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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드리 하우스

  • 작성일 2023-04-28
  • 조회수 1,563

런드리 하우스



등장인물

강수혁:    37세, 런드리 하우스 직원 

조이슬:    27세, 런드리 하우스 직원 

김동인:    61세, 런드리 하우스 직원

최억수:    35세, 런드리 하우스 직원 

전영자:    45세, 런드리 하우스 직원 

양진철:    15세, 런드리 하우스 아르바이트 사원

윤주섭:    57세, 런드리 하우스 사장

손철오:    56세, 형사

수혁의 모친

이슬의 부친

회장

새로운 사장 등



현대, 어느 해 겨울에서 봄까지



어느 도시의 영세 세탁공장 ‘런드리 하우스’ 안팎


무대


주 무대는 평화시장 인근의 세탁공장 ‘런드리 하우스’ 내부. 중앙에는 다림질대 세 개가 놓여 있고 왼쪽으로는 다림질이 끝난 세탁물을 포장하는 작업대, 그 왼쪽에는 국내에 유통되거나 해외로 수출되는 의류가 등급별로 구분된 채 옷걸이에 걸려 있다. 뒤쪽으로 박스 포장된 옷들이 차곡차곡 쌓여 있고 그 너머로는 화물차에 박스를 싣기 위한 공간으로 빠져나가는 문이 있다. 다림질대 오른쪽으로는 세탁을 마치고 다림질을 진행해야 하는 세탁물들을 넣어 두는 커다란 통이 있고 그 오른쪽으로는 의류를 수선하거나 얼룩을 지우는 작업대, 간단히 차를 마실 수 있는 탕비실, 세탁실로 이어지는 문이 있다. 무대 뒤쪽 벽에 ‘오늘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말라’는 표어가 붙어 있다.  



1장


막이 오르면 다림질대 앞에서 이슬, 영자, 동인이 능숙하게 다림질을 하고 있다. 그 앞쪽에서 진철이 쭈그려 앉아 핸드폰 게임을 하고 있다. 동인, 진철을 못마땅하다는 듯 흘끗 쳐다본다. 진철, 그런 시선을 의식하지만 못 본 척 게임을 계속한다. 벽시계가 오전 11시를 가리키고 있다.


동인

이제 그만하지?


진철, 못 들은 척 게임을 계속한다. 이슬과 영자의 손놀림이 빨라진다.


동인

어찌 하는 짓을 보면 싹수가 노란 것도 같고…….

이슬

좀 봐줘요. 방금 전에 포장 작업 끝냈잖아요. 

동인

다른 사람들은 놀았대? 저러다 또 억수 녀석한테 한 소리 듣지.

영자

그나저나 요새는 영 A급이 안 들어오네. 그런 게 좀 들어와야 우리도 재미를 보는데.

동인

저번에 블라우스 챙겼다가 사장님한테 그 욕을 먹어 놓곤 아직 정신 못 차렸군.

진철

(벌떡 일어서며) 아싸라비아! 신기록 세웠어요!

동인

뭐?

진철

자동차경주요. 최고 기록이라고요! 이거 당분간 안 깨질걸요?


동인, 그 모습을 보며 혀를 찬다. 그때 억수, 몸을 움츠리며 등장한다.


억수

으 추워! 이놈의 겨울은 왜 이리 길어? (진철을 발견하고) 야! 양진철! 너 또 땡땡이냐? 이게 진짜 틈만 주면 저러네? 집합! 

진철

(볼멘소리로) 왜 그래요? 포장 작업 다 끝냈다고요. 

억수

이리 못 와?


억수가 눈을 부라리면 진철, 억수 앞에 달려가 차려 자세를 한다. 


억수

열중쉬어! 차렷! 열중쉬어! 차려! 

진철

(제대로 따라 하지 못하면)

억수

정신 못 차려?

영자

그러다 애 잡겠네. 살살 좀 해!

억수

틈만 나면 땡땡이잖아요. 따끔하게 혼 좀 나야 해요. 

동인

꼭 누구 옛날 모습 보는 거 같은데 뭐.

진철

옛날 모습요? 누구요?

동인

한 10년쯤 됐나? 내가 그땐 세탁소를 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찾아와서 기술을 가르쳐 달라고 조르던 녀석이 있었거든. 딱해서 가르쳐 줬는데 틈만 나면 땡땡이에 잔꾀를 부렸지.

영자

최 대리 이야기네. 

억수

아니 부장님!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제가 언제 땡땡이를 쳤다고요!

동인

기억 못 하면 어쩔 수 없고!

진철

아저씨도 그랬으면서 괜히 나만 혼내.

억수

뭐? 이게 진짜?


억수, 진철을 잡으려 하면 진철, 이리저리 도망치다 이슬 뒤에 숨는다.  


억수

저게 또 이슬 씨한테 엥기네. 그나저나 이슬 씨는 오늘도 아름다우시네요. 일 끝나고 시간 있어요? 저 앞 극장에 공포영화 쌈박한 게 개봉됐다던데.

영자

(혀를 차며) 공포영화가 뭐야? 데이트 신청하려면 로맨틱 코미디쯤은 되어야지. 

억수

아 진짜! 남의 연애사에는 참견 말랬잖아요!


주섭, 등장한다.


주섭

다들 주목! (주위를 둘러보며) 없는 사람 없지? 

진철

네, 없어요! 

주섭

엊그제 공지했듯 이따 신입이 올 거야. 

억수

근데 사장님.

주섭

왜?

억수

괜찮을까요?

주섭

뭐가?

억수

괜히 직원 잘못 들였다가 회사 분위기 망가지면 곤란하잖아요. (주위를 둘러보며) 다른 분들은 걱정 안 돼요?

영자

저도 좀 꺼림칙하긴 해요. 괜히 해코지라도 당하면 어떡해요?

주섭

사람 구해 달라며? 일거리 밀려서 힘들다며? 원하는 대로 구해 주겠다는데 뭔 불만이 많아? 

억수

사람도 사람 나름이죠. 살인 전과는 너무 하잖아요. 

진철

근데 진짜 사람을 죽였대요? (긴장된다는 듯 침을 삼키고) 그런 사람은 영화에서나 보는 줄 알았는데······.

억수

무섭지? 어쩌면 널 잡아먹을지도 몰라.

진철

······네?

주섭

최억수 대리! 우리 회사 사훈이 뭐지?

억수

아, 그거야 신속! 청결! 그리고······하나가 뭐였더라?

진철

상생!

주섭

그렇지! 나만 살아남으려 하지 말고 너만 살아남으려 하지 말고 우리 모두 살아남자는 거잖아. 성경에 보면 간음한 여자를 죽이려는 사람들에게 예수께서 하늘 아래 죄 없는 자만 돌을 들어 던지라고 하셨잖아. 그게 뭐겠어? 같이 살자는 거 아니겠어?

영자

음······ 그게 그런 뜻이었나?

억수

근데 사장님, 불교 아니었어요?

주섭

시끄럽고! 내가 상생을 하니까 사람들이 우리 회사를 좋게 보는 거야. 그게 하루아침에 된 건 줄 알아? (동인에게) 안 그래요 김 부장?

동인

아······ 그, 그렇죠.

주섭

경력이 좀 그래도 취직해서 먹고살겠다고 하면 받아 줘야 하는 거야. 그게 상생이야. 내 말 알아듣겠어 최 대리?

억수

그래도······. 

영자

사장님, 질문이 있는데요.

주섭

뭔데?

영자

어쩌다 그랬대요?

주섭

뭐?

영자

사람을 죽였으면 이유가 있을 거잖아요.

주섭

모범수라 가석방됐다는 거밖에 몰라. 어서 일들 해!


직원들이 다시 일에 착수하면 주섭, 이슬의 다림질대에 다가선다. 


주섭

이슬 씨 좀 봐. 이 다림질 솜씨 좀 보라고. 앞도 안 보이는데 이 정도면 정말 예술 아냐? 〈생활의 달인〉에 나가도 되겠어.

영자

사장님은 이슬이만 너무 예뻐하시는 거 같아요.

주섭

아줌마도 이슬 씨만큼 해 봐. 예뻐해 주다뿐이겠어? 업어 주지.

영자

진짜로요?

억수

에이 사장님도! 저 아줌마 몸무게가 얼만데. 감당되시겠어요?

영자

주둥아리 함부로 나불거릴 거야?

억수

맞잖아요. 나보다 더 무겁잖아요.

영자

어쭈? 오늘 제삿날로 한번 만들어 줘?


사람들이 동시에 웃는다.

암전.




2장


그날 늦은 오후. 

차량들의 소음이 들리면서 조명이 들어온다. 수혁과 철오, 무대 위로 걸어 나와 걸음을 멈춘다. 철오, 바람에 흩날린 반백의 머리를 오른손으로 어루만진다. 


철오

저 길 너머가 그곳이야.

수혁

······네. 

철오

(담배를 피워 물고) 얼마 만에 나온 거지?

수혁

······7년요.

철오

지금 몇 살이랬지?

수혁

서른일곱입니다.

철오

한창 때를 거기서 썩혔군. 

수혁

······.

철오

니 인생도 참 애매하다. (혀를 차다가) 아직 미혼이지?

수혁

······네.

철오

열심히 일해서 자리 잡고 좋은 여자 만나 가정도 꾸려. 

수혁

······.

철오

거기서 세탁 기술이라도 배웠다니 다행이군. 살다 보니 기술이 최고야. 기술이 있어야 나이 먹어서도 자기 일하면서 남한테 아쉬운 소릴 안 하지.


사이.


철오

지금 가석방 기간인 거 알지? 사고 치면 인생 제대로 꼬일 거야.

수혁

네.

철오

가자고. 저기 사장이 기다리고 있을 거야. 


두 사람이 무대 한쪽으로 퇴장한다. 

무대 다른 한쪽에서 동인, 실크 블라우스를 들고 들어서며 혀를 찬다.  


동인

이런 옷을 왜 버리나. 참 내. 이깟 얼룩 좀 묻었다고? 지들 몸에 과분한 건지도 모르고······ (블라우스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불쌍한 건말 못 하는 옷이지 뭐. 


주섭, 수혁과 함께 등장한다.


주섭

마침 퇴근 안 하고 있었네. 여기 새로 온 친구인데 차가 막혀서 늦었나 봐. 김 부장이 적응할 때까지 잘 봐줘. 내일 다른 직원들한테 소개도 시켜 주고. (수혁에게) 뭐 해? 인사 안 해?

수혁

안녕하세요, 강수혁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주섭

저 사람이 망해서 지금은 내 밑에서 일하지만 한땐 세탁소를 꽤 크게 했어. 기술 하나는 끝내주니까 잘 배우라고. 


주섭, 퇴장한다. 동인, 블라우스를 들고 오른쪽 테이블 앞 의자에 앉으면 수혁이 어정쩡하게 서 있다. 사이. 동인, 수혁의 존재를 잊어버린 것처럼 블라우스에 빠져든다. 


수혁

저기······. 

동인

왜?

수혁

무슨 일부터 할까요?

동인

그냥 앉아 있어. 

수혁

······네.


사이.


동인

(블라우스에 약품을 바르며) 여긴 왜 왔어?

수혁

······네?

동인

일도 힘들고 월급도 조금 주는데. 이유가 뭐냐고.

수혁

그, 그게······.

동인

만만해 보여?

수혁

아뇨. 

동인

그럼 뭔데?

수혁

······유일한 낙이었거든요.

동인

낙?

수혁

더럽고 얼룩진 옷이 깨끗해지는 게 좋았어요. 정말 시간이 안 갔는데 옷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견딜 만했어요.


사이.


동인

한 번만 말할 테니 잘 들어. 첫째! 출근 시간 엄수! 이거 어기면 일하기 싫은 걸로 알 거야. 둘째! 모든 장비는 쓰고 나면 처음 상태로 원위치! 내가 제일 싫어하는 인간이 장비 제대로 간수 못 하는 인간이야. 셋째! 내 말에 토 달지 말 것! 알아들었지?

수혁

네.

동인

차차 알게 되겠지만 헌 옷이 수거되어 오면 저쪽 세탁실에서 세탁되고 건조되어 여기로 넘어오는 거야. 그걸 잘 다려서 상태를 보고 A등급부터 D등급까지 분류해 포장해. 그게 우리 일이야. 쉽지?

수혁

저기······.

동인

궁금한 거 있어? 

수혁

화장실 좀 다녀와도 될까요?

동인

그런 건 물어보지 않아도 돼. 


수혁, 무대 왼쪽으로 퇴장하면 억수, 다른 방향에서 등장한다. 


억수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신입은요?

동인

화장실 갔어.

억수

좀 어때요?

동인

뭐가?

억수

그런 놈들 전과가 무슨 훈장이라도 되는 것처럼 은근히 어깨에 힘주잖아요. 부장님한테 뭐라 안 해요?

동인

경우가 없는 친구는 아닌 것 같아. 

억수

부장님도 참 큰일 날 사람이네.

동인

내가 뭐?

억수

어떻게 사람을 한번 보고 판단해요? 모범수로 가석방됐다지만 사람을 죽인 놈인데. 여기 그냥 일하러 왔겠어요?

동인

그럼 놀러 왔을라고?

억수

뭔가를 노리고 있는 게 분명해요.

동인

노리다니? 

억수

그런 놈들이 할 일 없으면 청부 폭력이나 청부 살인을 하기도 한대요. 분명 뭔가 있어요.

동인

쓸데없는 소리! 

억수

(뭔가를 생각하다) 부장님도 조심하셔야 해요.

동인

내가 뭘?

억수

부장님이 알부자라는 건 이 근방 사람들 다 안다고요. 은행을 못 믿어서 집 안 어딘가에 모아 놓은 돈을 숨겨 뒀다는 소문도 났어요. 누군가 그런 정보라도 주워듣고 그 신입을 고용했을 수도 있죠. 

동인

내가 돈 있음 이런 데 썩고 있겠어? 내 걱정 말고 니 걱정이나 해. 

억수

근데 신입, 변비 있나? 얼굴이나 보고 가려 했는데 술 약속 때문에 가 봐야겠네요. (시계를 보고) 저 먼저 가요. 


억수, 휘파람을 불며 퇴장한다. 동인, 잠시 묘한 표정을 짓고 있다가 고개를 흔든다. 동인, 얼룩진 블라우스를 계속해서 손보려다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 듯 내려놓는다. 암전.




3장



같은 날 밤. 원룸 안. 이슬, 빨래를 접고 있다. 앞은 보이지 않지만 손놀림은 능숙하다. 


진철

(목소리로) 누나 안에 있어요?

이슬

들어와. 


진철, 뭔가가 든 비닐봉지를 들고 등장한다. 


이슬

또 뭐 사 왔어?

진철

오렌지 주스하고 빵요. 안 비싸요. 저 앞 슈퍼에서 폭탄 세일하고 있어서요.

이슬

돈도 없으면서. 

진철

며칠 전에 월급 받았잖아요. 

이슬

저축해야지. 힘들게 번 건데. 

진철

(비닐봉지에서 주스하고 빵을 꺼내며) 알았으니까 좀 드세요. 점심에 카레여서 제대로 못 드셨잖아요. 누난 왜 카레를 싫어해요?

이슬

······그냥 싫어. 

진철

난 카레 좋은데. (빵 봉지를 뜯어 건네주며) 자요. 저녁도 잘 안 먹잖아요. 그러다 영양실조 걸려요. 

이슬

(받아서 한 입 베어 물고) 카스텔라네. 

진철

또 있으니까 많이 드세요. 

이슬

검정고시 준비는 잘 돼?

진철

그럭저럭요. 중학교 과정 마치면 고등학교 과정도 할 거예요. 

이슬

나중에 꼭 대학도 가. 넌 똑똑하니까 좋은 대학도 문제없을걸? 

진철

예전에 알던 형이 대학에 갔는데 맨날 술 마시고 여자 만나고 그런대요. 그런 거 재미없어요. 저는 런드리 하우스에서 일하는 게 좋아요. 뭐든 거기 오면 깨끗해지잖아요. 열심히 일해서 돈 많이 벌 거예요. 나중에 사장님처럼 되고 싶어요. 

이슬

······사장님?

진철

저는 고아고 누난 앞을 못 보는데 일하게 해주신 분이잖아요. 사장님처럼 좋은 어른이 되고 싶어요.

이슬

…….

진철

(갑자기 풀이 죽어서) 아뇨. 전······그럴 수 없을 거예요. 저는······나쁘니까. 진짜 나쁘니까. 

이슬

너 또 부모님 생각하는구나? 그분들이 그렇게 된 건 진철이 잘못이 아냐.

진철

저 때문에 난 사고예요. 

이슬

그렇지 않아.

진철

그냥 친척 집에 있어야 했어요. 데리러 오라고 떼를 쓰니까 엄마 아빠가 일 마치고 새벽에 오다가 그렇게 됐어요.

이슬

(다독이며) 부모님은 절대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실 거야. 

진철

······.

이슬

내 말 믿어도 돼. 그리고 세상에 나쁜 사람은 없어. 그 사람의 나쁜 행동이 문제인 거야. 사람은 죄가 없어. 

진철

새로 들어온다는 아저씨는요? 살인을 저질렀다잖아요. 

이슬

그 사람이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알아보고 판단해도 늦지 않아. 

진철

(일어서며) 갈게요. 졸려요.

이슬

아침에 일어나서 공부할 거지?

진철

네.

이슬

모닝콜 해줄까?

진철

요즘은 알아서 잘 일어나요. 누나도 피곤할 텐데 얼른 자요.

이슬

응, 잘 가.


진철, 퇴장하면 방 안을 더듬으며 청소해나가는 이슬. 멀리서 구급차 소리가 들려온다. 사이. 초인종 소리가 들린다. 이슬, 벽시계를 바라본 뒤 몸을 떨며 움츠렸다가 황급히 조명을 끈다. 다시 초인종 소리. 이슬, 아무도 없는 척하려는 듯 움직이지 않고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는다. 


주섭

(목소리로) 문 열어.

이슬

······.

주섭

깨어 있다는 거 알아. 불빛 보고 올라왔어.

이슬

그냥 가세요.

주섭

열어.  

이슬

저 좀 내버려 둬요!

주섭

(거칠게 문을 두드리며) 부숴버리기 전에 열어! 


이슬, 허공을 더듬으며 걸어가 문을 연다. 주섭, 안으로 들어오며 이슬의 팔을 거칠게 잡는다. 


주섭

자꾸 이럴 거야?

이슬

그만두고 싶어요.

주섭

뭘 그만둬? 앞도 못 보는 주제에······ 상습절도로 징역 살고 나온 널 받아 준 사람이 누군데? 

이슬

언제까지 이럴 수는 없어요. 

주섭

(껴안고 입을 맞추려 들며) 내 맘 몰라?

이슬

(뿌리치며) 자꾸 이러면 가만 안 있어요.

주섭

이건 상생이야. 넌 살길 찾아 좋고, 나는 사랑을 얻고. 

이슬

경찰에 신고할 거예요.

주섭

하려면 해. 근데 그 말을 누가 믿어 줄까? 증거 있어? 

이슬

······.

주섭

다들 나한테 뭐라고 하는 줄 알아? 자선사업가래. 어디서도 거들떠 보지 않는 전과자들 데려다가 먹여 살린다고 표창장이라도 매달 줘야 한대. 내 런드리 하우스를 거쳐 간 놈들 중 잘된 사람 많아. 거기서 옷만 세탁하는 줄 알아? 더러운 과거도 깨끗하게 빨아서 새롭게 시작하게 해주는 거야. 너도 도둑질 안 하고 네 힘으로 일해 서 먹고살고 있잖아. 나한테 고맙지 않아? 

이슬

제발 절 좀 내버려 두세요! 

주섭

자꾸 이러면 진철이를 쫓아낼 거야.

이슬

뭐라고요? 

주섭

그놈이 널 많이 따르지? 검정고시도 준비한다며? 그놈이 여기서 쫓겨나면 어디로 갈까? 소년원에서 만난 소매치기 놈들이랑 어울리게 되겠지? 경찰서를 들락거리다 언젠간 살인을 저지르게 될지도 모르지. 

이슬

그만해요!

주섭

너만 고분고분해지면 되는 거야. 괜히 문제 만들지 마. (옷을 벗으며) 뭐 해 옷 안 벗고? 자꾸 나 화나게 하지 마!


이슬,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고 블라우스의 단추를 풀기 시작한다. 

암전.




4장



다음 날 점심시간. 수혁, 테이블 위에 놓인 블라우스를 든 채 살피고 있다.


수혁

(고개를 갸웃거리며) 얼룩이 남아 있네. 이 상태면 큰 문젠데.


억수, 휘파람을 불며 등장해서 수혁이 블라우스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는 모습을 발견한다.   


억수

어이 신입!

수혁

······.

억수

이봐?

수혁

······.

억수

뭐지? 사람 말이 말 같지 않나? 


억수, 가까이 다가가서 수혁의 어깨를 잡으려는 찰나 수혁, 뒤를 갑자기 돌아본다. 놀란 억수, 엉덩방아를 찧는다. 


억수

아이고 내 엉덩이!

수혁

아, 미안합니다. 사람이 있는지 몰랐어요.

억수

내가 몇 번이나 당신, 아니 신입을 불렀는지 알아?

수혁

(손을 내밀며) 괜찮으세요? 일어나세요.

억수

(손을 쳐내고) 사람이 우스워? 

수혁

······.

억수

(일어서며) 근데 신입, 몇 살이지?

수혁

······서른일곱인데요.

억수

(자신보다 많자 헛기침을 하고) 나이가 중요한 건 아니지. 내가 여기서 일한 지 7년이 넘었어. 훨씬 선배라고! 알아들어?

수혁

······.

억수

밖에서 꽤나 험하게 논 모양인데 나도 주먹이라면 꽤 써 봤거든? (섀도복싱을 하며) 권투 도장에 오래 다녔고 링에도 올랐지. 근데 어이없는 싸움에 휘말려 폭력 전과를 다는 바람에······ 어쨌든 인생이 꼬여서 이 모양 이 꼴이지만 한땐 동양 챔피언쯤은 문제없는 재능으로 불렸던 몸이라고. 

수혁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억수

그래, 그렇게 나와야지. 


억수, 수혁이 생각보다 고분고분하자 할 말이 없어진 느낌이다. 그때 영자가 등장한다.


영자

최 대리, 사장님이 찾던데? 태국에 갈 박스들이 국내 업체로 잘못 배송됐나 봐.

억수

그럴 리가요. 나 이제 그런 실수 안 하는데. 

영자

화가 많이 나신 거 같은데. 

억수

진짜예요? 이거 또 깨지게 생겼네.


억수, 퇴장한다. 영자,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수혁을 향해 싱긋, 웃는다. 


영자

내가 구해 준 거예요.

수혁

······네?

영자

최 대리한테 벗어나게 해줬잖아요. 근데 나, 수혁 씨가 오기 전에 걱정 많이 했는데 아침 조회 때 보고 사람이 듬직하고 핸섬해서 맘을 놓겠더라고. 한마디로 인재가 들어왔다 싶었어.       

수혁

?


진철, 무대 오른쪽에서 머리를 살짝 내민다.


영자

어려운 거 있음 나한테 말해요. 내가 수혁 씨보다 나이는 좀 많지만 대화는 잘 통할 거야. 평소에 감각이 젊다는 소릴 많이 듣거든. 친구처럼 지내는 것도 좋고…… 가끔 퇴근 후에 술도 한잔하고…….

진철

친구처럼 지낸다는 게 뭐예요?

영자

너 언제부터 거기 있었니?

진철

술은 왜 마시는데요?

영자

누가 어른들 말하는 거 엿들으래?

진철

엿들은 게 아니라 그냥 들렸어요. 

영자

조그만 게 너무 제멋대로라니까!


영자, 투덜거리며 퇴장하려다 수혁을 쳐다본다.


영자

우리 친해져 봐요. 알겠죠?

수혁

네? 아, 네······.


영자, 묘한 미소를 지으며 퇴장한다. 수혁, 테이블 한쪽에 진열된 약품들 중 하나를 골라 블라우스에 처리를 하기 시작한다.


진철

(수혁에게 다가가서 손을 내밀며) 양진철이라고 해요. 

수혁

(진철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악수를 하면)

진철

여기서 일한 지는 1년 됐고요. 제일 어려요. 그래도 나이답지 않게 조숙하고 똑똑하다는 말도 많이 들어요. 

수혁

몇 살인데?

진철

열다섯 살요. 검정고시 준비하고 있어요. 중학교 과정 마치면 고등학교 과정도 할 거지만 대학은 안 가려고요. 돈 벌어서 저보다 어려운 사람들 도와주고 싶어요. 

수혁

기특하네.

진철

근데 그 블라우스 만지면 안 될 텐데. 얼룩 있는 건 부장님이 알아서 하시거든요.

수혁

다 됐어.

진철

와! 감쪽같네요?


그때 억수가 씩씩거리며 등장한다. 


억수

누님!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이 여자가 어디로 내뺐지? (진철에게) 영자 아줌마 못 봤어?

진철

왜 그래요?

억수

하여간 사기 전과 있는 거 자랑하는 건지 뭔지 툭하면 사람을 속여 먹는다니까. 괜히 사장님한테 실없는 사람 됐잖아. 근데 넌 왜 여기서 노닥거려? 포장 안 해?

진철

쉬는 시간인데요.

억수

어서 가서 일해.

진철

화장실 좀 다녀오고요.


진철, 투덜거리며 퇴장한다.


억수

(헛기침을 하고) 거기 신입도 땡땡이치지 말고 똑바로 합시다. 내가 항상 지켜보고 있을 거야. 

수혁

······.

억수

(피식 웃으며) 그렇다고 너무 쫄진 말고.


억수, 휘파람을 불며 퇴장한다. 사이. 이슬, 양쪽 팔을 스스로 주무르며 등장해서 한쪽에 놓인 빨래 뭉치를 다림질대 쪽으로 옮기려 한다. 빨래 뭉치가 무겁고 부피가 커서 한 번에 들지 못한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수혁, 대신 빨래 뭉치를 들어 다림질대에 내려놓는다. 


이슬

······고마워요. 

수혁

별말씀을요. 

이슬

앞으로 잘 지내 봐요.

수혁

······네.


이슬, 능숙하게 다림질을 하기 시작한다. 수혁, 그 모습을 지켜본다.


이슬

제법 잘하죠? 그렇다고 너무 빤히 쳐다보진 마세요. 쑥스럽거든요.

수혁

(당황해하며) 보고 있다는 걸 아시네요.

이슬

느낌이 오거든요. 

수혁

네에······.

이슬

앞이 안 보여도 제 할 일은 해요. 너무 신경 쓰실 거 없어요. 

수혁

언제부터 그랬는지······ 물어봐도 될까요? 

이슬

왜요?

수혁

······궁금해서요.

이슬

열다섯 살 때부터 그랬어요. 몇 년 전까진 희미하게 빛이 들어왔었는데 이젠 전혀 없네요. 

수혁

병원엔 가 보셨나요?

이슬

시신경이 손상됐대요. 

수혁

······.

이슬

이제 일할게요.

수혁

네.


사이.


이슬

혹시, 저 아세요?

수혁

왜 그렇게 생각하시죠?

이슬

그냥 느낌이 그래서요. 


동인, 영자, 진철, 억수가 동시에 등장한다. 


억수

한 번만 더 그런 장난치면 가만 안 둬요.

영자

속 좁기는. 장난은 장난으로 받아들여. 

억수

좋은 말 할 때 하지 마요! 

동인

자, 잡담은 그만하고 일하자. 저기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거 보이지?

영자

아이고 내 팔 떨어지겠네.


주섭, 등장한다.


주섭

자 주목! 기분 좋은 소식이 있어. 우리 세탁공장이 우수 중소기업에 선정될 가능성이 커졌어. 그것만 되면 감세 혜택에 저리 융자도 가능해져 숨통이 트일 거야.

억수

와! 잘됐네요. 

주섭

이따 저녁에 회식할 거야. 큰길 건너 삼겹살집 예약해 뒀으니까 시간들 비워. 

영자

간만에 남의 살 좀 실컷 씹겠네?

진철

벌써 배고파요. 

억수

오늘 진탕 마셔야지!

동인

위궤양 도졌다며.

억수

병원 약 다 소용없어요. 술이 진짜 약이지. 

주섭

(수혁에게) 새로 온 친구도 참석해. 신입 환영식을 겸하는 거니까. 알겠지?

수혁

네.

이슬

죄송하지만 저는 좀 빠질게요.

억수

이슬 씨가 왜요? 이슬 씨 없는 회식이 무슨 재미가 있다고요.

영자

또 시작이네.

이슬

몸이 좀 안 좋아서요. 죄송해요.

주섭

오늘은 예외 없어. 다들 일 끝나면 모여. 이상!


암전.




5장



조명이 서서히 들어오면 연기로 자욱한 상가 건물 위. 운동복 차림에 마스크를 쓴 수혁, 한 사내와 대치하고 있다. 사내는 쇠 파이프를 들고 있고 수혁은 진압 방패를 들고 있다.


수혁

그만 내려가자! 건물에 불이 붙었어!

사내

꺼져! 이대로는 절대 안 내려가! 

수혁

이러다 죽어! 

사내

내려가도 죽는 건 마찬가지야! 제대로 된 보상 없인 한 발짝도 못 움직여!

수혁

(다가서며) 포기해. 다 끝났어!

사내

(쇠 파이프를 휘두르며) 다가오지 마! 


수혁, 사내의 쇠 파이프를 잡는다. 사내가 수혁의 몸을 붙잡고 바닥에 뒹군다. 잠시 뒤엉켜 몸싸움을 하는 두 사람. 어느 순간 수혁, 바닥에서 일어서지만 사내는 그대로 쓰러진 상태다. 수혁,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깨닫고 서너 발짝 도망가다가 사내를 뒤돌아본다. 사이. 쿵, 소리가 들리며 수혁이 창살 그림자에 갇힌다. 법정에서 판결을 내리는 망치 소리가 세 번 들려온다. 수혁, 안타까운 표정으로 서 있다가 제자리에 주저앉는다. 창살 그림자가 더욱 짙어진다. 수혁의 모친이 다가선다.  


모친

몸은 좀 어떠니?

수혁

왜 또 오셨어요.

모친

변호사가 애쓰고 있어.


사이. 수혁, 모친을 올려다본다.


수혁

살이 많이 빠지셨네요.

모친

요새 입맛이 없어서 그래. 당분간 못 올 거야. 지방에서 식당 하는 친구를 돕기로 했어.

수혁

제 걱정은 말고 몸조심하세요.

모친

미안하다.

수혁

······. 

모친

나 때문에 네가 이렇게 됐어.

수혁

그런 말 듣기 싫어요!

모친

부모 잘 만났으면 그런 일은 하지 않았겠지. 네가 얼마나 착했니. 그 좋아하는 그림 포기하고 아버지 병원비 댄답시고 할 일 안 할 일 닥치는 대로 하다가 이렇게 된 거야. 어차피 죽을 인간, 그냥 놔두고 네 인생 살게 할 걸······ 내가 미친년이었어. 

수혁

······ 정당하게 내 할 일을 했어요. 

모친

사람이 죽었어. 네 아버지가 전과 있다는 이유로 사람들한테 손가락질 받을 때 네가 뭐랬니. 절대로 아버지처럼 살지 않겠다고 했잖아. 근데 너도······. 

수혁

듣고 싶지 않아요. 

모친

죽은 그 사람한테 몸이 불편한 딸이 있었다는구나. 근데 이젠 돌봐줄 사람이 없는 모양이야. 

수혁

그런 이야긴 왜 하세요?

모친

사람이 살다 보면 잘못을 저지를 수도 있어. 그 대가로 벌을 받더라도 끝나는 게 아냐. 용서를 구해야 해. 꼭 그래야 해.   

수혁

그만 가세요!  


모친, 퇴장한다. 수혁, 웅크리고 앉은 채 양쪽 무릎 사이에 머리를 파묻는다. 점점 사위가 어두워진다. 사이. 딸깍, 소리와 함께 주위가 환해진다. 동인, 이불을 덮은 채 잠들어 있는 수혁을 내려다보고 있다. 순간 수혁, 악몽에서 깨어나듯 몸을 벌떡 일으킨다.


동인

좀 더 자도 돼.

수혁

제가 왜 여기 있죠?

동인

기억 안 나?

수혁

(두통을 느끼며) 아······.

동인

무슨 술을 몸도 못 가눌 정도로 마셔? 

수혁

몇 잔 안 마셨는데…….

동인

몸이 골았구만. 집이 어딘 줄 알아야 택시라도 태워 보내지.

수혁

저기······.

동인

화장실?

수혁

아뇨. 물 좀 마실 수 있을까요?

동인

(컵에 물을 따라 건네며) 근데 무슨 잠꼬대를 그렇게 해? 

수혁

(물을 벌컥벌컥 마신 뒤) 제가 뭐라고 했나요?

동인

내려가자, 내려가자, 그 말을 수십 번도 더 했어. 대체 어디로 내려가자는 거야?

수혁

······.

동인

(담배를 피워 물고) 어디 살아?

수혁

저 아래 고시원요.

동인

가족은?

수혁

없어요.

동인

한 명도?

수혁

네.

동인

자네도 꽤나 외롭고 고단한 인생이군.


사이.


동인

그래도 나만큼은 아닐 거야. 

수혁

부장님이 왜요?

동인

열 살 때 양친 다 잃고 시골 친척 집에서 눈칫밥 먹다 못 견뎌서 도시로 올라왔어. 구두닦이, 신문 배달, 삐끼, 식당 종업원 등 안 해본 게 없는데 세탁 기술을 익힌 뒤로 그나마 밥 먹고 사는 걱정을 덜었지. 이 나이쯤 되어 보니 사람은 누구나 자기 몫의 고생이 있는 것 같더군. 도망가려고 발버둥 칠 필요 없어. 그 고생은 꼭 하게 되어 있어. 허물없는 사람도 없지. 그 허물을 이고 지고 사는 게 사람 운명이야.  


개가 낑낑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실제로 개는 보이지 않는다. 


동인

봉구야, 왜 그러니? (개를 안아 드는 자세를 취하며) 이 녀석을 데리고 산 지가 벌써 20년 가까이 돼. 사람으로 따지면 아흔 살은 넘었을걸? 이가 다 빠져 먹는 게 시원치 않은데도 끼니때 되면 밥 달라고 저리 낑낑대는 거야. 생명이라는 게 참 눈물이 나.


동인, 봉구를 내려놓고 사료를 준다. 


동인

봉구야, 많이 먹어라. 얼마나 더 살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사는 동안 많이 먹어라. (혼잣말처럼) 근데 이거야 원, 향수라도 사서 뿌려야 하는 건지. 목욕을 시켜도 네 퀴퀴한 냄새는 사라지질 않는구나.  

수혁

정이 많이 드셨겠어요.

동인

가족이지 뭐. 세상에 혼자라는 생각이 들 때마다 이 녀석 때문에 웃을 수 있었어. (새 담배를 피워 물고) 근데 어제 내가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던 블라우스, 자네가 만졌나?

수혁

죄송합니다.

동인

허락 없이 만진 건 죄송한 일이긴 한데 실력은 괜찮더군.

수혁

네? 

동인

(시계를 보고) 해장하러 갈 텐가? 저 앞에 선짓국 잘하는 집 있는데. 간밤에 많이 마셨더니 속이 쓰리군.

수혁

제가 사드리겠습니다.

동인

까불고 있네. 어서 일어나기나 해.


암전.




6장



한 달 뒤. 오전 11시 무렵. 심수봉의 〈사랑밖엔 난 몰라〉의 볼륨이 커지며 조명이 들어온다. 다림질대 앞에서 이슬, 영자, 수혁이 능숙하게 다림질을 하고 있다. 동인은 테이블 의자에 앉아 세탁물의 얼룩을 지우고 있고 진철은 한쪽에 쭈그리고 앉아 핸드폰 게임을 하고 있다. 동인, 진철을 못마땅하다는 듯 쳐다보지만 진철은 게임에 열중하느라 눈치채지 못한다. 


동인

이제 그만하지?

진철

한 판만 더요. 누가 제 기록 깨서 다시 해야 해요.

동인

내가 널 보면…….

진철

싹수가 노랗다고요? 근데 전 엊그제 검정고시도 통과했고요. 이제 고등학교 과정에 들어가거든요. 이만하면 싹수가 노란 것치고는 제 앞길 잘 개척하고 있는 거 같은데요? 안 그래요?

동인

뭐야? 

영자

부장님이 한 방 먹었네요.

이슬

어른한테 그러면 못써!

영자

(한숨을 내쉬고) 지겨워 죽겠네. 매일 변하는 게 없어. 오늘은 어제 같고 내일은 또 오늘 같을 거고. 언제까지 헌 옷이나 만지고 살아야 하나.

동인

이런 일이라도 없음 이 추운 계절에 어디서 어떻게 버티려고?

영자

이 런드리 하우스에 들어온 것부터 잘못이에요.

동인

뭔 소리야?

영자

요샌 슬픈 드라마를 봐도 눈물이 안 나요. 마음까지 하얗게 세탁돼서 아무런 감정도 없게 돼버린 것 같아요. 

동인

아직 배가 덜 고프니까 그런 소리가 나오는 거야.

영자

남편이랍시고 사기꾼을 만나 공범으로 몰려 별까지 달았어요. 인생 제대로 꼬였죠 뭐. 이혼까지 한 마당에 세탁 기술이 아니라 연기라든지 노래를 배웠으면 배우나 가수가 됐을지도 모르는데. 나 그런 거 아주 잘할 자신이 있는데.

동인

얼씨구.  

영자

연애라도 해야지. 인생 심심해서 안 되겠어요. 

동인

누가 중매라도 선대?

영자

(수혁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우리 수혁 씨, 여기서 일한 지 한 달 쯤 됐죠?

동인

갑자기 웬 콧소리야?

영자

한 달 기념으로 내가 수혁 씨를 위해 커피 한 잔 타드릴까?

수혁

아, 아뇨. 괜찮습니다.

영자

쑥스러워하긴! 나 커피 진짜 맛있게 잘 타. 한 잔 마셔 봐요!

동인

내 것도 부탁해!

이슬

저도요.

영자

콜!


영자, 탕비 공간에서 커피를 타고 있으면 심수봉의 노래가 끝난다. 억수, 옷 박스가 가득 든 손수레를 끌고 씩씩대며 등장한다.


억수

진짜 어이없어서 화도 안 나네!

동인

왜 그래?

억수

제일통상 김 부장 그 새끼한테 밥 좀 사라니까 시간 없다고 무안을 주잖아요. 확 거래처 바꿔버릴까요? 

동인

니가 뭐라고 김 부장한테 밥을 사라고 해? 이 돌대가리야! 비빌 데를 보고 비벼야지! 요새 헌 옷 물량 확보하기 힘든 거 알아 몰라? 

억수

밥 한번 먹자고 한 걸 갖고 부장님까지 왜 그래요? 세상 그렇게 각박하게 살 건가요?

동인

으이구! 철이 안 드는 것도 재능이다 재능!


진철, 손수레에 든 옷 박스를 펼쳐 본다. 


진철

와! 오늘은 물건이 대따 좋은 거 같은데요?

영자

(커피가 든 쟁반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어디 좀 봐. ······어? 진짜네? A급이 수두룩해! (코트를 펼쳐 들고) 이거 좀 봐! 당장 입어도 문제없겠는데?

억수

괜찮은 양복바지 하나 없나? 안 그래도 하나 필요한데. 

동인

그쯤 해 둬. 물건 손댔다가 사장님 아시면 또 혼쭐나려고. 

억수

(천장 모서리를 가리키며) 저 CCTV 고장 났어요. 걱정 안 해도 돼요.

동인

안 된다면 안 되는 줄 알아.

억수

하여간 꽉 막히셨다니까.

영자

(커피를 동인에게 건네주고) 커피 둘, 프림 둘, 설탕 둘 넣었어요. (수혁에게 건네며) 수혁 씨는 세련됐으니까 커피 둘, 프림 하나, 설탕 하나. (이슬에게 건네며) 이슬이는 커피 둘, 프림 둘, 설탕 하나 맞지?

이슬

고마워요 언니.

억수

내 건 없어요?

영자

직접 타 마셔. 

억수

(투덜대며 탕비실로 향하면) 

영자

근데 부장님, 여기 들어오는 물건들은 대부분 동남아나 아프리카로 가는 C급, D급이잖아요. 이런 A급은 거의 드문데 우리가 재미 좀 보는 게 뭐 어때서 그래요? 예전에는 가끔 그렇게 했잖아요.

동인

사장님이 금지시켰잖아. 저번 블라우스 사건 이후로.

영자

아니 누가 그게 이태리 명품인 줄 알았나. 그냥 좀 고급스럽다 했지. 사장님도 웃겨. 어차피 헌 옷으로 들어온 건데 뭐. 나 같은 사람이 그런 옷 입는 게 그렇게 못마땅한가?

동인

그냥 밖에서 사 입어. 그게 속 편하잖아. 

영자

밖에선 A급을 못 사 입잖아요. 너무 비싸서.

동인

그럼 입지 마. A급 입는다고 사람까지 A급 돼?

진철

(점퍼를 집어 들며) 와! 이거 백화점에서 파는 아동복이잖아요. 이런 건 한 번도 입어 본 적 없는데.

영자

곧 크리스마스인데 선물이라 생각하고 하나씩 골라 입으면 어때요? 뭐 하면 헌 옷만큼 셈을 치르면 되잖아요. 

동인

안 된다니까!

억수

관둬요. 부장님 고집을 누가 말려.

진철

크리스마스 선물 받고 싶은데.


진철, 시무룩해진다. 

사이.


동인

(한숨을 내쉬고) 그럼 하나씩만 골라. 이번이 마지막이야!


진철, 억수, 영자가 환호성을 지르며 옷을 고르기 시작한다. 억수는 주위 동료들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입고 있던 바지를 벗어 던진 뒤 양복바지를 입고, 진철은 아동복 상의를 걸친다. 영자는 다소 작아 보이는 밍크코트를 억지로 몸에 끼운다. 


영자

어때? 이만하면 부잣집 안방마님 같지 않아?

억수

나야말로 영국 신사 같지 않아요? 옷빨 진짜 죽인다니까!

진철

(스커트를 집어 건네며) 이슬이 누나는 이 치마 입어요. 다리가 예쁘니까 잘 어울릴 거예요.

이슬

고마워.

억수

근데 너! 맨날 바지만 입고 다니는 이슬 씨 다리가 예쁘다는 건 어떻게 아는데? 

진철

그, 그건…….

억수

이슬 씨 집에 드나들며 은근슬쩍 훔쳐본 거 아냐?

진철

제가 아저씨처럼 엉큼한 줄 아세요?

억수

뭐? 세상에 나처럼 순수한 남자 있음 나와 보라고 해!

진철

저번에 폰으로 야동 보다 저한테 걸렸잖아요. (혀를 차며) 어른이 그러면 저 같은 청소년이 뭘 보고 배우겠어요?

억수

(진철의 입을 막으며) 너 지금 누구한테 누명 씌우는 거야? 난 그런 적 없어! 이슬 씨, 오해 마세요. 진철이가 장난이 심하잖아요. 

진철

(빠져나오며) 아유 숨 막혀!

억수

(화제를 돌리려고) 아, 신입도 하나 챙겨 줘야겠지? (혀를 차며) 옷 꼴이 그게 뭡니까? (스웨터를 건네며) 이거 입읍시다. B급 국산이긴 하지만 거의 새거나 다름없으니까.

수혁

전 괜찮습니다.

억수

성의를 무시하네? 선배 호의가 우스워? 아님 이 옷이 보잘것없어 보여?

진철

(스웨터를 수혁에게 안기며) 입어 봐요. 사이즈도 맞을 거 같은데.

영자

아유 그래요. 입어 봐요. 체격이 좋아서 옷태가 나겠어.


수혁, 마지못해 스웨터를 입는다.


영자

꼭 영화배우처럼 잘생겼네. 부장님도 하나 챙기셔야죠?

동인

난 됐어. 옷 많으면 귀찮아.

진철

(화가 모자를 동인에게 씌우며) 이건 어때요?

영자

와! 잘 어울리네! 우리 이래 입어 놓으니까 꽤 부유한 사람들 같지 않아? 우리가 없어서 그렇지 제대로만 갖추면 하루하루 허덕대는 사람들이라고 누구도 생각하지 않을 거야.  


사이.


동인

자, 일하자고. 

영자

(거울에 자신을 비춰 보며) 평생 이렇게 살진 않겠지? 언젠가 여길 벗어나 화려한 세상에서 멋지게 살날도 오겠지?

억수

당연하죠.

영자

근데 가망성이 별로 없어.

억수

왜요?

영자

오늘은 어제 같고 내일은 또 오늘 같을 테니까. 그럼 언젠가가 돼도 지금과 똑같겠지.

억수

그러니까 한 방 터뜨려야죠.

동인

이 세상은 피라미드와도 같아. 우린 밑바닥이야. 아니, 밑바닥보다 더 밑인 지하일지도 모르지. 

진철

우리 위엔 누가 있는데요? 

동인

좀 더 잘사는 사람들이 있겠지.

영자

그 위에는요?

동인

그보다 더 잘사는 사람들이 있겠지.

진철

사장님 같은 분요?

동인

그럴 수도 있지.

억수

근데 사장님 위에도 누가 있을까요?

동인

있을 거야. 

진철

그럼 그 위에 위에 위에는 누가 있을까요? 가장 꼭대기요.

동인

모르지. 근데 분명 누가 있을 거야.  

진철

어렵네.

억수

그러니까 너도 땡땡이 그만 치고 열심히 해. 그래야 위로 올라갈 수 있어. 

동인

내가 너한테 하고 싶은 말이다. 열심히 좀 해. 

억수

부장님은 맨날 나한테만 뭐라고 한다니까. 


조명이 전환되면 주섭, 자신의 사무실에서 조명을 받는다. 주섭, 누군가와 심각하게 전화 통화를 하고 있다.


주섭

곧 갚을 테니 걱정 말라니까! (듣고 있다가) 당신들, 말이 심한 거 아냐? 그깟 빚이 얼마나 된다고! 갚을 테니 걱정 말고 끊어! (전화기를 꽝 내려놓고) 빌어먹을 새끼들! 그날 끗발이 너무 애매하게 섰어! 


주섭, 어디론가 전화를 건다. 한쪽으로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내의 모습이 드러난다.


주섭

회장님, 접니다.

회장

어쩐 일이지?

주섭

뉴타운 부지 정보 알려 주신다고 하셨는데 소식이 없어서요. 그런 고급 정보는 저한테 가장 먼저 주셔야죠. 

회장

이만 끊지.

주섭

저번에 세탁해 드린 돈은 잘 쓰셨죠? 제가 옷뿐만이 아니라 돈도 잘 세탁하지 않습니까. 근데 이런 사실은 저만 알고 있어야 하는데 자꾸 입이 근질거려서요. 

회장

지금 날 협박하나?

주섭

같이 살자는 말씀을 드리는 것뿐입니다. 회사가 요새 좀 어려워서요. 우수 중소기업에도 못 뽑혔거든요. 어떤 놈이 농간을 부린 건지 뭔지. 저 좀 도와주십쇼. 그래야 확실히 입을 다물고 있죠.

회장

······알았으니까 기다리고 있어.

주섭

그럼 믿겠습니다. (회장이 전화를 끊고 사라지면) 빌어먹을 놈! (다른 번호로 전화를 걸며) 스트레스 좀 풀어야지.


다시 공장. 이슬의 핸드폰이 진동한다. 이슬, 주위 눈치를 보다가 통화 버튼을 누른다.


주섭

내 사무실로 지금 바로 올라와.

이슬

(조그맣게) 근무시간이에요.

주섭

잔말 말고 올라와. 보고할 게 있다고 하고. 

이슬

곤란해요. (전화를 끊으면)

억수

근데 이슬 씨는 어젯밤에 언제 집에 갔어요?

이슬

네?  

억수

화장실 갔다 왔더니 없던데. 데려다주려고 했더니.

동인

니가 이슬이를 왜 데려다줘?

억수

같은 방향이잖아요. 

이슬

몸이 안 좋아서 먼저 갔어요.

영자

사장님하고 같이 나가는 것 같던데.

억수

그러고 보니 저번 회식 때도 그랬지 않나? 혹시…….

수혁

어젠 제가 모셔다줬습니다. 

억수

뭐? 신입이 왜 이슬 씨를? 

수혁

그렇게 됐습니다. 

억수

근데, 어제 꽤 취하지 않았었나? (동인에게) 비틀거리며 나가는걸 부장님이 부축해 주지 않았어요?

동인

글쎄, 잘 기억이 안 나는데.

억수

이슬 씨, 신입 말이 맞아요?

이슬

······네.

억수

뭐야? 두 사람 설마 그새 눈이라도 맞은 건 아니지? 

영자

지금 뭔 소릴 하고 있어? 누가 누구하고 눈이 맞아? 

억수

왜 화를 내요? 

영자

말도 안 되는 소릴 지껄이니까 그렇지! 눈 맞은 사람은 따로 있는데 왜 엉뚱한 데다 붙여?

동인

그만들 둬! 오늘따라 왜 이리 잡담들이 많아? 


벽에 붙어 있는 차임벨이 울린다. 


진철

와! 점심시간이다! 

동인

오늘 점심은 뭐지?

영자

비빔국수 시켰어요.

억수

군침 도네!


모두들 일손을 놓고 밖으로 나선다.


동인

(가만히 서 있는 수혁에게) 자넨 안 가?

수혁

속이 좀 안 좋아서요.

동인

젊은 사람이 시원찮긴. 

영자

소화제 갖다줘요?

수혁

아뇨, 그 정도는 아니고요.

억수

가자고요! 국수 퍼지면 아무 맛도 없어요.


수혁만 남기고 모두 퇴장한다. 사이. 이슬, 다시 등장한다.


이슬

왜 그랬죠?

수혁

······네?

이슬

조금 전에 왜 그랬냐고요.

수혁

곤란하신 거 같아서요.

이슬

제가 뭐가 곤란한데요?

수혁

······.

이슬

저 아세요? 

수혁

······.

이슬

말해 봐요. 저 알죠? 

수혁

네.


암전.




7장



그날 저녁. 무대 한쪽의 포장마차. 영자와 억수가 술을 마시고 있다. 영자, 소주를 마신 뒤 병을 기울여 다시 잔을 채운다.


억수

천천히 마셔요. 저번처럼 취하려고.

영자

(실실 웃으며) 왜? 내가 또 잡아먹을까 봐?

억수

분명히 말하겠는데 그날 일은 실수예요!  

영자

누가 뭐래? 

억수

근데 좀 이상해요.

영자

뭐가?

억수

신입 그 자식, 많이 취한 거 같았는데 어떻게 이슬 씨를 집까지 바래다줬겠냐고요. 

영자

도중에 깼겠지. 뭘 그리 머리 아프게 생각해? 술이나 마셔.

억수

(잔을 비우고) 달다.

영자

오늘도 취할까?

억수

실수 반복하고 싶지 않다니까요! 근데 누님, 돈 좀 없어요? 급하게 이천 정도 필요한데. 

영자

또 노름하려고? 

억수

아뇨. 암호화폐 사려고요. 그게 요샌 대세래요. 빌려줄 수 있어요?

영자

먹고 죽으려고 해도 없어.

억수

괜히 물어봤네. 누님도 언제까지 이렇게 살 순 없잖아요. 한 건 크게 잡아서 남들 보란 듯이 살아야지.

영자

무슨 수로?

억수

있는 돈 없는 돈 끌어모아 암호화폐를 사야 해요. 살던 대로 살면 계속 그대로인 거예요. 모험을 해야 뭔가 나아지지.


조명이 전환되면 이슬의 방. 이슬과 진철이 단팥빵을 먹고 있다. 


진철

맛있다.

이슬

많이 먹어. 저기 찬장에 더 있어. 

진철

근데 그 아저씨가 누날 진짜 안다고 했어요?

이슬

응.

진철

어떻게요?

이슬

모르겠어. 그 사람, 어떻게 생겼는지 설명 좀 해줄래?

진철

음······ 키는 180센티 정도 되고 좀 말랐어요. 눈빛이 날카롭고 무표정한 편인데 보기에 따라 잘생겼다고도 말할 수 있고 아닐 수도 있어요. 

이슬

그게 뭐야. 짐작도 안 가네.

진철

어렸을 적에 키다리 아저씨가 나오는 동화를 좋아했거든요. 주인공 소녀가 힘들 때마다 키다리 아저씨가 도와주잖아요. 혹시 그 아저씨도 그런 키다리 아저씨면 누나한테 좋을 텐데. (고개를 흔들고) 에이 말이 안 되는구나.

이슬

왜?

진철

키다리 아저씨가······ 살인을 했으면 안 되는 거잖아요. 


조명이 전환되면 주섭과 철오, 호프집에서 맥주를 마시고 있다.


철오

그 친구는 어때?

주섭

얌전해.

철오

방심하지 말고 잘 지켜봐.

주섭

왜?

철오

30년 형사 생활로 얻은 감이야. 처음엔 그냥 그러려니 했는데 생각할수록 이상해. 한사코 자네 회사에 취직하고 싶어 했어. 이상하지 않아?

주섭

세탁 일이 좋은 것이겠지. 

철오

그렇게 단순할 리 없다니까. 뭔가 꿍꿍이가 있어.

주섭

그렇다고 해도 걱정할 거 없어. 우리 런드리 하우스가 옷만 세탁하는 게 아니라 사람도 세탁해버리니까. 거칠게 굴러먹던 놈들도 여기 와서 몇 년 먼지 마시고 나면 힘이 빠져 흐물흐물하게 된다고. 사회악을 제거해 주는 거야. 

철오

사회악은 너 아니냐? 

주섭

내가 왜?

철오

그 앞 못 보는 애 좀 그만 괴롭혀. 그 정도 재미 봤으면 충분하지 않냐? 

주섭

사랑이라니까.

철오

놀고 있네. 자꾸 그러면 구속시켜버린다.

주섭

나한테 받은 뇌물 다 토해내시게? 

철오

그럴 순 없지.

주섭

그만 떠들고 술이나 마셔.  


조명이 전환되면 세탁공장 안. 수혁, 야전침대 위에 침낭을 펼치고 있으면 동인, 술에 취한 채 비닐봉지를 들고 나타난다. 


수혁

어? 집에 안 가셨어요?

동인

모텔이라도 잡지 여기서 왜 궁상이야?  

수혁

내일이면 원룸으로 들어가니까요. 모텔은 불편해서요. 

동인

(능글맞게 웃으며) 하긴 옆방에 커플이라도 들어오면 꽤나 불편해지겠지. 밤새 잠도 못 잘걸? 

수혁

한잔하셨네요.

동인

매일 술이지 뭐.


동인, 테이블 위에 비닐봉지를 펼쳐 놓는다.


수혁

순대네요?

동인

(소주병을 꺼내 종이컵에 따르고) 한잔해. 

수혁

(소주병을 받아 동인이 들고 있는 종이컵에 따르고) 받으세요.

동인

(받아서 마시고) 크 좋군. 순대 좀 먹어 봐.


수혁, 젓가락으로 순대를 집어 입에 넣고 씹으면 동인, 그 모습을 바라본다.


수혁

안 드세요?

동인

난 됐어. (담배를 피워 물고) 여기서 일하는 거 힘들지 않아?

수혁

몸은 힘들지만 마음은 편해요. 

동인

열심히 하면 꽤 괜찮은 기술자가 될 수 있겠어. 싹수가 괜찮아. 

수혁

칭찬은 처음 해주시네요.

동인

자넬 보면 예전의 내가 생각나. 나도 갈 데 없어 세탁소 한켠에서 숱하게 잤지. (연기를 내뿜고) 감옥에서 나온 직후였어.

수혁

부장님은 그런 데 가실 분 같지 않은데요.

동인

사람 겉만 봐선 모르는 거야. 스무 살 무렵에 배를 탔는데 다른 선원하고 시비가 붙었어. 몸싸움 중 그 선원이 떠밀려 바다에 빠졌는데 스크루에 그대로 빨려 들어갔어. 구할 새도 없었지. 고의는 아니었지만 어쨌든 사람이 죽었어.


사이.


동인

오갈 데 없는 날 받아 준 분이 계셨어. 국내 최정상의 세탁기능사셨지. 5년 넘게 욕이란 욕은 다 들어가며 기술을 배웠어. 고생도 많이 했고 남몰래 울기도 많이 울었지. 기술에 자신이 붙으니까 모아놓은 돈은 없는데 독립하고 싶더라고. 그때 하필 스승이 나한테 은행 업무를 맡긴 거야. 잔고가 꽤 되길래 그걸 갖고 튀었지.

수혁

······. 

동인

세탁소만 차리면 금방 갚을 수 있을 줄 알았어. 근데 당시 경기가 너무 안 좋았어. (한숨을 내쉬고) 스승이 날 많이 믿었는데 배신감이 컸을 거야. 그래도 5년 가까이 죽어라 일하다 보니 돈이 모이더라고. 잔뜩 겁을 먹고 스승을 찾아갔는데 돌아가신 지 1년이 넘었더라고.  

수혁

그럼 빚을 갚지 못하신 거네요.

동인

오래전에 인연 끊긴 아들이 있다고 들었었어. 그 친구를 찾을 수 있다면 갚을 생각이었어. 근데 만날 수 없었지. 자네 나이쯤 됐을 텐데…… (갑작스러운 의혹에 휩싸여) 혹시 부친이 무슨 일을 하셨나?

수혁

공사장 인부셨어요.


사이.


동인

언제라도 그분 아들이 빚을 받으러 왔으면 좋겠어. 용서받을 수 없더라도 죄를 고할 기회나 있으면 좋겠어. 죗값 때문에 이 나이 먹도록 혼자 외롭게 사는 건가 싶어. 자네는 갚을 거 있으면 확실히 갚고 용서 빌 일 있으면 제대로 빌어. 그것도 다 때가 있으니까. (피식 웃으며) 내가 너무 많이 마셨나 보군. 이런 말까지 주절거리다니.

수혁

용서를 받으면, 깨끗해질 수 있을까요? 세탁하듯이 깨끗이요.

동인

죄라는 건 희미해질 뿐 사라지진 않아. 빨래를 아무리 깨끗이 해도 옷감의 미세한 오염물질까지는 벗겨내지 못하는 것과 같아. 그 상태로 옷은 결국 낡아 폐기 처분되고 말지. 사람의 죄도 몸이 무너져 죽기 전까지 남아 있는 거야.

수혁

······.

동인

이만 가야겠군. 술 몇 모금 더 마시고 자. 감기 안 들려면. 


동인, 퇴장한다. 수혁, 그 방향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종이컵에 소주를 채워 들이켠다. 침낭에 들어가는 수혁. 딸깍하는 소리와 함께 스탠드가 꺼지면 사위가 어두워진다. 딸깍, 하며 다시 켜지는 스탠드 등. 그 동작이 반복되다 암전.  





8장



조명이 들어오면 어슴푸레한 새벽. 복면을 한 사내가 방 안을 뒤지고 있다. 동인, 한쪽 이불 위에서 자고 있다. 사내, 서랍장 깊숙한 곳에서 묵직한 종이가방을 꺼낸다. 그 와중에 서랍장 위의 탁상시계가 바닥에 떨어진다. 


동인

(벌떡 일어나며) 누, 누구야?

사내

······.

동인

당신 누구야? 


사내, 아무 말 없이 서 있다. 봉구가 으르렁거린다.


동인

혹시 부친의 빚을 받으러 왔나?

사내

······.

동인

아니군. 넌 그분 아들이 아냐. 그거 이리 내놔!


봉구, 으르렁거리며 달려들지만 사내가 발로 찬다. 깨갱거리며 쓰러지는 봉구. 동인, 사내에게 달려든다. 사내, 동인을 힘껏 밀쳐내고 도망친다. 바닥에 쓰러진 동인의 신음이 들려오며 암전.




9장



조명이 밝아오면 출근 시간 전의 세탁공장. 수혁, 와이셔츠를 앞에 두고 살펴보고 있다가 감을 잡은 듯 약품 처리를 해서 얼룩을 지우기 시작한다. 이슬, 등장해서 작업에 열중하고 있는 수혁 쪽을 흘끗 바라보고는 자신의 자리에 앉는다. 수혁, 문득 고개를 들어 이슬을 바라본다. 


수혁

어? 언제 왔어요?

이슬

방금요. 


이슬, 에코백에서 은박지로 싸여 있는 걸 조심스레 꺼내 다림질대에 올려놓는다. 은박지가 펼쳐지자 삶은 고구마가 드러난다. 이슬, 그중 큼직한 걸 하나 집어 들었다가 내려놓는다. 잠시 머뭇거리다가 수혁 쪽을 바라본다. 


이슬

아침 식사 하셨어요?

수혁

아, 아뇨. 

이슬

(고구마를 내밀며) 이거 하나 드세요.

수혁

괜찮아요. 

이슬

드세요. 밤고구마라서 먹을 만해요.

수혁

······.

이슬

팔 아픈데.

수혁

(받아 들고) 잘 먹을게요. (크게 한 입 베어 물고) 맛있네요.

이슬

여기서 지내신다면서요.

수혁

곧 원룸에 들어갈 거예요.

이슬

가족들은 다른 도시에 계세요?

수혁

없어요······ 가족.

이슬

미안해요.

수혁

아뇨. 괜찮아요.  


사이.


이슬

근데 우리가 어디서 알게 된 사이죠?

수혁

나중에 말씀드릴게요. 

이슬

눈이 안 보이는 대신 다른 감각이 발달했어요. 목소리만 들어도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거든요. 근데 수혁 씨는 잘 모르겠어요.  

수혁

허물이 많아서 그럴 거예요.

이슬

······허물요? 

수혁

그래서 여러 겹의 가면을 쓰고 있을 수밖에 없죠. 이슬 씨는 그런 게 필요 없겠죠? 

이슬

필요해요. 저도 허물이 많거든요.

수혁

설마요.

이슬

사람 겉만 봐선 모르는 거예요.


억수, 휘파람을 불며 등장하다 수혁과 이슬의 화기애애한 모습을 발견한다.


억수

어랍쇼? 두 사람, 뭐지? 설마 같이 출근한 거? (고개를 갸웃거리며) 설마 지난밤에 같이 있었던 건 아니겠지?

이슬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예요?

억수

안 그럼 왜 이른 아침에 두 사람이 같이 있냐고.

이슬

일찍 출근하는 것도 잘못이에요?

억수

이봐 신입! 요새 내가 눈여겨보고 있는데 영 못마땅해. 입사를 했으면 일을 해야지 왜 여자를 꼬드기는데? 플레이보이야? 여기가 무슨 나이트클럽인 줄 알아?

수혁

······.

억수

왜 말을 못 해? 정곡을 찌르니까 할 말 없지? 

수혁

그만 좀 하시죠.

억수

뭐? 선배가 말하는데 어디서 말대꾸야?

수혁

당신 같은 선배 둔 적 없는데. 

억수

(수혁의 멱살을 잡고) 이게 아침부터 뭘 잘못 먹었나? 한 판 붙고 싶어?

수혁

(억수의 손을 비틀며) 그러겠다면 어쩔 건데?

억수

아야! 아야! 이거 안 놔? 안 놔?

이슬

(손을 허우적거리며 말리려 들며) 왜들 그래요? 그만해요!


영자와 진철이 등장하다가 놀란 눈이 된다. 


영자

아침부터 이게 뭔 일이래? 왜들 싸우고 그래?  

진철

어? 수혁 아저씨가 더 세요!

영자

(두 사람을 떼어 놓으며) 그만들 좀 해!

억수

(손목을 만지작거리며) 진짜 열받네! (섀도복싱을 해대다가) 똥이 무서워서 피하나 더러워서 피하지? 내가 더러워서 참는다! 

영자

그러게 왜 가만히 있는 사람한테 시비를 걸어? 

억수

와! 이 누님 이제 보니 웃긴 사람이네. 누님이 봤어? 내가 시비 거는 거 봤냐고! 왜 알지도 못하면서 나한테 뭐래?

영자

꼭 봐야 알아? 니놈 심보가 원래 그렇잖아.

억수

진짜 나랑 한번 붙어 보겠다는 거야 뭐야? 

영자

(소매를 올리며) 그래 한번 붙자. 내가 원래 불의를 보면 못 참아! 


주섭, 등장한다.


주섭

왜들 이리 시끄러?

영자

어? 사장님 나오셨어요?

억수

사장님, 진짜 억울해서 직장생활 못 해 먹겠습니다. 제가 이런 말은 안 하려고 했는데 회사가 뭐 연애하는 뎁니까? 여자 꼬시는 데예요? 일하는 데잖아요. 근데 저 신입이 완전 물을 흐리고…….

주섭

시끄러! 다들 김 부장 소식 모르지?

억수

부장님이 왜요?

주섭

지난밤에 강도를 당했다는군. 

이슬

정말요? 혹시 많이 다치셨대요?

주섭

생명에는 지장 없대.

영자

아니 세상에······ 어쩌다가······ 그래도 불행 중 다행이네요.

억수

내가 그럴 줄 알았다니까. 그러니까 왜 현금을 집에 놔둬 가지고 표적이 되냐고.  

영자

이걸 어쩌나. 일 끝나고 병문안 가야겠네. 

억수

하여간 없던 일이 막 벌어지네. 그러게 회사에도 사람이 잘 들어와야 한다니까. 여태까지 이런 일은 한 번도 없었는데 말이야.

주섭

이따 형사가 들른댔으니까 다들 자리 지켜. 이런 사건 벌어지면 어쩔 수 없이 주위 사람이 용의자가 되는 거야. 다들 입조심해. 


주섭, 퇴장한다.   


영자

뭐야? 우릴 강도로 의심하는 거야?

진철

(이슬에게 안기며) 누나, 무서워.

이슬

걱정 마. 별일 없을 거야. 

억수

범인으로 의심 가는 사람은 있지만 난 아무 말 안 하겠어. 괜히 그랬다가 해코지당할지도 모르니까. (수혁이 들으라는 듯) 근데 나 같으면 자수하겠어. 곧 수갑 차게 될 텐데 그래야 형량이라도 줄이지.

수혁

그만 좀 합시다.

억수

(비꼬듯) 왜 발끈하고 난리일까? 도둑이 제 발 저리는 걸까?

수혁

말 다 했어?


두 사람이 서로 멱살을 잡는다. 주위 사람들이 뜯어말리면 암전. 




10장



전화벨 소리. 주섭에게 조명이 비친다. 한쪽으로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내의 모습이 드러난다.


주섭

회장님, 수없이 전화했었는데 안 받으시더군요. 어떻게 된 겁니까?

회장

아직은 안 되겠어.

주섭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고급 정보를 못 주겠단 겁니까?

회장

자넨 자격 미달이야. 조금만 더 기다리게. 

주섭

저도 자격이 됩니다!

회장

언젠간 때가 올 테니까······ 잠자코 기다려!

주섭

그동안 궂은일은 도맡아 했는데 왜 나만 따돌리는 건데요? 자격? 그게 무슨 개 같은 소리냐고! 

회장

흥분하는군. 그래서 넌 자격이 안 된다는 거야.

주섭

잔말 말고 정보 내놔! 나도 가만 안 있어. 내가 거기 못 올라가면 당신들을 여기로 끄집어 내릴 거야! 알아? 


회장, 전화를 끊는다. 주섭, 소파에 앉아 양손으로 머리를 감싼다. 

조명이 전환되면 직원들이 모여 앉아 있는 공장 안. 철오가 홀로 서 있다.


철오

여기 사장은 어디 갔어? 전화도 안 받고.

영자

문자 남겼으니까 곧 오실 거예요.


주섭, 등장한다.


철오

늦었네.

주섭

이봐 손 형사, 빨리 좀 끝내면 안 될까? 영업에 지장이 많잖아.

철오

어쩔 수 없어. 강도 사건으로 사람이 다쳤잖아. 

억수

형사님은 여기에 그 범인이 있다, 이겁니까?

철오

그럴 가능성이 크지. 

영자

세상에나! 한솥밥 먹은 게 얼만데 그런 짓을 한데요? 여긴 그럴 만한 사람이 없어요.

억수

최근에 온 신입은 아직 한솥밥 먹은 게 아니죠.

진철

왜요? 함께 일하니까 한솥밥 아녀요?

억수

아니라니깐.

영자

하여간 못된 심보! 왜 쓸데없는 소릴 해?

억수

안타까워서 그래요. (수혁의 눈치를 살피고) 진실은 언제든 밝혀지게 되어 있으니까 곧 범인도 밝혀지겠죠.

영자

너는? 찔리는 데 없고?

억수

내가 뭐요?

영자

너 노름빚 있는 거 이 공장 사람들은 다 알아. 너야말로 부장님 돈에 눈독 들일 이유는 충분할걸?

억수

이 누님이 진짜! 내가 스승과도 같은 부장님을 그렇게 만들었다는 거예요?

주섭

조용히들 하지 못해? (철오에게) 손 형사, 그래서 뭘 어쩌겠다는 거야? 남의 영업장에서 이래도 되는 거야? 여긴 범인 없어. 그럴 만한 사람이면 내가 쓰지도 않아. 내가 사람 보는 눈이 얼마나 정확한데. 

철오

모두들 어제 새벽 4시부터 6시까지 알리바이 대 봐. 

진철

알리바이가 뭐예요?

철오

그때 어디 있었냐고.

진철

복지원에서 잤는데요? 전 한 번 자면 누가 업어 가도 몰라요. 

영자

난 어제 친척 언니가 놀러 와서 함께 잤으니 알리바이는 확실하지.

철오

(억수에게) 너는? 

억수

고등학교 동창하고 새벽 2시까지 술 마셨어요. 일어나니까 아침이고 자취방 현관에서 자고 있던데요. 제가 완전 개처럼 취했는데 강도 짓 할 정신이 있었겠어요?

철오

(이슬을 보고는 고개를 흔들고 수혁에게) 자네는?

수혁

여기서 잤습니다. 

철오

집이 아니고?

수혁

원룸으로 이사 가기 전까지 여기서 며칠 지냈거든요. 

철오

새벽에 공장을 나갔으면 바깥 CCTV에 찍혔겠군.


사이.


철오

(주섭에게) 자네는?

주섭

내가 뭐?

철오

알리바이 대라고.

주섭

장난해?

철오

빨리 말해. 오늘 새벽 4시부터 6시 사이에 뭐 했지?

주섭

참 나. 운동했다 왜? 내가 30년 동안 하루도 안 빼먹고 새벽 4시면 일어나 운동해 온 사람이야. 그렇게 의심되면 우리 마누라한테 물어보라고. 그랬나 안 그랬나.  

철오

여기 있는 사람들 모두 당분간 어디 가지 말고 있어. 주변 CCTV 분석하고 탐문 조사할 거니까 곧 결과가 나오겠지.

주섭

글쎄 여긴 범인 없다니까. 우리 사이에 자꾸 이럴 거야?

수혁

저기······.

철오

뭐 할 말 있어?

수혁

어제 자정쯤에 부장님이 여기 오셨어요.

철오

여길 왜?

수혁

순대하고 술을 사 오셔서 함께 몇 잔 마시고 가셨어요. 

철오

그게 끝이야? 몰래 따라가거나 그러지는 않았고?

수혁

······.

억수

형사님, 이 정도면 게임 끝난 거 아녀요? 보니까 조금만 다그치면 자수할 얼굴인데요?

철오

넌 좀 나서지 마. 자꾸 설레발치니까 니가 더 의심스럽다. 

억수

제가 왜요? 개처럼 취해서 뻗었다니까요.

철오

(수혁에게) 너는 나 좀 따라와. 다른 사람들은 내가 한 말 명심하고. (수혁이 가만히 서 있자) 뭐 해? 따라오라니까. 


철오와 수혁이 퇴장한다. 

암전.




11장



그날 밤. 어둠 속. 이슬과 주섭이 다투는 소리가 들려온다.


이슬

그만해요!

주섭

가만히 있어 봐.

이슬

아파요!

주섭

좋으면서 왜 이래?

이슬

이거 놔! 놓으라고 개새끼야!


딸깍, 소리와 함께 불이 켜지면 수혁, 공장 입구에 서 있다. 와이셔츠 사이로 맨 가슴을 내놓은 주섭과 브래지어 차림의 이슬이 놀란 표정으로 옷을 추스른다. 


주섭

원룸으로 이사했다면서 여긴 왜 왔어? 

수혁

······.

주섭

아까 손 형사는 왜 따라갔는데? 뭔 일 있었어?

수혁

······.

주섭

심각한 얼굴 할 거 없어. 연애하는 사람들 처음 봐? (옷을 다 챙겨 입고) 괜히 이런 일 다른 사람들한테 알려 봐야 서로 좋을 거 없어. 무슨 말인지 알지? 입조심하라고. (나가면서 혼잣말로) 기분 잡쳤네 젠장!


주섭, 퇴장한다. 


이슬

(옷을 다 추스르고) 실망했겠네요. 

수혁

…….

이슬

말했잖아요. 허물이 많다고.

수혁

……. 

이슬

재미없는 이야기 하나 해줄까요? 오래전에 상가가 하나 있었어요. 아빤 거기서 부동산 중개소를 하셨어요. 근데 상가 주위로 재개발 열풍이 불었죠. 상가 사람들이 철거 반대 시위를 하려 했을 때만 해도 아빤 참여하지 않을 생각이었어요. 근데 미국에 있는 병원에서 수술을 받으면 제가 앞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말을 듣고 생각을 바꾼 거죠. 다른 사람들은 하나둘 지쳐 포기했지만 아빤 끝까지 상가 옥상을 지켰대요. 내 눈 때문에. 

수혁

…….

이슬

아빠를 원망하기만 했었어요. 무책임하게 낳았다고, 병을 고쳐 주지 않았다고, 미워했죠. 그 일이 있기 전에 아빠가 카레를 만들어 준 적이 있어요. 제 생일이었거든요. 제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 카레여서 손수 정성껏 만들어 주셨는데 그날도 아빠가 원망스러워서 입에도 대지 않았어요. 나중에야 그게 아빠가 만들어 준 마지막 음식임을 알게 되었죠.

수혁

…….

이슬

벌을 받고 있는 거예요. 아빠를 그렇게 보낸 벌.

수혁

…….

이슬

하루에 천 장씩 세탁물을 다려요. 보통 많아야 칠백 장인데 저는 꼭 천 장을 채워요. 왜 그러는 줄 아세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그래야 제가 조금은 반듯해지는 것 같아서예요. 열심히 일하고 싶어서 그러는 게 아니라요. 안 그러면 속이 터져버릴 거 같아서요. 무슨 말인지 알아요?

수혁

……조금은요.

이슬

그러다 더 견딜 수 없게 되면…… 춤을 춰요. 

수혁

춤요?

이슬

네.

수혁

누구하고요?

이슬

저 옷들요.

수혁

옷들이라면…….

이슬

손질이 잘 된 옷들은 자신 있게 추고 상태가 덜 좋거나 세탁이 애매하게 된 옷들은 수줍게 춰요. 


왈츠풍의 음악이 흘러나온다. 무대 양쪽에서 옷들이 걸어 나와 춤을 추는 장면이 환상처럼 전개된다. 어느 순간 이슬도 춤을 추고 수혁도 리듬에 맞춰 몸을 흔든다. 마침내 음악이 멎고 춤을 추던 옷들이 하나둘 사라진다. 

사이.


이슬

갈게요.

수혁

제가 뭐 도와드릴 일 없어요?

이슬

그쪽이 왜요? 

수혁

그게…….

이슬

혹시 나 좋아해요? 

수혁

…….

이슬

하긴 그럴 리가 없지. 근데 어떻게 나를 안다는 건데요?

수혁

…….

이슬

진짜 날 도와줄 맘 있어요?

수혁

네. 

이슬

사장 새끼, 죽여버릴 수 있어요?

수혁

…….

이슬

그건 어렵겠죠?

수혁

이렇게 살지 않아도 되잖아요.

이슬

그럼 어떻게 살죠? 내가 영화 주인공이라면 진작 키다리 아저씨가 나타났겠죠. ……뭐, 어떻게 보면 나타나긴 했죠. 내 몸을 탐하려고 해서 문제지만. 그 사람이 나한테 뭐라고 하는 줄 알아요? 남자를 미치게 한대요. (신경질적으로 웃으며) 앞 못 본다고 무작정 당해 온 멍청이는 아니에요. 나도 이용한 거예요. 불쾌해도 조금만 참으면 생활이 편해지니까.

수혁

그만해요.

이슬

다들 그런 식이죠. 사람들이 기대하는 난 연약하고 부스러질 것 같아서 동정을 받는 존재여야 해요. 

수혁

…….

이슬

동정받느니 이렇게 사는 게 나아요.   

수혁

저 때문에 돌아가신 분이 있어요.

이슬

…….

수혁

그분에겐 딸이 한 명 있었어요. 저는 빚을 갚아야 해요. 

이슬

왜 그런 이야길 하는 거죠?

수혁

…….

이슬

설마.

수혁

제가 거기 있었어요. 그 불타던 건물 옥상에.

이슬

그럼 당신이 그…… (고개를 흔들고) 말도 안 돼요. 


사이.


이슬

이렇게 나타나서 뭘 어쩌자는 건데요. 

수혁

…….

이슬

뭘 도와줄 수 있는데요? 아무것도 없는 전과자면서…… 사장 새끼를 죽인들 날 도와주는 게 될 거 같아요? 천만에요.  

수혁

…….

이슬

나한테 용서받고 싶은 거죠? 그래야 두 발 뻗고 잘 수 있으니까. 

수혁

그런 거 아니에요.

이슬

그럼 뭐죠?

수혁

함께…… 떠날래요?

이슬

뭐라고요?

수혁

어디 간들 여기보단 나을 거예요.

이슬

(어이없다는 듯 실소를 터뜨리고) 어처구니없네. 난, 아무 데도 안 가요. 여기가 좋아요. 그쪽 원망 안 할게요. 아빠가 죽은 건 그냥 사고였어요. 그쪽한테 바라는 거? 아무것도 없어요. 아무런 감정도 없어요. 그쪽도 갈 데가 없을 테니 사라져 달라고는 안 할게요. 그러니까 나한테 신경 꺼요.


이슬, 앞을 더듬으며 퇴장한다. 수혁, 그 방향을 쳐다보면 서서히 암전.




12장



조명이 들어오면 사흘 뒤. 주섭의 사무실. 주섭, 책상 의자에 앉아 있고 수혁, 그 앞에 서 있다.


주섭

나 참 어이없네. 니가 뭔데 만나라 마라야? 

수혁

그만 괴롭히세요. 

주섭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짓고는) 이 새끼가…… 인생이 불쌍해서 받아 줬더니 뭐? 니가 뭔데 그딴 소리야?

수혁

주위에 알릴 겁니다. 

주섭

그년 속마음을 니가 알아? 나 혼자 좋아서 이러는 거 같아? 상생이야. 서로 좋아서 이러는 거라고. 

수혁

(주섭의 멱살을 잡고) 좋아서 그런다고? 당신이 그 여자 마음을 알아? 어쩔 수 없어서, 선택할 수 있는 게 없어서 그런다는 생각은 안 해? 당신은 그걸 이용하는 거잖아! 보호해 줄 수는 없는 거야? 그렇게 짓밟아야 직성이 풀려?

주섭

(캑캑대며) 이거 못 놔? 


그때 억수가 등장해 두 사람을 떼어 놓는다.


억수

(수혁에게) 야 신입! 너 돌았냐? 사장님한테 왜 이래?

수혁

죽여버릴 거야! 다시 한번 그러면 내가 죽여버릴 거야! 

억수

뭐라는 거야? (수혁을 밀치며) 너 미쳤어? 쥐약 먹었어? (수혁이 잽싸게 손목을 잡고 비틀면) 아야! 이거 못 놔? 팔목 부러져! 놓으라고! (수혁이 손을 놓으면 바닥에 쓰러지며) 아이고 나 죽네. 이 새끼 이거 완전 깡패 아냐?

수혁

(주섭에게) 당신, 지켜볼 거야!


수혁, 퇴장한다. 


억수

저 또라이 새끼! 사장님 대체 무슨 일인데요?

주섭

알 거 없어. 

억수

저 새끼 당장 잘라버리세요. 하극상도 정도가 있어야죠. 저놈 온 뒤로 공장이 하루도 편할 날이 없는데. (주섭의 눈치를 살피다) 기분도 꿀꿀한데 어디 가서 맥주나 한잔할까요? 맥주 싫으시면 아는 룸살롱 있는데 거기 가서 양주나 때릴까요?

주섭

널 때리고 싶다. (퇴장하면)

억수

(따라나서며) 사장님, 거기 진짜 끝내준다니까요. 한번 가요! 네? 


암전.




13장



한 시간 뒤. 영자, 이슬, 수혁이 다림질대에서 일을 하고 있다. 앞쪽에서는 진철이 쭈그려 앉아 게임을 하고 있다. 


진철

(한숨을 내쉬고) 아, 또 못 깼어.

영자

그만 좀 해. 억수 올 때 됐어.

진철

백 점만 더 먹었으면 다시 신기록이었다고요. 진짜 아깝네.

이슬

부장님은 좀 어떻대요?

영자

거 뭐더라…… 기억 못 하는 병이 있다던데. 

진철

기억상실증요?

영자

응. 그게 왔나 봐. 근데 경찰은 뭐 하나. 그런 흉악범 하나 못 잡고.

이슬

CCTV에 안 나왔대요?

영자

당최 흐려서 누군지 알 수가 없대. (수혁을 흘끗 보고) 근데 수혁씨는 오늘 일 끝나면 뭐 해?

수혁

……네?

영자

내 친구 조카가 연극배우거든. 공연을 하고 있대서 초대권을 두 장 얻었는데 같이 갈까? 공연 끝나고 막걸리도 한잔하고. 그런 걸 뒤풀이라고 한다던데. 

진철

와! 아줌마 지금 아저씨한테 데이트 신청하는 거예요?

영자

넌 좀 가만히 있어.

진철

왜 얼굴이 빨개졌어요?

영자

수혁 씨 어때? 좋지?

수혁

죄송한데 선약이 있어서요. 

영자

(갑자기 웃음을 터뜨리고) 아유 무슨 남자가 쑥스러움이 그리 많아? 그냥 마음이 원하면 원하는 대로 하게 해. 주위 눈치 보다 좋은 시절 다 보낼 거야?


억수가 등장한다.


억수

좋은 시절은 무슨! 저놈은 곧 여기서 쫓겨날 거예요. 

영자

수혁 씨가 왜?

억수

하극상을 벌였어요. 사장님한테 폭력을 휘둘렀다니까요. 내가 말리지 않았으면 사장님은 골로 가고 저놈은 다시 감옥 갔을 거예요.

진철

설마요. (수혁에게) 진짜예요?

영자

뭘 물어봐. 수혁 씨가 그럴 사람으로 보여? (수혁에게) 아니지? 그렇지 수혁 씨?  


그때 주섭이 등장한다.


억수

사장님 오셨어요?

주섭

(수혁에게) 넌 여기 왜 있어? 아까 나한테 그러고도 계속 일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 당장 꺼져!

영자

사장님, 왜 그러세요? 무슨 일인데요?


수혁, 일손을 놓고 주섭 앞으로 다가선다. 


억수

(막아서며) 뭐야 너? 또 사장님한테 폭력을 쓰겠다는 거야?

수혁

넌 빠져!

억수

뭐? 내가 나사냐? 빠지게? (섀도복싱을 하며) 시발 진짜 내가 불쌍해서 봐주니까 한 판 제대로 뜨자는 거야 뭐야? (수혁이 한 발 다가오자 뒤로 물러서며) 너 진짜 뭔데? 양아치냐? 어?


그때 동인, 어깨에 테니스 가방을 멘 채 등장한다. 모두 동인을 바라본다. 


영자

어? 

진철

부장 아저씨다! 

억수

어떻게 된 거예요? 퇴원하신 거예요?

동인

…….

억수

저 알아보시겠어요?

이슬

괜찮으세요?

동인

…….

주섭

푹 쉬다가 나오라니까. 무리하는 거 아냐?

진철

아저씨, 진짜 기억상실증이에요? 

영자

그래도 여길 찾아온 걸 보면 괜찮아지신 거 아냐?

이슬

(동인의 팔을 잡고) 아저씨, 저 기억하세요? 이슬이에요. 

동인

…….

영자

아무 말도 없으시네. 말을 못 하게 되는 병이 있다던데…….

진철

실어증요?

주섭

그만들 해. 아무래도 상태가 안 좋아 보이네. (억수에게) 최 대리가 집에 좀 데려다주고 와.

억수

막 배송 나가려던 참이니까 가는 길에 모셔다드릴게요. (동인의 소매를 잡고) 이리 따라오세요. 

동인

이거 놔.

억수

어? 말을 하시네? 

주섭

이봐, 정신이 좀 들어? 

억수

근데 웬 테니스 가방? 운동 시작했어요? 


그때 철오가 등장한다.


진철

어? 형사 아저씨 왔네. 

철오

(동인을 발견하고 나서 주위를 둘러보고) 마침 다 있었네. 할 말이 있었는데 잘 됐군. 

억수

뭔데요?

철오

범인이 밝혀졌어.

주섭

……뭐? 그게 진짜야? 

억수

어떻게 찾았는데요?

영자

누군데요?

철오

(수혁을 가리키며) 저 친구!

억수

그럼 그렇지! 정의는 살아 있다니까!

영자

말도 안 돼요! 수혁 씨, 저분 말이 진짜야?

수혁

(철오에게) 전 아닙니다!

철오

너, 양동찬 알지?

수혁

…….

억수

양동찬요? 여기서 일하다 다시 감방 갔는데요?

철오

저 친구랑 교도소에서 같은 방을 썼어.

억수

아하! 저놈이 그놈한테 정보를 듣고 여기 찾아왔다는 거죠?

철오

처음부터 의도적이었어. 

수혁

아닙니다.

철오

아니긴! 기회를 엿보다 김 부장이 순대를 사 들고 찾아왔던 날을 디데이로 삼았겠지. 더 충격적인 사실을 말해 줄까?

주섭

뭔데 그래?

철오

저 친구 얼굴이 찍혔어. 김 부장 집 근처에 주차되어 있던 차에 있던 블랙박스에 찍혔다고.

영자

이게 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진철

(수혁에게) 아저씨가 진짜 그랬어요?

수혁

걱정돼서 갔던 거예요. 

철오

무슨 걱정?  

수혁

눈길이 미끄러울까 봐서요. 김 부장님이 많이 취하셨었어요. 그래서 조용히 뒤따라갔다가 무사히 집에 들어가시자 돌아왔어요. 그것뿐이에요.

억수

누가 그 말을 믿겠냐 이 강도 놈아! 이슬 씨, 이놈의 실체를 이제 알겠죠?

이슬

……. 

주섭

이거 참 실망스럽게 됐군. 

영자

수혁 씨, 사람을 이렇게 배신해도 돼?

진철

와, 진짜 세상에 믿을 사람 없네요.

수혁

(동인에게) 말씀 좀 해 보세요 부장님! 제가 그랬어요?

철오

시끄러! 주변 차량들 블랙박스를 계속 분석 중이니 곧 더 명확한 결과가 나올 거야.


동인, 말없이 테니스 가방을 내려놓고 내용물을 꺼낸다. 그 안에서 나온 건 테니스 라켓이 아니라 사냥총이다. 사람들이 놀란 얼굴이면 동인, 장전하고는 수혁을 겨눈다.


영자

무슨 짓이에요?

동인

(총을 꺼내려는 철오를 겨냥하고) 총에서 손 떼! 이거 한 방이면 멧돼지도 잡아. 말로만 겁주는 거 아냐!


철오, 양손을 든다.  


억수

부장님, 총 내려놔요. 다 끝났는데 왜 그래요? 

동인

(수혁에게 총을 겨누고) 너냐? 네가 내 돈 훔쳤냐? 근데 봉구가…… 그 불쌍한 녀석이 무슨 죄가 있다고 죽인 거야? 

수혁

저 아니에요. 

동인

거짓말이면 머리 날아간다!

수혁

정말 아니에요. 못 믿겠으면 그냥 쏘세요.

억수

아니긴! 형사님이 네가 그랬다고 그러셨거든? 

동인

(총구를 억수한테 돌리며) 너! 

억수

(자세를 낮추며) 뭐 하는 거예요? 왜 날 겨눠요?

동인

걱정해 주는 척하면서 내 돈 노려 왔지? 내가 그거 모를 거 같아?

억수

오해예요. 난 순수하게 걱정한 것뿐이라고요!

동인

내 돈 훔치면 노름 실컷 할 수 있었잖아. 그래서 훔쳤냐?

억수

내가 그랬으면 저기 진철이 아들새끼예요! 

영자

부장님, 억수 저놈이 질이 좀 안 좋아도 그럴 정도는 아니에요!

동인

(영자에게 총을 겨누고) 아줌마는 남의 곗돈 들고 날랐잖아. 여기 도망쳐 온 거잖아. 요새 계속 여길 뜨고 싶다고 노랠 불러잖아. 그러자고 내 돈 훔쳤나?

영자

(벌벌 떨며) 난 부장님 돈 같은 건 몰라요. 살려 줘요!

철오

이봐! 범인이 밝혀졌는데 왜 이러는 거야? 

주섭

진정해. 왜 엉뚱한 사람들을 잡으려 들어?

동인

(주섭에게 총을 겨누며) 닥쳐! 너 같은 새낀 총알도 아까워! 버러지 같은 새끼!

주섭

뭐? 버러지? 말 다 했어?

동인

쓰레기 같은 새끼! 저 불쌍한 이슬이를 건드리고 있는 거, 모르고 있었는 줄 알아? 알고 있었지만 모르는 척할 수밖에 없었어! 웬 줄 알아? 여기서 쫓겨나면 갈 데가 없었기 때문이야!

억수

뭔 말이에요? 사장님이 이슬 씨를…… 건드렸다고요? 이런 개쌍호로새끼를 봤나!   

주섭

저 말을 믿어? 지금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거야!

억수

(이슬에게) 이슬 씨, 저 새끼 말이 사실이에요?

이슬

…….

동인

아무래도 상관없어. 진짜 상관없어! (점점 광기에 휩싸여) 내 돈! 그 돈 없으면…… 난…… 난…… 살 수가 없어. 스승님 아들이 찾아오면 내줘야 해. 내 돈을 찾아야 해. 찾아내지 못하면 다 죽여버릴 거야! (총을 사방으로 겨누며) 다 죽일 거야!


모두들 동인의 총구를 피하느라 난리법석이다.


철오

총 내려놔! 이쯤에서 그만두면 정상 참작해 주겠어. 

동인

(철오에게 총을 겨누고) 닥쳐! 그동안 저 사장 새끼한테 붙어먹은 거 누가 모를 줄 알아? 너도 쓰레기야! 사장 놈하고 똑같아!

이슬

아저씨, 봉구에겐 특유의 냄새가 있었잖아요. 아저씨 집에 잠깐만 들러도 그 냄새가 배어요. (억수에게) 안 그래요 최 대리님? 언젠가 부장님 집에 들렀다가 냄새 배었다고 말한 적 있었잖아요.

억수

그게 뭐 어쨌다고요?

이슬

사건이 있었던 날 새벽, 저 인간이 저희 집에 들렀어요. 저는 그 냄새를 분명하게 맡았어요.

주섭

뭔 소리야? 난 그런 적 없어!

이슬

나한테 오겠다고 보낸 메시지가 남아 있어.

동인

(주섭에게 총을 겨누고) 너냐? 너였냐?

주섭

아냐! 난 돈이 넘치도록 많은 사람이야. 강도 짓을 할 이유가 없어!


그때 철오의 핸드폰 벨이 울린다. 철오, 가만히 전화를 받다가 주섭을 노려본다. 주섭, 시선을 피한다.


철오

너 이 새끼! 

주섭

아냐! 난 아니라고! 

철오

(다가서며) 순순히 가자. 소란 피우지 말고.

억수

대체 뭐야? 그럼 범인이…… 사장 저 새끼?


순간 주섭, 철오의 총을 빼앗아 사람들을 번갈아 가며 겨눈다.


철오

야! 그거 이리 안 내놔?

주섭

시발 이판사판이야! 너 이 새끼! 나한테 왜 이래? 설마 그 회장 놈한테 사주받았냐? 나 감옥에 처넣고 입막음하라고 하든? 의리라고는 개밥에나 말아먹는 새끼!

철오

총 내려놓고 말해!

주섭

내가 그래도 직원들 월급 밀린 적은 없어. 근데 이 새끼들은 다 내 욕해. 나는 뭐 남는 게 있었는 줄 알아? 

철오

좋은 말할 때 총 내려놔! 

주섭

감옥 가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나아. 내가 시발 이렇게 추락할 것 같아? 더 올라갈 데가 있는데? 천만에! 꼭대기까지 올라가서 세상 모든 인간들을 내려다보며 살 거야. 내가 니들하고 같은 줄 알아? 인간이면 다 같은 인간인 줄 알아? 

철오

총 내려놔! 

주섭

(이슬에게 총을 겨누고) 영악한 년! 빼먹을 거 다 빼먹고 날 범인으로 몰아? 넌 죽어야 해!


수혁, 동인의 총을 빼앗아 주섭을 겨누며 대치한다.


수혁

그만둬. 다 끝났어.

주섭

놀고 있네. 쌍으로 보내줄까?


순간 탕, 하는 소리와 함께 암전.




14장



석 달 뒤. 공장 안. 이슬, 영자가 열심히 다림질을 하고 있다. 한쪽에서는 진철이 게임을 하고 있다. 배송 준비를 하던 억수가 그 모습을 발견하고 진철에게 다가가서  잔소리를 해댄다. 

조명이 전환되면 감옥 안. 수혁, 죄수복을 입은 채 세탁물을 매만지고 있다가 문득 창문 밖을 쳐다본다. 환한 봄 햇살이 자신을 비추면 수혁, 희미하게 웃는다. 

조명이 전환되면 런드리 하우스 사장실. 새로운 사장과 이슬이 의자에 마주 앉은 채 면담을 하고 있다.


사장

(서류를 살펴보며) 실적이 괜찮군.

이슬

…….

사장

긴장할 것 없어. 굳이 널 내보낼 생각은 없으니까. 난 이전 사장과 다른 방식으로 공장을 운영해 볼 생각이야. 공장 규모도 키우고 사람들을 많이 뽑아서 경쟁을 시킬 거야. 실적이 좋으면 살아남고 나쁘면 도태되는 거야. 무슨 뜻인지 알아?

이슬

…….

사장

근데 넌 예외로 해주지. 왜냐하면 넌 내 마음에 쏙 들거든. 예전 사장한테 그랬듯 나한테도 그렇게만 해주면 돼.

이슬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사장

잘 알 텐데.

이슬

(벌떡 일어나며) 이전 사장과는 다르다면서요!

사장

왜? 그런 방식이 싫나? 서로 상생할 방법 같은데. 싫으면 여길 떠날 건가? 어차피 갈 데가 없을 텐데?

이슬

그만두겠어요!

사장

그럴 수 있을까?

이슬

누구도 나한테 함부로 말할 수 없어요. 그럴 권리, 없어요! 이제부터라도 내 의지대로 살 거예요! 


조명이 전환되면 다시 공장 안. 진철, 훌쩍이며 울고 있다. 영자는 다림질을 하고 있고 억수는 박스 포장을 하고 있다. 


억수

양진철! 계속 질질 짜고 있을 거야?

영자

놔둬. 슬플 땐 울어야 마음이 풀리지. 


이슬, 소지품이 든 박스를 들고 등장한다.


영자

(이슬에게 다가서며) 진짜 가는 거야? 부장님도 그만두고 이슬이 너까지 그만둔다니 정말 일할 맛 안 나겠어.

이슬

그동안 감사했어요.

영자

왜 그러는데? 사장도 바뀌었잖아.

이슬

달라지는 게 없을 것 같아요.

영자

정말 아쉬워.

이슬

저도요. 정이 많이 들었는데…….

억수

잘 가요 이슬 씨.

이슬

우리 진철이, 잘 부탁해요. 

진철

(울먹이며) 누나, 가지 마.

이슬

울지 마.

억수

어디로 가는 건데요?

이슬

어디로든요. 

영자

기술이 있는데 뭔 걱정이야. (잠시 뜸을 들이고) 근데 수혁 씨는 안 만나? 정당방위로 풀려날 모양이던데. 

억수

아이고 누님! 그 신입하곤 엮여 봐야 좋을 게 하나 없어요. 

진철

그 아저씨가 누나를 구해 줬다고요. 나쁜 사장님이 총 들고 설칠 때 최 대리님은 뭐 했는데요?

억수

뭐?

영자

(웃음을 터뜨리며) 할 말 없겠네. 근데 사장 그놈 배에 난 구멍은 잘 메꿨대? 하여간 운도 좋아.

억수

원래 악인이 오래 산다잖아요.  

이슬

(박스 안의 종이가방을 내밀며) 이거 좀 버려 주실래요?

영자

뭔데? (열어 보고) 어? 그동안 챙겼던 옷들이잖아? 다 A급 같은데…… 가져가서 입지.

이슬

제 옷을 입으려고요. 제가 입어야 할 옷요. 등급으로 나뉘는 옷이 아닌 저한테 맞는 옷요. 


조명이 전환되면 철컹, 하는 소리와 함께 수혁이 철문 밖으로 나온다. 바깥세상이 눈부신 듯 쳐다보고 있으면 이슬, 모습을 드러낸다. 수혁, 이슬을 발견하고 다가선다.  


이슬

고생 많았죠?

수혁

견딜 만했어요. 근데 여긴 어떻게…….

이슬

혼자면 쓸쓸하실 거 같아서요.

수혁

…….

이슬

그때 했던 말, 아직 유효해요? 

수혁

어떤…….

이슬

같이 떠나자고 했었잖아요. 

수혁

…….

이슬

그래 줄 수 있어요?

수혁

……그러지 못할 거 같아요.

이슬

왜요?

수혁

그럴 자격도 능력도 없어요.

이슬

그럼 안 되는데요. 저 혼자 온 게 아니거든요. 


진철, 모습을 드러낸다.


진철

저도 왔다고요.

수혁

일 안 하고 여긴 왜 왔어?

진철

거긴 그만뒀어요. 사내가 좀 더 큰물에서 놀아야죠. 우리, 같이 떠나요. 네? 

수혁

…….

이슬

그럴 수 있죠?

수혁

……어디로요?

이슬

어디로든요.

진철

제가 좋은 방법 알아요.

이슬

뭔데?

진철

예전에 어떤 할아버지가 해줬던 말인데요, 어딜 가야 할지 모를 땐 터미널에 가서 가장 멀리까지 가는 버스표를 끊으랬어요.

이슬

왜?

진철

멀리 가는 동안 그곳에 가는 게 맞는지 틀린지 알 수 있다고 하셨거든요. 

이슬

틀리면?

진철

도착하는 터미널에서 또 버스를 타는 거죠. 계속 타고 또 타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면 결국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있댔어요.

이슬

말 되네. 우리도 그래 볼까?

진철

어때요 아저씨? 좋은 방법 같지 않아요?

수혁

…….

이슬

아직 결정 못 했어요?

진철

가요 아저씨. 네?

수혁

…….

진철

우리 같이 가요. 

이슬

같이 가요.

수혁

……그래요, 같이 가요.


세 사람이 웃는다.

암전.




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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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마선에 노출되어 슈퍼 히어로가 된 세 명의 박사는 왜 지구를 지키려 하지 않는가 정범철 등장인물 스컹크맨 (최만수) 51세 / 남 / 여러 가지 냄새를 뿜어 특별한 능력을 발휘하는 히어로. 블루씨스루 (이강재) 48세 / 남 / 투시 능력을 발휘하는 히어로. 그린타키온 (진순남) 43세 / 남 / 빛보다 빠른 속력을 발휘하는 히어로. 레드플라이 (고혜정) 43세 / 여 / 두 팔에서 날개가 돋아나 하늘을 날 수 있는 히어로. 기자 1, 2, 3, 4, 5, 6 취객 스파이더맨 사회자 통역사 레드플라이의 엄마 때 현재 곳 대한민국, 서울 1장 – 기자회견 무대에 세 개의 의자가 놓여 있다. 무대 뒤에는 “감마선 히어로 긴급 기자회견”이라고 쓰인 플래카드가 붙어 있다. 관객들이 등장하는 동안 사회자가 먼저 등장해 마이크 체크를 하고 기자회견 준비를 한다. 기자 역의 멀티남도 등장해 사회자와 인사도 나누고 카메라를 점검하며 객석에 앉는다. 사회자의 인사로 기자회견이 시작된다. 사회자 안녕하십니까. 바쁘신 와중에도 이렇게 참석해주신 국내외 언론매체 관계자와 기자 여러분 감사합니다. 사전에 연락드린 바와 같이 이번 기자회견은 감마선 히어로 네 명 중, 세 명의 히어로가 긴급히 요청하여 마련되었습니다. 세 명의 히어로는 스컹크맨, 블루씨스루, 레드플라이입니다. 이번 기자회견은 빠른 진행을 위해 한국어로 진행된다는 점 먼저 양해를 구하겠습니다. 통역이 필요한 외신 기자분들은 입구에서 나눠드린 동시통역기를 착용해주시기 바랍니다. 혹시 못 받으신 기자분 계신가요? Is there anyone who didn’t get the translator? 아, 저 뒤에… (무대 옆을 보는데 그냥 진행하라는 신호를 받은 듯) 네? 아, 그렇군요. 지금 준비된 통역기가 부족하다고 하네요. 예상보다 많은 외신 기자 분들이 참석해주신 것 같습니다. 그만큼 세계의 눈과 귀가 국내 히어로들에게 쏠려있다는 방증이겠죠? 그럼 지금부터 기자회견을 시작하겠습니다. 세 분의 히어로 여러분, 무대로 나와주십시오. 스컹크맨, 블루씨스루, 레드플라이가 정장을 입고 무대로 등장해 자리에 앉는다. 찰칵찰칵 사진 찍는 소리와 함께 카메라 플래시 터진다. 스컹크맨은 서류 파일을 들고 있다. 사회자 작년에 전 세계적으로 큰 화제를 모아 아마 모르는 분이 없으리라 생각하지만, 국민 여러분과 전 세계 시청자 여러분들을 위해 각자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스컹크맨 지금 생방송으로 나가고 있는 거죠? 사회자 네, 그렇습니다. 스컹크맨 안녕하십니까. 최만수라고 합니다. 블루씨스루 안녕하세요. 이강재입니다. 레드플라이 안녕하세요. 고혜정입니다. 기자1 히어로 네임으로 말씀 좀 해주세요! 난처한 표정의 세 박사. 사회자 네, 각자 히어로 네임을 좀…. 스컹크맨 스컹크맨입니다. 블루씨스루

  • 관리자
  • 2023-11-15
환승

환승 윤미희 나오는 사람들 상희 민재 윤아 때 늦은 밤 곳 지하철 안과 밖 무대 무대는 달리는 지하철 안과 지하철을 기다리는 밖으로 나뉜다. 별다른 무대 장치 없이 지하철을 타고 내리는 것만 표현해도 좋다. 1. 주안역 열차를 기다리고 있는 상희, 민재, 윤아 세 사람 모두 검정색 계열의 옷을 입고 있다. 각자 스마트폰을 보며 혼잣말을 하는 건지 들으라는 건지 모르겠는 말투로 민재 왜 난 검색해도 안 나오지? 윤아 버스 타야 하는데 괜히 지하철 타는 건가? 상희, 윤아에게 자신의 스마트폰을 보여주며 상희 제가 검색할 때는, 신도림에서 갈아타서 홍대입구까지 이렇게 가는 걸로 나오거든요. 민재, 기웃거리고 윤아, 상희의 스마트폰을 바라본다. 민재 어? 그건 또 다르게 나오네. 윤아 도대체 뭐가 맞는 거야… 상희 성신여대입구까지도 간다고 나오니까 연희동까지는 충분히 갈 수 있을 거예요. 윤아, 다시 자신의 스마트폰을 바라본다. 민재, 끼어들며 민재 나도 좀 봐줘요. 민재, 자신의 스마트폰을 내민다. 상희, 자신의 스마트폰으로 검색하며 상희 신도림에서 2호선으로 갈아타셔서 잠실까지 쭉 갔다가, 잠실에서 8호선으로 갈아타셔서 천호, 거기에서 다시 5호선으로 갈아타야 된대요. 5호선에서는 한 정거장만 더 가시면 되고요. 민재 좀 애매한데… 윤아 이미 돌아가긴 늦었어요. 민재 역 주변에 있을 곳이 있나. 상희 전부 술집뿐인 것 같던데요. 민재 주안역은 처음이거든요. 상희 저도요. 윤아 저도 1호선은 많이 안 타봤어요. 민재 아까 올 땐 1호선 급행열차 탔는데, 윤아 1호선에도 급행열차가 있구나, 민재 우리 잘 도착할 수 있겠죠? 상희 그럼요. 부천행 급행열차가 오고 있다. 윤아 어? 급행열차네요. 민재 이거 타는 거 맞죠? 상희 이거 타거나 좀 기다렸다가 일반 열차 타거나 도착하는 시간은 똑같아요. 민재 왜요? 상희 …부천행이잖아요. 민재 네? 상희 신도림까지는 가셔야죠. 민재 아, 잠시 고민하는 세 사람. 민재 좀 덥지 않아요? 윤아 그냥 탈까요? 어차피 기다리는 거 조금이라도 가면서 기다리는 게… 상희 그래요, 그럼. 문 열리고 탑승하는 세 사람, 빈자리가 많아 좀 떨어져 앉는다. 각자 다시 스마트폰을 보며 윤아 왜 다시 검색하면 자꾸 다르게 나오지? 상희, 눈치만 볼 뿐 대꾸하지 않는다. 윤아 아까 거기서 버스 타고 가서 공항철도를 탔어야 했나 봐요. 잘 모르는 길이라 혼자 가기도 좀 그렇고 해서 따라오긴 했는데… 민재, 열차 내부에 붙어 있는 노선도를 바라보며 민재

  • 관리자
  • 2023-11-10
붉은 여인의 초상

붉은 여인의 초상 황수아 대호 한국신문 문화부 기자 현 국내 유명 화가 미현 현의 애인 여인 정체불명의 여인 선예 현의 아내 상인 미술 학원 원장, 화가 현서 강력계 경찰 상우 패션잡지 에디터 변호사 이혼 전문 변호사 부장 신문사 문화부 부장 1장 미술관 무대 정면에 커다란 그림 하나가 걸려 있다. 색이 선명하고 사실적인 풍경화다. 시골 마을을 병풍처럼 감싸 안은 뒷산과 그 앞을 흐르는 개울 한 가족이 피크닉을 즐기고 애완견이 그들과 함께한다. 동화책 삽화로 나올 것 같은 따스한 그림이다. 현, 두 손을 뒤로 맞잡고 자신의 그림을 바라보고 있다. 대호, 현의 뒤로 조심스레 다가간다. 대호 안녕하세요. 작가님. 현 (뒤돌아 대호를 본다.) 대호 한국신문 문화부 기자 이대호입니다. 현 네. 안녕하세요. 대호 전시회 잘 봤습니다. 현 잘 보셨다니 다행입니다. 대호 다음 일정이 없으십니까? 현 아내가 오기로 해서요. 대호 아. 그러시군요. 사이 현 (대호를 다시 한번 쳐다보며) 기억나는군요. 아까 기자 간담회 때 저의 근황에 대해 질문하셨던 분이시군요. 대호 네. 그렇습니다. 계속 질문을 드리면 실례일 것 같아 멈췄습니다. 현 제법 곤란했던 기억이 나네요. (웃는다.) 대호 더 질문드리면 사적인 영역까지 확대될 것 같아서요. 현 그림의 연장선상인데 뭐 어떱니까. 궁금한 건 얼마든지 물어보셔도 됩니다. 대호 그러시다면… 한 가지만 더 질문드려도 될까요. 특집 기사를 준비하고 있어서요. 현 한국신문에서 제 특집 기사를요? 대호 네. 현 고마운 일이죠. 질문하시면 성의껏 대답해 드리겠습니다. 대호 최근 풍경화를 주로 그리시는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현 근 일 년간 국내 여행을 많이 다녔습니다. 제가 모르던 자연의 풍경에 매료되었죠. 아직 개발되지 않은 곳들을 그림에 담고 싶었습니다. 대한민국의 국토 개발은 너무 빠른 속도죠. 언제 개발되어 사라질지 모르는 풍경들이니까요. 대호 그런데 원래는 인물화를 중심으로 작업하지 않으셨습니까? 거의, 아니 백 프로 인물화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현 발표되지 않은 풍경화를 많이 가지고 있었습니다. 미대 시절엔 풍경화 동아리도 했었죠. 언젠가 한 일 년 정도는 풍경화 위주로 작업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작년 안식년을 가지며 여행을 한 게 새로운 발상의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대호 아. 현 또 물으실 게 있나요? 대호 실례가 되는 질문인지 모르겠지만… 제 개인적인 의견으론. 인물화에 흐르던 그 특유의 분위기가 사라졌습니다. 현 특유의 분위기라뇨? 대호 선생님이 항상 그리던 여인은 눈빛과 입매가 아주 미세하게 비대칭이라 독특했죠. 초기작부터 중기, 그리고 최근까지도 그 도발적인 느낌은 점점 강해졌습니다만 풍경화

  • 관리자
  • 2023-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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