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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흙과 비

  • 작성자 아기호랑이
  • 작성일 2024-04-27
  • 조회수 188

비가 조금 내리고 국화 핀 향기가 나고, 무덤 앞에서 무너져버린 너를 봤어. 네가 나의 품에 안기던 날, 우리가 피워낸 한 송이의 꽃을 기억하니. 너는 무서운 속도로 추락했고 나는 그런 너를 먹었어. 우리의 아름다운 꽃은 그렇게 잔인한 세상에서 태어난 거야. 


초록이 자라나는 봄이 되었고, 구름 위에서 숲을 내려다본 너는 내가 보이지 않았을 거야. 네가 얼마나 용기 있는 결정을 내렸는지 알아. 나무들 사이에서 피어난 우리의 꽃은 네게 너무나도 멀었어. 이따금 나는 너에게 꽃을 잘 보살피겠노라 말했어. 그러면 넌 언제나 투명한 웃음을 보내주었지. 


그래, 고운 정 미운 정 다 들었다는 거 알아. 네가 오랫동안 자리를 비울 때, 너만을 기다리는 꽃의 물음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어. 시간이 지날수록 몸 한구석에 깊게 파인 상처에서 피가 흐르는 것처럼 느껴졌어. 괜히 서러운 울음을 참았어. 


너는 언젠가 내가 너를 가두고 있었다고 털어놓았지. 내가 너를, 먹었다고. 그 후 내게 상처였던 시간은 너에게 감옥이었겠지. 나는 너를 품고 놓아줄 자신이 없었던 것 같아. 내가 눈물을 흘릴 수 있게 되던 날, 너도 함께 울었어. 


비가 조금 내리고 국화 진 향기가 나고, 무덤 앞에서 무너져버린 너를 봤어. 나는 몰랐고 너는 알았어. 우리의 꽃이 죽어버린 날을. 너의 부재는 나의 부정이었고, 나의 무지는 너의 무게였어. 그럼에도 나는 국화가 살아있을 것이라고 믿었어. 네가 고개를 저으며 마른 눈물을 삼킬 때 나는 너무 늦게 깨달았어. 죽음의 생명이 죽었다고. 


우리는 영원히 살아갈 수 있었기에 죽음의 존재를 너무 쉽게 부정했는지도 몰라. 다만 신은, 우리에게 영원을 그냥 주지 않았어. 그만큼 생명은 소중했고, 죽음 또한 이치였어. 그럼에도 첫 꽃을 떠나보내야 했던 우리는 그 사실을 받아들이기에 벅찼었나 봐. 네가 눈물을 흘릴 수 있게 되던 날, 나는 마른 눈물을 삼킬 수밖에 없었어. 나는 네가 얼마나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냈었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어. 


우리의 예술가가 떠났어. 항상 흰 모자를 쓰고 다니던 그에게 조금 더 많은 모자를 씌워주고 싶었어. 우리는 한 해 동안 정말 열심히 일했다며 뿌듯해했어. 나는 그 역시 행복한 줄로만 알았지. 그가 유언을 남길 수 있게 되던 날, 우리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그의 목소리를 들었어. 모자가 너무 많아. 그것은 사실이었어. 


그에게 씌워준 모자의 개수만큼 우리는 생명을 책임져야 할 거야. 언젠가 내가 바람에 날리고 네가 사선으로 내릴 때, 우리가 헤어지더라도 너무 슬퍼하지 말자. 우리는 눈물을 흘리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으니까. 그럼에도 눈동자를 감아보자. 우리의 눈물이 곧 생명의 탄생을 의미할 테니까. 


무덤 속에는 어린 예술가의 모자 하나가 남았어. 나는 그것을 보지 못했지만, 알고 있었어. 모자에는 작은 씨앗이 하나 들어 있었어. 모자를 껴안고 겨울을 보냈어. 


비가 조금 내리고 국화 핀 향기가 나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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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원래 그랬던 것처럼

1나는 언제나처럼 턱을 괸다. 딱 쓰러지지 않을 만큼만. 힘을 주고 버틴다는 느낌이 들지 않도록 한다. 제각각 틀어진 각도의 부조화는 사회적인 불만이 있는 것으로 보일지 모른다. 다만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는다. 단지 조금 삐딱한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볼 뿐이다. 남들이 모두 정자세로 앉아있을 때 홀로 다른 곳으로 시선을 옮기는 것이다. 나의 뒤통수에 눈이 달려있으면 어떨까, 하는 상상에도 심각한 척 연기한다. 의미 없는 상상을 15분쯤 지속하면, 누군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주위를 서성인다. ‘뭐 하시는 건가요?’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오랫동안 뜸을 들이고도 차마 입 밖으로 내뱉을 수 없는 원초적인 의문이다. 내가 답한다. ‘보면 모르나요? 일하고 있잖습니까. 한 번도 보신적 없으신 것 같은데, 소설가는 원래 이렇게 일합니다. 방금 괜찮은 아이디어가 떠올랐는데 말하느라 잊었습니다. 그러니 남 일에 상관 말고 가 주시면 좋겠습니다. 제가 좀 바쁩니다만….’머릿속이 이런 상상으로 채워지면서 미소가 번진다. 때로 대중들이 작가의 웃는 모습을 떠올릴 때면, 대단한 영감이 찾아왔거나 권위 있는 상을 받는 모습을 그리곤 하는데, 그렇지 않다. 사실 시시한 농담 따위에 즐거워하는 중이다. 그러나 웃음이 영원할 수는 없는 법이다. 미소가 흐려지면 그때의 감정은 기억으로만 남는다. 그럴 때면 다시 턱을 괴고 생각한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고. 그러면서도 오래 간직하고 싶은 기분이 있다고. 딱 쓰러지지 않을 만큼만. 2원래 그랬던 것처럼 책장을 넘기다 보면 읽지 않은 책을 감상하는 듯한 착각이 든다. 곁눈질이 찾아낸 좋은 문장들이 처음부터 자신의 것인 양 기억하게 된다. 읽지 않고도, 쓰지 않고도 자기 것이 된다. 자신만의 분위기에 젖어 든다. 그러는 사이에 물먹은 종이가 찢겨나간다. 더 이상 나의 문장은 작가의 문장이 되지 않았다. 고통의 정도에 관한 질문에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생각이 고통의 근원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으니, 최소한의 의식만을 남겨둔다. 나머지는 모두 무의식에 맡긴다. 정해지지 않은 전개가, 예측하지 않은 결말이, 기대하지 않은 수상에 더 만족하니까. 너무 많은 고민으로 시도조차 하지 못했던 글들은 버린다. 더 이상 실패한 과거와 성공한 미래는 없다. 글을 쓰는 순간의 현재가 있을 뿐이다. 그렇게 탄생하는 것들을 마주하면 그곳에 내가 있다. 자신도 인식하지 못했던 내가 있다. 자아 아래에 숨은 원초아가 만년설이 녹은 민둥산처럼 드러난다. 내가 바람은 모르는 것에 관해 쓰는 것.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에 대한 글을 쓰면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다. 대부분, 혹은 작가 자신도 몰랐던 이야기가 쓰는 과정에서 발현된다. 나는 아직 몰래 숨어서 창작을 지켜보고 있는 최초의 목격자에게 가서 묻는다. “당신은 이것을 알고 있었습니까?”“그렇습니다.”“당신은 이 이야기를 접해본 적 있습니까?”이제부터 소설가는 긴장해야 한다. 무의식에 인식이 섞였는지 알아보기 위해. 개인의 경험은 너무나 적다. 간접적인 경우도 마찬가지다. 읽지도, 쓰지도 않았지만,

  • 아기호랑이
  • 2024-03-23
#4. 기록되지 않은 순간의 당신에게

우리는 여행으로써 서로의 삶에 존재하는 공백의 시간에 징검다리를 놓고 있었어. 냇가에 놓인 돌을 딛고 서 있는 순간에도 함께할 수 없는 미래를 당연시하면서, 매번 언제 도래할지 모를 다음을 기약했지. 각자의 삶이 바쁘다는 핑계로 안부를 전하지 못한 날들이 이어졌지만, 달력을 넘기면서 피곤한 하루를 정리하는 것이 일상이었어. 사실 달력을 보지 않은 날이 더 많았던 것 같아. 그럼에도 나의 책상 한편에는 여전히 인화된 사진들이 나열되어 있어. 빛바랜 사진들의 추억이 느슨한 줄의 작은 나무집게에 걸려 흔들리고 있어. 그 앞에 서 있다 보면, 사실은 사진보다 사진이 걸려있지 않은 빈 곳에 더 많은 시선을 보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어. 우리가 만나지 못했을 동안 너는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네가 언급했던 과거의 조각을 이어 보았지만,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았어. 만일 우리가 좀 더 자주 만났다면 과거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까. 나는 지금 빈 곳의 사진에 대해 생각하고 있어. 우리가 만났지만, 아무런 사진도 남겨두지 않았던 때를 말이야. *너는 모든 순간에 대해 기록했어. 그것이 작가의 숙명이라 말했지. 그러나 너는 그 이상의 것에 대해 말해주지 않았어. 나는 단지 네가 시, 소설, 에세이가 아닌 사진에 좀 더 많은 관심을 두고 있다고 추측할 뿐이야. 우리가 갔던 유명한 이탈리아 식당은 생각나니? 난 그곳에서 고급 레스토랑일수록 한 접시에 담기는 스파게티의 양이 적다는 이론에 확신을 가질 수 있게 되었어. 너는 올리브오일 파스타가 너무 맛있어 보인다며 각도를 바꾸며 셔터를 눌러댔지. 식기 전에 빨리 먹으라고 말해도 사진을 보정하느라 바빠 보였어. 언젠가 너는 카페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 나를 찍어서 보여준 적이 있었지. 그 사진에서 나는 좀 달라 보였어. 카메라의 렌즈에 초점을 맞추고 찍어서 선명하게 나온, 그 어떤 사진에서도 본 적 없는 표정이 반쯤 드러나 있었어. 아무것도 보정하지 않은 자연스러운 미소 말이야. *그런 네가 어느 날 카메라를 가져오지 않은 채 나타난 거야. 사건의 근원은 더 많은 사진을 찍기 위한 시도에서 비롯되었어. 저장공간 확보를 위해 눌렀던 버튼이 여타 앱의 사진을 지우고 있었다는 거야. 나는 백업한 사진이 남아있지 않느냐고 물었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인 너는 사진의 원본, 아니 보정본을 볼 수 없어서 우울해진 거였어. 너는 선뜻 사진을 찍기가 두렵다고 했지. 나는 그날, 네가 카메라 앱을 켜는 모습을 한 번도 보지 못했어. 또한 네가 밝게 웃는 모습도 보지 못했지. 촬영으로 갖추어진 그 완벽한 웃음을 말이야. 우리는 그날 좀 더 가까워졌어. 내 판단이 너와 일치한다면 너 역시 어떤 변화를 느꼈을 거야. 사람의 외형을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내면을 감각하는 시간이었어. 이 순간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할 수 있는 이유는, 역설적으로 아무것도 기록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해. 나는 이 글을 통해 그때의 감각을 너에게 알려줄 수 없어. 우리가 카메라에 이를 드러내고 환하게 웃는 순간, 과장된 단어의 허례

  • 아기호랑이
  • 2024-01-22
죽음을 달리는 열차

네가 이 편지를 받았을 때 나는 이미 죽어있을 거야. 난 죽음을 달리는 열차에 올랐거든. 이 열차는 멈추는 법이 없어. 철도가 끊어지더라도 계속해서 바퀴가 굴러갈 거야. 그 끝이 어딘지 모르는 것은 당연해. 목적지가 없거든. 내가 뽑은 열차 티켓에도 목적지가 빈칸으로 남아있어. 나는 그 자리에 DEATH라고 당당히 적어둘 거야. 그래, 맞아. 나는 어디론가 가기 위해 열차에 타지 않았어. 출발점은 있는데 도착점이 없어. 철도는 계속해서 연장되겠지. 시간은 무한대로 흐를 것이고 내가 죽은 후로도 세상은 영원할 테지. 그 사이에 놓인 삶은 아무것도 아니야. 나의 삶 이전에도, 나의 죽음 이후로도 무한한 시간이 존재해. 끊임없이 이어지는 우주의 시계 속에서 내가 차지하는 비중은 미세한 점 하나에 지나지 않지. 삶은 동시에 죽음으로 향하는 과정의 일부가 돼. 세상의 목적지는 없겠지만, 나의 여정이 계속될 수는 없어. 나도 언젠가는 죽겠지. 그때가 내 인생의 종착지가 결정되는 순간이야. 나는 삶의 마지막을 함부로 결정하지 않을 테야. 꼭 여기에서 멈춰야 할까. 한 걸음 더 나아가도 크게 다르지는 않겠지만, 그 순간이 모인 결과에는 변화가 생기지 않을까. 굳이 이를 마다하고 삶을 일찌감치 놓아버릴 이유는 없지. 시간은 영원하고, 열차는 달리고, 철도에는 끝이 없는데, 모든 것이 나아가고 있는데. 멈출 필요는 없잖아. 가만 생각해 보면 나는 지금까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던 것 같아. 나는 창밖을 보면서 멀리 떠났다고 생각했어. 근데, 그거 알아? 내가 아직도 기차의 마지막 칸에서 벗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단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고 세상으로부터 멀어지는 방법을 알려줄까. 나를 둘러싼 세상을 통째로 밀어버리면 돼. 이제 가만히 앉아있는 것에 질렸어. 묵묵히 자리를 지키는 것이 전부였던 과거에서 탈피하고 움직임을 보여야 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졌어. 끝없이 펼쳐진 여정이 마치 자유를 상징하는 것 같았거든. 지금까지의 기억은 없었던 거야. 새로운 공간에서 다시 시작하는 거야. 이때까지 경험해 왔던 것들이 미래의 삶에는 영향을 끼칠 수 없도록. 남은 평생을 걸어도 닿을 수 없는 곳으로. 가능한 멀리. *내가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는 너 때문이기도 해. 너한테서 멀어지고 싶었어. 정확히 말하자면 너에게서 비롯된 고민을 그만두고 싶었어. 너무 멀리 와버려서 돌아가려고 해도 돌아갈 수 없는, 아무리 고민이 많아져도 기억조차 나지 않을 그곳. 그런 장소를 찾아 나서면 괜찮을 거로 생각했어. 내가 한평생 도달하지 못할 상상 속의 좌표를 그리고 있었는지도 모르고. 목적지가 주어져 있다면 시작과 끝이 명백하겠지. 그런데 결말이 밝혀지지 않은 세상에서는 최후의 운명을 정해두지 않아. 끝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는 시작이 중요해. 결과는 발단과 이후의 과정이 결정해. 여정을 거꾸로 따라가다 보면 비로소 처음의 순간을 향할 거야. 이 순간을 분명한 점으로 나타낼 방법은 없어. 어느 순간 탄생하는 것이 아니라 흐름에 따라 서서히 발현되지. 아무도 모르

  • 아기호랑이
  • 2023-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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