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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을 그리며」외 6편

  • 작성일 2023-10-18
  • 조회수 1,604

별을 그리며

이기선


어릴 적 밤하늘은 5일장날 같았다

장터 복판길 같은 은하수 물길 따라

온 동네 별들이 나와

수다를 떨었다


밤새 반짝반짝 웃음꽃을 피우던 별들

어둠이 엷어지면 하나둘 집에 가고

해거름 시장통처럼                  

하늘이 비어갔다                 


아기 눈빛 같던 그 시절 뭇별들은 

땅에 떨어져서 도시의 밤을 수놓고

하늘엔 폐광촌 불빛 같은

별 몇 개만 서성일 뿐






딸 바보 아빠의 기도



야근하다 새벽에 온 딸이 벗어 논 구두 

흐트러진 두 짝을 가지런히 모아 놓으며 

우리 딸, 고운 짝 만나

알콩달콩 살라고


서둘러 출근하느라 어질러진 딸의 침대

베개며 이부자리 반듯하게 펴놓으며

우리 딸, 오늘 밤에도

고운 꿈을 꾸라고






눈 내리는 밤



쥐들도 살지 않는 고향 집 마당에는

어둠 한 켜 적막 한 켜 눈이 내려 쌓이고  

바람은 양철 차양에 앉아

시소 타고 있겠다


바람이 이따금씩 발을 구를 때마다

쌓였던 눈덩이는 절명하듯 떨어지고

눈가루, 썩은 마룻장에서

속울음을 울겠다


밤이 깊을수록 어둠은 희미하고 

잠이 엷을수록 옛일은 또렷한 데        

오늘 밤 내 꿈길에도      

함박눈이 내리리라  






양계장 닭의 독백



옛날 조상들은 바깥에서 살았다지

비 오면 나무 밑에서 서로 부둥켜안고

더러운 두엄을 헤치며

먹이를 찾았대


우리는 복 받은 거야, 주인을 잘 만났어

날씨를 걱정하나

먹을 걸 걱정하나

밤에는 불까지 켜주잖아

자지도 말고 먹으라고    






마스크 연가



앞에 오는 여인과 눈이 마주쳤다

철벽같은 마스크 위로 낯익은 고운 눈매

어디서 본 듯도 한데

누구더라 

누구더라


내 심장 박동 소리 행여나 들킬세라

숨조차 멈추고 그 눈만 바라보는데

여인도 내 시선을 맞춘 채

머뭇머뭇 지나갔다






잔설(殘雪)

-양로원 비가(悲歌)



암회색 세상에 축복처럼 내리던 눈

천지를 덮어주고 포근히 감쌌는데

길에서 질척거리자

천더기가 되었다


사람들은 눈을 쓸어 구석에다 버렸다

외지고 후미진 곳에 쌓여있는 눈더미

흙먼지 뒤집어쓴 채     

속울음을 울고 있다  






봄비



들릴 듯 말 듯이 이별을 이야기하던 

너의 목소리처럼 가녀린 떨림으로    

차가운 대지에 내렸다                 

내 마음을 적셨다                  


보이지 않는다고 없는 건 아니리라

깡마른 가지에서 새싹이 돋아나듯

가슴에 메말라 있던 

그리움도 싹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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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리자
  • 2023-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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