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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편연재] 계류와 표류 제2회

  • 작성일 2014-03-15
  • 조회수 1,197

[중편 연재 소설]



계류와 표류(제2회)



안보윤



계류와 표류2


2


추접스런 늙은이. 동욱은 버스 정류장에 수레를 세우는 늙은 여자를 보며 중얼거렸다. 여자는 단순히 늙었다, 라는 것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을 만큼 흉측하고 비루했다. 동욱은 늙은 여자를 묘사할 더 혐오스런 단어가 떠오르지 않아 적잖이 낙담했다. 정수리에 얼기설기 쌓인 늙은 여자의 백발은 두피가 고스란히 내보일 만큼 숱이 적었다. 관자놀이부터 목 뒷덜미가 숫제 맨숭맨숭 붉기만 했다. 주름투성이 얼굴은 이마와 양 볼이 넓은 대신 눈 코 입 간격이 눈에 띄게 좁아 우스꽝스러울 정도였다.
늙은 여자는 가로수 밑에 놓인 쓰레기봉투에서 버려진 캔을 골라 수레에 싣는 중이었다. 캔을 밟아 찌그리는 모습이 구부정하고 어설펐다. 왜 노인네들은 주섬주섬 무언가를 뒤지고 느리게 움직이고 대추 썩은 냄새를 풍기며 끈질기게 돌아다닐까. 동욱은 이 자리에 앉아 버스정류장을 배회하는 늙은이들을 수도 없이 목격했다. 늙은 여자처럼 축축하게 젖은 파지나 빈 깡통을 줍는 노인도 있었고, 멍하니 버스를 기다리다 결국 어느 버스도 타지 않은 채 돌아서는 노인도 있었다. 그들은 대개 혼자였고 다듬어지지 않은 머리털을 번뇌처럼 이고 있었으며, 노랗게 변색된 눈 흰자위와 치아를 갖고 있었다.
입구가 벌어진 쓰레기봉투를 대충 여며 놓은 늙은 여자가 수레 손잡이를 잡았다. 수레는 늙은 여자와 세트처럼 낡아 있어, 깨진 보도블록 위를 잔기침하듯 덜컹대며 굴러갔다. 목장갑에 싸여 보이지 않았지만 수레를 미는 늙은 여자의 손은 시커멓게 때에 절어 있을 게 분명했다. 동욱은 손끝이 지저분한 사람이 싫었다. 손톱 아래 이물질이 끼어 있거나 깨진 손톱 사이로 고름이 돋아 있는 손이라면 더더욱 그랬다.
동욱은 늙은 여자의 등허리를 걷어찼을 때 뒤꿈치에 느껴지던 딱딱한 뼈를 떠올렸다. 와슥, 하고 삭은 나뭇가지 부러지는 소리가 났는데도 늙은 여자는 꿋꿋이 땅을 짚고 일어났더랬다. 두리번대는 희멀건 얼굴과 비대칭으로 기운 어깨가 그야말로 좀비 같았다. 아무것도 생산할 줄 모르는, 다른 생명체에 멋대로 기생하는 민폐덩어리들. 잉여의 시간을 보내는 주제에 절대 죽지 않으며, 심지어 무시무시한 속도로 증식하는 저 늙은이들이 좀비와 다를 게 대체 뭐란 말인가.
그날 늙은 여자의 수레에 실려 있던 것은 동생의 그림이었다. 천재적인 색감과 불안정하지만 매력적인 구도로 재구성된 죽음과 삶이라 평해지던, 정규 교육을 한 번도 받지 못했음에도 놀라운 재능을 보이는 강원도 산골소년의 그림이 상자째 수레에 실려 있었다. 늙은 여자는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전혀 모를 것이었다. 그 그림 때문에 무엇이 바뀌었는지, 누구의 인생이 어떤 식으로 뒤틀렸는지 전혀. 동욱은 다시금 떠오른 감촉과 불쾌감에 진저리를 치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주차장을 둘러볼 시간이었다.


주차장은 밝은 연두색 철제 펜스로 둘레가 막혀 있었다.
자동차 마흔세 대, 자전거 스무 대를 주차할 수 있는 소규모 유료주차장은 동욱의 임시 일터였다. 고모부가 운영하는 곳이라 별 부담 없이 일을 시작했으나 지금에 와서는 후회가 컸다. 하루 일곱 시간 근무가 지켜진 적은 한 번도 없었고―동욱의 고모부는 동욱에게 딱 삼십 분만 더 앉아 있어라, 해 놓고 문 닫는 시간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주말이면 지인의 결혼식이나 장례식을 핑계 삼아 나가버리는 바람에 동욱 혼자 주차장을 지키기 일쑤였다―제대로 휴가를 받은 일조차 없었다. 대학을 휴학한 뒤 일 년 동안 동욱이 한 일을 떠올려보면 주차장 안을 빙빙 돌거나 주차장을 청소하거나 주차장을 멍하니 바라보거나 하는 것들 외에 어떤 것도 없었다.
동욱은 정사각형 모양 주차장과, 그의 옆과 뒤를 빙 에워싸고 있는 빌딩들을 둘러보았다. 피부과와 치과, 어학원, 커피전문점, 설렁탕집, 편의점. 켜켜이 쌓인 이름들이 죄다 엇비슷했다. 동욱은 이것과 똑같은 빌딩과 간판들을 옆 블록에서, 또 옆 블록에서 보았다. 이상한 일이었으나 길을 오가는 사람들의 표정은 편안했다. 균일한 간격으로 쪼개진 길 위에서 수시로 방향을 잃는 건 동욱뿐이었다.
빌딩 그림자에 눌린 주차장은 너무 작고 납작해 언제 지워져도 이상할 것 같지 않았다. 주차장 바깥 면 한쪽은 육 차선 도로와 맞닿아 있었다. 버스정류장이 세워져 있어 그곳을 드나드는 다양한 노선의 버스들이 한눈에 보였다. 이마에 각각 매달고 있는 숫자만큼이나 길고 복잡한, 때로는 터무니없을 만큼 긴 노선을 지닌 버스들이었다.
열여섯 종에 달하는 간선버스와 지선버스의 노선을 동욱은 모조리 외우고 있었다.
넓고 한적한 도로를 달리다 소금이 하얗게 말라붙은 인천대교를 통과해 공항으로 가는 좌석버스 노선을 동욱은 알았다. 서울역, 안양역, 강남역으로 가는 광역버스들이 어느 고속도로를 타고 어떤 톨게이트를 통과해 고무 탄 내를 풍기며 종점에 들어서는지도 알았다. 부득이한 사정으로 인천에 정착하던 해에 동욱은 여길 통과하는 모든 노선의 버스를 타보았다. 정류장과 창밖으로 지나치는 풍광을 전부 외울 수 있을 때까지 반복해 탄 버스도 있었다. 버스들은 대개 중심지를 향해 뻗어 있었다. 붙여넣기를 한 것처럼 비슷한 행색과 표정을 한 사람들이 쏟아져 나오는 빌딩숲, 매달리거나 붙박인 간판이 수천 개는 될 법한 거리, 세계의 크고 작은, 유명하지만 빈한막심한 도시들의 변두리 활주로와 연결되어 있을 공항. 동욱은 가쁘게 노선을 갈아타며 이곳에서 무얼 할 것인가 생각했다. 모든 길이 연결되어 있고, 모든 곳이 동욱에게 열려 있었으나 답은 쉽게 나오지 않았다. 이후 깨닫게 될 이곳의 특징들, 말하자면 능숙한 배척과 교묘하게 도열된 무질서 같은 것들이 고향에서 동욱이 배워온 무엇과도 닮은 점이 없는 까닭이었다.
원래 동욱은 강원도 오리 농장에서 태어나 자랐다.
마을을 연결하는 것은 세발수레가 간신히 긁어놓은 외길로, 그 끝에 다다랐을 때 마주치는 것들은 늘 단순명료했다. 오리 축사, 마을회관, 저수지, 그리고 학교. 동욱이 아홉 살 되던 해에 비로소 시내까지 한 번에 나갈 수 있는 길이 뚫렸는데, 너비가 늘어났을 뿐 그걸 타고 갈 수 있는 곳 역시 빤했다. 중앙시장과 바투 붙어 있는 도민회관, 도축장, 직업전문학교. 동욱은 그 중 어떤 것에도 관심이 없었다.
동욱의 부모는 순박하고 근근한 사람들로 선대가 하던 오리 농장을 어떤 종류의 의문도 없이 내려 받아 운영하고 있었다. 아기 때부터 오리 축사를 드나들며 사료 푸는 삽으로 키를 쟀다니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동욱 역시 중학교에 다닐 즈음부터 파각을 시작한 오리들을 육추실에 옮겨 넣는 일을 예사로 해냈다. 동욱이 대팻밥과 왕겨를 깔아둔 육추실 열선을 데우느라 바쁘게 움직이는 동안 동욱의 동생은 알을 깨느라 지쳐 널브러진 새끼 오리들을 홀린 듯 들여다보곤 했다. 볼품없이 젖은 털 뭉치를 휴지로 문질러주다 꾸지람을 듣는 일도 잦았다. 동욱이 꾸지람을 들은 유일한 기억은 한겨울에 부화기 습도 조절 구멍을 잘못 막는 바람에 오리알 300개 중 14수만 부화에 성공했을 때가 유일했다. 그를 제외하면 동욱은, 농장에서 가장 어리되 가장 영민한 일꾼이었다.
고교를 졸업한 동욱은 학교 대신 농장으로 출석했다. 부모는 아직 젊었고 동욱이 할 수 있는 일은 한정돼 있었으나 동욱은 자신이 농장에서 그들의 부모처럼 늙어갈 것임을 의심치 않았다. 수레를 잡아 미는 손가락 마디가 하루가 다르게 단단해졌다. 동욱은 대칭으로 벌어져 꼼꼼히 근육이 붙은 등에 사십 킬로그램짜리 청미 포대를 세 개씩 지고 다녔다. 그런 동욱과 달리 동욱의 동생은 잘못 부화한 새끼 오리마냥 몸집이 작았다. 기다란 목을 간들대며 하는 일이라곤 농장 앞 언덕으로 난 외길을 넘어 중학교에 다니는 것이 유일했다.
때로 동욱은 새끼 오리용으로 혼합해둔 쌀겨와 청미, 미강을 한 줌씩 오래 쥐고 돌아다니곤 했다. 언제고 동생에게 한 줌 두 줌 먹이고 나면 속이 풀릴 것 같았다. 동욱이 돌본 새끼 오리들은 활발하고 씩씩했다. 동욱의 동생은 그의 집에서 가장 약하고 쓸모없는, 가장 위태로운 무엇이었다.
동욱의 부모는 가슴팍이 얇고 숨이 밭은 동욱의 동생을 되는 대로 놓아길렀다. 병치레나 안 하면 다행이라던 가족들의 걱정과 달리 동욱의 동생은 더디지만 끈질기게 자라났다. 집에서 한 시간 거리에 위치한 도민회관 미술 특강에 꼬박꼬박 참석해왔다는 사실을 가족들이 알게 된 건 한참 뒤였다.
그곳의 누군가가 동생의 그림에 호들갑을 떨지만 않았다면, 동생의 그림이 도 대회에 입상해 전국 대회까지 실려 가지 않았다면, 신문에 섣부른 기사가 실리지 않았다면, 방송에 출연한 뒤 몇몇 예술고등학교에서 또다시 호들갑을 떨며 동생을 데려가려 하지 않았다면, 동생의 그림이 터무니없이 비싼 값에 팔리지만 않았다면, 그랬다면 과연 어땠을까.
동욱은 의미 없는 가정과 질문을 곱씹으며 그들의 바뀐 인생에 대해 생각했다. 솎아낼 수 있는 기억은 많지 않았으나 동욱은, 지금 이 곳에서 가장 약하고 쓸모없는, 가장 위태로운 무엇이 최소한 동생이 아니란 것쯤은 알았다.
동욱 형제의 거취가 인천으로 정해진 건 고모부 때문이었다. 유료주차장 운영에 빌라 임대업을 해 형편이 넉넉했던 고모부가 동욱의 부모에게 먼저 전화를 걸어왔다. 자신이 살고 있는 빌라 옆집을 형제에게 내주고 끼니때마다 식사를 챙겨준 사람도, 예고 진학 서류를 모두 구비해준 사람도 고모부였다.
애초에 동욱은 오리 농장을 떠날 마음이 없었다. 동생의 짐을 대신 싸주면서도 발이 자란 탓에 새로 사야 할 고무장화나 눈이 내리기 전 보강해야 할 축사 지붕에 대해 생각했다. 이삿날이 가까워오자 동욱의 부모는 눈에 띄게 마루며 문간을 서성이기 시작했다. 잠을 자다 새벽에 깨면 두런거리는 부모의 말소리가 발밑에 한 치는 쌓여 있었다. 이윽고 동욱을 불러다 앉힌 그의 부모는, 또 다른 피부처럼 동욱의 손을 단단히 감싸고 있는 목장갑부터 벗겨냈다. 자신의 맨손을 그토록 유심히 들여다본 것은 그날이 처음이었다. 동욱은 빳빳하게 일어난 손거스러미와 누렇게 들뜬 손톱을, 그 끝에 엉겨 있는 검은 때를 보았다. 그것은 물에 비친 얼굴처럼 익숙하면서도 속이 울렁거릴 만큼 낯선 광경이었다.
동욱의 것과 찍어낸 것처럼 똑같은, 그러나 더 낡고 메마른 손 한 쌍이 동욱의 손을 움켜쥐었다.
우리가 촌동네 오리쟁이라 아는 건 없지만 테레비에서 보고 들은 건 있다. 요즘은 길바닥에서 쓰레기를 치울래도 대학 졸업장이 필요하다. 지난번 조류독감 때 우리 농장이 어땠나. 방역을 암만 하더라도 오 년에 한 번씩은 오리 자루가 몇 천 개씩 구덩이에 파묻힐 거다. 철새가 똥 싸지르고, 황사바람 불고, 주둥이 꽉꽉 조인 축사에서 오리 기르는 한 그건 끝이 없다. 그럼 농장 망하면 넌 뭘 하나. 우린 늙었으니 이제 됐다. 좁은 동네도 상관없고 농장 망해도 관계없다. 하지만 젊은 너는 세상으로 나가야 된다. 오리똥 치우는 일이야 아무나 할 수 있으니 넌 네 길을 가라. 이건 다 너를 위한 거다.
지저분하게 얽힌 네 개의 손을 동욱은 보고 또 보았다. 그 위를 덮듯이, 더 두껍고 더 지저분한 손이 다가왔다. 오리 잡내로 끈끈한 손 뭉치를 보며 동욱은 대꾸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세발수레를 빼앗기고 짐까지 꾸려진 마당에 고개를 끄덕이는 것 외엔 달리 할 대답도 없었다. 방에 막 들어선 동욱의 동생이 뜻도 모르면서 손을 내밀었다. 왼손 엄지와 검지에 얼룩덜룩 붙은 물감이 전부인 말간 손이, 말랑말랑한 손끝이 검은 덩어리 위에 얹혔다.


주차장으로 들어오는 차는 드물었다.
주변 대형 빌딩들은 제각각 지하 육 층까지 파내려간 주차장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유료주차장을 찾는 사람은 부자연스러운 각도로 깎인 지하 출입구와 빠듯한 주차 공간에 지레 겁을 먹은 여성 운전자가 대부분이었다. 빌딩 일 층에 위치한 은행이나 상점에 일을 보러 온 사람이 서둘러 들어왔다 나가기도 했다. 주차장의 주요 수입은 바로 옆에 있는 설렁탕집을 비롯해 몇몇 식당들과 맺은 장기 계약에서 나왔다.
동욱은 비좁은 관리실에서 나와 주차장 안을 천천히 돌았다. 버려진 담배꽁초는 없는지, 혹시 세워둔 차 옆구리에 이제 막 생겨난 것이 분명한 스크래치나 우그러짐은 없는지, 바닥이 유독 파인 곳이나 경계석이 깨진 곳은 없는지 살펴야 했다. 주차된 차의 그림자 길이나 위치가 조금씩 변화했을 뿐 대부분의 풍경은 한 시간 전과 열 시간 전, 사흘 전과 똑같았다.
주차장을 둘러싸고 있는 밝은 연두색 철제 펜스는 바라진 곳 없이 말끔했다. 실제 선 긋기 이상의 역할로는 역부족인 물건이었으나 그만으로도 충분한지 이를 넘는 사람은 없었다. 빈약한 선에 가로막힌 것은 자동차뿐이 아니어서, 동욱은 종종 주차장을 돌다 구석에 쭈그려 앉곤 했다. 펜스 아래쪽에 달라붙어 있던 검은 덩어리 세 개를 발견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덩어리는 개나 고양이의 배변 같기도 했고 곤충 번데기 같기도 했다. 무엇이라 해도 반질반질한 표면과 원뿔처럼 뾰족이 올라온 끝부분이 수상쩍었다. 동욱은 펜스를 발끝으로 퉁퉁 찼다. 떨어지기는커녕 오히려 진액 같은 것이 덩어리 아래쪽에서 스멀스멀 흘러나와 고였다. 동욱은 세게, 더 세게, 있는 힘껏 펜스를 걷어찼다. 펜스가 뒤로 넘어갈 것처럼 흔들린 다음에야 덩어리 하나가 떨어졌다. 그것은 의외로 딱딱한 소리를 내며 주차장 반대편 도로로 굴러갔다. 숨을 고르던 동욱이 다시금 발끝을 세우던 찰나였다. 자동차 클랙슨 소리가 좁은 사각형 안을 매섭게 휘돌았다. 돌아보니 중형차 한 대가 주차장 출구 차단기 앞에 서 있었다. 창밖으로 내민 손이 노란색 주차증과 천 원짜리 몇 장을 신경질적으로 흔들어댔다.
주차장에서 일한 지 일 년이 넘었음에도 동욱은 아직 자신을 향해 불쑥불쑥 내밀어지는 손이 거북했다. 말갛고 가느다란 것이든 마디가 우둘투둘하고 살갗이 거친 것이든 마찬가지였다. 직선으로 뻗어 나오는 손은 하나같이 무례하고 공격적이었다. 손이 운전석에서 튀어나올 때마다 동욱은 저도 모르게 몸을 뒤로 물리곤 했다. 주차증을 받아든 동욱이 관리실로 들어갔다. 운전자가 내민 돈은 주차 요금보다 천 원이 모자랐다.
천 원 까.
동욱 또래임이 분명한 운전자가 추임새를 넣듯 말끝마다 클랙슨을 울려댔다.
너 이 새끼, 바빠 뒈지겠는데 내가 여기서 십 분이나 기다렸어, 내 십 분은 니 십 분하고 레벨이 틀려, 새꺄, 천 원 까고 빨랑 이거나 열어.
십 분이나 자리 안 비웠는데요. 저 쪽에 잠깐 갔다 온 거예요.
그래, 정신 빠진 새꺄, 너 거기서 창살 존나게 차고 있더라, 그런다고 시급이 오르냐 차단기가 열리냐, 비생산적인 새끼, 니네 사장한테 꼰지르기 전에 문 열어.
계속되는 클랙슨 소리에 버스정류장에 서 있던 사람들이 힐금대기 시작했다. 관리실과 마주한 위치에 있는 편의점 주인이 가게 밖으로 나왔다. 미간을 찌푸리고 손을 휘휘 내젓는 모습에 성가신 기색이 역력했다. 넌 어린 애가 왜 그렇게 유도리가 없냐. 고모부와 함께 질책하던 목소리가 도로와 시간을 뛰어넘어 귀에 꽂혔다. 동욱은 차단기를 열었다.
두 개의 덩어리는 아까보다 더 길고 축축해진 모습으로 펜스에 붙어 있었다. 동욱은 다시 바닥에 주저앉아 꿈질거리는 덩어리들을 구경했다. 유독 긴 더듬이와 짧은 꼬리. 이렇게 크고 검은 건 흔치않으니 누군가 호기심에 키우다 내다버린 달팽이인 게 분명했다. 동욱은 아까 굴려 보낸 덩어리를 찾아 주위를 살폈다. 도로 복판에 납작하게 으깨진 검은 껍질이 보였다. 그 사이로 흘러나온 말간 몸체가 햇빛에 반짝반짝 녹아내리고 있었다.





《글틴 웹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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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10-01
K-할머니의 이름은

[리뷰 - 청소년소설] 기존 〈글틴스페셜〉이 9월호부터 〈Part.g〉로 변경되었습니다. 〈Part.g〉는 청소년 대상의 성장소설은 물론 창작희곡과 그래픽노블까지 다양한 영역의 '작품'과 '리뷰'를 게재할 예정입니다. K-할머니의 이름은 유은실, 『순례 주택』(비룡소, 2021) 김젬마 불편한 것들에 대하여 동화나 청소년소설에서 노년 여성 캐릭터는 대개 죽음이라는 소재와 연관되거나 주인공에게 정서적인 위안을 주고 성장을 돕는 존재로 그려진다. 그들은 주로 돌봄 노동과 모성의 주체로 호명되다 보니 자신의 이름보다 누군가의 어머니 혹은 할머니로 불려 온 것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자신을 이런 방식으로 규정하는 호칭들에 매우 민감한 이가 있으니, 바로 『순례 주택』의 건물주 순례 씨다. 75세인 순례 씨는 어머니, 할머니, 사부인, 동거녀 등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타인과 가족 단위로 엮이는 호칭들을 불편해한다. 이러한 호칭들은 순례 씨의 다채로운 삶과 이력들을 괄호 칠 뿐 아니라 순례 씨의 바운더리를 침범하는 무례함을 담고 있다. 순례 씨는 사별한 남자친구의 손녀인 수림을 손녀가 아닌 최측근으로 호칭 정리하며 할머니와 손녀라는 전형적인 관계 방식에서 벗어난다. 그는 ‘순하고 예의바르다’의 순례(順禮)에서 남은 인생을 지구별을 여행하는 순례자의 마음으로 살기 위해 순례(巡禮)로 개명할 만큼 자신의 이름에 대한 애착과 소명을 가지고 있다. 누군가의 가족으로 소환될 뿐 정작 자신의 이름으로 불린 경험이 없는 ‘K-할머니’의 이름은 자신을 옭아매는 규범적인 호칭들을 하나씩 덜어내며 재정의 된다. 순례 씨는 호칭뿐만 아니라 물질과 돈을 필요 이상으로 소유하는 것에 대한 불편함 때문에 필요 이상의 것들을 덜어내는 미니멀 라이프를 지향한다. 이산화탄소를 마구 배출하는 인간들과 쓰고 남는 돈, 썩지 않는 쓰레기가 인생 최대의 고민인 그는 푸짐하고 손 큰 할머니의 밥상이 아닌 노동력을 최소한으로 하는 간단하고 소박한 밥상을 차린다. 순례 씨는 정직하게 땀 흘려서 노동하는 삶을 추구하며 세상과 물질에 욕심 없는 다소 초월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하지만, 사실 그 누구보다 자기만의 경계가 매우 뚜렷한 인물이다. “월세 밀리는 건 참아도, 분리배출 제대로 안 하는 건 못 참”(80쪽)을 만큼 그는 순례 주택의 생활 수칙에 있어서만큼은 엄격하고 단호하다. 이렇게 순례 주택 입주민들은 공용 생활 수칙과 자신의 바운더리를 지키며 사는 것을 중요시하고, 무엇보다 이들은 “자기 힘으로 살아 보려고 애쓰는 사람들”(53쪽)이라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다. 유은실의 『순례 주택』은 고정된 공간과 다양한 인물들의 대화를 중심으로 서사가 진행되며 기본적으로 순례 주택이라는 공동체의 복작거리는 삶을 그린다. 이는 사건이 인물과 장소의 활용도가 높고 이를 중심으로 사건이 전개되는 시트콤의 형식과 비슷하다. 『순례 주택』은 등장인물의 이름, 나이, 직업, 특징 등을 세세하게 묘사하며 이

  • 관리자
  • 2022-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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