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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편연재] 계류와 표류 제3회

  • 작성일 2014-04-01
  • 조회수 716

[중편 연재 소설]



계류와 표류(제3회)



안보윤



계류와 표류3


3


우리 형은 저 주차장에서 일해요.
시골에서 올라와 힘들게 살고 있다는……
그건 거짓말이라니까요.
그래, 그랬지.
주차장 사장이 우리 고모부예요. 되게 옛날에 사둔 땅인데 신도시 개발로 아파트 단지랑 상가가 들어서면서 값이 엄청 올랐다고 좋아하던데요.
여긴 간척지니까 옛날엔 기껏해야 갯벌이거나 모래밭이었겠구나.
논이었대요.
그래, 그래.
갯벌이든 논이든 아무튼 그런 곳에 삼십육 층짜리 아파트를 지어도 괜찮은 건가요? 이백 개는 될 거 같은데. 여기 건물들은 편백나무처럼 삐죽 길기만 해요. 내가 살던 곳엔 진짜 편백나무 숲이 있었어요.
장관이었겠구나.
멋지죠. 나무가 얼마나 두꺼운지 한여름에도 햇빛이 안 들어왔어요. 진짜 시원하고 좋았는데. 그 나무들은 아무리 길어도 멋있기만 했거든요, 하나도 안 불안하고. 근데 여기 건물들은 되게 답답하고 불안해요. 저렇게 높아도 괜찮아요? 땅이 가라앉으면 어떡해요.
괜찮으니 지었겠지.
여긴 걸을 때마다 발밑이 푹푹 꺼지는 느낌이에요. 자꾸만 출렁거리고, 흔들려요.
그럴 리가 있니. 확실히 땅이 된 다음에 아스팔트를 몇 미터는 깔았을 텐데. 바닷가라고 생각하니까 괜히 그런 느낌이 드는 걸 거다.
난 원래 살던 곳이 좋아요. 거긴 모든 게 단단하고 옹골차서 하고 싶은 대로 맘껏 내달려도 괜찮았어요. 눈이 쌓이면 거기 찍힌 발자국까지 단단했다고요. 오리 농장 주변에는 낮은 언덕 말고 시야를 가리는 게 아무것도 없어서, 하우스에 씌울 비닐이 실린 트럭이랑 수레를 끌고 가는 형 뒷모습도 다 보였어요. 그런데 여긴, 이 빌딩 바로 뒤에 뭐가 있는지조차 알 수 없어요. 왜 이렇게 빼곡한 건지 모르겠어요.
인구가 많으니까.
똑같은 사람들이 백 명이나 되는 건 무서워요.
무슨 소리니?
클론, 복제인간 같은 거요. 버스를 타고 가다보면 아까 탄 아저씨가 또 타고 또 타고 또 타요. 아까 내린 아줌마가 또 내리고 또 내리고 또 내리죠. 특히 누나들은, 이마랑 눈썹까지 똑같아서 진짜 무서워요. 오리도 아닌데, 부화기로 한 번에 깨운 오리도 아닌데 어떻게 그럴 수 있죠? 난 그런 건 그리고 싶지 않아요.
싫다면 그리지 않으면 되겠지. 네가 그리고 싶은 걸 그리렴.
그럼 안 된대요.
안 되는 건 세상에 없다, 너 같은 어린애에게는 더더욱. 이것 좀 도와줄래? 어째 상자가 빠지질 않는구나.
……밑에 못이 박혀 있어요. 여기에 매달아놓고 쓰는 모양이에요. 이거 말고 저쪽에 있는 걸 실어요, 저 라면박스요.
그건 안 돼.
또 왜요? 버려진 상자잖아요.
버려진 게 상자뿐이 아니라 그렇단다. 그 안을 봐, 고양이가 들어 있지. 누가 데려가진 못하고 그냥 밥만 주는 모양이더라. 절름발이에 털이 좀 벗겨지긴 했는데 얼굴은 귀엽단다.
저런 얼굴을 귀엽다고 하는 사람은 할머니밖에 없을걸요.
나라도 있으니 다행이구나. 이왕이면 데려가 키우면 좋겠지만.
그럴 필요 없어요. 저건 금방 죽을 거예요.
네 예언은 그런 것뿐이니? 불행해지거나 죽게 되는 거.
예언이 아니라 사실이에요. 저 고양이 눈 밑이 올리브색으로 변했잖아요. 저런 색은 딱 두 번밖에 안 나와요, 막 태어났을 때랑 병들었을 때.
됐다. 너랑 얘기하다보면 어째 마음이 답답해지는구나. 그만 학교에 가는 건 어떠니? 이렇게 며칠씩 쫓아다닌다고 네 시간이 쓸모 있어지는 건 아니잖니.
학교에 가도 쓸모없는 건 마찬가지예요.
시간이?
나랑 내 그림이요.
네 그림은 비싸다면서.
비싸다고 좋은 그림은 아니래요. 내 그림은 무지한 언론이 부풀려 놓은 뻥튀기라고 하던데요. 할머니 공갈빵이라고 알아요? 얼굴만큼 둥그렇고 큰 빵인데 속이 텅 비어 있어요. 내 그림이 그거래요, 포장만 번지르르하게 된 뻥카드. 귀 얇은 사람들의 변덕은 소변기 하나가 백만 달러에 팔리던 순간부터 입증된 거래요.
뒤샹 작품이 그 가격에 팔린 건 변덕 때문은 아니라고 보는데 말이다.
학교에 가봐야 소용없어요. 나는 대학도 못 간다는데요, 뭐.
누가?
학교 선생님이요. 내가 그리고 싶은 대로 그리면 좋은 대학에 갈 수 없대요. 반 애들도 선배들도 모두 그랬어요. 나처럼 기본도 모르는 애가 대회에 나가봐야 웃음거리만 될 뿐이라고. 전국 대회에서 상을 못 타면 특별 전형에 지원할 수 없어요. 난 공부를 못하니까 그런 게 아니면 진학이 불가능해요. 쓸모없는 건 내 시간이나 그림이 아니라 내 존재 자체예요.
그건……
……
……
할머닌 오리가 어떻게 태어나는지 알아요?
글쎄다. 병아리라면 본 적 있는 것 같기도 한데.
아마 똑같을걸요. 난 오리가 태어나는 걸 수십 번도 더 봤어요. 처음에 오리알은 그냥 뿌옇고 단단해요. 돌멩이처럼 가슬가슬해서 뺨에 문지르면 기분 좋은데, 형은 내가 만진 알은 곪아서 안 된다고 빼버리곤 했어요. 부화기에 넣어 놓으면 알이 푸르스름하게 투명해지기 시작해요. 손전등을 비춰보면 새까만 콩알 같은 게 보이는데, 그게 새끼 오리 심장이랑 눈이에요. 그땐 알이요, 꼭 젤리처럼 말랑말랑해 보여요. 문을 열면 안 되니까 만져본 적은 없지만 꼭 그런 느낌이에요. 새끼 오리가 태어나는 건 푸른색이 짙어지다가 다시 껍질이 딱딱해지는 순간이에요. 그래야 부리로 알을 깰 수 있으니까요. 오리가 되지 못한 알들은, 검게 변해요. 침울하고 아주 무거워 보이는 색이에요. 가끔 알을 깨다 지쳐 죽는 오리도 있는데, 형은 그런 알을 귀신같이 찾아내 껍질을 까주곤 했어요.
그래, 그래.
갓 태어난 새끼 오리들은 죽은 것처럼 보여요. 비리고 축축한데다 아주 가끔만 움직이거든요. 눈 근처랑 목, 가슴 같은 데가 온통 올리브색이에요. 발가락과 날개가 형편없이 구겨져서 죽었나, 하고 귀를 갖다 대면 툭툭 부러지는 소릴 내며 심장이 뛰고 있어요. 내가 보아온 탄생의 순간은 모두 그렇게 괴기스럽고 차가웠어요. 학교에 입학하고 나서 오리를 그렸더니 모두 나를 혼냈어요. 내가 그린 건 탄생이 아니래요. 탄생의 순간은 뜨겁고 정열적이며 희망찬 붉은색이라고 선생님이 그랬어요. 내가 쓴 색들은 죽음의 색이고, 내가 그린 오리들은 전부 시체래요. 색에 대한 이해와 지식이 없다면 나는 세상 누구에게도 메시지를 전달할 수 없을 거라고도 했어요.
무얼 하든 공부는 필요하지. 색에 대해 공부하는 건 네 미래를 위해서도 꼭 필요한 일일 거야. 너도 모르는 부분을 배우려고 학교에 다니는 거잖니.
나는 그냥 그림 그리는 게 좋았을 뿐이에요. 내가 본 걸 마음대로 그릴 수 있다면 그걸로 좋았어요. 그런데 선생님은 캔버스를 전부 계산하고 재단해야 된대요. 학교에선 배운 대로, 알려준 방식대로 그려야 한다, 그래야 대회에 나가서 상을 타오지, 수상 경력이 많아야 좋은 대학에 원서를 넣을 수 있어, 그렇게 요란법석을 떨며 입학시켰는데 네가 좋은 대학에 못 들어가면 우리 학교 명예가 뭐가 되겠니, 변명은 그만하고 시키는 대로 좀 그려라, 그림에 대해 쥐뿔도 모르는 게 왜 이렇게 고집이 세니, 방송에서 띄워주니까 니가 진짜 뭐라도 된 것 같아? 이런 그림은 대회에서 큰 상을 탈 수 없다고 몇 번 말했니. 선생님은 늘 똑같이 말했어요. 난 좋은 대학도, 좋은 그림도 어떤 건지 모르겠는데 선생님과 반 애들은 척척 대답해요. 그런 건 이상하다고 했더니 모두들, 이상한 건 나래요. 내가 세상물정 모르는 촌놈이라 그러는 거래요. 난 학교가 싫어요. 그런 곳엔 가고 싶지 않아요.
넌 학교를 얼마나 다녔지? 한 달? 두 달?
여름방학 때까지니까, 다섯 달쯤 돼요.
그래, 퍽이나 오래 다녔구나. 난 그림은 잘 모르지만 대부분의 과목들처럼, 가장 기본이 되는 것들을 배우고 난 뒤 그걸 응용하는 방법을 배워나갈 거라고 생각한다. 숫자의 정의를 알아야 인수분해와 미적분을 할 수 있는 것처럼 그림에도 기초적으로 필요한 지식과 기술들이 있겠지. 내가 듣기에 네 말은 투정으로밖에 들리지 않는구나.
난 그냥 그림을……
그래, 그림. 그림을 그리고 싶다면서 그림을 공부하는 건 왜 싫다는 거니?
학교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내 그림을 싫어했어요. 왜 이것밖에 못 그리냐고, 더 대단한 걸 그려보라고 윽박지르는 게 다였죠. 내가 그리는 것마다 모두 틀렸다고 말하면서 대체 뭘 그리라는 걸까요. 나는 내가 천재라고 말한 적 없어요. 자기들이 멋대로 이름 붙여 놓고 이제 와서 날더러 어쩌라는 거예요.
그래서 도망쳤니?
모두 날 싫어했다고요. 그림도 그릴 수 없었어요.
도망친 게 맞구나. 강요가 싫었다면 다른 방법이 얼마든지 있었을 거다. 반을 바꾸든 전학을 가든 뭐라도 할 수 있었겠지. 넌 그런 최소한의 노력도 하지 않은 채 도망만 친 거야. 열등감은 당연한 거라면서?
……
널 비난하는 게 아니야, 안타까운 맘이 들어서 그런다. 어린애의 성급함을 잡아주는 건 어른들의 몫인데 네겐 아직 그런 기회가 없었던 모양이구나. 네가 학교에 가지 않는 걸 어른들도 알고 계시니?
고모부는 알 거예요. 학교에서 몇 번이나 전화가 왔으니까요.
널 혼내시지 않던?
아뇨.
그건 좀 이상하구나. 네 형도 알고 있니?
형은, 모를 거예요. 맨날 주차장에만 있으니까. 내가 집에 있든 없든 형은 신경 쓰지 않아요. 형은 아무것도 보지 않고, 아무 일도 하지 않아요.
아까는 네 형이 주차장에서 일한다고 하지 않았니.
그런 걸 일한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어요. 형은 그냥 거기, 유령처럼 앉아 있을 뿐이에요. 그게 다예요.
너희가 불쌍한 애들이라고 했던 이유를 알겠다.
우린 가난하지 않아요.
너희가 가여운 건 가난해서가 아니야. 의논할 사람이 없어서다. 너희에게 제대로 충고해줄 사람이 없어 불행한 거야.
형은…… 형은 고모부에게 많은 걸 의논했어요.
너도 고모부와 얘길 해보는 게 어떻겠니. 나보다는 분명 도움이 될 거야.
도움이 될까요? 고모부가, 욕심으로 가득 찬 나쁜 사람이라고 해도요?
넌 네 고모부가 싫으니?
싫지도 좋지도 않아요. 어쨌거나 형이랑 내가 이곳에 왔을 때 많은 걸 돌봐줬으니까요. 내 그림이 계속 없어지는 건 아무래도 고모부 짓 같지만 그것도 괜찮아요. 그런데 고모부가 좋은 사람이냐고 물으면, 존경할 만한 사람이냐고 물으면 그건 아닌 것 같아요.
어떤 점에서?
복권.
복권?
그런 게 있어요. 고모부는 분명 불행해질 거예요. 그 불행을 형이나 나한테 떠넘기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아무래도 늦은 것 같아서 무서워요.
또 못된 말을 하는구나.
……형은 고모부에게 많은 걸 의논했어요. 우리 부모님은 너무 멀리 살고 계신데다, 자신들이 오리 치는 일 외엔 아무것도 모른다고 생각했으니까요. 작년 여름인가, 형이 대학에 들어가고 처음 맞는 방학이었어요. 형은 학교 동기들이 다들 휴학을 한다며 고모부에게 상의했어요. 군대를 갈까요, 토익학원에 다닐까요. 다른 애들은 학원도 다니고 자격증도 따고 어학연수도 가고 봉사활동도 가고 인턴 시험도 보던데, 저는 뭘 할까요.
고모부는 뭐라고 하셨니?
주차장에서 일하라고 했어요.
왜?
거기서 일하며 앞으로 뭘 할지 천천히 생각해보라고요. 난 그 말 안 믿어요. 생각은 다른 데서도 얼마든지 할 수 있어요. 군대에서도 학원에서도 회사에서도요. 고모부는 그냥 형을 거기 앉혀 놓고 싶었던 거예요. 그래야 자기가 맘 편히 복권방에 다닐 테니까요.
복권방이라……
형은 늘 저기 앉아 멍하니 졸거나 휴대폰을 만져요. 일 년 전, 한 달 전과 일주일 전의 모습이 똑같죠. 다음 달에도, 재수 없으면 내년에도 형은 저 자리에 앉아 있을지 몰라요.
그게 꼭 네 고모부 탓만은 아니잖니. 형이 그만두고 나오면 될 일이야.
형은, 저기 멈춰 있어요. 그런데 자기가 멈춰 있는 줄도 몰라요. 가고 싶은 곳이 없으니 멈춘 줄도 모르는 거예요.
형한테 직접 얘기해보지 그러니.
물어본 적이 있어요. 형이 하고 싶은 일은 뭐냐고, 뭐가 되고 싶냐고요.
뭐라고 하던?
아무것도 하기 싫대요. 그런 말이 어딨어요?
……
……형은 어째서 아무것도 아끼지 않는 걸까요. 나는 매일 매일이 초조해요. 그림을 그리고 있을 때도, 그리지 않을 때도 마찬가지예요. 나는 그림을 좋아하고, 잘 그리고 싶기 때문에 버려지거나 부정당하면 괴로워요. 그림이 비싼 값에 팔리고 유명해지는 걸 원하는 건 아니지만 쓰레기가 되길 원하는 것도 아녜요. 괴롭긴 하지만 나는, 그림을 그리는 나 자신과 내 손, 물감을 긁는 순간과 부러진 연필까지 모두 소중해요. 그런데 형은 어째서 그런 게 없다는 걸까요. 아무것도 없이, 의욕도 바람도 꿈도 없이 살아가는 게 어떻게 가능해요?
형이 달리 생각하는 게 있을 수도 있잖니.
할머니가 한 번 가서 봐요, 우리 형이 얼마나 멍청한 얼굴로 앉아 있는지. 오리 농장에서의 형은 저렇지 않았어요. 엄청 똑똑하고 부지런해서 사람들이 다 감탄할 정도였다고요. 이곳에서의 형은 옆구리가 뚫린 쌀 포대 같아요. 구멍으로 줄줄 새어나가는 게 할머니가 말한 것처럼 형의 시간들이라면, 나는 그걸 어떻게 주워야 할지 모르겠어요.
내 생각에 너희는, 잘못 날아왔구나.

* 김성규 시집 <너는 잘못 날아왔다>에서 인용


……
……
사실…… 욕을 배워본 적이 있어요.
무슨 욕을?
엄청 복잡하고 살벌한 욕이요. 학교에 유명한 욕쟁이가 있었거든요. 보통은 나한테 하는 욕이었는데, 그래도 배웠어요. 음료수가 먹고 싶대서 콜라 하나 뽑아줬더니 받아 적으라고 하던데요. 모욕감 때문에 창자 같은 게 저절로 꼬일 것 같은 욕이었어요.
욕은 뭐 하러 배웠는데?
형한테 해주려고요.
……했니?
아뇨. 까먹는 바람에 못 했어요.
안됐구나.
뭘요. 천 원짜리 욕이 다 그렇죠 뭐.
혹시 기억나면 나한테도 알려주렴.
뭐하시게요?
꼴 보기 싫은 인간들한테 퍼부어주려고. 여사님 여사님, 하고 이죽거리는 얼굴들에 실컷 뱉어줘야겠다. 저기 편의점 장 씨 같은 사람들 말이다. 이대 나온 여사님, 저대 나온 사장님이랑 꽃놀이 한 번 가시죠, 그래놓고 저질스럽게 낄낄대지. 사람들은 말이다, 자기보다 처지가 나빠 보이는 사람이 눈앞에 있으면 한없이 꼴불견이 된단다.
할머니는 왜 아무것도 없어요?
응?
부모님은 우릴 여기로 보내면서 그랬어요. 좋은 고등학교에 다니면 좋은 대학교에 갈 수 있다고, 그럼 좋은 직장, 좋은 차, 좋은 여자가 당연하게 딸려온다고, 성공한 삶은 그런 거라고요. 중고 트럭을 몰고 오리 농장 흙길을 다니는 건 중학교나 겨우 졸업한 자신들이 할 일이라고 했어요. 그런데 할머니는 왜 아무것도 없어요? 이대는 좋은 학교잖아요.
그건 원숭이들의 논리야. 변명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하는 말이지. 내가 실패한 건 좋은 학교를 졸업하지 못해서야, 내가 가난한 건 좋은 부모, 좋은 아내를 만나지 못해서야. 자기가 부족하고 불성실한 것까지 남들이 쓸데없이 부지런해서라고 탓하는 나약한 사람들의 논리란다.
우리 부모님은 원숭이가 아니에요.
그래, 그래.
우리 부모님은 나약하지 않아요. 하우스 철근 세우는 것도 폭설에 주저앉은 지붕 내리는 것도 끄떡없는데요. 그리고 할머니보다 훨씬, 훨씬 부지런해요.
너희 부모님이 그렇다는 게 아니라…… 그래, 달리 얘기해보자. 사람들의 현재는 모두 선택에 의한 거란다. 내가 지금 살고 있는 모습은 내가 선택한 것들이 가져온 일종의 결과지. 성적표 같은 거지.
그게 뭐예요?
사람들은 수천만 가지 방식으로 살아. 운이 좋거나 나쁘거나 건강하거나 병들거나 하면서 말이야. 그것 외에는 모든 것이 선택에 의해 이루어진단다. 좋은 선택을 하거나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끔찍한 선택을 하거나 하면서. 괴롭힘을 견디지 못하고 학교에서 뛰쳐나온 건 네 선택이지. 후에 고등학교 졸업장도 없이 거리를 떠돌게 된다면 그건 네 선택의 결과니까 네가 감당해야 할 몫이란다. 너를 괴롭혀서 학교에서 쫓아낸 건 그 사람들의 선택이지. 거기에 따른 죄책감과 비난 역시 그 사람들이 감당할 몫이다.
형이 저러고 있는 것도 형 선택이란 말인가요? 형이 선택했으니 형이 감당해야 한다고요?
엄밀하게는 그렇지. 형에게 욕을 하거나 충고를 하는 건 너의 선택이고. 그걸 받아들이고 말고는 또 형이 선택해야 할 몫인 거야. 인생 마지막 칸에 도달할 때까지 온갖 소소한 선택들이 이런 식으로 결과에 영향을 끼친단다. 별다를 것 없어. 내가 한 선택들이 꾸준히 나를 다음 칸으로 인도하는 방식이지. 나를 비웃을 수 있는 사람은, 나를 비난할 수 있는 사람은 그 모든 걸 선택한 나뿐이야. 너와 네 형 역시 마찬가지다.
어려워요.
그래. 아직 네겐 어려울 거야. 사실은 모두에게 어렵지.
그러니까 할머니는, 파지 줍는 늙은이를 선택했다는 뜻이에요?
그 반대야. 내가 한 선택들의 결과가 파지 줍는 늙은이란 거지.
뭐가 됐든 결과는 똑같네요.





《글틴 웹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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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리자
  • 2022-10-01
너와 나의 알싸한 세계

너와 나의 알싸한 세계 백온유, 『페퍼민트』(창비, 2022) 김젬마 재난이 남긴 것들 백온유의 『페퍼민트』는 준비 없는 재난 앞에 닥친 기약 없는 기다림과 불투명해진 미래를 견디는 청소년들의 이야기를 그린다. 소설은 ‘프록시모 바이러스’ 후유증으로 식물인간이 된 엄마를 돌보는 ‘시안’과, 슈퍼 전파자라는 낙인으로 두려움과 불안함을 안고 사는 ‘해원’의 이야기가 교차된다. 전염병이 발생하기 전까지만 해도 시안과 해원은 가족처럼 가까운 사이였지만, 바이러스가 삶에 침투하자 이들의 평범한 일상과 관계에 균열이 생긴다. 식물인간이 된 엄마의 세계가 멈추고 자신의 미래까지 멈춰버린 시안은 돌봄 노동을 수행하느라 정작 자신의 세계여야 할 학교와는 단절된 삶을 살아간다. 그저 자신의 하루를 견디고 버티며 사는 것 외에는 그 어떤 희망이나 미래를 품을 수 없는 고단한 삶 속에 놓여 있는 시안의 일상은 위태롭고 무력할 뿐이다. 엄마가 깨어날 거라는 희망보다 엄마의 죽음을 기다리는 것에 익숙해진 것에 죄책감을 느끼고, 엄마를 누구보다 꼼꼼하고 세심하게 돌보지만 결국 모든 정성과 노력들이 물거품이 되는 순간들에 지쳐 있다. 한편 슈퍼 전파자라는 무차별 공격으로 인한 불안함에 시달린 나머지 자신의 이름을 ‘지원’으로 개명하고, 이사와 전학을 선택한 해원은 자신의 과거를 감추고 마치 바이러스가 자신의 삶에 없었던 것처럼 평범하게 살아간다. 가족만큼이나 끈끈했던 두 사람은 우연한 계기로 6년 만에 다시 만나게 되지만 이들의 공백은 쉽게 메워지지 않는다. 이 공백은 두 사람의 잃어버린 시간과 멀어진 마음의 거리만큼 복잡하고 난해한 감정들을 담고 있다. 그렇게 다시 만난 시안과 해원은 서로에게 불편함을 느낀다. 시안은 평범한 일상을 영위하는 해원을 보며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고 그동안 자신을 짓눌러 왔던 감정의 화살을 해원에게 돌린다. 해원은 유일하게 자신의 과거를 아는 시안의 등장이 당혹스럽기만 하고 지난 시간을 들추는 것 같아 불편하다. 희망 없는 현실을 견디고 있는 시안과 과거로부터 도망쳐 평범한 삶을 꿈꾸는 해원, 이 두 사람은 다시 연결될 수 있을까? 고여 있는 삶 재난을 준비할 시간도 없이 엄마와 이별을 한 시안은 식물을 돌보듯 엄마를 간병한다. 엄마의 존엄성을 지키는 것은 엄마가 썩지 않도록 기저귀를 자주 갈아 주는 것뿐이지만, 시안은 엄마의 미각을 깨우는 데 도움이 될까 싶어 엄마가 좋아하던 페퍼민트 차를 매일 우려 입에 적셔 준다. 시안은 매일 같이 차를 우리며 어린 시절을 회상할 뿐 아니라, 절망과 무력함으로 점철된 일상에 작은 희망을 품으며 나름의 의식을 행하고 있다. 엄마는 고여 있는 것 같다가도 우리 삶으로 자꾸 흘러넘친다. 우리는 이렇게 축축해지고 한번 젖으면 좀처럼 마르지 않는다. 우리는 햇볕과 바람을 제때 받지 못해서 냄새가 나고 곰팡이가 필 것이다. 우리는 썩을 것이다.(98쪽) 시안이 오랜 간병 경험으로 얻은 것은 자신을 바라보는 연민의 시

  • 관리자
  • 2022-10-01
K-할머니의 이름은

[리뷰 - 청소년소설] 기존 〈글틴스페셜〉이 9월호부터 〈Part.g〉로 변경되었습니다. 〈Part.g〉는 청소년 대상의 성장소설은 물론 창작희곡과 그래픽노블까지 다양한 영역의 '작품'과 '리뷰'를 게재할 예정입니다. K-할머니의 이름은 유은실, 『순례 주택』(비룡소, 2021) 김젬마 불편한 것들에 대하여 동화나 청소년소설에서 노년 여성 캐릭터는 대개 죽음이라는 소재와 연관되거나 주인공에게 정서적인 위안을 주고 성장을 돕는 존재로 그려진다. 그들은 주로 돌봄 노동과 모성의 주체로 호명되다 보니 자신의 이름보다 누군가의 어머니 혹은 할머니로 불려 온 것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자신을 이런 방식으로 규정하는 호칭들에 매우 민감한 이가 있으니, 바로 『순례 주택』의 건물주 순례 씨다. 75세인 순례 씨는 어머니, 할머니, 사부인, 동거녀 등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타인과 가족 단위로 엮이는 호칭들을 불편해한다. 이러한 호칭들은 순례 씨의 다채로운 삶과 이력들을 괄호 칠 뿐 아니라 순례 씨의 바운더리를 침범하는 무례함을 담고 있다. 순례 씨는 사별한 남자친구의 손녀인 수림을 손녀가 아닌 최측근으로 호칭 정리하며 할머니와 손녀라는 전형적인 관계 방식에서 벗어난다. 그는 ‘순하고 예의바르다’의 순례(順禮)에서 남은 인생을 지구별을 여행하는 순례자의 마음으로 살기 위해 순례(巡禮)로 개명할 만큼 자신의 이름에 대한 애착과 소명을 가지고 있다. 누군가의 가족으로 소환될 뿐 정작 자신의 이름으로 불린 경험이 없는 ‘K-할머니’의 이름은 자신을 옭아매는 규범적인 호칭들을 하나씩 덜어내며 재정의 된다. 순례 씨는 호칭뿐만 아니라 물질과 돈을 필요 이상으로 소유하는 것에 대한 불편함 때문에 필요 이상의 것들을 덜어내는 미니멀 라이프를 지향한다. 이산화탄소를 마구 배출하는 인간들과 쓰고 남는 돈, 썩지 않는 쓰레기가 인생 최대의 고민인 그는 푸짐하고 손 큰 할머니의 밥상이 아닌 노동력을 최소한으로 하는 간단하고 소박한 밥상을 차린다. 순례 씨는 정직하게 땀 흘려서 노동하는 삶을 추구하며 세상과 물질에 욕심 없는 다소 초월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하지만, 사실 그 누구보다 자기만의 경계가 매우 뚜렷한 인물이다. “월세 밀리는 건 참아도, 분리배출 제대로 안 하는 건 못 참”(80쪽)을 만큼 그는 순례 주택의 생활 수칙에 있어서만큼은 엄격하고 단호하다. 이렇게 순례 주택 입주민들은 공용 생활 수칙과 자신의 바운더리를 지키며 사는 것을 중요시하고, 무엇보다 이들은 “자기 힘으로 살아 보려고 애쓰는 사람들”(53쪽)이라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다. 유은실의 『순례 주택』은 고정된 공간과 다양한 인물들의 대화를 중심으로 서사가 진행되며 기본적으로 순례 주택이라는 공동체의 복작거리는 삶을 그린다. 이는 사건이 인물과 장소의 활용도가 높고 이를 중심으로 사건이 전개되는 시트콤의 형식과 비슷하다. 『순례 주택』은 등장인물의 이름, 나이, 직업, 특징 등을 세세하게 묘사하며 이

  • 관리자
  • 2022-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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