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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 지대

  • 작성자
  • 작성일 2024-03-28
  • 조회수 230

내가 좋아하는 플레이리스트 유튜버는 비정기적으로 영상을 업로드한다. 그 주기는 꽤 길어서 나는 그의 영상을 이제 기다리지 않는다. 다만 알림이 뜨면 그저 반가운 마음으로, 간만에 마주한 오래 전의 단짝과 손을 마주 잡는 기분으로 영상을 클릭하고 음악을 듣는다. 삼십분에서 한 시간 남짓 되는 시간 동안 나는 그가 선물한 세상 안에 깊숙이 들어간다. 취향이 섬세하게 엮여 만들어낸 뜨개 이불 같이 나의 고단한 등을 받쳐주는 음악들이다. 그 음악들은 전부 비슷한 템포로 이어진다. 검정치마의 노래 가사처럼 '같은 템포 다른 노래인' 것이다. 변함 없는 음악의 결. 나는 단조와 장조 하는 음악 용어는 알지 못하지만 그 음악들이 어떤 템포를 가지고 서로의 손을 붙잡고 있는지는 안다. 그것은 늦봄 해변 한구석에 아무도 모르게 올라온 풀포기, 한여름 저녁 석양 너머로 부는 선선한 바람, 초가을 은행들이 익어가는 무던한 풍경, 한겨울 자정녘 교회 십자가 위에 쌓이는 소복한 눈의 템포다. 

내게 음악의 템포는 삶의 템포다. 환절기 어느 날, 해가 뉘엿해지는 오후에 친구와 동네 카페에 마주 앉는다. 각자의 학교에서 일어난 크고 작은 일들을 속삭이듯이 이야기한다. 그럴 때 나는 탁자를 일정한 속도로 가볍게 두드린다. 그것은 눈앞에 놓인 식은 아메리카노의 템포이기도 그 순간 내 삶의 템포이기도 하다. 내가 듣는 음악들은 이런 삶의 템포와 나란히 걷고 뛰고, 또 종종은 넘어진다. 그리고 나는 이 질주의 속도가 맞닿는 순간 내가 듣고 있던 음악들을 모두 모아 보았다. 한 장르로 묶이기에 충분한 모임이었다. 인디 음악. 내가 사용하는 두 가지의 스트리밍 어플 중 하나는 나에게 '인디 애호가' 라는 별칭을 붙여주었다. 다른 하나는 나에게 릴렉싱 뮤직을 추천해준다. 

나는 문득 내 삶과 자주 맞닿아 있는 인디가 무슨 의미인지 궁금해졌다. 모두가 애용하는 초록색 검색 엔진은 '인디 음악'을 이렇게 정의한다. ' 타인의 자본에 종속되지 않고, 자신의 돈으로 직접 앨범을 제작하고, 홍보 역시 자신의 돈으로 하는 등 독립적으로 활동하는 뮤지션을 인디 뮤지션이라고 하고, 이들의 음악을 인디 음악이라고 한다'. 거대 자본의 도움을 받지 않는다는 것, 대중을 겨냥하지 않고 내가 바라는 것을 용감하게 한다는 것. 그러니까 인디는 작은 것, 주류와 일치하지 않고 조금 빗겨간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런 것들은 대체로 애호가들 사이에서 유달리 큰 애정을 받기 마련이다. 

독립영화 <소공녀>에는 모두가 가진 것들을 고유하게 아끼는 미소가 나온다. 가만 보면 미소는 인디의 마음으로 위스키와 담배, 남자친구를 사랑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위스키는 그냥 술의 한 종류일 뿐이고, 담배는 어디서든 구할 수 있는 기호 식품이며, 남자친구는 많은 사람들이 가지거나 가지지 못한 것이다. 그러니까 어디서든 회자되기 쉬운 이름들이라는 의미다. 그렇지만 미소의 위스키는 하루의 고된 일과 끝에 스스로를 위로하는 소박한 사치이고, 미소의 담배는 친구들과의 방탕하고 자유로웠던 시절로 돌아가게 하는 간편한 타임머신이며, 미소의 남자친구는 추운 골방에서도 웃음을 터뜨리게 하는 유일한 풍선이다. 평범해서 뻔하던 것들 앞에 이름 하나를 붙이는 것만으로도 인디를 만드는 미소. 미소는 모두가 알고 있지만 모르는 것을 포착하는 사람이다. 미소의 눈으로 보는 세상은 우리가 놓치고 지나간 풍요들로 가득하다. 

이처럼 나는 대체로 '인디'인 것들을 좋아한다. 독립영화, 인디 음악, 손님이 적은 다방, 인적이 드문 산책길, 이른 새벽의 공원, 아주 늦은 밤의 그네. 많은 사람들에게 발견되지 않는 것에는 그 덕에 생기는 솔직한 아름다움이 있다. 나는 인디의 순간과 인디의 장소들에 머물며 본래의 내가 되는 기분을 느낀다. 다른 이들과 말을 맞출 것 없이, 모든 사람들이 아는데 왜 너만 모르냐는 날선 물음을 들을 것 없이, 누구에게도 발견되지 않은 곳에서 나와 인디들은 진짜 우정을 나누다. 우리는 오늘 본 담벼락의 작은 실금에 대해서 섬뜩한 상상을 하기도 하고, 아무도 신경쓰지 않지만 나만 상처 받은 일에 대해 하소연 하기도 한다. 요조의 음악 'B.O.O.K'는 그런 나에게 '겁이 날 때까지 용기를 내'고 '죽을 때까지 살아나가자'고 이야기한다. '자도 되고 안 자'도 된다며 가장 안심이 되는 위로를 건넨다. 

정밀아는 앨범 <청파소나타> 속의 곡 '언니'에서 내가 종종 허공에 던지곤 했던 말들을 한다. 그럴 때면 나는 노래를 만들고 부르던 정밀아와 내가 빈틈없이 연결되어 있음을 발견한다. 우리는 늦은 밤, 모든 것이 허무하게 느껴질 때 하염없이 혼잣말을 내뱉던 센치하고 고약하고 유의미한 시간을 공유하고 있다. 그렇게 밀아는 음악을 만들었고 나는 글을 쓴다. 

눈앞에 너무 많은 평가들이 줄 지어 서 있을 때면 끝없는 불안이 밀려온다. 생각의 여름은 앨범 <손> 속의 곡 '불안에게'에서 내가 너무도 듣고 싶던 말을 건네준다. '일렁여야만 바다는 아니'라고 '휘청여야만 여행은 아니'라고 내 안의 흔들리믕ㄹ 서서히 잠재워준다. 분명 그는 자신이 듣고 싶던 말을 시처럼 적어 멜로디를 붙였을 것이다. 혹은 불안해 하는 누군가에게 너무도 해주고 싶었지만 차마 하지 못한 위로인지도 모른다. 나는 생각의 여름이 발견한 불안 치유법 안에서 불면을 멈추고 잠에 든다. 

내가 나의 인디를 나에게만 있고, 딱 하나 있고, 너무도 소중한 것으로 이야기했지만 사실 모두에게 인디는 있다. 나와 다르고 그들만 아는 그런 인디. 인디를 갖는다는 것은 특별하고 대단한 일처럼 보이지만 그저 나에게 유달리 커다랗게 다가오는 것이 무엇인지를 포착하기만 하면 된다. 모두가 알고 있는 것에서 내가 발견한 새로운 의미가 인디를 구성한다.

얼마 전 읽은 소설 <초록은 어디에나> 속에는 이런 문장이 나온다. '나름이라는 단어는 되뇔수록 어쩐지 용기가 생긴다.' 인디는 곧 나름이다. 나름이라는 단어에는 작은 긍지가 있다. 나만의 작은 세상, 나름대로 살겠다는 것. 그것이 모두가 짧은 삶 동안 복잡한 세상을 건강하게 살아가는 유일한 힘일 것이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나의 것을 기특해 하느라 잊을 우려가 있는 딱 한 가지를 기억해야 한다. 


모두들 각자의 인디 지대를 유별나게 사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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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과 사랑

요즘은 어떤 사랑이 마음 안에서 찰랑거린다고 느낀다. 꿈에 대해서 오래 생각하다보니 그렇게 됐다. 나는 오랫동안 영화를 만들고 싶은 사람으로 친구들에게 소개되었다. 그러다가 고등학교에 들어오고서는 더 수많은 우회로들을 찾았다. 영화하고 싶다는 말은 담임 선생님의 얼굴을 당혹으로 물들이는데 너무 충분한 일이었다. 학교 특성상 그랬다. 내가 외고에 진학하게 된 것은 하나의 발악 같은 것이었다. 나의 꿈이 의무로부터 도피하기 위한 핑곗거리에 불과하지 않다는 사실에 대한 증명이 필요했다. 그렇지만 시간이 흐르고, 십대의 마지막 해를 시작하고부터는 이대로 사는 것이 맞는지에 대한 고민이 짙어졌다. 일월의 시작부터 일기를 쓰면서, 나의 꿈을 계속 소환해냈다. 꿈을 인지하게 되면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질 것을 알고 억지로 그랬다. 어차피 늘 잔존하고 있던 것, 늘 나를 늦봄의 버드나무처럼 흔들리게 하던 것이 꿈이라서. 영화를 만들고 싶다던 포부가 진짜 꿈을 말할 수 없어서 건져낸 다듬어진 직업일 뿐이었다는 것을 나는 쭉 알고 있었다. 내가 나를 인식하던 그 순간 즈음부터, 일기를 쓰기 시작하고 나를 독대하던 그 순간부터 나는 연기를 하고 싶었다. 영화 에서 셀린은 이런 이야기를 한다. ‘내가 연기자를 말하면, 부모님은 뉴스 앵커를 말하는 식으로. 나의 꿈을 돈벌이 가능한 직업으로 바꿔 버린다’고. 나는 셀린을 보면서 내가 사랑하는 일 앞에서 어쩌다가 무정한 사람이 되었는지, 꿈 꾸는 나를 왜 부정하고 싶어했는지를 어렴풋이 알 것도 같았다. 기대에 부응하는 삶을 산다는 것, 내가 나로 존재하기보다도 그들에게 귀속된 존재로서 올바르게 기능한다는 것이 너무 중요한 문제였던 것이다. 지리멸렬한 글쓰기를 매일 두 시간씩 억지로 반복하면서 나는 처음 나를 마주하던 때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그러니까 스스로의 미성숙을 다시 끌어올려 두 눈으로 바라보는 일을 견딜 수 없어 하던 열넷 즈음으로. 언어화되는 치기들이 부끄러워 참을 수 없던 때로. 나 스스로를 잘 안다고 자부하던 나는 온데간데 없고, 그저 어리숙한 표정으로 아무것도 알 수 없어 하는 나만 있었다. 나의 진심을 자꾸 의심하고, 왜를 묻는 과정은 두 번째라고 해서 무뎌지지 않았다. 자신을 이루는 중요한 부분에 대한 혼란을 느끼는 일은 마음을 하루종일 가라앉게 하는 일이었다. 최은영은 소설 에서 성숙은 그저 우리 환경에 익숙해지는 일일 뿐인지도 모른다고 이야기한다. 나는 이 문장을 읽고 여행자의 마음을 떠올리게 됐다. 우리는 새로운 환경 앞에서 나의 미성숙한 부분을 기꺼이 마주하고자 여행을 떠나는 것이 아닌지 짐작해보기도 했다. 그런 의미에서 나의 지난 두 달은 조그만 방 안에서 아무도 모르는 여행을 떠나는 일이었다. 이름 없는 여행지와 벌이는 다정하고 날카로운 밀회였다. 내가 가진 미성숙과 독대하는 과정에서 나는 비로소 꿈을 꿈으로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는 힘을 연습할 수 있었다. 그러자 보이는 것이 있었다. 꿈이라는 것은 하는 수 없이 양가적이라는 사실 말이다. 나는 질투하면서도 동경하고, 미워하면서도 사랑

  • 2024-02-25
옹골찬 바다

지난 시월에는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다녀왔다. 바쁜 중간고사와 곧 시작될 기말고사 사이에서 가쁜 호흡을 내쉬던 우리에게는 너무도 달가운 일이었다. 모두가 한 데 모여 요란하게 보내던 삼박 사일의 일정 중에도 나는 손쉽게 고요한 아름다움 앞에 섰다. 이것은 아마도 제주도가 가진 힘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제주 공항에 내려, 늦가을 답지 않게 따뜻한 바람 앞에서 우리는 외투를 벗었다. 지난 주까지만 해도 살갗이 트도록 춥더니. 끼인 계절은 변덕스럽구나. 캐리어를 끌고 얕은 오르막을 힘차게 걸으면서 시답잖은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우리의 앞뒤로 한국과 어울리지 않고 제주와는 꼭 맞는 야자수 나무가 즐비해 있었다. 새파란 하늘과 관광객들의 대화, 줄지어 늘어선 수학여행 버스에 쉽게 들떴다.이동하는 길에는 모두가 각자의 채비를 했다. 체력을 비축하겠다고 어설픈 잠에 빠져드는 친구도 있었고, 한나절 동안 찍은 사진을 빠르게 정리하고 업로드 하는 친구도 있었다. 나는 창가에 기대어 죽 이어지는 직선 같은 풍경을 바라보았다. 분초마다 빠르게 창밖 모습이 바뀌던 길만 달리다가 매끄러운 한 폭의 그림처럼 늘어선 오름과 갈대밭, 귤밭과 산등성이를 보는 일에 생경한 행복을 느꼈다. 이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은 탁월한 음악이다. 비틀즈와 장필순, 노영심, 정밀아와 루시드폴의 음악을 들었다. 제주를 사랑하는 이들이 만든 노래에는 갈대를 흔들리게 하는, 귤을 농익게 하는 제주의 모든 숨결이 구석구석 숨어 있는 것만 같았다. 인파가 많은 곳에서도 보드라운 음악을 들으면 순식간에 사위가 잦아드는 기분이 든다. 나는 목소리가 선명하게 들리는 음악에 기대어 부풀어 오르는 마음을 느꼈다. 차를 타고 한참을 이동해 커다란 호텔에 도착했다. 가족끼리도 가본 적 없을 만큼 크고 좋은 호텔이었다. 웅장한 건물의 모양새와 빼곡한 차들에 놀라고 감탄했다. 우리의 머리 위에 있던 해가 조금씩 기울던 무렵이었다. 일몰이 하늘을 가득 채울 때 즈음 주상절리 앞에 설 수 있었다. 해와 우리의 발걸음이 완벽한 하모니를 이루는 것만 같았다. 주상절리의 가장자리를 타고 선명한 주황빛의 빛무리가 번졌다. 바다 위를 유유히 떠가는 보트인지, 낚싯배인지 모를 것은 새까맣게 실루엣만을 남겼다. 꽁무니의 햇빛은 파도의 결을 만나 새하얗게 부서졌다. 삼삼오오 사진을 찍는 친구들의 틈에 끼어 역광의 사진 몇 장을 찍었다. 바다를 등지고 웃고 있는 사진을. 입장 팻말이 붙은 곳 밖에서는 닭꼬치 같은 조악한 간식들을 팔고 있었다. 나는 주린 배를 무시하고 Y와 가벼운 산책을 나섰다. 주상절리 매표소가 나오기 전에 가파른 내리막이 하나 보이는데, 우리는 그것이 어디로 이어지는 것인지 궁금증을 참을 수 없어서 손을 꼭 붙잡고 내려갔다. 콩콩콩. 발걸음에 스피드가 붙었다. 내려간 곳에서 우리는 탄성을 질렀다. 사람이 바글바글했던 주상절리 사이트 스팟과는 다르게 한산한 바다가 펼쳐졌다. 금발에 갈색 선글라스를 끼고 민소매를 입은 외국인 하나가 병맥주를 마시며 계단참에 기대어 있을 뿐이었다. 바다 앞으로는 해변이 아니라 크고

  • 2024-02-18
K에 대해

일기장을 뒤적이다가 K 얘기를 많이 해놓은 페이지들을 읽었다. K는 나의 가장 힘든 시절을 오랫동안 수호해준 사람이다. K 덕에 내가 누리게 된 사랑이나 갖게 된 마음이 어색하고 신기하다. 그건 여전히 그렇다. 떠올려보면 나의 한 시절을 설명할 수 있는 건 그 때 내 옆에 있던 사람. 그 사람의 행보로 나 역시도 이해되는 사람 뿐이다. 구체적인 사건들보다 마음을 빚졌던 사람이 나에게 시절로, 한 때로, 유년으로 남아 있다. 하루하루 나의 얼굴 뼈가 달라지고 어제와 오늘 종종 다른 사람이 되는 때. 그 언제보다도 교차가 잦은 때. 나조차도 나를 모르겠는 마음이 커져서 나를 구성하는 모든 것들과 이별하고 싶어지는 때. 나는 이런 순간에 K를 사랑해서 아마 K를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내가 자주 떠올리게 될 나의 열일곱, 열여덟, 열아홉에 K가 있다. 아주 커다란 상흔처럼 있다. 사랑을 유보해둘 수 있다면 나는 그렇게 했을 거다. 나의 마음이 모자라다고 느껴질 때면 K에게 사랑을 느낀다는 것조차 죄책감이 들 때가 있었다. 내가 조금 더 괜찮은 사람이 될 때, 지금보다 조금만 더 성숙할 때, 어떤 마음이 잘 주는 마음이고 어떤 마음이 그렇지 않은 마음인지 알게 될 때. 그럴 때로 사랑을 미뤄두고 싶다고. 아무것도 아니겠지만 나의 마음은, 그래도 매끄러워진 사랑만 주고 싶었다. K가 가진 윤택함 사이사이로 나의 거칠거칠한 마음이 끼어드는 일을 견딜 수 없었던 것도 같다. 해본 적 없어서 껄끄러운 것이 K 앞에서 드러난다는 게 어딘가 나를 벌려놓는 것만 같았다.어느 날의 나는 내가 K를 좋아한다는 것에 참 겁이 없었던 것 같다고 썼다. 틀린 말은 하나도 없다. 원래 뭣도 모르고 피할 수 없이 시작되는 것이 대체로 마음이라는 것을 안다. 그리고 그런 것이 가장 크다는 것도. 꼭 상투적인 말에 진심을 담는 것이 가장 쉬운 것처럼 말이다. 나는 아무것도 모른 채로 마음을 시작하느라 K를 마음대로 짐작하고 좋아했다. K와 이야기를 하고 그 애를 조금 파악한 것처럼 착각하는 지금은, 그 모든 짐작 마저도 오산이었다는 것을 안다. K는 언제나 내가 생각한 것보다 유치했고 내가 생각한 것보다 더 어른 같았다. 나는 꽤 자주, 어느 어른에게서도 배우지 못했던 것을 아직 아이 같은 K에게서 배운다. 이를 테면 용서하는 법, 나를 믿는 법, 타인의 미움에서 나를 지키는 법 같은 것을. 그 당연하고도 어려운 것을.차를 타고 길을 달릴 때면 K가 연주하고 녹음한 음악을 크게 틀어두고 목소리를 겹친다. 뻔한 낭만과 고유한 호칭들로 점철된 가사 앞에서 나는 무력해진다. 그리고 속절 없이 충만해진다. 낯선 대중교통 차창에 머리를 기대고 K의 음악을 듣는다. 떨어지는 노을, 저물어 가는 빛깔, 성에로 눈에 보이는 계절. 그 옆에는 항상 K가 있다. 무너질 때도, 숨이 떨릴 때도, 아무것도 해낼 수 없을 것 같아 불안할 때도, 환상이라도 내 편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허무한 생각을 할 때도, K가 있었다. 내가 여기까지 자랐다면, 가장 위태로운 시기에 안전히 여기까지 온 것이 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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