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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수영, 「파이」를 배달하며

  • 작성일 2023-08-17
  • 조회수 1,089


   미현은 『퀴즈백과』와 『일반상식대사전』을 반복해 보았다. 깊이 생각할 것 없이 단답형의 답을 외우고 확인하는 일에 기쁨을 느꼈다. 기다리는 일이 생겼다는 사실이 미현을 달라지게 했다. 식욕이 살아났고, 거실을 난장판으로 만들며 노는 아이들이 사랑스러워 울컥했다. 저녁 무렵 부엌 창가에서 서성거리는 일이 사라졌고, 남편의 벨 소리에 현관문을 활짝 열었다. 프라이팬을 꺼내다 그 뒤쪽에 감춰둔 술병을 발견했지만 조금도 마음이 가지 않았다.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윗집 여자는 눈에 띄게 달라진 미현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한수영, 「파이」, 『바질 정원에서』, 도서출판 강, 2023, 75쪽)


소설가 이승우
한수영, 「파이」를 배달하며

   기다리는 일이 생겼다는 사실이 사람을 얼마나 달라지게 하는지, 사람을 어떻게 바꾸는지 기다려본 사람은 알지. 세상이 문득 아름답게 보이고, 짜증나던 사람이 갑자기 사랑스러워지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 없게 되지. 세상이 그대로인데 다르게 보이지. 그래서 알게 되지. 내 안에 생긴 변화가 세상의 변화를 만든다는 걸. 세상이 그렇게 보였던 것은 내가 그렇게 보았기 때문이라는 걸. 세상이 이렇게 보이는 것은 이제 내가 이렇게 보기 때문이라는 걸. 기다림은 세상을 뒤집는 마술.

   기다림은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을 미리 사는 일. 그러니 현실에 안달하지 않을 수 있지. 지금 이곳의 불만이 아니라 다른 걸 보니까. 선취해서 보니까. 간절해지고 기도하게 되지. 설레고 긴장되는 일이지.

   기다린다는 건 가장 적극적인 행동. 무기력이 아니라 가장 큰 움직임. 마음의 에너지를 쓰는 일. 식욕이 생기는 건 그 때문이지. 식욕 뿐이겠는가. 모든 일에 의욕이 생기고 모든 사람에게 너그러워지지. 힘이 넘치지. 이 변화를 사람들이 못 알아볼 리 없지. 늘 보던 사람이 처음 보는 사람 보듯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그러니까 기다리는 일을 만들 것. 기다리는 사람을 만들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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