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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도

  • 작성일 2018-03-01
  • 조회수 3,526

[비평in문학]




<새로운 시대, 문학의 키워드>

‘여성, 노동’같은 전통적인 주제에서 시작해 ‘문체, 주체’와 같은 비평 키워드나 ‘번역, 상호텍스트성’같은 문학적 키워드, ‘환상, 무의식’같은 인접학문 그리고 ‘빅데이터, 가상현실’같은 미래용어에 이르기까지. “새로운 문학의 키워드는 무엇이 될 것인가?”라는 질문에서 출발한 [비평in문학]의 새로운 비평 기획입니다.




애도



민승기




라스 폰 트리에(Lars Von Trier)의 <멜랑콜리아>(Melancholia, 2011) 도입부. 지구와 닮은, 그러나 지구보다 큰, ‘지구의 짝패(double)’와도 같은 멜랑콜리아라는 행성과의 충돌, 세상의 끝. 그러나 엄마는 아이를 안고 이 마지막 때를 벗어나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 멜랑콜리아의 영향력으로 모든 것은 땅 밑으로 꺼져 간다. 저스틴(Justine)이 아끼는 말 아브라함도, 레오(Leo)를 품고 있는 클레어(Claire)도 심연 속으로 빠져든다. 클레어의 깊이 팬 발자국은 세계가 이미 끝났지만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지시하는 ‘흔적’(trace)이다. 18번 홀로 구성된 완벽한 골프 코스를 갖춘 대저택의 주인인 존(John)은 과학적 지식의 신봉자이지만 멜랑콜리아가 지구와 부딪히지 않고 아슬아슬하게 비켜 갈 것이라는 예측이 빗나가 세상의 끝이 명확해졌을 때 미리 자살하고 만다. 존의 죽음 이후에 클레어가 종말을 피하기 위해 레오를 안고 푹푹 빠져드는 걸음을 옮기고 있는 곳은 그러나 19번 홀이다. 온전함(18번 홀)에 더해져 그것이 이미 결핍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과학적 지식으로 계산할 수 없는 나머지이자 잉여.1) 19번 홀은 세상이 끝나버린 이후에도 여전히 남아 있는 ‘죽음 이후의 삶,’ ‘남겨진 삶,’ 삶 자체가 이후이자 나머지임을 보여주는 ‘흔적’이다.
데리다(Jacques Derrida)는 세상이 끝난 뒤에도 여전히 남아 있는 윤리적 부름에 응답하고자 한다. “세상은 끝이 나고 나는 너를 품어야(운반해야) 한다”(“Die Welt ist fort, ich muss dich tragen”)는 첼란(Paul Celan)의 시구2)는 데리다 속에서 데리다가 제어할 수 없는 목소리로 남아 있다.3) 데리다의 세미나 속에서 반복적으로 인용되는 첼란의 파편은 관계가 시작되는 모든 곳에서 이미 울리고 있는 지울 수 없는 목소리이다. 관계는 ‘하나’가 되는 융합이나 대립되는 ‘둘’이 아닌 하나이자 둘, 하나 속의 둘이다. 그것은 타자를 품을 때, 타자를 내 안으로 운반할 때 생겨난다. 데리다는 유사성이나 차이로 설명할 수 없는 이런 관계(아닌 관계)를 ‘애도’(mourning)라 부른다.
애도는 ‘이미 항상’(always already) 발생하고 있는 동시에 ‘아직 발생하지 않은’(not yet) 이중적인 작업이다. 타자의 죽음은 처음부터 타자와의 관계 속에 출몰한다. 친구가 살아 있을 때도 나는 이미 친구를 애도하고 있다. 데리다의 말대로 ‘우정은 둘 중 하나가 더 오래 살아남아 다른 친구의 죽음을 지켜볼 가능성에서 생겨난다.’4) 친구의 상실은 내 안에서 이미 발생하고 있는 동시에 여전히 도래할 가능성으로 남아 나와 친구의 관계를 가능하게 한다.5) 이미 죽은 그러나 여전히 살아 있는 타자, ‘도래할 타자에 대한 기억’이 바로 애도이다. 타자의 죽음과 기억을 내 안에 품게 될 때에야 비로소 ‘내 안에서’는 의미를 갖게 된다. 데리다의 말대로 애도는 타자와의 관계를 가능하게 할 뿐 아니라 나 자신과의 관계, 나의 내면성을 생성하는 기원적 조건이다.6) 타자를 애도할 때 나는 내가 된다. “나는 애도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7) “나는 사후를 숨쉰다”(I posthume as I breathe)8). 삶은 이미 (죽음) 이후의 삶, 의미로 종결될 수 없는 나머지이다. 애도는 애도할 수 없는 나머지를 불러낸다. 애도할 수 없는 것을 애도하기.
‘도래할 타자에 대한 기억.’ 기억은 기억할 수 없는 것을 기억한다. 무엇보다도 기억은 미래를 향해 있기 때문이다. “기억은 근본적으로 실제로 존재했던 과거를 향하고 있지 않다. 그것은 과거의 ‘흔적’과 함께한다. 흔적은 이미 항상 지나가 버려 현전화할 수 없는 것인 동시에 와야 할 것으로 남아 있는, 미래로부터 도래하는 것이다.”9) 애도는 타자를 내 안으로 운반해 와 봉인하는 작업이 아니라 그가 내 안에서 계속 살 수 있도록(living-on) 미래의 가능성을 여는 행위이다.10) 이제 “타자는 내면화를 통해 타자를 종결짓고자 하는 기억을 거부하게 된다.”11) 타자의 예측할 수 없는 도래는 애도의 기억을 가능하게 해주는 동시에 그것을 넘어선다. ‘내 안의 타자’는 기억을 통해 타자를 전유하려는 나의 모든 시도를 중지시키고 나를 나와 다른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타자는 ‘나의 가까움 속에서 결코 지배될 수 없는 멂’(far away in us)12)으로 남아 나를 ‘타자를 책임지는 주체’로 변형시킨다.13) 아직 발생하지 않은 가능성으로 말미암아 타자는 애도의 기억 속에서 그것을 능가하는 잉여로 작용한다. 미래를 기억하기.14) 애도가 종결될 수 없는 ‘읽기’(reading) 또는 다른 사유를 위한 약속이 되는 것15)은 이런 이유에서이다.
엄마가 품고 있는 ‘아이.’ 클레어가 안고 있는 레오. 아이야말로 과거이자 미래, 흔적으로서의 타자이다.16) 우리는 모두 아이였고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도래하는 아이를 품고 있다. 와야 할 것으로 남아 있는 기원. 아이의 탄생은 세계의 다른 기원을 여는 기회이자 위협이다. 과거는 위협이자 기회로 미래 속에서 반복된다.17) 도래하는 자는 이미 항상 다시 오는 자이다.18) 과거의 기억 속에서 완전히 종결되지 못한 채 다시 돌아오는 가능성들. 과거는 온전히 과거일 수 없고 미래 역시 과거 속에 이미 있던 ‘틈’이다. 그러므로 데리다는 아이의 괴물성(monstrosity)을 이야기한다.19) 에일리언을 임신하고 있는 리플리를 생각해 보자. 미래는 괴물의 모습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이 괴물은 이미 우리 속에 있던 아이이다. 아이는 우리 속의 틈으로 도래한다. 그것은 또 다른 세계가 아닌 이 세계의 다른 기원을 연다(<멜랑콜리아>에서 클레어는 곧 끝나버릴 이 세상과는 다른 세상, 레오를 위한 세계에 대해 질문하지만 저스틴은 ‘그런 곳은 없다’고 답한다). 아이 역시 흔적이다. 그것은 어른으로 지양되어야 하는 부정적 장애물이 아니라 어른의 기원이자 어른이 제거할 수 없는 틈으로 다시 돌아온다. 이제 애도는 애도할 수 없는 아이를 품고 있다.
애도 속에서 애도가 종결될 수 없도록 틈을 여는 아이. 애도는 자신의 실패를 고지하는 멜랑콜리아라는 아이를 품고 있다. 그러나 자신의 불가능성을 품고 있는 애도, ‘멜랑콜리아적 합체’(melancholic incorporation)만이 유일한 애도일 수 있다.20) 우리는 타자와 관계 맺기 위해, 타자에게 무관심하지 않기 위해 타자를 내 안으로 운반해야 하지만 이것이 타자 전유를 통한 나의 확장으로 귀결되어서는 안 된다.21) 타자를 나의 집으로 맞아들이는 행위가 타자의 전유와 결코 분리될 수 없는 것처럼 우리는 애도해야 하는 동시에 애도하지 말아야 한다. 데리다의 말대로 “타자를 내 안에 나와 같은 것으로 보존한다는 것은 항상 타자를 망각하는 것이다. 바로 거기(타자를 전유하는 곳)에서 타자의 망각이 시작된다. 타자의 타자성을 존중하기 위해 타자를 품어야 한다면 멜랑콜리아가 필수적이다.”22) “그러므로 전유 불가능성을 통해 타자의 무한성을 가능하게 하는 멜랑콜리아로부터 시작해야 한다.”23) 가능성이 불가능성과 같아지는 이중 구속(double bind). 타자를 나의 내부이자 외부로 운반해야 하는 "실패하기로 운명지워진"24) 작업. 그러므로 애도는 늘 ‘온전하지 못한 애도’(half-mourning)25), 불가능한 애도, 멜랑콜리아로만 존재할 수 있다. 멜랑콜리아는 애도의 결핍, 충분치 못한 애도가 아니라 애도를 애도로 만들어주기 위한 내부적 절개, 애도가 단순히 의미의 복구나 프로그램으로 환원될 수 없도록 하는 애도의 (불)가능 조건이다. 문제는 애도될 수 없는 나머지이자 잉여인 멜랑콜리아를 과도하게(militantly) 긍정하는 것이다.26) 베닝턴(Geoffrey Bennington)의 말대로 삶 역시 ‘종결될 수 없는 삶’(half-life), 애도로 봉합될 수 없는 멜랑콜리아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죽음 이후에도 지속되는 삶(after-life).27)
“세상은 끝이 나고 나는 너를 품어야(운반해야) 한다.” 세계는 이미 항상 상실된 것이다. 우리는 “세계란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섬들만이 있다”(“There is no world, there are only islands”)는 데리다의 말에서 시작해야 한다.28) 우리 모두가 공유하는 하나의 세계는 “당연한 것으로 전제되어 있는 기대의 산물”29)일 뿐이다. 그것은 의미와 가치를 부여해 주는 세계가 상실될까 두려워 우리가 만들어낸 방어적 판타지이다.30) 우리는 한 번도 이런 온전한 세계를 가져 본 적이 없다. 섬들은 하나의 세계를 전제하거나 공유하는 개별화된 존재들이 아니라 세계의 상실을 이미 품고 있는 멜랑콜리아적 파편들이다. 파편들은 흔적으로서의 세계에 열려 있다. 세계로의 열림은 예측 불가능한 미래를 향한 노출로 섬들의 타자성을 이룬다. 어떤 지식이나 이론으로 규정되거나 통합될 수 없는 열림이 섬들 간의 무한한 거리를 지시한다.31) 섬들은 모두가 공유할 수 있는 하나를 전제하고 있는 다양한 세계들이 아니라 하나의 불가능성을 고지하는 흔적들이다. 그러므로 데리다는 ‘친구의 죽음이 세계 속에 있는 어떤 세계의 종말이 아니라 세계 자체의 종말’이라고 말할 수 있다.32) 처음부터 이미 항상 상실된 세계, 멜랑콜리아적 세계(의 종말)만이 남아 있다.
사가피(Kas Saghafi)의 말대로 처음부터 타자와의 관계를 규정짓고 있는 것은 ‘근원적 상실,’ ‘멜랑콜리아’이다. 친구와의 첫 만남 속에 이미 멜랑콜리아가 깃들어 있다. 우리는 모두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고, 둘 중 하나가 더 오래 살아남아 죽은 자를 애도할 것이다.33) 데리다의 말대로 친구의 상실이 세계 속의 특정한 세계의 상실이 아니라 세계 자체의 상실이라면 ‘너를 품고 가야 하는’ 남겨진 자의 행위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세계가 완전히 상실된 이후에 뭔가가 남아 있다면 세계는 처음부터 온전하지 않았던 것이 아닐까? 모든 사람이 공유할 수 있는 하나의 세계가 사라진 이후에도 남아 있는 세계는 어떻게 구성되는 것일까? 온전한 세계라는 판타지 속에서 멜랑콜리아적 상실을 극복하려는 시도가 실패하는 지점, <멜랑콜리아>의 19번홀. 19번홀은 온전함에 더해져 온전함이 처음부터 온전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잉여, 나머지이다. 상실이라는 ‘사건’ 역시 무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뭔가를 남긴다.34) 의미가 완전히 소진된 이후에도 의미로 환원될 수 없는 존재가 항상 남아 있다. 글은 저자가 사라진 이후에도 반복되어 읽힐 수 있어야 글일 수 있다. ‘반복되어 읽힐 수 있는 가능성’(readability)은 저자의 죽음 이후에도 살아남아 글이 이미 남겨진 글임을, 사후의 읽기를 통해 비로소 존재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35) 글은 이미 항상 상실된 그러나 도래할 것으로 남아 있는 흔적, 멜랑콜리아적 파편으로 존재한다. '글이 (남아) 있게 될 것이다.' 친구의 상실 역시 세계 자체의 상실이지만 또 다른 친구의 죽음을 통해 반복될 수 있다. 데리다에게 ‘사건’은 완전하게 종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도래할 것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매번 세계 자체가 상실되고 다시 반복된다. 멜랑콜리아가 반복되는 실패로 이야기될 수 있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이다.
“세상은 끝이 나고 나는 너를 품어야(운반해야) 한다.” 의미나 가치를 보증해 주는 근거가 모두 사라져 버렸을 때, 모두가 공유하는 하나의 세계라는 알리바이가 상실되었을 때, 윤리적 행위의 가능성이 생겨난다. 세계의 상실 이후에 남겨진 자는 상실된 자(의 세계)를 자신 안으로 운반한다. 상실된 이후의 세계, 세계라고도 세계가 아니라고도 할 수 없는 남겨진 세계 속에서 행해지는 타자의 운반 작업, 애도는 나인지 타자인지 구분할 수 없는 잔존물을 남긴다. 타자를 기억하기 위해 애도는 타자를 내 안으로 운반해야 하는 동시에 타자를 나와 같은 것으로 봉합하여 망각하지 않도록 타자와의 무한한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 전유의 불가피성과 탈전유의 필연성이 겹치고, 타자에의 충실성과 배반이 동시에 발생한다.36) 타자는 나의 안이자 바깥이고 나와 타자는 구분 불가능한 잔존물, ‘나-타자’로 남아 있다. 품는 행위는 바로 ‘내 안에 있는 바깥,’ ‘죽었지만 아직 살아 있는,’ ‘과거이지만 도래할 것으로 남아 있는’ 유령들에게 말을 거는 것이다.37) 그것은 또한 보편적 세계의 종말을 내 안으로 운반하는 것이다. 나와 타자를 구분하여 ‘나-타자’라는 잔존물을 말끔히 제거하는 지식의 종말, 보편적 지식으로 완전히 소진될 수 없는 나머지를 환대하는 작업이 바로 타자의 운반, 타자를 내 안에 품는 행위이다. 윤리는 상호인정을 기반으로 한 의미에 종속될 때가 아니라 괴물과도 같은 잔존물을 환대할 때 생겨난다.38) 어떤 공통된 근거도 없는 심연 속에서 알 수 없는 것으로 도래하는 괴물을 환대하고 창조할 때 윤리가 시작된다.
너를 내 안으로 운반하는 윤리적 행위는 애도할 수 없는 것의 애도, 온전히 애도될 수 없는 잔존물을 수행적으로 반복하는 작업일 수 있다. 이것이 세계의 사라짐이 세계의 기원과 같아지는 이유이다. 세계는 완전히 사라지는 동시에 여전히 남아 있고 죽음은 탄생과 분리될 수 없다.39) 이미 항상 상실된, 우리가 종속되어야 할 어떤 근거나 의미도 갖지 않는 ‘심연적 기원,’ 멜랑콜리적 잔존물의 세계는 수행적 반복을 통해 가능하기 때문이다. 나는 타자를 내 안으로 옮길 때 비로소 존재한다. “존재 이전에 타자의 운반,” 타자에 대한 책임이 있다.40) 타자의 운반 속에서 나는 태어난다. 어떤 근거도 없는 심연적 운반 행위 속에서 나(의 세계)는 다시 태어난다. 세계의 상실 이후에도 세계가 도래할 것으로 남아 있는 이유는 심연적 행위의 사후적 결과물로 (재)창조되기 때문이다.41) 무엇보다도 세계가 잔존물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상실된 세계와 다른 세계가 아닌 온전하게 상실될 수 없어 남아 반복되는 ‘나머지-세계.’
데리다는 수행을 묘사하는 진술사와 묘사를 수행하는 수행사의 접목(grafting) 속에서 언어의 이중구속(double bind), 또는 잔존물로서의 언어를 이야기한다.42) “오 나의 친구들이여, 친구란 없다”(“Oh my friends, there is no friend”). 우정의 역사 속에서 이미 항상 인용되어 반복되는 동시에 아직 발생하지 않은 우정의 가능성을 여는 이 ‘부름’은, 우정을 보증하는 본질적 가치들이 모두 사라진 후에 ‘부름’이라는 수행적 행위에 의해 생겨나는 잔존물로서의 우정을 잘 보여주고 있다.43) 모든 진술문은 부름이란 수행적 행위를 이미 포함하고 있다. 언어는 의미체이기 전에 타자에게 말을 건네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레비나스(Emmanuel Levinas)식으로 말하자면 언어는 ‘타자의 부름에 대한 응답’ ‘타자의 환대’이다. ‘친구란 없다’는 진술은 이미 항상 부름을 전제하고 있다.44) 아직 친구가 아닌, 도래할 친구, 지금 적일 수도 있는 친구에의 부름. 이미 전제하고 있지만 아직 오지 않은 친구의 가능성이 ‘친구란 없다’는 진술 속에 출몰하고 있다. 로러(Leonard Lawlor)의 말대로 우정은 이미 행해졌고, 여전히 도래할 것으로 남아 있다. 반면 모든 부름은 뭔가를 진술해야 한다.45) ‘오 나의 친구들이여’라는 부름은 적에게 건네질 때도 ‘친구란 있다’고 진술하고 있다. 진술사와 수행사는 이미 서로를 품고 있고, 수행사 안의 진술사, 진술사 안의 수행사로 남아 진술사와 수행사 안에서 서로를 와해시킬 수 있는 ‘바깥’으로 도래한다. 언어는 진술사와 수행사가 어떤 공통의 기반도 상실한 채 상대방을 자신 속으로 운반할 때, 서로를 품을 때 발생하는 나머지, 이미 항상 ‘남겨진 언어’이다.
“세상은 끝이 나고 나는 너를 품어야(운반해야) 한다.” 세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두가 공유할 수 있는 하나의 세계는 세계의 근원적 상실, 기원적 세계 없음이 가져다주는 불안에 대처하기 위해 만들어진 판타지일 뿐이다. 우리에게 최종적 목적지(telos)를 부여하고 방향을 규정해 주는 규제적 이상으로서의 세계는 이미 상실되었다. 문제는 내가 이런 세계가 존재하는 것처럼(as-if) 가정하고 세계라는 판타지에 자발적으로 종속됨으로써, 어떤 행위의 가능성도 부정할 때이다. 데리다는 세계를 내 안으로 운반해, 나와 세계 모두를 절개(tele)함으로써 세계가 부여한 최종 목적에 틈을 내고자 한다. 'telos'와 'tele'는 서로를 품고 있다. 'tele'는 'telos'가 제거할 수 없는, 도래할 간극/거리로 남아 'telos' 내부에서 'telos'를 연다.46) 데리다는 세계라는 판타즘에 단순히 굴복하지 않고 세상의 끝에 직면한 내가 가질 수 있는 두 가지 주체적 태도를 이야기하고자 한다.47) 첫째, 세계는 없고 단지 섬들만이 있음을 인식하고 타자를 어떤 사건이나 어떤 환대도 발생할 수 없는 빈 공간으로, 세계라는 판타지 바깥으로 운반할 가능성. 둘째, 판타즘 없는 세계, 빈 공간과의 대면을 넘어 세계가 존재할 수 있는 것처럼 세계를 시적으로(poetically) 재구성하려는 시도. 세계가 상실되어 버린 바로 거기에서 세계가 있어야 하는 것처럼, 세계를 재창조하는 작업. 세계라는 판타지를 유지하거나 맹목적으로 믿는 것을 그만두고 빈 공간과의 대면으로부터 시적 재구성을 통해 세계 속에 이미 사라져 버린 세계의 흔적을 기입하는 행위.48) 미리 주어진 기원이나 목적을 갖지 않는 세계, 친밀함이나 가까움에 의해 회집될 수 없고, 지금도 앞으로도 ‘낯설고도 먼’ 채로 남아 있는 세계를 심연 속에서 구성해 내려는 시도. 시적 구성은 단순히 판타지의 바깥이 아니라 판타지의 반복을 통해 판타지를 내부적으로 절개한다. 온전한 세계가 마치 존재하는 것처럼 진술하고 믿는 것이 아니라, 이미 상실된 세계 속에서 세계의 다른 가능성이 생겨날 수 있는 것처럼 행위하기. ‘무로부터의 창조.’ 멜랑콜리 역시 단순히 상실의 완전한 회복이라는 애도의 판타지와 대립되는 바깥이 아니다. 그것은 애도의 불가능성을 지시하는 빈공간이라기 보다는 애도를 반복함으로써 애도의 다른 가능성을 여는 시적 구성이다. 타자의 타자성을 유지한 채 타자를 내 안으로 운반할 때, 애도의 필연성과 불가능성을 동시에 구현할 때, 멜랑콜리의 윤리학이 시작된다.

1) Christopher Peterson, "The Magic Cave of Allegory: Lars Von Trier's Melancholia," Discourse 35:3 (Fall 2013): 408 참조.
2) Paul Celan, "Grosse, Glühende Wölbung," Atemwende (Frankfurt-am-Main: Suhrkampf, 1967), 93.
3) Jacques Derrida, The Beast and the Sovereign, Volume II (Chicago:: U of Chicago P, 2017), 258-68 참조.
4) Jacques Derrida, Memoirs for Paul de Man, Trans. Cecile Lindsay, Jonathan Culler, Eduardo Cadava, Peggy Kamuf (New York: Columbia UP, 1989), 29, 34 참조.
5) Derrida, Memoirs for Paul de Man, 22.
6) Derrida, Memoirs for Paul de Man, 33.
7) Jacques Derrida, Points...Interviews, 1974-1994, Trans. Peggy Kamuf and others (Stanford: Stanford UP, 1995), 321.
8) Jacques Derrida, "Circumfession," Jacques Derrida and Geoffrey Bennington, Jacques Derrida, Trans. Geoffrey Bennington (Chicago: U of Chicago P, 1993), 26.
9) Derrida, Memoirs for Paul de Man, 58.
10) Jacques Derrida, The Work of Mourning, Eds. Pascale-Anne Brault and Michael Naas (Chicago: U of Chicago P, 2001), 23.
11) Derrida, Memoirs for Paul de Man, 34.
12) Derrida, The Work of Mourning, 161.
13) Derrida, The Work of Mourning, 205.
14) Joan Kirkby, "Remembrance of the Future: Derrida on Mourning," Social Semiotics 16:3, 461-72 참조.
15) Derrida, Memoirs for Paul de Man, 93-97 참조.
16) Samir Haddad, "Inheriting Birth," Derrida and the Inheritance of Democracy (Bloomington: Indianda UP, 2013), 124.
17) Haddad, "Inheriting Birth," 123.
18) Haddad, "Inheriting Birth," 129.
19) Haddad, "Inheriting Birth," 125-27 참조.
20) Derrida, Points..., 321.
21) Jacques Derrida, "Rams," Sovereignties in Question: The Poetics of Paul Celan (New York: Fordham Up, 2005), 161.
22) Derrida, "Rams," 160.
23) Derrida, "Rams," 161.
24) Derrida, Points..., 321.
25) Geoffrey Bennington, Not Half No End (Edinburgh: Edinburgh UP, 2010), xi-xii 참조.
26) Bennington, Not Half No End, 120. 베닝턴은 이러한 긍정을 "militant melancholia"라고 표현하고 있다.
27) Bennington, Not Half No End, xii-xiv, 8-11 참조.
28) Derrida, The Beast and the Sovereign Volume II, 9.
29) Derrida, The Beast and the Sovereign Volume II, 265.
30) Derrida, The Beast and the Sovereign Volume II, 266.
31) Derrida, The Beast and the Sovereign Volume II, 266.
32) Derrida, The Beast and the Sovereign Volume II, 260.
33) Kas Saghafi, "The World after the End of the World," The Oxford Literary Review 39:2 (2017), 266.
34) Bennington, Not Half No End, 42. “사건은 사건 이후의 반복을 통해 비로소 사건으로 발생한다.”
35) Bennington, Not Half No End, 126-28. “나는 읽을 수 없는 곳에서만 읽을 수 있다.” “그러나 의미에 도달하지 못한 위험은 또한 (읽기의) 기회일 수 있다.”
36) Derrida, Points..., 321.
37) Derrida, "Rams," 159.
38) Michael Naas, "If you could take just two books...," The End of the World and Other Teachable Moments (New York: Fordham UP, 2015), 53.
39) Bennington, Not Half No End, xiii.
40) Derrida, "Rams," 162.
41) Saghafi "The World after the End of the World," 272.
42) 이하의 논의는 Leonard Lawlor, From Violence to Speaking Out (Edinburgh: Edinburgh UP, 2016), 253-59 참조.
43) Jacques Derrida, Politics of Friendship. Trans. George Collins (London: Verso, 1997), 213-14.
44) Lawlor, From Violence to Speaking Out, 254.
45) Lawlor, From Violence to Speaking Out, 254.
46) Lawlor, From Violence to Speaking Out, 253.
47) Derrida, The Beast and the Sovereign, Volume II, 268.
48) Naas, "If you could take just two books...," 60.












작가소개 / 민승기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 칼리지 객원 교수. 해체론과 정신분석이 겹치는 공간에 관심을 갖고 있다. 지은 책으로 『라깡의 재탄생』(공저), 옮긴 책으로 『바디우와 지젝: 현재의 철학을 말하다』, 논문으로는 「눈먼 나르시수스」, 「열림의 윤리학」등이 있다.


《문장웹진 2018년 0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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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그라미와 동그라미, ∞ - 김멜라의 「이응 이응」1)을 읽으며 ‘사랑’을 생각하기 송연정 동그란 이응 “성욕은 만지고 닿고 싶은 마음과 어떻게 다를까.”2) 어떻게 다른지는 모르겠다만, ‘사랑 없는 섹스’라는 말을 생각해 볼 때, 어떻게든 다르긴 다를 것만 같다. 사랑하는 이에 대한 무수한 열망 중 하나가 성적인 끌림으로 발현될 수는 있지만. 성적으로 결합했다고 해서 상대방을 사랑한다고 말하기엔 다소 난감하다는 쪽이 우리에게는 훨씬 익숙하게 느껴지니 말이다. 이러한 태도에서라면 성욕과 사랑 중 우위를 점한 쪽은 아마도 사랑이다. 사실 성욕은 사랑이 아닌 그 어떤 감정과 붙어도 대부분 진다. 적어도 성욕이 순전히 육체적인 충족만을 위해 발동된다는 전제하에서는 말이다. 두 사람이 서로에게 이끌려 마침내 두 영혼이 공명하는 일은 낭만적이며 아름답고 심지어 숭고하지만, 몸과 몸의 결합은 충동적일뿐더러 한때이고 가끔 추잡하기까지 한 것 같다. 몸을 열등한 것으로 깎아내리며 그와 관련한 일체의 욕망을 부정하고 터부시하는 일은 우리의 오랜 습관이기도 하다.3) 그러나, 만지고 닿고 싶은 마음은? 상대를 만지고 싶고 또한 상대의 손길이 나에게로 향했으면 하는 애욕은, 어쩐지 성적인 뉘앙스를 함의하고 있는 듯하면서도 정서적인 이끌림을 수반하는 것도 같기에 더욱 미묘하고 어렵게 느껴진다. 김멜라의 「이응 이응」은 ‘이응’이라는 둥근 캡슐을 통해 성욕에 대한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며, 나아가 앞선 질문에 대한 나름의 대답을 마련해 본다. 「이응 이응」의 세계관에서 이응은 공원이나 목욕탕, 미술관이나 도서관, 학교와 주민센터와 병원에서도 찾아볼 수 있을 정도로 상용화된 기계이다. 사람들은 거대한 물방울처럼 생긴 캡슐 형태의 이응으로 들어가 “손오공의 머리띠처럼 생긴 은색 띠를 머리에 두르기만 하면 됐다.”(32쪽) 남성과 여성 혹은 그 너머의 스펙트럼 속 정체성의 명도를 조절하고, 성적 끌림 대상과 정서적 끌림 대상, 끌림의 크기, 받고 싶은 곳과 하고 싶은 곳··· 이외에도 몇 단계의 설정을 완료하고 나면 이응이 작동한다. “근육의 수축과 경련 그리고 이완. 오감을 채워 주는 이미지에 둘러싸여 양극과 음극의 전기 자극에 따라 맥박수와 혈압이 상승하고 나중에는 모든 긴장이 풀리며 상쾌해진다. 무의식 상태로 들어서게 하는 델타파부터 휴식과 이완을 주는 알파파까지. 이응은 단계별로 뇌파의 변화를 유도해 우리의 몸과 의식을 열린 상태로 만들어” 주는(30쪽), 그야말로 청결하고도 건강하며 합법적인 성욕 해소 기계인 것이다. 이응의 현자는 바야흐로 새로운 로맨틱의 시대가 열렸다고 말했다. 번식과 성욕, 사유재산이 만들어 낸 오랜 통치술의 사슬을 끊어 내고, 진실로 사랑의 의미를 깨우친 이들이 평등하고 자유로운 관계를 맺는 반려의 르네상스가 도래했다고 말했다.

  • 관리자
  • 2025-05-01
새로움의 경제 2(2)

새로움의 경제 2(2) 강동호 1. 새로움의 역설 광인은 입을 다물고 청중들을 다시 바라보았다. 청중들도 입을 다물고, 의아한 눈초리로 그를 쳐다보았다. 마침내 그는 등물을 땅바닥에 내던졌다. 등불은 산산조각이 나고 불은 꺼져버렸다. 그가 말했다. “나는 너무 일찍 세상에 나왔다. 나의 때는 아직 오지 않았다. 이 엄청난 사건은 아직도 진행 중이며 방황 중이다. 이 사건은 아직 사람들의 귀에 들어가지 못했다. 천둥과 번개는 시간이 필요하다. 별빛은 시간이 필요하다. 행위는 그것이 행해진 후에도 보고 듣게 되기까지 시간이 필요하다.” - 니체, 『즐거운 학문』1) ‘새롭다’라는 말은 대개 ‘다르다’ 혹은 ‘최근에 생산되었다’라는 의미가 결합된 단어로 통용되곤 한다. 새로움이라는 개념이 일상에서 빈번하게 사용되는 까닭은 그것이 대상의 특징적 차이를 지시하고, 그 특별한 가치를 강조하는 데 있어 가장 직관적인 기호에 해당해서일 것이다. 시장(market)은 이러한 ‘기호 가치’로서 새로움이 이견 없이 유통되는 대표적인 시공간 가운데 하나이다. 가령 어떤 자동차를 일컬어 ‘새로운 자동차’라고 규정한다면 우리는 해당 자동차가 여타의 자동차들과 다르며, 상대적으로 최근에 출시된 신상 모델이라는 사실을 즉각적으로 인지할 수 있다. 이때 새로운 자동차가 사람들로부터 더 큰 매력과 구매 의지를 불러일으키는 것은 자연스럽고 합리적이다. 새로움은 해당 제품의 기능적 우월성을, 그리고 그로부터 얻게 될 한층 차별화된 만족과 유용성을 표현한다. 여기서 새로움이라는 기호에 함축되어 있는 ‘차이’(difference)의 기제는 새로움이 일종의 비교적 가치라는 점을, 나아가 차이의 비교 우위를 정당화하는 원리가 발전·진보·개선 등의 시간적 내러티브와 밀접하게 연동되어 있음을 말해 준다. “우리 시대에는 차이가 최우선의 높은 가치를 지닌다”2)는 바우만의 진단처럼, 새로움의 가치화 현상이 기반하고 있는 것은 이른바 차이의 경제(economy of difference)이다. 차이적 가치 혹은 가치로서의 차이야말로 교환·거래를 활성화하는 매혹의 원천이자, 시장의 혁신적 성장을 가능하게 하는 경제적 원리의 토대이기 때문이다. 표면적으로 차이의 경제는 예술 작품의 미학적 의의를 규명하는 과정에도 유사하게 적용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주지하듯 예술은 작품들 사이의 차이를 판별하고, 원본성·독창성·창의성 등의 이름으로 작품의 새로움을 조명하려는 제도적 장처럼 인식된다. 하지만 예술 작품의 새로움이 차이의 논리를 통해 온전히 설명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전통적으로 적지 않은 이견이 제기되어 왔다. 이를테면 키르케고르(Kierkegaard)는 새로움과 차

  • 관리자
  • 2025-05-01
네버랜드 탈출기

네버랜드 탈출기 ― 김희준론1) 최다영 1. 신(新) 아카이브 프로젝트 선행 평론에서 적확하게 포착하고 있듯 “근원이나 태생에 대한 감각”이나2) “원형 회귀본능”을3) 말하지 않고서는 김희준의 시에 접근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들은 현상의 내밀한 원인을 해명하거나 김희준의 시적 작업이 내포한 고발과 대항 의식을 읽어 내기엔 여전히 충분하지 않은 키워드이기도 하다. 수록작이기도 한 ‘사기(史記)꾼’이라는 제목은 충실한 아키비스트(archivist)이자 교란하는 트릭스터(trickster)라는 상반된 함의를 모두 내포한다. 혹은 아키비스트의 본령이 트릭스터일 수밖에 없음을 일깨우는 것인지도 모른다. ‘사기(史記)꾼’으로서 김희준은 고대부터 이어져 내려온 신화와 성서, 동화 등 무수히 집적된 공동체적 기억의 편린을 환상적으로 중첩하고 그로테스크하게 변형시킨다. 그리고 이렇게 비틀고 왜곡하는 지점에서 김희준만의 원형적 이미지가 접속 면의 틈을 찢고 출현한다. 그의 시의 근간을 형성하는 태(胎)가 익숙한 공통의 근원 서사에서 발생했을지언정 반복적으로 그려지는 성교와 번식, 근친과 식인의 모티프는 공포스러운 재생 감각으로 연결되며 그만의 개인적 이미지로 일관되게 수렴하는 것이다. 바르부르크의 언급대로 이미지가 생물학적 필연성의 산물이라면, 김희준이 강박적으로 봉합하고자 한 거대 명제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인류는 종교, 예술, 문학 등 다양한 방법을 경유하여 원초적 두려움으로부터 자신과 공동체를 보호하며 종의 계승을 보존해 왔다. 출생과 소멸에 대한 두려움은 어느 인간도 피해 갈 수 없기에 해결할 수 없는 보편타당한 종의 운명 앞에서 이를 추상화하고 거리를 둠으로써, 또 사회적 집단 기억을 대를 이어 계승함으로써 두려움을 봉합하고 파토스를 안정시켜 온 것이다. 마찬가지로 김희준은 그 자신의 개인적 이미지를 개발하고 반복적으로 중첩시킴으로써 이미지의 기원에 대한 대답을 동시대에 가장 분명하게 제시하며 등장했다. 김희준에게 있어 기원을 더듬는 일은 그 계보를 추적하는 것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신화적 세계관을 축조하고 공고히 하는 데 있다. 그리고 이때 감지되는 건 신화와 동화의 알레고리 이면에 자리한 가부장적 폭력에 대한 고발과 저항 의식이며 더 나아가 발생과 소멸에 대한 인간의 근원적 두려움이라 할 수 있다. ⓒ엄윤채 (@90r1p) 2. 재생하는 네버랜드 김희준의 시 속에서는 무언가가 끊임없이 쏟아져 내린다. 그것은 주로 ‘소나기’이지만 때로는 “불”이기도 하고(「인류도감」) “아이”이거나 “유성”(「백색소음」), “사내”(「페스티벌」), “밀도 높은 당신” 혹은 “저녁”(「오후를 펼치는 태양의 책갈피」, 「테트리스 적응기」), &ld

  • 관리자
  • 2025-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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