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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소설_H·O·T·E·L⑦] 순환의 법칙

  • 작성일 2015-11-03
  • 조회수 2,830


[기획소설_HㆍOㆍTㆍEㆍL ⑦]



순환의 법칙




안보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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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수상쩍은 일이었다. 미주는 행운과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그녀에게 허락된 건 고작해야 마지못해 남겨진 것들, 이를테면 커피 얼룩이 선명한 심야버스 좌석이라든가 거리에서 나눠주는 판촉용 화장품 샘플 정도가 전부였다. 자판기 아래 떨어진 백 원짜리 동전 하나 주워 본 일이 없었다. 그런 미주에게 호텔 무료숙박권이, 그것도 도심 복판에 위치한 호텔의 일주일 숙박권이 주어지다니.
수상하다, 고 생각하면서도 미주는 부산하게 손을 움직였다. 겨드랑이가 노랗게 물든 반팔티셔츠와 보풀이 일어난 니트들을 작게 접어 오른편 바닥에 쌓았다. 습기에 전 옷들은 무거웠다. 찜질방 캐비닛과 신발장에 오래 넣어 둔 탓에 옷가지마다 공업용 본드 냄새가 진득하게 붙어 있었다. 어쩌면 그것은 도운의 방에서부터 따라붙은 냄새인지도 몰랐다. 도운의 방은 찜질방만큼이나 습지고 살풍경했다. 도망칠 때 도운의 운동화와 가방도 훔쳐냈지만 운동화는 터무니없이 컸고 가방 안쪽엔 온통 좀이 슬어 있었다. 현금이 담긴 봉투만 아니었다면 비루하기 짝이 없는 장물이었다.
미주는 커다란 비닐봉투 두 장에 옷을 나눠 담기 시작했다. 식당에서 얻어 온 비닐봉투는 널판 모양으로 말린 미역이 가득 담겨 있던 것이라 가장자리가 조금씩 뜯겨 있었다. 검고 질긴 비닐에서 찝찔한 비린내가 흘러나왔다. 익숙한 냄새였다. 미주는 최근 두 달간 찜질방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았다. 그동안 먹어치운 식당 미역국만 백 그릇이 넘을 터였다.
― 호텔, 호텔이란 말이지.
울퉁불퉁해진 봉투 옆면을 쓰다듬으며 전화 내용을 곱씹었다. 미주에게 전화가 걸려온 건 오전 아홉 시 정각이었다. 상대방은 무료숙박권이 이벤트 당첨 경품이라고 설명했다. 어디서 진행된 이벤트의 몇 등 경품인지는 설명하지 않았다. 호들갑떠는 목소리를 기대한 건 아니지만 판결문을 읽는 것처럼 뚜렷하고 억양 없는 목소리가 미주를 당혹케 했다. 숙박권은 언제든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전화는 끊겼다. 장난전화인가 생각할 즈음 호텔 이름과 약도가 문자로 전송됐다. 미주는 약도를 오래도록 들여다보았다. 선불 기간이 끝나 마침 찜질방을 나가야 하는 날짜에 날아든 숙박권이라니 우연치고는 섬뜩했다.
그러나 경품이라면 불가능한 일만도 아니었다. 원체 이벤트에 대한 집착이 심한 미주였으니 응모한 곳이라면 차고 넘쳤다. 지금껏 세상에서 온당히 받아내지 못한 것들을 한꺼번에 수거하겠다는 듯 미주는 각종 복권을 사들이고 성심성의껏 설문에 응하고 응모권마다 이름과 연락처를 써넣었다. 해외여행 상품권과 경차, 온수매트, 냉동실용 플라스틱 용기 세트와 감자칩 한 봉지. 경품이 무엇이든 상관없었다. 절실했기 때문이었다.
그랬다. 절실했다. 미주는 당장 손에 쥘 수 있는 한 가지를 원했다. 단단하고 모서리가 있고, 들어 올릴 때마다 미주의 근육 다발과 인대를 빠듯하게 잡아챌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좋았다. 게다가 교활하고 뻔뻔한 인간이 되자고 결심한 참이 아닌가. 미주는 도운과 함께 만취한 채 도로를 달리던 어느 저녁을 떠올렸다. 발작하듯 울어대던 구급차의 사이렌도, 앞차를 두 대나 들이받은 뒤 퍼진 차도 그들을 막지 못했다. 미주는 다음날 새벽 보란 듯이 도운의 돈을 훔쳐 도망쳤다. 고작 두 달 전 일이었다.


*


호텔은 전송받은 약도에 표시된 대로 전철역 가까이 위치해 있었다. 대로를 따라 익숙한 간판들이 들어차 있고 팔차선 도로가 보이는 곳에서 보이지 않는 곳까지 뻗어 있었다. 남다른 높이의 관광버스가 수시로 나타나 사람들을 토해 냈는데, 짧고 두툼한 하관이 쌍둥이처럼 닮은 사람들이었다. 미주는 쇼핑몰 건물과 편의점을 지나 약도에 실금처럼 그어진 골목으로 접어들었다. 대로에서 열 발자국쯤 물러났을 뿐인데 주변이 눈에 띄게 차분해졌다. 호텔 유리벽에 반사된 햇빛이 나른한 표정으로 골목을 채웠다. 체에 걸러낸 것처럼 잘고 부드러운 빛. 자동차 경적소리조차 끼어들지 않는 우묵한 공간. 호텔 부근은 마치 그곳만 진공 속으로 접혀 들어간 것처럼 적요했다.
미주는 조심스럽게 호텔 회전문을 밀었다. 짧고 두툼한 하관을 가진 사람 서넛이 로비에 흩어져 있었다. 여행가방과 면세점 봉투들을 테이블 위와 의자 옆에 아무렇게나 부려 놓은 모습이 더없이 여유롭고 편안해 보였다. 미주는 손에 쥔 검은 비닐봉투 두 개를 등 뒤로 숨겼다. 안내데스크에 다다를 때까지 봉투들이 부딪치고 비벼지는 소리가 로비를 울렸다. 걸음마다 묵은 미역 냄새가 퍼지는 것 같았다.
― 저기, 이벤트요. 이벤트에 당첨됐다는 연락을 받았는데요. 무료숙박권을 주신다고, 그게, 이 호텔에서요.
―강미주 씨 되십니까?
매니저가 허리를 곧게 펴며 물었다. 기다렸다는 듯 이름을 댄 것치고 건조한 목소리였다. 미주는 뒤에 선 사람들이 보지 못하도록 데스크와 자신의 다리 사이에 봉투들을 끼워 넣었다. 뜯긴 자국투성이인 봉투가 찢어질까 봐 새삼 두려워졌다. 구질구질한 옷가지와 조악한 플라스틱 통에 담긴 화장품들이 대리석 바닥에 널브러지는 건 상상만으로도 끔찍했다. 신분증이 필요한가요? 미주가 빠르게 물었다. 매니저는 대꾸 없이 미주를 바라보았다. 무례하다고 느낄 만큼 곧은 시선이었다. 마른 뺨과 긴 콧날, 열기 없는 무표정한 시선이 사람이라기보다는 목각인형의 그것 같았다.
―룸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아주 특별한 곳이죠.
매니저가 얇은 종이에 싸여 있는 카드키를 내밀었다. 또박또박 눌러쓴 숫자 아래 굵은 직선이 죽 그어져 있었다. 미주는 곧바로 엘리베이터를 향해 걸었다. 뭔가 설명하려는 듯 매니저 입술이 달싹였으나 그리 적극적인 모양새는 아니었다. 궁금한 게 있다면 전화로 물어도 될 일이었다. 예를 들어 숙박이 정말 공짜인지, 세금을 포함해 미주가 부담해야 할 금액은 정말 없는지, 기간은 정확하게 일주일이 맞는지 하는 것들을.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고 온전히 혼자가 된 뒤에야 미주는 크게 숨을 내쉬었다. 아라베스크 문양이 새겨진 은색 벽면에 미주의 모습이 비쳤다. 정확하게는 미주의 윤곽선과 새까맣고 커다란 비닐봉투였지만. 7층에 도착해 복도로 발을 내딛는 순간 비닐봉투가 터지며 내용물이 쏟아졌다. 카펫이 깔린 바닥 위로 소리 없이 구르는 옷가지들을, 미주가 신경질적으로 긁어모았다.
705호는 간결한 선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희고 반듯한 침대와 간이테이블, 목재 의자와 화장대, 모든 것이 자를 대고 그은 선처럼 또렷했다. 불규칙하게 구부러지고 일그러진 선은 미주가 유일했다. 미주는 멈칫했지만 그러안은 옷가지가 툭툭 떨어지는 통에 생각을 멈추었다. 터진 봉투와 터지기 직전의 봉투를 테이블 옆과 의자 위에 부려 놓은 뒤엔 곧바로 침대로 파고들었다. 제대로 된 침구는 오랜만이었다. 미주는 확인하듯 몇 번이고 주위를 둘렀다. 적어도 이곳엔 잠든 미주를 함부로 넘어 다니는 어린애와 슬그머니 엉덩이를 붙여 오는 취객은 없을 터였다. 캐비닛 열쇠를 도둑맞지 않기 위해 손바닥에 쥐가 나도록 움켜쥐고 있을 필요도 없었다. 눈을 떴을 때 털이 부숭부숭한 누군가의 발등 대신 아늑한 빛을 뿜어내는 스탠드와 협탁 위에 놓인 은백색 라디오가 시야를 채울 것이었다. 일단은,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


……개구리 말입니다. 고백이라고 하긴 좀 우습겠습니다만, 이제 와 숨길 것도 없지요. 내 생애 최초의 악행은 개구리였습니다. 내가 어릴 때만 해도 많았거든요, 개구리가. 작은 개울이나 비온 뒤 저절로 생긴 웅덩이 같은 데 틀림없이 있었습니다. 새파랗거나 배가 빨간 개구리보다는 거무죽죽한, 엎드려 있으면 흙바닥과 잘 구분이 안 되는 것들이 많았습니다. 기껏해야 손톱만 한 크기였어요. 돌멩이처럼 흔한 개구리니, 게다가 시커멓고 미끄덩한 개구리니 신기할 것도 아끼고 싶은 마음도 없었습니다. 다들 본체만체하며 다녔죠. 개구리튀기기가 유행하기 전까지는 누구도 그것에 시선을 두지 않았습니다.


미주가 눈을 뜬 건 목소리 때문이었다. 방 안은 완만한 어둠으로 채워져 있었다. 커튼 새로 약간의 빛이 새어들었으나 그마저도 성기게 부푼 어둠의 일부처럼 보였다. 빛과 어둠의 결이 같다니 이상한 일이었다. 미주는 천천히 눈을 깜박였다. 어느 곳에나 유별난 아이가 하나씩은 있지 않습니까. 미주의 귀 바로 옆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비스듬히 몸을 세우자 파란 불빛이 점멸하는 라디오가 보였다. 시간이 되면 자동으로 켜지게끔 설정되어 있는 모양이었다. 그렇다 해도 방송은 확실히 낯선 종류의 것이었다.


한번은 그 유별난 애가 솜사탕처럼 부푼 분홍색 개구리를 들고 학교에 왔습니다. 신기했죠. 그런데 가까이서 보니 선천적인 분홍색이 아니었습니다. 개구리 살갗이 전부 터져서 뒤집어 빤 곱창처럼 울퉁불퉁해진 거였어요. 빛나는 분홍색은 밖으로 터져 나온 개구리 속살이었습니다. 계집애들은 비명을 지르며 피하고 사내애들은 개구리에 달라붙었습니다. 그 애가 자랑스럽게 말하더군요. 팔팔 끓는 물에 개구리를 던져 넣으면 순식간에 껍질을 벗고 알맹이가 튀어나온다고요. 개구리튀기기는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사내애들은 터진 개구리를 선생님 실내화 안이나 계집애들 가방 속에 집어넣었어요. 모두들 개구리 잡기에 혈안이 되었습니다. 나도 마찬가지로, 개울가를 뒤져 개구리를 잡고, 냄비에 물을 끓였지요. 주먹 안에 꽉 쥐고 있었으니 당연히 개구리가 죽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개구리는 사람 손에 닿기만 해도 화상을 입어 죽는다고, 그땐 그 속설이 진짜라고 믿었거든요. 끓는 물에 집어넣자마자 개구리가 펄쩍 튀어 오르더군요. 냄비 가장자리에 부딪쳐 도로 물속으로 떨어졌습니다만 죽을 만큼 놀랐습니다. 개구리는 금세 사지를 쫙 뻗고 죽었습니다. 검은 껍질이 터지고 살이 부풀었지만 유별난 애가 가져온 것처럼 분홍색이 되진 않았습니다. 나중에야 사내애들이 죽은 개구리 껍질을 벗겨 분홍 속살만 남긴 거라는 걸 알게 됐어요. 아무튼 제겐 하나도 재미있지 않았습니다. 죽기 직전까지 진저리치던 개구리와 부글부글 끓어오른 피부가 오랫동안 잊히지 않았습니다. 끔찍한 장면이었지요.


불쾌한 이야기였다. 미주는 서둘러 라디오를 껐다. 이전 투숙객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몰라도 악취미임에는 분명했다. 아예 설정을 바꿔 놓을 셈으로 라디오를 살폈으나 전원 버튼 외에 아무것도 달려 있지 않았다. 미주는 매끄러운 은백색 표면을 몇 번이고 더듬다 라디오를 내려놓았다.
생애 최초의 악행이라. 미주의 경우에 그것은 울음과 배변이 될 터였다. 의식적으로 한 악행은 아니었으나 결과적으론 그랬다. 미주의 부모는 유리관처럼 얇고 섬세한 신경을 가진 사람들이어서 갓 태어난 미주가 울어대는 걸 견디지 못했다. 똥 범벅이 된 미주를 욕조에 뉘어 놓고 화장실 문을 잠가버린 일도 있었다. 미주는 조부모 손에 자랐으나 특별히 부모를 원망하지 않았다. 가끔 찾아온 부모는 숨을 참느라 시뻘겋게 부푼 얼굴로, 손을 덜덜 떨며 미주의 어깨나 팔꿈치를 만져 보곤 했다. 솜사탕처럼 부푼 분홍색 개구리를 대하는 것처럼. 그래, 그들은 미주가 껍질 벗겨진 개구리라도 되는 양 손끝을 대보고는 두려움에 찬 얼굴로 곧장 물러섰다. 십 수 년 후 도운이 미주의 손을 잡아 왔을 때 미주는 도운이 아니라 자신의 손을 골똘히 살폈다. 그 순간만큼은 자신이 몹시 예쁘고 부드러운 가죽에 싸여 있는 것 같아서였다.
배가 고파 왔다. 미주는 카드키와 돈을 챙겨 일어섰다. 편의점에서 뭐라도 사올 작정이었다. 남은 비닐봉투가 기어코 찢어져 테이블 주변은 쏟아진 짐들로 엉망이었다. 미주는 그것들이 자아낸 사나운 선을 한참 바라보다 방을 나섰다. 복도는 텅 비어 있었다.


*


미주는 하루의 대부분을 잠을 자는 데 썼다. 잠에서 깨면 시간과 상관없이 냉장고에 넣어 둔 삼각김밥과 커피우유를 먹었다. 가끔 커튼을 걷고 팔차선 도로를 지그재그로 빠져나가는 자동차를 구경했다. 커다란 가방을 메거나 끌고 호텔로 들어서는 사람들 정수리를 헤아리기도 했다. 호텔을 나서는 사람은 드물었다. 골목은 여전히 아늑하고 상냥한 빛을 띠고 있었다.
별다른 일이라면 편의점에서 돌아올 때 복도를 좀 헤맨 정도였다. 당연히 7층이라 생각한 객실이 다른 층에 위치했던 것이다. 혹시나 싶어 계단을 짚어 내려갔던 미주는 6층 중앙 엘리베이터 맞은편에서 705호를 발견하고는 의아함과 안도감에 휩싸였다. 어떤 건물은 4층을 생략하고 객실 번호를 매긴다더니 이 호텔이 그런가 보다고, 미주는 쉽게 결론지었다.
도운은 어떻게 된 걸까.
미주가 테이블에 올려 둔 휴대폰을 이리저리 뒤집었다. 그날 이후 도운에게선 어떤 연락도 오지 않았다. 찜질방에서 지내는 동안 미주는 도운이 뛰어 들어와 자신을 마구 걷어찬 뒤 머리채를 끌고 나가는 꿈을 몇 번이고 꾸었다. 이제 병신처럼 당하고 살지만은 않을 거야! 운전대를 거칠게 돌리며 악을 쓰던 도운이었다. 돈 봉투를 들고 도망친 뒤 미주는 캐비닛 옷가지 틈에 휴대폰을 처박았다. 부재중 통화와 온갖 욕설 메시지를 각오하고 전원을 켠 건 보름이나 지나서였는데, 도운의 연락은 한 통도 없었다. 경찰에 잡혀간 걸까. 마지막 날의 전적을 살펴보면 그럴 법도 했다. 다급하게 울어대던 사이렌 소리가 관자놀이를 들쑤셨다. 백미러에 번쩍번쩍 비치던 붉은 빛이 꿰맨 것처럼 망막에 달라붙어 있었다.
― 나는 싱글벙글맨이야.
도운은 돈 봉투의 출처에 대해선 설명하지 않았다. 주점 노래방이었는데 미주도 도운도 선곡을 하지 않아 방 안은 부자연스러운 침묵에 짓눌려 있었다. 노래방 기계가 가끔 발작하듯 울려댔다. 도운이 봉투에서 오만 원 권 지폐를 꺼내 테이블에 길게 깔았다.
― 홀에는 매트가 깔려 있어. 아줌마랑 할머니들이 그 위에 잔뜩 모여 앉아 있지. 우리가 투입되기 전에는 팀장이 온돌매트의 효능이나 프로폴리스의 기적 같은 걸 설명해. 상품 종류라면 끝도 없이 많아, 우리는 다국적 기업이니까. 그러다 문득 싱글벙글송이 울려 퍼지면 아줌마들이 어깨를 들썩이며 박수를 쳐대. 신나는 음악이거든. 우리는 폴짝 걸음으로 뛰면서, 한껏 웃는 얼굴로 박수를 치면서 뛰어 들어가. 어린애들이 재롱잔치 하는 거 본 적 있어? 해맑게 천진난만하게 즐겁게, 그게 우리 모토야. 그런 얼굴로, 그런 표정으로 들어가야 해. 세상 더러운 꼴은 상상해 본 적도 없다는 듯이 신나게. 아줌마랑 할머니들이 앉아 있는 틈새에 우린 마구 끼어 앉아. 그러라고 일부러 의자 대신 매트를 깐 거거든. 신체 부위가 많이 닿을수록 우리에 대한 호감도와 믿음이 높아져. 아줌마 팔짱을 끼고 할머니 어깨를 마구 주무르면서 애교를 떠는 거야. 이모, 나 안 보고 싶었어? 어제는 왜 안 왔어? 누나, 지난번에 사간 원적외선 침대 효과 짱이지? 뺨이 다 보들보들해졌네, 한번 만져 봐도 돼? 앞에선 강사가 노래를 가르치거나 요가를 가르쳐. 우리는 누나 손을 조물거리고 이모 허리를 붙안아 주면서 달라붙어 있어. 명품가방을 든 사람? 보석을 주렁주렁 매단 사람? 그런 거 필요 없어. 우리가 노리는 건 외로운 사람이야. 외로운 사람한테선 쿰쿰한 입 냄새가 나. 잘못 말린 생선 냄새, 상한 청국장 냄새 같은 거. 거기 달라붙어서 아들처럼, 애인처럼 굴면 돈은 어떻게든 튀어나와. 대출을 받든 전세금을 빼든 알 게 뭐야. 싱글벙글맨은 촉매제야. 상품을 더 빨리, 더 많이 팔려는 데 사용되는 것뿐이야. 담당한 누나들의 상품구매 금액이 클수록 나한테 떨어지는 돈이 많아져. 나는 열심히 일해. 열심히 일해야 돈을 벌고, 돈을 벌어야 학자금 대출을 갚고 방 월세를 내고 냉난방비랑 건보료를 내고 식비를 버니까. 그런 최소한의 것들을 위해 이가 시릴 때까지 웃고 박수를 쳐. 열심히 일하는 게 잘못이야? 전세보증금을 빼고 사채를 써서 노숙자가 된 할머니가 내 책임이야? 딸 결혼자금을 홀랑 날리고 이혼당한 아줌마가 내 책임이야? 나는 그냥 싱글벙글맨이야. 해맑고 천진난만하고 즐거운 싱글벙글맨이야.
미주는 자신의 앞에 놓인 지폐를 돌돌 말아 양주잔에 꽂았다. 몇 개를 더 겹쳐 꽂으니 돈이라기보다 조악한 장식품처럼 보였다. 도운이 그 안에 담뱃재를 털었다. 오 년 전, 대학을 졸업할 즈음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술에 취한 미주와 도운은 서로에게 비스듬히 몸을 돌린 채 앉아 있었다. 사방이 탁 트인 포장마차였고, 불어터진 우동 대접에 경쟁하듯 담뱃재를 털어댔다. 플라스틱 테이블 위엔 상당한 금액이 찍힌 카드 영수증이 쌓여 있었다. 나는 좆밥이야. 도운은 술에 취하면 말투와 행동이 과격해지곤 했다. 씨근대며 안주 대신 영수증을 씹어 먹던 도운이 소리쳤다. 존나 좋은 대학에 다니는, 등록금 졸라 비싼 학교에 다니는 대형 좆밥이야. 상품을 먼저 내 돈으로 산 다음에 팔기만 하면 150% 수익이 난다고? 회원 다섯 명을 데려오면 관리직에 오를 수 있다고? 사기 치려고 작정한 새끼들 앞에서 내가 뭘 할 수 있었겠어? 씨발, 개좆밥인 내가 뭘 할 수 있다고 이게 전부 내 책임이라는 거야?
도운은 술에 젖어 눅눅해진 지폐들을 도로 봉투에 담았다. 오 년 전에도 메고 다녔던 백팩 안에 돈 봉투와 남은 술을 쓸어 담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미주는 양주잔에 돌돌 말려 꽂혀 있던 지폐를 꺼내 자신의 주머니에 넣었다. 주점을 나선 것은 이제 막 저녁 어스름이 깔리기 시작한 무렵이었다. 퇴근하는 사람들이 큰길가로 몰려들고 있었다. 도운은 주변을 두리번대더니 인도에 아래턱을 반 이상 올린 중형차에 시동을 걸었다.
― 웬 차야?
― 너 만나러 오는 길에.
도운이 술에 취해 반들거리는 눈으로 미주를 돌아보며 천진하게 웃었다.
― 훔쳤어.


*


구우웅, 하고 낡은 레일이 가동되는 소리가 들렸다. 바닥과 벽면이 잘게 진동했다. 어긋나기 시작한 단층에 말려든 것처럼 홧홧한 열기와 압력이 미주의 허리께를 찍어 눌렀다. 환기를 시켜야겠다고 미주는 생각했다. 객실 바깥쪽에 내건 팻말 덕분에 호텔 룸메이드는 한 번도 방문을 두드리지 않았다. 덕분에 방 안의 사물들은 정확한 위치에, 그림자도 덧붙지 않을 만큼 완고한 무게로 굳어 있었다. 두껍게 퇴적된 공기가 가까스로 몸을 일으킨 미주의 팔다리에 엉겨 붙었다.
창문을 열자 휘파람 소리를 내며 바람이 밀려 들어왔다. 동시에 라디오가 켜졌다. 잠결에 몇 번 더 들은 기억이 있었지만 내용은 흐릿했다. 라디오는 새벽에도 한낮에도 불쑥 켜졌다 꺼지곤 했다. 누군가 일부러 설정해 두었다기보다 단순한 고장인지도 몰랐다. 미주는 바람에 부풀어 얼굴에 휘감기는 커튼을 잡아 묶었다. 남자의 목소리는 이전보다 빠르고 강한 억양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는 겁니다. 내가 잘못 살았구나, 하고 말입니다. 한결같이 성실한 삶을 살아왔는데 나는 왜 여전히 가난하지, 누구도 속이지 않고 정직한 삶을 살아왔는데 나는 왜 천덕꾸러기가 되었지. 그런 의심이 들다 문득 깨닫게 되는 겁니다. 잘못 살았구나. 이 세상은 더 이상 정직하고 성실한 사람을 원하지 않는데 나 혼자 촌스럽게 그딴 걸 자랑스러워하면서 살았구나. 개구리튀기기 이후 나는 어떤 악행도 저지르지 않았습니다. 찝찝하고 비겁한 일을 멀리하며 그저 열심히 살았습니다. 평범한 학창 시절을 보내고 그럭저럭한 대학을 졸업했습니다만 취직은 할 수 없었습니다. 대기업은 독보적인 능력을 원했고 중소기업은 센스를 원했고 영세업체는 인맥을 원했습니다. 나는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어중간한 인간이었어요. 계약직으로 채용되더라도 정규직 전환은 어려웠습니다. 요령 좋고 사교적인 사람들이 자리를 얻었지요.


라디오를 끄려고 다가가던 미주가 걸음을 멈췄다. 그것은 미주의 이야기였다. 동시에 도운의 이야기이기도 했다.


엉거주춤, 갈팡질팡하는 새에 나는 너무 나이 들어 버렸습니다. 이렇다 할 경력 없이 서른이 되고 서른다섯이 되자 신입사원 채용 지원서조차 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취업 준비를 하는 동안 사기도 여러 차례 당했습니다. 취업 브로커는 대개 사기꾼이었고, 절박한 사람일수록 많은 금액을 잃었습니다. 마이너스 통장에 대출금 통장이 몇 개씩 붙고 나니 머릿속이 냉정해지더군요. 잘살아 보자, 고 결심했습니다. 정말 잘살아 보자. 그래서 나는 취업 브로커가 됐습니다. 절박한 낙오자라면 주변에 얼마든지 있었지요. 그들을 구슬려 돈을 우려내는 건 식은 죽 먹기였습니다. 나는 누구보다 그들의 심정을 잘 알았습니다. 인터넷사이트에 취업공고를 낸 뒤 전화를 걸어오는 사람들에게 내가 당했던 그대로의 수법을 썼어요. 대단한 매뉴얼도, 그럴듯한 사무실도 필요 없었습니다. 월 25만 원씩 내는 고시원 침대에 누워 근엄한 목소리를 흉내 내는 게 전부였어요. 내가 특별히 나쁜 인간이었던 게 아닙니다. 그동안 당해 온 것들을 대갚음한 것뿐이에요. 남들은 되고 나는 안 된다니 그런 게 어딨습니까. 나는 그들이 했던 그대로 했고, 또 다른 그들은 내가 한 그대로 했습니다. 세상의 순환논리를 비로소 깨달은 거죠. 실제로 나는 점점 더 잘살게 되었습니다.


도운이 심취해 있던 다단계에 제일 먼저 끌어들인 사람은 미주였다. 미주는 조부모의 적금 통장과 마지막 학기 대학 등록금과 보험담보 대출금을 다국적 기업에 쏟아 부었다. 돌려받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내가 너였어도 그랬을 거야, 어쩔 수 없었을 거야. 도운에게 그렇게 말하면서 미주는 속으로 이를 갈았다. 언젠가 기회가 오면 네게 똑같이 갚아 줄 거야, 네 믿음을 깨뜨리고 네 사랑을 짓밟고 네 돈을 전부 빼앗아 줄 거야. 오 년 뒤 미주는 정말 그렇게 했다. 돈 봉투를 훔쳐낸 뒤에도 후회라든가 미안한 감정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남자의 말마따나 그건 단순하고 명백한 ‘순환논리’일 뿐이었다.


……그런데 말입니다. 내가 이해한 대로 세상은 정말 순환하더라 이겁니다. 졸업예정자인 여대생에게 비서 면접을 보러 오라고, 신분증과 통장과 도장을 꼭 가져오라고 약속을 정해 주고 고시원을 나서던 길이었습니다. 옆방 문이 덜컥 열리더군요. 고시원 주방에서 몇 번 마주친 일이 있는 여자였습니다. 유기견처럼 비쩍 마르고 여러 감정이 뒤엉킨 눈을 하고 있었어요. 빈말로라도 예쁘다고는 할 수 없었는데 이상하게 눈이 갔습니다. 나락에 떨어진 사람들은 비슷한 냄새를 풍기거든요. 흠뻑 젖은 낙엽이 썩어 가는 냄새, 덜 익은 은행이 터지면서 풍기는 비리고 구릿한 냄새요. 여자는 다짜고짜 망치를 휘둘렀습니다. 근데 그게 참, 애들 장난감 상자에나 들었을 법한 허접한 망치였어요. 눈자위가 찢어지긴 했지만 핏방울도 제대로 안 맺힐 만큼 미미한 상처였습니다. 내 돈 내놔! 여자가 소리쳤어요. 고시원은 벽이 얇으니까, 여자는 내가 방에서 하는 통화를 전부 엿들은 상태였습니다. 여자의 돈을 뜯어낸 건 내가 아니지만 큰 의미에선 나이기도 했습니다. 임용고시 준비만 7년을 하다 뒤늦게 취업 준비를 하고 있는 여자는 세상에 대해 끔찍할 정도로 무지했어요. 나는 여자를 내 방으로 끌고 들어가 세상의 순환논리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여자는 순진했지만 머리가 나쁘지는 않았어요. 우리는 좀 더 큰 순환 속에 몸을 맡기기로 했습니다. 잘살고 싶어서요. 그거 말고 다른 이유가 뭐가 있겠습니까.


라디오는 예고 없이 꺼졌다. 더 큰 순환이라니, 둘이 손잡고 대대적인 사기꾼이라도 됐다는 건가. 아무 때나 켜지고 꺼지는 라디오도, 남자의 뜬금없는 고백도 미주로서는 달가운 일이 아니었다. 미주는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게 도운에 대한 것이라면 더더욱. 냉장고를 여니 반쯤 남은 생수 외에 아무것도 없었다. 미주는 입구가 너덜너덜해진 봉투에서 오만 원짜리 한 장을 꺼냈다. 눈에 띄게 얇아진 봉투를 보자 기분이 나빠졌다. 맥주를 좀 사오자. 고로케나 감자튀김처럼 짜고 따뜻한 것을 사는 거야. 미주는 카드키를 들고 방을 나섰다.
몇 번을 눌러도 엘리베이터 버튼에 불이 들어오지 않았다. 호텔이라면서 서비스가 엉망이네. 계단을 걸어 내려가며 미주가 투덜거렸다. 여기 며칠쯤 있었더라, 사흘? 나흘? 무료숙박 기간이 끝나면 이제 어디로 가야 하나. 찜질방이라면 지긋지긋한데. 사납게 머리를 흔들던 미주가 부자연스럽게 멈추었다. 로비였다. 계단을 따라 코너를 딱 두 번 돌았을 뿐인데 벌써 로비에 도착해 있었다. 어째서? 6개 층을 걸어 내려온 것치고 조금도 숨이 차지 않았다. 미주가 멈춰 있자 호텔 직원이 다가와 문제가 있는지 물었다.
― 방이…… 그러고 보니 전에도, 7층에 있었는데 6층에 내려와 있었고. 지금은 바로 위에…… 말이 안 된다는 건 알지만 방이, 뭔가 이상한데요.
― 아, 705호 고객님이시죠?
직원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 놀라실 것 없습니다. 방이 좀 변덕스러운 것뿐이에요.


*


미주는 목재 의자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테이블 위에서 감자튀김이 뻣뻣하게 식어 가고 있었지만 손대고 싶지 않았다. 맥주와 튀김을 사 호텔로 돌아온 미주는 7층부터 2층까지 복도를 헤매 다녔다. 705호는 어디에도 없었다. 6층 중앙엘리베이터 맞은편에는 당연하다는 듯 605호가 있었다. 카드키를 대자 요란한 경고음이 울렸다. 미주는 방문에 달린 팻말을 하나하나 확인하며 걸었다. 비닐봉투 안에 담긴 것들이 미주의 종아리를 뜨겁게 달구었다가 차게 식히길 반복했다. 2층 복도 끝까지 확인한 뒤에야 미주는 1층 안내데스크로 향했다. 제 방이 사라졌어요. 얼빠진 고백이 될 테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미주의 짐도, 얄팍한 돈 봉투도 모두 그 방 안에 있었다. 어쩌면 이건 호텔 측의 악질적인 장난일지도 몰랐다. 그렇지 않고서야 방이 사라질 리 없지 않은가.
안내데스크에는 처음의 목각인형 같던 매니저가 서 있었다. 미주가 뭔가를 묻기도 전에 매니저가 팔을 들어 왼편을 가리켰다. 반사적으로 시선을 돌리자 계단 옆에 바짝 붙은 방문이 보였다. 처음보다 3분의 1쯤 줄어든 크기의, 투박한 갈색 나무문이었다. 705호. 팻말에는 분명 그렇게 적혀 있었다.
― 이건 무슨 장난인가요? 제가 외출할 때마다 팻말을 바꿔 다는 건가요?
― 그럴 리가요.
― 아무리 공짜라지만 고객을 조롱하는 것도 아니고. 혹시 방이 모자라나요? 그래서 제 방을 창고랑 바꿔 놓은 건가요?
― 아닙니다. 저건 틀림없이 고객님의 방입니다. 705호요. 다만,
― 다만?
― 방이 좀 움직이는 것뿐입니다. 이를테면, 순환이지요.
미주는 미지근해진 맥주를 따 한 모금 마셨다. 호텔 직원들이 단체로 미쳤거나, 미주를 바보 취급하면서 놀리고 있거나 둘 중 하나였다. 필시 방이 모자란 거겠지. 비싼 방을 내주고 나니 아까웠던 거야. 몰래 방을 바꿔 놓고는 순환이니 어쩌니 헛소리를 해대다니. 빠르게 맥주를 마시고 새로운 캔을 땄다. 바보 취급이라면 얼마든지 당해 왔으니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미주는 서른 명의 직원과 똑같이 오전 8시부터 오후 7시까지 일한 뒤 다른 스물아홉 명의 직원보다 30% 적은 월급을 받았다. 놀랄 것 없어, 계약직은 원래 그렇게 받는 거야. 미주가 야근 수당도, 휴일 수당도, 복지 수당도 받지 못했다는 걸 깨달았을 때도 사람들은 똑같이 말했다. 조직이란 게 원래 이렇게 순환되는 거야. 알 만한 사람이 왜 그래?
이후에 취직한 회사들도 모두 똑같았다. 도운을 다시 만난 건 미주가 일곱 번째 회사에 사직서를 낸 뒤였다. 다단계 사건이 있은 뒤 흔적도 찾을 수 없었던 도운이었다. 대학 내에는 미주 외에도 도운에게 휘말려 돈을 뜯긴 동기와 선후배가 일곱이나 되었다. 도운은 오 년 전 일은 기억에도 없다는 듯 해맑게 웃으며 미주에게 말했다. 나는 싱글벙글맨이야.


……아이가 생긴 뒤에 여자는 말했습니다. 똑바로 살아야 하지 않을까요, 아이를 위해서라도. 나는 솔직히, 웃겼습니다. 똑바로, 올바르게라는 말은 국어사전에나 있는 겁니다. 현대 사회에선 이미 지워진 말이다 이겁니다. 순환을 아무리 설명해 줘도 여자는 미련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언젠가 벌을 받게 될 거예요. 당신 말대로 세상이 순환한다면, 내가 당신을 발견한 것처럼 누군가 당신의 악행을 발견하겠지요. 여자에게 화를 낼 기분은 들지 않았습니다. 자신 있었으니까요. 그즈음에 나는 발견한 겁니다. 순환의 고리가 일그러져 있다는 사실을요. 돈이 돈을 쫓는 것처럼 가난은 가난을 쫓습니다. 보이스피싱에 당한 사람은 취업 사기에도 당하고 다단계 사기에도 당하고 투자 사기에도 당합니다. 오로지 마이너스로 순환되는 인간들이 존재한다는 겁니다. 반대로 플러스로만 순환되는 인간들이 있지요. 소위 금 수저를 물고 태어나는 인간들 말입니다. 나는 뒤늦게, 순전히 노력으로만 플러스 궤도에 오른 참이었습니다. 절대 내려오고 싶지 않았어요. 올바른 순환이란 건 말입니다, 무한히 마이너스 궤도를 돌고 있는 사람을 내 옆에 붙여 두면 완성되는 겁니다. 그럼 나는 끝없이 플러스 궤도를 돌게 되죠. 여자는 내 말을 궤변이라고 했지만 내가 이뤄낸 결과까지 무시하진 못했습니다. 나는 점점 더 잘살고, 점점 더 부자가 되고 있었으니까요.


지긋지긋한 말이라고, 미주는 생각했다. 대체 뭐길래 모든 사람들이 순환 순환 하는 걸까. 두 번째, 세 번째 맥주 캔을 따는 사이 손끝이 점점 무거워졌다. 라디오를 끄려는 생각도 않은 채 미주는 침대로 옮겨가 누웠다. 희고 깨끗한, 푹신하진 않지만 잘 마른 침구가 미주의 몸에 닿았다. 룸메이드가 다녀간 건지 방 안은 처음처럼 반듯하고 간결한 선으로 되돌아가 있었다.


여자의 말을 들었다면 뭔가 달라졌을까요. 최소한 이런 지리멸렬한 고백을 할 필요는 없었을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자주 주거지를 옮겼습니다. 한동안 여자는 나를 따라다녔습니다만 아이가 유치원에 입학한 뒤부터는 한 곳에 정착했습니다. 친정부모가 살고 있는 작은 동네였어요. 나는 성공한 사위, 출장이 잦은 바쁜 사위 그런 역할을 이어 갔습니다. 남쪽 도시의 작은 인쇄소 하나가 망했고 철물점 하나가 사라졌습니다만 흔한 일이었어요. 여자와 아이를 만나러 가는 내 뒤를 철물점 주인이 쫓고 있다는 걸 나는 몰랐습니다. 장모인가 장인의 생일이었고, 여자와 아이는 대문 앞에 나와 나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차에서 내려 그들에게 걸어가는데 누군가 뒤에서 내 돈 내놔! 하고 소리쳤습니다. 언젠가의 여자가 했던 것과 똑같은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철물점 주인이 들고 있는 건 장난감 망치 같은 게 아니라 염산병이었고, 나도 모르게…… 몸을 피했습니다. 몇 번이고 비슷한 상황이 있어 왔고, 나는 순발력이 좋은 편이었으니까요. 그런데 내 앞엔 다섯 살배기 아이가 있었습니다…….


― 훔친 차라고? 진심이야?
― 아까 널 만나기 전에 말이지. 도로 복판에 이걸 세워 놓고 웬 아줌마가 슈퍼로 쑥 들어가 버리잖아. 개념 챙기라는 의미에서 내가 몰고 왔지.
도운의 운전은 서툴고 거칠었다. 차가 그릉그릉 발작하듯 차체를 흔들며 도로 위를 달렸다. 훔친 차에 만취 운전자라니, 어이가 없으면서도 한편으론 유쾌했다. 옆 차선에는 반듯한 차림새에 거뭇하게 시든 얼굴의 운전자들이 달리고 있었다. 필시 저들에게는 직장이 있겠지. 할부금과 보험금을 꼬박꼬박 내고 있는 차로 얌전히 차선을 지키며 퇴근하는 길이겠지. 내일이 되면 고통스러운 얼굴로 출근하겠지만 그럼에도 때가 되면 월급을 받고 세금을 내겠지, 최소한 아직 버틸 만한 회사에서 아직 사표 같은 건 내지 않은 상태로. 미주가 잔뜩 얼굴을 찌푸렸다. 도운이 사납게 액셀을 밟으며 중얼거렸다. 병신 취급당하는 건 이제 지긋지긋해.
사이렌 소리가 끼어든 건 그때였다. 경찰차인 줄 알고 바짝 굳었던 도운은 번쩍이는 붉은 빛이 구급차 사이렌이라는 걸 깨닫고 비루하게 웃어 보였다. 퇴근시간이라 4차선 도로에 차들이 가득했다. 구급차는 도운의 차 바로 뒤에서 사이렌을 울려대고 있었다. 양옆 차들이 움찔대며 바퀴를 틀었으나 쉽사리 틈이 나지 않았다.
― 너 아냐? 저런 거 다 개뻥이다. 길 막히니까 빨리 가려고 꼼수 피우는 거야, 요령 좋고 양심에 털 난 개새끼들이. 언젠가 인터넷에서 봤는데 사이렌 울리며 튀는 앰뷸런스 대부분이 빈 차라더라. 저 새끼도 그러는 거야, 날 호구로 보고, 날 좆밥으로 보고, 씨발.
도운이 핸들을 이리저리 틀어 구급차 앞을 막았다. 오른편 차가 속도를 줄여 틈을 내주면 얼른 거기로 차머리를 들이밀었다. 왼편에 틈이 나면 또 그리로, 구급차가 차선을 바꾸려 할 때마다 앞을 가로막았다. 구급차 운전자가 창밖으로 머리를 내밀고 뭐라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도운은 술기운에 붉어진 눈으로 킬킬 웃었다.
― 쇼하고 있네. 난 이제 아무한테도 안 속아. 지금껏 날 속여먹고 병신 취급한 새끼들한테 전부 똑같이 갚아 주면서 살 거야.
급기야 옆 차선 차들이 창문을 열고 소리치기 시작했다. 미주는 슬그머니 얼굴을 가렸지만 도운을 말리진 않았다. 미주의 시선은 오로지 뒷좌석에 놓인 도운의 검은 백팩에 머물러 있었다. 오만 원짜리가 빼곡히 차 있던 돈 봉투. 그거라면 오 년 전 도운에게 사기 당했던 돈의 일부는 될 것이었다. 너는 너대로 잘살면 돼. 나는, 나대로 갚아 줄 테니까. 굉음과 함께 도운의 차가 앞차를 들이받았다. 당황한 도운이 크게 핸들을 돌리자 옆 차를 다시 한 번 들이받으며 차가 멈췄다. 사이렌 소리와 백미러에 들어찬 번쩍번쩍한 붉은 빛이 절규처럼 울려 퍼졌다.
― 도망치자.
도운이 뒷좌석에서 백팩을 잡아채며 말했다.
― 어차피 훔친 차야, 아무도 몰라. 튀자.
도운은 차 문을 활짝 열어 놓은 채 도로를 가로질러 뛰기 시작했다. 엉망으로 뒤엉킨 차들이 도로를 꽉 메운 채 멈췄다. 미주는 도운의 뒤를 따라 뛰었다. 오로지 검은 백팩에만 집중해 다리를 움직였다. 사이렌 소리와, 사람들이 퍼붓는 비난의 소리는 깨끗이 무시했다. 지금의 이 모든 상황은 도운 때문이었다. 미주의 책임은 단 한 톨도 없었다.


……차들이 엉망으로 뒤엉킨 도로에서…… 구급차는 꼼짝할 수 없었습니다. 나는 아이를 안아 주지도 못했습니다, 살갗이 전부 녹고 터져서…… 어린 시절 분홍색 개구리처럼 내 아이는, 부글부글 끓어오른 피부 때문에 진저리를 치면서…… 끔찍한 비명을 질러댔습니다. 나는…… 멈춰 있는 차 안에서 그 모든 걸 지켜봐야만 했습니다. 내 아이는 제대로 된 치료도 받지 못한 채 도로 위에서 죽었습니다.


미주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구우웅, 하고 방이 깊이 가라앉는 소리가 들려왔다. 거대한 압력이 미주의 몸을 터뜨릴 것처럼 짓눌러 왔다. 방 안은 여전히 차갑고 명백한 선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남자의 목소리는 자주 끊기고 톤이 낮아져 헐떡이는 신음소리처럼 들렸다. 폐가 터질 것처럼 저려 왔다. 미주는 문을 향해 기다시피 움직였다. 남자의 목소리에서, 이 이상한 방에서 그만 벗어나고 싶었다. 시선 끝에 돈 봉투가 닿자 숨이 막혀 왔다.


남의 탓을 하려는 게 아닙니다. 내 아이가 그렇게 죽어버린 건 나 때문입니다. 내 순환궤도에 말려든 탓입니다. 플러스로 돌리느라 내가 억지로 비틀고 짜깁기한 궤도가 나를 씹어 먹는 대신 내 아이를…… 여자는 망치를 휘둘렀습니다. 내 아이 내놔! 이번에는 진짜 망치였습니다. 나는 광대뼈가 주저앉았고 여자는 손가락뼈가 부러졌습니다. 내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여자에게 아이를 내줄 수만 있다면…… 나는 이제 압니다. 이게 얼마나 끔찍한 순환인지 말입니다. 그리고 이제…… 당신도 알 겁니다. 당신도…….


방이 끝없이 가라앉았다. 그건 감각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미주가 목 언저리를 긁을 때마다 깊고 질긴 상흔이 남았다. 도운은 어떻게 되었을까. 왜 아무런 연락도 오지 않는 걸까. 처음보다 훨씬 작아진 갈색 나무문이 저쯤 놓여 있었다. 그러나 문을 연다 해도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을 것임을, 결코 도망칠 수 없을 것임을 미주는 깨달았다. 부풀어 오른 어둠 속으로 명료한 선과 거칠게 구겨진 선이 마구 뒤섞였다. 방은 끝없이, 끝없이 가라앉고 있었다. 그저 순환일 뿐이었다.



작가소개 / 안보윤(소설가)

- 1981년 인천에서 태어났다. 명지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했다, 동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석사과정을 수료했다. 2005년 『악어떼가 나왔다』로 제10회 문학동네작가상을 수상하며 등단했고, 2009년 『오즈의 닥터』로 제1회 자음과모음문학상을 수상했다. 그 밖에 장편소설 『사소한 문제들』(2011), 『우선멈춤』(2012)을 펴냈다.


《문장웹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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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리자
  • 2024-05-01
야생 식물원

야생 식물원 하가람 식물원으로 가는 길이었다. 다이아몬드 모양의 철골로 둘러싸인 거대한 유리 온실에는 열대와 지중해 지역에서 볼 수 있는 이국적인 식물이 자란다고 했다. 한 달 전 나는 식물원 근처에 있는 여러 호텔을 찾아 은규에게 링크를 보냈다. 보통 때의 그라면 어디든 좋다고 했을 것이다. 레스토랑도, 카페도, 동네의 작은 아이스크림 가게조차도 모조리 내 선택에 맡기곤 했으니까. 하지만 그날 은규는 이미 예약한 곳이 있다고 하여 나를 놀라게 했다. 은규가 보내 준 링크를 열어 보았다. 넓은 통유리 창 너머로 식물원과 공원이 내다보이는 스위트룸이었다. 나는 조금 들뜬 채 답장했다. — 우리가 만난 지 곧 1년이래. 믿어져? 1년이라는 시간은 내게 유별났고 은규에게는 별다른 감흥이 없는 것이었다. 그가 전에 사귄 여자친구는 단 두 명인데 각각 4년, 5년을 만났다고 했다. 매번 석 달도 채 넘기지 못하는 나와는 달랐다. 이따금 은규에게 이전 연인들에 대해 물었다. 그들이 어떤 성향의 사람이었고 어떤 외양을 가졌는지 궁금했다. 처음에는 응응, 하며 대꾸해 주던 은규는 내가 그녀들의 음악 취향이나 살던 동네처럼 구체적인 정보까지 캐묻자 태도를 바꾸었다. 기억 안 나. 그는 말했다. 다 옛날이야기라고. 그 후로는 이전에 나눈 대화를 떠올리며 그녀들을 생각했다. 눈, 손톱, 말투, 그리고 신발. 나와 닮았을지, 닮았다면 얼마나 닮았고 다르다면 무엇이 다를지도. 상상을 이어 가다 보면 늘 한 가지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은규는 한 번도 애인과 잠자리를 가진 적이 없다고 했다. 그러니까 여자와 밤을 보내는 일이 오늘 그에게는 처음이었다. 서른을 넘긴 남성에게서 보기 드문 경우였지만 그가 처음인 게 좋았다. 그 점이 무엇보다도 나와 그녀들을 구분 지어 주는 것만 같았다. 차창에 머리를 기대었다. 햇볕에 데워진 창문에서 온기가 느껴졌다. 인터넷으로 보았던 화려한 꽃과 기다란 나무들을 떠올렸다. 노랗고 푸르고 분홍빛이 맴도는 공간을. 여름 휴가철이었고 도로는 차들로 빽빽했다. 졸음 껌을 씹는 은규를 보며 말했다. “오늘은 내가 운전하고 싶었는데.” “다음에. 너 힘들어.” 은규가 말했지만 나는 안다. 다음에도 그다음에도 그는 내게 차를 맡기지 않을 것이다. “보면 놀랄걸? 너무 잘해서?” 나는 허리를 세운 채 한 손으로 반원을 그려 보았다. 휙휙. 입으로 소리 내며 운전대를 쥔 그를 따라 했다. 그가 웃었다. 머릿속으로 주행하기. 그것은 나만의 놀이였다. 캠퍼스 변두리에 있는 H관 1층, 5평 남짓한 주차관리실에서 상상력을 충족시켜 줄 만한 것은 많지 않았다. 먼지 쌓인 커피믹스와 낡은 소파, 책상 위에 시간별로 놓여 있는 분홍색, 파란색, 노란색 주차권들. 지겨운 서류, 서류, 서류. 드물게 실장이 자리를 지키는 날이 아니면 대체로 혼자 그곳에서 일했다. 사람들이 찾아와 주차권을 사거나 정기 등록을 마친 후 돌아가면 나는 모니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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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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