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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봇 단테 1

  • 작성일 2018-04-01
  • 조회수 1,774

[글틴스페셜 - 동화]



로봇 단테 1



임어진






“어서 와라. 단테 1호. 수명호 승선을 환영한다.”
장 회장은 은발을 한 손으로 쓸어올리며 경쾌한 걸음으로 안쪽에서 걸어 나왔다. 노인이라고는 도무지 믿기지 않는 탄탄한 몸이었다. 단테는 집무실 입구에서 단정하게 목례를 하고 장 회장이 권하는 소파로 가 앉았다. 장 회장의 우주선에 탑승하게 된 건 가히 가문의 영광이었다. 로봇이 자기를 만든 제조회사를 가문이라고 여겨도 좋다면 말이다.
“집무실이 고딕식 분위기가 나는군요. 회장님 취향을 조금 알겠어요.”
“그래? 하하하. 듣던 대로 감성이 뛰어나군. 생긴 것도 멋지고. 내 선택에 만족하네.”
장 회장은 소파 대신 커다란 책상 앞으로 가 앉으며 흐뭇한 웃음을 지었다. 책상 위 천장 조명들이 장 회장이 앉은 위치에 은은하게 조도를 맞추며 은발을 더욱 부드러워 보이게 했다. 적당히 주름지고 그을린 구릿빛 얼굴도 보기 좋았다. 매스컴에서 늘 보던 모습이었다.
단테는 예의를 갖추어 인사를 했다. 칭찬 소리가 듣기 나쁘지 않았다.
“높이 평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실제로 단테는 현존 최고 수준의 로봇들을 생산하는 걸로 세계 시장에 급부상하고 있는 드림 차일즈사의 명실상부한 으뜸 상품이었다. 수명그룹 총수 장수명 회장은 단테를 구입하는 대가로 드림 차일즈에 제2공장 건설 부지를 내놓았다. 수도권 서쪽에 자리한 삼십만 평 공장 부지는 장 회장이 지닌 수십조 원 재산의 원천인 곳이었다. 장 회장은 작은 뻘밭에서 소금을 긁어 파는 일로 장사를 시작해 지금과 같은 거대 무역회사 수명그룹을 키워낸 전설의 인물이었다. 정확한 나이나 출신 배경은 아무도 몰랐다. 일찌감치 고아가 되었다는 전설의 시초만 창업주 홍보물 도입부로 지겹도록 등장했다. 어차피 세상은 과거에 큰 관심이 없었다. 장 회장이 지닌 현재 부의 크기, 앞날의 전망에 더 치중했다.
다행히 장 회장은 맨주먹으로 큰 부를 이룬 이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수전노 노랑이과는 아니었다. 세상을 위해 부를 호쾌하게 쓸 줄 알았다. 자선단체치고 수명그룹의 후원을 받지 않은 데는 거의 없었다.
장수명 회장이 우주선 수명호를 띄우겠다고 했을 때 사람들이 놀란 건 당연했다. 수명그룹이 우주 사업에 뛰어들려는 신호탄으로 받아들였다. 실제로 장 회장은 우주여행 사업에 뜻이 있다며 본인이 첫 여행자로 답사 선발대가 되어 떠나겠다고 선포했다.
노령의 장 회장이 그런 계획을 갖고 단테를 지목해 구입 의사를 밝혔을 때, 드림 차일즈 내부에서는 의견이 분분했다.
“단테는 많은 사람들과 교감하며 지성과 감성을 스스로 키워 가도록 설계한 최신형 로봇이에요. 인류가 새로운 지혜를 필요로 할 때 현명하게 기여하길 바라고 단테 같은 지성 로봇들을 만든 거잖아요. 이제 세상에 갓 한 걸음을 내디딘 셈인데, 미처 제 능력을 갖추기도 전에 기업가 한 사람 사업 거들라고 보낼 수는 없어요.”
“장 회장이 제시한 제2공장 건설 부지 조건이 잠꼬대 같나? 우리 회사로서는 큰 기회일세. 이렇게 큰 홍보 기회도 없단 말이네.”
“하지만 단테가 우리 가까이에 있었으면 좋겠어요. 아직은 더 많은 지식을 습득해야 하고 우리랑 토론도 계속해야 기대한 대로 단테가 제 지성을 제대로 작동할 수 있을 거라고요.”
“장 회장 우주여행 답사 동행도 단테에게는 훌륭한 경험이 될 수 있네. 결코 나쁜 일이 아니란 말일세.”
“그렇긴 한데 장 회장이 단테의 잠재적인 능력을 제대로 알아봐 줄 것 같지가 않아요. 왠지 그저 신기한 새 로봇이 나왔다니까 갖고 싶어 하는 부자의 호사 취미 같다고요. 괜한 노파심인지도 모르지만……. 암튼 단테는 앞으로 세상에 더 많은 기여를 할 수 있을 텐데, 그렇게 한 개인에게 넘기자니 너무 아까운 아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단테를 제작했던 연구개발자 서진과 마윤이 열을 올리며 반대했지만 드림 차일즈 대표 테리 왕의 의견은 확고했다.
“회사는 이윤 추구가 최우선일세. 사회 공익에 기여하는 건 그다음이네.”
더 이상 논박은 어려웠다.
드림 차일즈는 단테에게 만반의 준비를 시켰다.
“네가 자랑스럽다, 단테. 모쪼록 이번 우주여행에서 많이 배우고, 너도 네 역량을 다하기 바란다. 부디 무사히 돌아와 우리 회사를 널리 빛내 주길 당부하마.”
대표의 말마따나 단테가 회사의 영예를 짊어진 셈이었다. 서진과 마윤은 아이를 멀리 떼어 보내는 부모들 같았다.
“보고 싶을 거야, 단테. 너도 우리 생각나면 언제라도 화상전화 해. 어디에 있든 혼자라는 생각은 하지 말고, 그렇게라도 서로 보자. 알았지?”
“응.”
마윤의 몸 아픈 어린 아들은 단테가 제 병을 고칠 약을 구해올 거라고 믿었다. 단테는 아이가 내민 손가락에 제 새끼손가락을 걸어야 했다.
“약속한 거지? 단테.”
“그래.”
단테는 아이가 눈을 반짝거리며 한 말을 가슴에 간직했다.
장 회장이 긴장을 풀지 않고 있는 단테에게 손짓을 했다.
“먼저, 출항 준비 차질 없도록 부탁하마. 다른 친구들도 애쓰고는 있네만 솔직히 그냥 깡통들일 뿐이어서 말이야.”
장 회장은 말끝에 헛웃음소리를 냈다. 우스운 말은 아니었다. 그런데 그 말이 끝나자마자 한 무리의 로봇이 집무실 안으로 들어섰다. 단테는 저도 모르게 훗 웃고 말았다. 나쁜 뜻은 없었다.
“인사들 나누게. 이쪽은 내 비서와 수행원들. 이쪽은 신입 단테.”
장 회장 소개에 비서와 수행원 로봇들이 단테와 인사를 나누었다. 비서 로봇은 자기를 쿤 실장이라고 소개했다. 쿤 실장과 수행원 로봇들 표정은 한결같이 무뚝뚝했다.
“자, 이틀 뒤면 긴 여정이 시작될 테니 우선 좀 쉬고 준비 점검에 들어가도록.”
장 회장이 물러가라는 손짓을 하자 로봇들은 허리를 꺾으며 절을 하고 집무실을 나갔다. 장 회장 얼굴에 지겨운 빛이 스쳤다 지나갔다. 단테는 얼떨떨한 채 뒤따라 집무실을 나왔다. 얼핏 책상 위 천장 조명이 어두워지며 장 회장의 모습이 흐릿해진 느낌이 들었다. 단테가 갸웃해 다시 돌아보았을 때는 이미 집무실 문이 닫혀 있었다.


수명호 발사 준비는 예정대로 순조롭게 진행되어 갔다. 장 회장은 19세기 유럽 대항해시대의 어리석은 야망과 드높은 포부에 가득 찬 초로의 선장처럼 굴었다. 정복해야 할 땅이 있는 노르만족 뱃사람의 거친 피라도 물려받은 듯 출격을 앞두고 흥분에 들떴다.
단테는 집무실 바깥으로 흘러나오는 장 회장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우주선 안을 이리저리 살피고 다녔다. 수명호 안은 겉보기보다 꽤 넓어서 단테가 한참 살펴보고 다녔는데도 아직 보지 못한 곳들이 많았다. 수송 창고 문도 잠겨 있었다.
“여기는 잠그지 않아야 필요할 때 물품 꺼내 쓸 수 있는 거 아냐?”
단테가 혼잣말을 하며 문손잡이를 잡고 흔들 때였다.
“네 자리에 가만히 좀 있지 그래?”
쿤 실장이 무언가를 들고 집무실로 가다 돌아보고 있었다. 단테는 어깨를 으쓱했다. 외모가 어린 소년이라고 대뜸 얕잡아보는 말투였다. 로봇으로서의 특질을 말하자면 둘이 다를 바가 없었다. 아니 오히려 모든 면에서 최신형인 단테가 월등했다. 무엇보다 단테는 그런 무례한 말들에는 그냥 넘어가지 않도록 감성 설계된 로봇이었다.
“더 부지런히 살펴보고 다닐 참인데?”
단테가 말했을 때는 쿤 실장은 벌써 집무실 안으로 들어가고 없었다. 어디서 킥킥 웃음소리가 들렸다. 한 무리의 아이 로봇들이었다. 그중 하나가 알은체를 했다.
“너, 단테? 드림 차일즈의 아이돌! 소문 들었다.”
들었다는 소문이 뭔지, 뚱딴지같은 아이돌 소리에 단테는 고개를 갸웃했다. 옆에 있던 다른 아이 로봇이 말을 보탰다.
“반가워서 그래, 단테. 인사해. 우리 친구다. 난 노아.”
다른 아이 로봇들도 제 이름들을 말해 주었다. 레이, 하치, 미란다. 단테는 이름을 입속으로 따라 말하며 중얼거렸다.
“친구라는 말 나쁘지 않네.”
단테가 사람들의 필요에 의해 소년형으로 만들어졌듯이 아이 로봇들도 소년형 소녀형 모습을 하고 있었다. 굳이 그렇게 한 이유가 나름 있을 터였다. 단테로서는 어떻든 친구로 지낼 로봇들이 있다는 게 다행스러웠다. 긴 항해가 덜 무료할 테니까.
집무실에서 장 회장의 우렁찬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제 시간이 되었다. 닻을 올려라! 선원들이여. 힘차게 노를 저어라! 가자! 저 창대한 우주 바다로!”
단테는 어이없는 웃음을 지었다. 아이보다도 더 들뜨고 흥분해 있는 저 노인이 정말 대 수명그룹의 전설적 창업주 장수명 회장이란 말인가. 무엇이 저렇게 장 회장을 달뜨게 만드는 걸까.
“재미있는 할아버지셔.”
아이 로봇들도 즐거워하며 제자리로 돌아갔다. 수명호는 곧 발사 직전 상태에 들어갔다. 단테도 교육받은 대로 선실 지정석에 얌전히 가서 앉았다. 조종실의 발사 준비 상황이 선실 벽면 스크린에 커다랗게 떴다. 발사 사인이 떨어졌다.
9, 8, 7, 6, 5, 4, 3, 2, 1, 0!
우주선 수명호는 순식간에 대기를 뚫고 날아올라 캄캄한 우주바다로 뛰어들었다. 우주여행 시대를 열어 갈 선발대의 멀고 긴 항해가 시작된 것이다.


장 회장은 집무실 밖으로 전혀 나오지 않았다. 출항 전 흥분해 소리치던 걸로 봐서는 우주선 조종실로 뛰어 들어가 직접 키를 잡겠다고 법석을 피울 것 같은데 의외로 잠잠했다. 해적선 선장이라도 된 듯이 수명호 탑승 로봇들을 거칠게 몰아치나 했는데 걱정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모든 게 우주선 일반 규칙과 기준대로 로봇들에 의해 그저 차분히 진행되었다.
단테는 문득 장 회장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군. 뭔지 알겠어.”
단테는 생명이 있는 존재들만이 느낀다는 고독이라는 감정을 떠올렸다. 그건 다시 두려움과 외로움이라는 감정으로 번져 나간다고 배웠다. 서진과 마윤이 혼자라고 생각하지 말라고 한 것도 그 때문일 거였다.
수명호 안에 생명이 있는 존재는 장수명 회장 하나뿐이었다. 오직 장 회장 한 사람만이 살아 숨 쉬고 언젠가는 그 숨을 멈출 살아 있는 생명체였다. 나머지는 모두 로봇이었다. 먹고 씻고 배설할 필요가 없으므로 한없이 자유로울 수 있는 존재들. 태양 에너지면 족했다. 덕분에 수명호는 장 회장 한 사람분의 생존 필요품들만 챙기면 됐다. 이미 노인인 장 회장 한 사람을 위한 우주여행 식량과 물품들은 사실 아주 많지 않았다. 대신 그 자리를 로봇들이 채웠다. 쿤 실장과 수행원 로봇들, 무슨 역할을 해야 하는지 아직 전달받지 못한 아이 로봇들, 그리고 단테.
장 회장은 분명 그 로봇들 틈에서 자신만이 사람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고 절대 고독감에 빠져든 게 틀림없었다. 우주여행에 품었던 기대와 환상이 출항과 동시에 일순 사그라지면서 노인을 움츠러들게 했음에 분명했다. 어쩌면 자신의 치기와 낭만 기질을 자책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이럴 때 옆에 있어 달라고 나를 동행시켰군.”
단테는 혼잣말을 하며 집무실 문을 두드렸다. 쿤 실장이 내다보고 단테가 찾아온 뜻을 듣고 들어간 뒤 한참만에야 장 회장 목소리가 들렸다.
“들어오게.”
쿤 실장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집무실 안쪽에 있는 장 회장 침실용 방에서 뭔가 볼일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그 방은 쿤 실장 말고는 아무도 들어갈 수 없었다.
“할 말이 있다고?”
책상 의자에 깊숙이 몸을 묻고 앉아 있는 장 회장의 은발 위로 천장 조명이 부드럽게 떨어졌다. 자세 탓인지 눈 밑으로 그늘이 짙게 드리워졌다. 모습은 달라진 게 없는데 어딘가 지친 얼굴이었다. 단테는 이해한다는 뜻을 담아 장 회장을 지긋하게 바라봤다.
“혼자라고 생각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장 회장은 무슨 말인가 싶어 단테를 쳐다보았다.
“지금껏 어떤 인간도 홀로 이 길에 나서지 못했어요. 회장님의 결단과 선택에 단테는 박수를 보내요. 그러니 무사히 답사를 마치고 다시 지구로 돌아가는 날까지…….”
“그날은 오지 않아.”
장 회장이 단테의 말을 자르며 중얼거렸다.
“네? 그게 무슨…….”
어리둥절해서 되묻는 어린 소년 로봇을 장 회장은 한참 바라보았다.
“겉모습만 아이인 줄 알았더니 생각하는 것도 어리숙하군. 순진무구한 건가. 그래, 마음에 들어. 후후.”
단테는 장 회장의 말을 이해할 수 없어 고개를 자꾸만 갸웃거렸다.
“내보내게.”
장 회장이 피로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 소리를 듣고 안쪽 침실에서 쿤 실장이 나왔다. 단테는 밖으로 떠밀려 나오며 볼멘소리를 했다.
“얘기 좀 해봐요. 무슨 말씀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다고요.”
쿤 실장은 무슨 말을 할 듯 하다 그만두었다. 아이 로봇들이 있는 제작실 쪽에서 갑자기 소란한 소리가 들렸다.
“내가 본 거 진짜다!”
단테가 무슨 일인가 다가가 보려고 하자 수행원 로봇이 안에서 나오며 막아섰다. 제작실 안에서 시끄러운 소리를 내던 노아가 갑자기 잠잠해졌다. 다른 수행원 하나가 노아 센서버튼을 꺼버린 것이다. 노아가 제자리에 풀썩 주저앉자 수행원 둘이 양쪽에서 한 팔씩 붙들고 우주선 구석 어딘가로 데려가 버렸다. 다른 아이 로봇들은 더 말할 엄두를 못 내고 제자리에 앉아 하던 일을 계속했다. 단테는 너무 놀라 그 자리에 서서 꼼짝도 못 했다. 대체 무슨 영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다른 아이 로봇들에게라도 물어보고 싶었지만 제작실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수행원 로봇 하나가 지키고 있었다.
단테는 자정이 되기를 기다렸다. 항해가 장기화될 것에 대비해 일반 로봇들은 자정부터 여섯 시간 동안은 태양 에너지를 쓰지 않도록 제한해 두고 있었다. 단테는 비상 전력을 일부 쓸 수 있었다. 많은 비용을 들여 제작한 단테의 뇌 기능이 잦은 단절로 저하되지 않도록 회사에서 나름 제공해 준 보완장치인 셈이었다.
단테는 제작실 앞을 지키던 수행원 로봇이 자정이 되는 순간 잠들 듯 오프 되는 걸 보며 어둠을 헤치고 살금살금 다가갔다. 안으로 들어갔는데도 아무도 기척을 하지 않았다. 단테는 오프 되어 있는 아이 로봇들에게 제 전력을 조금씩 흘려보냈다.
“레이, 하치, 미란다…….”
단테는 최대한 소리를 죽여 아이 로봇들 이름을 불렀다. 아이들이 눈을 떴다. 단테는 다급하게 물었다.
“어떻게 된 거야? 대체 무슨 일이야?”
놀란 마음 그대로 말이 앞서 나갔지만 소리는 사실 거의 나지 않았다.
“노아가 이상한 걸 봤대. 장 회장 살아 있지 않은 것 같대.”
레이가 역시 거의 소리를 내지 않으며 말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우리 제작한 거 보여주러 노아 집무실 갔는데, 앉아 있던 장 회장 갑자기 사라졌대. 안쪽 침실에서 쿤 실장 말소리 들렸대. 회장님, 잠깐만 플러그 뽑겠습니다.”
“조금 있다 장 회장 나타났대. 노아 거기 있는 거 보고 나가라고 야단쳤대.”
“장 회장 실제 사람 아니다. 플러그 사람이야.”
“플러그 사람? 실제 사람 아니면?”
“아바타.”
“맙소사.”
단테는 저도 모르게 탄식을 내뱉었다. 그 생각을 왜 못 했을까. 노인이라기엔 아직 탄탄해 보이던 몸, 주름이 있지만 오히려 적당해서 보기 좋던 얼굴. 아무리 실제 나이를 정확히 모른다고는 해도 이 정도로 젊은 노인인 건 아무래도 이상했다.
또 집무실 책상 밖으로는 잘 안 움직이던 모습, 보통 사람이라면 이렇게 저렇게 바뀌기도 하는 헤어스타일이며 체형이 거의 변함없이 그대로이던 것……. 다시 생각해 보니 이상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장 회장은 그럼?”
“우리도 모른다. 우리에게 지금 시키는 이상한 일만 좀 안 했으면 좋겠다.”
“이상한 일이라니?”
레이가 방 한쪽으로 가 시스템 일부를 작동시켰다. 한쪽 벽이 스르르 열리는가 싶더니 수송 창고 안이 눈앞에 펼쳐졌다. 창고 안에는 웬 남자 인형들이 끝도 없이 줄을 지어 서 있었다. 인형들은 마치 누에고치처럼 무게가 전혀 안 느껴지는 가늘고 질긴 실로 만든 것들이었다.
“이게 뭐야?”
단테가 영문을 몰라 묻자 레이가 인형 하나를 집어 단테 앞에 들어 보여주었다.
“우리 이거 하루 종일 만든다.”
단테는 무심코 레이가 집어 준 인형을 똑바로 해 모습을 마주 봤다. 놀랍게도 인형은 단테의 얼굴을 닮았다. 레이가 곧 추측이 맞는다는 걸 말해 주었다.
“우리 닮았다. 인형들.”
“뭐?”
사실이었다. 조금씩 다른 듯해도 기본 꼴은 모두 단테와 아이 로봇들 얼굴을 닮았다. 하치와 미란다가 말을 덧붙였다.
“기계로 한꺼번에 만들 수 있지만, 정성 기울여야 한대서 하나씩 만들고 있다.”
“이 일 시키려고 우리 데려왔다. 하지만 그만 하고 싶다. 똑같은 인형 계속 만드는 거 너무 힘들다.”
아이 로봇들은 한꺼번에 말을 쏟아냈다. 단테는 이게 다 무슨 의미인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저 많은 인형들을 왜 만들게 하는 건지 알 수가 없군. 좀 더 생각해 보자. 오늘은 일단 이만 가볼게.”
단테는 조용히 아이 로봇들 있는 데서 빠져나와 자기 방으로 갔다. 머리가 뒤죽박죽된 느낌이었다. 아이 로봇들 방에서 본 남자 인형의 영상이 계속해서 단테의 머릿속을 휘젓고 다녔다. 인형들 얼굴이 어쩐지 다 자신을 닮아 단테는 잠자리에 든 뒤에도 단테들에게 쫓겨야 했다.


다음날 단테는 눈을 뜨자마자 장 회장 집무실로 가 문을 부술 듯 두드렸다. 쿤 실장이 찌푸린 얼굴로 문을 열기 바쁘게 단테는 안으로 들어갔다. 장 회장이 늘 앉아 있던 책상 의자는 비어 있었다.
“무슨 짓인가?”
쿤 실장이 거칠게 팔을 잡았지만 단테는 조용히 뿌리쳤다.
“만나게 해주세요. 안으로 들어가면 되나요?”
단테가 안쪽 침실로 들어갈 기세이자 쿤 실장이 황급히 소리쳤다.
“여기서 기다려!”
잠시 뒤 장 회장이 버릇처럼 은발을 한 손으로 쓸어올리며 안쪽에서 뚜벅뚜벅 걸어 나왔다. 여전히 탄탄한 몸, 보기 좋은 얼굴이었다. 꽤 근사한 초로의 남자 모습이지만 실은 상당히 늙은 노인의 아바타일 뿐이라고 생각하자 기이한 느낌이 들었다. 장 회장 아바타는 책상 의자로 가 앉으며 불쾌한 얼굴로 물었다.
“무슨 일이지?”
단테는 곧바로 질문을 던졌다.
“사실대로 말해 주세요. 당신은 살아 있나요?”
아바타는 단테를 쏘아보았다.
“웬 헛소리지? 밤사이 블랙홀에라도 빠졌다 나왔나?”
고딕식 집무실 뾰족 창문 밖으로 은하수가 가득히 흘러가고 있었다. 지구에서보다 한결 가까이에 있었다. 단테는 다시 질문을 던졌다.
“우리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거지요? 우주여행 답사 상황은 현재 순조로운 건가요?”
아바타는 대답할 필요가 없는 질문이라는 듯 고개만 살짝 주억거렸다. 단테는 아바타 머리 위를 비추는 천장 조명을 올려다보다 조도 자동조절 기능에 개입해 에러를 일으켰다. 한껏 뜨거워진 조명이 어느 순간 파열을 일으키며 먹통이 되자 그 아래 앉아 있던 아바타는 볼품없는 모습으로 찌그러져 버렸다.
단테는 그대로 지나쳐 안쪽 침실로 들어갔다. 쿤 실장이 놀라 다급하게 뒤따라 들어오려 했지만 단테는 얼른 문을 잠가버렸다. 돌아서서 눈을 든 단테 앞에 장 회장의 모습이 보였다. 장 회장은 화려하고 커다란 진공유리관 안에 창백한 모습으로 잠들어 있었다. 얼굴에 살이라고는 한 점도 남아 있지 않은 채 백 살은 일찌감치 넘었음직한 노쇠한 모습이었다. 얼굴도 목도 온통 주름으로 뒤덮이고 머리카락은 은발 몇 올뿐이었다. 그 위에 플러그로 이어지는 수많은 연결 줄 장치를 쓰고 있었다.
“대체 언제……?”
단테가 중얼거리자 뒤따라 이동해 온 장 회장 아바타가 옆에서 대답했다.
“남은 날이 더 없다는 걸 알고 수명호를 띄우기로 했지. 큰 재산을 주고 우주선과 너를 구입했고…….”
단테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죽음이 다가오자 우주여행을 떠난다? 값비싼 로봇을 데리고? 대체 왜? 그래서 해결되는 게 뭔데?
순간 머릿속에 이치에 닿는 다른 답이 떠올랐다.
“아! 영생기술이 발달한 행성을 찾아가려고 했군요? 나더러 그 길잡이를 하게 하고……. 어? 그러려면 동면 처리를 했어야죠. 얼마나 오래 걸릴지도 모르는데 이 상태로는.”
아바타가 하하하 웃었다. 숨을 거둔 실존인물 옆에서 그의 아바타가 웃는 모습은 몹시 기이했다.
“명민한 줄 알았더니 이렇게나 아둔하다니! 이거 실망스럽군. 아니면 나를 너무 착한 할아버지로 본 거냐? 하하하. 단테, 혹시 중국 고대 황제 진시황을 알고 있나?”
진시황? 단테는 재빨리 정보를 찾아냈다. 영생의 꿈을 꾼 황제. 불로불사, 늙지도 죽지도 않는 약초를 찾아오라고 머나먼 해동 땅으로 소년 소녀 오백 명을 보냈다는 전제군주.
단테는 문득 자신과 아이 로봇들이 혹시 바로 그 소년과 소녀들 역할인 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그렇다면 더더욱 단테의 짐작이 틀림없었다.
“거 봐요! 맞네. 우리 같은 아이 로봇들 태워서 영생약 구해 오라고 먼 우주로 보내고 있는 거네요.”
단테가 마구 중얼거리자 아바타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틀렸어. 진시황은 마흔일곱 살에 죽고 말았어. 영생은 헛된 꿈일 뿐이었지. 대신 다른 방법이 있었어. 그 모두를 데리고 저 세상으로 들어가는 거야. 그러면 거기에서도 그대로 계속 살 수 있단 말이지. 나중에 다시 태어날 때도 그대로 다 데리고 태어날 거라고 믿었고…….”
아바타는 이어서 말했다.
“나도 그 방법이 마음에 들었지.”
단테는 혼자 중얼거렸다.
“모두를 데리고 저 세상으로 간다……?”
단테는 헉 비명을 삼켰다.
“그런 걸 고대 사람들은 순장이라고 했단다, 얘야.”
단테는 고개를 저었다.
“고작 무덤에 끌고 들어가려고 그렇게 큰 값을 치르고 우리를 여기까지 데려왔다고?”
“고작이라니! 섭섭한 소리. 나는 눈 감은 뒤 혼자 있고 싶지 않았다. 너처럼 섬세하고 사랑스럽고 영특한 아이가 내 곁을 지켜준다면 죽음도 견딜 수 있을 것 같았다. 또한 내 무덤이 세상 그 누구 것보다도 근사하게 장식되기를 바랐다. 그런고로 너야말로 명실상부 내 무덤을 영생토록 빛내 줄 최고로 값비싼 순장품이지.”
단테는 뒷걸음질을 치다가 침실 문을 왈칵 열고 밖으로 뛰어나왔다. 믿기지가 않았다. 자신은 고작 값비싼 순장품일 뿐이었다. 영원히 죽지 않고 사자의 곁을 지켜야 하는…….
자신을 자랑스럽다고 하던 드림 차일즈 대표 테리 왕의 말은 분명한 진실이었다. 사람들과 교감하며 지성과 감성을 스스로 키워 가도록 설계했다는 서진과 마윤의 자부심 가득한 애정도 전혀 거짓이 아니었다. 그런 자신을 그저 말하는 인형 정도로 여기며 무덤 속에 지금 영원토록 같이 있자는 거다.
“아니, 나는 그러려고 세상에 나오지 않았어. 나는 그런 존재가 아니야. 내가 할 일은 여기에 있지 않아. 처음 내 자리로 돌아가겠어.”
뛰쳐나간 단테를 쿤 실장과 수행원 로봇들이 막아섰지만 단테는 거칠게 떠밀고 우주선 복도를 뛰어갔다. 단테는 아이 로봇들이 일하는 제작실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너희들 말이 맞았어! 장 회장은 살아 있는 사람이 아니야.”
아이 로봇들이 웅성거렸다.
“우리가 상대한 건 그냥 아바타일 뿐이었어. 이 무덤에서 나가야 해. 어서!”
아이 로봇들이 단테를 따라 제작실을 나왔다.
“노아! 노아도 데려가야 해.”
단테와 아이 로봇들은 노아가 갇힌 데를 찾아 우주선 안을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수행원들이 달려와 아이 로봇들을 붙잡으려고 했다. 단테는 급히 방향을 바꾸어 에너지 추진실로 달려갔다. 로봇들은 물론 우주선 동력이 모두 여기서 나오고 있었다. 단테는 재빨리 동력 공급 스위치를 눌러 껐다. 우주선이 급정거하는 바람에 반동 충격으로 모두들 몸이 튕겨 올랐다. 여기저기 쿵쾅 부딪히고는 바닥에 그대로 널브러져 버렸다. 로봇들은 그대로 동작을 멈춘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얼마쯤 시간이 지났을까. 의식이 깨어난 단테가 비척비척 몸을 일으켰다. 사용 권한이 주어져 있는 비상 전력도 이제 얼마 남아 있지 않았다. 서둘러야 했다. 단테는 보트실을 열어 비상 탈출 우주 보트 상태를 확인했다. 우주 보트를 작동시키려면 에너지 추진 장치를 다시 가동하지 않으면 안 된다.
단테는 쓰러져 있는 쿤 실장과 수행원 로봇들을 다시 돌아보았다. 단테는 다가가 그 로봇들의 머리에 장 회장이 쓰고 있던 장치와 연결된 센서 핀들을 하나씩 꽂아 주었다. 그리고 활성 데이터를 새로 입력했다. 손과 발들은 아이 로봇들이 만들다 만 누에고치 인형 실로 두텁게 감아 놓았다.
단테는 다시 에너지 추진실로 뛰어가 동력 공급 스위치를 작동시켰다. 우우웅 소리와 함께 우주선이 앞으로 다시 나아가기 시작했다.
“저 녀석을 잡아!”
쿤 실장 목소리가 우주선 안을 울렸다. 맨 먼저 깨어난 게 하필이면 쿤 실장이람. 단테는 구시렁거리며 아이 로봇들을 흔들어 깨웠다.
“일어나. 어서! 빨리 떠나자!”
쿤 실장과 수행원들 머릿속에서 장엄하고 웅혼한 음악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대서사시를 음악으로 만든 곡이었다. 단테가 새로 입력한 데이터가 활성화된 거였다. 음악은 센서 핀을 통해 영면에 든 장 회장과도 공유가 이뤄지고 있었다. 쿤 실장과 수행원 로봇들은 아름다운 음악소리에 경악하며 누에고치 실로 칭칭 휘감긴 손과 발을 벌레 털듯 털어내느라 어쩔 줄 몰라 했다.
레이, 하치, 미란다가 급히 우주선 안을 뒤져 갇혀 있던 노아를 찾아 데려왔다.
“이제 됐어. 가자.”
“그래, 가자.”
수명호의 우주 구명보트는 꽤 성능이 좋고 튼튼해서 단테와 아이 로봇들을 어디로든 안전하게 데려다줄 거다. 장 회장은 비록 가장 아끼는 값비싼 순장품을 잃겠지만, 아직 남은 순장품들도 많았다. 문이 열리지 않는 방들에는 단테와 아이 로봇들이 알지 못하는 갖가지 순장품들이 그득히 들어 있을 터였다. 그 순장품들에 둘러싸여, 꿈꾸었던 거대 무덤 속에서 자신의 아바타가 들려주는 거짓 전설을 끝없이 되풀이해 들을 수 있을 거다.
단테와 아이 로봇들은 모두 구명보트에 몸을 실었다.
“어디로 갈까?”
“어디든.”
우선은 태양 에너지를 듬뿍 공급받을 수 있는 우주정거장까지 날아가야 할 거다. 그다음에는 어느 행성으로든 가보는 거다. 지구에서는 서진과 마윤이 기다리겠다고 했다. 마윤의 어린 아픈 아들도 단테가 제 약을 구해오길 기다리겠다고 했다. 단테는 그 약속을 꼭 지키고 싶다.
단테가 할 일들도 기다리고 있을 거다. 드림 차일즈도 단테에게 무사귀환을 당부했다. 회사의 이름을 빛내 주길 바라며.
하지만 우선 먼저 할 게 있다. 그 때문에 좀 미뤄야 할 것 같다. 우주여행 답사가 이제 시작일 뿐이니까. 선발대답게 제대로 길을 찾고 돌아가도 늦지 않다.
“좋아. 그럼 우주바다로 다시 출발한다.”
“좋아!”
아이 로봇들이 사인을 주고받았다. 우주 보트가 우주선에서 떨어져 나왔다. 제 몸 일부를 떼어 떨쳐낸 거대 우주선은 무덤이면서 잉태의 껍질처럼도 보였다. 아바타는 아이들을 실은 보트가 미끄러져 떠나는 걸 장 회장 곁에 유령처럼 서서 마냥 멀거니 보고 있었다. 우주선은 영원히 잠든 주인과 언제까지고 곁에 있게 될 남은 종들을 싣고 우주의 심해 속으로 깊이깊이 떠내려갔다. (*)















작가소개 / 임어진

동화와 청소년 소설을 쓰는 작가이다. 다른 어떤 일도 이만큼 재미있진 않다. 사람을 좋아하고 숲도 좋아한다. 쓰고 싶은 이야기들이 밀려들면 이야기하고만 논다. 『델타의 아이들』, 『너를 초대해』, 『괜찮아신문이 왔어요』, 『아니야 고양이』, 『사라진 슬기와 꿀벌 도시』, 『영우의 비밀친구』, 『이야기 도둑』, 『또도령 업고 세 고개』, 『보리밭 두 동무』, 『이야기 하나 주면 안 잡아먹지』, 『사라진 악보』, 『오방색이 뭐예요?』, 『말과 글은 우리 얼굴이야』, 『가족입니까』(함께 씀), 『광장에 서다』(함께 씀) 등 여러 권을 썼다.


삽화가 소개 / 조경은

대학에서 시각디자인 전공. 미디어아티스트이자 감독.
영상, 디자인, 일러스트레이션, 인터렉티브 미디어를 만들고 있다.



《문장웹진 2018년 0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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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문제 없음 고비읍 오른쪽에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입을 틀어막고 참아 보려는 듯하지만, 결국은 끕끕 새어 나오는 소리. 내 바로 왼편에 앉은 아이는 흘러내리는 눈물을 손등으로 닦아내기 바빴다. 사방에서 훌쩍이는 소리가 들려온 건 무대 위의 한 남자애가 울기 시작하고서부터였다. “부족한 저에게 이렇게 많은 사랑을 주셔서 정말, 정말 감사드려요. 그 사랑 다 돌려드릴 수 있도록 더 노력할게요. 저를 사랑받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셔서 감사…….” 그 애는 울먹이느라 말을 다 끝내지 못했다. 누군가가 크게 그 애의 이름을 연호하자 팬들이 한목소리로 그 애의 이름을 외쳤다. “연홍아, 울지 마!” “연홍아, 사랑해! 더 많이 사랑할게!” “최연홍! 행복하자!” 반짝거리는 옷을 입고 예쁘게 화장을 하고 눈부신 조명을 받는 무대 위의 남자애를, 이미 많이 행복해 보이는 그 애를 팬들은 더 행복하게 만들어 주겠다고 했다. 나는 커다란 공연장 안을 둘러보았다. 2만 명이 앉아 있는 이 공연장 어딘가에 송리윤도 있었다. 다른 팬들처럼 송리윤도 그 애를 보고 울었을까. 더 사랑해 주겠다고 외쳤을까. 따로 연락도 한 적 없고, 밥 한 번 같이 먹은 적 없지만 그 애는 송리윤에게 사랑받았다. 아무 이유 없이. 아무 대가 없이. 세븐플래닛은 마지막 무대라면서 팬들에게 함께 부르자고 했다. 팬들은 노래 가사 전체를 다 알고 있는지 막힘없이 따라 불렀다. 3시간쯤 콘서트가 진행되는 동안 세븐플래닛이 불렀던 노래 대부분은 내가 전혀 알지 못하는 노래들이었다. 애초에 나는 세븐플래닛에 관심이 없었다. 멤버가 몇 명인지, 이름이 무엇인지도. 관심도 없는 세븐플래닛 콘서트 티켓을 산 건 오로지 송리윤 때문이었다. “여러분, 오늘 즐거웠나요?” “네!” “행복했나요?” “네!” “저희도 너무너무 즐겁고 행복했어요.” 멤버들은 돌아가면서 엔딩 멘트를 던졌다. 아까는 우느라 말을 끝까지 하지 못했던 최연홍이 이번에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세븐플래닛과 가디언이 함께한 지 벌써 5년이 됐어요. 이만하면 한 가족이나 다름없어요. 그러니까 우리 평생 서로 사랑하고 아껴 줘요. 알았죠?” 팬들은 큰 소리로 “네!” 하고 대답했다. 어딘가에서 송리윤도 같이 외치고 있을 것만 같았다. “뭐야? 할 말 있어?” 송리윤이 근처에서 쭈뼛대는 내게 물었다. “저기…….” “쉬는 시간 다 끝나 간다. 아까운 시간 잡아먹지 말고 빨리 좀 말해 줄래?” “나도 갔었어, 어제. 세븐플래닛 콘서트 말이야.” 혹시나 반가워해 주지 않을까 기대를 하고 송리윤의 얼굴을 흘끔 쳐다보았다. 하지만 송리윤의 표정은 변함없었다. 여느 때처럼

  • 관리자
  • 2022-10-01
너와 나의 알싸한 세계

너와 나의 알싸한 세계 백온유, 『페퍼민트』(창비, 2022) 김젬마 재난이 남긴 것들 백온유의 『페퍼민트』는 준비 없는 재난 앞에 닥친 기약 없는 기다림과 불투명해진 미래를 견디는 청소년들의 이야기를 그린다. 소설은 ‘프록시모 바이러스’ 후유증으로 식물인간이 된 엄마를 돌보는 ‘시안’과, 슈퍼 전파자라는 낙인으로 두려움과 불안함을 안고 사는 ‘해원’의 이야기가 교차된다. 전염병이 발생하기 전까지만 해도 시안과 해원은 가족처럼 가까운 사이였지만, 바이러스가 삶에 침투하자 이들의 평범한 일상과 관계에 균열이 생긴다. 식물인간이 된 엄마의 세계가 멈추고 자신의 미래까지 멈춰버린 시안은 돌봄 노동을 수행하느라 정작 자신의 세계여야 할 학교와는 단절된 삶을 살아간다. 그저 자신의 하루를 견디고 버티며 사는 것 외에는 그 어떤 희망이나 미래를 품을 수 없는 고단한 삶 속에 놓여 있는 시안의 일상은 위태롭고 무력할 뿐이다. 엄마가 깨어날 거라는 희망보다 엄마의 죽음을 기다리는 것에 익숙해진 것에 죄책감을 느끼고, 엄마를 누구보다 꼼꼼하고 세심하게 돌보지만 결국 모든 정성과 노력들이 물거품이 되는 순간들에 지쳐 있다. 한편 슈퍼 전파자라는 무차별 공격으로 인한 불안함에 시달린 나머지 자신의 이름을 ‘지원’으로 개명하고, 이사와 전학을 선택한 해원은 자신의 과거를 감추고 마치 바이러스가 자신의 삶에 없었던 것처럼 평범하게 살아간다. 가족만큼이나 끈끈했던 두 사람은 우연한 계기로 6년 만에 다시 만나게 되지만 이들의 공백은 쉽게 메워지지 않는다. 이 공백은 두 사람의 잃어버린 시간과 멀어진 마음의 거리만큼 복잡하고 난해한 감정들을 담고 있다. 그렇게 다시 만난 시안과 해원은 서로에게 불편함을 느낀다. 시안은 평범한 일상을 영위하는 해원을 보며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고 그동안 자신을 짓눌러 왔던 감정의 화살을 해원에게 돌린다. 해원은 유일하게 자신의 과거를 아는 시안의 등장이 당혹스럽기만 하고 지난 시간을 들추는 것 같아 불편하다. 희망 없는 현실을 견디고 있는 시안과 과거로부터 도망쳐 평범한 삶을 꿈꾸는 해원, 이 두 사람은 다시 연결될 수 있을까? 고여 있는 삶 재난을 준비할 시간도 없이 엄마와 이별을 한 시안은 식물을 돌보듯 엄마를 간병한다. 엄마의 존엄성을 지키는 것은 엄마가 썩지 않도록 기저귀를 자주 갈아 주는 것뿐이지만, 시안은 엄마의 미각을 깨우는 데 도움이 될까 싶어 엄마가 좋아하던 페퍼민트 차를 매일 우려 입에 적셔 준다. 시안은 매일 같이 차를 우리며 어린 시절을 회상할 뿐 아니라, 절망과 무력함으로 점철된 일상에 작은 희망을 품으며 나름의 의식을 행하고 있다. 엄마는 고여 있는 것 같다가도 우리 삶으로 자꾸 흘러넘친다. 우리는 이렇게 축축해지고 한번 젖으면 좀처럼 마르지 않는다. 우리는 햇볕과 바람을 제때 받지 못해서 냄새가 나고 곰팡이가 필 것이다. 우리는 썩을 것이다.(98쪽) 시안이 오랜 간병 경험으로 얻은 것은 자신을 바라보는 연민의 시

  • 관리자
  • 2022-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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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 청소년소설] 기존 〈글틴스페셜〉이 9월호부터 〈Part.g〉로 변경되었습니다. 〈Part.g〉는 청소년 대상의 성장소설은 물론 창작희곡과 그래픽노블까지 다양한 영역의 '작품'과 '리뷰'를 게재할 예정입니다. K-할머니의 이름은 유은실, 『순례 주택』(비룡소, 2021) 김젬마 불편한 것들에 대하여 동화나 청소년소설에서 노년 여성 캐릭터는 대개 죽음이라는 소재와 연관되거나 주인공에게 정서적인 위안을 주고 성장을 돕는 존재로 그려진다. 그들은 주로 돌봄 노동과 모성의 주체로 호명되다 보니 자신의 이름보다 누군가의 어머니 혹은 할머니로 불려 온 것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자신을 이런 방식으로 규정하는 호칭들에 매우 민감한 이가 있으니, 바로 『순례 주택』의 건물주 순례 씨다. 75세인 순례 씨는 어머니, 할머니, 사부인, 동거녀 등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타인과 가족 단위로 엮이는 호칭들을 불편해한다. 이러한 호칭들은 순례 씨의 다채로운 삶과 이력들을 괄호 칠 뿐 아니라 순례 씨의 바운더리를 침범하는 무례함을 담고 있다. 순례 씨는 사별한 남자친구의 손녀인 수림을 손녀가 아닌 최측근으로 호칭 정리하며 할머니와 손녀라는 전형적인 관계 방식에서 벗어난다. 그는 ‘순하고 예의바르다’의 순례(順禮)에서 남은 인생을 지구별을 여행하는 순례자의 마음으로 살기 위해 순례(巡禮)로 개명할 만큼 자신의 이름에 대한 애착과 소명을 가지고 있다. 누군가의 가족으로 소환될 뿐 정작 자신의 이름으로 불린 경험이 없는 ‘K-할머니’의 이름은 자신을 옭아매는 규범적인 호칭들을 하나씩 덜어내며 재정의 된다. 순례 씨는 호칭뿐만 아니라 물질과 돈을 필요 이상으로 소유하는 것에 대한 불편함 때문에 필요 이상의 것들을 덜어내는 미니멀 라이프를 지향한다. 이산화탄소를 마구 배출하는 인간들과 쓰고 남는 돈, 썩지 않는 쓰레기가 인생 최대의 고민인 그는 푸짐하고 손 큰 할머니의 밥상이 아닌 노동력을 최소한으로 하는 간단하고 소박한 밥상을 차린다. 순례 씨는 정직하게 땀 흘려서 노동하는 삶을 추구하며 세상과 물질에 욕심 없는 다소 초월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하지만, 사실 그 누구보다 자기만의 경계가 매우 뚜렷한 인물이다. “월세 밀리는 건 참아도, 분리배출 제대로 안 하는 건 못 참”(80쪽)을 만큼 그는 순례 주택의 생활 수칙에 있어서만큼은 엄격하고 단호하다. 이렇게 순례 주택 입주민들은 공용 생활 수칙과 자신의 바운더리를 지키며 사는 것을 중요시하고, 무엇보다 이들은 “자기 힘으로 살아 보려고 애쓰는 사람들”(53쪽)이라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다. 유은실의 『순례 주택』은 고정된 공간과 다양한 인물들의 대화를 중심으로 서사가 진행되며 기본적으로 순례 주택이라는 공동체의 복작거리는 삶을 그린다. 이는 사건이 인물과 장소의 활용도가 높고 이를 중심으로 사건이 전개되는 시트콤의 형식과 비슷하다. 『순례 주택』은 등장인물의 이름, 나이, 직업, 특징 등을 세세하게 묘사하며 이

  • 관리자
  • 2022-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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