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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작가들의 樂취미들] 하마라니 실례예요

  • 작성일 2015-12-01

 

[젊은작가의 樂취미들]

 

 


하마라니 실례예요

 

 

 

조우리

 

 

 

 

    나의 가치평가 기준 중 하나는 귀여움이다. 나에게 귀여움은 절대적으로 옳다. 나는 귀여움이 세상을 구원할 거라고 믿는다. 부조리 앞에서 무력한 자신을 깨닫고 자괴감에 빠질 때, 해야만 하는 일을 기어코 미루고야 마는 스스로의 한심함에 웃음도 안 나올 때, 잠들지 못하는 밤 불규칙적으로 뒤척이며 어떤 날 연인이 했던 말을 낱낱이 되새길 때, 나는 귀여움으로부터 위로 받는다. 이 귀여움은 사전적 정의대로 예쁘고 곱고 사랑스러운 상태를 말하기도 하지만 또 그것들과 완벽히 대응되는 것은 아니다. 귀여움은 귀여움이다. 도저히 견딜 수 없어 ‘귀여워!’라고 외칠 수밖에 없게 하는 것.
    내가 몇 년째 ‘귀여워!’라고 외치며 찬양하고 있는 것은 무민이다. 하얗고 통통한 몸에 어쩐지 뚱한 얼굴을 한 이 캐릭터는 핀란드의 작가 토베 얀손이 쓰고 그린 ‘무민 시리즈’의 주인공이다. 모험을 좋아하는 아빠와 정원 꾸미기를 즐기는 엄마, 낭만적인 사랑을 꿈꾸는 여자 친구와 함께 무민 골짜기에서 살고 있는데 생김새 때문에 하마로 오해를 받지만 실제로는 핀란드의 전설 속 트롤이다. 그중 주인공인 무민은 통통하고 수줍음 많은 귀염둥이로 호기심도 많고 가끔 용기도 내는데 대체로 눈치가 없고 금세 불타오르고 빨리 식는다.
    요즘 나는 좀 기쁘다. 무민이, 정확히는 무민의 귀여움이 드디어 한국에도 널리 알려지고 있기 때문이다. 1939년에 탄생한 캐릭터를 나만 알고 있던 비밀처럼 여기는 건 아니고, 필요한 물건을 고를 때 선택지에 무민 캐릭터 상품을 넣을 수 있는 일이 늘어나서 기쁠 따름이다. 소설에서 시작해 신문 만화로 알려진 ‘무민 시리즈’는 핀란드는 물론 전 세계에서 사랑 받으며 애니메이션, 인형극, 오페라 등 다채로운 장르로 재현되고 재창작되었다. 한국에서는 마치 새로이 등장한 캐릭터처럼 여겨지고 있지만 귀여움계에서는 원로라고 할 수 있다. 특히 귀여움을 발굴하고 개발하는 것에 특출한 감각이 있는 일본에서는 이미 익숙하게 귀여움을 받아 왔다.
    내가 무민을 알게 된 것도 그 덕분이다. 2008년의 어느 날, 무심히 인터넷 서핑을 하던 나는 일본에서 유학 생활을 하는 사람의 블로그를 보았다. 그 유학생은 일본 편의점의 방대한 종류를 가진 도시락에 열광하고 있었는데, 각각의 도시락에 대한 맛을 기록하면서 편의점에서 일정 금액을 구매할 때마다 받을 수 있는 스티커를 모으면 선물을 받을 수 있다고 했다. 그가 여덟 개의 도시락을 먹고 받은 스티커를 모아 교환한 선물은 무민 머그컵이었다. 통통한 볼에 한쪽 손가락을 대고, 얌전히 앉아 있는 무민. 아마 나는 그 전에도 어딘가에서 무민을, 혹은 무민 시리즈의 캐릭터 중 하나를 본 적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나에게로 와 꽃이 되었다는, 거부할 수 없이 상황에 적확한 시구대로 블로그 주인이 적은 무민의 일본식 발음, ‘무밍’이란 두 글자는 나를 사로잡았다. 무밍, 헉, 귀여워.
    그때는 무밍이 일본의 캐릭터인 줄 알고 있었고, 때문에 일본을 여행한다는 사람을 만나면 무밍을 요구했다. 그렇게 무밍 티스푼이, 스티커가, 열쇠고리가 생겼다. 무밍이 사실 무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모자를 쓴 무민은 무민파파라는 걸, 앞치마를 한 무민은 무민마마라는 걸, 앞머리를 기른 무민은 스노크 메이든이라는 걸 알았다. 이름을 알게 되니 그들의 이야기가 궁금해졌고 저마다의 사연을 알게 되었을 때는 이미 멈출 수가 없었다. 어느새 내 주변은 온통 무민이었고, 그럼에도 무민이 항상 모자랐다!
    무민은 겁이 많지만 용기를 내야 할 때가 있다는 걸 알았다. 눈치가 좀 없지만 솔직했다. 실수를 하고 나면 반성했고 문제를 만나면 고민했다. 얼굴과 몸은 하얗고 통통했고 짧은 팔다리와 쫑긋한 귀, 꼬리를 하고서 부지런히 뛰어다녔다. 언제나 모험을 떠날 준비가 되어 있는 무민파파, ‘말 못 하는 동물들을 측은히 여기는 모임’의 회원인 무민마마, 자신이 결국은 행복한 이야기의 유일한 히로인일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스노크 메이든. 그리고 이들과 함께 살아가는 다양한 친구들. 그들이 모여 살고 있는 평화로운 무민 골짜기에는 심지어 조상님들이 함께하고 있었다. 그 모두가 알면 알수록 너무 귀여웠다.
    무언가를 사야 할 때는 검색창에 무민을 입력했다. 무민 에코백, 무민 도시락, 무민 손수건, 무민 다이어리, 무민 달력…… 가방을 열면 언제든 무민 캐릭터 상품을 꺼낼 수 있었다. 침대 위에는 무민 인형이 놓였고, 책장엔 무민 책이 꽂혔다. 벽에 걸린 무민, 머리 위에 무민, 발밑에도 무민…… 무민 양말을 신고 무민 컵을 썼다. 생일선물로는 당연히 무민 캐릭터 상품을 받았다. 나의 꿈은 무민의 나라 핀란드에 가서 무민 골짜기를 똑같이 만들었다는 테마파크에서 뮤지컬 공연을 보는 것이다. 그 전에 일본에 있다는 무민 캐릭터 상품 가게와 홍콩에 있다는 무민 카페에도 가야 한다. 어째서 이 모든 귀여움이 한국에는 없단 말인가. 한국인들이여, 좀 더 분발해서 무민을 사랑해 주세요.
    여기까지 해놓고 이런 말은 조금 머쓱하지만, 내가 제일의 무민쟁이라거나 뭐 그런 건 아니다. 말했듯이 탄생 이후 76년이 흐르는 동안 이 캐릭터에게 열광한 팬들이 한둘이었겠나. 하지만 적어도 ‘이 구역에서 무민이라면 나지’ 정도의 상태로 살고 있다. 무민의 귀여움이 각종 콜라보레이션을 통해 슬쩍슬쩍 비치더니 드디어 한국의 어떤 기업이 라이선스 계약을 체결한 모양으로 한글로 ‘무민’이라 박힌 각종 캐릭터 상품이 속속 출시되고 있는데, 나는 그 소식을 굳이 찾지 않아도 다 알 수 있다. “네가 좋아하는 걔 뭐가 나왔더라” 혹은 더 간단하게 “이것 좀 봐”라며 나에게 알려주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물론 대부분 내가 알고 있던 것들이지만, 지난 시간 유난과 극성의 소중한 결실이라 생각한다.
    얼마 전 답답한 동네에서 잠깐 일할 일이 있었다. 같은 사무실을 쓰는 사람이 나에게 물었다. “우리 씨, 우리 씨는 그 캐릭터가 자기랑 닮아서 좋아하는 거예요?” 이럴 수가. 사랑하면 닮는다더니. 결국 나는 무민을 닮아버리기까지 한 모양이다. 아닌가, 사실은 닮아서 끌렸던 걸까. 무민을 바탕화면에 띄운 채, 무민 손수건을 만지작거리면서 나는 조금 고민했다. 내가 대답이 없자 그는 “아니, 우리 씨가 하마 같다는 건 아니고” 하고 덧붙였는데 나는 그 말만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하마라니, 실례예요. 무민 트롤이거든요!”

 

조우리-본문

 

 

작가소개 / 조우리(소설가)

- 1987년생. 서울 출생.

 

   《문장웹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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