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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그림자

  • 작성일 2023-03-31
  • 조회수 2,220

[아르코문학창작기금 - 소설(단편)]


    숲그림자


문소윤


    낡은 차의 덜컹거림에 잠에서 깨어 거슴츠레 눈을 떴다. 우거진 숲의 초록빛이 쏟아지듯 시야에 들어왔다. 이선은 눈을 깜박여 보았다. 숲이 맞았다. 이틀간 마주한 건 어둠, 혹은 광활한 황무지뿐이었기에 오랜만에 보는 빽빽한 나무 군락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이선은 옆자리의 일선을 돌아보며 창문을 조금만 내렸다. 아직 햇볕에 달구어지지 않은 공기가 차 안으로 밀려들었다. 찬 공기를 깊이 들이마신 후 이선은 이틀 만에 윤식을 향해 입을 열었다. 아버지. 윤식이 백미러로 쳐다보자 이선은 창문 밖, 숲을 가리켰다. 

    윤식은 갓길로 차를 옮겨 세웠다. 이선은 먼저 차에서 내렸다. 왕복 이 차선 도로 앞뒤로 다른 차는 찾아볼 수 없었다. 미국에서 이선의 가족은 자주 옮겨 다니며 살았다. 최소한의 짐을 싣고 오랜 시간 이동하다 보면 문득, 끝도 없이 이어지는 길과 붉은 흙, 메마른 풍경 속으로 자기 가족만 내동댕이쳐진 기분이 들었다. 지금이 그랬다. 이렇게 말하면 아버지는 정색할 것이다. 지겹게 들어온 말을 되풀이하겠지. 그게 무슨 말이냐. 왜 우리 가족뿐이야. 플로리다에 사는 큰아버지도 있고, 텍사스로 이사 간 제이슨 가족도 있다. 그리고 한국에는 어머니 친척들과 무엇보다도 네 조부모 선산이 있잖니. 우리에겐 뿌리가 있다. 잊지 마라. 

    뿌리가 있는 우리가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지 따져 묻고 싶었다. 하지만 이선은 입을 꾹 다물고 숲을 향해 걸었다. 몇 걸음 후 뒤를 돌아보자 윤식이 차 문을 잠그고 뒤따라오는 게 보였다. 형 일선은 고개를 뒤로 젖힌 채로, 조수석의 어머니는 오른쪽으로 고개를 떨구고 잠들어 있었다. 이선의 시선을 알아차린 윤식이 입을 열었다. 

    “아무도 없는데 괜찮겠지.”

    두 사람은 숲을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숲 안으로 들어갈수록 공기는 서늘해졌다. 이선은 나무들이 뿜어내는 청량한 공기와 축축한 이끼, 고여 있는 물비린내가 뒤섞인 숲의 냄새를 마음껏 들이마셨다. 고개를 들자 무성한 나뭇잎 사이로 파란 하늘이 보였다. 그 틈새로 햇빛이 쏟아져 내렸다. 어둠을 가르며 사선으로 내리꽂히는 햇빛을 바라보다가 이선은 고개를 돌렸다. 두 팔을 뻗으면 닿을 듯한 나무와 나무 사이에 빛과 어둠이 공존했다. 빛이 들지 않는 나무를 향해 발을 내디뎠을 때, 누군가 빠르고 가볍게 이선 앞을 스쳐 지나갔다. 헉. 이선은 소리를 토해 냈다. 칠흑 같은 검은색은 아니지만 머리부터 발끝까지 까맸다. 길고 마른 몸은 입체적이진 않아도 납작하지도 않았다. 이선이 입을 벌린 채 어리둥절한 사이, 까만 존재는 부드럽고 우아한 몸놀림으로, 땅 위에 살짝 떠 허공을 걷는듯한 걸음걸이로 사라져 버렸다. 이선은 뒤따라오는 윤식에게 소리쳤다. 

    “아버지, 봤어요?”

    윤식이 다가왔다. 이선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을 쳐다보았다. 그곳엔 빽빽한 숲의 어둠이 그늘져 있을 뿐이었다. 윤식은 말했다. 

    “그만 돌아가자. 우리의 새집에서 쉬자꾸나.”

    이선은 윤식을 바라보았다. 우리의 새집이라니. 어느새 윤식은 왔던 길로 성큼성큼 되돌아가고 있었다. 


    차에 가까이 다가갔을 때 잠에서 깬 일선과 명신의 모습이 보였다. 머리를 맞대고 소곤거리던 두 사람은 윤식과 이선이 차 문을 열려 하자 입을 다물었다. 윤식은 백미러로 일선을 흘깃 쳐다보았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운전석에 앉고도 차를 출발시키지 않던 윤식은 명신에게 물었다. 

    “그래서, 그 집에서는 얼마나 오래 있을 수 있다고?”

    명신은 대답 대신 뒷자리의 일선을 돌아보았다. 일선은 창 쪽으로 고개를 돌려 버렸다. 차 안에 적막이 내려앉았다. 윤식은 앞을 바라본 채 말했다.

    “아니면 지금이라도 플로리다 형님께 연락드리든가. 언제라도 방 한 칸 내주신다고 하실걸?” 

    명신이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일선이 말로는 며칠 있으라고 했다는데, 오래 머물 수 있지 않겠어요? 자살한 사람 집에 누가 살려 하겠어요.”

    윤식은 차의 시동을 걸었다. 이선은 조금 열려 있던 창문을 마저 내렸다. 공기는 어느새 미지근해졌지만 차가 출발하자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두두두두두두두두두. 차의 속도가 빨라질수록 바람 소리도 거세어졌다. 

    “시끄러워. 창문 좀 닫아.”

    일선이 말했다. 이선은 형에게 쏘아붙이고 싶었다. 지금 누구 때문에 이 고생을 하는데? 

    떠나기 전 이선은 식구들을 향해 소리 지르며 울부짖었다. 내가 왜 학교도 그만두고 밤에 몰래 도망가야만 하냐고! 윤식은 이선의 뺨을 때렸다. 

    이기적인 놈. 우린 가족이잖냐! 

    그때부터 이선은 될 대로 되라는 마음이었다. 이제 두 달만 있으면 미국 나이로 열여덟 살이니 성인이라고, 자신은 남겠다고 했지만 윤식은 절대 안 된다고 했다. 넌 아직 어려. 너만 두고 갈 순 없다. 이선도 알고 있었다. 협소한 스튜디오는 아버지 지인 이름으로 빌린 거였고 아버지가 운전하는 낡은 차는 보험도 없었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형 일선도 근로기준법보다 많이 일하고 적게 돈을 받았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늘 말해 왔다. 이렇게 현금으로 주시니 얼마나 고맙니. 감사하자. 감사하며 살자. 아버지가 자신의 뺨을 때렸을 때, 이선은 명징하게 현실을 깨달았다. 고등학교에서 성적이 우수해 봤자 자신은 미국에서 유령일 뿐이라고. 형 일선의 미래가 곧 자신의 미래가 될 거라고. 

    “집을 빌려준 친구는 어떻게 아는 친구냐? 믿을 만한 친구야?”

    운전하던 윤식이 앞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일선은 딱히 보고 있지 않은 것 같은 창밖에 시선을 둔 채로 마지못해 대답했다. 

    “대학 친구예요.”

    “친구 누구?”

    “아버지가 제 친구를 다 알아요? 말해 봤자 모르시잖아요.”

    명신이 얼른 나서서 대신 대답했다. 

    “대학 기숙사 룸메이트래요.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남긴 집인데 작은 시골이라, 갖고 있을 게 좋을지 팔아 치우는 게 나을지 살펴봐 달라고 했대요.” 

    “그 노인네가 자살했다는 거야?”

    윤식의 물음에 명신은 한숨을 쉬었다. 대답을 미루고 달리는 차 앞 유리 너머를 응시하다가 명신이 입을 열었다. 

    “살해도 아니고 자살이니 괜찮아요. 가장 좋을 때 떠나고 싶다고 했던 분이래요. 여보, 그렇게 생각하면 호상 아닌가요?” 

    윤식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호상. 일선과 이선은 한국에서 태어나긴 했지만 어렸을 때 미국에 온 탓에 부모님이 나누는 한국말을 이해하지 못할 때가 많았다. 일선과 이선은 영어가 더 편했고 자신을 미국인으로 여겼다. 하지만 윤식은 일선과 이선이 영어로 이야기하면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한국인의 뿌리를 이어받았으니 집에서만큼은 한국말을 써야 한다는 이유에서였다. 한편으로 윤식은 일선과 이선에게 이렇게 당부하곤 했다. 너희들은 미국 땅에 살고 있으니 미국 사람이다, 절대 기죽지 말고 당당하게 살아라. 한국인의 뿌리를 가진 미국 사람이란 도대체 어떤 사람일까. 이선은 아버지 말에서 논리 찾기를 포기했다. 아버지가 간단한 영어 외에는 알아듣지 못한다는 걸 눈치챈 후부터였다. 그 후 이선은 집에서 영어와 한국말을 때에 따라 사용했다. 부모님이 안쓰러울 때는 서툰 한국말을, 화가 날 땐 빠른 영어를 내뱉었다. 그럴 때마다 윤식과 명신은 엇나가는 자식을 대하듯 안타깝게 이선을 쳐다보았고, 일선만이 이선의 의도를 눈치채고 씩 웃곤 했다. 

  

    목적지까지 10여 마일을 남겨 두고 있었다. 명신은 가는 길에 장을 보자고 윤식에게 말했다. 이선은 배가 고팠다. 명신이 지갑을 열어 남은 지폐를 세어 보는 것을 보고 고개를 돌려 버렸다. 지겨웠다. 사는 게 너무 뻔하고 구질구질해서 죽을 지경이었다. 걱정 없이 자란 듯한 또래의 해맑음을 마주할 때면 그들의 뺨을 치며 소리 지르고 싶었다. 너희들은 부모가 잘 조작해 놓은 세상에 살고 있어. 복에 겨운 줄 알라고!

    주유소 옆 작은 슈퍼마켓 앞에 차를 세웠다. 명신은 가장 늦게 차에서 내린 일선의 얼굴을 살피며 물었다. 

    “연락 온 거 없지?”

    “없어요.”

    일선은 대답하며 휴대폰의 전원을 꺼 버렸다. 윤식이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너, 휴대폰 켜 둬야 하는 거 아니냐? 일이 어떻게 되어 가는지도 모르는데.”

    일선은 피식 웃었다. 윤식을 향해 빠른 영어로 대꾸했다. 

    “당신도 무서워서 야반도주한 거 아녜요? 애초에 이 모든 일이 당신 때문이라고요!”

    윤식은 일선의 말을 알아들은 것 같았다. 주먹을 쥔 채로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하다가 눈을 뜬 후 일선과 이선에게 말했다. 

    “일선! 이선! 첫째도 착하게, 둘째도 바르게. 그게 너희 이름이라고 누누이 말했다. 그런데, 일선이 네가 사장님을 개 패듯이 팬 게 나 때문이라고? 내가 그렇게 가르쳤냐? 이 녀석이 어디서 아버지 앞에서….” 

    윤식은 아랫입술을 깨물며 부르르 떨다가 말을 이었다. 

    “그동안 아버지가 살아온 모습을 보고도 그래? 미국에 산 이십 년 동안 교통 딱지 한번 안 뗀 게 나다. 그런 나를 보고 자랐으면서 그래?”

    일선은 윤식을 똑바로 바라보며 영어로 빠르게 말했다. 

    “경찰한테 걸릴까 봐 무서워 조심하신 거잖아요. 잘못하면 한국으로 추방당할까 봐. 바르게 사셨다고요? 사람들이 우릴 뭐라고 하는 줄 알아요? 범죄자래요. 자기들은 엄청난 세금 떼이며 합법적으로 살아가는데 불체자들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빌붙어 산다고요.”

    윤식은 이선을 쳐다보며 물었다. 

    “니 형이 지금 뭐라는 거냐? 내가 부끄럽다고 한 거 맞냐? 어서 말해 봐!”

    명신이 고개를 가로젓는 걸 외면하며 이선은 표정 없는 얼굴로 일선의 말을 한국말로 전했다. 윤식은 입을 벌린 채 기막혀하다가 일선에게 다가가 소리를 질렀다. 

    “열심히 산 아비한테 불법체류가 뭐냐, 불법체류가.” 

    명신이 윤식의 팔을 붙잡으며 토닥였다. 

    “여보, 진정해요. 요즘은 불법체류자가 아니라 서류 미비자라고 부른대요.”

    “서류 미비자? 그건 또 무슨 해괴한 소리야. 미비라니, 그것도 부족하다는 말 아냐. 내가 이곳에서 얼마나 열심히 살아왔는데. 합법적인 체류 신분을 못 얻어서 갖은 고생을 한 것도 서러운데 미비자라니. 그래, 희망 체류자. 우리끼리라도 희망 체류자라고 부르자. 우리는, 우리의 의지로 이곳에 사는 거다.”

    윤식의 말에 일선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윤식의 얼굴 앞에 제 얼굴을 가까이하고 발로 땅을 박차며 한국말로 소리를 질렀다. 

    “아버지! 당신이 저까지 불체자로 만들었잖아요! 그래서 대학 졸업하고도 캐쉬 준다는 한인 마켓밖에 갈 데가 없었어요. 근데도 아버지 때문이 아녜요?”

    윤식이 일선을 향해 오른팔을 번쩍 들었다. 언제라도 일선의 뺨을 향해 날아들 것처럼 오른손이 허공에서 부들부들 떨었다. 윤식이 입을 열었다. 

    “그렇다고 직장 사장님을 때려? 그것도 나 때문이냐?” 

    일선은 질린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두어 번 젓고는 슈퍼마켓 안으로 빠르게 걸어 들어갔다. 명신이 윤식에게 말했다. 

    “이러지 말고 빨리 먹을 거 사서 집으로 가요. 괜히 사람들 눈에 띄는 행동하지 말고요.”

    윤식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주춤주춤 오른팔을 내린 후 슈퍼마켓을 향해 걸어갔다. 윤식을 뒤따르다가 명신은 뒤를 돌아보았다. 멀찍이 떨어진 채로 식구들을 지켜보던 이선을 향해 빨리 오라고 손짓하고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이선은 한참 후에야 느릿느릿 몸을 움직였다. 


    슈퍼마켓은 작았지만 여러 품목이 골고루 진열되어 있었다. 이선은 빛바랜 과자 봉지와 진열대 모서리에 쌓인 먼지를 눈여겨보며 과자 하나를 들어 올려 유통 기한을 확인했다. 명신이 플라스틱 장바구니를 들고 지나가다가 이선이 내려놓은 과자를 집어 장바구니에 넣었다. 

    “먹고 싶은 거 있으면 사. 돈 걱정하지 말고.”

    이선은 가게 안을 둘러보았다. 점원 외에는 자기 가족뿐이었다. 계산대 앞, 까만 머리와 수염을 어깨선 아래로 길게 기른 남자가 무심한 시선으로 이선의 가족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선은 명신을 뒤따랐다. 일선이 캔 맥주와 감자 칩을 한 아름 들고 나타나 명신이 들고 있던 장바구니에 떨어트렸다. 명신은 눈살을 찌푸렸다. 일선 옆에 있는 이선에게 큰 소리로, 끼니로 먹을 만한 것을 고르라고 말한 후 명신은 빵이 진열된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윤식이 명신에게 다가와 말했다. 

    “아무래도 밥을 먹긴 힘들겠지?” 

    “김치도 없잖아요. 빵 먹어요.”

    “당신이 양배추로라도 겉절이를 담그면 안 될까?”

    명신은 짧은 한숨과 함께 대꾸했다.

    “고춧가루는요?”

    명신의 대답에 윤식은 입맛을 다시며 돌아섰다. 잠시 후 윤식이 컵라면 네 개를 들고 명신에게 다가오며 말했다.

    “시골이라 그런가 여긴 한국산 컵라면이 없네.”

    명신은 대꾸 없이 제일 큰 빵 봉지를 골라 장바구니에 집어넣고 계산대로 향했다. 뒤따르던 일선이 장바구니를 대신 들어 올려 계산대 앞에 내려놓았다. 검은 수염의 남자가 장바구니에서 상품을 하나씩 꺼내 바코드를 찍으며 물었다. 

    “여행 중이세요?” 

    “네, 왜요?”

    명신이 되물었다. 남자는 바코드를 계속 찍으며 대답했다. 

    “인근 가구를 합쳐 봤자 스무 가구도 되지 않아요. 외지인들은 쉽게 눈에 띄죠.”

    일선은 휴가 중이라고 덧붙였다. 남자는 일선을 잠시 쳐다보았을 뿐 더 묻지 않았다. 바코드를 다 찍은 남자가 물건값을 말하자 명신은 지갑을 열어 지폐와 동전을 꺼냈다. 남자가 명신의 동작을 지켜보다가 나머지 식구들의 얼굴을 찬찬히 살폈다. 눈이 마주쳤을 때 이선은 남자 뒤쪽의 벽을 가리키며 물었다. 

    “저 블랙맨은 뭐예요?”

    남자는 이선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뒤를 돌아보았다. 계산대 뒤쪽 벽면에, 신문 기사를 오린 듯한 얇은 종이가 붙어 있었다. 남자는 누렇게 변색하여 모서리 부분이 말린 종이를 처음 보는 것처럼 응시하다가 고개를 돌려 이선에게 말했다. 

    “저건, 이 마을의 전설 같은 거란다.”

    “전설이요?”

    남자는 어깨를 으쓱한 후 말을 이었다.

    “우리 아버지도 할아버지께 들었다고 하니 전설이라 할 수 있겠지? 마을 주변 숲에 그림자가 살고 있다고 해. 이른 아침이나 해 질 무렵 운이 좋으면 만날 수 있다는데, 저걸 사람이라 부를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본 사람은 딱 사람 형상이라고 했대. 우리 아버진 숲그림자를 만나면 잘 달래서 집으로 데려오랬어. 숲그림자가 집에 머물면 그 집의 근심거리도 사라진다는구나. 물론, 네가 이런 전설을 믿을 바보는 아니겠지만.”

    이선은 남자의 말을 들으며 종이 속 숲그림자 모습에 시선을 고정했다. 명신은 남자를 향해 몇 장의 지폐와 동전을 내밀었다. 퍼펙트! 거스름돈을 내줄 필요도 없이 정확한 금액에 남자가 대꾸했다. 명신과 일선은 물건이 담긴 비닐봉지를 나눠 들었다. 

    네 사람은 슈퍼에서 나와 차에 올라탔다. 이번엔 일선이 운전석에 올랐다. 입력한 주소지를 향해 구글맵의 안내대로 천천히 차를 몰았다. 슈퍼에서 벗어나 1마일쯤 안으로 들어가자 일 차선의 비포장도로가 나타났다. 메마른 먼지들이 일어나 공중으로 흩어졌다. 일선은 열려 있던 유리창을 완전히 닫았다. 윤식은 덜컹거리는 차 안에서 밖을 응시하다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미국은 참 복도 많은 나라야. 어딜 가든 노는 땅이 넘쳐나니.”

    윤식은 떠나온 지 오래인 한국의 모습을 떠올렸다. 한 번쯤 가 보고 싶었지만 출국하면 다시는 미국 땅에 발을 디딜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가고 싶은 마음이 들 때마다 윤식은 미국의 좋은 점을 이야기했다. 

    “미국에는 직업의 귀천이 없잖니. 한국에 있어 봐라. 치열한 대학 입시 통과해도 직장 잡기가 하늘의 별 따기라는데, 너희들은 여기서 얼마나 행복하게 자랐냐?”

    또다시 윤식이 늘어놓는 미국 생활의 장점에 대해 아무도 맞장구치지 않았다. 일선은 앞을 응시하며 천천히 차를 몰았다. 비포장 일 차선 도로가 둥글게 이어졌다. 띄엄띄엄 위치한 집들은 하늘을 향해 우뚝 솟은 나무들 틈에 자리 잡은 데다가 지붕 위로 진초록 가지가 드리워 있어서 꼭 숲에 사로잡힌 인질처럼 보였다. 일선이 중얼거렸다. 

    “나도 인질이지.”

    아무도 일선의 말을 듣지 못한 듯했다. 일선은 숲의 가장 안쪽에 있는 집 앞에 차를 세웠다. 윤식은 식구들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자, 우리의 새집으로 들어가자.”

    윤식이 먼저 내리자 다른 식구들도 차례로 내렸다. 네 사람은 나란히 서서 말없이 이층집을 올려다보았다. 붉은색 벽돌을 쌓아 올린 외벽에 연노란색 지붕이었다. 빛바랜 외관이 한눈에 보기에도 오래된 집으로 느껴졌다. 방치를 증명하듯 마당엔 말라비틀어진 누런 풀 몇 가닥만이 듬성듬성했다. 네 사람은 현관으로 향하는 계단을 올랐다. 계단 맨 위, 현관문 앞 갈색 웰컴 매트 위에 뭔가가 놓여 있었다. 악! 명신이 비명을 질렀다. 검붉은 피가 얼룩진 흰 비둘기였다. 윤식은 바닥에서 접힌 종이를 집어 들었다. 종이를 펴 잠시 들여다보다가 일선에게 건네며 물었다.

    “뭐라고 쓰여 있는 거냐?”

    “A sacrifice of salvation. 구원의 제물.”

    일선은 쪽지에 적힌 영어를 읽었다. 네 사람은 비둘기 앞에서 침묵했다. 한참 후 윤식이 매트를 양손으로 잡아 들어 올린 후 비둘기를 계단 옆 마당으로 내던져 버렸다. 일선은 매트가 놓여 있던 바닥에서 열쇠 하나를 집어 들었다. 

    열쇠로 현관문을 열고 네 사람은 안으로 들어갔다. 


    새벽에 이선은 잠에서 깨어났다. 창문 너머로 어떤 소리가 들렸다. 꿈이 아니었다. 이선은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창문 밖으로 무성한 초록 가지만 보였다.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어슴푸레한 빛을 바라보자 잠은 완전히 달아났다. 덮고 있던 이불에 절여 있는 냄새가 뒤늦게 후각을 자극했다. 이선은 이불을 걷어내고 침대에서 빠져나왔다. 

    삐거덕거리는 나무 바닥 소리에 신경을 곤두세운 채 현관문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운동화에 맨발을 끼우고 집을 나섰다. 새벽의 찬 공기가 몸을 맞이했다. 이선은 주저함 없이 숲으로 향하는 오솔길로 들어섰다. 

    숲에서 이선은 편안함을 느꼈다. 미국 국립공원 산불 감시원이 이선의 꿈이었다. 몇 년 전 도서관에서 잡지를 보다가 감시탑에서 찍은 풍경 사진을 본 적이 있었는데 이선은 사진에 매료됐다. 산불 감시원이 머무는 감시탑 통유리창 너머로 숲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바뀌는 경이로운 숲의 풍경을 보며 이선은 오랜만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숲에 머물며 돈까지 벌 수 있다니! 하지만 미국에서 유령인 현재 신분으로는 절대 이룰 수 없는 꿈이라는 걸, 뒤늦게 알았다. 

    이선은 내딛는 발걸음에 힘을 주었다. 발아래에서 마른 나뭇잎과 나뭇가지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이선은 걸음을 멈췄다. 눈을 감고 두 팔을 벌려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숨을 한껏 참고 있다가 푸후, 하고 내쉬면 풍선에서 공기가 빠져나가듯 이선 또한 부유하며 걱정 없는 또 다른 세상으로 옮겨갈 것만 같았다. 다시 눈을 뜨자 숲에 공존하는 빛과 어둠이 보였다. 이선은 한 나무 아래에 멈춰 섰다가 발을 크게 내디뎌 다음 나무에 가닿는 식으로 나아갔다. 이번엔 빛, 다음엔 어둠, 이번엔 빛. 걸음을 크게 하여 다음 나무에 이르렀을 때 검은 형상이 이선의 몸과 겹쳐졌다. 

    숲그림자구나! 이선은 전율을 느끼며 동작을 멈췄다. 숲그림자가 고개를 돌려 이선의 얼굴을 마주했다. 이선은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오래 주시하자 형체가 구분되어 보였다. 이선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는 두 눈과 오뚝하게 들린 코, 살짝 올라간 입매까지. 완전한 검정이라기보다는 흰색이 스며든 듯한, 혹은 여러 색이 한데 섞여 이루어진 듯한 검정이었다. 잠시 후 숲그림자가 미끄러지듯 멀어져 가려 할 때, 이선은 덥석 손을 붙잡았다. 

    “함께 있어요.”

    숲그림자는 이선을 응시했다. 이선은 시선을 받아 냈다. 잠시 후 숲그림자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이선은 맞잡은 손을 꼭 그러쥐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터질 듯 격렬한 심장박동을 느끼면서도 뒤돌아보지 않았다. 붙잡은 손에 힘을 주고 앞을 보며 걸었다.


    이선은 왼손으로 현관문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안으로 들어선 후 두 발을 이용해 신발을 벗었다. 손을 쥔 오른손을 펴거나 말을 내뱉으면 숲그림자는 연기처럼 사라져 버릴 것만 같았다. 이선은 현관문 안쪽에 멈춰선 채로 생각했다. 나는 왜 숲그림자를 데려온 걸까? 

    “어디 갔다 왔어?”

    명신이 현관 앞으로 나와 물었다. 아침 식사를 준비하던 참이었는지 손에 달걀이 들려 있었다. 이선이 대답하기도 전에 명신은 부엌으로 들어가 버렸다. 

    이선은 뒤를 돌아보았다. 숲그림자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분명 현관문 안으로 함께 들어왔는데 엄마를 보고 놀라 손을 놓아 버렸다. 이선은 손바닥을 들여다보았다. 숲그림자의 손을 쥐었을 때의 감촉,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 부드럽고 푹신한 것을 손에 쥔 듯하던 느낌이 남아 있는 듯했다. 명신이 다시 나타나 왜 그러고 서 있냐며, 얼른 손 씻고 오라고 재촉했다. 이선은 집 안으로 들어섰다. 

    아침 식사를 위해 네 사람은 식탁에 둘러앉았다. 이선은 음식을 먹지 못하고 숲그림자 생각에 골몰했다. 아직 여기 있는 건 아닐까? 집 안을 눈으로 훑었지만 보이지 않았다. 실망감에 음식을 그대로 남기고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을 때, 얼룩진 회색 소파 뒤로 웅크린 검은 그림자가 보였다. 이선은 놀라움과 기쁨으로 엉거주춤 멈춰 선 채로 뚫어지라 바라보았다. 그림자가 꿈틀거리듯 벽 쪽으로 길게 늘어지다가 점점 입체적인 형태로 모습을 드러냈다. 이선의 얼굴에 반가움이 어렸다. 완전히 몸을 일으켜 세운 숲그림자가 천천히 다가왔다. 집안의 빛과 어둠 사이로, 징검다리를 건너듯 가뿐하고 우아한 발걸음이었다. 이선은 숲그림자를 바라보며 식구들에게 말했다. 

    “숲그림자에게 인사하세요.”

    식구들은 이선의 시선이 닿은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숲그림자가 긴 기둥 모양의 모자를 벗으며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윤식은 들고 있던 숟가락을 떨어트렸고 일선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명신은 입을 벌린 채 눈만 깜박거렸다. 숲그림자가 다가와 이선 옆, 빈 의자에 앉은 후 싱긋 미소 지었다. 

    네 사람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제 더는 어떤 일에도 놀라지 않을 거라 호언장담했던 윤식조차 식사를 이어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이선은 새벽에 숲을 산책하다가 숲그림자를 만났던 상황을 이야기하며 슈퍼 아저씨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식구들에게 환기시켰다. 일선이 입을 열었다. 

    “넌 지금 그 말을 믿는 거야? 근심거리를 가져간다고?”

    “밑져야 본전이지. 안 그러냐?”

    윤식이 말했다. 일선은 입을 이죽거리며 말했다. 

    “뭐 결국 아버지 뜻대로 되겠지만요. 우리 집 근심거리가 워낙 많아서 뭘 가져가 줄지 모르겠군요.”

    윤식은 입을 굳게 다문 채 일선에게 눈을 부라렸다. 일선은 고개를 돌려 버렸다. 명신이 말했다. 

    “여기 있는 게 재밌어야 머물 텐데. 뭘 어떻게 해 줘야 할까?” 

    일선이 비아냥거리며 대꾸했다. 

    “셰에라자드처럼 이야기를 들려주시던가요. 흥미진진한 이야기로 매일 죽음을 면했다는 아라비안나이트 말이에요.” 

    “그거 좋은 생각이구나.”

    명신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선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명신과 숲그림자를 번갈아 쳐다보다가 두 손을 들며 어깨를 으쓱했다. 이선은 기대감으로 가슴이 두근거렸다. 숲그림자라니! 어떻게 내게 이런 일이 생겼지? 이선은 숲그림자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숲그림자는 식탁 의자에 앉아 두 손을 턱에 괴고 식구들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창문으로 아침 햇빛이 발치까지 드리우자 숲그림자는 천천히 발을 그늘로 옮겼다. 


    윤식을 제외한 식구들은 숲그림자의 몸의 형태를 구분하게 되었다. 실룩이는 입 모양과 눈을 찡긋하는 것까지, 다채로운 표정에 사로잡혀서 하던 이야기를 중단하기도 했다. 처음엔 명신과 이선이, 나중에는 일선까지 번갈아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아침과 저녁, 한 번에 한 사람이 숲그림자에게 말하는 동안 다른 식구들은 2층에 머물렀다. 어차피 뻥 뚫린 거실 천장을 통해 이야기는 2층까지 들려왔다. 목소리가 작아 들리지 않으면 식구들은 1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에 앉아 귀를 기울였다. 윤식은 숲그림자가 머무는 건 허락했지만 그리 달가워하지 않았다. 명신이 윤식에게도 이야기할 것을 권했지만 윤식은 단호히 거부했다. 

    식구들은 숲그림자가 훌륭한 청자라는 것을 알았다. 귀 기울여 들어주었을뿐더러 적절하게 이야기에 반응했다. 목소리가 들리는 건 아니었지만 얼굴을 마주하고 말하다 보면 긴 침묵에 머물 때가 있었는데, 그때 숲그림자의 생각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전달받은 생각이 맞는지 의아해하며 빤히 쳐다보면 숲그림자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명신은 합법적 미국 체류 기한을 넘겨 어쩔 수 없이 불법체류자가 됐을 때의 심경을 말하며 눈물을 글썽였다. 불체자인 걸 모르는 사람들이 명신 앞에서 불체자를 욕하며 도덕성의 문제다, 거지 근성이다, 범죄자다, 라고 비난하는 걸 듣고만 있어야 했다고, 그 후로는 어떤 신분으로 체류하고 있냐고 물어볼까 봐 사람을 깊이 사귈 수도 없었다고 털어놓았다. 숲그림자는 눈을 한껏 찡그린 채 귀를 기울였다. 명신은 이야기를 멈추고 말을 잇지 못했다. 숲 그림자가 명신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맞잡은 손을 통해 숲그림자가 보내는 따뜻하고 충만한 위로가 명신에게로 밀려왔다. 그 위로는 명신의 해묵어 진득해진 상처와 슬픔을 몸 밖으로 밀어내 맞잡은 손을 통해 숲그림자에게로 옮겨 갔다. 전류가 흐르는 것처럼 감정이 이동하는 생생한 느낌에 놀라 명신은 맞잡은 손을 놓아 버렸다. 숲그림자의 어둠이 전보다 더 진해져 있었다. 

    첫날엔 숲그림자를 상대하는 순번을 정했지만, 이튿날부터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시작됐다. 말소리가 들려오면 나머지 세 사람은 하던 일을 멈추고 아래층에서 들려오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당신은 여기 숲에만 머물러야 하나요? 캘리포니아 세쿼이아 내셔널 파크에 있다는, 3200년 된 나무 들어 본 적 있어요? 내셔널 지오그래픽에서 그 나무 사진을 봤는데요, 눈 덮인 숲을 배경으로 존재 자체로 당당함과 기품을 뿜어내더라고요. 실제로 가서 보면 나무 밑동밖에 안 보이고 전체 높이를 가늠할 수도 없대요. 사진 아래에, 무릎까지 눈에 잠긴 사람이 나무 밑동 부근에 서 있었는데요, 3200년 된 나무 앞에서 아주 작은 개미처럼 보이더라니까요. 네? 내 이야기를 해 보라고요? 내 이야기라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어쩌면 숲에선 말할 수 있을지도 몰라요. 나중에, 당신과 숲에 가게 되면 그때 생각해 볼게요. 


    당신에게 반복되는 제 꿈 이야기를 들려 드릴게요. 전 꿈을 잘 기억하지 못하는 편인데 이 꿈만큼은 잠에서 깨어난 후에도 생생하답니다. 낯선 방 안에 저 혼자 서 있어요. 아무것도 없는, 흰 벽으로만 둘러싸인 방이에요. 여기가 어딘지, 왜 여기 있는지 어리둥절해서 전 주위를 두리번거려요. 그때 바닥이 흔들려요. 바닥에서 튀어나온 거대한 톱이 방바닥의 네 모서리를 정교하게 잘라요. 전 바닥과 함께 그대로 떨어져요. 정신을 차리면 아까와 똑같이 생긴 방에 서 있어요. 고요의 시간이 길게 흐르다가 갑자기, 또 두 발을 딛은 바닥이 흔들려요. 전 두려움에 사로잡혀요. 떨어질 때보다도 떨어질 것을 예감하는 순간이 더 무서워요. 다시 바닥 모서리가 잘려 나가고 저는 바닥과 함께 하강해요. 새로운 바닥이 계속 생기고 속수무책으로 떨어짐을 반복하죠. 그러다 문득 생각해요. 바닥을 정교하게 자르는 이는 누굴까.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는 설계자는 누굴까. 그게 궁금해서 전 어느새 두려움마저 잊어요. 


    난 말을 믿지 않아요. 세상 다정하게 너를 위한다는 소리, 다 개소리죠. 삼촌처럼 의지하라던 사장이 뭐라 그랬는지 알아요? 불체자가 구제받으려면 시민권자와 결혼하는 수밖에 없다며, 제게 사십 넘은 이혼녀를 만나 보라 하더라고요. 그러면서 소개비로 월급 석 달 치를 까겠다고 하잖아요! 니 인생을 구제하는데 너무 적은 대가라며 생색을 내는데, 어깨를 토닥이며 삐뚜름하게 웃는 모습이 역겨워 나도 모르게 주먹으로 한 대 갈기고 말았어요. 바닥에 나뒹굴며 코피를 흘리는 모습을 보니 어찌나 통쾌하던지! 그놈이 소리 지르더군요. 여기서 잘리면 갈 데나 있냐며, 미 이민국에 신고할 거라고요. 근데 일을 전해 들은 아버지 반응이 웃겼어요. 한숨을 쉬며 한참 후에나 하는 말이, 그냥 한 번 만나 보지 그랬냐는 거예요. 창창하게 젊은데 계속 불체자로 살 순 없는 거 아니냐고, 시민권 있는 여자랑 결혼해서 시민권 따고 부모 초청, 형제 초청해 주면 가족 모두가 불체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서요. 아, 시발. 그게 아들한테 할 소리예요? 처음부터 자기가 불체자가 되지 말았어야지, 그게 아버지로서 할 소리냐고요!


    숲그림자가 함께 머문 후 집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어디로 들어왔는지 모를 작고 하얀 새가 집 안을 날아다녔다. 거실 바닥 나무 틈새로 작은 새순이 솟아나더니 하루가 다르게 자라나 초록 잎과 빨간 열매를 맺었다. 넝쿨 식물이 내벽을 휘감으며 자라났고 햇빛이 들지 않는 그늘진 구석엔 진녹색 이끼가 세력을 넓혔다. 명신이 수세미로 박박 문질러 보았지만 소용없었다. 집 안은 점점 숲으로 변해 갔다. 

    숲그림자가 온 지 일주일이 지났을 때, 일선은 그동안 꺼 두었던 휴대폰의 전원을 켰다. 뒤늦은 문자 알림음이 울렸다. 휴대폰 화면을 들여다보던 일선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명신이 다가가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일선은 한참 후에야 대답했다. 

    “같이 일하던 사람인데, 며칠 전 미 이민국에서 사람들이 왔었대요.”

    윤식과 명신, 이선은 움직임을 멈춘 채 가만히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얼른 휴대폰 꺼라.”

    윤식이 입을 열었다. 일선이 휴대폰의 전원을 다시 끄려고 할 때 벨 소리가 울렸다. 번호를 확인한 일선은 전화를 받았다. 일선의 표정이 점점 어두워졌다. 말없이 듣고만 있던 일선은 알겠다고 대답한 후 전화를 끊었다. 무슨 일이냐는 명신의 재촉에 일선이 말했다.

    “이 집 빌려준 친군데, 팔기로 했다고 그만 나가 달래요.”

    “너는 어째 일 처리가 그 모양이냐. 그 친구도 그래. 자살한 사람 집에서 살아 줬으면 고마워해야지, 나가라고? 여기 아니면 갈 데가 없을까! 당장 나가자.”

    윤식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명신은 윤식을 만류했다. 

    “진짜로 일선이 직장 사장이 미 이민국에 신고한 모양인데, 살던 데로 돌아갈 수도 없잖아요. 갈 데는 있어요?”

    윤식은 휴대폰을 꺼내 저장된 번호를 훑으며 큰소리를 쳤다. 

    “우리가 왜 갈 데가 없어? 플로리다 형님한테 전화하면 당장 오라고 하실걸?” 

    윤식이 전화 거는 모습을 식구들은 말없이 지켜보았다. 오랜 신호음 후에 전화를 받은 사람은 젊은 여자였다. 당황해하는 윤식을 대신해 일선이 휴대폰을 넘겨받았다. 짧게 통화를 마치고 일선은 전화를 끊었다. 

    “큰아버지 전화번호 바뀐 거 모르셨어요? 그 여자가 벌써 3년째 사용한 번호라는데요.”

    윤식은 마룻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았다. 눈을 감은 채 명신에게 물었다. 

    “텍사스로 이사 간 제이슨네 전화번호 알아? 예전에 참 친하게 지냈잖아. 우리 사정도 많이 봐주고.”

    “언제적 이야기에요. 그때 이사 잘했냐고 전화했더니 더는 연락하지 말라더라고요.”

    명신은 조용히 대꾸했다. 윤식은 명신의 한국 친척들을 떠올렸지만 묻지 않았다. 그들은 윤식의 가족이 미국에서 잘 사는 줄 알고 있었다. 한국에 돌아가 봤자 집도 없고 돈도 없는데. 윤식은 회피해 왔던 진실을 마주할 수밖에 없었다. 돌아갈 곳이 없구나. 갈 곳도 없어. 

    윤식은 미국에서 보낸 이십여 년의 생활을 돌이켰다. 30년간 상환해야 할 빚을 지고 몇 년간 소유했던 집은 작지만 잔디가 깔린 이층집이었다. 한국 지인들에게 사진을 찍어 보내면 다들 미국 가서 성공했다며 윤식을 부러워했다. 작은 데리야키 식당을 운영하며 신청한 영주권이 거절된 후 윤식은 불안감에 휩싸였다. 힘겹게 일궈 놓은 미국에서의 삶을 내려놓고 패배자처럼 한국으로 돌아갈 순 없었다. 절박한 사정을 지인에게 건너 들었다며 윤식을 찾아온 한국인 사장은 자기 회사에서 영주권을 신청해 주겠다고 제안했다. 사장은 회사가 유지되어야 영주권도 받을 수 있다며 회사에 투자를 종용했다. 윤식은 뭔가 잘못됐다고 느끼면서도 되돌릴 수 없었다. 결국 가진 것을 잃고 영주권도 받지 못한 윤식의 삶은 빠르게 몰락했다. 

    그저 열심히 살아왔을 뿐인데, 잘살아 보려고 온 힘을 다했는데, 왜 이렇게 돼 버린 거지? 

    윤식은 그동안 외면했던 진심을 마주했다. 분노와 원망이 자신을 태워 버릴 것처럼 치솟았다. 내가 누구 때문에 그 고생을 한 건데! 다 자식들 좋은 환경에서 키우려고 아등바등 살았는데, 이젠 식구들마저! 내 고생은 무시하고 저 이상한 것을 의지한다. 윤식은 바닥에 주저앉은 채로 고개를 돌렸다. 넝쿨이 어제보다 무성해진 것 같았다. 손을 짚고 있는 마룻바닥 틈새에 푸른 이끼가 끼어 있었다. 윤식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를 질렀다. 

    “근심을 가져간다고? 저게 들어오고 더 나빠져 버렸어. 저 이상한 걸 당장 쫓아내!”

    식구들은 어쩔 줄 몰라 하며 숲그림자의 기색을 살폈다. 숲그림자는 한쪽 다리를 꼬고 소파에 앉아 있던 참이었다. 이선은 숲그림자가 더 검게 변했음을 알아차렸다. 숲그림자를 데리고 나가고 싶었다. 명신은 윤식을 똑바로 바라보며 대답했다. 

    “안 돼요. 내 말에 처음으로 귀 기울여 준 사람이에요.”

    “사람? 당신은 저게 사람으로 보여?”

    윤식이 기막혀하며 숲그림자를 가리켰다. 일선이 윤식의 팔을 붙잡으며 말했다.

    “그냥 좀 내버려 두라고요.”

    이선마저 자리에서 일어나 두 팔로 숲그림자를 가로막았다. 윤식의 얼굴은 터질 듯 새빨개졌다. 

    “저게 뭐라고 다 같이 편들며 나를 무시해? 이 집의 가장은 나라고!” 

    윤식은 계속 소리를 질렀다. 

    “저딴 게 집에 들어온 후 다들 이상해졌어. 사람도 아닌 게 우리 문제를 해결해 준다고? 지금껏 식구들을 위해 뼈 빠지게 고생한 건 나야! 근데 겨우 저런 것 때문에….” 

    윤식은 말을 잇지 못하고 몸을 바르르 떨었다. 고개를 두리번거리다가 식탁 위에 놓인 과일칼을 들고 숲그림자를 향해 달려갔다. 칼을 높이 들어 심장 부근을 찌르려고 했을 때, 숲그림자는 두 팔과 입을 크게 벌려 온몸으로 윤식을 삼켜 버렸다. 

    식구들은 모두 입을 벌린 채 순식간에 벌어진 일을 목도했다. 윤식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자 명신은 바닥에 주저앉았다. 이건 꿈이야, 꿈. 명신이 중얼거렸다. 

    이선은 그대로 얼어붙은 채 숲그림자를 바라보았다. 숲그림자가 이선 앞으로 다가왔다. 처음 만났을 때처럼 한 뼘을 사이에 두고 마주 섰다. 숲그림자가 긴 숨을 내쉬자 바람이 휘몰아치며 이선의 길어진 머리칼을 날렸다. 숲그림자는 몸을 돌려 창문으로 향했다. 쏟아지는 햇빛 아래 점점 희미해졌다. 숲그림자의 모습이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됐을 때, 창틀엔 검은 그을음만 남았다. 이선은 몸을 돌려 밖으로 달려 나갔다. 

    일선이 바닥에 주저앉은 명신의 몸을 일으켜 소파에 앉혔다. 어느새 집안은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아가 있었다. 흰 새도, 넝쿨식물도, 이끼도 없었다. 그 변화를 눈으로 훑은 후 일선은 명신 앞에서 입을 열었다. 

    “엄마는 어떻게 할 거예요?”

    명신은 일선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이제야 일선이 떠나게 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명신은 일선의 눈과 코, 입을 시선으로 어루만지며 희미하게 웃었다. 

    “걱정하지 마. 어떻게든 살아가겠지.” 

    일선은 눈가에 고인 눈물을 참으며 얼굴을 찡그렸다. 명신은 일선의 손을 잡고 토닥였다. 

    “지금껏 아빠와 엄마가 어떻게 버텨 왔는지 아니? 그래도 지금은 바닥이 아니라고 생각했단다. 미래에 더 나쁜 일이 생길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지금은 최악보다 나은 상황이라고. 그러니까 지금, 할 수 있는 것을 해 나가면 된다고.” 

    말을 마친 명신은 일선의 손을 놓고 눈을 감았다. 잠시 후 일선의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명신은 아이들이 자신을 붙잡고 있어서 지금껏 삶을 견뎌 왔다고 생각해 왔다. 하지만 일선의 발걸음 소리를 들으며 자신이 아이들을 움켜잡아 왔음을 깨달았다. 이제는 놓아주어야 한다는 것도. 한참 후 일선이 다가와 자신을 껴안은 후 현관문 쪽으로 걸어가는 기척을, 천천히 문이 열렸다가 닫히는 소리를, 그들의 오래된 차에 시동이 걸리는 소리를, 명신은 눈을 감은 채 그 모든 것을 받아들였다. 

    딛고 선 바닥의 모서리가 잘려 나가고 아래로 떨어지는 꿈이 이어지고 있다고 명신은 생각했다. 언제 더 깊은 바닥을 마주하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하강 전의 고요에 잠겨 있어도 되지 않을까. 사라진 남편이 돌아올 때까지만. 명신은 깊은 피로감을 느끼며 스러지는 식물처럼 마룻바닥에 드러누웠다. 

  

    이선은 숲을 향해 달렸다. 갈 수 있는 곳이 아무 데도 없다는 걸 알고 나서야 어디로 가고 싶은지가 또렷해졌다. 

    숲으로 깊이 들어갈수록 특유의 향기가 진했다. 이선은 달리기를 멈추고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걸음을 옮겼다. 발걸음을 받아주는 울퉁불퉁한 지면이 이선의 두려움과 불안을 그대로 흡수하는 듯했다. 숲에 고여있는 빛과 어둠을 바라보았다. 나무 앞 빛, 나무 뒤 어둠.

    숲그림자에게 이야기를 들려줄 때조차 이선은 자신에 대해 말하지 못했다. 미래에 대한 기대도, 희망도 없는 이야기는 뻔했다. 숲그림자와 함께 있는 것이 유일한 기쁨이라는 것을 식구들이 듣는 곳에서 말하고 싶지도 않았다. 이선에게 진심을 털어놓는 일이란 누군가를 슬프게 하고 울게 하는 것이었다. 더 말을 잇지 못하고 바닥을 내려다보기만 했을 때, 숲그림자는 가만히 바라봄으로 이선의 마음을 꿰뚫었다. 숲그림자에게 스며든 빛이 한순간 일렁이며 이선의 시선을 끌어올리더니 자신의 마음을 전해 주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사람들이 알지 못한다고 존재하는 것이 없는 건 아니라고. 

    생각에 골몰하며 걷다 보니 이선의 눈은 자연히 아래를 향하고 있었다. 시선에 보이는 것은 나무 밑동과 떨어진 나뭇잎뿐이었다. 이선은 발걸음을 멈췄다. 시선을 밑에서 위로 천천히 끌어올렸다. 잘 보이지 않는 나무 위쪽까지 보기 위해 허리를 뒤로 젖혔을 때, 3200년 된 나무 사진이 떠올랐다. 가지가 엉키고 꼬여서 그 자체로 거대한 숲처럼 보이는 나무 위쪽에 누군가 서 있었던 것을. 

    이선이 본 나무 사진은 한 번에 촬영된 것이 아니었다. 땅을 딛고 서서는 3200년 된 나무의 밑동밖에 볼 수 없어서 32일 동안 나무의 각 부분을 촬영하여 얻은 126장의 사진을 합해 전체 나무 사진을 완성했다고 했다. 나무 윗가지에 서 있는 사람은 조사단 중 누군가, 과학자이거나 등반가, 사진작가일지도 몰랐다. 나무 밑에 서 있는 사람은 윗가지에 있는 그를 절대 보지 못했겠지만, 그는 나무 위에 존재했다. 

    이선은 나무 위쪽을 올려다보며 생각했다. 어쩌면 나는 나무의 윗가지를 딛고 서 있는 건지도 몰라. 땅만 바라보는 사람들에게는 내가 보이지 않겠지. 하지만 나는 분명 여기 있어. 

    이선은 빽빽한 나무숲의 빛과 어둠 속으로 깊숙이 걸어갔다. 



작가소개 / 문소윤

2021년 <문학사상> 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아르코문학창작기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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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는 사람

없는 사람 이혜오 휴대폰 알람은 새벽마다 나를 밀쳤다. 나는 미지근해진 자리끼처럼 엎질러졌다. 바닥에 쏟아진 나를 겨우겨우 주워 모아 연습실로 출근해서 스트레칭을 하면, 그제야 팔다리가 달린 사람의 몸을 감각할 수 있었다. 확실히, 그 시절의 나는 이미 엎질러진 나를 어떻게든 수습하는 기분으로 살았던 것 같다. * 댄스 학원에 다닌 것은 열네 살 때부터였다. 길거리 캐스팅이 될 만큼 뛰어나게 예쁘지 않은 나 같은 애들은 대개 그때부터, 혹은 그전부터 학원을 다니며 오디션을 준비했다. 대형 기획사의 공채 오디션에서는 번번이 떨어졌고, 열여섯, 중3 때 중소형 기획사 하나에서 내 영상을 보고 대면 오디션을 보러 오라는 제안을 했다. 엄마와 함께 서울에 가서 대면 오디션을 봤고, 합격 통보를 받았다.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가득한 계약서에 사인을 했다. 당시 사옥이 위치해 있던 청담동은 내가 살던 동진과는 완전히 다른 세계처럼 보였다. 동네 전체가 백화점 같았다고 할까. 깨끗하고, 반들거리고, 비싼 것들과 알아들을 수 없는 외국어로 가득한. 그 세계의 일부가 된 것이, 나는 기뻤다. 그다음부터는 새벽에 일어나 아침 연습을 하고, 학교에 갔다가 하교 후에는 연습실에 가서 레슨을 받고, 레슨이 끝나면 밤까지 연습을 하다가 숙소에 가서 잠을 청하고 다시 학교에 가는 패턴의 반복이었다. 연습생 숙소에는 나처럼 지방에서 올라온 연습생들이 때에 따라 열 명에서 열네 명까지 모여 살았다. 어깨선을 넘는 긴 머리를 한 여자애 열네 명이 한 공간에 모여 살면 상상을 초월할 만큼의 머리카락이 바닥에 떨어진다. 끝없이 쌓이는 머리카락을 줍고, 줍고, 또 줍다 보면 문득 인간의 머리에서 머리카락이 계속 자란다는 사실이 지긋지긋해지곤 했다. 그곳에선 언제나, 모든 자원이, 부족했다. 동진에서 부모님과 살 때는 부족할 수 있다는 상상조차 해 보지 못한 것들까지. 화장실과 콘센트의 개수나 냉장고와 옷장과 침대의 넓이, 그리고 프라이버시 같은 것들. 내가 온전히 혼자 있을 수 있는 공간은 이불 속밖에 없었다. 나는 좁다란 이층 침대에서 늘 머리끝까지 이불을 뒤집어쓰고 이어폰을 꽂은 채 잠들었다. 그 어둡고 텁텁한 공간만을 편안하다고 느꼈다. 나는 천천히, 깨끗하고, 반들거리고, 비싼 것들과 알아들을 수 없는 외국어로 가득한 세계에는 내 자리가 없다는 것을 깨달아 갔다. 회사가 작아서인지 제대로 된 트레이닝 시스템이랄 게 없어서, 데뷔 조가 아닌 연습생들은 제대로 관리를 받지 못했다. 어린애들이 우르르 들어왔다가 또 우르르 나갔다. 들짐승처럼 방치된 우리는 서로를 경계하고 미워했다가 또 끌어안았다가 하며 그 시간을 견뎠다. 물론 견디지 못하는 애들이 더 많았다. 고참들은 조급하고 불안한 마음을 텃세로 풀었고, 신입들은 눈치만 보다가 나가떨어졌다. 매일 갈등이 있었고 매일 누군가 울었다. 누가 언제 집으로 돌아가게 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안정적인 관계를 만들기란 어렵다는 것. 그 정도의 스트레스 상황에서 남을 미워하지 않고 버티기는 힘들다는 것. 이제는

  • 관리자
  • 2023-11-15
멜들다

멜들다 양혜영 멜*이 들어왔다. 강 선주가 포구 안으로 들어온 멜 떼를 발견했다. 강선주는 포구에 매어 둔 배를 살피러 나왔다가 방파제 아래 바닷물이 은색으로 팔딱이는 것을 보고 멜 떼가 들어온 걸 알았다. 강 선주는 부리나케 집으로 달려가 양동이와 족대를 챙겨 나오며 멜이 들어왔다고 마을 안쪽을 향해 외쳤다. 그 소리를 들은 소도리 포구 사람들이 뛰어나왔다. 급히 나오느라 베개에 눌린 머리와 엉덩이께 대충 걸친 바지 차림을 하고도 양손 가득 뜰채와 양동이를 들고 나오는 것만은 잊지 않았다. 사람들은 가랑이가 젖는 것도 아랑곳 않고 바닷물 속으로 텀벙텀벙 들어가 뜰채로 멜을 건지기 시작했다. 사방에 은빛 물보라가 튀어 올랐다. “아이구, 이제랑 좀 앉아 쉬어 보카” 일찍 멜을 발견한 덕에 양껏 멜을 건진 강 선주가 슬그머니 방파제 한쪽에 술자리를 벌였다. 그 모습을 본 남자 서넛이 뜰채를 넘기고 방파제로 올라와 강 선주 옆에 앉았다. “아이고, 맛나다.” 검지 끝으로 멜의 꼬리지느러미를 잡아 입 속에 털어 넣으며 장 씨가 웃었다. “그냥 녹암쪄, 녹아.” “입 속에서 꿈틀꿈틀 헤엄쳠서.” “아이고, 맛 좋다. 맛 좋아.” 누가 채여 가기라도 할 것처럼 남자들은 쉴 새 없이 멜을 집어 먹었다. 멜이 수북이 쌓였던 접시가 어느새 허연 속살을 드러냈다. “아이고, 다 떨어지기 전에 여기들 왕 한잔씩 합써.” 강선주가 선심 쓰듯 바다에서 멜을 건지는 사람들에게 말했다. “좀 조용헙써! 바당 전세 냈수과!” 갑자기 강 선주를 향해 볼멘소리가 날아왔다. 대성호를 모는 박 선주였다. 민망해진 강선주가 두 눈을 부릅뜨고 박 선주를 쏘아보았다. 박선주도 강선주의 눈을 피하지 않고 한판 붙을 기세로 노려보았다. 옆에 있던 박 선주의 아내가 황급히 박 선주의 팔꿈치를 낚아챘다. “그냥 멜이나 건집써. 시간 아깝수다.” 아내의 말에 박 선주가 고개를 돌리고 다시 멜을 건지기 시작했지만, 잔뜩 굳은 어깨가 못마땅한 심사를 그대로 드러냈다. 강 선주는 그런 박 선주의 뒤통수를 계속 노려보다 바지통을 잡아끄는 일행의 손끝에 못 이긴 척 앉았다. 보는 눈이 너무 많았다. 보통 멜 떼가 머무는 시간은 한 시간이 채 되지 않았다. 그래서 웬만한 소도리 포구 사람들은 죄다 포구에 나와 있었다. 이미 강 선주와 박 선주 사이가 껄끄럽다는 소문을 아는 사람들이 호기심 가득한 시선으로 둘을 힐끗거렸다. 강 선주는 그런 사람들의 눈 때문에 치밀어 오르는 화를 참아 눌렀다. 포구 사람들 사이에 끼어 멜을 건지던 정순도 그 모습을 보고 얼굴을 찌푸렸다. 둘 만큼이나 정순도 그들과 껄끄러웠다. 몇 년 전 화재 보상 문제로 생긴 앙금이 다 풀리지 않은 탓이었다. 한숨을 쉬며 시선을 내리자 바닷물 속에서 희끗거리는 멜 떼가 보였다. 정순은 손을

  • 관리자
  • 2023-11-15
물을 잡으면

물을 잡으면 호인 티브이 화면 가득 연한 푸른색의 거인이 누워 있다. 거인의 배가 천천히 오르내리며 숨을 쉬는 동안 배꼽에서 꿈틀꿈틀 연두색 싹이 올라온다. 카메라가 뒤로 빠지듯 시야가 확 멀어지며 줄기가 솟구쳐 오른 끝에 등불처럼 맑고 밝은 꽃봉오리가 피어나고, 봉오리가 활짝 연꽃으로 벌어지자 그 안에서 한 남자가 나타난다. 화면이 빙글 돌며 보여 주는 남자는 사방마다 하나씩 네 개의 얼굴을 가졌다. 남자가 눈을 뜨자 주변의 어둠이, 캄캄한 태초의 우주가, 섬세하게 일렁이며 여명이 밝아 온다. -멋있다. 저거 뭐니? 말을 걸 기회를 노리던 입에서 나도 모르게 탄성이 튀어나온다. -멋지구리하면, 게임 광고일 걸요? 한솔이는 티브이 쪽을 보지도 않고 중얼댄다. 그래도 그 정도면 근래 보기 드물게 긴 대답이다. 나는 용기를 얻어 질문을 계속해 본다. -게임? 무슨 게임인지 아니? 한솔이는 티브이를 흘끔 보더니 곧 다시 고개를 숙인다. 대답은 짧고 무성의해진다. -인도 신화예요. 지난해 동남아 여행에서 본 기억이 난다. 저 거인들은 비슈누나 브라마 같은 힌두교의 신들이겠구나. 티브이 화면이 휙휙 바뀌더니 중세 유럽풍 갑옷을 입은 힌두 신들의 영상이 번쩍거리면서 브라흐마가 눈을 뜨면 새로운 칼파가 시작된다아, 낮고 웅장한 소리가 울린다. 나를 사로잡은 건 멋지구리한 신들의 모습보다는 칼파라는 단어다. 칼파, 겁파, 겁(劫). 내가 아는 하나의 겁은, 세상이 생겨났다가 사라지는 하나의 주기, 천지가 한 번 개벽한 뒤부터 다음 개벽할 때까지의 시간이다. 그 무한한 시간이 게임이 서툰 아이에게는 한순간에 끝나겠구나. 그리고 곧이어 하나의 겁이 새로 시작해서 금방 끝나고, 또다시 새로운 겁이 시작하겠지. -저거, 네가 하는 게임이니? 내 질문은 어딘가 건성이 되어 버린다. -아니요. -요즘 컴퓨터 게임은 여럿이 함께 한다며? 너도 그러니? 한솔이는 수저를 탁 내려놓고 자기 방으로 가 버린다. 티브이에서는 신들과 악마들이 단 몇 초 화려한 전쟁을 벌이다 엄청난 폭발을 일으킨다. 하나의 칼파가 끝나 세상이 캄캄해지고 티브이 화면 가득 게임의 이름이 반짝거린다. 광고가 끝나고 드라마가 시작하지만, 텅 빈 거실에서 티브이나 보고 있을 생각은 없다. 남편은 집을 나간 후 생활비를 보내지 않고, 나는 돈을 벌어야 한다. 비즈 팔찌를 만들려고 작업실로 가는데 갑자기 불길한 느낌이 든다. 무의식적인 곁눈질이 무언가 이상한 걸 감지한다. 고개를 돌리자 어항이 보이고, 역시나, 금붕어 한 마리가 불길한 수류를 따라 떠돌고 있다. 지난 보름 사이 네 번째. 금붕어가 죽었다. 이 년 전, 남편이 한솔이를 위해 사 왔던 금붕어가. 이 년 전 지나가 버린 그 시절 책임감 있던 가장이 착했던 아들을 위해 사 왔던 그 금붕어가. -*- 시조카 아이가 우리 집에 온 건 이 년 전, 그러니까 재작년 가을이었다. 툭하면 사람을 패고 다니는 시동생이 또 사고를 치고, 동서가 죽는다고 소동을 벌인 때문이었다. 부부가

  • 관리자
  • 2023-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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