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자의 줄」외 6편
- 작성일 2024-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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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자의 줄
박소언
그리운 적막이 투명하게 걸려있다
마르지 못하는 목매단 모자 하나가
바지랑대를 하늘 높이 세우면 가장자리를 중심으로 두 줄이 생긴다
젖은 옷가지들과 모자가 걸린 문이었으므로
하늘이 내린 경계에서 하루의 동거가 바짝 말라간다
맨살을 비비적거리는 살갑던 허공을 헤아려본다
두들기던 얼룩이 서성대다, 발버둥 치다, 뜨거운 태양에 몸을 맡긴다.
자리매김한 여분도 없이 넘나들다, 휘날리다, 사지가 갈리면
문을 닫고 눈을 감고 싶다
두 개의 집게에 물려 벼랑에 설 때마다
하늘과 땅 사이를 맥없이 자맥질하는
무지개를 동반한 비바람의 날들이 가까스로 씻겨나간다
바람 너머 저 홑청 속으로 얼비치는 아홉 살 여자아이가
고사리 같은 손등에 밥물을 잡는다
뒷산에 해가 걸리면, 아궁이에 군불을 지핀다
매운 눈을 비비며, 육자배기 노랫가락에 아들 타령 늘어진 아버지가
”아~ 신라의 밤이여”
털레털레 삽짝 문을 열고 갈지자로 휘청거린다
“아버지 내가 커서 아들 낳아드릴게요”
버스럭버스럭 벗겨내던 슬픈 말꼬리가 아들 없는 빈소를 기억하며 하얗게 운다
구멍 뚫린 양말이 늙지도 못한 채 유품처럼 마당가에 서 있는 빈 바지랑대
줄에 걸린 검정 두루마기가, 술 취한 혼잣말이
낮 그림자에 나풀거리며 자꾸만 손짓한다
흙 마당에 고꾸라진 짝 잃은 속디디미처럼 종종걸음하며
방향을 잃고 몸부림쳐대는 꼴이라니
옷가지 거두어간 자리에 방울방울 물음표만 걸리는
속알속알 느낌표만 걸리는
저 섬망 같은 세월을 하염없이 일으켜 세운다
허공 의자
한 사내가 높다란 허공 의자에 앉아 바람을 타고 있다. 창문에 매달린 꿈을 꾸며 리듬을 갈之자로 가른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보는 것만으로도 아찔한 순간이다. 밧줄에 매달려 좌우로 흔들리는 난간에서 무거운 몸통을 거미처럼 붙여 놓고 사내는 끝없이 추락하는 꿈을 꾸기도 한다. 빌딩 외벽에서 사내가 환상을 찾아 떠난다. 반짝반짝 별자리에 머물렀던 적 있었던가. 절벽 같은 유리창에 매달려 흔들흔들 안락의자를 기웃거렸을 뿐이다. 울렁울렁 목을 잡아당기던 밧줄에 맞춰 기어올랐을 벽과 빌딩 사이, 이곳저곳 희망에 꿰차고 앉아 날개를 달기도 했다. 높다란 저녁별 마주 보며 떨어지는 어둠에 하루치의 밧줄을 말아 잡아당겼다. 바람의 끝에서 홀로 앉아 있던 사내의 앉음새가 스르륵 풀어졌다. 핑 도는 어지럼증이 발아래로 튀어 오르자 사내는 그제야 허공 의자에서 내려오는 그때
유리창 아늑한 방안에서 아장아장 기어 나오는 아기가 두 손을 꽉 쥐고 까르르 웃는다. 하늘 높이 날아오를 포즈로 나는 그네 타기 놀이에 빠져든다.
은지화
애오라지. 손바닥만 한 딱지에
물고기와 아이들*이 놀고 있다
은물결 팔딱이다 헤엄치다
긴한 말들이 아로새겨진 활자 같다
꼬리꼬리한 비늘이 까르르 뒹굴면
깊은 바다를 부력으로 그려내는 아버지
색동옷 입혀주지 못하고
지그시 눌렀을 아이들의 얼굴
헝겊데기에 묻어난 환쟁이의 몸짓
국보가 되어서도
명치께를 아리게 두드리며
시치미 떼고 돌아누운 형상
무장해제한 그 전쟁의 여백까지 읽는다
담뱃갑 속에 숨겨둔 못갖춘마디가 불씨를 불어넣듯
쇄골과 깍지를 끼고 거꾸로 매달려 포개진 그리움
하냥, 즐거운 표정들
선묘한 저 실금들 속에 한 자락의 꿈이 자랐을
해방, 그 이후를 비추며
사람살이의 애수가 하염없이 빤짝인다
음각 선에 몰려 들어간 네모난 외로움
꼬물꼬물 발가락 사이를 비비적거리며
타들어갔을 꽁초만 한 피붙이
아버지가 살고 싶은 유일한 케렌시아였을
겹겹이 구겨진 골필 끝에
아이들이 새들처럼 모여앉아
콕콕 살결 깊숙이 파고드는 피난살이 박지
아버지 탓이 아니라고
아이들이 해독하듯 말한다
*은박지에 그린 이중섭의 그림
모래선
저만치 길게 뻗은 수위에 도착했다. 이미 간격이 생기고 말았다. 높은 언덕이 시작되기 전 에메랄드빛 물살은 환영의 그늘이다. 억겁의 고도를 헤집자 뜨거운 알몸을 드러낸 것, 굼틀굼틀 바람의 기억으로 부서져 애초에 사무친 모래알을 찾는다. 마치 세상의 모든 길을 모래벌판에 은폐한 형식 같다. 그리고 큰 파도에 휩쓸려 한순간에 부서져 버린 것, 빙하기에서 온 바람이 모래에게 쓴 깨알 같은 편지 같은 것, 한 걸음도 걸을 수 없을 때 다리가 긴 두꺼운 발바닥을 가진, 북슬북슬한 품 같은 것, 끝없이 맨발에 간질간질 밀려오는 유혹 같은 것, 무심한 기별을 일필휘지로 헤아리는 것, 모래성 쌓던 그 언제 적이 금세 해당화로 피었다 진다. 토끼 발께쯤에 집을 지었다. 근사한 모래 미술관처럼, 돗토리 사구에서 본 높은 모래언덕이며 먼 곳까지 펼쳐진 푸른 바다도 자신만의 궤도를 그려냈다. 소리 없이 흘러내리다, 사라지다, 비워내다, 생겨나는 것, 어쩌다가 한 번씩 씹히는 모래를 퉤퉤 뱉는 것,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고빗길에서 흩어지다 모아진 모래 둥지 눈부시게 빛나는 법이다. 뭉쳐지지 않아 쌓이는 특성으로 고착된 것, 뜨겁기만 한 온도에 속수무책으로 걸어가야 한다. 퇴적된 주름이 모랫길을 만들고 일정한 무늬로 구겨진 시간을 펴주기도 하는 것, 더는 배를 띄울 수 없는 모래섬에서 ‘두껍아 두껍아 헌 집 줄게 새집 다오’ 걸은 만큼 도망가는 저 언덕 너머로 아슬히 먼 영지가 보인다. 다시, 바람이 선을 그린다
수壽
비탈진 대숲에 조붓한 차밭을 걷는다
똑똑 떨어지는 소릿결에 귀를 연다
우수수 쌓인 댓잎 속에 깊숙이 박혀 꼼수를 부릴 요량으로
수명을 다한 차나무를 울컥 안는다
구순을 넘긴 엄마의 무표정한 몸짓 같은
기억의 뿌리가 썩었어도 몸피에 돋아난 초록 잎의 감쪽같은 시간만큼
그 잃어버린 고립 속에서 순간순간 어린 나를 부르는 사락거리는 소리를 듣는다
이끼 머금은 바윗돌에 엉겨 붙은 모체를 찾아가는데
누군가 꺾어놓은 죽순이 눈에 감긴다
여러 겹의 껍질을 벗기니 어린 옥수수 같은 연노란 몸빛이
야들야들 엄마의 피부만큼 얇다
샛바람에 흔들리다 빗줄기에 몸은 반으로 휘어졌어도
결코 부러지지 않고 한세상 견디는 중이다
열매와 씨앗을 남겨두고 하염없이 비워내면서 떠나갈 준비를 한다
가장 느린 몸짓으로 적당한 날을 벼르며 긴요한 셈을 하고 있는 눈치다
덜컥 하늘은 코앞에 닿고 어지럽던 머릿속이 번쩍 밝아진다
엄마의 처소를 두고 딜레마에 빠지다니 돌아보지 않는 시간이 가슴속을 파고든다
어린잎에 맺힌 대이슬이 나를 향해 씰룩거리다 글썽거리다 한마디 툭 떨어진다
엄마의 남은 수(壽)가 간절하게 사무치도록
목젖에 번지는 속울음이 온통 초록빛이다
숨을 시간이 더는 없다고
버젓이 대롱대롱 이슬을 매달고 운다
영롱한 한 모금이 내 심장에 멀거니 내려앉는다
엄마의 남은 수(壽)가
낯선 여행자
3A라는 좌석을 확인한 후 빛 속을 빨려 들어가듯 블랙홀 호에 올랐다. 어느 행성에서 온 외계인인지. “미안해 너 여기 앉으세요” 얼떨결에 3B에 앉고 말았다. 문 닫히는 자동제어장치 기계음 소리가 차갑다. 승무원의 안내 멘트에 안정을 찾으니 비로소 여행이 실감이 난다. 이제는 빠져나갈 수 없다는 일정한 경계선이 굳어진다. 초고속 소리에 조용한 호흡을 가다듬으며 굉음을 내는 시스템. 작은 별빛들을 삼킨 후 조각조각 부서지는 미지의 세계로 지구인과 외계인이 곤두박질치고 있다. 우주에서 가장 큰 별을 따려는 강한 스피드 속을 따라오는 달을 본다. 안부 문자 놓치지 않는 지구 밖, 정거장은 분주하고도 아름다운 풍경들이다. 밀물과 썰물 같은 조수 같다. 수평선과 지평선이 쏘아 올린 태양과 달. 인공위성의 조종을 받는 새마을호 행성 하나가 차창 유리에 비친다. 지나온 시간 속으로 달려가는 화이트홀 호가 궁금하다. 무궁화호가 그러하고 오래전 삼켜버린 통일호가 그립다. 거침없는 어둠 속을 지나며 먹이를 찾아 헤매는 환한 기억들처럼. 삼라만상이 흩어지지 않고 고분고분 따라오고 있다. 천체들을 삼켜버린 별 하나하나마다 산산조각 난 빛을 말없이 견디고 있다. 숨통을 끊어놓을 요량으로 잃어가는 빛, 터널 속에 어둠을 묻어둔 채 속도 없이 반짝이는 별이고 싶다. 우주에서처럼 가장 오래된 폭발하지 않는 초신성인 양 빛의 속도를 내는 오늘. 낯선 하늘 아래 멈춰 선 KTX, 3A가 내리고 찰나적으로 어둠 속을 환하게 빠져나가는 광선이 줄행랑치고 있다. 혜성처럼 빛을 뿜어내며 사라져갈 때까지 낯선 여행자를 눈빛으로 배웅하자. 블랙홀 호에서는 물빛 꼬리별 하나가 찡긋 손 흔들어준다
바다를 쌈해 먹다
간만의 차가 컸다 게다가, 물살까지 센 둘 사이에
죽방멸치 밥상이 차려졌다
부글부글 끓다가 죽어 간 통 멸치를 해부하기 시작하자
비릿한 멸치 똥 냄새가 싫었던 하루가 말뚝처럼 박혀있지 않은가
수심 얕은 갯벌에 V자 어살을 매어놓고
파도에 떠밀려 살아온 시간을 턱 괴고 비밀스레 들여다본다
거센 바다에 맞서 자리를 지켜내려는 둘의 몸부림이
은빛 비늘로 반짝인다
허물어질 듯한 속살을 들추다 떼어내다
밴댕이 소갈딱지라며 출렁이던 막말을
눈을 감고 뼈째 곱씹는다
껄끔껄끔한 가시를 발라내고 오물거리자
달짝지근한 끝맛에 눈물이 핑 감돈다
오랜 동거가 물 한 잔을 꿀꺽 삼킨다
파르르 떨리는 가슴지느러미가 수면위에 떠오른 아가미가
서로를 적시하며 무음처럼 흘러 뻐끔거린다
상처 내지 않고 살아내려는 간격 위에 큰 멸치를 살갑게 올려준다
그러곤, 한 술 두 술 숟가락 소리가 맛있게 오간다
파랑(波浪)과 부처(夫妻) 사이가 앙다문 속내를 묻듯
입 벌리고 쌈 싸 먹는 봄날
수천 개의 비늘이 벚꽃 길을 흩날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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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선 윤인숙 참 이상하지 빨간 가운을 걸치면 몸에서 죽은 쥐 냄새가 나 유리 머리 폭탄 웃음 마음 바다 어느 쪽이 더 좋아 수족관에 손 하나가 어슬렁어슬렁 손도 키우시나요 그럼 물도 매일 갈아 줘야겠어요 손톱에 물때가 낄 테니까요 깨진 유리 구겨진 웃음 진심으로 고마웠다니, 이런 환멸은 처음이야 머리를 틀어 올리고 다리를 오므린다 온도가 중요해 시시때때로 변하는 손바닥 얼룩같이 두 눈이 없어도 잘 느낄 수 있는 늪의 악어 알처럼 수국을 움켜쥘 때의 기분 모든 첫 중에 첫, 한 입 복숭아 수국을 손바닥으로 움켜쥘 때 무른 복숭아의 즙 손가락을 타고 흐르는 거기를 만질 때 조금 젖을 때의 침이 꿀꺽 넘어가는 물고기가 찌를 물고 달아나는 산꼭대기 고사리 밭 층층나무의 향기 이끼 아래 바위 복숭아 살을 손으로 뭉개 봤다면 밀가루 반죽을 휘휘 저어 봤다면 끝물이라는 말 그 여름이 뜨거웠다는, 뼈의 화목 나무가 이름을 얻는다 적막이 가만히 가라앉고 있다 흰 항아리 한 줌 다섯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는 뼈의 화목 허공은 잠시 눈을 감았다 밖은 따뜻하고 속은 부서지는 중 골목을 들어서며 느리고 크게 부르던 노래도 낡아, 노래뿐이다 기억은 가뭇없고 폭풍이 쓸고 간 듯 먼 길이 생겨나고 있다 이마가 땅에 닿도록 절을 한다 풀이 풀의 어깨에 기대 흐느낀다 목덜미에 내려앉은 나비의 날갯짓 믿을 수 없다 믿을 수 없다 나무의 이름이 살갗 아래 새겨진다 얕은 밤 고개를 젖혔다가 퉤, 하고 누런 가래를 뱉을 때, 가래가, 누런 가래가 땅바닥에 ‘척’하고 달라붙은 거 같죠. 척하고 뭉개지는 거죠. 산산이 그냥 사라지지 않는다는 걸 보여주려는 것처럼요 발끝으로 쓰윽 뭉개지 말아요. 진득한 실이 달라붙을지도 몰라요 영원이 알을 슬어 놓을 것 같아요 어느 순간에도 꽃은 피니까요 어떤 순간도 영원이 될 수 있으니까요 꽃이 피기도 전에 시든다는 걸 일깨워 주진 말아요 왜 그런지, 선명한 것은 가여워요 얕은 밤에 꿈은 무르익고 계절은 저쪽에서 이쪽으로 슬금슬금 와버려요 어느 쪽으로 기울어져야 할까요 전 언제나 지는 쪽이 더 좋기는 해요 숨 비 오고 라일락이 막 피려고 해요 꽃향기 비눗방울처럼 터져요 다정한 소문 같아요 향기는 몸이 없고 소문은 멀리 가고 비 오는 날, 오른손을 높이높이 볼륨을 올리고 몸을 흔들어요 온몸에 풍선 달고 가라앉는 배 위에서 물구나무를 서요 아아 목 놓아 노래 불러요 꿈틀꿈틀 드디어 다른 몸이 되려나 봐요 괴로움은 역사가 짧아 우리 엄마에 비하면 새 발의 피 춤으로 노래로 하늘로 하늘로
- 최고관리자
- 2024-11-05
직전의 양 임지은 잠이 오지 않을 때 그만 좀 불러냈으면 좋겠어 사람들은 양털로 옷도 이불도 해 입으면서 잠까지 덮어버릴 셈인가 봐 가을이 오면 확연하게 줄어든 몸무게에 양이 얼마나 어리둥절해하는지 모르면서 내가 아는 제일 불면증이 심한 사람은 양을 구십구만 구천 마리까지 셌지만 잠이 오지 않았대 세기를 그만두자 그제야 잠에 들었다지 좁은 방에 아침까지 불러 모은 양들이 서로를 밟고 올라섰다지 이런 사정을 아는 동물 애호가는 양 대신 말, 소, 사자들을 불러 모았대 함께 있기에는 긴장감이 넘치는 사이라서 밤새 뜬 눈으로 지켜봐야 했다지 이런 얘길 들으면 내 마음이 조금 약해지긴 해 그래서 생각해 본 건데 컵이나 상자를 부르는 건 어때? 쌓아 올리기도 쉽고 무너지기도 쉬운 게 잠이잖아 쏟아진 잠 밑에 깔려 상자에 구멍을 내고 그 안을 들여다봐 보면 하얗고 부들부들한 털이 그게 설마··· 양이 아니라면 대체 뭐겠어 한낮의 잎맥처럼 활짝 펴지는 잠, 수증기 가득한 욕실의 콘센트처럼 짜릿한 잠, 일주일째 닦지 않은 안경처럼 흐릿한 잠, 프라이팬 위에 터진 노른자처럼 중심이 없는 잠, 그런 잠을 자기 위해 사람들은 계속 양을 부르고 좀비 소원 깨고 나니 좀 이상했습니다 욕구라고 부를만한 게 없어졌습니다 더는 먹고 싶지도 자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그렇게 늦장 부리다가는 정말 지각이라는 엄마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화가 난 걸까요? 하지만 저에겐 기분이라고 할 게 없어졌는걸요? 그래도 습관이라고 할 게 남아 있어 학교에 갔습니다 이가 빠진 것처럼 듬성듬성 비어있는 의자들 ㅂ ㅂ ㅂ ㅂ ㅂ 선생님이 소원을 적어 실내 나무에 걸라고 합니다 소원이라는 건 이루어질 수 없는 거잖아요 이루어질 수 있는 것도 소원이라 할 수 있나요? 연필 끝을 씹는 동안 준호가 시아를 깨물고 시아가 영재를 깨물고 나는 깨끗한 종이에 소원을 적고 있었습니다 진우를 더 이상 못 만나게 해달라고요 진우는 사인펜도 잘 빌려주고 내 얘기에 많이 웃어줍니다 진우를 물고 싶지 않습니다 그런데 소원은 벌써 어긋나버렸나 봅니다 진우가 내 손을 잡고 달리고 있습니다 못 만나게 해달라고 했는데 진우는 하필 나를 만나서 숨을 몰아쉬면 진우는 깨물기 좋은 목덜미를 가졌고 아주 이상한 맛이 납니다 소원이라는 건 이루어질 수 없는 거잖아요? 어떤 소원은 정말 이뤄지지 않는 편이 나을지도 모릅니다 새로 생긴 점 코 위에 점은 미인 점이라 부르고 손가락 위에 점은 재주가 많다는 뜻이라죠? 입술에 점이 생기면서 할 말이 많아졌습니다 친구가 손에 샤프 점이 생겼다고 했을 땐 반투명한 점이 참 신기했는데 나도 없던 점이 생기길 바란 적 있습니다 한 번 마음 먹으면 진짜 해내는 점
- 최고관리자
- 2024-11-05
가스라이터와 함께하는 시간 ―태양 고광식 당신은 나의 가슴을 열고 태양을 심었다 심장 대신 태양은 뜨거운 분노로 이글거린다 큐브처럼 여섯 가지 색깔의 표정을 찾아 당신이 지목한 사람들을 폭행했다 관상동맥은 뜨거운 열로 딱딱하게 굳어지고 아버지를 폭행하는 날이면 혈액순환이 원활해져 사랑의 노래를 부른다 심장이 약속보다 빨리 뛰어 나는 흥분한다 깨끗해지기 위해 단단한 빗장을 풀었다 태양을 안고 달리다 보면 늘 동쪽 서쪽 너머는 도달할 수 없는 곳이다 당신의 입술은 책 어느 페이지이든 숨어 있다 동생이 강물에 뛰어들어 나를 잡아당겼다 축축한 말을 들으면 당신은 언제나 옳다 태양이 지는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나는 당신이 준 태양을 심장 대신 가슴에 품고 다닌다 열리는 입술을 보는 나의 귀가 커진다 바다의 소멸각 나는 바다와 육지 사이에 고래를 그려 넣었다 검은 눈동자 속에서 해변이 소멸하고 있었다 파도가 칠 때마다 셀프 마사지기로 문질러댔다 아침과 저녁을 오가며 파도가 출렁인다 소멸하는 파도가 안타까웠다 각이 사라진 고래는 곧 척추동물의 소멸을 예고한다 고래의 심장은 아직 뛰고 있다 바다의 각이 다 닳지 않았다는 사실이 나를 흥분케 했다 고래 등에 각이 산다 멀리 있는 겨울 바다의 표정이 녹아든다 고래수염은 각자 각을 만든다 바다 각의 크기는 일정치 않다 나는 몇 번 태양의 각을 떴나 일출과 일몰 때의 시간을 모두 놓친 것 같다 크릴새우와 수염 사이의 각은 살아 있다 고래의 시간은 열대 대양에 각을 뜨면서 만들어진다 파도의 높이와 상관없이 바닷속은 각을 뜨기 좋은 압력으로 눌리는데 차단된 소통은 외로움을 부른다 소음은 파도치는 속도로 플랑크톤처럼 쌓인다 좌우 비대칭으로 기울어진 자세로는 바다의 각을 뜰 수 없다 파도는 공작새의 꼬리만큼 화려하다 고래는 해안가에 일렬로 떼 지어 마지막 각을 만든다 각은 고래의 몸속으로 흘러들어 하얗게 흩어진다 난독증 ―결별 ㅍ, ㅏ, ㄷ, ㅗ를 놓고 마주 앉았다 카페의 창문에 매달려 우리를 붙잡고 있는 바다 꽃병과 꽃잎이 분리되지 않는다 커피잔과 네 입술을 구별할 수 없는 시간이 의자 밑으로 흐른다 구름이 바닥에 깔린다 표정 잃은 너의 발과 내 발이 동시에 젖는다 이미 구별할 수 없는 모습으로 변해버린 우리의 발 ㄱ, ㅡ, ㅁ, ㅏ, ㄴ, ㅁ, ㅏ, ㄴ, ㄴ, ㅏ 각각의 소리에 대응할 수가 없다 네 목소리가 낮게 탁자와 탁자를 건너뛰고 있다 긴 꽃병이 환경에 적응하려는 듯 바닥의 물을 위로 끌어올리고 있는데 카페의 의자는 유행가로 사랑을 만든다 너는 항상 같은 의자에 앉아 지연 없이 이해되는 말을 익혔다 노래는 감정을 파도에 섞으며 가벼운 허기로 삐걱거렸다 젖은 발로 구름을 밟는 너, ㅇ, ㅏ, ㄴ, ㅕ, ㅇ 시각적인 기호를 나는 분리할 수 없다 고양이 무리가 되고 싶
- 최고관리자
- 2024-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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