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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_단편소설_응] 고양이

  • 작성일 2015-05-26
  • 조회수 1,079


[5월_테마소설_응]



고양이



조희애



삽화-고양이


창녀 같은 년.
엄마의 손바닥이 날아와 내 뺨을 후려쳤다. 몸이 휘청하며 손에 들고 있던 돈 봉투가 떨어졌다. 월급은 역시 현금이라며 사장님이 빳빳한 지폐로 준비한 알바비가 봉투 밖으로 쏟아져 나왔다. 한 달 동안 주유소에서 틈틈이 일하며 번 돈이었다. 나는 돌아간 고개를 돌려 엄마를 쳐다봤다.
“어디서 눈을 부라려, 이 년이! 아르바이트 하지 말라고 분명히 경고했는데 결국 했다 이거지? 어디 그 돈으로 얼마나 할 수 있나 보자. 여보, 앞으로 얘한테 용돈 주지 마. 아무 것도 해주지 마. 알았어?”
엄마의 악다구니에 마당에 앉아 있던 아빠가 슬쩍 뒤를 돌아봤다. 순간 나는 아빠가 날 위해 어떤 액션을 취해주리라 기대했지만, 아빠의 눈빛은 늘 그렇듯 무기력했다.
떨어진 돈을 주워 방으로 들어왔다. 나를 향한 엄마의 경멸의 혼잣말이 문밖에서 계속되고 있었다. 화장대 거울 안에 볼이 벌겋게 부은 내가 서 있었다. 그 아래에는 쓰다 만 비비크림과 빨간색 틴트가 벌렁 누워있었다.


*


아...오늘은 진짜 야자하기 싫다아칵이이잉잇ㄱ!!.


중학교 때부터 친구였던 단체 대화창에 머리를 격렬하게 흔드는 사진 올라왔다. 그러자 다른 친구들도 한마디씩 거들며 순식간에 떠들썩해졌다. 나는 ‘ㅋㅋㅋㅋ그냥 째버렷!’이라고 쓰려다 지웠다. 의도와 다르게 친구들의 오해를 살 수도 있었다. 아니면 너는 실업계라 야자 안 해서 좋겠다, 부럽다 식의 얘기와 함께 공부에 대한 고민과 푸념이 줄줄이 이어지든가. 어느 쪽이든 불편하긴 마찬가지였다.
실업계에 다닌다고 하면 사람들은 소위 ‘꼴통’을 떠올리지만 그 정도로 공부를 못한 건 아니었다. 내가 실업계를 선택한 건 애니메이션을 하고 싶기 때문이었다. 애니메이션 고등학교에 지원했다 불합격한 나는 차선책으로 실업계 고교의 애니메이션과에 진학했다.
예상했던 대로 엄마의 반대는 극심했다. 가난하고 불량한 꼴통 집합소에 왜 가느냐고, 동네 사람들 보기 창피해서 어떡하느냐고 길길이 날뛰었다. 이미 벌어진 일을 어쩌겠느냐며 아빠가 나서서 진정시켰지만 그럴수록 엄마의 목청은 더 높아졌다.
“저 년이 일부러 저러는 거야. 나 죽으라고, 나 죽이려고!”
“무슨 말을 그렇게 해. 그만 좀 해.”
“뭘 그만해, 뭘! 쟤 좀 내 앞에서 안 보이게 해줘 제발. 꼴도 보기 싫다고!”
아빠가 날 쳐다봤다. 방에 들어가란 뜻이었다. 엄마는 독재자였고, 나는 이 집안의 죄인이었다.


헐! 대박. 박민영 임신했대.


박민영? 박민영이 누구더라. 주유소로 가는 버스 안에서 밀린 대화를 읽으며 그녀를 떠올리려 애썼다. 아, 그 친구! 아버지는 의사고 어머니는 첼리스트라던. 피아니스트를 꿈꾸며 각종 콩쿠르를 위해 연습에 매진하던. 수수한 얼굴에 교정기 끼고, 머리가 길던.


근데 그게 전 원어민 과외 선생 애래. 출국하고 알았나봐.......


대화창에 수십 개의 대화가 쉴 새 없이 올라왔다. 얌전하게 생겼는데 뒤로 호박씨 까고 다닌다는 흉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녀가 생긴 것과 달리 그다지 얌전한 스타일이 아니라는 걸 전부터 알고 있었다.
중학교 3학년 여름 체육시간이었다. 반 아이들은 운동장으로 나가고, 나와 민영이는 몸이 안 좋아 교실에 남아 있었다. 평소에도 별로 대화를 나눠본 적이 없었던지라 둘 사이엔 어색한 기운이 감돌았다.
나는 연습장을 꺼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단발머리 소녀가 쭈그리고 앉아 고양이를 부르는 모습이었다.
“너 그림 되게 잘 그린다. 그림 잘 그리는 애들 부러워.”
언제 왔는지 민영이가 내 어깨너머로 훔쳐보고 있었다.
“너는, 피아노 잘 치잖아.”
“잘 치는 건 아냐. 그냥 치는 거지.”
민영이는 내 앞에 놓인 빈 의자에 돌아앉아 내 그림을 본격적으로 구경했다.
“진짜 잘 그리네. 너희 집 고양이 키워?”
“아니. 키우고 싶어.”
“그래? 나도 고양이 좋아하는데. 뭐랄까, 다른 동물보다 더 요염하고 우아해 보인달까.”
“응응, 맞아. 정말 그래.”
우리는 씩 웃었다. 내 손끝에선 고양이의 꼬리가 완성되고 있었다. 민영이가 갑자기 뭔가 떠올랐다는 듯 깜짝 고개를 쳐들었다.
“너 야한 그림도 그려봤어?”
“응?”
“야한 거 말이야. 나 야한 그림 한 장만 그려주라. 발가벗은 여자가 이렇게 하고 있는 거.”
그러더니 민영이는 고개를 뒤로 젖힌 뒤 두 다리를 활짝 벌려 포즈를 취했다.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당황스러웠다.
“뭐야. 그, 그런 건 안 그려봐서 몰라. 못 그려.”
“내가 이렇게 포즈 취하고 있으면 되잖아.”
“안 돼…… 못해……. 나 화장실 좀 갔다 올게.”
나는 황급히 교실을 빠져나갔다. 대체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볼일을 보고 손을 씻는데 화장실이 열리며 민영이가 들어왔다. 움찔한 나와 달리 민영이는 태연한 얼굴로 두 번째 칸에 들어갔다. 당당하고 시원한 오줌소리가 화장실 안에 울려 퍼졌다. 민망함은 내 몫이었다. 나는 민영이가 볼일을 마치기 전에 교실로 돌아와 책상에 엎드려 자는 척을 했다.
잠시 후, 교실 문이 열리며 민영이가 들어왔다. 걸음걸이에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민영이는 뚜벅뚜벅 자기 자리로 돌아가 평소처럼 악보 책을 꺼내 들었다. 그 뒤로 우리는 두 번 다시 말을 섞지 않았다.


어떡하긴. 당연히 지워야지.


아빠 없는 혼혈 아이를 여고생이 키우는 게 현실적으로 가능하겠냐며 다들 한마디씩 했다. 현실…… 현실적……. 엄마는 내게 현실적으로 살라고 했다. 너는 현실을 너무 모른다. 이 세상이 얼마나 험한 줄 아느냐. 애니메이션인지 뭔지 해서 네가 입에 풀칠이나 할 수 있을 것 같으냐.
내가 있는 이곳이 현실이 아니라면 뭘까? 엄마와 싸울 때마다 나는 머릿속으로 애니메이션을 만들었다. 1. 두 눈을 부릅뜨고 소녀를 잡아먹을 듯이 소리치던 엄마의 몸이 점점 커지다 뻥 터져버린다. 2. 소녀는 터진 잔해 조각 아래에서 춤을 추며 축제를 벌인다. 3. 지나가던 방랑자 고양이 한 마리가 끼어들어 함께 춤을 춘다. 4. 또 한 마리의 방랑자 고양이가 끼어든다. 5. 또 한 마리, 또 한 마리…… 결국 수십 마리의 고양이 방랑자가 소녀의 집에서 함께 살게 된다. 끝.
“누나, 출근카드 안 찍고 뭐해요?”
같은 시간에 일하는 옆 동네 실업고교생 준수가 멍 때리던 나를 툭 치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잘생겼다. 저런 타입은 분명 인기가 많을 것이다. 얘기하는 걸 들어봐도 여자친구가 자주 바뀌는 듯했다. 나는 준수가 여자친구와 진한 스킨십을 나누는 순간을 상상했다. 잠깐, 내가 뭐하는 거지? 나는 재빨리 상상에서 빠져나왔다. 단체 대화창의 여파였다. 휴대폰을 확인해보니 시끄러웠던 대화창은 야자가 시작되면서 잠잠해졌다.
교복을 벗고 기름 냄새가 밴 작업복으로 갈아입었다. 나는 매번 이 순간이 좋았다. 투박하고 안 예쁘긴 해도 어쩐지 정직하고 당당한 느낌이 들었다.
차 한 대가 주유소로 들어오고 있었다. 나는 마중하기 위해 뛰어갔다.
“이쪽으로 오세요. 더, 더, 더. 됐습니다! 얼마 넣어드릴까요?”
미간에 주름이 깊게 팬 50대 중년 남자가 창문을 슥 내리며 같잖다는 듯 짧게 답했다.
“오만 원. 야, 여기 화장실 어디야.”
“네! 화장실은 건물 오른쪽으로 돌아가시면 있습니다.”
그러자 조수석 문이 열리며 한 여자가 밖으로 나왔다. 여자는 몸매가 다 드러나는 짧은 검은색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늘씬하고 예쁜 젊은 여자였다. 여자는 화장실을 향해 또각또각 걸어갔다.
“뭘 그렇게 봐?”
“아…… 여자친구 분이 너무 예쁘셔서요. 주유구 좀 열어주세요, 손님.”
남자는 바닥에 침을 퉤 뱉은 뒤 주유구를 열었다. 나는 남자에게 휘말리지 않으려 애쓰며 주유소 기계에 휘발유 5만원 어치를 찍었다. 차창 밖으로 결제카드를 쥔 남자의 손이 삐죽 나왔다. 주유기를 꼽고 카드를 받으러 가는데 분위기를 눈치 챈 준수가 튀어나와 나 대신 결제를 하고 왔다.
“감사합니다! 주유 끝날 때까지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그러고는 내 쪽으로 와 은근한 목소리로 말을 붙였다.
“와, 남자 완전 별론데. 여자가 훨씬 아깝다. 그렇죠?”
“……응.”
어쩐지 수줍어져 작업복 안에 얼굴을 파묻고 겨우 대답했다. 볼일을 마친 여자가 도도한 자태로 다시 차에 올라탔다. 나는 주유구 뚜껑을 드르륵 돌려 잠그면서 유연하게 고개를 젖힌 민영이의 모습을 떠올렸다.


*


남자애들은 교실 한쪽 벽을 차지하고 서서 격렬한 말뚝박기를 선보이고 있었다. 공격편에 선 누군가가 한 명씩 높이 뛰어올라 내려앉을 때마다 고개를 박고 있는 사람과 구경꾼들이 으악, 어억, 하하호호 떠들어댔다. 얼마나 시끄러운지 바로 옆에 있는 현주에게도 목청을 높여 말해야 할 정도였다.
“억!”
누군가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바닥에 쓰러졌다. 말뚝박기를 하다 거길 잘못 얻어맞은 것 같았다. 남자애들은 박장대소했다. 한 친구가 다가가 바닥에 쓰러져 있는 친구의 허리를 주먹으로 퍽퍽 때려줬다.
“그래서 학원은 언제부터 다닐 생각이야?”
현주의 질문에 나는 다시 애니메이션의 세계로 돌아왔다. 현주도 나처럼 애니메이션이 하고 싶어 실업계로 온 소수파였다. 여러 가지로 통하는 게 많았던 우리는 금방 친해졌다. 중학교 절친에게도 말하지 않은 주유소 알바 얘기도 현주에게는 다 털어놓을 수 있을 정도였다.
“다음 달부터 등록할까 해. 학원 다니면서 알바하려면 좀 힘들겠지만 그래도 학원 다니려고 시작한 아르바이트니까…… 해야지.”
“부모님은, 아직 모르시는 거지?”
“얼마 전에 들켰어. 엄마한테 제대로 맞았지.”
“맞았어?”
말뚝박기를 하던 남자애들이 다시 으아악 소리를 지르며 몸을 날렸다. 떨어진 충격에 몸을 휘청이면서도 어떻게든 중심을 잡는 남자애들의 모습이 너무 필사적이어서 우스꽝스러웠다.
지잉. 휴대폰 진동이 짧게 울렸다.


뭐해? 바빠? 박민영 결국 낙태했대. 대화창으로 컴온.


대화창에서는 박민영의 낙태와 결석과 콩쿠르 결과와 앞으로의 진로에 대해 벌써 낱낱이 해부, 전시되어 있었다. 여고생들에게 여고생의 낙태와 임신과 섹스는 놀랍고 흥미로운 소식임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 호기심은 불편하고 천박한 것임이 분명했다. 만약 박민영이 아니라 내가 그런 일을 겪었더라면 친구들은 어떻게 반응했을까. 아이! 병신 새끼. 등 뒤에서 남자애들이 낄낄 웃으며 공중으로 뛰어올랐다.


*


늦었다.
이대로라면 30분, 아니 한 시간 시급을 공중에 날릴 판이었다. 학교에서 주유소로 가는 버스를 타려면 15분은 더 걸어가야 했다. 정류장으로 가는 길은 두 개다. 하나는 큰 길, 하나는 시장으로 들어가 샛길로 빠지는 것. 샛길은 큰 길보다 5분이나 빠른 확실한 지름길이었지만 잘 가진 않았다. 왜냐하면 아마도 성매매 하는 걸로 추정되는 가게들이 있기 때문이었다.
어쩌지?
어쩌긴 뭘 어째.
나는 교복 단추를 모조리 잠그고 매무새를 만졌다. 그러고는 최대한 당당한 표정과 발걸음으로 골목에 들어섰다.
낡은 가게들이 하나씩 곁을 지나갔다. 어떤 가게는 유리창이 깨진 채 방치되어 있었고, 어떤 가게는 무슨무슨 음식점이라고 적혀 있었지만 그렇게 보이진 않았다. 간판이 없는 가게도 있었다. 수건 여러 장이 빨래건조대에 평화롭게 널려 있는 곳도 있었다. 여자들의 말소리가 낮은 창문 밖으로 조용조용 새어나왔다.
그러다 나는 건물 뒤에서 담배를 피우던 여자를 발견하곤 놀랐다. 삼십대 후반으로 보이는 여자는 시폰 소재의 가슴이 깊게 패인 하늘색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여자가 담배 연기를 뱉으며 나를 쳐다봤다. 쳐다봤지만 쳐다본 것 이상의 의미는 없었다. 여자의 눈빛에는 그 어떤 수치도, 건방도 없었다.
나는 얼른 고개를 돌리고 걸음을 재촉했다.
“집에 가니?”
상냥한 목소리였다. 조금 놀랐다. 말을 걸어서 그런 것은 두 번째고, 예상했던 목소리와 달리 미성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 두 다리는 버스정류장을 향해 힘차게 내딛고 있었고, 대답을 망설이는 사이 타이밍도 놓쳐버렸다. 나는 그녀를 무시한 셈이 되어버렸다. 이젠 정말 여기로 다닐 수 없겠네, 하고 생각하는 동안 길이 끝났다.
나는 몸을 돌려 뒤를 돌아봤다. 그곳에 여자는 없었다.


*


주유소에 도착하니 준수와 과장님이 차 여섯 대를 맡아 처리하고 있었다. 한없이 한가하다가도 차가 몰리면 갑자기 바빠지는 게 주유소다.
나는 미안한 마음에 주유가 끝난 자동차로 곧장 달려갔다. 과장님이 차 위로 얼굴을 빼고 소리쳤다.
“됐어, 그냥 둬! 괜찮으니까 가서 옷부터 갈아입고 와.”
손님 카드를 쥔 준수가 카운터로 뛰어오며 “지각했대요오. 지각했대요.” 하고 놀려댔다.
한바탕 손님을 치러낸 뒤, 나와 준수는 야외 의자에 앉아 늘어졌다. 스피커에서 섹시 콘셉트로 인기 있는 5인조 걸그룹의 노래가 흘러나왔다. 준수는 능청스럽게 걸그룹 춤을 흉내 냈다. 푸핫, 웃음이 터졌다. 나름대로 각선미가 살아 있었다.
“누나, 남친 있어요?”
“응. 응?”
“뭐예요. 있단 거예요, 없단 거예요?”
“갑자기 그런 걸 왜 물어.”
“그냥 뭐…… 궁금해서.”
“……있어.”
사실 없었다. 하지만 없다고 말하면 내가 자기를 좋아할 거라는 착각을, 아니 사실을 들킬까봐 찔렸다. 자기는 있는데 나만 없다고 하는 것도 약간 자존심이 상했다.
“있다고요? 에이, 장난치지 말고요. 진짜?”
뭐지, 이 반응은. 마치 내가 있어선 안 될 것을 있다고 말한 것처럼 굴잖아? 의도는 둘 중 하나였다. 없을 것처럼 생겼는데 있다고 해서 놀랐거나 있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 나는 후자에 살짝 기대를 걸어봤다.
“응, 있어. 왜?”
“와, 이 누나 범생이처럼 생겨가지고 안 되겠네. 완전 날라리구만? 깜빡 속을 뻔했네!”
기대는 여지없이 무너졌다. 그때부터 준수는 날 날라리 누나, ‘날누’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어? 날누! 저기 고양이!”
거뭇하게 때가 탄 노란색 고양이가 주위를 경계하며 걸어오더니 세차장 쪽으로 들어갔다.
“뭐 줄 거 없으려나?”
“고양이 좋아해요?”
“응.”
“나 소시지 하나 있는데 그거 줄까요?”
“정말?”
“잠깐만 기다려요.”
준수는 창고로 들어갔다. 나도 고양이를 쫓아 살금살금 세차장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그새 어디로 가버렸는지 보이지 않았다. 준수가 천 원짜리 통통한 소시지를 내밀었다.
“여기!”
“근데 고양이가 없어졌어. 어디 갔지? 고양아…… 고양아…….”
“킥. 누나도 참. 그렇게 부르면 고양이가 네에, 하면서 나온대요?”
“그렇긴 한데…….”
그때 검은색 승용차 한 대가 주유소로 들어왔다. 준수는 자기가 맡을 테니 잘 찾아보라며 뛰어갔다.
나는 바닥에 엎드려 고양이가 숨었을 법한 곳을 살폈다.
찾았다!
노랗고 보송보송한 앞 다리 두 개가 물건 틈새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고양이가 도망가지 않게 멀찌감치 서서 소시지 조각을 휙 던져주었다. 괜찮아, 어서 먹어. 고양이는 킁킁 냄새를 맡으며 곧바로 먹을 것처럼 굴다가 다시 고개를 들곤 야옹 울었다.
준수가 세차장 입구에 서서 손나팔을 하고 소리쳤다.
“누나, 어떤 아줌마가 찾는데요?”
목소리에 놀란 고양이가 반대편으로 휙 도망갔다.


엄마였다. 어떻게 알았을까.
과장님이 심각한 표정으로 나에 대한 변명을 늘어놓고 있었다. 아마 가짜로 받아온 ‘미성년자 아르바이트 부모님 동의서’가 문제겠지. 나를 발견한 엄마가 눈을 부라리며 협박했다.
“차에 타.”
“엄마……”
“타라고 했어!”
늘 이런 식이다. 상대방의 입장을 헤아리기는커녕 얘기조차 듣지 않는다. 그저 자기 기분대로 상황을 군림하려 든다. 그게 상대방에게 얼마나 모욕적이고 화가 나는 일인지 엄마는 모른다. 모를 수밖에 없다. 휘두른 적은 있어도 휘둘린 적은 없으니까.
우리 집 분위기를 감지한 과장님은 엄마 말씀대로 하는 게 좋겠다며 들어가서 짐을 챙겨 나오라고 했다. 내가 머뭇거리자 과장님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 뜨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자기 말대로 하라는 조용한 회유였다.
두 손을 가지런히 모은 준수가 창고로 들어가는 나를 안절부절 따라오다 멈춰 섰다. 아, 쪽팔려. 옷을 갈아입고 짐을 챙기는 동안 엄마를 향한 온갖 욕이 입 안에서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년. ……년. ……년. ……년!


얘들아...민영이 죽었대.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밀린 단체 대화를 읽었다. 대화창의 분위기는 전과 사뭇 달랐다. 푸드덕거리며 호들갑을 떠는 대신, 드문드문 말을 던져놓고 상황을 지켜보는 듯했다.


안타깝다.


라고 누가 말했다. 그러자 민영이를 옹호하는 응원의 말이 기다렸다는 듯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그래봤자 이미 죽었는데 뭘. 이제 와서 뭘. 이렇게 해서 뭘, 어쩌겠다고.
엄마의 휴대폰이 울렸다. 누군지 확인한 엄마는 망설이는 듯하더니 내게서 먼 왼쪽으로 전화를 받았다.
“응.”
휴대폰 너머로 남자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정확한 말은 들리지 않았지만 애교 섞인 음성이었다.
“나 지금 통화하기 곤란한데. 나중에 전화할게.”
도로를 달리던 차가 신호등에 걸려 정차했다. 소음이 사라지자 남자의 목소리가 조금 또렷해졌다.
‘왜애. 뭐하는데? 다른 남자랑 있는 거 아냐?’
“딸이랑 있어. 운전 중이야.”
‘에이, 알았어. 맞다, 호텔 예약해야 하는데 27일에 되는 거 확실히 맞지? 그것만 얘기해줘.’
“응. 돼.”
‘오케이. 그럼 그날로 예약할게. 이따가 연락해애.’
전화가 끊어지고 침묵이 찾아왔다. 방금 전 통화는 충분히 미심쩍은 구석이 있었다. 아니, 사실 난 확신하고 있었다.
엄마는 바람을 피우고 있다.
새로 산 화장품이 많아지고, 비싸서 엄두가 안 난다던 피부관리샵을 회원권으로 끊어 다니기 시작하지 않았나. 한 번은 우연한 기회에 서랍장에 숨겨져 있던 야한 속옷을 본 적도 있었다. 그게 아빠를 위한 이벤트일 리 없었다. 엄마, 아빠의 관계는 이미 예전에 끝이 난 상태였다. 다만 두 사람 사이에 이혼이란 단어를 입에 올릴 만한 사건이 없었기 때문에 그냥 하루하루 살고 있을 뿐이었다.
“엄마…… 혹시 다른 사람 만나?”
옷 여러 벌을 몸에 대고 거울에 비춰보던 엄마를 향해 내가 물었다. 조금은 당황할 줄 알았던 엄마는 오히려 농담처럼 맞받아쳤다.
“왜? 너무 예뻐졌어?”
“……응.”
“여잔 꾸며야 돼. 꾸며야 빛이 나더라. 이제부턴 엄마도 여자로 살아볼까 해.”
꽃무늬가 그려진 하얀색 블라우스와 파란색 스커트를 골라 입은 엄마는 옷과 어울릴 법한 립스틱 두 개를 꺼내 보여줬다.
“둘 중에 어떤 색이 나아?”
나는 은은한 분홍색을 골랐다. 그걸 발라본 엄마는 너무 무난하다며 한톤 밝은 립스틱으로 고쳐 발랐다. 입술과 스커트의 색이 대비되어 그 둘밖에 보이지 않았다.
“만약 다른 사람이 생긴 거면…… 이혼했으면 좋겠어. 그게 엄마를 위해서도, 아빠를 위해서도 좋을 것 같아.”
“……갑자기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넌 가끔 그렇게 엉뚱한 소릴 하더라? 엄마 나가야 돼. 찌개 끓여 놨으니까 데워 먹어. 아빤 좀 늦게 들어온대.”
그날 밤 퇴근하고 돌아온 아빠에게 엄마의 요즘 상황에 대해 넌지시 얘기를 꺼냈다. 지금 상황을 어떻게든 개선해보겠다는 의지 따위, 아빠에게 없을 걸 알고 한 말이었다. 나는 정말로 두 사람이 이혼하길 바랐다.
“그러냐.”
그게 끝이었다. 아빠는 더 이상 어떤 것도 묻지 않았다. 그리고 다음 날, 엄마가 내게 미친년이라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 실업계 꼴통들만 보니 머리가 돌았나 보다고. 엄마가 해준 밥 먹고 그딴 생각이나 한다며 물건을 집어던졌다. 사실 확인을 요청했던 아빠는 네가 잘못 생각한 모양이라며 엄마에게 빌라고 했다. 엄마는 내 머리를 다 잘라놓겠다고 발악하고 있었다.
“어서!”
나는 잘못했다고 용서를 구했다. 사과가 받아들여지진 않았다. 그날부터 엄마는 날 볼 때마다 더러워 견딜 수 없다는 듯 표정이 일그러졌다.


신호등이 초록불로 바뀌었다. 차가 붕하고 앞으로 나가는데 갑자기 고양이 한 마리가 도로로 뛰어들었다. 끼익! 굉음과 함께 차가 급정차했지만 고양이는 이미 치여 죽은 뒤였다. 새빨간 선혈이 축 늘어진 몸에서 흘러나왔다.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기분 나쁜 찌릿함이 온몸을 조였다. 나는 손으로 입을 막고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엄마는 차를 뒤로 뺀 뒤 고양이를 살짝 비켜 세웠다.
“타!”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차에 타라고! 이미 죽었는데 어떻게 해?”
나는 조심스레 고양이를 들어올렸다. 손 아래로 피가 흘러 내렸다. 피가 아직 따뜻했다. 엄마가 밖으로 나와 소리쳤다.
“그만해! 그거 안 놔? 야, 넌 엄마 말이 말 같지 않니?”
“씨발 뭘 그만해 쌍년아! 너나 가! 너나 집에 가라고!”
나는 인도 옆 화단에 고양이를 내려놓았다. 울음이 끅끅 올라와 목구멍을 때렸다. 미안해. 정말 미안해.
그때 갑자기 몸이 휘청 뒤로 자빠졌다. 엄마가 내 머리를 낚아 챈 것이다.
“이 년이 정신 나갔지. 엄마한테 욕을 해? 어? 너 오늘 나랑 끝내자! 한 번 죽어봐!”
엄마의 손이 얼굴로 사정없이 날아들었다. 속수무책으로 몇 대 맞던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젠 나도 참을 수 없었다. 나는 엄마를 잡고 있는 힘껏 바닥에 내팽개쳤다. 지나가던 행인들이 달려와 우리를 말렸다.
“앞으론 절대 너랑 같이 못 살아! 짐 다 갖다 버리기 전에 당장 내 집에서 나가! 알았어?”
엄마는 씩씩대며 차를 끌고 가버렸다.
그날 나는 집에 들어가지 않았다. 현주에게 연락해 오늘 하루 재워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물론이지. 얼른 와.


갑자기 아랫배가 심하게 당겼다. 나는 근처에 있는 공중 화장실로 들어갔다. 울컥 나온 생리 혈이 팬티에 묻어 있었다.
나는 엄마가 죽길 간절히 바랐다.


아빠의 연락을 받고 다음 날 오후 늦게 집에 들어갔다. 평소와 달리 심각하고 숨 막히는 공기가 집안에 감돌고 있었다. 거실에선 담배 냄새가 진동했다.
“네 엄마가 집을 나갔다.”
별로 놀랍지 않았다. 언젠가 엄마가 집을 나갈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그게 오늘일 뿐이었다.
“이건 무조건 네가 잘못한 거야. 자식이 돼서 그러면 되겠냐? 넌 대체 생각이…… 하아.”
아빠가 담배 한 대를 꺼내 물었다.
“어차피 나갈 생각이었을 거야. 기다리는 사람이 있으니까.”
“누구. 딴 남자? 아직도 그 소리냐? 너 정말 정신이 어떻게 된 거 아냐? 너 때문에 엄마가 집을 나갔는데 지금 그런 말이 나와?”
늘 무기력하기만 했던 아빠의 눈이 희번덕거리며 혐오로 가득 차올랐다. 이쯤 되니 나는 기대에 부응하는 미친년이 되고 싶어졌다.
“나 고양이 키울래. 이제 엄마 없으니까 그래도 되지?”
“뭐?”
기가 막힌다는 듯 쳐다보는 아빠의 얼굴에 대꾸하지 않고 방으로 들어와 문을 잠갔다. 뭐가 문제야? 그런 년은 차라리 없는 게 나아. 엄마 없는 생활이 두려운 적은 없었다. 나는 항상 부모님의 이혼을 생각했고, 아빠와 살 생각이었다. 적어도 아빤 내가 하는 일을 막지는 않았다. 아니, 그럴 의지가 없었다. 관심이 없었다.
이제 엄마가 없으니 애니메이션 공부도, 주유소 아르바이트도 계속할 수 있었다. 그동안 소원하던 내 고양이도 키울 수 있었다. 어떤 고양이가 우리 집에 오게 될까? 검은 고양이? 회색 줄무늬 고양이? 아니면 그때 주유소에서 봤던 노란색 고양이? 나는 뻥 터져버린 엄마의 잔해 아래에서 섹시한 걸그룹 춤을 추는 수십 마리의 고양이를 떠올렸다.
그러고는 휴대폰을 꺼냈다.


민영이 장례식장이 어디야? 나도 같이 가.


*


영정사진 속의 민영이는 교정기를 뗀 채 환하게 웃고 있었다. 교정 덕분인지 확실히 치아가 가지런했다.
나는 국화를 헌화하며 남자 앞에서 야한 표정을 짓고 있는 민영이를 상상했다. 민영아, 너 고양이 좋아한댔지? 나 이제부터 고양이 키울 거야. 같이 봤으면 좋았을 텐데. 잘 가. 잘, 가.
우리와 맞절을 하던 민영이의 엄마가 흐느끼며 무너졌다.


*


엄마가 집을 나간 지 두 달쯤 됐을 때였다. 아빠 앞으로 이혼 서류가 날아왔다. 당연히 엄마가 보낸 거였다. 참 악랄한 여자였다. 한창 찾을 땐 꽁꽁 숨어 있다가 적응해 살 만하니까 이런 식으로 등장하다니.


힘들이지 않았으면 좋겠어. 우리 이미 끝난 사이잖아. 협조해줘.


아빠가 여러 번 전화를 걸었지만 엄마는 끝내 받지 않았다.


남자 생겼니.


더 이상 엄마에게 애정이 없는 아빠에게도 이혼의 이유는 알아야 하는 것이었다. 잠시 후, 엄마에게서 전화가 왔다. 나는 아빠 곁에서 일어나 방으로 들어갔다. 문은 닫지 않았다. 고양이가 내 허벅지 위로 올라와 자리를 잡았다. 아빠 목소리가 낮게 웅웅댔다. 나는 아빠의 통화를 엿들으며 고양이를 쓰다듬었다. 내 생각이 맞았다. 엄마는 오래된 새 남자의 존재를 아빠에게 고백했다. 그래 그랬겠지. 그 남자 앞에서 등을 뒤로 젖히고 응응, 그래그래. 응응 좋아좋아. 응응 더 해줘 더! 라고 외쳤겠지. 씨발,
“창녀 같은 년.”
기분이 좋은지 고양이가 그르릉그르릉 울었다. 바닥에 내려놓은 휴대폰이 지잉 울리며 화면이 켜졌다. 단체 대화창에 새로운 대화가 올라왔다.


아, 이제 야자 끝! 집에 간다, 오예!


나는 휴대폰이 화면이 자동으로 꺼질 때까지 그것을 노려보았다.




● 작가의 말


고등학생 때 나는 숫기 없고 조용한 아이였다. 그러나 그게 곧 평화를 뜻하는 건 아니었다. 나는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소용돌이에 휘말려 산산이 부서지고 있었다. 그걸 알아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렇게 나는 죽었고, 동시에 태어났다.
고유일한 희망은 시간이었다. 상대도, 나도 건드릴 수 없는 절대영역. 나는 응, 하고 순응하는 법을 배웠다. 그러면 시간이 조금 더 빨리 달려왔다. 하지만 ‘응’은 또 다른 ‘응’을 요구했다. 더 많고 확실한 ‘응’을 바쳐야 했다. 그래서 나는 나를 죽였다. 그리고 태어난 것은…….



작가소개 / 조희애(동화작가)

200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동화 부문으로 등단



《글틴 웹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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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문제 없음 고비읍 오른쪽에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입을 틀어막고 참아 보려는 듯하지만, 결국은 끕끕 새어 나오는 소리. 내 바로 왼편에 앉은 아이는 흘러내리는 눈물을 손등으로 닦아내기 바빴다. 사방에서 훌쩍이는 소리가 들려온 건 무대 위의 한 남자애가 울기 시작하고서부터였다. “부족한 저에게 이렇게 많은 사랑을 주셔서 정말, 정말 감사드려요. 그 사랑 다 돌려드릴 수 있도록 더 노력할게요. 저를 사랑받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셔서 감사…….” 그 애는 울먹이느라 말을 다 끝내지 못했다. 누군가가 크게 그 애의 이름을 연호하자 팬들이 한목소리로 그 애의 이름을 외쳤다. “연홍아, 울지 마!” “연홍아, 사랑해! 더 많이 사랑할게!” “최연홍! 행복하자!” 반짝거리는 옷을 입고 예쁘게 화장을 하고 눈부신 조명을 받는 무대 위의 남자애를, 이미 많이 행복해 보이는 그 애를 팬들은 더 행복하게 만들어 주겠다고 했다. 나는 커다란 공연장 안을 둘러보았다. 2만 명이 앉아 있는 이 공연장 어딘가에 송리윤도 있었다. 다른 팬들처럼 송리윤도 그 애를 보고 울었을까. 더 사랑해 주겠다고 외쳤을까. 따로 연락도 한 적 없고, 밥 한 번 같이 먹은 적 없지만 그 애는 송리윤에게 사랑받았다. 아무 이유 없이. 아무 대가 없이. 세븐플래닛은 마지막 무대라면서 팬들에게 함께 부르자고 했다. 팬들은 노래 가사 전체를 다 알고 있는지 막힘없이 따라 불렀다. 3시간쯤 콘서트가 진행되는 동안 세븐플래닛이 불렀던 노래 대부분은 내가 전혀 알지 못하는 노래들이었다. 애초에 나는 세븐플래닛에 관심이 없었다. 멤버가 몇 명인지, 이름이 무엇인지도. 관심도 없는 세븐플래닛 콘서트 티켓을 산 건 오로지 송리윤 때문이었다. “여러분, 오늘 즐거웠나요?” “네!” “행복했나요?” “네!” “저희도 너무너무 즐겁고 행복했어요.” 멤버들은 돌아가면서 엔딩 멘트를 던졌다. 아까는 우느라 말을 끝까지 하지 못했던 최연홍이 이번에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세븐플래닛과 가디언이 함께한 지 벌써 5년이 됐어요. 이만하면 한 가족이나 다름없어요. 그러니까 우리 평생 서로 사랑하고 아껴 줘요. 알았죠?” 팬들은 큰 소리로 “네!” 하고 대답했다. 어딘가에서 송리윤도 같이 외치고 있을 것만 같았다. “뭐야? 할 말 있어?” 송리윤이 근처에서 쭈뼛대는 내게 물었다. “저기…….” “쉬는 시간 다 끝나 간다. 아까운 시간 잡아먹지 말고 빨리 좀 말해 줄래?” “나도 갔었어, 어제. 세븐플래닛 콘서트 말이야.” 혹시나 반가워해 주지 않을까 기대를 하고 송리윤의 얼굴을 흘끔 쳐다보았다. 하지만 송리윤의 표정은 변함없었다. 여느 때처럼

  • 관리자
  • 2022-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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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리자
  • 2022-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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