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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연고 시간

  • 작성일 2023-03-31
  • 조회수 1,573


[아르코문학창작기금 - 소설(단편)]




무연고 시간

정영선

장군이 기차로 압록을 건너 선양 톈진을 지나 하노이에 갈 거라는 뉴스를 듣는 순간 땀이 나고 입안이 말랐다. 가는 데만 3박 4일 60시간이라고 했다. 기차가 평양에서 하노이를 가는 게 아니라 내 몸속에서 출발해서 몸속 어딘가로 가는 것처럼 심장이 쿵쿵 뛰었다.

나는 라오스 폰사완의 명캄학교로 봉사 활동을 가지 않기로 결정했다. 성적 우수자는 숙박비만 내는 조건이었는데, 그 정도면 라오스 5박 6일 경비로 껌값이라고 했지만 신청했던 걸 취소했다. 물론 숙박비가 부담스럽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몸이 아프다든가 알바를 해야 한다든가, 많은 핑계를 생각했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물론 장군 때문이라는 말은 입 밖에도 내지 않았다. 장군하고 관계없는 일이었으니. 은주 언니가 안 가서 가기 싫다는 말은 더 할 수 없었다. 그냥 가기 싫다고만 했다.

교감 선생님이 불렀다. 우리를 아들과 딸이라 부르는 사람이었는데 우리들 중 누구도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았다. 머리는 벗어지고 배가 좀 나왔다. 아침마다 운동장을 뛰고 체육관에서 헬스를 하는데도 그랬다. 늘 먹고 늘 운동을 하고. 한국 사람들은 이렇게 산다. 헬스장에서 만났을 때 했던 말이었다. 봄방학이라 한두 선생님만 노트북에 코를 박고 있을 뿐 교무실은 고요했는데, 교감 선생님은 나를 보자마자 의자에서 일어나 왜 취소했는지 취소한 이유가 뭔지 연거푸 물었다. 돌아오기 전날이 동명이 생일이라는 말을 준비해 왔지만 하고 싶지 않았다. 한 번 더 대답을 다그친 교감 선생님이 책상을 돌아 나와 내 귀에 대고 말했다. 무연고 성적 우수 학생에게 후원금이 들어왔다며,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했다. 무연고, 가족도 없이 혼자 남한으로 넘어온 사람. 다섯 살 동생이 쉼터에 있었지만, 나는 진짜 무연고이고 싶었다.

4,500킬로 가는 데 60시간 걸린다는데, 그냥 비행기 타고 가지, 꼭 티를 내네. 진석이 소리를 죽여 웃었다. 석식을 먹고 식당 앞 벤치에서 바람을 쐬고 있을 때였다. 공부도 안 하면서 방학 특강을 신청해 놓고 학교에서 뒹굴고 있는, 싫지 않은 아이였다. 장군은 광저우 쪽으로 가네. 나는 쿤밍 쪽으로 왔는데 거기서 라오스로. 누나도 라오스로 갔지? 응. 나는 짧게 대답했다. 아, 진짜 힘들었어. 버스에서 먹고 자고 똥 싸고. 죽는 줄 알았다니까. 사 일쯤 그랬나…. 누나는 며칠 동안 탔어? 나도 그 정도. 입가에 묻은 케첩이 거슬려 진석의 얼굴을 보고 있기가 싫었다. 진석이 허벅지를 바짝 붙였다. 단단하고 부드럽고 따뜻한 것이 싫지는 않았는데, 조금 떨어져 앉았다. 경애하는 장군님도 기차에서 자고 먹고 똥 싸고…. 진석이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웃었다. 이 간나가, 그 말이 내 몸 어느 구석에 박혀 있다 몸을 뚫고 나왔는지, 진석도 눈에 티가 들어간 것처럼 깜짝 놀라는 표정이었다.


비행기는 밤 7시 30분에 출발했다. 라오스의 비엔티안까지는 6시간 걸린다고 들었다. 비행기에 타서 검은 창을 내다보며, 하늘을 볼 수 있는 비행기를 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물을 두 잔 얻어먹었고 입국 신고서를 썼고 면세품 잡지를 뒤적거리다 프리지어 향수를 오랫동안 들여다보았다. 도착하고 보니 밤 11시 30분이었다. 6시간 걸려서 왔는데 4시간 만에 닿은 것이었다. 시차라는 건 알았지만 기분은 이상했다. 물을 두 잔이나 먹고 검은 창밖을 내다보고 허리를 펴고 잠을 자기도 하고 잡지도 뒤적거린 그 시간 중 일부가 사라진 것이었다. 어느 게 남고 어느 게 사라졌는지 알 수 없었지만 공항 앞에 대기해 있던 버스를 타면서도 나는 뭔가를 남겨 두고 온 것 같아 뒤를 돌아보고 싶었다.

다음 날 공항 근처의 호텔에서 잠시 눈만 붙이고 날이 새기도 전에 버스를 탔다. 메콩강 쪽배를 잠시 보고 점심만 먹는데도 밤이 되어야 폰사완에 닿을 거라고 했다.

나무 울타리 사이로 보이는 강은 낯설었다. 깊어 보이지도 넓어 보이지도 위험해 보이지도 않았다. 강 봐라! 저 쪽배잖아. 교감 선생님만 우리가 넘어온 현장을 목격한 듯 흥분한 목소리였다. 나는 강 건너편이 태국이냐고 묻고 싶어 목젖이 부어올랐다. 몇 명이 등을 돌린 채 강을 보고 있었다. 연주 언니는 키만 봐도 알 것 같았다 머리를 두 갈래로 묶고 스웨터를 어깨에 걸치고 있다. 그 옆에 키가 한 뼘 더 큰 사람은 정심 언니다. 정심 언니는 우리 학교에서 나이가 제일 많다. 28살이란 소문도 있었다. 돈 벌면 중국에 있는 애를 데리고 와야 한다며, 졸업하면 바로 요리 학원 갈 거라고 했다. 키가 작은 연주 언니는 공부를 잘해 이미 간호대학에 합격을 했다. 그 옆은 머리로 봐서는 소민이 같은데, 학교 축제 때 춤으로 1등을 한 아이다. 이게 메콩강이라고? 처음 본다. 그때는 너무 깜깜해서…. 작은 목소리였지만 선명하게 들렸다. 아, 진짜 무서웠어. 연주 언니가 정심 언니의 등에 얼굴을 묻었다. 저 작은 배에 열 명이 탔다니까, 가라앉는 줄 알았어. 연주 언니가 반대편 강기슭에 매여 있는 쪽배를 가리켰다. 엄청 큰 강인 줄 알았는데 작구나야. 그렇게 겁을 먹는 게 아니었는데. 겨울옷 버려야 다 탈 수 있다고 해서 중국서 산 새 옷도 버리고.

정심 언니가 조금 떨어져 강 건너편을 보고 있는 사람을 턱으로 가리키며 누구냐고 물었다. 에스더 선생님, 게스트라고 했잖아요. 나는 작게 이야기했다. 에스더 선생님이 잠깐 고개를 돌려 웃었다. 햇빛 아래서 보니 분홍색 티셔츠는 낡았고 피부도 푸석푸석하고 머릿결도 좀 상한 것 같았다.

연주 언니가 강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두 명도 찍고 네 명도 찍고 앉아서도 찍고 서서도 찍고. 에스더 선생님에게는 아무도 찍자는 말을 하지 않았다. 선생님은 무료한 듯 무릎을 폈다 굽히고 허리와 긴 목을 돌렸다. 그리고는 무심한 표정으로 풍경 사진을 몇 장 찍더니 사진을 찍고 있던 아이들에게 물었다. 이번 봉사 활동 취소한 사람 많았다며? 서원 언니요? 소민의 목소리였다. 나는 돌아보고 싶은 걸 참았다. 서원이는 왔잖아, 저기 있네. 정심 언니가 턱으로 나를 가리켰다. 나는 에스더 선생님과 눈이 마주칠까 봐 얼른 강으로 눈을 돌렸다. 아, 맞네. 모르겠는데요. 소민이 휴대폰으로 찍은 사진을 들여다보며 버스 쪽으로 걷고 있었다. 선생님과 나는 단 몇 시간이었지만 이름도 생각나지 않는 공항 옆의 호텔에서 한방을 썼다.

메콩강의 쪽배를 보러 내렸을 때도 배가 고팠는데 1시간이나 더 달려 식당에 도착했다. 흙먼지가 뽀얗게 덮인 가게 문을 지나 식당 안으로 들어서자 미리 주문을 해 두었던 듯 쌀국수가 나왔다. 하얀 국수가 잠긴 국물에서 약하지만 독특한 향신료 냄새가 났다. 메콩강 쪽배를 보고 나면 옛날 생각이 나서 밥 먹기가 좀 힘들더라고. 진석에게 들은 말이 생각났다. 그 앤 봉사하러 가기로 결정한 다음 날부터 틈만 나면 이번 여행을 안내했다. 자기도 작년에 다 듣고 갔다고, 무지개학교 재학생과 출신들로 구성되는 무지개봉사단은 교감 선생님의 최고 역점 사업이라고 아는 체했다. 올해 5기는 19명이었다.

옆에 앉은 소민이 건져 올리던 국수 가락을 도로 내리고 일어났다. 소문이 맞다면 소민도 이제 무연고다. 같이 온 아버지가 암으로 돌아가셨다고 했다. 앞 테이블에 앉은 아이들도 먹는 흉내만 내고 나갔다. 6인용 테이블에 앉아 있는 사람은 에스더 선생님과 나뿐이다. 나는 은주 언니 이야기를 할지 말지 좀 망설였다. 왜 안 먹어요? 배고플 텐데. 에스더 선생님은 국수를 입에 물고 눈을 치켜뜬 채 물었다. 배가 고파서 그런지 먹을 만해요. 먹을 만한 게 아니라 엄청 맛있다는 표정이었다. 가이드가 더 먹으라며 면이 담긴 그릇을 건넸다. 선생님은 잠시 망설이더니 한 젓가락을 집어내고 옆 테이블로 그릇을 넘겼다. 베트남에서는 먹지 못해 쩔쩔맸는데, 국수가 변했는지 내가 변했는지, 거기도 먼지가 자욱했고 오토바이와 자전거가 많이 다니던데. 선생님은 목을 빼고 거리를 잠시 내다보았다. 나는 은주 언니 이야기를, 언니와 무지개학교 다닐 때 같은 방을 썼고. 지금도 명절이거나 기숙사를 비워야 하는 방학에는 수원 권선구에 있는 언니 집에 간다는 걸 말하지 않았다. 대학 입시 준비반이었던 언니는 한 달 만에 대학을 포기하고 휴대폰 부품 회사에 취직을 했다. 언니가 월급 받아 산 침대에 누워서 브로커가 보내 준 언니의 가족들 사진을 같이 봤다. 엄마와 남동생이었다. 같은 마을에 사는 이모와 이모부, 사촌들까지. 이모의 환갑이라고 했다. 위병이 있어 얼마 못 산다고 했는데 아직 살았다고. 남동생은 광산 일을 하다 자동차 정비를 배우고 있다고 했다. 그래서 생활비를 자신이 줘야 한다고. 언니의 다섯 살 아들을 키우고 있는 건 알고 있었다. 국경이 좀 잠잠해지면 내년에는…. 나는 그때쯤이면 늘 소변이 마려웠고 잠이 왔고 이도저도 아니면 기침을 했다. 은주 언니는 그 이유를 알고 있을 것이다.

은주 언니는 에스더 선생님에게 전화가 왔다고 했다. 교감 선생님이 숙박비가 없어 취소한 학생이 있는데 후원을 해 주면 안 되겠냐고 했다는 것이다. 돈이 없으면 안 가면 되지 그것까지 신세 지면서 꼭 가야 해? 목소리가 조금 높아졌다. 못 낸다고 하면 되지 않냐고 하자, 그게 아니고…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겠어? 했다. 한숨을 쉰 후 언니는 잘해 주라는 말을 덧붙였다. 거지도 아니고, 그 말을 듣지 않아도 들은 것 같았다. 에스더 선생님은 언니가 하나원을 나가 정착한 지역의 담당자였다. 누구나 그런 담당자가 있었다. 휴대폰 개통과 전입신고, 은행 업무, 장보기 등을 같이 하는 사람이었다. 나는 누구랑 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데, 아니 기억하고 싶지도 않은데, 언니는 그 선생님과 휴대폰도 개통하고 장도 같이 보고 전입신고도 하고, 첫 월급 타 같이 밥도 먹었다.

버스에 앉아 차창으로 눈을 돌렸다. 잠시 보이던 허름한 상가들도 사라지고 산이었다. 산을 돌고 나오자 길가에 먼지를 둘러쓴 집들이 이어졌다. 이제 1시간만 더 가면 폰사완이라고, 앞에 앉은 가이드가 말했다. 그는 허리에 커다란 전대를 차고 한국 돈을 라오스 돈으로 바꿔 주었다. 라오스에 10년 넘게 살아서 인지, 라오스 사람 같지도 우리나라 사람 같지도 않았다. 검게 그을린 피부가 기름을 바른 듯 주름 하나 없이 반질거렸다. 나는 3만 원을 바꾸었다. 그걸로는 살 게 없다고 더 바꾸라고 했지만 일단 2만 원은 그대로 두었다. 누군가 북한보다 더 못산다고 중얼거렸다. 나도 같은 생각을 했다. 빨랫줄에 걸린 낡고 얇은 옷과 겹겹으로 에워싸인 산을 보고 있으면 어디선가 앓는 소리가, 누군가 저 나무 뒤, 흙먼지 속에서 눈물도 없이 울고 있을 것 같았다. 내가 그랬듯.

긴 팔 셔츠 위에 패딩 잠바까지 입었다. 한 시간 간격으로 가을과 겨울이 오는 것 같았다. 숙소 로비에서 에스더 선생님이 지친 목소리로 300킬로를 오는 데 9시간 걸렸다고 했다. 시속 35킬로 정도, 정체된 곳도 없었고 사고가 나서 멈춘 곳도 없었는데 진짜 느리다고, 느낌상으로는 1천 킬로 이상 온 기분이라고 했다. 내 옆에서 그 말을 듣던 연주 언니가 입을 삐쭉였다. 북한 생각을 했을 거다

접수대 앞에서 가이드가 방 열쇠를 나눠 주고 있었다. 에스더 선생님이랑 또 같은 방을 써야 된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했다. 연주 언니가 슬쩍 팔을 당겼다. 우리 방에서 자자. 언니와 한방을 쓰는 향이도 고개를 끄덕였다. 외부를 두고 내부의 결속을 다지는 건 거의 본능이었다. 그 말을 전하자 선생님도 좋아하는 듯했다. 그 모습을 보니 어쩐지 손해를 본 것 같기도 했지만 그래도 언니랑 자는 게 편했다. 교감 선생님은 알아서 하라고 했다. 우리는 보란 듯이 하이 파이브를 하고 여행 가방을 끌고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언니와 같은 침대를 쓸 줄 알았는데 둘이 안쪽 침대를 쓰고 바깥 침대를 나 혼자 쓰게 했다. 이번엔 내가 외부가 된 것 같았다. 잠시 멀뚱하게 앉아 있다 휴대폰을 들었다. 장군이 하노이에 닿았다고 뉴스에서 난리야. 누나들이랑 돌아오는 날짜가 같더라고, 알아? 진석이 조금 전에 보낸 카톡 문자였다. 관심 없어. 나는 잘라 말했다. 누나 나 보고 싶지? 심장이 쿵 뛰었다. 나는 누나 같은 스타일이 좋아. 키 크고 늘씬하고. 진석은 중국에서 내가 뭘 했는지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마사지 가게 주인은 조용하고 얌전한 사람이었다. 큰 집이 있고 차도 좋았다. 가끔 남자들 방으로 들어가라고 했다. 시키는 대로 하면 된다고. 그런 날은 깜짝 놀랄 돈을 주었다. 그 돈을 몇 번만 받으면 엄마랑 둘이 다시 고향으로 가서 잘 살 수 있을 것 같았는데… 고향 가는 길은 점점 멀어졌다. 침대에 앉아 답을 생각하고 있는데 진석이 바로 문자를 보냈다. 어떤 사람이 북의 엄마하고 오빠가 죽은 줄도 모르고 계속 돈을 보냈대. 누군데? 몰라 누군지는, 거의 멘붕이래. 이제 아무도 없다고, 진짜 무연고라고. 나는 더 이상 카톡을 하기가 싫어져서 선생님이 부른다고 거짓말을 했다.

거짓말은 다리 같다. 크고 작은 어려움을 슬쩍 넘어간다. 북한을 떠나 이곳으로 올 수 있었던 건 발도 손도 아닌 거짓말이었다. 압록강을 건널 땐 친구 만나러 간다고 했는데… 아버진 그게 거짓말인 줄 알았을까. 엄마도 마찬가지였다. 연변에서는 조선족이라고 했고 남한으로 안내할 브로커에게는 내 나이를 세 살이나 내려 스무 살이라고 했다. 그래야 남한에 가서 공부도 하고 집을 각자 받을 수 있다 했는데, 그건 거짓말 축에도 들지 못하는 것들이었다.

호텔이라고 했지만 먹을 건 별로 없었다. 냄새 나는 고깃국물을 부어 먹어야 하는 국수와 찰기 없는 밥, 쓸어 놓은 채소들, 달고 느끼한 커피, 계란 프라이. 누군가에게 들은 아침 메뉴였다. 언니와 나는 식당에 내려가지 않았다. 늦게 일어났기 때문이다. 어젯밤 연주 언니는 자기 본명이 연심이었다고 하나원 나오면서 개명했다고 했다. 향이는 언니 본명이 충심이 아니냐고 했고, 연주 언니는 충심이는 지금 원주에서 중학교에 다닌다고, 나이 차가 얼마인데 그런 소리를 하냐고 했다. 향이는 아마도 키가 비슷해서 그런 것 같다고 했는데, 연주 언니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사람 무시한다며 베개를 내동댕이쳤다. 향이는 그게 아니라고 변명했지만, 그게 아니면 뭐냐고 더 몰아붙였다. 향이는 아무 말도 못 하고 베개를 들고 다른 방으로 갔다. 향이가 가고 난 다음에 연주 언니는 향이의 험담을 엄청 했다. 북에서 빽 써서 예술단 들어가려고 했는데 못 들어가서 넘어온 거라며, 그 돈이 다 남쪽에서 올라온 향이 이모가 보낸 돈이었는데 그 아들은 학교도 안 보내고 구박했다고. 그 이야기를 해 준 언니는 지난달에 부자 남편을 만나 잘살고 있다고 했다. 남편이 한 달에 생활비를 이백만 원이나 준대. 버스에서 실컷 잤는데 또 잠이 왔다. 그 언니한테서 아까 문자가 왔는데 누가 가족이 죽은 줄도 모르고 2년 넘게 북으로 돈을 보냈다는데, 미쳤지. 나는 그 사람이 누구냐고 물었다. 언니도 진석이처럼 모른다고 했다. 그리고는 향이가 진석이를 좋아한다는 이야기를 했다. 갑자기 잠이 확 깼다. 몇 달 전에 언니한테 삼만 원 꾸어 가 일주일 뒤에 갚았는데, 그 돈으로 진석이 생일 선물을 사 줬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잠이 완전히 달아났다. 이제 자야겠다며 언니가 등을 돌렸다. 나는 잠이 안 온다고 이야기를 더 해 달라고 졸랐다. 향이와 진석의 이야기를 더 듣고 싶었지만 언니는 고향 이야기를 줄줄이 했다. 집 앞에 있던 살구나무와 강에서 고기 잡던 이야기, 이틀 굶고 먹은 옥수수죽, 몰래 보던 알판, 의붓아버지한테서 맞은 것, 겨울에 압록강 건넜는데 물이 코까지 들어와서 떠내려갈 뻔했다는 말까지. 그것들이 낡은 폰사완의 호텔 방을 잠시 서성이다 내 귀로 들어왔다. 나는 어디선가에서 들었던 이야기를 처음 들은 것처럼, 그 이야기를 듣자고 이곳에 온 것처럼 곱다시 다 들었다. 언니가 자지 않았다면 나도 무슨 이야기를 했을 것 같은 밤이었다.

안내원은 중국 국경을 넘을 때까지 되도록 차에서 내리지 말라고 했다. 휴게실은 언제나 위험하다고, 중국 경찰이 볼 수도 있고 누가 신고를 할 수도 있으니 차 안의 화장실을 이용하고 안내원이 주는 음식을 먹으라고 했다. 그 말대로 낮에는 버스에서 내리는 사람이 없었지만 밤에는 몇 명이 내려서 다리를 굽혔다 편 후 화장실도 가고 매점에서 해바라기씨도 샀다. 엄마도 그랬다. 차에서 내려 허리를 두어 번 돌리고 매점 쪽으로 가고 있는데, 남자 두 명이 다가갔다. 차 안은 순간 얼음이 언 듯 얼어붙었고 동명이는 가느다란 신음 소리를 내며 차창에 매달렸다. 안내원이 동명이를 떼어낸 후 눈을 지릅뜨며 입술 위에 검지를 세웠다. 동명이가 제 손으로 입을 막았다. 안내원은 그래야 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후 시동을 걸고 출발을 했다. 엄마 소식은 돌아가서 확인해 줄 테니 걱정 말라고 했다. 운이 좋으면 풀려나고 운이 나쁘면 교화소라고, 엄마보다 동명이가 더 걱정이라고 했다. 한국말도 모르는 네 살짜리가 한국 가서 어떻게 살지? 그 말을 알아들었다는 듯이 동명이가 고개를 떨구었다.

깜깜한 밤이었다. 안내원은 날이 새기 전에 그 산을 넘어야 한다고 했다. 그 산을 넘으면 라오스라고. 사람들은 동명이가 울까 봐 걱정했다. 발각되면 모두 엄마처럼 붙잡혀 갈 것이다. 붙잡히면 그 자리서 죽겠다고. 청산가리를 가진 사람도 있고 농약을 넣어 온 사람도 있었다. 나는 그것보다 돈이 제일 좋다는 생각을 했다. 돈이 있으면 중국 공안도 구워삶을 수 있었다. 돈만 있다면…. 산을 넘어온 뒤 라오스 국경 근처의 오두막에서 하룻밤을 잤다. 다음날 깜깜한 밤이 되길 기다렸다 오두막을 나섰다. 울퉁불퉁한 돌 사이로 미끄러운 흙이 밟혔다. 풀 냄새가 나고 바람이 불었다. 추워서 겉옷을 하나 더 꺼냈다. 버스에서 올린 토사물의 시큼한 냄새에 고개를 돌렸다. 동명이의 옷에서는 냄새가 더 심했다. 동명이는 엄마가 붙잡혀 간 후 먹는 것도 없는데 구역질을 했다. 올리는 게 없어도 냄새는 지독했다. 뒷사람들이 앞 사람을 놓칠까 봐 자주 신발 뒤축을 밟았다. 걸음이 느린 동명이를 세 사람이 차례로 업은 뒤에 강가에 닿았다. 그 강만 건너면 태국이라고 했다. 손으로 더듬어 배에 탔다. 등 뒤에 붙은 아줌마의 땀 냄새 입 냄새, 앞에 앉은 동명이의 오줌 냄새, 그것보다 물비린내가 더 심했다. 저기까지만 가면 된다. 안내원은 맞은편 반딧불처럼 희미한 불빛을 향해 노를 저었다. 나는 배가 조그만 옆으로 기울어지면 앞에 앉은 동명이를 강으로 밀어 넣고 싶었다. 아버지가 누구인지도 모르니 그래도 될 것 같았다.

버스에서 만난 에스더 선생님이 기다렸다는 듯이, 난방도 안 되고 따뜻한 물도 안 나오고 얼어 죽는 줄 알았어요, 했다. 아무리 고산 지대라 해도 열대 지방에 와서 벌벌 떨었다니까. 선생은 괜히 와 가지고 고생이라는 표정이었다. 후원금 이야기까지 할까 봐 나도 얼른 찬물에 머리를 감았다고 했다. 돌아보는 향이와 눈이 마주쳤지만 누구랑 잤는지 묻지 않았다.

교감 선생님이 마이크를 잡더니 차만 타면 잔다고 야단을 쳤다. 라오스 풍경도 좀 봐라, 제발. 그 순간에도 버스를 스치듯이 오토바이가 지나갔다. 흰 셔츠를 입은 여학생이었다. 그 학생을 보기 위해 목을 뺐는데 버스 창에 머리만 부딪쳤다. 흙먼지를 잔뜩 뒤집어쓴 집들과 그 앞에 널린 낡은 빨래들. 작고 야윈 어른과 아이 몇 명, 그 옆에 바나나 나무가 있었다. 도대체 무얼 보라는 건지, 적당히 느리고 적당히 흔들리는 버스의 리듬 탓인지 잠이 왔다.

화장실인 듯 버스가 멈추는 게 느껴졌다. 다 내리라는 말이 들렸지만 그대로 눈을 감고 있었다. 그 학교는 화장실도 없나 별나게 구네, 라는 생각도 했는데 누군가 어깨를 치며 내리라고 했다. 가이드였다. 끈적끈적한 눈길이 느껴져 반사적으로 일어났다. 어디서 본 듯하다는 말이 머리채를 잡듯 따라와 좌석 등받이에 세게 부딪혔다.

남자와 여자가 마주 보고 공놀이를 하고 있었다. 흙먼지에 둘러싸인 집 어디에 저런 고운 옷들이 보관되어 있었는지, 여자들은 화려한 수가 놓인 치마와 구슬이 달린 모자를 썼다. 남자들은 머리를 가지런히 빗고 가죽 구두를 신었다. 한 남자가 우산을 쓴 여자에게 조심스럽게 작은 공을 던졌다. 남자들의 끝에 교감 선생님이 서 있었다. 앞에 선 여자들은 당황하고 남자들은 줄을 벗어났다. 가이드가 몽족의 축제 뇬막헌이라고 했다. 공을 받는 것은 던진 사람의 프러포즈를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교감 선생님이 던진 공을 받은 여자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교감 선생님이 축제를 다 망친 것 같았다. 향이와 나란히 서 있던 에스더 선생님과 잠깐 눈이 마주쳤다.

향이가 오더니, 에스더 선생님 이름 말이에요, 했다. 그 이름이 성경에 나오는데 대학 때부터 교회에는 안 다닌대요. 그런데 다들 열심히 다니는 줄 안다고. 이름을 바꾸라고 했어요. 나도 바꿀 생각이라고. 그러긴 싫대요. 참 언니 원래 이름도 알더라고요. 광숙이라고, 맞아요? 어떻게 알았대? 선생님 북한 친구 중에 언니 아는 사람이 있다고 했어요. 이번 봉사 활동도 신청했다가 취소하고 다시 신청했다던데…. 왜 그랬냐고 물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왜 취소했다 다시 왔냐고요? 더 큰 소리로 물어서 사람들이 쳐다보았다. 진석 오빠랑 놀려고 했죠? 교감 선생님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보고 있었다. 진짜 그랬냐는 듯이. 조그마한 게 못 하는 말이 없어. 나는 손으로 향이의 머리를 쥐어박고 마을 쪽으로 걸었다.

향이 따라왔다. 아, 뭐 이런데 다 봉사 활동을 오고, 고향보다 더 못사는데. 거긴 그래도 공장도 있고 아파트도 있는데 여긴 뭐…, 향이 툴툴댔다. 돼지가 다가왔다. 검고 통통하고 코가 뾰족한 것 같았다. 여긴 돼지도 돌아다니네. 그것도 불만인 듯했다. 진석이는 뭐 하고 있대? 나는 닭들을 바라보며 물었다. 미국 갈 거라고 영어 공부할 거래요. 아무리 그래도 영어 공부는 아닌 것 같아서 나는 소리 내어 웃었다. 또 무슨 말을 하대? 닭은 땅을 헤치고 뭔가를 찾고 있었다. 언니한테 잘하라고 했어요. 향이가 인상을 찌푸렸다. 저건 거짓말이라고 생각했다. 아, 어떤 사람이 브로커에게 속아 가족이 죽은 줄도 모르고 몇 년이나 돈을 보냈다고 했어요. 그동안 전화 통화도 안 했나. 했대요, 그것도 가짜래요, 사진도 합성이고. 근데 어떻게 알았대? 고향 사람이 이번에 하나원에서 나왔나 봐요. 고향이 어딘데? 몰라요, 삼지연이랬나 무산이랬나, 다들 브로커를 잡아 죽여야 한다고…. 향이 얼굴을 찌푸렸다. 그 애도 알 거다, 브로커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교감 선생님이 우리를 보고 버스에 타라는 손짓을 했다. 공놀이를 하던 사람들이 우리가 탄 버스를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몽족은 라오스의 소수민족인데 베트남전쟁 때 미국 편들었다가 산악 지대에 산다는 가이드의 말에 한 번 더 창을 내다봤지만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십 분 뒤면 명캄학교에 닿을 거라며 짐은 두고 내리라고 했다. 나는 립글로스와 핸드폰과 지갑을 꺼내 학교에서 준 형광색 조끼 주머니에 넣었다. 브이 자로 목을 판 부대 자루 같았지만 호주머니가 많아 좋긴 했다. 버스가 서기도 전에 앞줄에 탄 아이들이 허리를 반쯤 세우고 창밖을 보고 있었다. 에스더 선생님도 선글라스를 벗고 창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교감 선생님과 학생 대표가 내리자 그 학교 선생님과 학생 여러 명이 꽃을 전했다. 내리는 순서대로, 나도 붉은 꽃과 노란 꽃을 받았다. 키가 작고 야윈 남학생과 키가 작고 통통한 여학생이었다. 남학생이 눈가에 주름을 지으며 흰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꽃을 받아 보기는 처음이었다. 똑같이 나누어주는 양말이나 우산은 많이 받아봤지만, 양말이나 우산을 받을 때하고는 기분이 달랐다. 가슴이 뛰었다. 온몸이 진동을 하는 것 같았다. 꽃은 먹지도 못하고 곧 시들 거라는 생각을 해도 마찬가지였다. 환대의 느낌을 따라 부끄러움이 치밀어 올랐다. 눈물이 나려고 했지만 울지는 않았다. 그깟 꽃이 뭐라고. 더운 나라에는 꽃이 지천으로 필 건데… 나는 물에 금방 씻은 듯한 포도알 같은 여학생의 눈을 외면했다.

본관 앞에 행사장인 듯 커다란 천막이 처져 있었고 플라스틱 의자들이 줄을 지어 놓여 있었다. 의자 앞엔 긴 테이블이 놓여 있고 그 너머에는 늙고 왜소한 노인 몇 분이 누런색 셔츠를 입고 웃고 있었다, 교감 선생님이 두 손을 모으고 허리를 숙여 인사하는 걸 보니 높은 분인 것 같았는데 눈은 이미 테이블 위에 차려진 음식들로 향했다. 가장 눈에 띄는 건 삶은 닭과 바나나였다. 생선 튀긴 것도 있고 돼지고기 삶은 것도 보였다. 야채도 한 접시 있었다. 잘린 색색의 실 뭉텅이가 군데군데 놓인 것이 특이했다. 교감 선생님이 감사의 인사말을 하면 옆에 선 사람이 라오스 말로 통역을 했다. 그다음엔 마을 어른들이 축원식을 진행한다고 했다. 깡마르고 야윈 염소수염의 노인들이 주문 같은 걸 외울 때 상 위에 있던 음식이 넘어왔다. 바나나 잎에 싼 밥, 잎을 펼치자 하얀 찰밥이 푸짐하게 들어 있었다. 한입 물어 목구멍으로 넘기니 빈 위장이 금방 차오르는 기분이었다. 다 먹기도 전에 앞줄이 수런거렸다. 고개를 빼고 보니 마을 어른들이 교감 선생님과 아이들의 손목에 실을 묶고 있었다.

남학생들은 축대를 쌓고 여학생들은 요리를 했다. 1조는 라면과 떡볶이, 2조는 잡채와 김밥, 3조는 두부밥이었다. 나는 언니들과 두부밥이었다. 두부밥은 두부를 잘라 기름에 튀기고 그 속에밥을 넣은 다음 양념장을 바르는 북한 음식이었다. 연주 언니는 두부를 튀기고 정심 언니는 양념, 나는 밥이었다. 김밥 만들 밥까지 내 몫이었다. 돌로 만든 화덕과 그을음이 앉은 시커먼 솥이 걸려 있었다. 나무만 있다면 어려울 건 없었다. 밥물이 끓자 불이 붙은 나무를 꺼내 물을 재빨리 부었다. 그래야 연기가 나지 않았다. 그 모습이 자연스러웠는지 마늘을 다지던 정심 언니가 한마디 했다. 오, 살아 있네.

다리도 펴고 물도 마실 겸 아까 모였던 천막으로 가고 있는데 교문 옆 나무 의자에 앉아 있던 에스더 선생님이 오라고 손짓을 했다. 뭘 만드냐고 물어서 두부밥이라고 했다. 두부밥 만들어 서 니들이 다 먹을 거지? 선생님은 그런 장면을 많이 본 듯이 말했다. 두부밥이라고 하면 사족을 못 쓰더라고. 혼자 중얼거리듯 말해 놓고 그 이유가 뭔지 알고 있다는 듯 교문 밖을 내다보았다. 다 그런 것은 아니라는 말을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교문도 없는 학교 밖으로 교복을 입은 여학생이 익숙하게 헬멧을 쓰고 오토바이 시동을 걸었다. 은주 언니가 선생님한테 잘해 드리라고 했어요. 나는 그제야 그 말을 했다. 은주 대신 내가 온 건데, 왜 취소했대? 선생님이 진짜 궁금하다는 듯이 물었다. 중국에서 손님이 온다고 했어요, 누구인지는 모른다고. 말하고 나니 누구인지 궁금했다. 그러는 사이 또 한 명의 여학생이 오토바이 뒷좌석에 누군가를 태우고 학교 밖으로 나갔다. 은주한테 서원이 이야기 들었어, 엄마는 오시다가…, 나이 어린 동생이 한 명 있다고. 듣고 싶은 이야기도 있고 그래서 교감 선생님한테 같은 방을 쓰겠다고 했는데. 선생님은 더 할 말이 있다는 듯 잠깐 쳐다보았다. 은주 언니에게만 한 말을 들은 것 같았다. 교화소에서 나온 엄마가 돈을 보내 달라고 한다는 거, 공부 그만하고 돈을 벌라고 한다는 이야기만 들었으면 했다.


해가 진 뒤 숙소에 돌아와 접수대 앞에 모여 있었다. 교감 선생님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연주 언니가 손목을 걷고 축원식 때 묶은 실 팔찌를 보고 있었다. 나도 많은데 연주 언니는 두 배 더 많았다. 향이는 그보다 더 많았다. 다들 몇 시간 만에 축복과 인연을 주렁주렁 달고 돌아온 것이다. 배도 불렀다. 라오스 밥도 많이 먹고 우리나라 밥도 많이 먹었다. 와이파이를 연결하자마자 진석의 카톡이 쏟아져 들어왔다. 누나 장군님 좆 됐어. 미국하고 협상이 틀어졌나 봐. 미국 대통령은 바로 돌아갔는데 장군님은 더 남아 있다 다시 60시간 기차 타고 평양 간대, 경애하는 장군님께 뭐 하는 짓인지 모르겠네. 고소하기도 하고…, 누나는 어떻게 생각해? 두 시간 전에 보낸 문자였다. 카톡의 대화창을 쏘아보았다. 맨날 핵 타령이지. 아무리 그래도 가족이 죽었는지 살았는지는 알아야 할 거잖아. 그 생각만으로도 장군이 탄 기차가 옆으로 지나가는 듯 심장이 뛰고 귀가 먹먹해졌다. 어디에 있든 우리는 북한 사람이었다. 생각나는 대로 나불대다가는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질 수도 있었다. 아, 오늘 실 많이 묶었겠네. 응. 나는 간단하게 답을 보냈다. 누나는 뭘 빌었어? 빌면 소원을 들어준다잖아. 진석은 그 실을 일주일간 풀지 않았다고 했다. 샤워를 할 때도 풀지 않았다는, 진석의 말을 읽고 팔뚝의 실을 내려다보았다. 누가 묶어 준 건지 기억할 수가 없었다. 까만 머리를 어깨까지 땋은 여학생이 묶어 준 건 기억났다. 무엇을 빌어 준 것일까. 나의 행운과 건강? 실 팔찌가 한 개씩 늘어날 때마다 가짜 행운에 묶이는 기분이 들어 마음이 무거웠다. 향이는 에스더 선생님 옆에서 서로 손목을 보이며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교감 선생님이, 내일은 이곳보다 좀 낮은 데로 가는데 이제 춥지 않을 거라고 했다. 오늘 음식도 만들고 축대도 쌓고 라오스 아이들과 운동도 하고 공연도 했으니 오늘만 특별히 밤 11시까지 외출을 허락한…, 교감 선생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아이들이 기다리고 있었던 듯 환호를 했다. 피곤해서 죽겠다고 목도 세우지 못했던 아이들의 눈빛이 빛났다. 선생님 야시장 가요. 향이가 에스더 선생님의 팔짱을 꼈다. 선생님과 눈이 마주칠까 봐 나는 고개를 숙였다. 벌써 아이들이 엘리베이터 쪽으로 움직이고 있었고 더 많은 아이들이 참을 수 없다는 듯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청남방 셔츠 안에 흰색 티를 받쳐 입은 선생님은, 향이랑 이야기하다가 너무 늦게 잤더니 약간 졸린다고 했다. 정심이도 나왔던데 왜 야시장에 안 왔냐고 물었다. 피곤해서 일찍 잤다고 했다. 나가자고 마음먹은 게 세 번, 가지 말자고 마음먹은 게 세 번이었다. 가자고 한 사람이 가지 말자고 했다. 언니가 두 번, 내가 한 번. 동명이 생일 선물 때문에 가자고 했다가 동명이 생일 선물 때문에 취소했다. 내일이 동명이 생일 파티였다. 쉼터 선생님은 가족이 안 오면 쓸쓸해하니까 꼭 오라고 했다. 가려고 했다. 가야 할 것 같아 봉사활동도 취소했다. 쉼터 선생님이 할 말이 있다는 말만 안 했어도…. 동명이가 누나가 아니라 엄마라고 했을까 봐 두려웠다. 중국에 있을 때 엄마가 바빠서 내가 키워서 그런 말을 한다고…, 수없이 되새긴 말이 있긴 하지만 두려웠다.

선생님은 아침 장에서 샀다며 말린 과일을 몇 개 건넸다. 살 만한 게 없더라는 말도 했다. 시장 안에 가축 시장이 있는데 조금만 소쿠리에 돼지 새끼가 들어 있더라고, 귀여웠다고 했다. 향이가 가족이 죽은 줄도 모르고 돈을 보낸 사람 이야기를 해서 은주에게 문자를 했더니, 자기 아니라고 했다며, 어떻게 아직도 이러고 살아야 하는지, 귀 뒤로 머리를 넘기며 짧게 한숨을 쉬었다. 아, 이제 따뜻한 곳으로 가니까 좋네. 선생님은 한숨 자야겠다며 버스 등받이에 허리를 묻었다. 향이도 이미 자고 있었다. 정심 언니도. 자지 말고 라오스 풍경도 보라는 가이드의 말을 눈을 감고 들었다. 점심을 먹고 소수민족 학교에 들렀다가 저녁에 방비엥에 도착하는 일정이었다.

먼저 내린 아이들이 버스 뒤쪽 식당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나를 깨운 선생님도 아이들을 따라가고 있었다. 차 문은 열려있고 우리나라 군복을 입고 있던 기사 아저씨도 보이지 않았다. 도대체 몇 시간을 잔 것인지, 사막에 떨어진 기분이었다. 내려서 보니 생선과 고기들에 파리들이 까맣게 붙어 있다 선풍기 날개 같은 데서 바람이 오면 도망을 갔다. 다시 파리가 앉아 생선의 몸을 덮을 즈음이면 바람이 오고, 나는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버스 앞쪽으로 머리 뒤까지 올라온 큰 배낭을 진 외국인이 길을 건너오는 게 보였다. 지프차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달렸다. 아이들이 들어간 식당 반대쪽으로는 아무도 가지 않았다. 벌건 황토 무더기 사이로 난 길은 길이 아닌 것 같았다. 나무도 집도 없었다. 누런 먼지바람이 길 너머를 가렸다. 그곳으로 한 발 디딘 후 힐끔 뒤를 돌아보았다. 교감 선생님은 운전기사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앞으로 걸어갔다.

장군은 다시 60시간 기차를 타고 평양으로 돌아갈 것이다. 나는 그곳으로도 갈 수 없다. 가고 싶지도 않다. 다른 곳으로 가고 싶다. 내 몸에 새겨진 이야기로 나를 구별하지 않는 곳, 더 이상 적응이라는 말을 듣지 않아도 되는 곳으로. 대한민국은 먹여 주고 재워 주고 공부 시켜 주고, ‘나’만 잘하면 어떤 꿈도 이룰 수 있는 곳이라고 했다. 그 말이 제일 좆 같다고 한 건 진석이다. 진석이가 마음에 들었던 건 그 말 때문이었다. 나만 잘하면 된다니, 엄마는 공부 그만하고 돈을 벌라 야단이고 아버지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아들 동명은 벌써 다섯 살이었다. 오토바이가 경적을 울렸다. 작은 트럭도 마찬가지였다. 차선이 없으니 누가 잘하고 잘못한 것도 없다. 그대로 걸으면 된다. 아무도 모르는 저 너머의 길로. 마른 눈물이 났다. (끝)

작가소개 / 정영선

경남 남해 출생. 1997년 중편소설 「평행의 아름다움」으로 문예중앙 신인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 시작. 장편소설 『실로 만든 달』 『물컹하고 쫀득한 두려움』 『물의 시간』 『생각하는 사람들』 『아무것도 아닌 빛』 과 소설집 『평행의 아름다움』을 펴냈다. 부산소설문학상, 부산작가상, 봉생문화상(문학), 요산김정한문학상 수상.

《아르코문학창작기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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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는 사람

없는 사람 이혜오 휴대폰 알람은 새벽마다 나를 밀쳤다. 나는 미지근해진 자리끼처럼 엎질러졌다. 바닥에 쏟아진 나를 겨우겨우 주워 모아 연습실로 출근해서 스트레칭을 하면, 그제야 팔다리가 달린 사람의 몸을 감각할 수 있었다. 확실히, 그 시절의 나는 이미 엎질러진 나를 어떻게든 수습하는 기분으로 살았던 것 같다. * 댄스 학원에 다닌 것은 열네 살 때부터였다. 길거리 캐스팅이 될 만큼 뛰어나게 예쁘지 않은 나 같은 애들은 대개 그때부터, 혹은 그전부터 학원을 다니며 오디션을 준비했다. 대형 기획사의 공채 오디션에서는 번번이 떨어졌고, 열여섯, 중3 때 중소형 기획사 하나에서 내 영상을 보고 대면 오디션을 보러 오라는 제안을 했다. 엄마와 함께 서울에 가서 대면 오디션을 봤고, 합격 통보를 받았다.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가득한 계약서에 사인을 했다. 당시 사옥이 위치해 있던 청담동은 내가 살던 동진과는 완전히 다른 세계처럼 보였다. 동네 전체가 백화점 같았다고 할까. 깨끗하고, 반들거리고, 비싼 것들과 알아들을 수 없는 외국어로 가득한. 그 세계의 일부가 된 것이, 나는 기뻤다. 그다음부터는 새벽에 일어나 아침 연습을 하고, 학교에 갔다가 하교 후에는 연습실에 가서 레슨을 받고, 레슨이 끝나면 밤까지 연습을 하다가 숙소에 가서 잠을 청하고 다시 학교에 가는 패턴의 반복이었다. 연습생 숙소에는 나처럼 지방에서 올라온 연습생들이 때에 따라 열 명에서 열네 명까지 모여 살았다. 어깨선을 넘는 긴 머리를 한 여자애 열네 명이 한 공간에 모여 살면 상상을 초월할 만큼의 머리카락이 바닥에 떨어진다. 끝없이 쌓이는 머리카락을 줍고, 줍고, 또 줍다 보면 문득 인간의 머리에서 머리카락이 계속 자란다는 사실이 지긋지긋해지곤 했다. 그곳에선 언제나, 모든 자원이, 부족했다. 동진에서 부모님과 살 때는 부족할 수 있다는 상상조차 해 보지 못한 것들까지. 화장실과 콘센트의 개수나 냉장고와 옷장과 침대의 넓이, 그리고 프라이버시 같은 것들. 내가 온전히 혼자 있을 수 있는 공간은 이불 속밖에 없었다. 나는 좁다란 이층 침대에서 늘 머리끝까지 이불을 뒤집어쓰고 이어폰을 꽂은 채 잠들었다. 그 어둡고 텁텁한 공간만을 편안하다고 느꼈다. 나는 천천히, 깨끗하고, 반들거리고, 비싼 것들과 알아들을 수 없는 외국어로 가득한 세계에는 내 자리가 없다는 것을 깨달아 갔다. 회사가 작아서인지 제대로 된 트레이닝 시스템이랄 게 없어서, 데뷔 조가 아닌 연습생들은 제대로 관리를 받지 못했다. 어린애들이 우르르 들어왔다가 또 우르르 나갔다. 들짐승처럼 방치된 우리는 서로를 경계하고 미워했다가 또 끌어안았다가 하며 그 시간을 견뎠다. 물론 견디지 못하는 애들이 더 많았다. 고참들은 조급하고 불안한 마음을 텃세로 풀었고, 신입들은 눈치만 보다가 나가떨어졌다. 매일 갈등이 있었고 매일 누군가 울었다. 누가 언제 집으로 돌아가게 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안정적인 관계를 만들기란 어렵다는 것. 그 정도의 스트레스 상황에서 남을 미워하지 않고 버티기는 힘들다는 것. 이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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