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죽어가고 있다
- 작성자 Alicja
- 작성일 2024-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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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죽어가고 있다.
한 사람이 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사람인지 과거의 망령인지 구분하기도 힘든 사람이 있다. 그는 고독 속에서 그 자신 속으로 끝없이 침잠하며 <말테의 수기> 속 말테의 말마따나 자신이 사는 현실 속에서 말라죽어가고 있었다.
말라죽어가는 과거의 망령이라니, 내가 봐도 우습다. 하지만 내가 백 년, 이백 년 전의 과거에 태어났어야 한다는 것은 적어도 나 자신에게는 자명한 사실이었다. 당장 내 책장을 봐도 현대 문학이 차지하는 비중은 10퍼센트가 채 되지 않았고 나머지 90프로를 각종 음악 서적들과 괴테, 톨스토이, 시엔키에비치 등이 사이 좋게 나눠갖고 있었다.
의자에 축 늘어져 이런 생각이나 하고 있는 내가 한심해 보인다고 이걸 읽고 있는 당신은 비판할지도 모른다. 비판해도 좋다, 비판은 당신의 자유이다. 그리고 애초에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모두 어느 정도는 한심하며 난 그 중에서도 더 한심하다고 여겨지는 부류이니까.
나는 책장을 향해 손을 뻗어 공책을 꺼내고 펜을 잡았다. 내 손에 쥐어진 펜의 펜촉에서 붉은색 잉크가 흘러나와 종이를 적셨다. 글씨를 쓰는 자신의 과업을 그 펜은 완벽히 완수해내고 있었다. 펜에서 흘러나오는 그 잉크-진짜 피도 아닌 것이-가 쓸데없이 비장하다.
21세기에 만년필을 쓰는 특이한 인간. 나는 내가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생각하려고 애를 쓰다 그만두었다. 과거의 문물을 좋아하는 것이 비난받을 일은 아니니까 말이다. 적어도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사고에 따르면. 불행하게도 그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사고라는 것은 종종 통하지 않을 때가 있다. 아니, 생각보다 아주 많다.
나는 글쓰기를 멈추고 내가 쓴 것들을 바라보았다. 의식의 흐름대로 쓴 형편없는 문장들이 어지럽게 나열되어 있었다. 이런 식으로 더 써봤자 그 어떠한 유의미한 진전도 없을 것 같아 나는 발코니로 나갔다.
자정이 거의 다 되었는데도 길에는 사람이 많았다. 어딘가로 분주하게 걸어가는 그 사람들은 모두가 비정상적으로 똑같았다. 걸어가는 방향과 걸음걸이와 차림새는 다들 조금씩 달랐지만 죽은 물고기의 것과 같은 눈을 하고 로봇처럼 걸어간다는 점에서는 같았다.
그렇다. 그들은 모두 로봇같았다. 아이러니하게도 개개인에게 역사상 가장 많은 자유가 주어졌다는 이 시대에 정작 아무도 자유롭지 않았다. 그리고 죽을 때까지 반복되는 노예와 같은 일상 속에서 아무도 자신이 자유롭지 않다는 것조차 깨닫지 못했다.
길 건너편에 교복을 입은 근처 고등학교 학생들이 보였다. 정장을 입고 컴퓨터 가방을 든 회사원들도 보였다. 열두 시 삼 분 전이었다. 끔찍했다. 한밤중인데도 고요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이 풍경이, 아니 이 풍경을 만든 세상 전체가 끔찍하리만치 혐오스러웠다. 고요와 사색과 휴식은 끔찍한 세상에 밀려 쫒겨난지 오래였다.
너무나도 마음에 들지 않는 그 풍경들을 뒤로하고 나는 다시 집 안으로 들어왔다. 그러고는 제 몸에 맞지 않는 새장에 갇힌 새가 미쳐서 자신의 깃털을 뽑아대듯 마구 엉킨 머리칼을 쥐어뜯었다. 그래, 나는 태어나면 안 되었다.
나가죽으라는 그 목소리가 점점 더 크게 들렸다. 내 목소리와 똑 닮은, 항상 쉬어 있으며 혐오스럽고 듣기 불편한 그 목소리는 여러 개로 나뉘며 나를 점점 조여왔다. 나의 목에는 수건이 감겨 있었고 내 두 손이 그 수건의 양 끝을 잡고 있었다. 그 손들이 서로 멀어짐에 따라 내 목이 점점 조여졌다. 나를 괴롭히는 그 모든 것들 속에서 알 수 없는 나른한 감정이 느껴졌다. 이제 나는 드디어 이 맞지 않는 구두같은 삶에서 벗어나는 것인가?
어느 순간 나의 양 팔의 힘이 풀렸고 내 손들은 그 수건을 떨어뜨렸다. 이 나약하고 구제불능인 모기 같은 …
나는 방으로 돌아와 피난처를 찾기 위해 헤드폰을 쓰고 음악을 틀었다. 나보다 거의 이백 년 가깝게 먼저 태어난 작곡가의 음악이 흘러나왔다. 나는 그 음악에 내 정신을 맡기며 그 아름다운 과거의 유산과 하나가 되어갔다.
오늘도 나는 내 안에서 죽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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