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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턴 투 차일드(퇴고)

  • 작성자 YJH
  • 작성일 2023-08-08
  • 조회수 388

내가 만일 주인공이라면 프로필은 이런 식으로 쓰일 것이다. 

김주연. (30) 적당한 기업의 적당한 위치에서 일하고 있다. 애인은 없다. 

주인공인 내가 맡은 임무는 다음과 같다. 

의미 없는 보고를 하고 의미 없는 회의와 의미 없는 서류 작성 의미 없는 회식. 

내용만 다를 뿐 크게 본다면 범주는 모두 같은 곳에 속했다. 

이 의미없는 챗바퀴 속에서 허덕이다보면 챗바퀴를 멈추고 싶을 때가 찾아온다. 

그럴 때마다 나는 어릴 적 즐겨보던 용감한 소년의 모험만화를 떠올리곤 했다.

 어린 시절 친구들과 신나게 놀고 난 뒤 저녁을 기다리며 텔레비전을 뚫어져라 쳐다봤던 그 만화. 그 이야기. 

바보 된다고 꾸중을 듣기도 했던. 

이제 다시 없을 여름방학이 저물어갈 무렵 차갑게 씻고서 탈탈거리는 고물 선풍기에 몸을 맡기던. 

그런데 그게 무슨 이야기였지? 

그것과 관련된 추억은 뚜렷이 떠올라지만 그 이야기에 대해서 떠오르는 건 딱히 없었다.

 어렴풋 외관은 떠올라도 이름이나 구태여 특징은 저 먼 곳으로 떠난지 오래였다.

 "뭘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세요?"

 나의 직속후배인 이지열이었다. 

장르는 다르지만 일본 애니메이션을 즐겨 보다는 이지열이라면 알고 있지 않을까. 

"지열아, 혹시 옛날에 하던 만화도 잘 아냐?" 

"당연하죠. 제가 또 레트로 만화 박사랍니다." 이 말은 믿을 게 못 된다. 

이지열의 말버릇 중 하나로 무슨 말을 해도  '~박사' 라고 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이번만큼은 자신 있는지 가슴을 쿵쾅 두드렸다.

 "옛날에 봤던 만화가 기억이 안 나서 말이지..." "몇 살 때 쯤인데요?" "한 열 살쯤이었을 거야." "그럼 제가 아홉살이었네요." "내가 기억하기론 되게 유명한 거였는데. 디음 날 학교 가면 애들도 다 그 얘기를 하면서..." "주인공이 누군데요?" 추억에 관심 없다는 듯 단칼에 끊은 지열을 보며 입안에서 커피를 마신것 처럼 씁쓸함을 느꼈다. 한김 식힌 커피를 호록 마시며 곰곰히 생각했다. "또 커피에요? 그만 마시세요." "이거 없으면 못 살아." 확실히 커피를 마시니 두뇌가 자극되는 기분이었다. "모자를 썼고 선장이었어." "그게 다예요?" "또 있어. 이건 진짜 확실해. 머리가 빨간색이야." "아!" "뭐야 알 것같아?" "아뇨. 그것 갖고 어떻게 알아요." 기대가 서릿발처럼 차갑게 식었다. "그런 건 잊어버리시고 저랑 같이 이거 보실래요? 주인공이 잘생겼는데 저랑 좀 닮은..."

 "지열아, 내 어린시절 꿈이 뭐였는지 아냐?" 

"갑자기요? 뭔데요." 

"선장. 선장이 너무 되고 싶었어. 그 만화에 나오는 주인공이 너무 멋있었거든." 

"겨우 그런 것 가지고 선장이 되고 싶었다니. 꿈을 너무 쉽게 가지는 거 아니에요?" 

"낭만을 모르는 놈. 네가 그 꿈 하나가지고 무역회사에 취업했단 거 아니야." 

"전혀 관련이 없지 않나요." 

"현실이 녹록지 않을 걸 어떻게 하겠냐."

 "아 예."

 그 만화에 대한 생각들은 머릿속에서 하루종일 떠나질 않았다.

 다른 동료들한테도 물어보았지만 그들 또한  이지열과 같은 대답을 할 뿐이었다.

 동년배가 많아서 한 명쯤은 알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쯤되니 내가 기억하는 모든 것이 사실 꿈이 아닐까란 생각도 해보았다. 

신기루처럼 희미했다. 

"에이 일이나 하자." 

잊기 위해 의미 없는 짓들을 더욱 열심히 해보았다. 보고서도 열심히 쓰고 회의도 나름 열심히 하고 탕비실에 커피도 좀  채우고.

 하지만 생각은 좀처럼 사라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아예 머릿속에 단단히 자리를 잡은 모양이다.

 왜지. 왜 자꾸 그 생각이 떠오를까. 마음이 차분해지기 위해 했던 생각은 이제 내 마음을 심란하게 만들고 있었다

. *** 

퇴근 길.

 나는 지하철 역사에서 포털 사이트에 무언가를 검색하다 지우길 반복했다. 뭐라고 쳐야 나올까.

 "아저씨."

 스마트폰 화면에서 눈을 떼 힐끗 앞을 바라보니 웬 소년 한 명이 서 있었다. 외국인인 건지 머리는 밝은 갈색, 아니 빨강에 가까운 갈색인가.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서 있는 소년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왜 그래? 길 잃은 거야?"

 "아뇨." 

"부모님은? 부모님은 어디 계셔?" 

"안 계셔요. 저 혼자 살아요." 

이 어린애가 혼자 살고 있다니. 믿어도 되는 말인가. 

"그럼 집이 어디야? 아저씨가 데려다 줄게."

 "모르는 사람 함부로 믿지 말라고 하던데요." 

교육을 잘 받았군. 

"...그럼 경찰서에 데려다줄게." 

선뜻 고개를 끄덕인 소년의 작은 손을 잡고 나는 역사를 나섰다. 어린아이의 손을 잡아본 적이 잘 없어서 몰랐는데 참 작구나. 

"근데 아저씨는 뭘 그렇게 심각하게 보던 거예요?" 

"내가 심각해 보였니?" 

"장난 아니던데요." 

앞으로 집중할 때에는 표정을 신경 써야겠어. 

이 애한테 알려줘봤자 옛날 만화라 알 길이 없겠지만 이 아이는 나름 현역(?) 이니까 혹시 알고 있을지도 몰랐다. 

"너 혹시 만화 많이 보니?"

 "만화요? 많이 보죠. 웹툰이라던가 아니면 만화책같은." 

"그런 거 말고 텔레비전에서 해주는 애니메이션 말이야."

 "가끔 보죠."

 "그럼 혹시 이것도 아니? 빨간 머리 소년이 배를 타고서 바다를 탐험하며 친구들도 만나는 그런 얘기였는데..."

 구멍이 들쑥날쑥한 나의 설명을 듣고선 고민에 빠진 차분한 눈동자가 그를 이끄는 듯했다. 저렇게 심각하게 고민해줄 필요는 없는데.

 그 사이 나는 주변을 스쳐 지나가는 수많은 사람들을 보았다. 나와 또래로 보이는 이들이 많았다. 저들 중에서 그 만화를 기억하는 이들이 있을까. 

어릴때는 처음 보는 사이더라도 놀이터에서 만나 한바탕 놀면서 친해졌지. 지금은 사회성을 억지로 끌어내는 어른이 되었지만. 

어제까지만 해도 나는 저들 중 하나였다. 고된 노동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며 달콤한 사탕을 까먹듯 웹툰, 동영상, sns 따위를 읽고 훑으면서. 하지만 딱히 재미는 없었다. 

그냥 이 걸어가는 시간마저 지루하기에, 뭐라도 읽고  싶어서 보는 것이였다. 적어도 나에겐 이것 또한 의미 없는 짓이였다. 챗바퀴에 잠시 제동을 걸어줄 무언가를 찾는 것이었다. 

짙은 우울감이 선홍의 혈액을 검게 물들며 올라오는 기분이었다. 

"아저씨." 계단을 다 오른 참에 소년이 입을 뗐다. "뭔지 알았어요." 

"그래? 뭔데?" 귀를 가까이 대라는 듯 손짓을 다급하게 해댔다. 사람들이 없는 구석으로 달려간 나는 마침내 답을 들을 수 있었다. 

"그래! 그거야. 고맙다 꼬마야." 이제야 하나, 둘씩 제대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선장인 주인공이 대륙을 모험하며 악당을 물리치고 보물을 칮아내는. 

주인공의 이름, 줄거리와 사사로운 에피소드, 가장 인상 깊게 보았던 장면들이 깜깜한 밤 줄기차게 쏟아지는 유성처럼 생각이 반짝였다.

 "이거 되게 옛날 만화인데 어떻게 알았대?" 

소년은 아무 말 없이 미소를 지었다. 그 모습이 내가 아는 주인공과 매우 닮아 있었다. 붉게 타오르는 빨간 머리칼과 무뚝뚝해 보이지만 웃으면 굉장히 개구쟁이같은. 왜인지 몰라도 나는 그가 이런 말을 하길 기다렸다. 모험의 끝은 새로운 탄생의 시작이다.

 "모험의 끝은 새로운 탄생의 시작이지." 

첫 마디를 내뱉는 소년은 성스러운 신처럼 보이기도 했고 만인의 사랑을 주목받는 매혹적인 모험가같았다. 

내가 할 말은 정해져 있었다.

 "...하지만 모험이 끝나면 우리는 다 흩어지잖아."

 "아니.  우리는 언제나 함께할 거라네. 그저 각자의 모험을 떠날 뿐이지." 

원래 대사는 여기서 끝이다. 이야기의 끝에서 화면은 블랙아웃이 되고 엔딩송이 흘러나오며 티비를 끌 시간.

 그치만 나는 까만 화면 너머가 궁금했다. 소년은 궁금하지 않지만 어른은 궁금한 이야기. 

"네가 그리울 때가 찾아오면?" 

소년은 약속을 지킨이의 뿌듯함이 미소 가득 채웠다. 

"그것도 걱정 말게나. 친구가 그리우면 나는 언제고 너를 찾아갈테니!" 

소년은 내가 아는 그 누군가와 닮아있었다. 

너무나 닮고 싶었던 한 이야기의 주인공같았고. 내일이 되면 새로운 꿈이 기다리고 있는 지금은 만날 수 없는 한 소년 같기도 했다. 

그것은 동시에 나이기도 했고. 내가 아니었다. 

아아. 찾아와줬구나. 

알 수 없는 슬픔의 고양감과 그동안 애써 눌러놓은 세월의 고달픔과 외로움, 쓸쓸함이 역류했다. 역류한 감정들이 눈물들로 쏟아졌다. 

너무 그리웠다, 너를 보던 때로 돌아가고 싶다고, 부장님의 잔소리와 상사와의 갈등, 머리가 터질 듯이 복잡한 업무와 야근이 없는 세상에 살고 싶다고. 어른이기에 털어놓을 수 없던 모든 서글픔을 나의 어린시절을 함께한 이에게 털어놓았다. 

주인공은 모를 것이다. 물가가 오른단 게 무슨 의미인지. 종합소득세나  금리와 대출 이자, 꼴아박은 주식의 의미들을. 

때론 아무것도 모르기에 오히려 털어놓을 수 있다. 

"괜찮다네 친구여. 걱정 말게나." 

완벽히 저버린 줄 알았던 어린 시절의 동심은. 어른이 되기 위해서 반드시 버려야 한다고 했던 동심이. 

그리워졌다. 

동심이란 어쩌면 어린이만을 위한게 아니라 어른에게도 필요한 것일 지도 몰랐다. 물론 어른이 피터팬이 될 수는 없지만 적어도 피터팬을 그리워할 동심은 아직 이 사회에 필요하다고. 

나는 그렇게 동심의 작은 조각을 오랜 친구에게서 찾았다. 

"이제 어른으로 돌아갈 시간이라네." 

소년의 몸이 반짝이는 별가루가 되어 사라지고 있었다. 

어느새 작아져 있던 내 몸을 바라본 나는 당차게 세상을 모험하겠다는 으름장을 내놓던 멋진 소년처럼 외쳤다. 

"이 모험이 언제 끝날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끝나는 날이 온다면 우리는 모두 어른이 돼 있겠지." 

만화 속 대사를 곰곰히 듣던 주인공은 내가 알던 대답과 사뭇 다른 답을 읊었다.

 "하지만 나는 나의 친구들을 위해 영원한 어린이로 남아있겠네." 

내가 너무나 되고 싶었던 인물이 나를 위해 남아주겠다 약속했다. 그게 마음 속일지 혹은 다른 세상일지 몰라도 나는 그를 기억할 것이다. 

"출항 준비는 완료되었나!" 

소년은 파랑이 넘치는 파도 위 출렁거리는 배 위에 서 있었다. 양복만 입고 다니던 나는 물비린내 물씬 풍기는 옷을 입은 선원이었다. 

"네 캡틴!" 


정신이 아득해지며 이야기의 끝과 함께 티비는 꺼졌다. 

*** 

내가 눈을 뜬 곳은 병원이었다, 형광등이 눈을 깨물었기에 나는 상체를 일으켰다. 

내 오른팔을 움켜쥔 이를 바라보았다. 

타지에서 일하느라 고향으로 연락만 간간히 하던 나의 어머니였다. 어느새 깊게 파인 주름과 흰머리가 눈에 띄었다.

 "...주연아 깼어?" 

느지막이 깨어난 소년에게 간밤의 안부를 묻는 다정한 어머니같았다. 

"과로래. 지하철에서 쓰러져 있었는데 한 할머니가 신고해줬다네.

요즘 야근이 잦고 잠을 잘 못 잔 연유였나 보다. 

그나저나 그것은 역시 모두 꿈이었나. 꿈일 수밖에 없던 일들의 달콤한 편린을 사탕처럼 녹여먹었다. 

이제 꿈에서 벗어났으니 나는 다시 대출과 상사의 갈등이 있는 세계로 돌아왔다. 

하지만 나는 어쩐지 이 세계를 다시 살아갈 용기가 살아났다.

 "그런데 너 기분 좋은 꿈 꿨나 봐? 자는 내내 웃고 있더라." 

그 말에 나는 내가 아는 그 누구처럼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오랜 친구를 만났거든요."

 어디선가 엔딩송이 들려올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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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YJH
  • 2024-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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