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안개와 잡담-사운드에세이0

  • 작성일 2017-11-01
  • 조회수 2,914

[단편소설]



안개와 잡담

-사운드에세이0



김태용







11932년에 만일 내가 여전히 살아 있다면
나는 십만 살이 될 것이다
- 백남준


오 조약돌이여 그렇지 않은가
- 프랑시스 퐁주



서사평형 상태를 유지할 것.
우리가 무엇을 쓸 때 무엇을 쓰지 않을 수 있을까.
음악 같은 이야기가 있다. 음악 같은 이야기는 음악과 같은 이야기가 될 수 없고 음악과 같아지는 이야기로만 가능하다. 음악과 같아지는 이야기를 쓰기 위해 나는 음악 속에 빠져 있다. 음악 쪽으로 몸이 기울어지고 있다.
머리에 연결된 초감도 자극기를 통해 음악이 몇 겹의 막처럼 흘러내린다고 상상해 보자. 경미한 두통이 토성의 고리처럼 머리 껍질의 안과 밖을 넘나들며 돌아가고 있다. 불투명한 음악의 막에 덮인 채 굴곡이 고르지 못한 레코드판 머리가 되어 앞뒤를 구분하지 못하고 움직이는 순간도 있을 것이다. 음악이라기보다는 미약하게 이어지는 소리의 늘어짐 같기도 하다. 어떤 소리들은 음악을 불러온다. 음악적 상황을 보여준다. 음악적 상황은 사운드에세이를 찾는 모험을 떠나게 만든다.
음악의 서툰 날갯짓 사이로 다른 음악이 들려오고 있다. 다른 음악은 무엇일까.
음악 이후의 음악.
음악을 유혹하는 음악.
음악을 증오하는 음악.
음악을 마주보는 음악.
음악을 깨뜨리는 음악.
음악 이전의 음악.
전기 올빼미 장존삽을 위한 반음 빠른 장송곡, 이라고 이름 붙일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더 멀리서 들려오는 더 작은 음악으로 가볍게 갈아탄다. 음악이 나를 우리에게 데려다준다. 음악이 어디에서 들려오는지 알 수 없었다.
음악의 바깥으로 나가자.
너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우리는 그날 오솔길을 따라 음악의 반대편으로 걷고 있었다. 음악의 반대편은 어디인가. 우리는 음악의 반대편이 어느 방향인지 알지 못했지만 음악의 반대편으로 걷고 있다고 서로의 생각을 읽으며 걸었다. 우리는 서로의 생각을 잘못 읽고 있었는지도 모르고, 음악의 반대편을 찾기 위해서는 우리의 공간이 두 번 정도 휘어져야 한다. 오솔길은 자주 끊겼고 드물게 몇 갈래로 이어져 있었다. 오솔길을 감싸고 있는 전자기장이 우리의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끌어당겼다. 우리는 그것을 어떤 계시 혹은 신호로 받아들였다.
길을 잃기 좋은 날씨이다. 음악이 들려오지 않을 때까지 계속 걷자.
너는 그렇게 말했고 나는 그러자, 라고 대답했다.
우리의 머리 위로 해와 달이 동시에 떠 있었다. 해와 달이 지구를 위해 원자 볼레로를 추고 있다고 믿었던 시대를 기억하자고 우리는 함께 걸었다. 1초에 1/24 걸음씩 이동했다. 그렇게 우리는 오솔길의 프레임을 넓혀 가며 해와 달의 빛을 흡수했다. 빛은 전기에너지 변환을 겪은 뒤 우리의 몸 안에서 반고리관 튜브 모양의 음표들로 떠다니며 다차원의 파장을 일으켰다.
수학과 논리학의 수고로움을 포기한 우리는 그것을 쉽게 검은 태양의 춤이라고 말했고, 크툴루 신화 속에서 배를 타고 떠난 선원들은 기하학 분노로 무너지는 산비탈의 파도교향곡이라고 전했다. 공포 앞에서는 사변수사학의 대가가 되거나 광기의 시인이 될 수 있다. 심란한 어린 시절을 겪은 사람일수록 더욱 그렇다. 그러나 우리를 이끄는 것은 공포의 훈연향이 아니었다.
우리 앞에는 오솔길이 있었다. 오솔길 끝에는 무엇이 있는가. 음악의 반대편. 음악의 바깥. 우리가 잘못 읽고 있는 서로의 생각이 그려내는 무수한 패턴과 무늬의 음향들. 우리가 발견해야만 하는 장소. 우리가 발견한 장소는 망각 속에서 다시 재발견되어야 한다.
장소의 이름. 어떤 장소는 말하거나 쓸 수 없다. 말하려고 하면 우리의 혀는 안으로 말려 들어가고 쓰려고 하면 우리의 손끝은 지문의 주름을 따라 갈라진다. 우리의 언어 재현 능력은 제로의 수치로 떨어진다. 그렇게 장소는 우리의 비언어적 기억에 머물게 된다. 우리가 수은의 침묵에 빠져 허둥대는 사이 장소는 우리를 떠나 사라지게 된다.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계속해서 사라지면서 나타나게 된다. 사라짐과 나타남이 중첩되어 우리의 시각기억중추를 어지럽힌다.
우리가 이야기할 수 있는 장소는 우리가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장소뿐이다. 우리가 떠난 것이 아니고 우리가 도착한 것이 아니고 장소가 우리를 떠나고 우리에게 도착했다. 우리는 언제나 여기 머물러 있었다. 머물러 있으면서 계속 떠나 떠돌아다니고 있다고 믿었다. 장소를 발견하며 장소를 지우며. 우리는 그렇게 장소를, 장소의 이름을, 미지의 영역에 놓아두고 초콜릿을 싸고 있는 은박지처럼 살짝 구겨 보거나 몰래 찢어 보는 것이다.
손가락 마디마디를 옭아매는 공기의 흐름들.
무릎이 안으로 접혔다가 펴지는 소리들.
그날의 기억은 악보의 코다처럼 이어진다. 끝없이 코다만 지속되는 음악이 있다. 그 음악을 어떻게 들을 수 있을까. 어떻게 기록할 수 있을까. 어떻게 다시 읽고 다시 연주하고 영원히 듣지 않을 수 있을까.
아모르푸딩에 빠져 바벨의 음악을 꿈꾸며 서로의 귀를 맞대고 잠드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의 잠을 잠시 빌려 공간을 확장하고 시간을 압축하면 또 다른 이야기의 껍질이 떨어진다. 속이 빈 열매 같은 이야기의 껍질을 맨발로 밟아 자연의 리듬을 만들며 걸어가는 몽유병자가 꿈의 벽에 부딪히기 전 너의 목소리가 오솔길 지층 아래 깊은 곳으로부터 들려온다.
음악 이전의 목소리. 퇴적된 음향의 살을 찢고 새어 나오는 목소리가 있다. 바닥이 있다면 내 몸은 나의 의식보다 먼저 바닥에 납작하게 엎드리고 말 것이다. 온몸으로 들어야 하는 소리가 있다. 소리의 파장이 있다. 피부의 피드백. 우리의 피부에는 프리즘스피커의 표면처럼 미세한 입자들이 돋아나 있다. 소리의 파장으로 피부의 입자들은 천천히 형태와 색채와 움직임을 바꾼다. 그렇게 우리의 신체는 눈으로 감지할 수 없는 속도로 달라지고 있고, 우리를 둘러싼 세계의 리듬을 비가역적으로 조정하고 있다.
아주 오랜 시간이 흘러 다른 행성에 살고 있는 우리의 종족들은 어떤 외형을 갖고 있게 될까?
걸음을 멈춘 너의 목소리에 나는 물음표를 달아 주고 기억증폭장치를 통과한 전기메아리를 따라간다. 전기메아리는 반투명한 영상의 레이어를 쌓아올린다. 우주의 기압과 음파에 적응하기 위해 수세기에 걸쳐 얼굴의 표피 안으로 두루마리 악보처럼 조금씩 말려 들어간 귀는 보이지 않는 내부 기관이 되었을 수도 있다. 영원한 밤의 은하계 위에 설치된 가변적 인공태양 아래 살아가던 어느 날. 청각실인증을 갖고 태어난 아이의 머리를 무릎에 안은 채 옆얼굴을 손가락으로 더듬으며 이렇게 말하는 우리의 자손도 있을 것이다.
옛날 사람들은 여기에 저마다 다른 모양의 바깥귀가 돌출되어 있었고, 그것을 접었다 폈다 할 때마다 토성의 고리를 따라 미끄러지는 우주 스케이팅 소리가 들려온다고 믿었단다.
왜 얼굴에 그렇게 주름이 많아요?
아이는 눈을 반짝이며 슬픈 목소리로 말한다. 고통으로부터 달아나는 이야기를 잡아 두기 위해 얼굴에 주름이 잡히는 거란다.
우리의 자손은 말하지 않을 것이다. 아이는 우리의 자손이 더 이상 얼굴을 만져 주지 못하게 되자 보다 깊은 침묵에 빠져들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관자놀이 옆을 긁적이며 사라진 바깥귀의 지도를 찾는 버릇을 갖게 될 것이다. 그때마다 의미를 알 수 없는 희미한 목소리가 내부의 귓속에 소용돌이칠 것이다. 아이는 그것이 푸른 어둠 속에서 겪었던 헛된 환청의 변주가 아니라 언어로 재현을 거부하는 실제적 음향이라고 몇 번의 어리석은 사랑에 실패하고 나서 깨닫게 될 것이다. 소리입자0과 소리입자0이 부딪혀 중첩된 소리입자0이 되어 사랑의 볼레로를 추고 있다는 어리석음에 빠져들게 만들 것이고, 그 사랑은 언제나 실패로 끝나게 될 것이다. 많은 것들이 너무 빠르게 사라졌고, 너무 늦게 소리로 돌아와 장소의 겹을 쌓고 침묵의 결을 만들 것이다.
아이는 남들이 쉽게 듣는 소리를 어렵게 듣고 남들이 듣지 못하는 소리가 언젠가 자신에게 들릴 것이라고 믿을 것이다. 주기적으로 자신이 선택받았는지도 모른다는 망상에 시달릴 것이다. 무엇을 위해 누구로부터 어떤 선택을 받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아이는 유년의 끈놀이이기도 한 망상연구를 즐기며 빛도 아니고 어둠도 아닌 영역에 속한 문제에 골몰할 것이다. 문제가 복잡하다면 문제가 단순해질 때까지 복잡하게 사유하고 실험해야 한다고 아이는 자신을 어떤 한계로 몰고 가는 것에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청각중추에서 양자거품이 끓고 있다고, 난청의 한계를 가설 데이터로 삼으면서 일종의 우주고고학 분야인 양자음향학과 픽션심령술을 공부한 아이는 사라진 바깥귀의 무덤인 지구를 찾아갈 것이다.
불행 없는 소망이 담긴 미래정복형 시제는 더 이상 미래를 예측하지 못하고 불시착 과거형으로 전달된다. 그리고 우주의 눈꺼풀에 달라붙어 있는 먼지 같았던 아이는 이야기의 중력에 이끌려 부네, 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
부네를 둘러싸고 있는 촘촘한 사회적 관계망이 형성한 심란한 내러티브는 생략하는 것이 좋겠지만,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부네는 죽음을 눈앞에 두고 버려진 행성을 찾아갔다. 일종의 우주자살이었다. 죽음을 선고 받고 왜 나여야 하고, 왜 내가 아니면 안 되는가, 뒤척이던 어느 날 밤부터 부네는 ‘흐느끼는무늬속삭임’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소리를 들었고, 들었다기보다는 보았다는 표현이 정확할지도 모르지만, 어떻게 보이는지는 언어로 설명할 수 없어도, 분명 그 소리가 보이면서 들린다고 확신했다. 일종의 대뇌피질 자기장에 작용하는 의식적 시청각언어에 대한 확신은 망상연구를 가속화시켰고, 그 소리가 비주얼 도큐멘트로 본 나팔형 지구로부터 들려오고 자신을 끌어당긴다고 믿었다. 육체의 쇠약으로 감정이 약해졌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연약한 감정이 펼쳐 보여주는 미약한 신호의 그물망으로 이루어진 어렴풋한 세계가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이제 잊힌 세계의 단면에 달라붙는 먼지의 입자가 되어도 좋을 것이다. 그래야만 했다. 우주폭풍을 일으키는 잠재적 먼지 상태가 아니라 ‘흐느끼는무늬속삭임’이라는 음향을 음악으로 되들으며 고요히 흔들리는 먼지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다. 어떤 죽음은 허구적 실천이고, 사변적 심령픽션의 등장인물이 되어도 상관없었다.
지구로 들어갈 수 있는 토포스포지션에 다다르자 에어캡슐로켓의 슬라이드게이트가 열리고 거미줄 입자로 만든 광자보호막 드레스를 입은 부네가 지구를 둘러싸고 있는, 한때 에로스의 파동이라고 불리기도 했던, 분홍빛 전자 스모그를 뚫고 떨어졌다. 깃털처럼 가볍게 지면에 닿을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았지만 예상보다 큰 중력장의 시차에 의해 부네의 몸이 심하게 뒤틀렸다. 우습게도 파이프호른 요가 자세로 사랑을 나누던 젊은 시절이 잠시 떠올랐다. 뼈와 근육으로 호흡을 나누던 절정의 시간은 이제 없다. 상상으로 육체의 흔들림을 제어해 보려는 시도는 오래가지 않았다. 충격파를 완화하기 위해 메가탄소하리보젤리를 물고 있었지만 치아들에 금이 간 듯했고 어금니 하나가 쑥 빠져 입안에서 굴러다녔다. 무언가 하복부 깊숙이 들어왔다가 빠져나가는 것만 같았다.
부네는 한 번도 아기를 갖거나 출산한 적이 없지만 비슷한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아기가 산도를 빠져나올 때 옛사람들은 지구를 무사히 탈출했다, 라는 말을 쓰곤 했다. 우주재난의 역사가 만들어낸, 이제는 사라진 구세대의 은어였다. 부네는 자신이 지구에 이제 막 도착했지만 지구를 무사히 탈출했다, 라고 믿으며 오래전 라이프스크린을 통해 본 자신이 태어난 아늑한 자궁 속을 떠올렸다. 주름이 아름답도록 많아 윙클 부인이라고 불러 보고 싶었지만 그렇게 부르지 못한 사람. 잠들 때마다 사라진 바깥귀의 지도를 그려 보이던 사람. 사라진 지도가 그려질 때마다 작은 음파가 떨어지는 것만 같았다. 그 음파가 만들어내는 마음의 미래에 이제 막 도착했지만, 기억 속에 떨어져 있는 음파가 ‘흐느끼는무늬속삭임’과 유사한 것인지는 단정할 수 없었다. 윙클 부인과의 동기화 시간은 오래가지 않았다. 부네의 자궁 속에 저마다 다른 숫자꼬리를 달고 있는 코흐바이러스가 증식해 온몸으로 점점 퍼져 나가고 있었다. 자신의 몸 속에 너무나 많은 암흑음향들이 들끓고 있었다. 윙클 부인이 살아 있었다고 해도 자신의 선택을 막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생체리듬을 지연시키기 위해 수소입자로 만든 말안장 시트에 누워 라이프스크린을 바라보며 남은 삶을 정리할 수도 있었지만 부네는 어릴 적부터 키워 온 아집대로 문제를 어렵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고, 이제 문제의 마지막 문을 열고 들어가고 싶었다.
당신의 체력으로는 도착한 곳에서 무너지고 말 거예요.
내가 어떤 형태의 무덤을 만드는지 잘 봐둬요.
여전히 모든 게 성급하다고 나는 지금 계산하고 있어요.
부네는 풀리지 않은 문제가 있을 때마다 어깨에 걸치곤 했던 숄에 일어난 보풀을 뜯어내는 것만 같았던 파스칼의 음성을 뒤늦게 떠올렸다. 파스칼의 계산은 정확하다. 정확하다고 부네는 믿었다. 풀리지 않은 문제가 영원히 풀리지 않을 때까지 파스칼의 계산은 정확할 것이다.
폐기된 지구시간으로 11932년. 부네의 무진동망막 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한때 바다로 덮여 있던 오렌지노루커피무늬색 화산계곡이다. 지층의 주름 사이로 흐르는 초단파열에너지를 감지하기 위해 몸을 엎드려 섭씨 -37.2도 지상의 무릎에 얼굴막을 댔다. 얼굴막이 감촉한 데이터가 부네의 뇌 센서에 입력될 것이다. 이제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부네는 측정할 수 없는 데이터, 수치화할 수 없는 음향의 파동이 자신에게 끼얹어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양자거품이 터지는 소리는 몸 속으로 닫힌 귀를 통해서만 들을 수 있었다. 그러니까 들었다는 시각진동이, 감지한 가상입자의 흔들림이 자신을 없던 여기로 불렀다고 생각했다. 모든 물리적 현상을 초우주적 곰팡이 반죽으로 만든다고 해도 ‘흐느끼는무늬속삭임’의 정체를 찾고 싶었다. 정체가 없는 정체가 있다는 것을.
부네는 뒤늦게 자신이 명명한 무중력 언어의 피로감이 가속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그 피로감에 신체에너지의 마지막 입자 하나까지 소진시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들릴 듯 말 듯한 소리의 이글거림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부네는 광자보호막 드레스의 후드를 열고 얼굴막을 벗겨 피부 그대로 소리를 접촉하고 싶었다.
얕은 꿈속에서 듣는 입술과 혀의 마찰이 일으키는 속삭임.
피부의 겹으로만 이루어진 생물이 스스로 얇은 막을 한 겹씩 벗는 소리.
연약한 문법의 시간 속에서 진동하는 모음의 프르동.
끓는 물을 내려다보는 동물의 미소를 스치고 지나가는 하악골의 그늘.
우리가 무엇을 들을 때 무엇을 듣지 않을 수 있을까.
부네는 자신이 버려진 리듬의 수호자가 된 것만 같았다. 알 수 있지만 말할 수 없는 슬픔에 빠져들고 눈물이 나오지 않지만 두 볼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리는 느낌을 갖게 된다. 흐르지 않는 눈물은, 보이지 않는 눈물은 어떻게 닦아야 할까. 부네는 다차원의 시간을 뚫고 멀리서 와서 가볍게 달라붙는 느낌의 입자들이 자신의 얼굴막 주변에 얼어붙어 떨고 있는 것을 본다. 보고 있다고 믿는다.
부네가 보고 있다고 믿는 장면을 부네의 조수이자 뇌파애인이었던 파스칼이 보고 있다. 부네가 믿을 수 있는 유일한 대상이었다. 몇 만 겹의 레이어로 구성된 홀로그램이 파스칼의 뇌 스크린에서 진동하고 있다. 파스칼의 녹색 망막이 떨린다. 돼지의 결벽증 유전자를 복제해 만든 3세대 로보족스인 파스칼은 자아보호를 위해 왼쪽 눈 옆에 창작된 송과체 스위치를 조절해 부네와 연결된 모듈 수치를 점점 낮춰야 하지만 망설이고 있다. 망설임의 시간이0.0000000000000000000000006849암흑광년 지속된다. 파스칼은 머릿속 송과선 수증기가 점점 풀어지고 있다는 것을 인지한다. 부네와의 약속대로 송과선 수증기가 완전히 엉켜 머릿속이 자동포맷 되기 전에 모듈 연결을 끊어야 한다. 부네가 엎드린 채 두 눈을 반짝거린다. 파스칼이 두 눈을 반짝거린다. 둘은 눈을 마주치지 않는다. 마주칠 수 없다. 부네는 더 이상 파스칼을 볼 수 없고 파스칼의 눈은 부네의 눈과 겹쳐져 있다. 겹쳐진 두 눈의 눈빛!
우주자살을 위한 준비된 의식을 치르듯 부네는 메가탄소하리보젤리와 빠진 어금니를 목구멍 안으로 삼킨 뒤 광자보호막 드레스의 열 보존 포켓을 연다. 파스칼은 빠르게 부네의 잔여 운동량을 계산한다. 인간의 불완전한 언어습관이 관계감정분출을 위한 안전장치였다는 것을 새삼 깨달으며 파스칼은 정확한 계산값을 광자효율성을 소모하며 불이행 예측 언어로 디폴트 시켜 본다.
부네는 곧 소멸될지도 모르지만 전기 올빼미 장존삽이 되어 다른 시간 속에서 소멸되어 가는 상태가 영원히 지속될 수도 있을 거야.
파스칼의 머릿속 송과선 수증기가 흐트러지고 있다.
한때 지구의 생물체에게 최적화된 자연리듬인 7.83헤르츠의 잔향이 부네의 피부로 스며든다. 자연리듬, 그것은 모든 물질을 통과하면서 운동에너지를 소진시키는 방사능 노이즈의 적정수준에 다름 아니었다. 부네의 얼굴과 몸에 빠른 속도로 주름이 생긴다. 몸 속 기관의 주름이 표피의 미세한 틈 밖으로 흘러나와 번질 것만 같다. 주름의 골에 수은색 땀방울이 맺히는 동시에 얼어붙는다. 어떤 주름이 달아나는 이야기를 잡아 둘 수 있을까. 부네의 입술과 턱선의 굴곡이 저화질 픽셀처럼 무너진다. 머릿속으로 뾰족한 음향 알갱이가 들어와 굴러다니며 자신을 기능적으로 괴롭히고 있다고 부네는 생각했다.
이건 어려운 문제가 아니야. 어려운 문제가 아니야. 이건 문제가 아니야.
눈꺼풀 안쪽으로 보이는 먼 별로부터 상영 연주되는 우주 파노라마가 부네의 머리 스크린 둘레를 맴돌며 싱크가 어긋난 자막 같은 스크래치를 남긴다.
인간은 과거로 돌아갈 수 있지만 돌아간 과거는 이미 지나온 과거가 아니다. 이건 나의 과거가 아니야. 시간의 반복이란 없다. 그리고 이건 누구의 목소리일까. 비선형 폐곡면을 그리는 우주의 공간 속에서 영원히 과거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돌아가기 위해 노력했고, 끊임없이 지나온 시간을 분열 조합시키는 의식투영 매체를 만들고, 변형된 의식투영 매체로 재조립시킨 세계의 모델 속에서 과거로 돌아갔다고 믿었던 지구인들의 무모함과 무모함의 에너지가 발산시키는 황홀경에 신경세포가 한 가닥 한 가닥씩 갈라져 팽창하는 것만 같았다. 지구인의 멀티 의식 유전자를 갖고 있는 나는 지구인이 맞는가. 나는 잊힌 조상의 그림자 화석 위에 올린 뾰족하게 멍든 사과인가. 내가 사과라면 사과의 귀는 지구의 입에 깨물려 찢어져야 하고 또 사과의 귀 속으로 지구의 벌레가 굴을 파고 들어가야 한다. 여기가 지구가 맞는가. 그리고 이건 누구의 목소리가 아닐까.
부네는 자신이 누군가의 의식 속에 등장한 전자형상에 불과하다는 생각에까지 다다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왜 불과하다는 표현을 쓸 수밖에 없는가. 그리고 그 누군가가 있다면 뇌파교환을 하면서 스페이스 엑스타시를 가장 많이 느꼈던 파스칼일 것이다. 파스칼을 향한 의식이 몰아 쓴 파형의 소리들은 어디로 흩어지고 있을까. 바깥귀의 지도를 그릴 수가 없다. 시간이 부족하다. 모든 회의적 물음은 언제나 뒤늦게 떠오른다. 부족한 시간은 언제나 다른 시간으로 보충될 것이다. 다른 시간이라니. 그것은 떠올릴 수는 있지만 감촉할 수 없는 시간이다.
시간은 음향에너지가 제로 상태로 향하는 픽션 입자라고 부네는 쓴 적이 있다. 그렇게 쓰자 불가능해 보였던 문제들이 잠시나마 매듭을 푸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제 풀어진 매듭이 저절로 다시 매듭을 묶어 영원히 풀리지 않게 돼버렸다. 매듭과 함께 투명한 언어의 목이 조여진 것만 같았다. ‘흐느끼는무늬속삭임’이라는 애초에 불투명한 언어를 투명한 언어로 고정시켜 놓은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이제까지 그래 온 것처럼 불투명한 언어의 구멍을 멀리서 가까이서 동시에 들여다보고 구멍의 위상적 크기를 좀 더 넓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위상적 크기가 넓어지면서 퍼져 나가는 소리가 있다. 그러니까 계속 움직여야 한다. 움직이는 모든 것이 변화시키는 소리에 집중해야 한다. 간섭된 소리언어의 파동과 함께 ‘흐느끼는무늬속삭임’이 반고리관 튜브 형태를 만들 때까지.
우주 리듬을 놓친 자율신경계의 춤 속에서 부네의 허옇게 센 머리카락이 다차원의 방향으로 정전기를 일으킨다. 흔들리는 머리카락이 가리키는 모든 방향으로 의심 없이 기어갈 수 있다면 좋을 것이다.
돌아와요.
파스칼은 자신의 융털성대가 만드는 목소리가 찌그러진 음파로 변환 전달되고 그것이 부네의 마지막을 괴롭히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자신이 계속 같은 뇌파언어를 모듈을 통해 보내고 있다는 것을 무시할 수 없었다.
돌아와요.
파스칼의 소리 없는 뇌파언어가 부네의 의식을 거쳐 되들려오지 않는다. 파스칼이 해독할 수 없는 부네의 주파수는 도착하지 않고 있다. 부네의 주파수가 도착해도 부네는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부네는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갔다. 다시 돌아올 수 있다고 해도 이곳은 아닐 것이다. 지구를 뒤덮은 분홍빛 전자 스모그를 뚫고 떨어질 수는 있어도 다시 빠져나올 수는 없었다. 부네가 떨어진 전자구름의 토포스포지션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파스칼은 부네의 육체물질이 돌아오지 않을 테지만 물질의 윤기와 주름이 녹아든 피부소리 입자들은 저감도 주파수가 되어 돌아올 수도 있다고 자신이 예측하고 있다는 것에 놀라지 않았다.
부네를 지켜주는 광자보호막 드레스의 열 효율성이 급속도로 빠르게 떨어졌다. 드레스에 새겨지는 진동 데이터 수치 역시 어떤 수식에도 적용할 수 없는 오류의 숫자들로만 떠다니다 자동소멸 될 것이다. 부네의 몸이 점점 바닥으로 무너지고 있다. 부네가 마지막으로 가야 할 방향이 있다면 지상의 깊은 곳, 음향의 메마른 물줄기가 흐르는 곳이다. 조금 더 강한 중력을. 부네는 자그맣게 몸을 웅크린다. 뾰족하게 멍든 사과에서 하나의 원형사각형 멍 자국이 된다. 안쪽 귀에 가득 찼던 소리들이 노란 실들이 엉킨 액체가 되어 입 밖으로 흘러나오는 것만 같다. 이제 보이는 모든 것을 믿을 수 없고, 믿을 수 없는 것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언제부터 조약돌이 눈앞에 있었을까. 조약돌은 이제 막 시간의 구멍을 뚫고 떨어졌을 것이다. 역시 그 시간은 부네가 감촉할 수 없는 다른 시간일 것이다. 저 조약돌이 내 삶의 마지막 한 겹일지도 모른다. 부네는 손을 뻗어 눈앞에서 빛나고 있는 회갈색 조약돌을 잡으려 한다. 조약돌이 부네의 손을 피해 구른다.
조약돌이 웃고 있네.
부네는 눈앞에서 끼를 부리고 있는 작은 조약돌을 자신이 잡아야 할 마지막 끈 같은 것이라고 생각해서 안간힘으로 몸을 끌어 팔을 뻗어 보지만 조약돌은 아슬아슬하게 부네의 손길을 피하며 달아나고 있다.
웃다가 입이 찢어져도 모를 조약돌이네.
어쩌면 저 조약돌이 굴러가면서 웃는 소리가 ‘흐느끼는무늬속삭임’의 정체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조약돌이여, 너의 이름은 ‘흐느끼는무늬속삭임’이다. 조약돌은 부네가 지어 준 이름의 옷을 벗으려는 듯 몸을 바닥에 몇 번 튕겨 본다.
나는 모든 이야기를 알고 있어.
너는 아무도 모르는 이야기만 알고 있어.
부네는 자신이 웃고 있다고 생각하면 웃어 보였다. 무엇을 위한 웃음인가. 우주 스케이팅의 마지막 트랙을 돌고 있는 의식의 카트리지가 다차원의 표면을 긁어내며 만들어내는 가장 투명한 색채슬픔의 웃음이다. 부네의 살점은 녹아 떨어져 나가고 뼈는 부서진다. 가능한 모든 방향으로 부네의 잔해물질이 흩어진다. 남은 것은 부네의 몸을 감싸고 있던 찢어진 광자보호막 드레스와 부네의 웃음소리. 그리고 구르기를 멈춘 채 웃음소리의 입자가 일으키는 소규모 파동을 지켜보고 있는 조약돌이다.
나는 모든 이야기를 알고 있어.
너는 모두가 아는 이야기를 모르고 있어.
파스칼은 부네와 연결된 모듈 스위치를 끈다. 파스칼의 머릿속 송과선 수증기는 엉킴점에서 멈춘다. 머릿속은 흩어진 수증기로 뜨겁지만 파스칼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기온이 많이 차가워졌음을 인지한다. 춥다. 부네가 남겨 준 보풀이 잔뜩 일어난 숄을 몸에 걸친다. 춥다. 이제 추위를 인지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말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파스칼은 테이블에 놓인 크롬 달걀을 집어 든다. 한 손으로 두 조각을 내 깨려고 시도한다. 와그작 하고 달걀 껍데기가 으깨져 내용물이 테이블에 쏟아진다. 실패이다. 손에 남은 껍데기를 내용물과 떨어진 껍데기의 잔해들에 갖다 대자 다시 원래의 크롬 달걀이 된다. 파스칼은 다시 한 번 한 손으로 크롬 달걀을 두 조각으로 깨려고 한다. 역시 달걀 껍데기가 으깨져 테이블에 떨어진다. 이 크롬 달걀을 한 손으로 깰 수 있어요? 처음 연구실에서 만났을 때 부네가 한 말이었다. 어디선가 으깨진 달걀 껍데기 같은 부네의 웃음소리가 들려온다고 파스칼은 감지해야 하지만 웃음소리는 들려오지 않는다.
부네가 남긴 웃음소리 입자는 ‘흐느끼는무늬속삭임주파수’를 만들어 다른 은하계에 멈춰 있는 지구의 리듬을 만들고 있다. 폐기된 지구 시간으로 다시 11932년. 목에 찢어진 광자보호막 드레스를 둘둘 감고 있는 백남준이 깨어난 자의 방식으로 31/197분 음표 안테나를 들고 있고, 정수리의 홈에 한 방울의 빗물이 고여 있는 프랑시스 퐁주가 다시 깨어난 자의 방식으로 조약돌을 위로 던졌다가 떨어진 위치로 가 조약돌을 주워 다시 위로 던졌다가 떨어진 위치로 걸어갔다. 걸음보다 눈빛이 먼저 도착해 조약돌을 반짝이게 했다. 조약돌의 반짝임 때문에 주파수의 교란이 일어난다고 생각한 백남준이 조약돌을 맞출 수 있는 유효 각도와 사정거리를 계산한 뒤 음표 안테나를 던지려는 순간 프랑시스 퐁주가 조약돌을 집어 다시 위로 던졌다. 조약돌은 위로 올라갔고 반짝임만 남았다. 반짝임의 위치에 백남준이 음표 안테나를 꽂기 위해 걸어가고, 프랑시스 퐁주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하늘을 올려다본다. 조약돌은 계속 위로 올라가고 있다. 분홍빛 전자 스모그 속으로 조약돌이 사라진다.
맹목적으로 완전히 이해가 가능한 장면 속에서 언젠가 다시 아래로 떨어지더라도 조약돌이 위로 올라가며 만든 수직적 궤적을 뚫고 전기 올빼미 장존삽이 날아간다. 자신이 왜 여기로 날아들었는지 모르는 전기 올빼미 장존삽은 ‘흐느끼는무늬속삭임주파수’의 망에 걸려 날개를 털며 피규어피규어 소리친다. 그 소리가 전기 올빼미 장존삽이 날아온 궤도를 거슬러 방사형으로 퍼진다. 퍼지면서 빛과 어둠의 리듬을 얻어 음악이 된다. 음악이 두 번 정도 휘어진 공간 사이를 통과할 수 있다면 그 음악은 우리가 걸어가는 오솔길까지 들려오게 될 것이다.
아주 오랜 시간이 흘러 다른 행성에 살고 있는 우리의 종족들은 어떤 외형을 갖고 있게 될까?
계속 걷고 있는 너의 목소리에 나는 물음표를 달아 주고 기억증폭장치를 통과한 전기 메아리를 따라간다. 전기 메아리는 반투명한 영상의 레이어를 쌓아올린다. 나는 너에게 이야기를 시작한다.
우주의 기압과 음파에 적응하기 위해 수세기에 걸쳐 얼굴의 표피 안으로 두루마리 악보처럼 조금씩 말려 들어간 귀는 보이지 않는 내부 기관이 되었을 수도 있어. 영원한 밤의 은하계 위에 설치된 가변적 인공태양 아래 살아가던 어느 날. 청각실인증을 갖고 태어난 아이의 머리를 무릎에 안은 채 옆얼굴을 손가락으로 더듬으며 이렇게 말하는 우리의 자손도 있을 거야. 옛날 사람들은 여기에 저마다 다른 모양의 바깥귀가 돌출되어 있었고, 그것을 접었다 폈다 할 때마다 토성의 고리를 따라 미끄러지는 우주 스케이팅 소리가 들려온다고 믿었단다.
나의 이야기는 자주 끊겼고, 그럴 때마다 너는 오솔길에 떨어진 나뭇가지를 밟으며 음악의 정지 신호 같은 소리를 만들었다.
전기 올빼미의 이름이 장존삽이야?
응, 장존삽.
무슨 이름이 그래?
이름이 그래.
납과 납덩이 같은 우리의 대화가 오솔길을 음악의 반대편으로 구부러지게 만들었고, 끝날 듯 끝나지 않는 언어입자들의 즉흥연주 속에서 어딘가 보이지 않는 곳에 가닿아 있는 우리의 눈빛!
눈빛을 확인할 의식투영 매체가 없다고 하더라도.
왜 그렇게 먼 시간을 돌아 여기 다른 가까운 곳에 바짝 다가온 거야?
너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고, 네가 말하지 않는 너의 이야기는 잠재적 음향으로 미시 우주의 가변적 순환 속을 떠돌며 음악적 상황을 만들고, 사운드에세이를 찾기 위한 모험을 계속하게 한다.
불투명한 언어가 스치고 지나가는 소리의 변곡점들.
우리가 쉽게 시린침묵이라고 부르는 수동적 소리각성 상태.
내면의 색채울림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공동의 아픔을 음악으로 느끼기 시작하는 것이 아닐까.
아득한 곳.
까마득한 곳.
까먹은 곳.
음악의 반대편은 가까운 곳에서 점점 멀어지고 멀어져서 다시 가까워지는 음악의 반대편.
소리가 공동의 소요 상태를 꿈꾸는 곳에서 비가시성의 거리를 좁히면서 넓히는 차원분열도형의 음악언어들.
우리가 음악과 같아지는 이야기를 상상할 때 우리가 상상한 것은 우리가 상상한 것이 맞는가. 우리가 상상하는 것은 우리를 상상하는 대상이 상상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다시 그것이 그것이지 않게 하는 이야기는 어떤 이야기인가.
이제 막 소멸한 다른 은하계의 ‘흐느끼는무늬속삭임주파수’를 감지하며 피규어피규어 울고 있는 전기 올빼미 장존삽을 위한 반음 빠른 장송곡이 울려 퍼질 때 우리는 세이렌 중 가장 아름답고 변덕스러운 자매의 뼈로 이루어진 크툴루의 덧니 계곡 사이로 흘러나오는 다차원 음향의 냄새에 취해 양자 볼레로를 출 수 있을 것이다.
우주의 엑토플라즘 같은 지구의 음향 인플레이션 속에서.
도착한 뒤 바로 떠났던 사람들.
미래의 조상이 흩뿌려 놓은 우주의 정념이 이끄는 대로.
우리가 무엇을 읽을 때 무엇을 읽지 않을 수 있을까.
서사평형 상태를 무너뜨릴 것.













작가소개 / 김태용

2005년 《세계의 문학》 으로 작품활동 시작.
소설집 『풀밭 위의 돼지』 『포주 이야기』 장편소설 『숨김없이 남김없이』 『벌거숭이들』 출간
텍스트사운드 그룹<A.Typist>에서 활동중.


《문장웹진 2017년 11월호》


추천 콘텐츠

상속

상속 김유담 너는 길 건너편에서 신호가 바뀌길 기다리며 서 있었다. 그냥 건너오라는 손짓을 해도 너는 꼿꼿이 서서 녹색불이 켜지기를 기다렸다. 유령이 저렇게까지 교통법규를 철저하게 지킬 필요는 없지 않나, 나는 조금 우습다는 생각이 들었다. 길 건너편에서 우르르 횡단보도를 건너오는 사람들 중에서도 너는 단연 눈에 띄었다. 나를 향해 걸어오는 네 모습이 마치 런웨이를 걷는 모델 같았다. 나는 미니스커트에 가죽 코트를 걸쳐 입고 부츠를 신은 네 모습을 보고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법정에 가는 옷차림치고는 좀 요란하다 싶기도 했다. 오늘 같은 날은 최대한 후줄근하게 입는 게 낫지 않나, 혼자 생각에 잠겼다가 너는 옷차림을 신경 쓸 필요가 없다는 걸 아차차 하고 깨닫는다. “안 늦었지? 강남은 올 때마다 복잡하고, 사람이 많아서 긴장돼.” 원래 키가 큰 편인 데다 굽 높은 부츠까지 신은 네가 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나는 너를 잠깐 올려다보았다가 이내 사거리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눈을 마주치는 게 어색했다. “밥, 어디서 먹을까? 먹고 싶은 거 있어?” 반갑다는 인사 대신 내가 꺼낸 말이었다. “이 근처에 오면 꼭 가고 싶었던 맛집 있어. 거기 가보자. 서초동에 해운대암소갈비 분점이 있더라고. 해운대에서 먹었던 갈비를 여기서 먹을 수 있다니, 설렌다. 고기 괜찮지?” 내 대답도 듣기 전에 너는 앞장서 성큼성큼 걸었다. “괜찮아?”라고 묻지 않고, “괜찮지?”라고 묻는 것은 네 아버지의 질문 방식이었다. 정확히는 “괜찮제?”였다고, 기억한다. “갈비는 좀 헤비하지 않나? 간단한 걸로 먹어. 사실 나 점심 생각도 없어.” 너를 좇아가며 네 뒤통수에 대고 내가 말했다. “중요한 날이잖아, 든든하게 먹고 들어가자.” 너는 뒤돌아선 채로 나를 향해 손짓했다. 재판까지는 두 시간 정도 남아 있었다. 미리 만나 밥을 같이 먹자고 한 건 너였다. 너는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돈 주고 사 먹을 수 있지만 난 그럴 수가 없단 말이야. 떼를 쓰듯 말하는 너를 어쩔 수 없이 따라나섰다. 아버지들끼리 절친한 친구 사이라 너와 나는 어려서부터 자주 만났다. 서로의 집을 격의 없이 오갔고, 계절마다 같이 나들이를 다녔다. 매년 봄 진해에 가서 벚꽃을 봤고, 여름이면 남해로 휴가를 다녀왔으며, 가을마다 가야산 단풍 구경을 빼먹지 않았다. 겨울에는 무주에 가서 스키도 탔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그 계절을 가장 만끽할 수 있는 명소를 찾고, 제철 음식을 먹어야 한다는 것은 너의 아버지 지론이었다. 네 아버지는 좋은 것을 누려 왔고, 즐길 줄 아는 사람이었다. 너희에게는 그런 여유가 있었다. 학창 시절, 내 아버지는 학교에서 손꼽히게 가난한 축이었고, 네 아버지는 그 학교에서 가장 부유하기로 소문난 학생이었다. 너의 조부는 부산 지역에서 이름난 유지

  • 관리자
  • 2024-03-01
손상

손상 지강숙 차가 안개를 헤치고 철문 앞으로 다가섰다. 반쯤 열린 철문에 ‘출입제한구역'이라는 표지판이 붙어 있었다. 표지판 앞에서 민호가 머뭇거렸다. 방금 지나온 캠핑장을 돌아보았지만 이미 만원이라 들어갈 자리가 없었다. 민호는 할 수 없이 철문 안으로 차를 전진시켰다. 울창한 소나무 숲 사이를 지나니 샛길이 나 있고 길 끄트머리에 숨어 있던 공터가 나왔다. 공터 한편에는 미니버스 크기의 캠핑카 한 대가 서 있었다. 희수가 자세히 보려 차창을 내렸을 때, 사람 한 명이 다가오는 게 보였다. 키가 작고 다부진 어깨를 가진 남자였다. 그는 두 팔을 휘저으며 차를 한쪽으로 몰았다. 희수는 차에서 내려 소나무 숲 건너 언뜻 보이는 캠핑장을 부럽게 바라보았다. 차는 여기 두시고, 저어기 계곡 건너편이 조용할 거예요. 남자는 캠핑카와 최대한 멀리 떨어진 곳을 가리켰다. 공터에서 내려다보이는 계곡의 맞은편에 간신히 텐트가 들어갈 만한 공간이 보였다. 희수는 준비해 온 카메라를 트렁크에서 꺼냈다. 캠핑카 앞에도 촬영 장비가 즐비한 것을 보니 남자 쪽도 놀러 온 것은 아닌 것 같았다. 서로의 화각을 생각하면 피차 손해 볼 것 없는 제안이었다. 희수와 민호는 텐트와 조리도구, 음식 재료가 담긴 아이스박스를 짊어지고 계곡을 건넜다. 번쩍. 캠핑카 앞을 지날 때, 플래시가 터지는 것 같았지만 희수는 돌아보지 않고 차가운 물에 발을 디뎠다. 백화점의 캠핑 코너는 몇 개의 유명 브랜드를 빼고 대부분 비슷한 물건을 팔았다. 중소 브랜드의 경우에는 전주 매출에 따라 매대 위치가 정해지는 터라 경쟁이 치열했다. 매니저들은 타사에 밀리지 않으려고 백화점에서 금지한 가매출을 공공연히 자행했다. 자신의 카드 한도로 모자라면 신입이나 수습 같은 말단 직원에게 구매를 강요했는데, 다음 달에 실적이 없어 취소를 못 하면 직원이 고스란히 빚을 떠안기도 했다. 희수는 말단 직원을 괴롭히는 대신 자신이 고생하는 편을 택했다. 밤늦게까지 트렌드를 분석하거나 캠핑 용품의 기능을 공부해 와 고객이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는 방식으로 매출을 올렸다. 희수의 언변으로 타 매장에서 텐트를 산 고객이 환불을 받고 희수 매장에서 구매한 일도 있었다. 자산 규모가 미미한 업체임에도 희수의 매대는 작년까지 이벤트 홀 가장 좋은 자리를 제일 많이 차지했다. 매일 저녁 블로그나 유튜브로 유행 아이템을 살펴보고 설명할 말을 다듬는 일은 고단했다. 하지만 희수는 자신의 노력에 따른 보상에 자부심을 느꼈다. 그런 희수도 대기업을 모기업으로 둔 신생 브랜드 P사의 공격적 마케팅은 당해 낼 재간이 없었다. P사는 입점 행사로 터무니없이 낮은 가격대의 물량 공세를 퍼부었다. 희수가 봤을 때 기능 면에서 희수의 제품이 훨씬 뛰어났지만 고객들은 희수의 설명에 잠시 멈췄다가도 결정의 순간에는 P사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희수는 아무리 설명을 잘해도 고객의 마음을 돌릴 수 없다는 사실에 절망했다. 몸이 부서져라 일을 해도 대책 없이 줄어드는 통장 잔고가 억울하기만 했다. 하지만

  • 관리자
  • 2024-03-01
킨츠키 클래스

킨츠기 클래스 신주희 유리 조각을 주워 그 애의 집으로 갔다. 그랜드 피아노가 있는 이층집. 피아노 레슨 중인 그 애를 기다리는 동안 그 집의 장난감들을 가지고 노는 것은 자유다. 예컨대, 그 애가 아끼는 인형의 옷을 갈아입히거나, 그 인형의 이름을 다르게 부르거나. 침대에 눕는 것도 가능했다. 굳이 눕고 싶다면 그래도 되었다는 뜻이다. 나의 경우, 그러니까 초등학교 1학년이던 나는 그 애의 침대가 좋았다. 늘 좋은 냄새가 나고, 귀여운 만화 캐릭터 시트가 깔려 있는, 나로서는 한 번도 가져 본 적 없는 앙증맞은 침대였으므로. 나는 그곳에 누워 차마 피아노곡이라 말할 수 없는 도, 미, 솔, 솔, 솔을 들으며 끝끝내 무엇인가 다른 것을 원하는 상태가 된다. 길에서 주워 온 유리 조각을 꺼내 햇빛에 비춰 본다. 그러니까, 그래서, 그렇지만,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유를 알 수 없지만 결심했기 때문이다. 오늘은 꼭, 그 애의 매끄러운 피아노에 깊은 흠집을 내버리기로. * 수업 준비는 늘 최고이면서 최악이었다. 나는 매일 산산조각이 난 접시나 찻잔, 사발을 들고 온 수강생들에게 그것은 복원 중일 뿐 아직 완전히 망한 것은 아니라는 말을 반복한다. 그러니 인내심을 가지기를. 끈기를 가지고 다음 수업 예약을 꼭 해주기를. 나는 구차함을 떨쳐내며 테이블 위의 수업 계획서를 가지런히 모아 놓는다. 지난 수업과는 조금씩 다르게 이어 붙인 문장들 사이에서 틈이라는 글자가 내 시선을 붙잡는다. 깨진 도자기를 복원하는 기법 중 하나인 킨(金) 츠기(継ぎ)는 상처 난 영혼을 치유하는 것에 비유됩니다. 틈을 금으로 이어 붙인다는 뜻으로 파편의 경계를 감추지 않고 오히려 살려서 사물의 일상성을 회복시키는 의미 있고 아름다운 작업입니다. 나는 틈을 메우는 일에 보람을 느끼면서도 내게 틈이 생기는 것을 싫어한다. 고작 틈, 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지만 절망이나 좌절이라고 말하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다. 나는 비관을 포기한 사람으로 서른 중반까지 사모님으로 살았지만 마흔이 된 지금은 누군가를 사모님이라고 부르는 처지가 되었다. 꽤 큰 규모의 프랜차이즈 레스토랑을 운영하던 남편의 회사가 최종 부도 처리되자 집 안 곳곳에는 압류 딱지가 붙었다. 죽고 싶을 만큼 처참했다. 동시에 처절하게 이를 악물고 살아남고 싶기도 했다. 밑 빠진 독을 채우는 일처럼, 눈앞에 던져진 모든 것을 허겁지겁 해치웠다. 끝내 이혼과 재산 분할, 양육권 분쟁으로 이어진 일련의 시간이 들이닥쳤다. 그러나 무엇인가를 깨뜨려 본 사람은 안다. 한번 깨진 것은 본래의 것보다 더 큰 의미를 지니게 된다는 것을. 아무리 긴 시간과 정성을 들여도 완벽한 복원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그 뒤로 알 수 없는 허기가 나를 집어삼켰다. 공포스러울 만큼 왕성한 소화력과 끝이 없는 식사. 순식간에 불어난 몸이 거대한 틈처럼 느껴졌다. 때문에 나는 시시때때로 벌어지는 틈을 채울 수밖에 없었다. 집은 항상 정리된 상태를 유지해야 하고, 규칙적으로 다이어트를 하며, 적

  • 관리자
  • 2024-03-01

댓글 남기기

로그인후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을 남겨 주세요!

댓글남기기 작성 가이드

  • 타인에게 불쾌감을 주는 욕설, 비방 등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주제와 관련 없거나 부적절한 홍보 내용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기타 운영 정책에 어긋나는 내용이 포함될 경우, 사전 고지 없이 노출 제한될 수 있습니다.
0 / 1500

댓글0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