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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비, 걸, 우먼

  • 작성일 2023-04-21
  • 조회수 956

베이비, 걸, 우먼 (Baby Girl Woman)

도은


등장인물

윤미수: 1950년대 초반생. 전국 곳곳을 돌아다니며 여성학 강연을 진행하는 유명 강사이자 작 가이다.
심 안: 1970년대 초반생. 소규모 타일 시공 업체를 운영 중이며, 가장이다.
심미지: 1990년대 초반생. 대학원 휴학생이자 페미니즘 웹진을 창간 준비 중이다.
강현재: 1990년대 초반생. 필명 ‘깡’으로 활동하는 퀴어 칼럼니스트이다.
박수오: 1980년대 초반생. 구술 작업 책을 준비하고 있는 작가이자, 미지의 애인이다.
양기호: 1970년대 중반생. 도배 전문 업체를 운영 중이며, 안의 동거인이다.


1992년부터 2022년까지.


무대

미수의 스튜디오 겸 작업실, 안과 기호의 단층 주택, 미지와 수오의 투 룸 빌라, 현재의 방, 백화점 문화센터, 강연장, 시상식장이 등장한다. 무대 위에서 사실적으로 구현되어야만 하는 공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강연장과 시상식장에서만 무대의 단차가 존재하길 바란다.


0. 1992년


백화점 내 문화센터 강연장.
셔츠에 정장 바지 차림의 미수가 강연장 안에 들어선다.
40세의 미수다.


단상 앞에 서서 마이크의 위치를 조정하는 미수.

미수 너무 높네요.

미수의 말에 강연장 내에 간간이 웃음이 터진다.
미수, 이내 마이크를 뽑아 들고는, 전선을 질질 끌며 단상을 지나, 강단에서 내려온다.

미수 심지어 턱도 높아. 그쵸?

청중들은 미수의 물음에 별다른 대답이 없다.

미수 노원 어머님들이 점잖으신가 봐요. 원래 지금쯤 되면, 선생님! 홍보사진보다 실물이 더 나아요, 이런 말씀들 해주시거든요.

그제야 간간이 터지는 웃음을 확인하듯, 긴장이 풀리는 미수의 얼굴.

미수 농담이고요. 여태 강연하느라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그런 얘기 들어본 적 한 번도 없 습니다. 좀 들어보고 싶어요. 제가 강연 제안을 받았을 때 젊은 어머님들, 흔히 말하 는 요즘 신세대 어머님들을 상대로 강연을 하라고 해서 흔쾌히 알겠다고 했습니다. 그 냥 친구 만나는 것처럼 만나서 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을 줄 알았거든요. 근데······.

미수, 잠시 말을 고르다가.

미수 전혀 아니네요. 전혀 아녜요. 지금 절 바라보시는 여러분들을 보고 있으니까 제가 올해 로 마흔인데. 전 신세대가 아니라는 걸 확실히 깨닫고 있어요, 지금. 약간 후회도 되는 데 그래도, 강연비 받았으니까 열심히 해야겠죠? 여러분들도, 아이 유치원 간 사이에, 남편 출근한 틈에, 집안일도 많고 가뜩이나 바쁜데도 불구하고 강연 들으러 와 주셨잖 아요.

미수, 마이크를 든 채로 걸음을 걷다가 멈춰 선다.
꼬인 마이크 줄을 푼다.

미수 이게 은근히, 아니 너무 귀찮아요. 줄 푸는 시간 다 합치면, 강연 하나쯤은 나올걸요.

마이크 줄을 푼 미수,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간다.
청중과 미수의 거리는 처음보다 훨씬 가까워졌다.

미수 어머님들 잘 아시겠지만, 오늘 강연의 주제는 ‘아내는 어떻게 빠삐용이 되는가’예요. 빠 삐용 하면 여러분들은 뭐가 제일 먼저 떠오르세요?

청중, 조용하다.
미수, 예상했다는 듯이 웃는다.

미수 아직 여러분들과 저의 거리가 줄어들지 않았나 봐요. 처음엔 다들 이래요. 끝날 때쯤엔 서로, 본인들 이야기하시겠다고 싸우시기도 해요. 안 믿기죠? 진짜 그래요. 어쨌든, 빠 삐용 하면 탈옥이죠. 그 독방에서, 방법도 없어 보이는데도 몇 번이고 탈옥을 시도합니 다. 근데 이게 아내랑 무슨 상관일까요?

청중, 여전히 조용하다.

미수 그래요. 아직은 대답하지 마세요. 아직 눈치 볼 타이밍 맞아요. 잘하고 계세요. 제가 대 답할게요. 여러분은 인식하지 못하지만, 사실 여러분이 빠삐용과 같은 처지라는 이야기 를 해 볼까 해요.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아내란 존재는 결국 가정에 속박되어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에요. 속박이란, 다른 말로 하면 자유롭지 않은 상태인 거죠, 그래 서 여러분을 빠삐용과 같은 처지라고 말한 겁니다. 독방에 묶여 있던 그 죄수와요. 그 런데 이런 얘기하면 다른 분들도 딱 여러분들과 같은 표정을 지으세요. 그게 무슨 표 정이냐면요······.

미수, 잠시 뜸 들이다가.

미수 아침에 애들 학교 보내고, 남편 직장 보내고 난 뒤에 정신없이 아침 먹은 거 치우고, 빨래 돌려놓고 청소기 한 번 싸악, 돌리고. 빨래 널고, 화분에 물 주고 나면······ 나도 자유시간을 가지는데? 같은 얼굴이세요. 그 자유시간에 어떤 날은 에어로빅도 하고, 우 리 애 같은 반 엄마들도 만나고, 수영도 하고, 가끔 이렇게 백화점 나와서 쇼핑도 하 고. 그쵸? 애들 하교하기 전, 남편 퇴근하기 전까진 나도 자유다. 이렇게 생각들을 하 시거든요.

미수, 청중 사이를 걸어간다.

미수 하지만 반대로, 조금만 더 생각해 보면요, 정말 자유로운가? 주부의 자유는 남편의 허 락 하에, 자식의 부재 아래에서만 가능한 게 아닌가?라는 질문으로 바꿔 볼 수도 있 어요. 그러니까 이게 무엇이냐면요. 우리가 태어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절대 벗어날 수 없는 가부장제 아래에서, 주부가 자유롭기란 빠삐용의 탈옥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라 는 거예요. 사실 불가능에 가깝죠. 가부장제란 속박은 여성들의 삶을 평생 쫓아다니니 까요. 그래서 오늘은, 여성들 중에 특히 주부님들. 우리 어머님들의 노동이 어떻게 폄 하되어 왔고,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는 노동이 되었는지에 대해 이야기해 보려고 해요. 미수, 청중을 바라본다. 청중, 미수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려는 듯 조용하다.


1. 2021년


미지와 수오의 집 안, 거실.
신문이 어지러이 놓여 있고, 어제 마신 빈 맥주 캔이 굴러다닌다.
수오는 어질러진 거실 한가운데에서 박스를 뜯고 있다.
미지, 하품을 하며 방에서 나온다.

수오 잘 잤어?
미지 응. 수오 씨는.
수오 잘 잤지. 어제 이 많이 갈더라.
미지 그랬어? 피곤했나 봐.

미지, 수오의 곁에 무릎을 굽히고 앉는다.

미지 뭐 시켰어?
수오 짜잔.

수오, 박스에서 녹음기를 자랑스레 꺼내 보인다.

미지 뭐야?
수오 녹음기.
미지 녹음기? 왜?
수오 저번에 말했······.
미지 (말 끊으며) 아 맞다, 맞다. 새 책 준비하는 거 때문에?
수오 응. 구술 프로젝트니까 하나 필요할 거 같아서.
미지 핸드폰도 있잖아.
수오 얼마 안 해.
미지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
수오 (녹음기를 하나 더 꺼내며) 사실 자기 것도 샀어.
미지 내 거까지?
수오 자기도 취재할 때 하나 있으면 좋잖아.
미지 난 괜찮은데······.

미지, 수오가 건넨 녹음기를 받아서는 빤히 바라보다가.

미지 아침 먹을래?
수오 컵누들 먹었어.
미지 혼자? 같이 먹지.
수오 자기 너무 곤히 자길래.
미지 혼자 먹기 싫은데.
수오 그럼 또 먹을게.
미지 그래도 돼?
수오 응. 원래 아침 두 번 먹는 거 좋아해.

미지, 짧게 웃으며 수오의 볼에 입을 맞춘다.
자리에서 일어난 미지는 아무렇게나 펼쳐져 있는 신문을 접는다.

미지 오늘 어디 나가?
수오 글쎄······ (녹음기 만지며) 자긴?
미지 이따 현재 만나기로 했어.
수오 준비는 잘 돼?
미지 응, 잘 돼. 왠진 모르겠는데 느낌이 좋다?
수오 느낌이 와? 페미니스트들의 우상이 될 것 같아?

미지, 신문지를 접다 말고.

미지 나 여자들 우상 되려고 하는 거 아니거든?
수오 알아. 농담이야.
미지 하나도 재미없어.
수오 ······미안해.

미지, 다시 신문지를 접으며 정리한다.
이번엔 맥주 캔을 정리한다.

미지 먹고 정리하고 자.
수오 알았어.
미지 아침에 일어났는데 어질러져 있으면 기분 별로지 않아?
수오 (고개 갸웃거리며) 그런가······ 깨끗한 거 같은데, 이 정도면······.
미지 아니거든. 수오 씨 엄청 어지르는 타입이거든.
수오 고칠게.
미지 (작게 한숨 쉬며) 그래, 고치도록 노력해 봐.
수오 응, 노력할게.

수오, 미지를 향해 웃어 보인다.
미지, 수오를 따라 입꼬리를 올린다.
수오가 다시 녹음기에 열중하며 테스트를 하는 동안 미지는 거실 청소를 한다.


2. 2021년


안과 기호의 집 안, 거실.
안은 점퍼에 팔을 막 끼워 넣으며 정신없이 거실을 돌아다닌다.
앞치마 차림의 기호는 토스트를 들고 안의 뒤를 쫓아다닌다.

아오, 정신없어. 쫌!
기호 앉아서 먹으라니까?
늦었어! (훠이훠이 손짓하며) 비켜 봐, 비켜 봐.
기호 뭘 늦어. 현장 가까운 거 다 아는데. 당신 좋아하는 땅콩버터에 블루베리 잼 바르고 버터에 구운 거야. 앉아서 먹고 가.
머리끈 어디 갔지?
기호 (토스트 들이밀며) 손목에.
(토스트 우물거리며) 차 키! 차 키, 차 키, 차 키!

안, 허둥지둥거리며 거실 이곳저곳을 뒤진다.

기호 맨날 놔두는 데 없어? 서랍장 위에.
없어. 안 보여. 당신 어제 내 차 몰았어?
기호 아니. 아, 두유 있다. 두유도 좀 마셔라.

기호, 서둘러 주방으로 향한다.

아 진짜, 시간 없다니까 저러네.

안, 서랍장 위를 살피다가, 바닥에 찰싹 붙어 소파 아래를 본다.
여전히 차 키는 보이지 않는다.

(슬슬 성질이 난다) 어디 간 거야, 바빠 죽겠는데······!

안,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점퍼 주머니를 뒤진다.
점퍼 주머니 안에서, 분홍색 곰돌이 인형 열쇠고리가 달린 차 키가 나온다.

(머쓱하게) 여깄네.
기호 이거, 이거 좀 마셔!

기호, 팩 두유에 빨대까지 꽂아 안에게 건넨다.

나 오늘 늦어.
기호 알아. 현장 마무리까지 보고 와야 하지?
응. 당신은? 제기동 현장으로 가?
기호 이따가. 점심쯤에.
카톡할게.

안, 집 안을 막 빠져나가려는데.

기호 잠깐만!
뽀뽀면 가만 안 둔다.
기호 아니, 이거.

기호, 서류 한 장을 안에게 건넨다.
안, 이게 무엇이냐는 듯, 올려다보면.

기호 당신이 열어 봐.
뭔데 그래.
기호 봐 봐, 얼른.
무섭게 왜 이런대······.

안, 기호를 의심하면서도 약간은 두려운 얼굴로 서류를 펼친다.
서류를 위에서부터 천천히 읽어 내려가는 안의 얼굴이 점점 굳어진다.

갑자기 뭐야······?
기호 갑자기 아니야. 당신한테 계속 말했었잖아.
언제 준비했어?
기호 일주일 전에?
근데 왜 지금 줘.
기호 당신한테 주기 딱 어울리는 타이밍을 재다가······ 아무리 재도 안 오더라고. 그래서 정 신없을 때 주려고.
다 적었네.
기호 당신 칸은 당신이 채우면 돼.
······.
기호 누가 보면 혼인 신고서가 아니라 독촉장 받은 줄 알겠다.
무슨······.
기호 안 가? 늦었다며.
어, 어. 가야지.
기호 또 바쁘다고 끼니 거르지 말고.
어, 알겠어.

안, 서류를 든 채 집을 빠져나간다.
기호, 여러 생각이 드는 얼굴로 현관문을 바라본다.


3. 2021년


스타벅스 안.
콘센트가 가까이 있는, 높은 테이블 앞에 앉아 있는 현재와 미지.
두 사람 모두 멍하니 노트북을 바라보고 있다.

미지 이건 《HER》의 위기야.
현재 벌써? 아직 창간하지도 않았는데?
미지 창간도 안 했는데 이러니까 문제지.
현재 《HER》한텐 칼럼니스트 깡이 있잖아.
미지 오, 저 자신감.

현재, 자신이 작성 중이던 원고 파일이 열려 있는 노트북 화면을 보여 준다.

현재 읽어 봐. 이번에 자신 있어.
미지 깡. 난 네 그 자신감이 참 부럽다.
현재 자신감은 글에서 나오는 거거든.

미지, 현재의 글을 찬찬히 읽어 내려간다.

미지 짜증 나.
현재 왜?
미지 너무 재밌어서 짜증 나. 네가 이렇게 쓰면 내 기획은 어떡하라고.
현재 (노트북 가져가며) 독자들이 좋아할까?
미지 (뭘 그런 걸 묻냐는 듯) 당연한 거 아냐?
현재 레즈비언 얘기를 누가 읽냐고. 레즈비언들 빼고.
미지 야. 그럼 게이 이야기는? 게이 이야기 잘 팔리잖아.
현재 우리도 삽화를 좀 넣어 볼까?
미지 삽화?
현재 왜. 웹 소설처럼. 완전 매혹적인 여자 얼굴을 따악.
미지 ······.
현재 ······말도 안 되지?
미지 우리 돈 없어.

현재와 미지, 한숨을 쉰다.
미지, 노트북을 덮고는 현재에게 바짝 붙어.

미지 대신 이렇게 홍보하는 건 어때?
현재 얼굴 절대 안 깐다. 너 내가 중학생 때까지 모태신앙이었던 거 알지? 내가 레즈비언인 것도 모자라서 이런 섹스칼럼······.
미지 (말 끊으며) 아니, 네 얼굴 말고. 한국의 캐리 브래드 쇼로 홍보하는 거야.
현재 ······캐리? 〈섹스 앤 더 시티〉 주인공?
미지 어. 너랑 공통점도 많잖아.
현재 섹스칼럼 쓰는 거 말고 또 뭐가 있는데.
미지 걘 뉴욕, 넌 서울. 서울도 세계 중심 도시 중 하나다?
현재 또?
미지 걘 구두 중독. 넌 토닉워터 중독.
현재 너무 차이 나잖아. 걔 막 지미추 구두 신고 그러지. 뉴욕 한복판에 살면서. 난 보증금 천만 원짜리 원룸 살거든. 거의 옥탑에 가까운.
미지 또 있어!
현재 또 뭔데.
미지 둘 다 골초.

미지, 만족스럽게 웃으며 현재의 등을 때린다.
현재, 하나도 즐겁지 않은 얼굴이다.

현재 죽는다, 진짜.
미지 왜, 나 진지해. 한국의 캐리 브래드쇼! 괄호 열고 레즈비언 버전 괄호 닫고! 어 때? 괜찮지?
현재 아니, 하나도 안 괜찮아.
미지 아, 왜.
현재 구리니까. 그리고 나 캐리 같은 여자애들 딱 질색이야.
미지 캐리가 어때서? 난 넷 중에서 제일 좋던데.
현재 그렇게 세상이 자기중심으로 돌아가는 애들. 진짜 별로야. 모든 고민이 결국 자기로 돌아 가게 만드는 애들!
미지 ······왜 이렇게 흥분해. 그건 걔가 주인공이니까 그런 거고.
현재 아, 어쨌든 싫어. 진짜 싫어. 절대 안 돼.
미지 알았어. 안 하면 될 거 아냐.

짧은 사이.
현재, 미지의 눈치를 살핀다.

현재 네 기획 기사는 어쩌게. 좀 풀렸어?
미지 몰라. 꽉 막혔어. 인터뷰를 좀 따고 싶은데······.
현재 마땅한 사람이 없어?
미지 응, 그렇네. 유명한 분들은 신문이나 기존 잡지에서 이미 인터뷰를 했고. 나도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사람들 말고 조금 다른 페미니스트를 찾고 싶거든······.

미지, 테이블에 엎드린다. 볼살이 테이블에 꾹, 눌린다.
현재, 미지의 등을 살살 쓰다듬으며.

현재 미지야. 나 요새 자기 전에 유튜브를 엄청 많이 보거든.
미지 ······뭘 새삼스레. 나도 그래.
현재 거기서 너네 할머니 강의를 듣는다. 어제도 한 편 들었어.
미지 엉? 우리 할머니?
현재 요새 방송국들이 유튜브 채널에 옛날 방송 많이 올려 주잖아. 여성 인사 특집으로 묶 어서 아침 방송이나 특별 기획에서 강연하던 여성 강사들이 막 올라오는데. 너희 할머 니 강연 조회수 꽤 높아.
미지 (다소 심드렁하게) 그래······?
현재 가까운 데서 찾아보는 건 어때.

미지, 벌떡 일어나 똑바로 앉는다.

미지 안 돼.
현재 왜? 너 이따 한번 봐 봐. 거기 댓글들도 많이 달리고. 너희 할머니 강연 진짜 잘하셔.
미지 벌써부터 혈연 찬스 쓰고 싶지 않아.
현재 야, 네가 손녀로 인터뷰하는 거냐. 같은 페미니스트로서 하는 거지.
미지 그건 좋게 포장한 거고.
현재 너희 할머니가 인터뷰 거절할 수도 있잖아. 처음 들어보는 웹진이니까.
미지 ······설마.
현재 그리고 야, 너희 할머니가 예전에 하시던 강연 들어보면 우리가 대학교 1학년 때 듣 던 거나, 요새 교양강의로 듣는 내용이랑 별반 다를 거 없어. 빡치게도. 그니까 이런 상황을 너희 할머니는 어떻게 바라보는지 인터뷰해 보는 거지.
미지 ······.

미지, 여전히 고민하는 얼굴이다.

현재 너 90년대생 페미니스트 인터뷰 특집도 묶어 보고 싶다며. 이왕 이번 기획에서 두 개 를 같이 묶는 건 어때?
미지 할머니 인터뷰랑 같이?
현재 어. 2세대 페미니스트의 시각이랑 90년대생 영 페미니스트들의 시각이 어떻게 같고 다른지. 인터뷰하면 좀 나오지 않겠어?
미지 그런가······.
현재 괜찮지?

미지, 설득당한 얼굴이지만 대답하지 않는다.
현재, 미지의 옆구리를 찌른다.

현재 야, 괜찮잖아 솔직히. 어? 어?
미지 아, 알았어. 한번 해 볼게.
현재 진짜지? 그럼 기획도 다 정해진 거지, 우리?
미지 응, 우선 그렇게 가 보자.

현재, 환하게 웃는다.
미지, 현재를 따라 웃는다.


4. 2020년


기업의 성희롱교육 강연 자리.
셔츠에 편안한 진 차림의 미수가 강연장에 들어선다.
48세의 미수다.
미수는 활짝 웃으며 청중을 향해 인사를 한다.

미수 안녕하세요, 은성그룹 재무팀 여러분. 개인적으로 은성그룹에 들어와 이렇게 강연을 하게 되어 영광입니다.

미수가 박수를 유도하면 청중, 손뼉을 친다.
미수, 마이크를 받아 강단 위에 올라서려다가 말고.

미수 여러분께서 이렇게 환호해 주실 줄 알았으면 제가 좀 더 일찍 올 걸 그랬어요. 얼마 전, 은성그룹이 안 좋은 일로 신문에 이름이 실렸었죠? 아마 제가 여러분을 조금 더 일찍 뵀다면 적어도 그런 일은 안 생기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미수, 강단 위에 올라서는 대신에 강단 아래에서 말을 이어 나간다.

미수 그렇다고 해서 제가 하는 강연을 들으면 성희롱, 성추행이 마법같이 사라진다. 악마 같 은 검은 손이 갑자기 천사처럼 변한다, 이런 이야기가 절대 아니고요. 성희롱은 일어납 니다. 아마 앞으로도 성추행은 일어날 거고요.

처음과 달리 조용해진 강연장 안.

미수 성희롱을 하는 입, 성추행을 하는 손은 악마의 입이나 손이 아니라 우리가 매일같이 얼굴을 마주하고, 같이 밥 먹고, 때로는 야근도 하던 사람의 입과 손이고요. 그러한 입 과 손을 갑자기 마법처럼 걸러내서 사라지게 할 순 없잖아요? 아마 여러분은 지난주에 겪으셨던 일을 앞으로도 분명히 겪게 되실 거예요.

미수, 청중의 얼굴을 살핀다.

미수 지금 여러분 표정이 ‘그럼 저 여자 여긴 왜 온 거야?’ 같은 질문, 혹은 의심을 품고 계 신 것 같은데요. 저는 그러한 일이 벌어졌을 때 우리가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회사 내에서는 어떠한 시선으로 성추행, 성희롱 사건을 바라봐야 하며 처벌과 피해자 보호 는 어떻게 이뤄져야 하는지에 대해 이야기하려 합니다. 즉 간단하게 말하면, 성희롱 가 해자를 어떻게 걸러내는지나 피해자가 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이야 기가 아닙니다. 그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할뿐더러, 피해자에게 책임이 있다는 시선으로 부터 벗어나지 못한 사고방식이고요. 우리가 해야 하는 건 앞으로 우리가 어떻게 변해 야 하는지, 당장 내일이라도 내가 성추행/성희롱을 당하게 된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에 대해 이야기 나누려 합니다.

미수, 청중에게 한 발자국 다가선다.

청중, 조용하다.
미수, 예상했다는 듯이 웃어 보이며 청중에게 더 가까이 다가간다.

미수 여기, 제 바로 앞에 계신 여성분 한번 말씀해 보시겠어요? (듣고는) 네. 새로 수영을 시작하셨군요. 운동을 시작하는 거 정말 좋죠. 자, 그럼 질문을 조금 더 바꿔 볼게요. 2000년에 들어서서, 밀레니엄이 되었더니 내 삶이 이렇게까지 변해버렸다, 하는 분도 계실까요? 갑자기 막, 삶이 최첨단이 되고, 미래가 도약한 느낌을 온몸으로 전해 받고. 이러신 분······ 아무래도 안 계시겠죠?

미수, 강단에 올라선다.

미수 제가 이런 질문을 드린 이유는 간단합니다. 2000년이 되어도, 여전히 우리 사회의 몇 몇 문제는 변하지 않았다는 거예요. 그리고 이러한 문제는 2000년과 같은 밀레니엄이 다가오면 저절로 해결되는 게 아닙니다. 시간이 아니라 우리가 해결해야 하는 문제죠. 제가 며칠 전에 모 기업에서도 오늘과 같은 강연을 나갔었는데요. 거기서 한 부장님께 서 그러시더라고요. 술자리에서 여직원에게 ‘젖탱이’가 너무 크다고 말했다고 인사과에 불려 갔었다고요. 그러면서 그 부장님께서 굉장히 억울해하시는 거예요. ‘젖’을 ‘젖’이 라고 안 하면 뭐라고 하냐면서······ 전 거의 홍길동인 줄 알았습니다. 여러분들 들으시 면서 어이없으시죠? 2000년인데, 밀레니엄인데, 내가 지금 무슨 이야 기를 듣고 있나 싶으시죠. 그런데 이게 현실입니다. 그리고 아마 내색은 안 하셔도 지금 제가 들은 예 시가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계실 거예요. 그래서 오늘 저는 그러 한 생각에 조금이라도 흠집이 생기도록, 그 생각이 전부가 아닐 수 있도록 노력해 보 려고 해요.

미수, 강단에 올라서서 목소리를 가다듬는다.

미수 오늘 은성그룹에서 제게 강연을 요청하시면서 강연 주제를 ‘여성 사원의 성희롱/성추 행 대처 방안’으로 해주실 수 있냐고 물어보셨어요. 그래서 제가 이 수업은 여성 사원 만 들어서는 안 되고, 성별 상관없이 들어야 한다. 그리고 성희롱/성추행은 남성에게도 일어나니 여성 사원의 대처 방안이 아니라 은성그룹의 대처 방안이 옳다. 이렇게 정정 을 해드렸거든요. 그랬더니 그럼 강사님께서 강연 제목을 지어 달라고 하시더라구요. 아마 제가 조금 까탈스럽게 비쳤나 봐요. 그래서 오늘 제가 지은 강연의 제목은 ‘반 드시, 또, 일어납니다. 성추행, 성희롱’입니다. 다소 비관적인 제목이죠? 하지만 이런 생각만이 성추행과 성희롱을 방지하고 발생 후에도 올바른 대처가 이뤄질 수 있도록 하거든요.

미수의 강연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5. 2021년


미수의 작업실 겸 스튜디오 안.
미지, 스튜디오 곳곳을 구경한다.
스튜디오 안에는 그동안 미수가 썼던 칼럼, 책들이 진열되어 있다.
스튜디오 한편에는 대학 강단에서 강연 중인 미수의 젊은 시절 사진이 붙어 있다.
이때, 미수가 찻잔과 차를 쟁반에 담아 들어온다.

미수 갑자기 불러서 놀랐지.
미지 아니에요, 할머니. 저도 마침 할머니 보고 싶었어요.
미수 (장난스레) 부탁할 거 있구나?
미지 (뜨끔하며) 예? 아닌데요.
미수 딱 보니 그런 거 같은데.
미지 (차 호로록 마시며) 아니라니까 그러신다, 또. 할머니부터 말하세요.
미수 그래. 내가 먼저 말하마.

미수, 우러난 차를 한 모금 마신다.

미수 미지, 너는 잘 알겠지만 여기 스튜디오 말이야. 나한테 참 뜻깊은 공간이다.
미지 알아요, 강연도 많이 하셨잖아요.
미수 그럼, 여기서 책도 쓰고. 스터디 클럽도 꽤 많이 진행했었어. 시니어 페미니스트 모임, 기혼자 모임, 북클럽도 많이 하고······ 하여튼, 나한텐 참 고마운 공간이었는 데, 이제 여길 좀 정리하려고 해.
미지 스튜디오를요? 갑자기 왜요?

미지, 의아한 얼굴로 미수를 살핀다.

미수 더 이상 나한테 필요가 없을 거 같아서.
미지 왜 필요가 없어요. 강연도 하시면 되잖아요. 책 쓸 때도 그렇고.
미수 많이 고민하고 또 생각해 봤는데······.

짧은 사이.

미수 이제 강연도 그만하고, 글도 안 쓰려고 한다.
미지 네?
미수 말하자면, 절필 선언? 강연 중단 선언?이랄까.

미수, 작게 웃어 보이지만 미지는 따라 웃지 못한다.

미지 할머니, 갑자기 왜요?
미수 ······.
미지 혹시 어디 편찮으신 거예요?
미수 아니. 나야 너무 건강해서 탈이지.
미지 근데 갑자기 왜요.
미수 음······ 갑자기는 아니고, 오래전부터 생각했던 일인데. 결심하기까지 시간이 걸렸던 거지.
미지 안 돼요. 갑자기 이렇게 그만두시면 어떡해요.
미수 안 되니? 네 할머니 곧 일흔이야.
미지 너무 건강해서 탈이라면서요.
미수 더 했다간 노인 학대다, 미지야.
미지 ······.

다소 완강해 보이는 미수의 태도에 말을 잇지 못하는 미지.
미수는 계약서가 담긴 파일을 꺼낸다.

미지 (파일 받으며) 이게 뭔데요?
미수 여기 스튜디오 계약서.
미지 계약서를······ 왜요?
미수 미지 너한텐 미안하지만 안이한테 넘겨주고 싶어서.
미지 네?
미수 안이 일하는 사무실로 써도 좋고, 아님 팔아도 좋아.
미지 그걸 왜 엄마한테······.

미수, 미지의 얼굴을 빤히 바라본다. 미지의 얼굴을 통해 안을 바라보는 듯이.

미수 할머니가 네 엄마한테 잘못이 좀 있잖니.
미지 ······.
미수 내가 직접 주고 싶었는데 전화도 안 받고.
미지 엄마, 한 달 전에 핸드폰 바꿨어요. 현장에서 떨어트려서요.
미수 그랬구나. 그렇다고 찾아가면 싫어할 거 같아서.

미지, 한동안 자신의 손에 들린 계약서를 내려다본다.

미지 엄마, 아마 절대 안 받을걸요.
미수 알아, 아는데도 할머니가 미지한테 부탁하는 거야.
미지 할머니한테 화내실지도 몰라요. 저한테도요.
미수 ······나 너무 이기적이지? 손녀 앞세워서 이런 부탁이나 하고.
미지 (한숨 쉬며) 그래도 엄마한테 얘기는 꺼내 볼게요.
미수 그래, 고맙다. 그거면 돼.
미지 할머니.
미수 응?
미지 잊지 마세요. 제가 할머니 도와드린 거. 나중에 꼭 갚으세요.
미수 그래, 알았어. 안 잊고 꼭 갚을게.
미지 (자리에서 일어나며) 가 볼게요.
미수 응, 그래.

미지, 미수에게 꾸벅 인사하고 밖으로 나간다.
홀로 남은 미수, 다 식어버린 찻잔을 든 채 멍하니 허공을 바라본다.


6. 2021년


안과 기호의 집 안.
미지는 욕실에 있는 안이 나오기를 기다리며, 거실 소파에 앉아 있다.
보지 않으려고 하지만, 집 안을 두리번거리게 되는 미지.
집 안 곳곳에는 안과 기호가 함께 찍은 폴라로이드 사진, 안이 질색했던 기호가 선물한 인형들 몇 개, 세계 여러 나라의 맥주병이 있다.
두 사람의 취향이 온전히 묻어나는 공간이다.

왜 그러고 있어.
미지 어, 어?
마실 거 좀 줄까. 맥주?
미지 아니. 나 곧 갈 거야.
그래라, 그럼.

안, 캔 맥주를 꺼내와 앉는다.

똥 마려우면 화장실 가. 나 나왔잖아.
미지 아니거든?
근데 왜 꼭 똥 마려운 개처럼 그러고 있냐.
미지 아, 좀······ 똥 얘기 좀 안 하면 안 돼?
옛날엔 제일 좋아하던 얘기면서.
미지 내가, 내가 언제.
너 기억 안 나? 너 유치원 다닐 때 애들한테 매일 방구 얘기하고 똥 얘기해서 유치원 선생님이 나더러 미지가······.
미지 (말 끊으며) 아, 엄마 좀.

안, 말없이 맥주 캔을 딴다.

왜. 수오랑 무슨 일 있어?
미지 일이 있기는. 똑같아, 그냥.
그럼? 현재랑 하는 일이 잘 안 돼?
미지 아직 시작 단계라······.
(맥주 벌컥벌컥 마시고는) 그럼 뭔데!
미지 왜 짜증을 내?
내가 언제 짜증을 냈냐. 네가 이유도 없이 엄마 집에 올 애야? 할 말이든 부탁이든 뭐든 있으니까 왔지. 너 설마 돈 필요해?

망설이던 미지, 대답 대신에 가방에서 서류를 꺼낸다.

뭐야, 그게?
미지 나 낮에 할머니 만나고 왔어.
(퉁명스럽게) 알아. 네 할머니라면 너 껌뻑 좋아 죽는 거.
미지 왜 또 화를 내?
내가 언제.
미지 엄마는 무슨 할머니 소리만 꺼내도 화내잖아.
너네 할머니 만나서 또 강의 듣다 왔냐?
미지 아니거든.
너네 할머니 특기가 그거잖아. 사람 앉혀 놓고 계속 강의하는 거.
미지 (한숨 쉬며) 이거, 할머니가 엄마 전해 주래.

안, 미심쩍은 얼굴로 미지가 건넨 서류를 받는다.

(찬찬히 서류 읽어 내려가다가) 이게 뭐야?
미지 할머니. 스튜디오 정리할 거래.
근데?
미지 ······엄마가 스튜디오 가졌으면 좋겠다고 하셔.

안, 어이없다는 듯 웃는다.

너희 할머니가 나 갖다 주라든?
미지 내 할머니지만 엄마 엄마이기도 해.
(서류 다시 건네며) 야, 필요 없다고 해.
미지 할머니가 엄마 직접 만나서 주고 싶다고······.
(말 끊으며) 엄만 분명 필요 없다고 했다.
미지 무슨 말을 못 하게 해. 얘기 좀 들어보면 안 돼?
무슨 얘기.
미지 할머니도 할머니 입장이 있을 거 아냐.
······심미지.
미지 ······.
난 네가 네 할머니 좋아하는 거, 존경하는 거, 무슨 어려운 일 있을 때면 할머니한테 상담받는 거 다 상관없어. 그건 내가 아니라 너랑 할머니 사이니까.
미지 ······엄마랑 할머니 관계에 대해선 한마디도 하지 말란 거야? 난?
네가 모르는 시간들이 있다는 거야.

미지와 안 둘 중 누구도 쉬이 먼저 말을 꺼내지 못한다.

내 자부심이 뭔지 알아.
미지 ······.
나는 내 엄마와는 다르다는 거. 나는 절대로 날 키운 사람이 했던 잘못을 똑같이 반복하지 않았다는 거.
미지 ······알아. 엄마 노력한 거.
이건 네가 도로 가져가.

이때,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울린다.
방금 막 퇴근을 한 기호가 집 안으로 들어온다.

기호 어, 미지 왔구나.
미지 네. 안녕하세요.

미지, 고개를 숙여 어색하게 인사한다.
기호, 미지와 안 사이에 흐르는 어색한 기운을 감지한다.

기호 저녁은 먹었니? 당신, 저녁은?
아직. 이제 먹어야지.
기호 밥도 안 먹고 맥주부터 마셨어?
한 캔이야.
기호 미지야, 아저씨가 저녁 차려 줄게. 저녁 먹고 가.
미지 아, 아니에요. 저 이제 가려고 했어요.
기호 벌써? 밥도 안 먹고?
그래, 밥 먹고 가.
미지 아냐. 수오 씨 기다려.

미지, 어정쩡하게 자리에서 일어난다.

기호 그럼 내가 데려다줄게.
미지 네? 아뇨, 아뇨. 괜찮아요.
기호 집 멀잖아.
쟤가 애도 아니고.
미지 엄마 말이 맞아요. 전철 타면 금방이에요.
기호 그래도······.
미지 (손사래 치며) 저, 정말 정말 괜찮아요.

기호, 어색하게 웃어 보이는 미지를 빤히 바라본다.

기호 미지야.
미지 네?
기호 혹시······ 너희 엄마한테서 들었니?
미지 예?

안, 기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모르겠다는 얼굴로 올려다보며.

무슨 얘기?
기호 그······ 그거 있잖아.
뭐?
기호 당신이랑 나······.
미지 아저씨랑 엄마가 왜요?

기호, 입을 달싹이며 망설이다가.

기호 혼인신고서 말이야.
미지 혼인신고서?
(이제야 생각난 듯) 아, 맞다.
미지 엄마 결혼해?
기호 아, 맞다?

기호와 미지, 두 사람 동시에 믿을 수 없단 눈빛으로 안을 바라본다.

얘는 결혼은 무슨······ 미안. 완전히 잊고 있었네.
기호 잊고······ 있었어?
오늘 정신이 없었어.
기호 오늘 얘기하자며.
하자. 하면 되지.

안과 기호를 지나쳐 가는 적막에 미지, 당황한다.
미지, 슬금슬금 자리를 빠져나간다.

미지 저는 가 볼게요.
기호 어, 어. 정말 저녁 안 먹고 가니?
미지 네, 괜찮아요. 다음에 또 올게요.
기호 ······그래.
미지 엄마, 나 갈게. 전화할게.
어, 가.
미지 응. 아저씨 안녕히 계세요.
기호 어, 미지. 다음에 또 보자.

미지, 꾸벅 인사하고는 안과 기호의 집을 빠져나간다. 집 안에 남은 두 사람.
둘 중 누구도 쉬이 입을 떼지 못한다. 어색한 적막만이 그들을 감싼다.


7. 2021년


미지와 수오의 집.
미지와 수오가 나란히 침대 위에 누워 있다.
스탠드 조명만 켜져 있어, 서로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는다.
미지, 가만히 천장을 바라보고 있다.

미지 수오 씨.
수오 응.
미지 아버지 생각해?
수오 ······가끔 하지.
미지 아직도 아버지가 미워?
수오 글쎄······.

수오, 생각하는 듯 잠시 말이 없다.

수오 어렸을 때, 아버지가 떠나기 전에 이런 말을 했어. ‘너도 크면 알게 될 거다.’
미지 크면 알게 될 거라고?
수오 응. 자라면서 평생 그 말을 원망했거든. 너무 비겁하니까.
미지 ······.
수오 근데 이젠 다르게 두려워져. 내가 언젠가 그 말을 이해해버릴까 봐.

미지, 수오 쪽으로 몸을 돌려 그를 바라본다.

미지 지금은? 지금은 아버지가 약간 이해 가?
수오 ······모르겠어. 근데 그건 갑자기 왜?
미지 그냥. 오늘 엄마랑 할머니 만나고 왔는데······.
수오 응.
미지 난 엄마가 할머니랑 멀어진 이유가, 할머니가 너무 바빠서인 줄만 알았어. 모든 걸 가질 수는 없으니까. 할머니는 유명 강사가 되고, 다른 많은 여성들의 삶에 영향을 끼치는 동안 엄마랑은 친해질 수 없었던 거라고. 그렇게만 생각했거든.
수오 ······응.
미지 근데 꼭 그게 전부는 아닌 거 같아.
수오 ······미지야, 잠깐만.
미지 응?

수오, 침대에서 일어나 무언가를 찾으러 간다.
홀로 남은 미지의 한숨 소리가 울린다.
수오, 녹음기를 들고 다시 침대 위로 올라온다.

미지 ······뭐 해, 지금?
수오 혹시 녹음해도 될까.
미지 우리 얘기 나누는 거?
수오 어. 사실 지금부터 연습하고 싶거든. 누군가 자기 마음을 털어놓을 때, 말하는 순간을 녹음하는 일.
미지 ······수오 씨.
수오 응?

미지, 아무런 말 없이 수오의 베개를 수오를 향해 던진다.
수오의 얼굴에 명중하는 베개.

미지 제정신이니.

미지, 수오에게 등을 지고 몸을 돌려 눕는다.
짧은 사이.
수오, 조심스레 미지의 옆으로 붙는다.

수오 자기야. 화났어? 나는 그냥······.
미지 됐어. 불 꺼.
수오 ······.
미지 나 잘 거니까 말 시키지 마.

사이.

수오 미지야.
미지 ······.
수오 잘못했어. 진심이야. 내가 너무 무신경했어.

수오, 미지의 어깨를 살살 쓰다듬는다.
미지, 움찔거리지만 수오를 향해 뒤돌지 않는다.

수오 불 끄기 전에 한마디만 해도 돼?
미지 ······뭔데.
수오 아까 말한다는 걸 까먹었는데······ 집주인한테 문자 왔어.
미지 왜?
수오 다음 달에 계약 만료잖아. 보증금 올려 달래.

미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수오를 바라본다.

미지 그걸 왜 지금 말해?
수오 까먹었다고 말했잖아.
미지 까먹을 게 따로 있지. 얼마 올려 달라는데?
수오 삼천만 원.

짧은 사이.
미지, 다시 눕다 말고 이번엔 자신의 베개를 수오를 향해 던진다.

미지 짜증 나. 진짜.
수오 ······화 풀어.
미지 삼천만 원을 어디서 구해.
수오 방법이 있겠지.
미지 무슨 방법?
수오 내가 앞으로 찾아볼게.

미지, 깊은 한숨을 내쉰다.

수오 열심히 찾을게.

미지, 수오를 바라본다.
수오 역시 미지를 바라보다가 이내 자신의 품에 안는다.
미지, 힘없이 수오의 품 안에 안겨 있다. 미지, 잠에 들려고 하지만 쉬이 잠이 오지 않는다.
잠든 수오의 팔을 풀어내 자리에 앉는 미지. 아침에 받았던 녹음기를 꺼내 온다.

미지 (녹음기 켜며) 내가 기억하는 할머니의 첫 모습은 정수리였다.

미수와 안, 성큼성큼 미지의 앞으로 걸어 들어온다.
미수, 안을 향해 고개를 숙인다.

고개 들어요.
미수 엄마가 잘못했어.
고개 들라니까.
미수 다 내 잘못이야.
(어이없다는 듯) 엄마, 내가 미지 임신했을 때. 엄마가 뭐라 했는지 잊었어?
미수 ······.
그럴 줄 알았다.
미수 엄마가 잘못 생각했어. 너한테 큰 잘못 했어. 알아.
아니, 엄만 몰라. 엄마한테서 그런 말 들어본 적 없잖아, 엄만.

미지 그다음으로 기억하는 모습은 할머니 손에 들린 빨간 풍선.

여길 엄마가 왜 와?
미수 미지가 알려 줬어.
어린애가 알려 준다고 쫓아와?
미수 미지가 그러는데, 자기 계주로 뽑혔다고. 1학년 중에서 제일 잘 달리니까, 할머니 꼭 보러 오라 그래서······.
제발 좀. 엄만 늘 이런 식이지. 자기 좋을 대로 행동하고, 거기엔 늘 이유가 있었다, 난 그럴 만했다. 이게 엄마 방식이잖아. 엄마가 왜 내 딸을 보러 와? 가. 미지는 나만 있 으면 돼.
미수 가끔 보러 오는 것도 안 되겠니.
안 바빠? 그렇게 바쁘신 양반이. 갑자기 왜 이래. 사람이 안 하던 짓 하면 어떻게 되는 지 몰라?
미수 ······.

미지 내 기억 속에서 할머니와 엄마가 함께 있던 마지막 기억은 내가 입원했을 때.

미수 미지가 오지 말랬는데 내가 오고 싶어서 그랬어.
······.
미수 애 말로는 크게 안 다쳤다는데 그래도 직접 보고 싶어서. 미지 얼굴만 보고 갈게.
엄마.
미수 ······.
엄마한테 난 뭐였어?
미수 ······내 딸이지.
아니. 그거 말고. 엄마, 왜 미지한테 하듯이 나한텐 안 그랬어. 이 나이 먹고 따지는 거나까지 우스워지는 일 같아서 참고 또 참았는데. 나 키우면서는 엄마 안 이랬잖아. 늘 없는 사람이었지. 항상 바쁘고. 말 걸 수도 없고. 졸업식도 입학식도 늘 혼자였어, 난. 미지 낳고 나서도 내 발로 미혼모센터 찾아 들어갔었어.
미수 (사이) 그땐 엄마가······.
(말 끊으며) 엄마. 우리 이제 진짜 얼굴 보지 말자. 서로 아는 척도 말고, 그냥 알아서 잘 살자. 부탁할게.

미지 할머니와 엄마는 서로를 신경 쓰지만 신경 쓰지 않는 척 사는 걸까.

미지, 깊은 밤까지 잠에 들지 못한다.


8. 2021년


미수의 스튜디오 안.
미수와 미지가 마주 앉아 있다.
미지는 녹음기를 꺼내 녹음 버튼을 누른다.

미지 인터뷰 녹음을 좀 할게요.
미수 그래. 이제부터 나도 존댓말 써야 하니?
미지 할머니 편한 대로 하면 돼요.
미수 알겠습니다. 잘 부탁드려요.

미지, 미수를 바라보며 웃는다.
가방 안에서 준비해 온 질문지를 꺼내기 전에, 스튜디오 계약서를 발견한 미지.

미지 (녹음기 누르며) 아, 잠깐만요.

미수, 의아하게 바라보면.

미지 할머니. 이거 먼저 돌려드릴게요.
미수 ······.
미지 받으세요.

미수, 스튜디오 계약서를 받아든다.

미수 내가 너한테 괜한 짐을 덜었나 보다.
미지 아니에요.
미수 ······안이 화 많이 내든?
미지 할머니 잘 알면서 그러신다. 엄만 원래 화 많아요.
미수 (작게 웃으며) 그게 우리 집 여자들 내력이야.
미지 ······어쩐지. 그래서 내가······.
미수 그래도 집에선 미지 네가 제일 얌전하잖아.
미지 밖에선 안 그래요. 수오 씨가 들으면 비웃을걸요.
미수 그래?
미지 (사뭇 비장하게) 전 지든 이기든 싸움은 피하지 않거든요.
미수 (웃으며) 그것참 다행이다, 얘.

미지, 다시 녹음기를 누른다.
준비해 온 질문지를 들고, 미수를 바라본다.
미지와 미수의 눈이 마주친다. 두 사람은 눈빛을 주고받는다.

미지 반갑습니다. 웹진 《HER》의 창간호에 윤미수 선생님을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미수 아니에요. 오히려 이렇게 인터뷰를 청해 주셔서 제가 더 영광입니다.
미지 저희 《HER》가 첫 시작이다 보니까요. 첫 질문은 선생님께서 처음으로 자신을 페미 니스트라고 자각하던 순간에 대한 질문을 드리고 싶어요. 선생님께선 대한민국에서 유 명한 페미니스트 중 한 분이신데, 본인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고 생각하게 된 계기나, 순간이 따로 있을까요?
미수 유명 페미니스트라니······ 어쩐지 민망한 기분이 드네요. 제가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 고 명명하게 된 건 스무 살이 넘어서 읽게 된 베티 프리단의 『여성의 신비』가 가 장 큰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겠어요. 그전까진 마음속에서 그저 이상하다고 생각했던 것들, 혹 내게 문제가 있는 건가라는 고민이 저만의 고민이 아니었음을 그 책을 읽으며 확신하게 되었으니까요. 이후에 필리스 체슬러나 글로리아 스타이넘의 글을 열심히 읽 었어요. 근데 이건 페미니즘의 언어를 알게 된 이후에, 나 자신을 명명하게 된 일이고 요. 사실 내가 페미니스트로 싹을 피웠던 순간은 따로 있어요.
미지 싹이라니, 어떤 싹수였을까요?
미수 (웃으며) 맞아요. 흔히 말하는 싹수가 보였던 때가, 집을 나서려는데 현관에 놓여 있던 축구화를 봤을 때였어요.
미지 축구화요?
미수 제가 막내 남동생이 하나 있거든요. 우리 집이 딸딸딸 집이었는데, 늦둥이로 남동생을 봤어요. 걔랑 내가 띠동갑도 넘게 차이가 나요. 근데 우리 막내가 축구를 했었어요. 공 부는 영 싫어하니까 집에서 축구를 시켰던 거죠. 근데 아침에 일 나가려다가 보면 늘 축구화가 반질반질하게 닦여 있는 거예요.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 흙이 묻어 있을 법도 한데 늘 깨끗했어요.
미지 공을 잘 못 찼던 거 아닐까요?
미수 (웃으며) 어머, 내가 그 생각은 못 했네. 우리 막내 걔가 축구에도 영 소질이 없었어요. 하여튼 그래서 어느 날 보니까 우리 어머니가 매일 밤마다 그 축구화를 빨아서 널어 놓은 거예요. 공도 몇 번 못 차서 깨끗한 축구화를 매일 빨고 또 말리고. 그때 깨달았 죠. 애써 내가 무시하고 있던 것들이 실제로 존재했었다는 걸.
미지 아마 남성 형제가 계신 독자분이라면 많이들 공감하실 것 같은데요. 사실 이번 인터뷰 가 기획 기사로 나갈 예정이거든요. 90년대생 페미니스트분들과 선생님의 인터뷰를 함 께 실을 예정이에요.
미수 그거 정말 영광이네요. 기사가 어떻게 나올지 궁금한데요.
미지 저도 궁금하답니다. 혹시 지금 《HER》를 읽고 계신 대다수의 독자님들 중에도 90년 대생 분들이 많이 계실 텐데. 이제 막 본인을 페미니스트라고 자각한, 혹은 젊은 페미 니스트분들에게 전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실까요?

미수, 미지의 질문에 무언가 생각하는 얼굴이다.

미수 음······.

미수, 쉬이 입을 떼지 못한다.
긴 사이.

미지의 질문은 미수를 2018년 한 강연장으로 옮겨 놓는다.

미수 미안해요. 많이 기다렸죠?

미지, 미수의 앞에 선다. 어딘가 결심한 듯한 얼굴이다.

미지 오늘 선생님 강연 좋았어요. 우는 사람도 있던데요.
미수 고마워요. 우리 이러지 말고 어디 들어가서 차라도······.
미지 (말 끊으며) 선생님. 선생님한텐 제가 피해자로만 보이세요?
미수 갑자기 그게 무슨······.
미지 선생님 강연에 등장했던 사례. 제 얘기잖아요. 데이트 폭력당하는 여자 얘기. 그거 저 맞잖아요.
미수 학생. 우선 내 얘기부터 들어봐요. 학생이 겪은 일이 다른 여성들에게 분명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해서 그랬던 거예요. 학생에 대한 개인정보는 절대로 들어가지 않았고, 대학 강의에서는 사례로 사용 안 했어요. 아무도 학생 얘기인 줄 모를 거예요.
미지 전 알잖아요. 저한테 동의 구한 적 없잖아요.
미수 미안해요, 학생이 이렇게 싫어할 줄은······.
미지 (말 끊으며) 선생님은 선생님이 모든 여성들에게 도움을 주고 있다고 생각하시죠. 근데요, 그거 착각이에요.

미지는 말을 끝내자마자 밖으로 나가버린다.
홀로 남은 미수, 미지가 나간 곳을 바라본다.

긴 사이.

깊은 생각에 빠진 듯한 미수의 얼굴.
미지가 황급히 스튜디오 안으로 들어선다.
그제야 미수는 방금 잠에서 깬 사람처럼, 미지를 올려다본다.

미지 할머니, 죄송해요. 내일 인터뷰해 주시는 분께 급하게 전화가 와가지고······.
미수 으응, 아냐. 괜찮아.
미지 그럼 오늘 인터뷰는 이렇게 정리할까요?
미수 그래, 난 좋아. 또 취재 나가니?
미지 (가방 챙기며) 아뇨. 다른 편집자 친구랑 만나기로 했어요.
미수 바쁘구나.
미지 생각보다 일이 많더라고요.
미수 쉽지 않지?
미지 쉽지 않아도 해야죠.
미수 심미지, 멋진데.
미지 또 연락드릴게요. 오늘 감사해요.
미수 내가 뭘 한 게 있다고······.
미지 전화드릴게요.
미수 그래, 조심히 가.

미지, 서둘러 스튜디오를 빠져나간다.
미수, 미지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다시 깊은 생각에 빠진다.


9. 2021년


현재의 집.
정신없이 노트북을 두드리다가 멈추는 현재.
담배를 찾아 입에 물고는, 불을 붙이려다 말고 다시 노트북을 두드린다.
그리고 다시 멈추는 현재.
현재는 담배에 불을 붙이고는, 노트북 화면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쉰다.
이때, 울리는 현관 벨 소리.

현재 누구세요?
미지 심미지입니다.
현재 아, 뭐야. 그냥 비번 치고 들어오지.

미지, 양손에 무겁게 무언가를 든 채로 집 안에 들어선다.
현재, 자연스럽게 미지의 손에 들린 것을 받아든다.

현재 뭐야. 갑자기?
미지 우리 《HER》의 기대주님께서 잘하고 계신지 감시차 나왔지.
현재 (비꼬며) 참 고맙네?

현재, 다시 노트북 앞에 풀썩 주저앉는다.

미지 (따라 앉으며) 좀 잘돼가?
현재 진도가 안 나가네.
미지 현재야.
현재 응?
미지 진도 나가게 해줄까?

현재, ‘그걸 네가 어떻게······’와 같은 미심쩍은 얼굴로 미지를 바라본다.
미지, 들고 온 쇼핑백 안에서 보드카를 꺼낸다.

현재 (타이르듯) 야.
미지 왜애.
현재 글 쓰는데 술 마시면 어떡하라고.

말과 달리, 현재는 얼른 일어나 잔 두 개를 꺼내 온다.

미지 토닉워터 있지?
현재 (뭘 그런 걸 묻냐는 투로) 당연한 거 아님?

현재와 미지, 보드카와 토닉워터를 섞는다.

미지 《HER》의 무궁한 발전과 강현재의 마감을 위하여!
현재 위하여!

두 사람, 잔을 부딪치고는 원 샷 한다.

미지 으, 써.
현재 미지야. 큰일이다. 너무 맛있어.
미지 거봐. 내가 도와준댔잖아.
현재 심미지 천재다, 정말.

두 사람, 다시 잔을 기울인다.

현재 너는 인터뷰 어땠는데.
미지 그냥 뭐······ 한 번 더하긴 해야 할 것 같아.
현재 왜?
미지 생각보다 많은 얘기도 못 나눠 가지고······.
현재 한 번 더 하면 되지. 할머니한테 부탁드려!
미지 ······응, 그래서 다음 일정 잡아 놨어.

두 사람, 또 잔을 기울인다.

현재 수오 씨는?
미지 수오 씨도 뭐······.

미지, 갑자기 원 샷을 한다.

현재 (술 따라 주며) 뭐야. 왜 그래? 수오 씨랑 무슨 일 있어?
미지 아니. 수오 씨가 잘못한 건 아닌데. 요새 자꾸 수오 씨한테 화를 내게 되네.
현재 왜 화가 나는데.

두 사람, 동시에 원 샷을 한다.

현재 말해 봐. 화가 나는 이유가 있을 거 아냐.
미지 집주인이 보증금 올려 달래.
현재 얼마나?
미지 삼천만 원.
현재 뭐? 삼천?
미지 ······어이없지.
현재 갑자기 삼천을 어디서 구하냐.
미지 나가란 소리지 뭐.
현재 올라도 좀, 상승 곡선을 타고 완만히 올라야지. 갑자기 그렇게 오르면 사는 사람은 어쩌 라고. 화나네. 생각할수록?
미지 짐 빼는 사람은 나거든? 몰라.

두 사람, 다시 건배를 한다.

미지 근데 또 수오 씨는 자기만 믿으란다.
현재 믿을 구석이 있어야 믿지. 하여간 시스젠더 헤테로 남성들 허세는 알아줘야 해.
미지 야. 수오 씨가 허세 있는 타입은 아냐. 그냥······ 본인 말을 책임을 못 질 뿐이지.
현재 그니까. 왜 말을 막 뱉냐고. 주워 담지도 못하는데.
미지 막 뱉진 않아. 엄청 조심스레 말해.
현재 말투가 조심스러우면 뭐 하니.
미지 수오 씨 말하는 것도 느려.
현재 그게 뭔 상관이야.
미지 그냥······ 그냥 그렇다고.

미지와 현재, 점점 취기가 올라온다.

미지 그러는 넌. 네 연애는 잘돼가냐.
현재 몰라. 다영이랑 헤어질 수도 있을 거 같아.
미지 왜? 다영 씨 좋아 죽겠다며.
현재 좋지, 좋은데······. 자꾸 챙겨 주려고 해.
미지 챙겨 주면 좋지, 뭘 그래.
현재 난 그거 싫어. 우리 집 비번 알려 달라는 것도 싫고.
미지 내가 알려 줄게. 다영 씨 전화번호 줘 봐. 너네 집 비번이 뭐라고.
현재 야이 씨. 하여튼, 자꾸 옛날얘기는 왜 물어보는지 몰라.
미지 전 애인들?
현재 차라리 그게 낫지. 내가 어떤 아이였을지 궁금하대.
미지 ······.
현재 학창 시절은 어땠고. 그땐 무슨 음악을 듣고 어떤 가수를 제일 좋아했는지. 나 부모님 이랑 사이 안 좋잖아? 어렸을 때도 안 좋았는지. 자꾸 그런 걸 물어봐.
미지 ······.
현재 또 한 번은 어떤 줄 아냐. 자기랑 내가 십 대 때 만났으면 좋았을 거 같대.
미지 ······.
현재 난 단 한 번도 그런 생각해 본 적도 없고, 그러고 싶지도 않은데.
미지 다영 씨 좋은 사람 같은데?
현재 좋지. 좋아. 걔 좋은 애야. 근데 난 아니라고.
미지 너도 좋은 사람이잖아.
현재 아니, 그런 문제가 아니라······.

현재, 한숨을 쉬고는 술을 원 샷 한다.

현재 나한텐 그런 게 버겁다고, 좀.
미지 마음을 좀 붙여 봐.
현재 마음이 냉장고 자석이냐. 내 맘대로 떼었다 붙였다 할 수 있게. 그럴 수 있음 진작했 지.
미지 왜 또 비꼬냐. 그냥, 그 사람 공간을 좀 남겨 두라고. 네 마음에.
현재 내 마음속 한구석에? 방을 마련해 줄까?

현재, 토하는 시늉을 한다.
미지, 현재의 등을 퍽 때린다.

미지 나 지금 진지하거든?
현재 너 수오 씨 닮아 간다.
미지 ······아, 아니거든.
현재 맞거든요. 내 연애는 내가 알아서 할게.
미지 난 걱정되니까 그렇지.

두 사람, 이제는 완전히 취한 상태다.

현재 날 왜 걱정해. 네 걱정이나 해라.
미지 삼천만 원?
현재 그것도 그렇고······.
미지 뭐야? 왜 말끝을 흐려.
현재 내가 언제.
미지 방금. 그렇고라니. 또 뭐가 있는데, 내가?
현재 아, 됐어. 마셔. 마셔.
미지 아니. 뭔데.
현재 별거 아니라니까 그러네.
미지 별거 같으니까 이러지.

현재, 미지의 잔에 술을 따라 주지만 미지는 마시지 않는다.

미지 말해 봐. 화 안 낼게.
현재 (한숨 쉬며) 난 너도 나처럼 네 연애를 재고해 봐야 한다고 생각해.
미지 왜?
현재 알면서 뭘 묻냐.
미지 아니. 모르겠는데.
현재 이래서 내가 말 안 한다고 한 거야.

미지, 단숨에 자신의 앞에 놓인 술을 들이켠다.

미지 수오 씨가 나보다 열두 살이나 더 많으니까?
현재 ······.
미지 하긴 페미니스트면서 어떻게 열두 살이나 많은 남자랑 동거하면서 살겠어. 그치?
현재 난 그런 말 한 적 없어.
미지 생활비도 반반씩 내면서!
현재 ······네가 먼저 말하니까 하는 건데, 그거 난 아직도 진짜 웃기다고 생각해. 수오 씨가 너보다 12년이나 더 살아 놓고. 집에도 훨씬 오래 있으면서, 반반이 말이 되냐?
미지 우리 둘 다 프리랜서라서 그래.
현재 양심이 없어 보인다고, 내 눈엔.
미지 넌 왜 사랑이랑 나이를 결부시켜?
현재 불리하면 사랑 타령 나오는 거 너도 알지.
미지 뭐? 사랑 타령? 야, 수오 씨 얘기하면서 사랑 얘기 나오는 건 당연한 거 아냐?
현재 어쨌든 나한텐 그게 좋아 보이진 않는다고.
미지 너한텐 수오 씨가 험버트로 보이지?
현재 그러는 넌. 뭐 롤리타냐? 야, 그럴 리가 있냐. 험버트는 제레미 아이언스가 연기한 거 몰라. 수오 씨를 보고 떠오르겠냐고.
미지 그런 뜻이 아니잖아. 또 말 돌리지 말고.
현재 얘가 아무리 사랑에 미쳐도······ 제레미 아이언스를 어디다 갖다 붙여······.
미지 내 말은······.

짧은 사이.

미지 네가 늘 그런 식으로 날 판단한다고.
현재 ······내가 언제.
미지 너한테 난 늘 부족한 페미니스트잖아. 네 눈에 난 열두 살이나 많은 남자 뒷바라지하 는 모자란 여자애로밖에 안 보이지?
현재 심미지. 너 너무 갔어.
미지 차라리 나도 여자 좋아하고 싶어
현재 ······뭐?
미지 그래야 나도 헤테로들 막 판단하고, 평가하면서 몇 점짜리 페미니스트인지 점수 매길 수 있을 텐데 말이야. 그치?
현재 너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
미지 맞잖아. 너 자주 그러잖아.
현재 레즈비언인 내가, 너네를 막 판단하고 평가한다고? 야, 난 사람들이 있는 줄도 모르는데? 관심도 없는데? 내가 뭐라고 정상인들을 판단하겠어, 안 그래?
미지 넌 좋겠다. 완벽한 페미니스트라서. 남자 때문에 고통받을 필요가 없잖아.
현재 누가 너더러 남자 때문에 고통받으라고 부추겼냐?

미지, 현재의 말에 울컥한다.

미지 남자가 좋은데 어떡하라고!
현재 그럼 그냥 좋아해! 계속 고통받으면서!
미지 이봐, 이봐! 나도 내가 싫어. 근데 페미니스트인데도 남자가 너무 좋으면 어떡해! 내가 선택한 것도 아닌데.
현재 너, 네가 선택하지도 않은 정체성에 대해서 내 앞에서 불평하는 거 아니지?
미지 나도 내가 헤테로인 게 싫다고! 근데 그런 걸 어떡하라고!
현재 그럼 너도 때려쳐! 여자 좋아해 봐! 여자랑 막 자고 다니고! 헤테로 때려쳐. 내일부터 레즈비언 해, 그냥! 넌 이게 쉬워 보이냐? 이게 주정거리가 된다고 생각해?
미지 주정 아니거든.
현재 나한텐 주정으로밖에 안 보여.

미지, 현재를 빤히 바라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난다.
가방을 챙겨 나갈 채비를 하는 미지.
현재도 그런 미지를 바라볼 뿐, 말리지 않는다.

미지 주정 그만 부리고 갈게.
현재 야, 나도 화나거든?
미지 알아. 그러니까 간다고.
현재 넌 내가 널 판단한다고 생각하겠지만, 솔직히 난 네가 징징거리는 걸로밖에 안 보여. 진짜 미안한데.
미지 하나도 안 미안하면서 뭘 미안하대.
현재 비꼬지 마.
미지 ······간다.

미지, 현재의 집을 빠져나간다. 현재, 남은 술잔을 기울인다.


10. 2021년


안과 기호의 현장. 안은 기호의 도배 일을 돕는 중이다.
낡은 벽지를 뜯어내는 일을 하는 안과 기호의 뒷모습.

당신이 오랫동안 이 일을 한 이유를 알 거 같아.
기호 왜?
(벽지를 뜯어내며) 이렇게 낡은 벽지를 뜯어내고 있으면. 왠지 모르겠는데 마음이 편안해 진다.
기호 새 벽지를 바를 때도 그래.
종이 갈라지는 소리 때문에 그런가.
기호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벽지에도 시간이 쌓여 있거든.
시간?
기호 이 집에서 살았던 사람들의 시간. 아이들이 자라는 키를 표시해 둔 거나, 낙서나, 음식 이 튄 자국 같은 것들. 어떨 땐 그 시간들을 전부 지우고, 빈 시간을 채워 넣는 것 같 아. 아직 오지 않은 새 시간들.
(기호 바라보며) 당신 좀 멋지다.
기호 그래?
응.
기호 그걸 이제 알았단 말이야?
좀만 더 겸손하면 좋을 텐데.
기호 남자는….

기호, 말을 하려다 말고 멈칫한다.
안, 어디 계속해 보라는 얼굴로 기호를 바라보면.

기호 아니, 인간은······ 자신감이야.

안, 대꾸 대신 다시 벽지를 뜯어내기 시작한다.
오래되고 낡은 벽지가 찢어지는 소리가 울린다.

근데 당신 있잖아.
기호 응?
왜 그렇게까지 혼인신고가 하고 싶어?
기호 (벽지 뜯어내며) 당신은 왜 그렇게까지 혼인신고가 싫은데?
말했잖아.
기호 솔직히 납득이 잘 안 가.
자기야.

안, 찢어진 벽지를 바닥에 내려 두고 기호를 바라본다.

당신은 인간은 자신감이라고 했지만, 나한테 인간은 신념이야. 인간은 무조건 자신만의 신념이 있어야 해. 나한텐 이게 내 신념이고.
기호 우리가 같이 산 지 벌써 5년째야. 난 당신 신념에 아무런 영향도 못 끼쳤어?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 당신 때문이 아니라 나 때문이야. 평생 법적으로 결혼하지 않 겠다는 거. 그 다짐 덕분에 미지한테 여러 명의 아빠가 없는 거야. 내가 얼마나 거지 같은 남자들을 만났는지 알아. 또 그 인간들이 얼마나 나한테 결혼하자고 보챘었는데.

기호, 뜯던 벽지를 바닥에 버린다.

기호 당신한텐 나도 그 인간들이랑 다름없나 보네.
그게 아니라······ 법적으로 그 인간들과 나랑 미지가 아무런 연관이 없어서 다행인 순 간들이 많았다고. 진심으로 감사했어. 절대로 결혼하지 않겠다는 내 신념한테. 내가 약 해질 때마다, 남들이 여자 혼자 대한민국에서 애를 키우는 사실에 대해 부끄러워하라 고 할 때마다 그 신념 덕분에 버틸 수 있었어.
기호 ······.
내 신념을 존중해 주면 안 돼?

짧은 사이.
기호는 다시 묵묵히 벽지를 뜯어낸다.

기호 불안해서 그런가 봐.
왜 불안한데?
기호 당장 내일이라도 우리가 남남이 될 수 있다는 게. 당신이 나랑 함께 산 세월을 증명해 주는 게 아무것도 없고.
남들한테 증명받을 필요 없잖아.
기호 우리도 변해. 지금처럼만 살면 좋겠지만, 나이를 먹고 누군가 아프기 시작하면 변할 거라고. 그럼 그때 서로의 보호자가 되고 싶어. 당신에겐 미지가 있지만, 나도 당신 보호자 역할을 하고 싶다고.
······.
기호 ······.

기호와 안은 한동안 말이 없다.
무언가 말을 하려던 안은 이내 입을 떼지 못한다.
기호와 안, 말없이 벽지를 뜯어낸다.


11. 2021년


미수의 스튜디오 안.
미수와 미지가 마주 앉아 있다.
인터뷰를 진행 중인 미지의 얼굴이 다소 피곤해 보인다.

미지 마지막 질문에 앞서, 추가로 질문을 드려 보자면 혹시 페미니스트로서 살아가면서 후 회하셨던 적이 있나요?
미수 페미니스트로 살기로 마음먹은 것에 대해 후회한 적은 없어요. 그건 어떤 필수적인 일, 제가 거부할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요. 다만······.

짧은 사이.

미수 제가 밖에서 여성들에게 들려주는 이야기, 여성들에게 영감이 되길 바라고 하던 이야 기와 제 삶의 괴리가 심한 적은 분명히 있었죠. 아직도 존재하고요.
미지 어떤 괴리였을까요?
미수 아무래도 가정과 일 사이에서의 방황이 가장 크지요. 워킹맘들에게 죄책감을 가질 필 요 없다고 말하면서도 저 역시 죄책감에 시달렸으니까요. 아이에게 충분히 설명하거나 대화하지 못했던 것 같아요. 돌이켜 보면 그 시절, 아이를 방치했을지도 몰라요. 저 나 름대로는 아이와 단둘이 살아가기 위해 발버둥 쳤던 시간이었는데도 말이죠. 그 점이 가장 후회스러워요. 다른 여성들에게 이야기하던 것처럼 아이에게도 충분히 이야기했 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후회가 남아요.
미지 여성에게 있어서 가정과 일은 풀리지 않는 숙제 같아요.
미수 시스템이 뒷받침해 주면 참 좋을 텐데 말이죠. 여성의 숙제로 남겨 둘 게 아니라.
미지 그런 날이 올까요?
미수 와야죠, 당연히.

미지, 미수의 말에 씁쓸하게 웃는다.

미지 마지막으로, 얼마 전 절필 선언을 하셨어요. 강연도 더 이상 하지 않겠다고 하셨고요. 혹시 이렇게 결심하게 된 계기가 따로 있을까요?
미수 우선 제가 많이 늙었어요.
미지 아직 정정하신데요.
미수 겉으로만 그래 보여요. 내년이면 일흔인데, 불러 주는 곳이면 가리지 않고 전국 곳곳을 돌아다니다 보니 관절이 예전 같지 않고요. 그리고 어쩌면, 더 이상 제 목소리가 필요 치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미지 그러한 생각을 하시게 된 이유가 있을까요?
미수 얼마 전, 인터뷰를 하다 보니 생각이 났는데요. 제가 18년도에 한 학생에게 항의를 받 은 적이 있어요. 그때 제가 강연에서 예시로 들었던······.

미수, 말을 이어 가려는데, 이때 안이 다급하게 스튜디오 안으로 들어선다.

미지 어, 엄마?
미수 안아.

안, 숨을 고르고는 미수 앞에 다가선다.

엄만 끝까지 내 말을 안 듣지.
미수 우선 좀 앉아. 앉아서 얘기하자.
길게 얘기할 필요도 없어. 나 현장 돌아가야 해.
미수 너 힘들어 보여.
엄마가 날 힘들게 하잖아, 지금!
미지 엄마, 왜 그래······.

안, 주머니에서 통장을 꺼내 미수를 향해 집어 던진다.

왜 멋대로 돈을 부쳐?
미수 ······.
그럼 내가 고마워할 줄 알았어? 이제라도 도와줘서 고맙다고?
미수 그런 뜻이 아니라······.
(말 끊으며) 엄마 뜻 듣고 싶지도 않고. 엄마가 번 돈은 엄마가 가져야지. 왜 그걸 자 꾸 나랑 미지한테 떠넘겨. 아님 뭐 이제 와서 부채 의식이라도 느껴?
미수 너한텐 늘 미안했어.
그래서 돈으로 갚겠다는 거야, 지금.
미수 내가 네 마음을 더 헤아렸으면 좋았을걸. 계속 후회했다.
후회는 후회대로 하시고. 나 무슨 일이 있어도 엄마 돈 안 받아. 엄만 잊었는지 모르겠 지만, 미지, 어렸을 때 내가 그랬지. 엄마 도움은 절대 안 받는다고, 미지는 내가 알아 서 내 힘으로 키울 거라고.
미수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어서 그랬어.
(어이없다는 듯) 엄만 늘 이런 식이지. 자기 좋을 대로 생각하고. 근데 그거 알아?
미수 ······.
엄마 도움, 필요했던 적도 원했던 적도 없어. 이제 엄마라는 사람이 나한테 더 이상 아 무것도 아냐. 그러니까 제발, 내 딸한테 쓸모없는 일 좀 시키지 마.

안, 자신의 말을 마치자마자 스튜디오를 빠져나간다.
미지가 안을 잡으려 하지만, 뿌리쳐버린다.
스튜디오에는 미지와 미수만이 남았다.
미수, 깊은 한숨을 내쉰다.
미지와 미수, 한동안 말없이 앉아 있다.


12. 2021년


미지와 수오의 집 안.
수오는 이어폰을 끼고, 구술 프로젝트를 위해 녹음을 했던 파일을 듣고 있다.
미지, 소파에 누워서 멍하니 천장을 바라본다.

미지 수오 씨.
수오 ······.
미지 수오 씨.

수오, 이어폰 때문에 미지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다.
미지, 소파에서 내려가 수오의 옆에 바짝 다가가 앉는다.

미지 (수오의 어깨를 치며) 수오 씨.
수오 (이어폰을 빼며) 응?
미지 뭘 그렇게 열심히 들어? 아직 프로젝트 시작 안 했잖아.
수오 으응, 연습 삼아 녹음해 봤던 거.
미지 응.

짧은 사이.

미지 우리 어떻게 하지?
수오 ······글쎄.
미지 이사 가야겠지?
수오 이 동네 좋아했잖아.
미지 응. 수오 씨도 그렇잖아.
수오 근처에 있는 집을 알아보자.

짧은 사이.

수오 다음 집은 이사 걱정 없게······.
미지 걱정 없게?
수오 신혼부부 주택청약을 알아볼까?
미지 청약?
수오 응.
미지 결혼해야 하는 거잖아, 그거 넣으려면.
수오 그렇지.
미지 ······지금 결혼하자는 거야?
수오 자기 싫으면 안 해도 돼.
미지 ······.
수오 그냥, 이런 방법도 있다는 거야. 내 얘기는.
미지 무슨 말이 그래. 수오 씨 나랑 결혼하고 싶어?
수오 ······.
미지 아님 지금 집 때문에 결혼하잔 거야?
수오 그건 아냐.
미지 그럼?
수오 난 너랑 이렇게 계속 살고 싶어.
미지 ······.
수오 너랑 사는 게 좋아. 그게 다야, 난.

미지, 수오의 말에 생각이 많아지는 얼굴이다.
수오, 미지의 어깨를 쓰다듬고는 다시 이어폰을 낀다.
한참을 말없이 이어폰을 낀 수오를 바라보는 미지.

미지 난 모르겠어. 이게 맞는 건지.

미지, 수오의 어깨에 기댄다.
수오는 자연스레 미지가 편하게 기댈 수 있도록 어깨를 내준다.


13. 2021년


미수의 집 안.
미수는 거울 앞에 서서 페이스 롤러로 얼굴을 문지르고 있다.

미수 개인적으로 수상을 하게 되어 영광입니다.

페이스 롤러로 얼굴을 문지르며, 발음을 힘주어 연습하는 미수.

미수 개. 인. 적. 으. 로. 수상을 하게 되어 영광입니다. 올해의 여성이라는 과분한······.

미수, 발음을 연습하다 말고 페이스 롤러를 집어 던진다.
무언가 뜻대로 되지 않는 얼굴이다.

미수 올해의 여성은 무슨······.

미수, 집어 던졌던 페이스 롤러를 다시 집어 든다.
열심히 다시 얼굴을 문지르는 와중에 현관 벨 소리가 울린다.

미수 갑자기 웬일이야?
미지 할머니 화장 잘 먹었나 보러 왔죠.
미수 얘는 별······.

미지, 미수를 바라보며 작게 웃는다.

미지 할머니 잠도 제대로 못 잤을 거 같아서 들렀어요.
미수 그래, 뒤척이느라 한숨도 못 잤다.
미지 엄만 제가 얘기해 볼게요.
미수 ······.

짧은 사이.
미수, 정장 두 벌을 가져온다. 파란색과 흰색 정장이다.

미수 어떤 게 더 낫니?
미지 대 봐요, 한번.
미수 봐 봐.

미수, 자신의 앞에 정장을 대 본다.

미지 흰색이 더 잘 어울려요.
미수 그래? 그럼 이거 입고 가야겠다.
미지 ······할머니.
미수 미지야.
미지 네.
미수 할머니가 너랑 네 엄마한테 잘못했어. 이 나이 먹도록 계속 잘못을 한다.
미지 할머니 노력한 거 알아요, 전.
미수 살다 보면 노력만으로는 안 되는 일이 있잖니. 주워 담을 수 없는 말처럼. 돌이킬 수 없는 시간들도 있는데, 내가 자꾸 그걸 외면하려 했나 봐.
미지 저도 그래요.
미수 뭐를?
미지 저도 외면하면서 살아요.
미수 (의외라는 듯) 미지, 네가?
미지 그럴걸요?
미수 너랑 나랑 닮은 점도 있네.
미지 저 할머니 많이 닮았잖아요.
미수 그렇게 생각해? 난 네가 네 엄마랑 똑같다고 생각했는데.
미지 (의외라는 듯) 예? 엄마랑 저요? 우리 둘이 완전 다른데.
미수 아냐, 내 눈엔 둘이 많이 닮았어.
미지 화내는 거요?
미수 그것도 빼먹을 수 없지.
미지 엄마랑은 제가 잘 이야기할게요.
미수 아니야. 굳이 안 그래도 돼. 괜히 네가 중간에 껴서 고생이다. 그치?
미지 아니에요. 할머니.
미수 응?
미지 가서 당당하게 상 받고 오세요. 멋있게.
미수 그래. 고마워.
미지 이따 밤에 전화할게요.

미수, 미지를 향해 손을 흔든다.
홀로 남은 미수는 미지가 추천해 준 옷을 다시 한번 자신의 앞에 대 본다.


14. 2021년


미지와 수오의 집 안.
수오는 자신의 짐 가방에 짐을 넣고 있다.
미지, 그런 수오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본다.
수오, 마지막으로 녹음기까지 짐 가방에 넣는다.
짐을 다 챙긴 수오가 미지를 향해 걸어간다.

수오 갈게.
미지 미안해.
수오 또 그 소리.
미지 나도 뭐가 맞는 건지 모르겠어.
수오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되겠지, 우리 둘 다.

미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수오를 올려다본다.

미지 이게 맞는 걸까?
수오 잠시 시간을 갖는 거로 생각하자.
미지 내가 우겨서 이렇게 된 것만 같아.
수오 아니야. 나도 네 의견에 동의하니까 이러는 거야.
미지 ······나 짜증 나지?
수오 ······약간?
미지 그럴 줄 알았어.
수오 장난이야.

수오, 짐 가방을 내려놓고 미지의 어깨를 잡는다.

수오 지금 이 시간이 후회되면, 그땐 또 다른 방법을 생각해내게 될 거야.
미지 ······그럴까, 정말?
수오 어떻게든 같이 살게 되겠지.
미지 ······.
수오 후회되지 않으면······.

짧은 사이.

수오 그것도 또 나름대로 잘 살걸.
미지 ······미안해.
수오 그만해, 그 소리. 정말 짜증 낸다, 나?
미지 짜증 내도 돼.
수오 미지야.
미지 응.
수오 잘 살아.

미지, 수오를 올려다본다.
두 사람의 눈동자에, 잠시 동안 아무 말 없이 서로가 담겨 있다.

미지 수오 씨도 잘 살아.
수오 응, 그럴게.

수오, 짐 가방을 들고 현관으로 향한다.

수오 연락할게.
미지 응, 잘 가.

수오, 집을 빠져나간다.
홀로 남은 미지, 멍하니 앉아 있다.
얼마 안 가, 현관 벨 소리가 울린다.
화들짝 놀라며 현관으로 달려가는 미지.

현재 (보드카 흔들어 보이며) 짠.
미지 뭐야?
현재 보드카.
미지 아니······ 갑자기 어떻게 왔어.

보드카를 든 현재가 미지의 집 안에 들어선다.
미지, 현재의 뒤를 따른다. 현재는 자연스럽게 소파 위에 앉는다.

현재 너 그러고 있을까 봐 왔지.
미지 내가 뭘······.
현재 눈물의 이별은 잘했냐?
미지 안 울었거든. 그리고 우리 헤어진 거 아니거든. 아직.
현재 그래, 알겠어, 이제 연애 이야기 그만하자. 또 싸울라.
미지 ······.
현재 미지야, 뭐 하니. 잔 안 가져오고.
미지 현재야.
현재 응?
미지 미안해. 그날, 그렇게 말해선 안 됐었는데.
현재 너 벌써 스무 번도 넘게 사과한 거 알지?
미지 알아, 아는데······ 그래도······.
현재 미지야.
미지 응?
현재 잔이나 가져와.
미지 아, 응.

미지, 현재의 재촉에 얼른 잔 두 개를 가지고 온다.

현재 받아.

현재, 미지의 잔에 술을 가득 채워 준다.

미지 현재야. 아까 수오 씨가 가는데, 진짜 오랜만에 잘 가라고 인사했다. 그게 너무 이상해.
현재 금방 적응될 거야.
미지 그럴까.
현재 또 집 안에서 수오 씨 흔적 찾으면서 궁상떨지 말고.
미지 내가 뭘······.

현재, 자신의 잔을 들어 보이며 미지에게 눈치를 준다.

현재 심미지의 독립을 위하여.
미지 나 독립한 지 오래거든?
현재 새로운 독립이라고 해. 그냥 넘어가라, 좀.
미지 알았어.

미지, 웃으면서 현재의 잔에 자신의 잔을 부딪친다.
미지와 현재, 동시에 술을 원 샷 한다.


15. 2022년


미지의 팟캐스트 녹음 스튜디오 안.
녹음을 준비하며, 헤드셋을 정리하고 있는 미지와 현재.
안, 미지의 옆에 앉아 대본을 보고 있다.

딸. 이거 하다가 말 씹으면 어떡하냐?
미지 괜찮아. 천천히 해도 돼.
말 꼬일 수도 있잖아.
현재 어머님, 그럼 편집하면 돼요. 요새 편집 기술 장난 아니에요.
그래? 이런 건 첨 해 보니까, 알 리가 있나. 너희들 나 바보 만들면 안 된다.
미지 우리가 엄마를 왜 바보 만들어.
현재 그럼 녹음 시작하겠습니다?

미지, 두 사람 앞에 놓인 마이크의 버튼을 켠다.
팟캐스트 오프닝 음악이 울려 퍼진다.

미지 안녕하세요. 심미지와 깡의 청취자 여러분. 이번 주 오늘의 게스 트는 이문동에서 도배 업체를 운영 중이신 사장님, 심안 님입니다.
네,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현재 저희가 이제 막 시작한 뜨끈뜨끈한 팟캐스트다 보니까, 청취자 여러분들과 아직 서로 낯 설어요. 얼굴은 아는데, 친근하게 인사까지는 어려운 사이? 약간 그런 사이거든요.
아, 예.
미지 그래서 청취자분들께서도 오늘의 게스트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으실 거예요. 왜냐면 저희도 낯설어 하시거든요. 그래서 심안 님께서 어떠한 연유로 <베걸우>를 찾아 주셨는지 말씀해 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아, 네. 어······ 우선 딸 덕분에 나왔고요. 미지는 제 딸인데, 이번에 웬일로 저를 섭외 하고 싶다고 해서. 기쁜 마음으로 나왔고. 그리고 현······ 아니, 깡도 오랫동안 봐 왔거 든요. 얘네 고등학교 졸업할 때 제가 술도 사 주고. 잡지 만들었다가 망했을 때도······.
미지 맞아요, 맞아요. 《HER》라고 불운의 잡지죠.
현재 예. 운영 미숙과 자금 부족으로 인하여 2호까지 나오고 폐간이 되었던 잡지였죠. 저랑 미지 님이 팟캐스트 전에 만들던 잡지였어요.
예. 그때 제가 열 권도 넘게 샀었는데. 망하는 건 뭐 금방 망하더라고요.

미지, 마이크 버튼을 누른다.

미지 아, 엄마.
왜?
미지 왜 자꾸 망한 얘길 해?
하면 안 돼?
미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지금.
어머, 너네 웃긴다. 그게 왜 안 중요하냐. 너네가 페미니즘 하면서 이것도 망해 보고 저기서도 일을 벌여 봤다, 이런 거 다 말해야지. 그래야······ 뭐야 그 청취자랑도 친해 지지.
현재 야, 그래. 재밌는데, 왜?

미지, 다시 마이크 버튼을 누른다,
녹음 시작 알림음이 울린다.

미지 저희가 오늘 심안 님을 모신 이유가 있죠. 심안 님 하면 떠오르는 분이 계세요. 바로 유명한 페미니스트이자 심안 님과 의절하신 어머니 윤미수 작가님이잖아요.
그쵸.
미지 어떤가요?
의절이요? 여전히 얼굴 안 보고 삽니다.
현재 (웃으며) 아니요. 의절의 아이콘으로 떠오르신 거 어떠신지 궁금해요.
의절의 아이콘이라고 할 거까지 있나요. 잠깐 화제 되고 말았는데요, 뭘.
미지 저만 중간에서 부엉이처럼 옮겨 다니고요.
현재 박쥐 아닌가요?
미지 부엉이가 더 귀엽잖아요.
근데 많이들 착각하시는데. 의절한다고 해서 내 뿌리가 사라지고, 인생이 걷잡을 수 없 이 나빠지고 이런 거 아니거든요. 엄마 없는 게 뭐 어때서요. 안 보면 뭐 어떱니까. 안 봐서 행복하면 안 봐야죠.
현재 시원시원하시네요.
여러분들도 너무 겁내실 거 없어요. 이게 생각보다······.

미지, 마이크 버튼을 누른다.

미지 엄마, 잠깐만.
또 왜?
미지 아니, 꼭. 무슨 의절 권장 프로그램 같잖아.
그러니?
현재 아뇨. 재밌고 좋던데요.
아니라잖아.
미지 나만 이상한 거야?
쟤가 은근히 보수적이야.
현재 맞아요, 어머니. 미지가 좀 그런 구석이 있어요.
미지 ······녹음 다시 갈게요.

미지, 마이크 버튼을 누르면, 세 사람, 다시 마이크에 가까이 다가간다.


16. 2021년


시상식장 단상 앞.
상패를 든 미수가 단상 위로 올라선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흰색 정장 차림이다.

미수 감사합니다. 올해의 여성을 수상하게 되어 너무나 큰 영광입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절필 선언을 할 걸 그랬어요. 이렇게 상을 주실 줄 알았으면······.

미수, 작게 웃어 보인다.

미수 아마도 이 상은, 지난 40년 동안 한국에서 공개적인 페미니스트로서 살아가면서 산전 수전을 많이 겪었는데 그에 대한 위로 내지는 응원이라고 생각이 되어요. 제가 참 욕 도 많이 먹고, 죽인다는 소리도 많이 들었는데요. 이렇게 오늘처럼 다양한 직군의, 세 대의 여성분들이 뽑아 주신 상을 받고 나면 그러한 일들이 다 잊히고는 해요. 꼭 상을 받아서 그런 건 아니고요. 같은 여성이 제게, 잘하고 있다는 듯한 눈빛을 보내주실 때 혹은 강연이 끝나고 제게 다가오셔서 아무 말 없이 제 두 손을 잡아 주실 때. 그런 순 간들이 지금까지 저를 이끌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미수, 들고 있는 상패를 바라본다.

미수 제 손녀는 농담으로, 혹시 제가 얼마 전에 여러 여성 이슈 관련 시민단체에 기부를 해 서 이 상을 받는 거 아니냐는 이야기를 했었는데. 저는 여러분을 믿습니다. 아닐 거라 고, 생각이 되고요. 그리고 그 기부는 저 혼자만이 이뤄낸 게 아니라, 제 강연을 들으 셨던 수많은 분들, 제가 제기한 문제에 함께 공감하고 목소리를 내주셨던 분들 덕분에 가능했던 일이에요. 요새 저더러 기부왕이라는 굉장히 낯부끄러운 타이틀을 붙이시고 는 이렇게, 인터뷰 요청을 가끔 주시는데. 저는 기부왕도 아니고요. 그리고 이전에 인 터뷰들을 너무 많이 해서, 거의 비슷할 거예요. 지금 하나. 그래서 기자님들께서 너무 서운해 마셨으면 합니다. 오늘도 상만 받고 얼른 집에 가려고요. 요샌 혼자가 편하더라 고요.

짧은 사이.

미수 마지막으로 제가 꼭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있는데요. 제가 제 딸과 의절한 지 오래예 요. 제 딸은 저를 보고 싶어 하지 않고, 필요로 하지 않는데요. 이런 얘길 밖에서 해 본 적이 없더라고요, 제가. 여성들의 삶에 대해 조언하고 이야기하면서 정작 제 삶이 어떤지에 대해서는 얘기를 안 했어요. 아마 무의식중에 좋지 않은 얘기라 생각하고, 감 췄던 것 같아요. 그런데 오늘 이 자리에서 왜 굳이 이 얘기를 하느냐면요. 저는 엄마로 서 굉장히 실패한 사람이고, 여성들을 돕는다 생각했지만 그들에게 상처를 입히고, 어 쩌면 그들의 목소리를 대변한다는 명목하에 여성들의 언어를 제 것처럼 얘기했던 적도 있었어요. 그래서 이 상을 받는 것에 대해서 굉장히 많이 고민을 했었고요. 그럼에도 뻔뻔하게 이 상을 받는 이유는 올해의 여성이 무결하고 완벽한 여성이지 않아도 된다 는 사례를 남기고 싶어서입니다. 무지에 대해 깨닫고, 반성하고, 외면하지 말라는 의미 에서 이 상을 주신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저 열심히 살았거든요.

미수, 상을 한 번 흔들어 보이고는 단상에서 내려온다.
미수, 청중을 바라본다.
여러 감정이 오가는 듯, 슬픔과 미소가 찬찬히 퍼져나간다.


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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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리자
  • 2023-11-15
환승

환승 윤미희 나오는 사람들 상희 민재 윤아 때 늦은 밤 곳 지하철 안과 밖 무대 무대는 달리는 지하철 안과 지하철을 기다리는 밖으로 나뉜다. 별다른 무대 장치 없이 지하철을 타고 내리는 것만 표현해도 좋다. 1. 주안역 열차를 기다리고 있는 상희, 민재, 윤아 세 사람 모두 검정색 계열의 옷을 입고 있다. 각자 스마트폰을 보며 혼잣말을 하는 건지 들으라는 건지 모르겠는 말투로 민재 왜 난 검색해도 안 나오지? 윤아 버스 타야 하는데 괜히 지하철 타는 건가? 상희, 윤아에게 자신의 스마트폰을 보여주며 상희 제가 검색할 때는, 신도림에서 갈아타서 홍대입구까지 이렇게 가는 걸로 나오거든요. 민재, 기웃거리고 윤아, 상희의 스마트폰을 바라본다. 민재 어? 그건 또 다르게 나오네. 윤아 도대체 뭐가 맞는 거야… 상희 성신여대입구까지도 간다고 나오니까 연희동까지는 충분히 갈 수 있을 거예요. 윤아, 다시 자신의 스마트폰을 바라본다. 민재, 끼어들며 민재 나도 좀 봐줘요. 민재, 자신의 스마트폰을 내민다. 상희, 자신의 스마트폰으로 검색하며 상희 신도림에서 2호선으로 갈아타셔서 잠실까지 쭉 갔다가, 잠실에서 8호선으로 갈아타셔서 천호, 거기에서 다시 5호선으로 갈아타야 된대요. 5호선에서는 한 정거장만 더 가시면 되고요. 민재 좀 애매한데… 윤아 이미 돌아가긴 늦었어요. 민재 역 주변에 있을 곳이 있나. 상희 전부 술집뿐인 것 같던데요. 민재 주안역은 처음이거든요. 상희 저도요. 윤아 저도 1호선은 많이 안 타봤어요. 민재 아까 올 땐 1호선 급행열차 탔는데, 윤아 1호선에도 급행열차가 있구나, 민재 우리 잘 도착할 수 있겠죠? 상희 그럼요. 부천행 급행열차가 오고 있다. 윤아 어? 급행열차네요. 민재 이거 타는 거 맞죠? 상희 이거 타거나 좀 기다렸다가 일반 열차 타거나 도착하는 시간은 똑같아요. 민재 왜요? 상희 …부천행이잖아요. 민재 네? 상희 신도림까지는 가셔야죠. 민재 아, 잠시 고민하는 세 사람. 민재 좀 덥지 않아요? 윤아 그냥 탈까요? 어차피 기다리는 거 조금이라도 가면서 기다리는 게… 상희 그래요, 그럼. 문 열리고 탑승하는 세 사람, 빈자리가 많아 좀 떨어져 앉는다. 각자 다시 스마트폰을 보며 윤아 왜 다시 검색하면 자꾸 다르게 나오지? 상희, 눈치만 볼 뿐 대꾸하지 않는다. 윤아 아까 거기서 버스 타고 가서 공항철도를 탔어야 했나 봐요. 잘 모르는 길이라 혼자 가기도 좀 그렇고 해서 따라오긴 했는데… 민재, 열차 내부에 붙어 있는 노선도를 바라보며 민재

  • 관리자
  • 2023-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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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리자
  • 2023-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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