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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 ‘랩’소디 인 블루: 여섯 개의 트랙

  • 작성일 2018-11-01

[기획-인터뷰]

 

 

'랩'소디 인 블루: 여섯 개의 트랙

― 컨소울이라는 장르

 

 

이민하

 

 

 

    어떤 실험은 자신의 몸 안에서 자연스럽게 이뤄진다. 즉흥적으로 쏟아 내는 몸의 이야기를 자유롭게 기록하는 것이 실험의 전부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내가 만난 래퍼 컨소울은 컨소울 자신의 음악실이자 실험실이다. 그러니까 1992년 11월에 태어난 그는 딱 26년짜리 몸 안에 작업실을 갖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문 앞에는 'Konsole'이라는 문패를 걸어 두었다. 한 살 한 살 나이가 들수록 작업실은 한 평 한 평 평수가 늘어날 것이다.
    컨소울을 만난 건 10월 1일, 우리 동네 '아나키브로스(Anarchy Bros)'에서였다. 골목 깊숙이 아늑하고 은밀하게 자리 잡은 이 카페는 지난해 봄 이삿집 구하러 다닐 무렵 찜해 두었던 곳이다. 그 후 가족들과 한 번, 지인들과 한 번, 이번이 고작 세 번째 방문이지만 몸보다도 마음이 머물기에 좋은 장소 같았다. 컨소울에게 단골집이 있다면 그리로 갈 참이었지만 부천에 사는 그는 흔쾌히 이곳으로 와 주었다. "다리는 좀 어때?" "많이 좋아졌어요." 인터뷰 날짜를 잡으려고 문자를 주고받아서인지 신기하게도 어제 만난 사이처럼 편안했다.
    사실 그를 처음 만난 건 6월이었다. 낯가림이 있는 내가 낯가림이 있는 그에게 인터뷰를 청하고 미리 얼굴도 익히려고 만든 저녁 자리였다. 수에게 부탁했고 수와 동행했었다. 지난봄 원고 청탁을 받았을 때 며칠을 주저하면서도 끝내 뿌리치지 못한 건 어렴풋이 그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나는 그의 음악을 아꼈고 그라면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것 같았다. 인터뷰 말고 이야기. 그보다 조금 앞서 그가 우울증을 앓고 있다고 들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그러나 진심으로 "내가 그럼 밥 사 줘야겠네." 수에게 말했었다. 하지만 그는 발목의 인대가 끊어져 수술 후 병원에서 3개월이나 꼼짝할 수가 없었다. 가을에 다시 만난 컨소울은 적당히 낮고 적당히 느리고 적당히 조용한 음색을 지니고 있었다.

 

 

    음악, 소년

 

    ― 그런데 이름 말이야. 영어로도 그렇고 한글 표기도 그렇고 어떤 게 맞아?
    ― 리셋 이후엔 Konsole만 써요. 그게 처음에 만들었던 거예요. 한글로는 옮기기 나름이니까 상관없어요.
    흔히 '컨소울'로 알려져 있고 '콘소울'이나 '컨솔'로도 불리지만 그는 개의치 않는 눈치다. 초창기 공연 때 라인업에 우연히 'Konsoul'로 표기된 이후 그냥 그렇게 써 왔다고 한다. 나도 처음엔 'Korean soul'쯤으로 짐작했었다. 흔한 말로 힙합 하면 '소울'이니까. 하지만 그의 작명은 의외로 단순했다. 게임을 즐겼던 중학생 시절 '콘솔게임(console game)'에서 착안했다고. 음악을 시작하게 된 계기도 단순했다. 어느 날 온라인상의 게임 친구가 음악을 할 거라며 자작곡을 들려주었다. '난 더 잘할 수 있는데.' 그는 생각했고 정말 해 버렸다. 그런데 너무 재미있어서 게임 할 시간에도 수업 시간에도 음악을 했다. 어렸을 때부터 해외 음악을 듣긴 했지만 만화랑 프로레슬링을 좋아했고 프로게이머가 되려고 했던 '소년 김환승'은 그렇게 음악에 빠졌다.
    대학 때 별명이 '동방귀신'이었어요. 동아리방 귀신? 네. 녹음할 수 있는 환경이 있어서 동아리에 들었는데 거기서 거의 살았어요. 그때 실력이 늘었어요. 작업량이 엄청났거든요. 학교 안 다닌 줄 알았는데(웃음).
    비범한 재능과 확고한 꿈이 갖춰진 사람에게 대학 시절은 아까운 시간일 수 있고 컨소울에게도 진학은 의미 없을 거라 막연히 생각했었다. 새로운 걸 추구하면서 혼자서 죽도록 공부했겠지 그런 생각.
    수업은 생각만큼 재미있지 않았어요. 1학기 내내 강의 안 듣고 음악만 만들었어요. 그 후 등록을 포기해서 결국 제적당했죠. 전공이 뭐였는데? 건축과요. 정말? 왠지 어울린다. 컨소울 음악에선 어떤 구조랄지 공간감이 느껴져. 인테리어 디자인에 관심이 많았어요. 나도 국문과 졸업 직후 인테리어디자인 학원을 6개월 다녔었어. 취업 목적은 아니고 공간에 대한 관심이 많았거든. 저도 공간을 만들거나 꾸미고 싶었어요. 음악을 업으로 삼을 생각까지는 못 했었는데 오히려 건축과에서 확실해진 거죠(웃음).
    실험적이니 전위적이니 초창기부터 그의 음악에 대한 평가가 따랐다. 지금이야 흔해진 트랩 음악을 일찍이 2011년부터 시작했고 팝이나 전자 음악으로서의 랩 음악을 폭넓게 확장시킨 것으로도 주목받았다. 이런 건 전문가들의 견해이고, 나는 그의 음악에 대한 열정과 스타일에 얽매이지 않는 표현의 자유로움이 좋았다. 특히 <R E S E T>이 그랬다.
    ― 자신의 노래 중 가장 좋아하거나 애착이 가는 곡 있어? 난 리셋도 너무 좋았고 6Track은 정말 멋진 앨범 같아. Always나 Cloud9도 자주 찾아 듣는데···.
    ― 이런 질문은 어려운데 아무래도 리셋 같아요.
    ― 그래, 리셋 얘기를 해 보자.

 

 

    RESET

 

    ― 리셋 앨범 자체가 테크노 음악과 랩을 접목한 거잖아. 선례가 없는 실험이었다고 하던데, 그런데도 거칠지 않고 세련되고 절묘하게 느껴졌어. 그중에서도 리셋. 컨소울에게도 여러 면으로 특별할 것 같아.
    ― 모든 곡이 애착이 가지만 리셋은 왠지 특히 더 그래요.
    ― 나도 알 것 같아. 당시의 심리 상태와 잘 결합되었던 거라서 그럴 거야. 내겐 환상수족이란 시가 그래. 그 시절의 내면의 풍경과 내가 쓰고 싶은 방향이 자연스럽게 밀착되었거든. 그 후 사람 관계든 세상 이야기든 시선이 옮겨 가는 대로 내 방식대로 쓸 수 있게 된 거지.
    ― 저도 그게 리셋 때부터인 것 같아요. 제 자신을 그대로 드러낸 곡인데 그러면서 제 음악이 전체적으로 바뀌었어요. 이후에는 사람들을 전혀 의식하지 않고 저만의 음악을 하게 됐어요.
    그러니까 컨소울은 한동안 회의감에 빠져 있었다. 돈, 여자, 마약 등의 이야기로 치우치는 트랩 문화에 대해서다. 트랩을 고집해 온 건 사운드적으로 장르 자체를 좋아했던 거지 미국 본토의 문화를 따라가려 했던 건 아니었다고. 그는 모든 걸 원초적인 상태로 돌리고 싶었다. 그동안의 커리어나 작업물들을 백지화할 수는 없어서 대신 활동명을 초기화했다. 다시 시작하겠다는 이 선언에는 자신의 병까지도 포함시켰다. 아니 자신의 증상을 아예 전면에 드러냈다. 어쩌면 자신과의 정면 돌파였다. 단절된 가사가 반복적으로 방출되는 건 마치 뇌가 발작할 때의 전기 신호 같다. 그것은 컨소울이 몸을 악기처럼 쓴다는 얘기다. 세상에서 단 하나밖에 없는 악기.
    ― 음악이 굉장히 새로웠어. 낯선데도 흡입력이 있었던 건 진짜 체험이 매개체여서 그럴 거야. 음악과 실험, 뮤비의 조화도 완벽하다고 느꼈어. 뮤비에 약봉지 나오잖아? 그것도 신선하고 신기했어. 래퍼 하면 쉽게 떠오르는 환각제가 아니라 그냥 병원에서 처방받는 약이라는 게···. 뮤비는 같이 기획한 거야?
    ― 그런 건 아니에요. 약봉지를 챙겨 가기는 했어요. 리셋이라는 앨범 자체가 병에 관한 이야기이고 내 병을 공개해야겠다는 생각은 했으니까요. 그런데 뮤비 나온 거 보고 깜짝 놀랐어요. 병이 있는 아이들도 아닌데 표현을 너무 잘해서···.
    라픽과 함께 만든 이 영상을 처음 보게 됐을 때 나는 수에게 멋있다고 말해 줬었다. 공포감이나 섬광 같은 전조 증상이랄지 자아의 혼란, 분열, 고립 같은 것들이 시각화되어 있었다. 3년 전 수가 서울로 올라온 건 음악과 창작에 대한 열망 때문이었다. 처음엔 폰이나 모니터, 스케치북을 가리지 않고 아트워크 작업을 했다. 당시의 그림들이 아까웠지만 수는 가차 없이 버렸다. 그 무렵 좋아하던 래퍼들과 인연이 닿았다. <Crazy> 앨범 커버를 만들면서 컨소울과의 인연도 시작되었다. 그 후 일 년여 만에 수는 영상 작업까지 병행하면서 새장을 벗어난 새처럼 날아다녔다. 그런 시절도, 그런 기질도 없었던 나에게 수가 불현듯 날아와 들려주는 세상 이야기는 아름다웠다. 이런 날이 오기 전까지 십수 년간 수는 내 꿈속에서는 언제나 자라지 않는 어린아이 그대로였다. 우린 늘 친구처럼 만나고 모든 걸 공유해 왔는데도 그랬다. 그리고 그건 나의 성장 장애를 뜻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최근 3년간 내가 극도로 아팠던 건 산산조각 났던 시간의 뼈들이 몸에서 리셋되는 과정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오늘 약은 먹었어? 오기 전에 먹었어요. 약 먹으면 괜찮아? 예전처럼 쓰러지지는 않아요. 그런데 잠을 많이 자요. 무기력할 때가 많아요. 요즘은 하루에 열일곱 알을 먹거든요. 조울증에 공황장애까지 와서···. 아침에도 병원에 다녀왔어요.
    내가 본 의사의 역할이란 질문하고 경청하고 눈물 닦으라고 티슈 뽑아 주는 것. 나는 창피해서 병원을 끊었었다. 그보다 주변의 도움이 더 효과적이었다. 이모가 매일 전화해 줬다. 구급차를 돌려보내고 몇 시간 견디면 공황발작도 잦아들었다. 그러니 정신과 약은 가급적 끊기를 권했다. 그리고 이후 그는 정말 끊었다. 몸과 마음은 서로를 챙겨야 하니까 둘 다 앓으면 안 된다. 컨소울은 서른 번도 넘게 쓰러졌었다. 'epilepsy'라는 단어가 가사에 나온다.
    ― 뇌전증 이후에 우울증이 심했어요. 이러다 죽는 건 아닐까 늘 불안했어요. 쓰러지면서 머리가 찍혀 피가 나거나 혀를 깨물기도 했거든요. 그런데 우울증이 조울증으로 바뀌더라고요. 에너지가 막 넘칠 땐 하루에 두 곡도 만들고. 감정이 파도치듯 해서 이번 앨범에 그대로 담았는데 작업하는 데 한 달도 안 걸렸어요. 단기간에 집중적으로 몰두하는 편이라서 그러고 나면 계속 아무것도 못 해요. 사람들 만나도 아무 말 안 하고.
    나도 글을 쓰고 나면 몸이 다시 리셋될 때까지 아무것도 못 한다. 이 일은 아무리 반복해도 익숙해지지 않는다. 누군가 내게 그쯤 되면 하룻밤에도 뚝딱 쓰는 거 아녜요? 그랬을 때 그럴 리가요··· 하고 말았지만 속으론 그가 끔찍했었다. 익숙해지지 않는 건 병도 마찬가지다. 컨소울은 자신의 병이 음악에 영향을 준다고 생각할까.
    ― 뇌전증 때문에 제 음악 스타일이 바뀌었다는 생각은 해 봤어요. 뇌전증이 발병해서 영향을 줬다기보다 그 병으로 인해 저한테 좀 더 솔직해지고 저를 표현하는 데 집중할 수 있도록 삶에 영향을 주니까 그것이 음악에도 반영이 되는 것 같아요.
    이쯤에서 고백해야겠다. 나도 뇌전증이다. 등단 즈음 알았다. 도스토옙스키나 고흐가 홍보 대사 격인 측두엽 뇌전증이다. 정확히는 오른쪽. 희귀병도 아니고 '하이퍼그라피아(hypergraphia)'니 '창조적 열병'이니 수많은 예술가들이 검증해 준 터라 나쁘진 않다. 뇌파검사를 할 때마다 푹푹 쓰러지지 않느냐는 의사의 소견과 달리 나는 잠깐씩 의식을 잃거나 환각에 드는 정도여서 잘 들키지도 않는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기면증도 있기에 증상이 중화되는 건 아닐까, 이건 내 나름의 합리화이지만 내가 약을 거부하는 진짜 이유는 다른 이들이 경험하지 못하는 순간들을 포기하고 싶지 않아서일 것이다. 꿈과 망각, 환청과 환시, 공포감과 신비로움··· 이런 특별한 체험은 사람들이 닿지 못하는 감각의 영역에까지 데려다주니까. 특혜를 잃지 않으려면 고통과 불안을 감수해야 하는 이 병, 축복일까.

 

 

    거울

 

    ― 쓰러지는 내 모습을 제 눈으로 직접 본 거예요.
    ― 어떻게? 그거 정말 충격이었겠다.
    ― 누워 있는데 전조 증상이 확 올라오는 거예요. 그대로 발작이 일어난 적 있어서 너무 무서워 나도 모르게 일어나 자리를 옮기다가 거울 바로 앞에서 몸을 떨다가 쓰러졌어요. 그 장면을 직접 본 이후로 작업을 못 했어요. 그게 쉬기 시작한 첫 번째 시점이었어요.
    그는 정말 충격받았다. 그건 자신의 몸을 타인처럼 목격한 이물감이었고 동시에 타인의 눈으로 자신의 몸을 지켜본 당혹감이었을 것이다. 그 사건 이후 사람들이 당황하지 않도록 병을 미리 알렸다. 공개적인 자리에서도 털어놓았다. 그리고 자신의 몸과 자신의 세계에 집중하게 되었고, <R E S E T>이 만들어졌다. 그의 몸은 그렇게 그의 음악과 하나가 되었다.
    '청년 김환승'은 툭하면 쓰러졌다. 깨어나 보면 신체의 어딘가가 늘 망가져 있었다. 뇌전증은 고등학교 때 발병했다. 그의 부모님은 진료 기록마저 지워 주기를 병원에 청했다고 한다. 그의 병이 드러나 사회로부터의 차별이나 불이익을 초래할까 봐 두려워서였다. 자식을 보호하려는 평범한 부모였다. 평범하다는 건, 병이 없다는 뜻일까. 나의 친할아버지는 조현병이 있어서 어린 아들에게 돌팔매질을 하고 골방에 틀어박혀 그림을 그리고 글을 썼다고 한다. 집 밖을 떠도는 어린아이를 이웃들이 불러 밥을 먹였다고 한다. 가정에 대한 갈증이 학구열로 전이됐을까. 아버지는 일찍이 집을 나와 고학을 하며 법학을 전공했지만 그때 얻은 폐결핵으로 청춘은 고갈됐다. 내 거울 속엔 가끔 아버지가 누워 있다. 아버지는 늘 그림을 그렸는데 캔버스 앞에 오래 머물지 못하고 자리에 눕곤 했었다.
    이건 거울에 관한 또 다른 얘기. 컨소울의 <Man In The Mirror>를 최근에야 들었다. 자신을 극복하려는 힘이 느껴졌다. 가사에는 타인이 아닌 오직 자신을 능가하려는 음악에의 집념도 실려 있었다. 사운드 때문인지 나는 이 곡이 컨소울이 자신에게 거는 주문이자 끊임없이 전진하게 만드는 행진곡처럼 들렸다. 그는, 그리고 그의 음악은 그렇게 자신의 한계를 넘어 늘 새롭게 태어났을 것이다. 그것이 또 다른 자신과의 공존이자 세상과의 소통 방식일 것이다.

 

 

    소통

 

    ― 리셋 전후로 작업이 뜸했던 것 같아. 음악적인 고뇌를 하는 거라고 생각했어.
    ― 사람들과 차단하고 싶기도 했고요. 쉬다가 준비가 됐을 때 다시 만나고 다시 차단하고 이런 게 늘 반복이 됐던 것 같아요.
    ― 그런데 요즘 음악은 소모 주기가 빠르잖아. 팬들은 신곡을 재촉하고 쉬거나 고민할 시간도 주지 않고 이동해 버리지. 트렌드에도 민감하고 대체품도 많아졌으니까. 이미 익숙한 환경일 테니 무의미한 질문일 수도 있겠지만 혹시 이런 현상에 대해 충돌한다거나 한계 같은 걸 느끼지는 않아?
    ― 음악이 소모품처럼 된 것 같기는 해요. 그런데 저와는 무관한 일 같아요. 그런 경향은 요즘 앨범이 발매되는 형태나 청중의 행동에 의해 만들어진 거잖아요. 저는 앨범을 내는 주기가 불규칙한데 그건 사람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내가 결정하는 거니까요. 대중을 상대하는 포지션도 아니고, 유명해지고 싶고 이런 생각도 없고요.
    ― 그렇지, 대중성과 소통은 별개니까. 나도 그 대상이 '누구나'여야 한다는 부담이 없을 뿐, '누군가'와는 완벽하게 소통한다는 설렘이 좋아. 사소하지만 희귀하고 속 깊은 비밀처럼. 아무래도 감성이 비주류야(웃음). 그런데 음악은 대중과 가장 가까이서 소통하는 거잖아. 대중적 인기에 무관심하다 해도 그럼에도 곡을 공개하고 음원을 발매한다는 건 누군가와는 절실히 소통하고 싶은 거겠지.
    ― 엄청 공감해요. 뭐랄까, 모든 대중과의 소통보다는 제 음악을 좋아해 주고 공감해 주는 사람들이면 되는 것 같아요. 주변의 권유도 그렇고 유명한 경연 프로에서 섭외가 와도 응하지 않은 이유를 제 자신도 몰랐었는데 듣고 보니 정리가 됐어요. 제가 가끔 무대 위에서도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이러다가 실수를 해요. 그래서 큰 공연보다는 소규모나 자유로운 클럽 공연이 좋아요. 나는 왜 항상 다르고 다양한 사람들 틈에서 잘 못 어울릴까, 그런데도 음악을 하고 있잖아요. 그게 이상했는데 이제 알겠어요. 제가 제 성격을 이해 못 할 때가 있거든요. 중학교 땐 방학 내내 아예 밖에 안 나간 적도 있고···.
    ― 나도 석 달 동안 현관문도 안 나간 적 있어, 서른도 훌쩍 넘었을 때(웃음). 요즘 신기하게 느낀 것 중 하나는 뮤지션보다 아티스트라는 용어를 쓴다는 거야. 생각해 보니 래퍼들은 단지 음악만으로 표현하지 않아. 춤과 무대, 뮤비, 심지어 패션까지도 자기만의 스타일을 연출하고 추구한다는 것. 비주얼이 음악 활동에 기여하는 거지. 모든 시청각 요소를 총동원해서 말이야. 내 이해가 맞을까.
    ― 그것도 그렇지만 아무래도 작사가적인 측면이 큰 것 같아요. 단지 가사를 받아서 노래하는 게 아니라 래퍼들은 직접 작사를 하면서 자전적인 창작을 하니까요.
    ― 그런 것도 같네. 글 쓰고 싶어 랩 음악을 시작했다는 래퍼들도 있더라고. 랩 가사는 접근성이 쉬우니까. 글을 쓰는 입장으로 볼 때 래퍼들은 두 가지 유형이 있는 것 같아. 가사의 의미에 공을 들이거나, 혹은 음악적 요소에 치중하거나. 컨소울은 후자 같은데? 멈블 랩이랄까 발음도 뭉개고, 어순도 무시하고.
    ― 시적이거나 비유적인 가사를 쓰는 래퍼가 많지만, 저는 그때그때의 감정을 직접적으로 표출하는 식이고 비유든 직접적인 표현이든 도달하는 건 같다고 생각해요. 가사를 안 쓰는 경우도 많아요. 미리 써 놓으면 정리가 돼 버린달까. 그냥 말하는 것처럼, 녹음할 때 즉석에서 원테이크로 프리스타일을 하는 거죠. 가사의 의미나 전달력도 중요하지만, 제겐 순간의 느낌과 음으로 표현될 때의 사운드가 더 중요하거든요. 리셋 이후엔 모호한 가사도 많아졌어요. 원래 감정이란 모호한 거니까(웃음). 저는 글도 받아들여지는 대로 느끼고 해석에는 초점을 두지 않아요.
    ― 모호한 게 진실인 거지. 규정될 수 없는 거. 굳이 억지로 해석할 필요는 없어. 시라는 것도 정확하게 언급하거나 전달하는 건 아냐, 암시만 하는 거지. 대화를 할 때 생각이나 경험해 온 것들이 서로 일치할 수는 없어도 공감할 수는 있잖아. 시에서 어떤 이미지가 그려지거나 표현 하나만 마음에 들어도 그걸 즐기면 되거든. 대신에 시에 관심이 있다면 많이 읽는 거고. 많이 접할수록 안목과 취향이 생겨서 자기가 고르고 취할 수 있는 기쁨이 늘어나니까.
    아, 저도 궁금해서 찾아봤어요. 그 시 정말 좋았어요. 뭐? 가족 이야기이고 '교복'이란 단어 나오는 건데···. 흑백사진? 맞아요. 시를 접해 본 적이 없는데, 시가 이럴 수도 있구나 너무 재밌고 신기해서 시에 대한 고정 관념이 깨졌어요. 사람들도 많이 깨지면 좋을 텐데(웃음). 옛날 시나 교과서 시 말고 세상엔 즐길 수 있는 시들이 얼마든지 있거든.

 

 

    日記

 

    2013년 싱글 앨범 <Turn Up> 데뷔. 하지만 그는 일 년 만에 음원을 내린다. 원래 녹음했던 파일이 날아가서 다시 믹스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많았어요. 그런데 어렸을 때라 완성도가 미흡한 상태에서 조급하게 공개했던 거라서요. 나도 첫 시집에 등단작이 없다. 그가 이름을 알린 건 <Aloha> 때부터인 것 같다고 했다. 곡을 내고 나면 찾아 듣지 않는다고도 했다. 나도 그래. 그때에는 그렇게 표현할 수밖에 없었던 필연적인 산물이었을 텐데. 우리는 매일 조금씩 달라지니까. 맞아요, 옛날 일기 들춰 보는 것 같은 기분. 저는 앨범을 '목소리'로 쓰는 일기장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싱글이든 미니든 정규든, 그때그때마다 일기의 길이가 달라지는···.
   그는 이번에는 아주 긴 일기를 썼다. 커버는 올해 자신이 찍었던 사진들을 아이폰 기능을 통해 하나로 모은 거라 했다. 앨범 제목은 '22'. 특별한 뜻이 있는 걸까. 2는 그냥 제가 좋아하는 숫자예요. 뭐든지 처음 할 때보다 두 번째 할 때 잘돼서요(웃음). 11월쯤 발매 예정이라 미리 듣는 즐거움을 맛보았다. 열한 곡이나 꽉 차 있었다. 조금씩 나누어 싱글이나 미니 앨범으로 내라는 주변의 만류가 있었다고 한다. 그의 고집은 음악에 있어서도 요즘 트렌드와는 달랐다. 타인의 목소리도 섞지 않았다. 동일인이 맞나 싶게 음색과 스타일이 변해 왔지만, 이번 색깔은 랩보다도 록 밴드 음악의 옛 감성이 실렸다. 레트로를 의도한 거냐고 물었더니 아니라고 했다. 밴드 음악은 해 보고 싶었어요. 이번에는 기타가 어울릴 것 같아 기타 작업을 많이 했고요. 레퍼런스를 삼거나 의도하고 만든 적은 없어요. 새로운 것에 대한 부담도 줄었고요. 어차피 만족은 없는 거고 누군가는 이미 했던 거잖아요. 그때그때 마음의 상태에 따라 음악이 변한다는 것. 나는 전적으로 공감한다. 마음이란 내버려두면 늘 새로워진다. 그는 이번 일기엔 마음이 흘러가고 요동치는 지점을 촘촘하게 담았다. 그렇게 하루하루 흘러가면서 자신만의 이야기를 옮긴다. 그것은 그러므로 매 순간 유일하고 고유해진다.

 

    온라인 매장에서 구입한 USB형 녹음기와 비뚤배뚤 질문이 적힌 노트, 스마트폰보다 해상도가 떨어지는 옛날 디카. 어설프게나마 갖추었던 준비물이었지만 굳이 필요치 않았다. 내가 불안해하자 그는 자신의 폰으로도 녹음을 했고 이야기는 질문지 없이도 흐르고 흘러 네 시간이나 지났다. 잠깐, 질문할 게 남았나 노트 좀 볼게. 질문이 되게 많았네요. 열세 개. 근데 최근 추구하는 경향, 이런 건 다 쓸데없는 질문이었네. 배고프겠다. 이제 밥 먹으러 가자. 참, 사진 좀 찍고. 사진 찍을 줄 몰라서 옷도 머리도 엉망이라고 했지만 어차피 분위기를 찍을 거라서 괜찮다고 했다. 컨소울 식으로 그날의 일기를 남기는 거니까. 그리고 나도 아주 긴 일기를 썼다. 그러나 그날 만난 컨소울은 컨소울의 일부다. 내일의 컨소울, 겨울의 컨소울이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컨소울에게 장르는 없다. '컨소울'이라는 장르만 있을 뿐이다. 우리는 불현듯 또 스칠 것이다. 2018년 10월 1일, 맑음. 그리고 적당히 바람, 소울소울.

 

 

 

 

 

 

 

 

 

 

 

 

 

 

 

작가소개 / 이민하

2000년 ≪현대시≫로 등단. 시집 『환상수족』, 『음악처럼 스캔들처럼』, 『모조 숲』, 『세상의 모든 비밀』 등이 있음.

 

   《문장웹진 2018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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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나무 숲을 서성이는 고양이, 그리고 토마토 이훤 이번 여름 나는 지독한 갈증에 시달렸다. 하루 몇 컵씩 물을 마셔도 몸이 아우성쳤다. 더 많이 필요하다고 외치는 것 같았다. 이상할 정도로 몸이 약해졌다. 어쩌면 너무 많은 마음을 쫓느라 그랬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곤란해졌다. 물을 너무 많이 마시면 소화가 안 되고 소화가 안 되면 자연히 몸에 수분이 부족해졌다. 하여 또다시 갈증으로 이어졌다. 나는 이 일련의 과정이 내가 평소 불안과 맺고 있는 관계와 비슷하다는 생각했다. 잘 지내다가도 어느 날 갑자기 위태로워지곤 하는데, 무엇이 먼저였는지 모르겠다. 이미 내가 불안한 사람이었는지, 불안은 어디든 자라므로 그가 날 알아볼 수밖에 없었던 건지. 불안한 자는 취약해진다. 취약한 자는 더 불안해진다. 어떤 세계는 정확한 수순을 모른 채 이어진다. 불안과 느슨하게 잘 지낼 방법을 찾고 있다. 어차피 여기 오래 상주할 것 같다. 불화해 왔지만 같이 살아야 한다면 그를 반려해 버리겠다. 그런 각오로 방 한편에 앉혀 놓고 달래도 보고, 듣기도 하고, 어깨 위에 데리고 다니며 삼십여 년간 함께의 방식을 찾고 있다. 불안에도 여러 종류가 있다. 이유 없는 불안. 이유 있는 불안. 타인에게 건네받은 불안. 나의 말과 행동을 놓아주지 못해 자초하는 불안 등 모습을 달리한다. 불안은 상상하기 어렵고 형체 없어서 익숙하거나 귀여운 물성을 입혀 본다. 이름을 붙여 본다. 그러면 조금 더 친해진 것 같고‧‧‧ 어떤 식으로든 조화하는 듯 느껴진다. 이유 없는 불안은 증식을 멈추지 않는 대나무와 닮았다. 키우는 화분이 시름시름 앓는 여름에도 대나무는 쑥쑥 자란다. 땡볕을 견디며 성인 정강이만큼 큰다. 대나무 유형의 불안은 빠르게 자라고 빠르게 퍼진다. 들춰 보면 주변을 둘러싸고 있다. 출구를 모르는 숲에 터를 잡은 박새처럼, 나는 대나무 사이를 서성인다. 온갖 나무가 거기 자라고 있다. 내가 쓰이지 않을 거라는 기우. 종이책이 점점 덜 팔리고 희귀해져서 작가란 직군이 줄어들고 사진가마저 AI에게 대체될지도 모른다는 염려. 그리고 미래를 향한 온갖 크고 작은 걱정이 모두 여기 속한다. 근거 없이도 그들은 자란다. 잘 살고 싶어서 한 번씩 낫을 들고 그 앞에 선다. 뿌리부터 베기 시작한다. 어떤 날은 숲 전체를 뽑고 싶지만 참는다. 어차피 다시 자랄 것이다. 솎아 내면서 나무들을 한 그루씩 배우고 기록한다. 마음이 기우는 방식을 배운다. 박새가 계절의 풍향을 배우듯. 한편 실체 있는 불안은 재빨리 손을 빠져나간다. 마음을 더디게 알아차리는 사람은 언제나 늦다. 하루가 지나서야 알게 되기도 한다. 직업 때문에 생겨나는 불안도 있다. 작가들은 신간이 나왔을 때 책의 추이를 살핀다. 3년간 쓴 책이 세 달도 안 돼 잊히기도 한다. 중요한 행사에 모객이 잘되지 않을까 봐 마음 쓰기도 한다. 숫자보다는 거기서 일어나는 만남이 언제나 중요하지 않겠냐고 친구에게 말하고, 나도 가끔 돌아서서 북토크 예매 상황을 살핀다. 언제든 작가로서의 생활이 끝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서

  • 관리자
  • 2025-10-01
나의 반려 시

나의 반려 시 정다연 어린아이였을 때 나는 자주 빈집에 있었다. 학교를 마치고 돌아오면 맞벌이하셨던 부모님이 퇴근하실 때까지 혼자 보내는 시간이 많았다. 무료하게 창밖을 구경하거나 거실 소파에 누워 천장을 보다가 엄마가 간편히 먹을 수 있도록 준비해 둔 음식을 데워 먹었다. 익숙하게 빈 그릇은 싱크대에 넣어 두고 티브이 켜 두고는 화면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를 백색소음 삼아 일기를 쓰고 숙제를 했다. 그러고도 시간이 남으면 부모님 냄새가 밴 이불을 파고들며 낮잠을 잤다. 눈을 뜨면 여전히 아무 무늬 없는 흰 벽지가 사방으로 펼쳐졌다. 일상의 곳곳이 자주 비어 있었기 때문에 늘 무언가로 채우고 싶었던 걸까. 한동안은 무언가를 모으거나 기르는 데 열중하기도 했다. 첫 시작은 개미였다. 놀이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개미를 채집통에 담아 와 길러 보겠다고 떼를 썼다. 오후 내 그 안을 관찰하다가 어딘가에서 개미가 좋아한다고 들었던 과자 부스러기나 과일 껍질을 넣어 주기도 했다. 또 한동안은 머리끈에 달린 유리구슬만 모았던 적도 있었다. 간직하고 싶은 구슬을 모으기 위해 부모님 몰래 멀쩡한 끈을 가위로 자르기도 했다. 그 후로도 무언가를 애착하는 일은 계속됐다. 애니메이션 〈101마리의 달마시안 개〉에 푹 빠져 달마시안 인형을 수집하기도 했고, 조금 더 커서는 백문조를 기르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일들이 내 마음의 구멍을 온전히 채워 주지는 않았다. 아무리 좋아하는 인형으로 방을 꾸미고 반려동물에게 말을 걸어도 그 구멍은 여전했다. 다른 방식으로도 삶을 채울 수 있다는 걸 알게 된 건 한 친구를 만나게 되면서였다. 그 친구는 나와 이름이 한 글자만 달랐다. 우리는 그게 친해질 이유라도 된다는 듯이 매일 같이 붙어 다녔다. 서로의 집 주변을 오고 가면서 누구와 친했고 멀어졌는지, 아무리 애써도 잘 고쳐지지 않는 습관은 무엇인지 이야기했다. 같은 보습 학원을 등록하고 친구가 학원에 가지 않으면 나 역시 가지 않았다. 하루는 공원 벤치에 앉아 어른이 되면 무얼 하고 싶은지에 대해 떠드는데, 친구가 맑은 얼굴로 고백하듯이 말했다. 나는 시를 쓰고 싶어. 시가 좋아. 친구가 좋아한다는 시가 무엇인지 궁금해서 며칠 뒤 글쓰기 학원에 따라갔다. 그때 친구를 통해 알게 된 시는 그전에 배운 것과는 완전히 달랐다. 감정이나 대상에 대해 느낀 걸 있는 그대로 쓰면 되었다. 나와 친구가 쓰는 문장은 하나의 답으로 고정되지 않았다. 한 편의 작품을 읽고서도 감상과 해석이 달랐다. 그건 얼마든지 나의 시선으로 세상을 구부리고 펴서 말해도 된다는 걸, 고스란히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걸 의미했다. 또 하나 마음에 들었던 건 시가 그것을 읽는 이들까지 염두에 둔다는 거였다. 혼자만의 생각에 갇히는 대신 시 속에 타인이 오고 갈 수 있는 문을 내어 함께 생각을 나눌 수가 있었다. 읽고 쓴다는 감각이 가볍고 자유로웠다. 시라는 문을 통해 나의 안과 밖을 드나들 수 있다는 걸 그때 알게 됐다. 그 후로 나도 시를 배우기 시작했다. 전에는 깊이 생각해 본

  • 관리자
  • 2025-10-01
믹스테이프 원더월

믹스테이프 원더월 임국영 #1 인투로 (이승윤) 무대 위에 록 밴드가 서 있었다. 조명이 드리운 실내 공연장은 마치 화마가 뒤덮은 것처럼 새빨갰다. 땅속 깊은 곳에서 길어온 듯한 베이스 기타 소리가 인트로 라인을 열었다. 긴장감이 고조되자 보컬이 관객에게 정중히 알렸다.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주십쇼.” 보컬이 말을 끝맺자 일렉트릭 기타 두 대와 드럼이 달궈진 무쇠를 망치가 내려치는 듯한 굉음을 내뿜었다. 관중은 음악에 맞춰 고개나 손을 흔들고 환호성을 쏟아 냈다. 리듬을 따라 움직이던 나는 잠깐 내가 어디에 있는지 잊어버렸다. 연주 파트가 끝이 날 즈음 고개를 들자 코앞에 마이크가 놓여 있었다. 어? 이게 왜 내 앞에? 의문이 가시기 전에 나는 그간 매일같이 불러서 입술 끝에 달라붙은 가사를 발음하기 시작했다. 1절 후렴을 끝내고 나서야 온전한 기억을 되찾았다. 맞다. 내가 보컬이었지. #2 나는 왜 (못) “록 얘기 좀 그만 쓰면 안 돼요?” 코로나 시대에 접어들기 직전 어느 술자리에서 누군가 내게 말했다. 그 사람 말고도 직간접적으로 비슷한 조언을 했던 이들이 더러 있었지만 유난히 진지한 그의 태도에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의 논지는 다음과 같았다. 요즘 같은 시대에 록 같은 걸 누가 듣겠는가? 당신이 어떤 음악을 듣고 좋아하는지 아무도 관심 없다. 주구장창 똑같은 이야기만 하면 질리지도 않는가? 그날 술자리를 마치고 나서도 한동안은 그의 말에 사로잡혀 지냈다. 저기요 선생님, 내가 쓰고 싶은 거 쓰겠다는데 님이 뭐 어쩔 건데요, 하는 반발심이 든 것도 사실이었다. 으레 애주가가 적은 글에는 술이 등장하고 흡연가가 쓴 소설에는 담배 피우는 장면이 삽입되기 마련 아닌가. 작가에게 친숙한 소재가 작품에 반영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다, 라는 항변을 스스로 되새겼지만 어쩐지 뒷맛이 개운하지 않았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음미해 볼 만한 화두임은 틀림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왜 소설을 쓸 때 늘 음악을, 특히 록을 소재로 삼는가. 어째서 한 번도 이 현상에 관해 의구심을 갖거나 깊이 성찰해 본 일이 없었을까? 나에게 록이란 무엇인가? #3 난 알아요 (서태지와 아이들) 당신 기억 속에서 가장 오래된 음악은 무엇인가? 라디오, 오디오 플레이어, TV와 컴퓨터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대중가요거나 부모님이나 유치원 선생님이 알려 주신 동요인가? 나의 경우는 카세트 플레이어에서 재생된 서태지와 아이들의 데뷔곡 〈난 알아요〉였다. 힙합 장르를 베이스로 한 댄스 팝에 메탈 요소가 가미된, 네 살 남짓한 꼬마한텐 여러모로 자극적인 노래였다. 얼마나 자극적이었냐면 노래를 듣는 순간 트랜스 상태에 빠진 샤먼처럼 눈이 뒤집혀서 별안간 춤을 췄을 정도였다. 이 소리는 도대체 무엇이기에 내 감정을 멋대로 조종하는 것인가! 나는 아직 만나 보지 못한, 얼굴도 모르는 이와 마치 하나가 된 듯한 감각에 빠져들었다. 이 곡을 듣고 있을 누군가와 똑같은 생각을 하고

  • 관리자
  • 2025-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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