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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자명, 「오 흐름 위에 보금자리 친」을 배달하며

  • 작성일 2023-08-03
  • 조회수 948


   나는 진눈깨비가 좋다. 눈도 비도 아닌 그것. 눈이 될 수도 비가 될 수도 있는 그것. 그때그때 대기의 상태를 봐서 자기 정체성을 결정하는 그것. 그 선택이 있을 때까지 한껏 머뭇거리며 기다리는 그것. 그래서 그 기다림 안에서 자기 시간을 숙성시켜 가는 그것.


(구자명, 「오 흐름 위에 보금자리 친」, 『건달바 지대평』, 나무와 숲, 2023, 259쪽)


소설가 이승우
구자명, 「오 흐름 위에 보금자리 친」을 배달하며
   자기 정체성이 없어서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없어서 생기는 문제보다 과해서 생기는 폐해가 더 큰 것 같다. 입장이 너무 견고해서, 과해서, 다른 입장을 용납하지 않아서 세상이 시끄럽고 무서워진 것 같다. 머뭇거리고 눈치 보고 기다리지 않아서, 자기 주장만 할 뿐 남의 이야기를 듣지 않아서 문제인 것 같다. 요즘 사람들은 그런 것을 무소신, 자존감 결여, 우유부단함으로 치부하고 꺼리는 것 같다. 정체성이 자기 스스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관계들 속에서, 타인들과의 지속적인 교류 속에서, 성찰과 배려 속에서 이루어지는 상대적인 개념이라는 것을 모르는 것 같다. 자기만 아니라 타인을 자신의 판단과 선택의 요건에 포함시켜야 하는데 그렇지 않은 것 같다. 그때그때 대기의 상태를 봐서 눈이 되거나 비가 되는 진눈깨비처럼, 머뭇거리고, 상대를 의식하고, 기다리고, 이래도 되는지, 이렇게 하면 어떻게 되는지 생각하고 헤아리는 마음이 있었으면 좋겠다. 헤아리는 마음이 사랑이라는 것을, 나의 헤아림에 의해 다른 사람이 고양되는 것처럼 다른 사람의 헤아림에 의해 내가 고양된다는 것을 알았으면 좋겠다. 기다림이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숙성시키는 과정임을 알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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