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오늘의 그래픽노블 이야기 3〉 – 공동의 작업, 사이의 장르 - 이동은 ‧ 정이용의 작품 세계

  • 작성일 2021-09-01
  • 조회수 1,166

[리뷰 - 그래픽노블]

기존 〈글틴스페셜〉이 9월호부터 〈Part.g〉로 변경되었습니다. 〈Part.g〉는 청소년 대상의 성장소설은 물론 창작희곡과 그래픽노블까지 다양한 영역의 '작품'과 '리뷰'를 게재할 예정입니다.




〈오늘의 그래픽노블 이야기 3〉

공동의 작업, 사이의 장르 - 이동은 ‧ 정이용의 작품 세계


김유진




1. 글과 그림이 만나는 공동 작업


이동은과 정이용의 그래픽노블을 처음 접했을 때 두 작가의 역할 구분이 궁금했다. 그림책이든 그래픽노블이든 대개 글 작가와 그림 작가를 구분해 ‘모모 글, 모모 그림’으로 표기하지만 그들이 출간한 모든 책에는 그들의 이름만 명기되어 있기 때문이다. 책 날개에 적힌 작가 프로필을 꼼꼼히 읽고서야 이동은 작가가 글을, 정이용 작가가 그림을 담당하겠구나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최근작인 『진, 진』과 『토요일의 세계』에서는 둘의 프로필마저 구분하지 않고 하나로 쓴다. “주로 영화감독이자 시나리오 작가인 이동은이 글을 쓰고, 만화가이자 일러스트레이터인 정이용이 그림을 그린다”라고.)
글과 그림으로 각자의 역할을 분리해서 내세우지 않는 까닭은 아마도 그들의 실제 작업 과정이 단지 역할 분담에 그치지 않고 훨씬 더 긴밀한 공동 작업이기 때문일 거라고 예상했다. 이 글을 준비하며 인터뷰를 찾아보니 역시 그랬다.
《씨네 21》(2021.1.13) 인터뷰에 따르면 이들의 작업 과정은 이렇게 진행된다. 이동은이 완성한 시나리오를 한 번에 주면, 정이용이 그 원고를 피드백 하고, 그렇게 수정해서 완성한 원고로 함께 콘티 작업과 캐릭터 디자인을 한다고 한다. 이후 정이용이 매일 이메일로 원고를 보내고 서로 이야기를 나눈다고. 정말로 처음부터 끝까지 긴밀하고 탄탄한 공동 작업인 셈이다. 의견을 조율하는 좀 더 구체적인 방식에 대해서는 위 인터뷰를 직접 인용하는 게 나을 듯하다.


정이용
시나리오를 받아 작업하면서 디테일을 고치는 일이 꽤 있다. 내가 그림을 그릴 때 납득이 되어야 그릴 수 있어서 납득이 되지 않으면 이의를 제기하고 이동은 작가에게 설정을 바꾸자고 할 때도 있다. 편집적인 것을 바꿀 때는 이동은 작가에게 이야기한다.


이동은
정이용 작가가 시나리오를 읽고 나서 주로 의견을 주는 부분은 어떤 인물의 감정이 잘 이해가 되지 않거나 불친절하다는 식이다. 그런 질문은 영화 작업을 할 때 키 스태프나 배우들이 하는 질문과 비슷하니까 시나리오를 보완하거나 보완하기 싫으면 싸우거나 한다. 정이용 작가의 그림 해석에 생각이 다를 때도 있다. 〈환절기〉에서 용준과 수현 외모가 비슷하게 그려졌다. 영화는 단역이 잠깐만 나와도 구분이 되는데, 만화는 인물마다 그림체로 구분이 확실하면 좋겠다고 의견을 낸다.


- 〈씨네 21〉(2021.1.13) ‘만화 〈진, 진〉 펴낸 이동은· 정이용 - 감정을 절제하고 덜 보여주는 것이 더 어렵다’


첫 책 『환절기』의 공동 작업이 우연히 시작되었다 해도 2013년 출간부터 지금까지 이러한 방식의 공동 작업을 지속하며 장편 5권을 출간한 건 놀라운 일이다. 무엇보다 도무지 ‘수지’가 맞지 않는 일일 듯하다. 수많은 책들의 판매 부수와 인세를 계산해 보면 작가들이 한 권의 책에 들이는 시간과 노동은 최저 시급도 되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럼에도 이토록 품이 많이 드는 공동 작업을 지속할 수 있던 이유는 뭘까.
물론 이들의 그래픽노블은 영화로도 만들어지고, 영화의 사전 작업으로서의 의미나 필요도 있겠지만 그것만은 아닐 것 같다. 글과 그림이 만나고 조금씩 새롭게 변화하면서, 자신의 작업이면서도 자신만의 작업은 아닌 결과를 보는 특별한 기쁨 때문이 아닐지 생각해 본다. 똑같은 이야기를 한다 하더라도, 작품이 놓이고 수용되는 장에 있어서는 대중예술인 영화에 비해 그래픽노블, 책, 출판이라는 형식이 좀 더 작가 자신에게 가까운 작업으로 다가오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아무래도 이동은, 정이용 작가에게 그래픽노블은 영화의 사전 작업 내지 중간 단계 이상의 의미일 듯하다. 창작 단계상으로는 그래픽노블이 영화로 이어진다고 하더라도 그래픽노블을 창작하는 시간과 노동은 오직 그래픽노블만의 것이다. 늘 일정 정도의 완성도를 보여준 5권의 장편이 그 사실을 대변한다. 그들은 그래픽노블 작가이며, 품도 많이 들고 쉽지 않은 공동 작업으로 창작을 지속하고 있다.



2. 문학과 영화 사이의 그래픽노블


영화감독이자 시나리오 작가인 이동은은 201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나리오 부문에 ‘당부’가 당선된 이력이 있다. 시나리오 ‘당부’를 그래픽노블로 창작한 작품이 『당신의 부탁』(이숲, 2015)이고, 이 작품이 바탕이 되어 동명의 영화가 만들어졌다.(이동은은 자신의 그래픽노블 『환절기』, 『당신의 부탁』, 『니나 내나』를 영화로 만들었다.) 당시 신춘문예 심사위원이었던 이유진 영화사 ‘집’ 대표와 이정향 영화감독은 심사평에서 “문장이 군더더기 없이 정갈하면서도 필요한 말은 다 전달하고 있는 느낌을 주”고 있다고 상찬한 바 있다. 심사평처럼 이동은의 문장은 재치 있고 간결하면서도 여운이 길다. 이러한 특징은 영화에서도 물론이지만 문자 언어에 좀 더 눈길이 머무를 수 있는 그래픽노블에서 더욱 돋보인다.
최근 출간된 청소년 성장 만화 단편선 『토요일의 세계』(라일라 외 공저, 창비, 2020) 수록작 「캠프」에서는 지금까지 장편들과는 다른 가볍고 발랄한 대사들이 우선 눈에 띈다. 여러 교회가 연합해 운영하는 하계 수련회에 참석한 고등학생 진석은 같은 방을 쓰게 된 유승과 이렇게 대화를 시작한다.


진석 : 완전 헬이야, 헬. 헬 캠프야. 갓 캠프가 아니라 갓 댐 캠프다.
몇 신지도 모르고, 여물 같은 밥이나 먹고… 이게 문명이냐? 원시인이지.
고인돌 원시인…
형제님은 어느 절에서 오셨어요?
유승 : 본동 제일교회
- 「캠프」, 57-58쪽.


문자 언어와 이미지 사이에서 발생하는 의미를 독자가 자신만의 호흡으로 읽어내는 그래픽노블이란 장르는 이동은의 문장과 정이용의 그림을 음미하기에 적절한 매체가 된다. 이들의 캐릭터들은 대개 말수가 적다. 또한 영화 시나리오를 염두에 두기 때문에 다른 그래픽노블과 달리 내레이션 없이 오직 인물의 대사로만 서사가 진행된다. 내레이션도 없이 말수가 적은 인물들로 서사를 이끌어 나갈 수 있는 힘은 함축적이고 다의적인 대사와, 이 대사들과 정교하게 배치되는 이미지에 있다. 이렇듯 글 작가와 그림 작가가 끊임없이 의견을 교환하면서 완성시킨 공동 작업의 결과물은 그들의 작품 세계를 더욱 특별하게 만든다.
인물들의 짧은 대사는 서사의 핵심을 밝히거나 암시하며 이야기를 진행시킨다. 『환절기』(이숲, 2013)에서 미경이 자신의 아들 수현과 친구 용준이 실은 오래 전부터 연인 관계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용준을 외면하다가 결국 받아들이게 되는 장면의 대화는 이렇다.


미경 : 언제부터야?
용준 : ?
미경 : 수현이랑.
어디가 좋았어?
용준 : 그게… 사실 수현이가 먼저…


미경은 수현과 용준의 자동차 사고 이후 우연히 용준의 카메라에서 둘의 사진을 보고, 그간 아들처럼 살갑게 대하던 용준에게 돌연 절연을 선언한다. 독자들은 그 이유를 궁금해 하다 용준이 직장 상사에게 사귀는 사람이 병원에 있다고 말하는 장면을 통해 용준과 수현의 관계를 명확히 알게 된다. 미경과 아울러 이제 독자까지 그들이 연인 관계임을 알게 된 후 남은 건 이제 그들의 관계가 미경과 용준 사이에서 어떻게 다루어질지 하는 것이다. 용준은 미경이 인지하고 있는 사실을 알게 될지, 용준과 미경의 유사모자 관계는 예전처럼 회복될 수 있을지 하는 점이다. 작품에서는 위의 인용 부분과 같은 미경의 짤막한 대사로 말문을 열고 화해의 장면을 만들어낸다.
대개의 그래픽노블이나 특히 웹툰 연재 후 책으로 출간된 그래픽노블은 하나의 컷에 머무르게 하는 여운을 그리 많이 만들어내지 않는 편이다. 이 여운의 길이는 문학 작품은 물론이고 영화와 비교해 봐도 그렇다. 그래픽노블의 호흡은 소설이나 영화보다 빠르다. 독자 개인의 감상을 열어 두고 기다리기보다는 독자에게 많은 양의 정보나 서사의 전개를 전달하는 게 우선으로 보일 때가 많다. 전체 서사의 복선이나 암시를 말하는 장면은 물론 있지만 장면 하나에 담긴 다의성에 좀 더 눈길을 오래 두게 되는 경험은 드물다. 그런 점에서 이동은과 정이용의 그래픽노블은 장르 형식으로서 뿐만 아니라 감상 형태에 있어서도 문학과 영화 사이에 있는 듯 보인다.
다른 작품에서도 이러한 특징은 계속 찾아볼 수 있다. 최신작 『진, 진』(창비, 2020)에서 남편과 사별하고 언니와 식당 일을 하는 50대 여성 수진은 갑작스런 임신에 당황해한다. 식당에서 맴도는 길고양이에게 밥을 주는 수진에게 언니는 밑도 끝도 없이 “임신이네”라고 말한다. 자신의 임신 사실을 혼자 고민하던 수진은 이 말을 듣고 깜짝 놀라지만 언니의 대사는 “고양이. 아무래도 젖도 불고 맞는 것 같아”(62쪽)라고 이어진다. 맥락도 없이 대뜸 던져지는 “임신이네”라는 대사는 이처럼 주인공의 심리와 상황을 집중적으로 환기시키는 장치가 된다.
동상이몽의 대사가 만들어내는 극적 효과는 수진의 아들 성민이 결혼을 허락받기 위해 여자친구 지원을 소개시키는 자리에서도 반복된다. 일찍 결혼하려는 성민이 마뜩찮은 수진은 식사 자리에서 시선을 내린 채 무심히 “얼마나 됐어요?” 하고 묻는다. 시선을 내린 수진은 보지 못했지만 독자들은 수진의 질문에 성민과 지원이 진땀을 흘리는 장면을 마주한다. 지원이 당황하며 “네…?” 하고 반문하자 성민이 “아아, 우리 한 일 년 됐나?” 하고 서둘러 대답하는 장면(148쪽)에서 독자들은 이들이 서둘러 결혼하려는 이유가 임신이라는 사실을 예상하게 되고, 이 사실은 이후 서사에서 확인된다.
이동은과 정이용의 그래픽노블에서 내향적인 인물들이 무심하고 짤막하게 내뱉는 대사들은 위의 사례들처럼 독자는 알고, 등장인물은 모르는 사실들을 환기시키는 장치로 기능하면서 서사의 긴장감을 유지시킨다. 앞서 살펴보았듯 『환절기』의 동성애, 『진, 진』의 임신 등 그 사실은 인물의 내면이나 인물 간의 갈등을 불러일으키는 서사의 핵심이다. 『니나 내나』(애니북스, 2016)에서 재윤의 성 정체성 또한 독자들은 알고, 등장인물은 모르는 사실로 제시된다. 미정, 경환, 재윤 삼남매와 미정의 고등학생 딸 규림은 수십 년 전 집을 나간 엄마가 위독하다는 엽서를 받고 부산에서 파주까지 엄마를 찾아가는 와중에 차 안에서 이런저런 대화를 나눈다.


미정 : 그래서 닌 진짜 사람 없나?
재윤 : 난 결혼 안 한다니까.
미정 : 니 어서 장가가 잘사는 걸 봐야 내가 두 다리 뻗고 잠을 잘 긴데.
재윤 : 사는 거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오십니까? 아버지는, 자긴 또 어떻고?
미정 : 왜, 경환이는 그래도 잘살고 있잖아.
규림 : 내가 볼 때 삼촌은…
미정 : 뭐?
규림 : … 아이다
미정 : 뭐가 아닌데?
(규림을 향해 - 필자 주) 너거 학교에 좋은 선생 없나. 학교에 여자 샘들 많잖아.
규림 : 삼촌은 싫어할 것 같은데…?
- 『니나 내나』, 134-135쪽.


조카 규림은 눈치 챘지만 누나 미정은 알지 못하는 재윤의 성 정체성은 두 가지 측면에서 이후 서사 전개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첫 번째는 재윤이 가족 안에서 더 이상 자신을 숨길 필요가 없어지게 되는 것이고, 두 번째는 다른 가족들 역시 재윤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삶을 수용하게 되는 것이다. 재윤의 형 경환은 커밍아웃한 재윤에게 “왜 굳이 말했는데? 안 해도 상관없잖아”(206쪽)라고 묻는다. 재윤은 “속이고 살기 싫었다, 나는 나라는 인간 자체가 거짓말 같다, 가만히 있어도 거짓말하는 그런 느낌, 속이는 게 더 피곤하다, 진짜가 아니니까”(207쪽)라고 대답한다. 한편 억지로 내림굿을 받기 위해 애쓰던 미정은 ‘신의 뜻’은커녕 동생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이 되고, “자신한테 도망치려 하는 거”라는 재윤의 말을 새기게 된다. 이렇듯 재윤의 성 정체성과 커밍아웃이 중요한 기점이 되는 서사 전개에 있어 인용 부분의 암시는 독자들에게 서사의 재미를 더한다.



3. ‘공동’과 ‘사이’로 이야기하는 것 - 가족 그리고 소수자


정밀하게 진행되는 글과 그림의 공동 작업이 그래픽노블의 완성도를 높일 뿐 아니라 문학이나 영화와 유사한 집중과 여운을 남기는 고유의 스타일을 창작해 낸 것, 이것이 이동은과 정이용 그래픽노블의 특징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그러한 창작 과정과 스타일을 통해 이야기되는 세계는 무엇인가.
이들의 작품에는 가족 내지 유사가족이 중요하게 등장한다. 그런데 작품에 등장하는 가족 중에 ‘정상가족’ 이데올로기에 갇혀 있는 가족 형태는 없다. 『환절기』의 수현 아버지는 외국에서 생활하며 가족과 남남처럼 지내다 수현 어머니에게 이혼 요구를 받고 곧 이혼한다. 『당신의 부탁』의 효진과 『진, 진』의 수진은 남편과 사별했다. 부모의 이혼이나 죽음으로 등장인물들은 청소년기부터 편부 혹은 편모 가정에서 지낸다. 『환절기』의 용준과 수현, 『당신의 부탁』의 종욱, 『진, 진』의 성민, 진아와 현아, 『니나 내나』의 미정, 경환, 재윤과 미정의 딸 규림까지, 이들은 결코 가족 안에서 행복감이나 안온함을 느끼지 못한 채 외로워하는 존재들이다.
하지만 이들이 자신의 삶을 수용하고 새 발걸음을 한 발짝 내딛는 계기 역시 가족이다. 『환절기』에서 미경은 결국 아들 수현의 연인이었던 용준을 아들처럼 받아들인다. 『당신의 부탁』의 효진은 사별한 남편이 전처와의 사이에서 낳은 종욱의 보호자가 된다. 『니나 내나』의 미정, 경환, 재윤 삼남매는 수십 년 전 다른 남자와 떠나버린 엄마를, 엄마의 죽음을 계기로 돌아보며 가족 사이에서 벌어진 아픔을 치유한다. 『환절기』와 『당신의 부탁』은 유사가족이나 새로운 가족의 탄생으로, 『니나 내나』는 가족 간 화해로 이야기가 마무리되는 것이다.
그런데 『환절기』와 『당신의 부탁』에서 유사가족 내지 새로운 가족의 탄생은 아들들의 소망이자 삶의 전환이지 어머니가 되는 여성들의 욕망인지는 의문스럽다. 『환절기』와 『당신의 부탁』 모두 작품의 초점화자는 미경과 효진이다. 그럼에도 아들의 어머니가 되는 서사의 완성이 이들의 욕망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환절기』에서 미경이 용준을 유사아들로 받아들이는 과정은 성 정체성에 대한 편견을 허물고 아들의 동성 연인을 수용하는 윤리적 결단과 중첩된다. 과연 미경에게는 유사어머니가 되는 인간적 행위와 동성애 혐오를 극복하는 윤리적 행동 중 무엇이 중요했을까. 두 가지 결단 중 무엇이 무엇을 이끌었을까. 식물인간이던 수현이 병상에서 일어나 건강을 회복한 이후 수현과 용준이 예전처럼 열렬한 연인 관계가 아니라는 결말은 더욱 이 서사가 미경이 아닌 용준의 욕망처럼 보이게 한다. 용준이 계속 미경의 유사아들로 남아 있기 위해서는 자신의 성적 정체성을 인정받되 더 이상 수현의 연인일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당신의 부탁』의 효진이 종욱을 아들로 받아들이는 과정 역시 효진의 욕망으로 보이지 않는다. 효진의 친구 미란은 종욱의 보호자가 되는 결정을 고민하는 효진에게 “법적으로만 따지자면 걔랑 아주 남남은 아니지. 맞아, 누가 걜 책임져야 하냐고 물으면 네가 될 수도 있어. 하지만 현실적으로 봤을 때 키우지 말아야 할 사람을 꼽자면 그것 역시 너야.”(76쪽)라며 현실을 일깨우는 지극히 온당한 충고를 한다. 그런데 효진은 이 말을, 자신이 아빠인지 확실하지도 않은 상황에서 십대 미혼모인 친구의 아이를 낳고 키우려는 종욱에게 똑같이 되풀이한다. “그래, 물론 누가 책임져야 한다고 물으면 네가 맞을 수도 있어. 하지만 현실적으로 봤을 때 키우지 말아야 할 사람이 누군가 따져 보면 그것 역시 너희들이야.”(264쪽) 효진은 자신이 종욱을 맡는 일은 종욱이 아기를 맡겠다고 하는 것만큼이나 합리적이지 않다고 여기면서도 이를 받아들인다. 종욱이 미혼모인 친구에게 아기를 입양시키지 말라고 화를 내며 직접 키우라고 억지를 쓰는 일이나, 어린 시절 잠시 키워 준 계모를 찾으려고 헤매는 행동 모두 엄마를 애타게 찾는 종욱의 욕망이다. 하지만 효진은 종욱의 욕망을 충족시켜주는데 충실하다. 거기에 효진의 욕망은 보이지 않는다.
이에 비해 최신작 『진, 진』은 모두 여성 인물의 욕망을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시선의 전환을 보인다. 『환절기』와 『당신의 부탁』에서 초점화자였음에도 결코 주체적인 인물이 되지 못한 여성 인물들은 『진, 진』에서 비로소 주체성을 획득한다. 중년 여성 수진은 오랜 기간 홀로 키운 아들 성민도 결혼으로 떠나보내고, 잠시 만나던 남자와도 결연히 헤어지며 “내 인생만 생각”(185쪽)하며 자신의 삶을 찾아 전진해 나간다. 청년 여성 진아 또한 아버지의 죽음을 법적으로 마무리하고, 청소와 대리운전 기사로 밤낮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생활 가운데서도 동생 현아와의 미래를 희망한다.
수진과 진아는 모두 홀로 자녀나 동생을 돌보아 온 여성들로, 작품 곳곳에는 이외에도 여성 연대의 광경을 만날 수 있다. 여성 전용 고시원에서 관리자와 이용자가 고단한 서로의 생활에 관심을 두는 장면이나, 밤늦게 대리운전 기사 일을 마친 진아가 서울로 들어가는 수진 자매의 차를 얻어 타며 나누는 대화들이 그러하다. 『진, 진』은 수진과 진아, 두 여성 주인공의 이름에서 비롯된 제목인데 이들은 한밤중 차 안에서 잠시 만났을 뿐이지만 모든 여성들의 삶에서 계속 함께할 수 있을 듯하다. 수진이 임신한 상태로 결혼하는 성민의 여자친구 지원에게 “성민이 엄마로서 하는 말이 아니라 여자로서 하는 말”이라고 이야기하는 장면 또한 그렇다. “막상 닥치면 내 의지가 아니라 어디 끌려가는 것처럼 하게 되는 게 있더라고요. 결혼도, 임신도… 그래서 내 마음이 어떤지는 살피지 못했던 것 같아요” “그러니까 책임감 때문에 하는 거면 꼭 한 번 다시 생각해 봐요”(184쪽)라며 오직 자기 자신에게 집중하며 결혼을 신중히 선택하라고 말하는 장면 또한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을 공유하는 장면으로 보인다.
『진, 진』에서 가족과 여성 인물에 대한 시선이 변화할 수 있던 까닭은 이동은과 정이용의 첫 작품인 『환절기』부터 줄곧 소수자에 대한 감수성을 견지했기 때문으로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앞서 살폈듯 『환절기』의 용준과 『니나 내나』의 재윤이 지닌 성 소수자로서의 정체성은 서사와 캐릭터의 중심 요소다. 지금까지 언급한 작품들과 전혀 다른 분위기로, SF 설정인 『yoyo』에서도 주인공 여자와 남자가 만나는 카페에는 성 소수자 커플이 매번 등장한다. 이들의 작품에서 성 소수자는 이성애자만큼이나 가시화된 존재로 재현되며 긍정되었다. 『토요일의 세계』에 수록된 단편 「캠프」의 고등학생 주인공 진석 역시 성 소수자로, 진석이 교회 캠프에 억지로 입소하게 된 이유는 자신의 성적 지향을 종교의 힘으로 교정하려는 가족들의 압박 때문이었다. 같은 방을 쓰는 유승이 진석의 목 뒤에 있는 점을 두고 “너만의 꼬리 같은 거, 너만의 표식, 마크”(72쪽)라고 말하는 장면은 곧 진석의 성 정체성을 긍정하는 것이다.
이동은과 정이용의 그래픽노블은 『환절기』에서 성 소수자의 가족 되기에서 시작해, 『당신의 부탁』에서 아들의 어머니 찾기를 거쳐, 『니나 내나』에서 가족 간 화해로 이어지다, 『진, 진』에 이른다. 작품 발간 시기 순서로 볼 때 『진, 진』은 작품 세계의 뚜렷한 변곡점으로 보인다. 이 변곡점이 앞으로 어떤 공동 작업을 통해 그래픽노블과 영화로 이어지며 새로운 곡선을 그려 나갈지 궁금해진다.













김유진
작가소개 / 김유진

아동청소년문학평론가·동시인.
평론집 『언젠가는 어린이가 되겠지』, 동시집 『나는 보라』, 『뽀뽀의 힘』, 청소년 시집 『그때부터 사랑』, 그림책 『오늘아, 안녕』 등을 냈다. 대학과 여러 기관에서 아동문학, 동시, 글쓰기, 젠더 주제의 강의를 한다.


《문장웹진 2021년 9월호》


추천 콘텐츠

아무 문제 없음

아무 문제 없음 고비읍 오른쪽에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입을 틀어막고 참아 보려는 듯하지만, 결국은 끕끕 새어 나오는 소리. 내 바로 왼편에 앉은 아이는 흘러내리는 눈물을 손등으로 닦아내기 바빴다. 사방에서 훌쩍이는 소리가 들려온 건 무대 위의 한 남자애가 울기 시작하고서부터였다. “부족한 저에게 이렇게 많은 사랑을 주셔서 정말, 정말 감사드려요. 그 사랑 다 돌려드릴 수 있도록 더 노력할게요. 저를 사랑받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셔서 감사…….” 그 애는 울먹이느라 말을 다 끝내지 못했다. 누군가가 크게 그 애의 이름을 연호하자 팬들이 한목소리로 그 애의 이름을 외쳤다. “연홍아, 울지 마!” “연홍아, 사랑해! 더 많이 사랑할게!” “최연홍! 행복하자!” 반짝거리는 옷을 입고 예쁘게 화장을 하고 눈부신 조명을 받는 무대 위의 남자애를, 이미 많이 행복해 보이는 그 애를 팬들은 더 행복하게 만들어 주겠다고 했다. 나는 커다란 공연장 안을 둘러보았다. 2만 명이 앉아 있는 이 공연장 어딘가에 송리윤도 있었다. 다른 팬들처럼 송리윤도 그 애를 보고 울었을까. 더 사랑해 주겠다고 외쳤을까. 따로 연락도 한 적 없고, 밥 한 번 같이 먹은 적 없지만 그 애는 송리윤에게 사랑받았다. 아무 이유 없이. 아무 대가 없이. 세븐플래닛은 마지막 무대라면서 팬들에게 함께 부르자고 했다. 팬들은 노래 가사 전체를 다 알고 있는지 막힘없이 따라 불렀다. 3시간쯤 콘서트가 진행되는 동안 세븐플래닛이 불렀던 노래 대부분은 내가 전혀 알지 못하는 노래들이었다. 애초에 나는 세븐플래닛에 관심이 없었다. 멤버가 몇 명인지, 이름이 무엇인지도. 관심도 없는 세븐플래닛 콘서트 티켓을 산 건 오로지 송리윤 때문이었다. “여러분, 오늘 즐거웠나요?” “네!” “행복했나요?” “네!” “저희도 너무너무 즐겁고 행복했어요.” 멤버들은 돌아가면서 엔딩 멘트를 던졌다. 아까는 우느라 말을 끝까지 하지 못했던 최연홍이 이번에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세븐플래닛과 가디언이 함께한 지 벌써 5년이 됐어요. 이만하면 한 가족이나 다름없어요. 그러니까 우리 평생 서로 사랑하고 아껴 줘요. 알았죠?” 팬들은 큰 소리로 “네!” 하고 대답했다. 어딘가에서 송리윤도 같이 외치고 있을 것만 같았다. “뭐야? 할 말 있어?” 송리윤이 근처에서 쭈뼛대는 내게 물었다. “저기…….” “쉬는 시간 다 끝나 간다. 아까운 시간 잡아먹지 말고 빨리 좀 말해 줄래?” “나도 갔었어, 어제. 세븐플래닛 콘서트 말이야.” 혹시나 반가워해 주지 않을까 기대를 하고 송리윤의 얼굴을 흘끔 쳐다보았다. 하지만 송리윤의 표정은 변함없었다. 여느 때처럼

  • 관리자
  • 2022-10-01
너와 나의 알싸한 세계

너와 나의 알싸한 세계 백온유, 『페퍼민트』(창비, 2022) 김젬마 재난이 남긴 것들 백온유의 『페퍼민트』는 준비 없는 재난 앞에 닥친 기약 없는 기다림과 불투명해진 미래를 견디는 청소년들의 이야기를 그린다. 소설은 ‘프록시모 바이러스’ 후유증으로 식물인간이 된 엄마를 돌보는 ‘시안’과, 슈퍼 전파자라는 낙인으로 두려움과 불안함을 안고 사는 ‘해원’의 이야기가 교차된다. 전염병이 발생하기 전까지만 해도 시안과 해원은 가족처럼 가까운 사이였지만, 바이러스가 삶에 침투하자 이들의 평범한 일상과 관계에 균열이 생긴다. 식물인간이 된 엄마의 세계가 멈추고 자신의 미래까지 멈춰버린 시안은 돌봄 노동을 수행하느라 정작 자신의 세계여야 할 학교와는 단절된 삶을 살아간다. 그저 자신의 하루를 견디고 버티며 사는 것 외에는 그 어떤 희망이나 미래를 품을 수 없는 고단한 삶 속에 놓여 있는 시안의 일상은 위태롭고 무력할 뿐이다. 엄마가 깨어날 거라는 희망보다 엄마의 죽음을 기다리는 것에 익숙해진 것에 죄책감을 느끼고, 엄마를 누구보다 꼼꼼하고 세심하게 돌보지만 결국 모든 정성과 노력들이 물거품이 되는 순간들에 지쳐 있다. 한편 슈퍼 전파자라는 무차별 공격으로 인한 불안함에 시달린 나머지 자신의 이름을 ‘지원’으로 개명하고, 이사와 전학을 선택한 해원은 자신의 과거를 감추고 마치 바이러스가 자신의 삶에 없었던 것처럼 평범하게 살아간다. 가족만큼이나 끈끈했던 두 사람은 우연한 계기로 6년 만에 다시 만나게 되지만 이들의 공백은 쉽게 메워지지 않는다. 이 공백은 두 사람의 잃어버린 시간과 멀어진 마음의 거리만큼 복잡하고 난해한 감정들을 담고 있다. 그렇게 다시 만난 시안과 해원은 서로에게 불편함을 느낀다. 시안은 평범한 일상을 영위하는 해원을 보며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고 그동안 자신을 짓눌러 왔던 감정의 화살을 해원에게 돌린다. 해원은 유일하게 자신의 과거를 아는 시안의 등장이 당혹스럽기만 하고 지난 시간을 들추는 것 같아 불편하다. 희망 없는 현실을 견디고 있는 시안과 과거로부터 도망쳐 평범한 삶을 꿈꾸는 해원, 이 두 사람은 다시 연결될 수 있을까? 고여 있는 삶 재난을 준비할 시간도 없이 엄마와 이별을 한 시안은 식물을 돌보듯 엄마를 간병한다. 엄마의 존엄성을 지키는 것은 엄마가 썩지 않도록 기저귀를 자주 갈아 주는 것뿐이지만, 시안은 엄마의 미각을 깨우는 데 도움이 될까 싶어 엄마가 좋아하던 페퍼민트 차를 매일 우려 입에 적셔 준다. 시안은 매일 같이 차를 우리며 어린 시절을 회상할 뿐 아니라, 절망과 무력함으로 점철된 일상에 작은 희망을 품으며 나름의 의식을 행하고 있다. 엄마는 고여 있는 것 같다가도 우리 삶으로 자꾸 흘러넘친다. 우리는 이렇게 축축해지고 한번 젖으면 좀처럼 마르지 않는다. 우리는 햇볕과 바람을 제때 받지 못해서 냄새가 나고 곰팡이가 필 것이다. 우리는 썩을 것이다.(98쪽) 시안이 오랜 간병 경험으로 얻은 것은 자신을 바라보는 연민의 시

  • 관리자
  • 2022-10-01
K-할머니의 이름은

[리뷰 - 청소년소설] 기존 〈글틴스페셜〉이 9월호부터 〈Part.g〉로 변경되었습니다. 〈Part.g〉는 청소년 대상의 성장소설은 물론 창작희곡과 그래픽노블까지 다양한 영역의 '작품'과 '리뷰'를 게재할 예정입니다. K-할머니의 이름은 유은실, 『순례 주택』(비룡소, 2021) 김젬마 불편한 것들에 대하여 동화나 청소년소설에서 노년 여성 캐릭터는 대개 죽음이라는 소재와 연관되거나 주인공에게 정서적인 위안을 주고 성장을 돕는 존재로 그려진다. 그들은 주로 돌봄 노동과 모성의 주체로 호명되다 보니 자신의 이름보다 누군가의 어머니 혹은 할머니로 불려 온 것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자신을 이런 방식으로 규정하는 호칭들에 매우 민감한 이가 있으니, 바로 『순례 주택』의 건물주 순례 씨다. 75세인 순례 씨는 어머니, 할머니, 사부인, 동거녀 등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타인과 가족 단위로 엮이는 호칭들을 불편해한다. 이러한 호칭들은 순례 씨의 다채로운 삶과 이력들을 괄호 칠 뿐 아니라 순례 씨의 바운더리를 침범하는 무례함을 담고 있다. 순례 씨는 사별한 남자친구의 손녀인 수림을 손녀가 아닌 최측근으로 호칭 정리하며 할머니와 손녀라는 전형적인 관계 방식에서 벗어난다. 그는 ‘순하고 예의바르다’의 순례(順禮)에서 남은 인생을 지구별을 여행하는 순례자의 마음으로 살기 위해 순례(巡禮)로 개명할 만큼 자신의 이름에 대한 애착과 소명을 가지고 있다. 누군가의 가족으로 소환될 뿐 정작 자신의 이름으로 불린 경험이 없는 ‘K-할머니’의 이름은 자신을 옭아매는 규범적인 호칭들을 하나씩 덜어내며 재정의 된다. 순례 씨는 호칭뿐만 아니라 물질과 돈을 필요 이상으로 소유하는 것에 대한 불편함 때문에 필요 이상의 것들을 덜어내는 미니멀 라이프를 지향한다. 이산화탄소를 마구 배출하는 인간들과 쓰고 남는 돈, 썩지 않는 쓰레기가 인생 최대의 고민인 그는 푸짐하고 손 큰 할머니의 밥상이 아닌 노동력을 최소한으로 하는 간단하고 소박한 밥상을 차린다. 순례 씨는 정직하게 땀 흘려서 노동하는 삶을 추구하며 세상과 물질에 욕심 없는 다소 초월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하지만, 사실 그 누구보다 자기만의 경계가 매우 뚜렷한 인물이다. “월세 밀리는 건 참아도, 분리배출 제대로 안 하는 건 못 참”(80쪽)을 만큼 그는 순례 주택의 생활 수칙에 있어서만큼은 엄격하고 단호하다. 이렇게 순례 주택 입주민들은 공용 생활 수칙과 자신의 바운더리를 지키며 사는 것을 중요시하고, 무엇보다 이들은 “자기 힘으로 살아 보려고 애쓰는 사람들”(53쪽)이라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다. 유은실의 『순례 주택』은 고정된 공간과 다양한 인물들의 대화를 중심으로 서사가 진행되며 기본적으로 순례 주택이라는 공동체의 복작거리는 삶을 그린다. 이는 사건이 인물과 장소의 활용도가 높고 이를 중심으로 사건이 전개되는 시트콤의 형식과 비슷하다. 『순례 주택』은 등장인물의 이름, 나이, 직업, 특징 등을 세세하게 묘사하며 이

  • 관리자
  • 2022-09-01

댓글 남기기

로그인후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을 남겨 주세요!

댓글남기기 작성 가이드

  • 타인에게 불쾌감을 주는 욕설, 비방 등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주제와 관련 없거나 부적절한 홍보 내용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기타 운영 정책에 어긋나는 내용이 포함될 경우, 사전 고지 없이 노출 제한될 수 있습니다.
0 / 1500

댓글0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