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적 기억의 역사, 그 사소함의 윤리
- 작성일 2018-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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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비평가 특집]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목소리에 더욱 귀를 기울이고자 한다. 이제 막 자리매김한 '젊은' 비평가들에게 한국문학에 관한 자유로운 글을 부탁했다. 이들의 글 속에서 꿈틀대는 변화에 대한 열망과 관습을 비트는 다른 시선을 발견하는 일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목소리들이 모여 새롭게 만들어갈 한국문학의 풍경을 기대하며 '기획'의 지면을 연다.
사적 기억의 역사, 그 사소함의 윤리
― 윤성희와 김금희의 소설을 중심으로
이병국
1. 그것은 어렵다
서로 한 덩어리로 굳게 뭉친다는 뜻의 연대는 주체와 타자의 단순한 결합뿐만 아니라 주체의 타자화/타자의 주체화를 포함한다. 한편으로 그것은 서로의 내밀함을 공유하고 주체와 타자의 구분을 지워 하나의 공동체를 가능하게 한다. 그 안에서 타자는 더 이상 타자로 존재하지 않으며 주체는 자신만이 절대적이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의심한다. 하나의 공동체가 다른 공동체를 배척하기 위한 목적에 복무하기도 한다는 것을 사회 여러 부문에서 보아 왔기 때문이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특정 집단이 드러내는 혐오가 자기 이외의 것을 타자화 하고 사회적 약자를 배척하는 무기로 사용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럼에도 포기할 수 없는 것이 연대의 힘이다. 사회적 약자이자 개별적 존재들은 자신을 향한 혐오에 맞서 단독으로 맞설 수 없다. 그들은 모여야 하며 한 덩어리로 뭉쳐야 한다. 그래야만 자신을 향한 혐오에 대항하여 싸울 수 있으며 폭력과 좌절로부터 자신의 존재 의의를 바로세울 수 있다.
이러한 연대를 가능하게 하는 방법으로 개별 존재들의 자기 증명은 중요한 요소이다. 하루하루 삶과 생활에 치여 살아가는 개별 존재들이 스스로를 드러내는 일, 특히 사회적으로 억압당하는 존재들 이를테면, 여성, 노동자, 동성애자, 불가촉천민 등 하층 계급이라고 명명되는 사람들이 자신을 보편적 인간 군상으로 드러내는 일이 필요하다. 자신을 드러냄으로써 타인을 끌어들이는 전략은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다. 그들은 우회를 통해 뜻을 형성해 나간다. 곁을 나누고 서로의 사적 기억의 역사를 공유하는 작은 연대부터 시작한다. 그들은 그럼으로써 더 이상 타자로서의 그들이 아닌 우리가 된다. 우리가 된다는 것은 단순히 타자/주체의 이분법적 구분에서 벗어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며, 그렇게 공유된 우리를 통해 서로의 한때를, 더 나아가 오랜 시간을 기억하고 나누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를 증거하고 외부를 포용하여 더 큰 연대로 나아가는 밑바탕이 된다.
그것은 대체로 이루어내기 어렵다. 잉여적 존재들에 대한 차별과 배제, 타인에 대한 막연한 거부감, 자신에 대한 불확실성과 그것을 강요하는 사회적 맥락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오랜 시간 중층적으로 강요된 구조적 폭력을 우리의 몸에서 얼마만큼 지워낼 수 있는지, 우리의 개인화되고 파편화된 삶을 어디까지 공동의 공간으로 이동시켜 나갈 수 있는지, 당장은 알 수 없다. 그러나 변화에 대한 갈망은 사람들로 하여금 곁을 지키고 시간을 공유함으로써 조금씩 달라지게 한다. 근래 많은 작가들이 이러한 문제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표현하며 목소리를 들려주고 있다. 이미 오래 전부터 지속되어 온 이 행위는 문학의 현재이면서 미래이기도 하다. 그중에서도 윤성희와 김금희의 소설이 재현하는 타자와의 연대가 문학적 장(場)을 현실적 삶의 가능태로 이끄는 방식을 살펴봄으로써 한국 문학의 방향성을 엿보고자 한다.
2. 사적 기억의 역사
윤성희의 소설 속 인물들은 시간이 증거하는 개인의 역사를 되짚어 나간다. 특별하거나 주목받는 사건으로서의 역사가 아닌 사소하고 개인적인 시간을 인물의 회상을 통해 혹은 주변 인물들의 기억을 통해 복기하는 것이다. 네 번째 소설집인 『웃는 동안』(문학과지성사, 2011)에서 죽은 자, 혹은 죽어가는 자의 시선을 담은 단편들을 통해 지금, 여기에 자신이 어떻게 놓이게 된 것인지를 재구성하려고 했던 것과 비슷하게 다섯 번째 소설집인 『베개를 베다』(문학동네, 2016) 역시 자신이 지금, 여기까지 오게 된 시간을 재구성함으로써 인물의 곁을 지켜 나간다.
윤성희의 소설에서는 사건이 발생하지 않는다. 사건은 서사 이전의 과거에 발생하였으며 그나마 사건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도 가족의 해체 정도이다. 얼핏 해체된 가족 로망스의 서사를 재현하려는 것도 같지만 윤성희는 소설 속 인물이 이미 겪은 사건에 대해서는 언급을 자제한다. 그러고는 시간이 한참 지나고 나서 그 시절을 돌아보는 인물을 이야기한다. 이것은 세상을 살아가는 존재에 대한 윤리와 관련을 맺는 것처럼 보인다. 윤성희는 이모나 삼촌 혹은 친구를 통해 확장된 가족을 그려낸다. 확장된 가족 관계는 부부간이나 부모자식 간의 결핍을 채워 나가거나 존재의 부재를 견디는 힘이 된다. 곁에서 자신들이 살아온, 혹은 보고 들은 것들을 이야기함으로써 서로를 포용하는 공동체가 형성되는 것이다. 여기서는 「낮술」, 「베개를 베다」, 「다정한 핀잔」을 주목하고자 한다.
"엄마는 스물다섯 살에 엄마가 되었다."(157쪽)로 시작되는 「낮술」은 엄마의 역사를 재현하고 있다. 화자는 딸이지만 딸이 표면에 등장하는 것은 후반부에 들어서이다. '삼수씩이나' 해서 들어간 대학에서 엄마는 미희 이모를 만나 대학 시절을 보내고 대학을 졸업한 이후로 친환경 변기를 만드는 회사에 들어가 아빠를 만나 결혼하게 된다. 엄마의 삶은 그리 특별할 것 없는, 어찌 보면 지극히 평범하고 익숙하다. 사소한 갈등과 다툼이 있고, 희로애락이 공존한 삶을 영위해 나간다. 이러한 엄마의 삶을 관통하는 핵심으로 작가가 선택한 것은 '낮술'이다. 낮술의 기원은 미희 이모가 낮술을 하는 할머니들과 막걸리를 마시고 난 때이다. 이때 미희 이모는 "아주 긴 여행을 다녀온 기분이 들었다고"(159쪽) 엄마에게 말한다. 그 말을 들은 엄마는 미희 이모의 말에 공감을 하고 가까워진다. 낮술을 마시고 길을 걷던 어느 날, 엄마는 바퀴 두 개가 모두 사라진 채 전봇대에 묶여 있는 자전거를 줍는다. 그 자전거를 끌고 가다 하늘색 페인트가 칠해진 공중화장실에 세워 놓는다. 미희 이모는 벽에 자전거 바퀴를 그린다. 이 사소한 일화는 '나'를 갖게 된 엄마가 누군가 바퀴 그림에 색칠을 해 넣고 바큇살과 체인까지 그린 것을 보게 되는 것으로 연결된다. 그로 인해 엄마는 "아이에게 자전거를 가르쳐주는 아버지"에 대한 희망을 품게 되고 '나'를 낳기로 결심한다.
이러한 삶의 사이사이에 '낮술'은 큰 역할을 담당한다. 아빠가 도망가서 보게 된 노부부의 낮술, '나'가 태어난 날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 아빠가 함께 마신 낮술, '나'가 사고를 쳤을 때 엄마가 피해자인 미주네 집까지 사과하러 갔다가 마신 낮술, 아빠가 죽고 '나'가 마신 맥주와 엄마의 회사 사장이 간암 말기로 병원에 입원하게 되어 병문안을 가서 엄마와 사장이 캔맥주 하나를 나눠 마신 낮술, '나'가 엄마처럼 '삼수 끝에 대학에 합격'하고 기숙사로 떠나는 날 엄마와 함께 마신 낮술. 삶의 중요한 시기마다 낮술은 인물들의 유대를 높이거나 결정을 확정짓게 하거나 마음을 달래거나 서로에게 공감하게 한다. '삼수씩이나' 해서 대학에 들어간 엄마의 시간이 여러 공감의 관계를 거쳐 '삼수 끝에 대학에 합격'한 딸에게 이어지는 것이야말로 삶이라고 말한다. 이는 특별한 어느 한때가 아니라 삶의 총체적인 시간을 나누며 그 곁을 지키는 것이야말로 소설의 역할이라고 작가는 말하고 있는 게 아닐까.
공동(共同)의 시간으로써 삶의 기원을 지금, 여기로 불러와 '다정한 핀잔'을 내뱉는 작가는 그렇게 지금을 살고 있는 존재의 곁을 따뜻한 쪽으로 한 걸음 가까이 다가가게 한다. 표제작인 「베개를 베다」에서 '나'는 일주일에 두세 번 포장마차에 가서 국수를 먹고 소주를 마신다. 포장마차 주인은 일주일에 한 번 이상 오는 단골에게 "고춧가루와 참기름으로 무친 단무지"(115쪽)를 '특별히' 내어준다. 그것을 같이 먹는 P와 K가 '나'의 곁에 잠깐 머물다 간다. 그들은 서로의 나이도 모르고 연락처나 주소도 알지 못한다. 스쳐지나가듯 우연히 마주친 포장마차에서 자주 그렇게 함께 술을 마시고 헤어진다. "셋 다 이혼을 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아침이 될 때까지 술을 마"(116쪽)신 그들은 "잔이 비면 따라주면서 시답잖은 농담을 주고받는 사이"로 "그걸로 만족"하는 관계를 형성한다. 「낮술」의 술 장면들과 겹치는 것은 특별한 충고나 위안을 주고받지 않음으로써 서로의 곁을 채워 준다는 이유 때문이다. 사람은 살아가면서 숱한 아픔과 좌절을 겪는다. 그럴 때마다 절망하고 쓰러지기보다는 어떻게든 삶을 이어 나간다. 작가는 삶이 주변의 또 다른 삶으로 지속된다고 말한다. 같이 술을 나누는 사람들은, 삶을 지속시키는 또 다른 삶이다. 이것은 우연을 감당해야 한다. 우연히 마주치는 삶이야말로 주인공의 삶에 오히려 큰 영향을 준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는 "말도 안 되는 얘기"(113쪽)를 말이 되는 이야기로 받을 수 있어야 한다. 아내와의 만남이 말도 안 되는 우연에서 비롯되었다 하더라도 그 이후는 자신의 노력 여하에 의해 만들어진다. 하지만 이 만들어진다는 것 역시 삶이 층층이 쌓여 눅여낸 과정에 다름 아니다.
어릴 때 자주 가던 단골집이 있어야 나중에 어른이 되었을 때 너그러운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나는 아들에게 말했다. 너그러운 사람하고 단골집이 무슨 상관이야. 말도 안 되는 얘기 좀 그만해. 아내가 옆에서 핀잔을 주었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 아내는 늘 내게 그렇게 말했다. 그것 때문에 우리가 만나고 또 그것 때문에 우리가 헤어졌지만. (······) 암튼, 아들에게 단골집을 만들어주기 위해 우리는 세 달 내내 주말마다 외식을 했다.(108~9쪽)
언젠가 나이가 들어 '무심코' 옛 생각이 나 가게에 들렀을 아들을 위해 단골집을 만들어줘야 한다는 발상은 부모가 부재한 삶을 다른 삶을 통해 위로받을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기원한다. 그 우연을 위해 반복적으로 가게 된 가게에서 위로를 받는 건 아들이 아니라 '나'이다. 삶이 눅여낸 것들이 어떤 방식으로, 어느 방향으로 곁을 내어주게 될 것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것 역시 감당해야 할 '말도 안 되는' 우연이기 때문이다. 아들의 죽음과, 아내와의 이혼과, 엑스트라로서의 삶을 감당하는 일은 그렇게 우연히 또는 무심코 만나게 되는 존재와 기억들을 통해서 가능하게 된다. 베개를 베고 잠시 잠깐의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것도 모두 그런 지난한 삶의 과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윤성희의 인물이 앞으로 더 나아갈 수 있는 것 역시 그러한 삶의 과정을 과거에 한정해 놓고 머물러 있지 않는 데 있다. "현재를 잃어버리고 과거로 돌아가려 할 때"(128쪽) '발냄새'를 맡게 하여 현재를 일깨우는 비유가 황당할지 모르지만, 발냄새야말로 시간의 층위가 고스란히 녹여난 삶이 아닐까.
그러한 시간의 층위를 가족 내부의 관계만이 아니라 외부로 확장시켜 바라본 「다정한 핀잔」은 주목할 만하다. 소설은 병원 대기실의 인물들을 보여주며 시작한다. '나'와 미희 언니의 동생인 미애씨, 미애의 아들인 형욱. 그들은 미희 언니가 수술을 받고 있는 동안 미희 언니와의 과거를 복기한다. '나'는 아르바이트를 하던 햄버거 가게에서 미희 언니를 만나 이십 년 넘게 친구로 지낸다. 열두 살의 나이 차에도 불구하고 '나'와 미희 언니는 친구가 된다. 이를 의아하게 생각하는 형욱이에게 미애씨는 고등학교 때 국사 선생님과의 일화를 이야기해 주고 '나'는 그것을 "그러니까 같이 술을 마실 수 있는 사이가 되면 나이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얘기"(215쪽)라고 해석해 준다. 윤성희의 이러한 별것 아닌 것 같은 이야기는 다층적인 의미망을 형성한다. 앞에서 본 것처럼 술을 마시는 우연적인 행위는 인물들을 친구의 관계로 확장시킨다. '오래 사귄 벗'이라는 의미의 친구(親舊)는 시간을 함께하는 존재를 의미한다. '나'가 미희 언니와의 시간을 복기하고 한편에서는 미애씨가 미희 언니와의 시간을 복기함으로써 미희 언니의 역사는 입체적으로 재구성된다. 서로가 알지 못하는 부분들을 채워 나감으로써 한 개인을 이해하는 것은, 그러므로 익숙한 존재의 낯선 면을 발견하는 과정이며, 낯선 존재가 우리라는 공동체를 만들어 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들은 일종의 작은 연대를 이루어 사적 기억의 역사를 곁에 두고 부재를 견딘다.
내밀한 기억을 공유한다는 것은 타인에게 자신의 사적 영역 한쪽을 허락하는 것이며, 보다 친밀한 연대 형성에 기여하는 일이다. 미희 언니가 어린 조카를 보며 '방긋'이란 단어가 그리 좋은 것인지를 깨달았다는 말이나, '낙엽'을 '낙옆'이라고 적은 연애편지의 틀린 글자에 빨간색으로 동그라미를 그려 넣은 글을 읽었던 기억을 공유함으로써 '나'와 미애씨는 동일한 자리에 서게 된다. 이러한 공동체적 연대는 일종의 유사 가족의 양상을 띤다. 사소한 기억을 공유하고 그것을 비난하거나 가볍게 생각하지 않는 연대는 가족 구성원 간의 친밀함과 동일하다. '나'가 응급실 밖 의자에 앉아 보고 듣게 된 부자의 대화는 '나'와 미애씨, 그리고 형욱을 유사 가족으로 묶어 준다. 위경련으로 응급실에 실려 온 어머니를 검사받게 하고 남자는 아내와 딸과 통화를 한 후, 아버지에게 당신의 손녀딸이 처음으로 간지러워라는 말을 했다는 등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다. 그들이 가족으로서 유대를 형성하고 공동의 장을 마련하는 것은 결국 '이런저런' 이야기를 통해서이다. 가족 간에 공유하는 '이런저런' 이야기는 내적 친밀성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며, 그들이 함께 지나온 시간을 기록하는 것과 같다. 손녀딸이 처음으로 말한 단어를 기억하는 일, 그리고 그 존재 자체를 고마워하는 일이야말로 가족 간의 유대를 넘어 사람이 사람을 포용하고 공감하는 일이며 공동체적 연대로 확장될 수 있는 일일 것이다.
미희 언니를 알고 지낸 지난 이십 년 동안 아마도 나는 미희 언니에게 미쳤냐는 말을 수백 번도 더 들었을 거다. (······) 내가 칠십 살이 되어도 언니는 나한테 미친년이라고 그럴 거지? 한번은 내가 물은 적이 있었다. 미희 언니가 당연하지 하고 대답했다. 생각해보니 팔십이 넘은 할머니한테 욕먹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223~4쪽)
'미친년'이라는 '다정한 핀잔'을 주고받으며 곁을 나누는 것만큼 위안이 되는 것이 또 있을까. 함께한 시간을 기억하고 그것을 공유하며 그 곁을 지켜 나가는 것. 이것이야말로 사회의 구조적 폭력과 위기 상황에서 개인들이 취할 수 있는 가장 든든한 힘이라고 생각한다. 윤성희의 인물들은 '낯선 이의 머리를 받쳐 주는 누군가의 손등'처럼 따뜻하다. 그들은 사적 기억을 공유하고 재구성함으로써 서로에게 위안이 된다. 비록 미희 언니의 이십대를 알 수 없게 된다 하여도 우리는 이야기해야 한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는 사소한 행위야말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삶의 윤리라고 윤성희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3. 곁의 윤리학
윤성희가 시간의 잉여를 통해 인물을 역사로 포용하고 이를 삶의 윤리로 그려내고 있다면 김금희는 특정한 국면의 잉여적 인물을 통해 서사의 한 시절을 잡아내고 그 곁을 지켜내고자 한다. 그러나 김금희 소설에 나타나는 연대의 가능성은 이율배반적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현실의 제반문제가 그대로인 채, 심정적인 동조 혹은 무조건적인 공감으로 위안과 위로의 연대에 머물게 되면 그것은 감정을 소모하는 일에 그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감정의 합리화라는 기만적 위로를 통해 세계의 균열을 단숨에 봉합하는 행위가 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김금희의 두 번째 소설집 『너무 한낮의 연애』(문학동네, 2016)를 지탱하는 인물들은 하나의 누빔점(point de caption)으로 작용한다. 이들은 서사의 흐름에 깊숙이 침투하여 서사를 추동하지는 못한다. 그저 주변 인물로 한쪽에 놓여 있다가 특정한 국면에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낸다. 그때 우리는 소설이 지향하고 있는 연대가 무엇인지 비로소 깨닫게 되는 한편, 그 안에서 배제되어야만 하는 존재에 대한 애틋한 슬픔을 느끼게 된다. 여기서는 「너무 한낮의 연애」의 조연출, 「조중균의 세계」의 해란씨, 「보통의 시절」의 상준을 중심으로 논의를 끌고 가려고 한다.
표제작인 「너무 한낮의 연애」는 인사이동을 통보받은 필용이 어느 날 맥도날드에 가서 점심을 먹다가 맞은편 건물에 걸린 현수막을 보게 되면서 양희와 재회하는 과정을 다루고 있다. 필용은 어학원 강의를 들으면서 알게 된 양희와의 한때를 추억하다가 현수막을 통해 알게 된 양희의 연극 "나무는 'ㅋㅋㅋ' 하고 웃지 않는다"를 보러 가게 된다. 이 연극은 관객 참여형 연극으로 관객 중 한 사람을 앉혀 놓고 전신 타이츠를 입은 양희가 마주한 채 시간을 보내는 것이 전부인 연극이다. 연극은 십육 년 전 필용과 양희가 맥도날드에서 마주한 채 햄버거를 먹던 장면과 겹친다. 둘은 마주한 채 앉아 있었다. 필용은 허풍과 기대를 포함한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양희는 맞은편에 앉아 듣기만 했다. 연극의 구조와 동일한 이 관계는 갑작스러운 양희의 사랑 고백으로 다른 색채를 띠게 되지만, 그것이 둘의 관계 자체를 다르게 만들지는 못한다. 필용은 십육 년이 지난 뒤 갑작스러운 양희의 고백과 그 고백이 연애로 이어지지 않고 사라져버린 것에 대해, 그리고 양희의 시골집을 찾아가 '아주 사라져버릴 수 있'는 어떤 것에 대한 경험을 떠올리게 된다. 연극의 마지막 공연, 필용은 양희와 마주하게 된다. 그리고 양희가 자신을 향해 "그 어느 밤의 느티나무처럼. 그리고 바람을 타듯 팔을 조금씩 조금씩 흔들"(41쪽)어 주는 것을 보고 돌아 나오는 길에 눈물을 흘린다. 나무는 비웃지 않기 때문에 그 앞에서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다. 필용은 자신의 현재 처지를 부끄러워할 것이 없다. 아주 사라져버린다는 것은 '아주 없음'이 아니라 '있지 않음'의 상태로 잠겨 있을 뿐이라는 것을 감각하게 된 셈이다.
양희와 필용의 이런 서사 한편에 조연출이 있다. 객석에서 늘 박수를 치던 남자 관객으로 필용에게 인식되는 조연출은 다른 의미에서 양희와 유사한 역할을 수행한다. 양희가 실질적으로 타자와 관계를 맺고 그들로 하여금 일종의 '힐링'을 가능하게 한다면, 조연출은 그 과정에서 관객으로서의 위치를 점유함으로써 극장이라는 공간이 주는 위압감을 제거하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것이다. 그로 인해 다른 관객들은 자신이 도드라진 위치에 놓인 것이 아닌, 다른 존재와 '함께' 공간을 점유하고 있는 편안한 상태로 양희와 마주할 수 있게 된다. 관객의 역할을 하고 박수를 치며 환호를 하는 등, 극의 일정 부분에 관여하는 조연출의 존재는 소설의 서사에서 잉여적 존재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필용과 양희의 십육 년 전의 한때가 필용의 회상에 의해서 구축되는 일방향적 서사라면, 현재 무대 위에서 이루어지는 필용과 양희의 위로의 연대는 잉여적 존재인 조연출로 말미암아 중층적인 사회적 위로의 맥락을 획득하게 된다.
잉여적 존재가 소설 내의 주동 인물들의 한때를 증거하는 또 다른 소설이 「보통의 시절」이다. 「보통의 시절」의 상준은 '나'의 공부방 첫 졸업생이지만 대학을 못 가 한동안 '애프터서비스'를 받아야 하는 인물이다. 상준은 '나'와 큰오빠, 작은 오빠 그리고 언니가 김대춘을 찾아가는 길에 동행하게 된다. 큰오빠는 암에 걸린 자신의 인생이 불행한 이유가 부모님이 운영하던 목욕탕에 김대춘이 불을 내 부모님을 죽게 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로 인해 동생들은 매년 김대춘에게 저주의 편지를 쓰고 그의 불행을 바라야만 했다. 그러나 그들은 김대춘과의 대면을 통해 김대춘 때문에 그들의 삶이 무너진 것이라고 말하는 큰오빠의 말이 잘못된 것임을 깨닫게 된다. 남매의 현재는 큰오빠와의 관계로 말미암아 비롯되었다는 깨달음. 이것은 큰오빠가 다녔던 대학의 건축학과 건물이 날림 공사로 무너질 위험에 처했을 때, 신입생 입학시험을 치를 고등학생들의 죽음보다 건축학과 교수와 졸업생, 재학생의 위상을 더 걱정하는 것처럼 자기중심적 사고의 결과였음을 깨닫는 것이다. 성탄절에 원수를 찾아 마음의 평화를 찾아보려던 그들은 현재의 자신의 불행을 김대춘이라는 개인에게 투사함으로써 부조리한 세계의 구조를 전유하여 스스로를 기만한다. "산 사람은 살아야 하는"(215쪽) 거라고 말하는 건축학과 학과장의 말의 부조리함이 큰오빠에게는 삶의 전언처럼 받아들여진 셈이다. 삶은 버티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는 것임에도 삶이 지닌 불행의 원인을 타자에게 전가하여 그를 적대시하고 차별함으로써 자신의 불행을 버티고 있는 셈이다.
이 모든 것을 고스란히 보고 기억하는 존재가 바로 상준이다. 대학 입시에도 실패하고 공부방에만 머무르고 있는 잉여적 존재인 그는 오늘 본 일을 다 잊으라는 말에 잊을 수 없다고 말한다. 이미 본 것들, 함께 경험한 것들을 그대로 간직한다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이는 타자의 경험에 대한 단순한 공감이나 기만적인 위로가 아니다. 그것은 '보통의' 일도 아니고, 생각해서 뭐가 되는 것도 아니지만 그 자체를 잊지 않음으로써 곁을 지켜 나가겠다는 윤리의 자리를 만든다. 노숙자인 김대춘을 "더럽다고 목욕을 안 받"고 내쫓았던 부모와는 달리 상준은 그들의 전부를 고스란히 받아들이는 셈이다. 편견이나 그릇된 인식으로 잘못된 판단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판단 그 자체를 중지하고 있는 그대로를 지켜내는 일이야말로 세상을 따뜻하게 하는 일이지 않을까.
어두운 보일러실 계단을 내려가는 촛불의 움직임이었다. 따뜻하다. 이제껏 느껴본 적 없는 따뜻함이 거기에 있다. 따뜻함은 너무 따뜻해서 잊게 하지. 강철의 추위나 모욕감 같은 것을. 그리고 잠들게 하는 것이다.(230쪽)
존재의 곁을 함께하는 것만으로도 '추위나 모욕감'은 치유될 수 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거대한 불행이 일어나기도 하고 거기에 휘말리기도 하는"(230쪽) 삶이지만 그러한 위기의 순간에 곁을 지킴으로써 위안을 나눌 수 있는 것이야말로 희망임을 상준은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특별할 것 없는 '보통의 시절'을 사는 방식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보잘 것 없는 행위일 수도 있지만 곁을 나누는 사소한 행위야말로 따뜻함으로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게 한다. 하지만 이때 하나의 질문이 떠오른다. 그것만으로 세상은 정말 살 만한 곳이 될 수 있을까.
「조중균의 세계」의 해란이라면 뭐라고 대답할까. 해란은 '나'와 한 달 전 신입으로 입사한 수습사원이다. '나'와 해란은 일종의 경쟁을 벌여야 하는 사이이기 때문에 '나'는 해란과 애매한 관계에 놓여 있다. 하지만 해란이 조중균에 대해 언급하는 순간, '나'의 시선에 조중균이 들어오게 되며 비로소 회사 구조의 문제를 인식하게 된다. 「조중균의 세계」의 주인공은 조중균이다. 사회 구조의 지배적 관계를 내면화하지 못하지만 성실함으로 그 세계의 요구를 수행하는 조중균에게 주어진 것은 '퇴사'라는 비극이다. 대학 시절, '아무것도 쓰지 않고 이름만 적'으라고 하는 교수의 의도를 알고 시대의 부조리를 감각했던 조중균은 그것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이었는지를 깨닫는다. 그는 '지나간 세계'라는 시를 통해 세계의 부조리함을 드러냈지만 그 저항의 자리에서조차 감춰진, 혹은 소외된 존재가 된다.
폭력의 근원에 대해 고찰하기에는 우리의 삶이 너무 팍팍하다. 삶은 버티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는 것임에도 개별자들의 삶은 버티는 쪽에, 내가 살기 위해 폭력의 구조에 순응하고 다른 개별적 존재를 적대시하는 쪽에 무게 중심을 둔다. 회사의 다른 직원들에게 조중균은 회사의 구조를 거부함으로써 자신을 불편하게 만드는 존재일 따름이다. 개별적 차원 너머에 존재하는 구조의 부조리함에 개인은 저항해야 한다. 그것이 가능하려면 개인만의 저항을 넘어서는 어떤 것이어야만 한다. 개별적인 존재는 모두 위태로운 위기를 버티는 쪽으로 감당하려고 한다. 하지만 그 시간들의 의미가 아주 없는 것이 아닌 '있지 않음의 상태로 잠겨 있을 뿐'이기에 잠겨 있는 시간에 공명하여야 한다. "지금은 환하고 환해서 감당할 수조차 없이 환한 한낮"(42쪽)이지만 한낮의 환함으로 가려져 있는 균열의 지점을 직시해야 한다. 해란은 바로 그 지점에 서 있는 인물이다. 조중균이 감당하고 있는 구조적 폭력이 결국은 자신이 처해 있는 상황과 다르지 않음을 인식하는 것, 그럼으로써 그의 세계에 공명하고 동조하는 것으로써 사회의 구조적 폭력에 저항할 수 있도록 해란은 우리를 이끈다. 조중균의 세계를 바라보며 "네, 알아요. 안다니까요."(67쪽)라고 말하는 해란이 그게 무엇이냐는 물음에 "뭔지는 몰라도 알 것 같기는 했어요."(68쪽)라고 말하는 것처럼. 무엇인지 몰라도 "알아요."라고 말하는 것, 동조하고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위기를 극복까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개별적 존재의 붕괴를 막는 저항의 단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이 모든 이들의 연대로 나아가기에는 사회의 구조가 너무나 견고하다.
아무도 해란씨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그렇게 잠시 있다 떠난 사람에 대해서는 이야기할 것도 없다는 듯이, 마치 없었던 사람처럼. 문제의 책이 출간되고 수습 기간도 끝나면서 나는 긴장이 놓였달까, 안심을 했달까, 아무튼 어딘가 한풀 꺾여 있었다. 안착은 그렇게 허무의 포즈를 하고 왔다. 그래도 고기를 굽고 주는 대로 술을 마시고 웃고 떠들었다.(70쪽)
짧은 수습 기간에만 존재했던 해란을 직원들은 떠올리지 않는다. 그저 스쳐 지나는 많은 사람들 중에 한 사람일 뿐, 자신들과 동등한 위치에 서 있는 존재로 여기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나'가 조중균의 세계를 "이름은 없는 세계"(71쪽)로 파악한 것이 실상은 해란의 세계를 드러내는 것이라 말할 수 있다. 조중균의 곁을 지킴으로써 자신의 곁을 잃은 존재. 곁의 윤리가 무엇인지 보여준 해란은 그것이 얼마나 성취하기 어려운 현실인지를 징후적으로 재현하는 셈이다.
4. 우리가 우리이도록 만드는 관계
그럼에도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면 그런 것이다. 우리가 우리로 하여금 존재하게 만든 관계들. 이를테면 한때를 공유하고 감정을 교류했던 존재 같은 것. 그리고 그 존재의 부재가 불러온 이루 말할 수 없는 슬픔. 친구인 은총의 죽음과 그로 인해 알게 된 세계의 비극과 견딜 수 없는 절망 같은 것. 거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방기한 삶을 다시 생의 한 축으로 되돌리기까지. 김금희의 장편 『경애의 마음』(창비, 2018)은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 되돌아보게 만든다.
『경애의 마음』은 낙하산으로 들어온 반도미싱에서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한 채 주변을 맴돌던 팀장대리이면서 퇴근 후에는 페이스북 페이지 '언니는 죄가 없다'를 운영하며 여자들의 고민을 상담해 주는 '언니' 공상수와 구조조정에 반대하는 파업에 참여하다 파업 기간 동안 일어난 성희롱을 노조 측에 항의하는 바람에 파업 실패에 대한 책임을 한 몸에 받게 된 8년차 총무부 직원 박경애, 잉여적인 존재인 두 인물이 해외영업 전담 팀에서 만나 오래전 그들이 공유한 존재에 대한 기억을 나누며 각자의 상처와 아픔을 치유하고 마음을 나누는 서사를 그리고 있다.
그들은 인현동 호프집 화재 사건으로 친구인 은총을 잃은 경험을 지닌 채 일종의 '살아남은 자의 죄의식'으로 명명될 수 있는 감정으로 자신의 삶을 구성해 나간다. 스스로를 '피조'로 명명해 온 경애는 '시속 900미터'의 속도로 삶을 감각하며 부조리한 사회가 강요하는 잉여의 자리에서 감당해야만 하는 모멸로부터 벗어나고자 했다. 파업에 참여하고 적극적으로 저항한 것이 그러한 의지의 발로였으리라. 그러나 그것이 좌절되고 회사 내에서 은근한 따돌림을 받아 그 시간을 견뎌야만 했던 경애에게 상수와의 만남을 통해 "이번에는 고통 속에 떠내려가도록 놓아두지 않겠다"(306쪽)는 다짐을 하게 한다. 이는 상수에게도 마찬가지인데 경애와의 만남이 있기 전까지 상수는 개인의 가정사로 말미암은 고통에 매몰되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타인의 고통을 이해할 수 있을 거라는 그래서 해결의 말도 건넬 수 있을 거라는 오해를 바탕으로 '언니는 죄가 없다'에 사연을 올리는 익명의 '여자들'을 카테고리화 할 수 있는 비극에 노출되어 있는 존재로 여기고 따끔한 조언을 쉽게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더는 익명이 될 수 없는 경애가 그의 조언을 "그 많은 독설"(143쪽)로 정리해 버리는 순간 그의 행위는 그 방향을 잃게 되며 비로소 사적 기억의 역사를 마주하게 된다.
흥미로운 점은 배제되고 소외된 존재로서 상수와 경애가 공유하고 있는 기억에 있다. 그 기억은 은총이 만든 영화 '마음'이다. 이 영화는 소설 전체에 흐르는 자아 상실의 위험으로부터 존재를 위무하는 역할을 한다. '마음'이라는 영화는 "뭔가를 계속 떠들어대는 남자애의 목소리와 함께 시작"(66쪽)하여 그의 뒷모습에 초점을 맞춘 채 그의 곁을 따라가다 "갑자기 위로 각도를 틀어 납골당의 현판과 그 위 어스름한 하늘을 확 비추면서"(67쪽) 끝난다. 별것 아닌 것 같은 영화의 시선은 작가가 생각하는 위로의 방식으로 보인다. 그저 따라가기만 할 뿐 타인의 삶에 특별히 개입하지 않지만 그것이 결국 서로의 마음을 이해하려는 몸짓이며 관계 형성의 시작이자 더 나아가 너와 나를 우리로 엮는 중요한 방식이라고 말이다. 그것은 존재의 결핍을 착취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곁을 지켜내는 일이다. 즉 해고된 자동차공장의 사람의 집회 행렬을 보고 상수가 불가피한 일이라고 말할 때, 소중한 걸 잃는 일에 대해 분노할 줄 알아야 한다는 깨달음을 준 것이나 지하상가에서 노숙하는 여자와 아이를 보고 경애가 무심코 불행을 언급했을 때, 누군가를 그렇게 불행하게 여길 자격은 없다고 말하는 은총은 개별적 존재들의 위계와 차이, 잉여적 존재들의 소외를 지워내고 그들 각자를 오롯한 존재로 감각하여 관계를 맺고 '우리'로 호명하도록 한다.
그 '마음'을 감각하며 기억하는 동안 죽은 은총은 '아주 없음'이 아니라 '있지 않음'의 상태로 상수와 경애 곁에 존재할 수 있게 된다. 그런 점에서 상수와 경애는 김금희의 다른 소설에 재현되는 인물들 이를테면 「보통의 시절」의 상준과 「조중균의 세계」의 해란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함께 경험한 것들을 기억하고 개별적 존재에 공명하고 동조하는 상수와 경애는 이 모든 관계의 기원이자 또한 그들 곁에 '있지 않음'의 상태로 '있는' 은총이 보여준 곁의 윤리를 온몸으로 재현하는 존재인 셈이다.
그런 이유로 상수가 '언니는 죄가 없다' 페이지가 해킹당한 이후로 자신이 행한 일이 기만적 행동이었음을 깨닫고 그 실체를 고백할 수 있게 된 것이나 회사 앞에서 부당 전보와 관련한 일인 피켓 시위를 하는 경애가 수행하는 것은 부조리한 세계의 현실과 마주하여 타인의 곁을 최선을 다해 지키며 자신을 방기하지 않기 위한 의지의 실현이라고 볼 수 있다. 한편으로 '자신을 방기하지 않는 것'은 "누군가를 기다려야 하는 사람의 의무"이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일이란" "자신을 가지런히 하"여 "최선을 다해 초라해지지 않는 것"(349쪽)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기다림은 '우리'를 '우리'이도록 만드는 관계의 출발이기도 한 셈인데 그것이 공동의 시간으로 지속되는 한 누군가에 대한 마음은 "폐기 안해도 되"며 그렇게 형성된 관계로서의 "우리는 조금 부스러지기는 했지만 파괴되지는 않"(176쪽)을 것이라는 믿음을 강화한다.
마음을 폐기하지 않기 위한 구체적 행위의 측면에서 보아야 할 소설은 어떤 점에서 윤성희의 『첫 문장』(현대문학, 2018)인지도 모르겠다. 딸의 죽음과 아내와의 이별을 배면에 깔고 "네 번이나 죽을 뻔했"(9쪽)던 '나'의 사적 역사를 기록하는 이 소설은 종국에는 딸이 자신의 인생을 기록한다면 첫 문장을 어떻게 쓸 것인가, 하는 답을 찾기 위한 여정으로 나아간다. 앞에서 보았듯이 윤성희의 소설에서 중심축을 이루는 사건은 과거에 발생한 것으로 딸의 죽음과 아내와의 이별 그리고 '나'의 죽음과 관련한 사연은 현재의 '나'가 마주하게 되는 여정의 원인으로 기능할 뿐, 그것이 또 다른 사건과 맞물리며 전개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전경화 된 '나'가 기억하는 사적 역사에 있다. 마치 「낮술」의 딸이 엄마의 역사를 기록하며 삶의 총체적인 시간을 나누는 것처럼 '나'는 '나'를 둘러싼 사적 역사를 기억하며 '나'를 둘러싼 세계의 총체를 죽은 딸과 나누고자 한다. 그리고 김금희의 『경애의 마음』이 은총의 기억을 상수와 경애가 공유함으로써 자신들의 마음을 나누고 그것을 지켜 나가게 되는 것처럼 윤성희의 『첫 문장』은 '첫 문장'을 찾기 위한 여정이 그동안 '나'를 둘러싼 존재들의 마음이 모여 '나'를 이루어낸 것의 연장선상에서 비롯된 것임을 깨닫고 그것을 지켜 나가는 마음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소중한 존재가 이 세계에 더는 없지만, 그 존재를 기억하는 한 그는 '아주 없음'이 아니라 '있지 않음'에 있다. 존재를 기억한다는 것은 그 존재의 사건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그와 함께 공유한 사소한 시간을 기억하는 것이다. "열세 살 때 30인분의 매운탕을 끓였다고. 기가 막히게 맛있었다고."(19쪽) 용석이의 장례식장에서 용석의 딸에게 이야기해 주고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구둣방에 가서 구두를 닦"(27쪽)아 할머니와의 약속을 지키는 것처럼. "넘치지도 그렇다고 모자라지도 않게"(26쪽) 삶을 영위해 나갈 수 있게 하는 것은 타인과 공유했던 시간을 지금 여기로 가져와 위로를 나누는 일이다. 비록 그 기억이 조금씩 어긋난다 하더라도 그것을 나누고 이야기하며 삶의 또 다른 과정 속에 놓는 일이야말로 각자의 고단한 삶을 위로하고 위로받을 수 있는 '우리'의 확장인 셈이다.
그런 점에서 김근식이라는 이름을 박영무로 바꾸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김근식이라는 주어진 이름은 박영무라는 또 다른 주어진 이름으로 옮긴다고 해서 달라지는 삶이란 어떤 의미를 지니게 될까. 그것은 새 이름을 선택함으로써 현실의 너절한 삶의 실상을 대체하고 기존의 관계를 새롭게 재배치하도록 하는 잠재적 가능성을 허락하는 일이며 어쩌면 우리에게 주어진 삶이 유일한 삶은 아니라는 세계에 대한 신뢰일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김근식이 지나온 기억의 역사가 사라지거나 은폐되는 것은 아니다. '나'를 둘러싼 세계의 관용과 애정 그리고 신뢰는 개별화된 특정한 이름에 제한된 방식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김근식의 결핍은 박영무로 인해 채워질 수 없지만 존재의 결핍을 착취하는 방식이 아닌 그것을 그대로 인정하고 그 곁에 또 다른 자아를 놓음으로써 자신에 대한 신뢰를 확보한다. 다른 한편에서는 '나'가 김근식이든 박영무이든 '나'가 마주하게 되는 존재들 ― 가족이든 터미널에서 우연히 지나치는 낯선 타인이든 ― 은 일종의 유사 가족의 형태로 '나'와 심리적인 연대로 묶여 있다. 그것은 타자에 대한 무관심이나 경계와는 다르다. 언제나 주체와 관계하는 존재로 여기-이곳 혹은 거기-그곳에 있다. 그러므로 '나'가 비록 원주에 사는 누나의 집을 떠나 횡성으로, 춘천으로, 경주로, 그리고 거제, 통영, 김해, 군산, 부여, 인천, 순천, 여수로 향했던 여정의 끝에 "로터리를 뱅글뱅글 돌면서"(135쪽) "어느 방향으로 나가야 할지 알 수 없"(134쪽)다 하더라도 결국 '나'는 "빠져나갈 수 있는 길이 다섯 개"(135쪽) 중 어느 한 곳으로 나가 '나'를 '나'이도록 하는 내적 친밀성의 세계로 돌아갈 것이다. '김근식'과 '박영무'를 둘러싼 삶의 관계들은 여전히 '나'의 곁에서 '나'를 '우리'로 호명하여 마음을 폐기하지 않도록 공동의 시간의 곁을 긍정할 것이기 때문이다.
5. 우리가 기억하는 사소함의 윤리
지금 우리는 위기의 시간을 통과하는 중이다. 위기가 아니었던 적이 언제였느냐만은 총체적 난국이라는 용어가 문자 그대로 현실로 재현되고 있는 시간을 견뎌내고 다른 가능성을 모색할 수 있게 되었다.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문제들이 고르디우스의 매듭처럼 풀 수 없는 지경이 되어 개별 존재의 삶까지 얽매고 있는 지경이었다. 그 매듭을 푸는 일을 포기하거나 알렉산더처럼 단칼에 잘라내길 원하지 않았다는 것을 지난 광장의 시간이 우리에게 말해 주었다. 참담한 현실 앞에서 우리는 역설적으로 우리의 얼굴을 마주하였다. 우리를 억압하는 구조적 폭력이 타자를 배제하고 혐오하는 주체의 모습을 되비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타자의 얼굴을 통해 자신을 바라보아야만 한다. 레비나스식으로 말하자면 타자는 주체의 새로운 존재 의의를 열어 주고 지배 관계를 벗어나 진정한 의사소통을 가능케 하는 조건이다. 타자를 자기 안으로 받아들이고 타자와 윤리적 관계를 형성할 때 비로소 진정한 주체가 확립될 수 있다. 이를 바탕으로 우리는 타자와 주체가 연대하는 윤리적 공동체를 형성하여 사회적 위기 해결을 모색할 수 있다.
문학은 지금의 문제에서 따로 떨어져 있지 않다. 현실에 밀착되어 있는, 개별적 삶을 재현함으로써 보편적 문제를 공론화하고 그것을 우리의 삶 속으로 투영시킨다. 마주 본 삶이 불편하다면 거울을 통해 바라보는 세계는 더욱 참혹할 것이다. 그러나 윤성희와 김금희가 재현하는 세계는 참혹하지 않다. 그 안에는 희망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존재의 결핍을 착취하기보다 타자의 곁을 지키고 사적 기억의 역사를 공유하면서 연대를 꿈꾼다. 문학의 자리는 그런 것이다. 문학은 참혹을 참혹으로 재현하는 것을 능사로 여기지 않는다. 또한 혁명을 기치로 내걸고 전복을 소망하지 않는다. 사소하지만 작은 변화, 외따로 떨어져 존재하는 것에 대한 애정, 절망하지 않도록 먼저 손을 내밀어 잡아 주는 일에 주목한다. 추상적인 개념이 아닌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만남을 통해 존재를 공동의 방향으로 형성해 나간다. 또한 이것이 지난 계절을 지나온 광장의 공동체를 문학적으로 선취한 방식이다.
윤성희와 김금희가 그려낸 곁의 윤리는 광장의 시민이 백만분의 일로 자신을 위치시키고 서로의 곁을 지키는 방식으로 수행된다. 부조리와 불합리, 부정부패와 적폐 청산을 외치며 거리로 나온 시민들은 개인의 이해를 넘어 공동의 윤리를 위해 목소리를 드높였다. 개개인의 개별적인 목소리는 단독자로서의 주체로 홀로 서 있는 것이 아니라 타자의 곁에 앉아 나란히 서로의 목소리를 더하는 방식으로 고양되었다. 정의롭지 못한 사회를 단숨에 바꿀 수는 없겠지만 변화를 열망하는 존재들은 주체와 타자의 구분 없이 서로의 곁을 나누며 사회의 폭력적 구조와 대치함으로써 변화의 가능성을 희망할 수 있게 하였다. 부조리한 사회의 견고한 벽 앞에서 우리는 그 기억을 공유하며 사소함의 윤리로 서로의 곁을 함께할 것이다. 그럼으로써 그 벽을 조금씩 뒤로 물러나게 하여 지워낼 것이다. 문학 역시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는 존재의 곁을 지켜내며 진실을 향한 걸음을 지속해야만 한다.
문학은 문학의 앞에 놓인 길을 그저 걸어갈 것이다. 그것이 리얼리즘의 형태든, 모더니즘의 형태든, 참여의 논리든, 순수의 논리든, 그 모든 문학은 그 시대를 살아가는 개인의 삶과 사회적 요구를 담아낼 것이다. 부조리하고 차별적인 현실의 폭력을 기록하고 이를 가시화하려는 의지가 문학적 수행의 방식으로 가속화되는 한편에서 문학은 그 곁에 나란히 놓여 있는 개별적 존재들의 사적 기억의 역사를 재현하는 데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사적이며 공적인 기록으로서 문학은 여전히 지속될 것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윤성희와 김금희가 지키려 하는 윤리가 딱 하나의 올바른 길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문학이 지향해야 할 바가 어디에 있는지 그들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위기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사회적 교착 상태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꿈꿔 볼 여지를 그들의 문학이 수행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이 선취하고 있는, 수행하고 있는 공동의 윤리가 바로 문학의 존재 이유이며 미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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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2018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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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움의 경제 2(2) 강동호 1. 새로움의 역설 광인은 입을 다물고 청중들을 다시 바라보았다. 청중들도 입을 다물고, 의아한 눈초리로 그를 쳐다보았다. 마침내 그는 등물을 땅바닥에 내던졌다. 등불은 산산조각이 나고 불은 꺼져버렸다. 그가 말했다. “나는 너무 일찍 세상에 나왔다. 나의 때는 아직 오지 않았다. 이 엄청난 사건은 아직도 진행 중이며 방황 중이다. 이 사건은 아직 사람들의 귀에 들어가지 못했다. 천둥과 번개는 시간이 필요하다. 별빛은 시간이 필요하다. 행위는 그것이 행해진 후에도 보고 듣게 되기까지 시간이 필요하다.” - 니체, 『즐거운 학문』1) ‘새롭다’라는 말은 대개 ‘다르다’ 혹은 ‘최근에 생산되었다’라는 의미가 결합된 단어로 통용되곤 한다. 새로움이라는 개념이 일상에서 빈번하게 사용되는 까닭은 그것이 대상의 특징적 차이를 지시하고, 그 특별한 가치를 강조하는 데 있어 가장 직관적인 기호에 해당해서일 것이다. 시장(market)은 이러한 ‘기호 가치’로서 새로움이 이견 없이 유통되는 대표적인 시공간 가운데 하나이다. 가령 어떤 자동차를 일컬어 ‘새로운 자동차’라고 규정한다면 우리는 해당 자동차가 여타의 자동차들과 다르며, 상대적으로 최근에 출시된 신상 모델이라는 사실을 즉각적으로 인지할 수 있다. 이때 새로운 자동차가 사람들로부터 더 큰 매력과 구매 의지를 불러일으키는 것은 자연스럽고 합리적이다. 새로움은 해당 제품의 기능적 우월성을, 그리고 그로부터 얻게 될 한층 차별화된 만족과 유용성을 표현한다. 여기서 새로움이라는 기호에 함축되어 있는 ‘차이’(difference)의 기제는 새로움이 일종의 비교적 가치라는 점을, 나아가 차이의 비교 우위를 정당화하는 원리가 발전·진보·개선 등의 시간적 내러티브와 밀접하게 연동되어 있음을 말해 준다. “우리 시대에는 차이가 최우선의 높은 가치를 지닌다”2)는 바우만의 진단처럼, 새로움의 가치화 현상이 기반하고 있는 것은 이른바 차이의 경제(economy of difference)이다. 차이적 가치 혹은 가치로서의 차이야말로 교환·거래를 활성화하는 매혹의 원천이자, 시장의 혁신적 성장을 가능하게 하는 경제적 원리의 토대이기 때문이다. 표면적으로 차이의 경제는 예술 작품의 미학적 의의를 규명하는 과정에도 유사하게 적용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주지하듯 예술은 작품들 사이의 차이를 판별하고, 원본성·독창성·창의성 등의 이름으로 작품의 새로움을 조명하려는 제도적 장처럼 인식된다. 하지만 예술 작품의 새로움이 차이의 논리를 통해 온전히 설명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전통적으로 적지 않은 이견이 제기되어 왔다. 이를테면 키르케고르(Kierkegaard)는 새로움과 차
- 관리자
- 2025-05-01
네버랜드 탈출기 ― 김희준론1) 최다영 1. 신(新) 아카이브 프로젝트 선행 평론에서 적확하게 포착하고 있듯 “근원이나 태생에 대한 감각”이나2) “원형 회귀본능”을3) 말하지 않고서는 김희준의 시에 접근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들은 현상의 내밀한 원인을 해명하거나 김희준의 시적 작업이 내포한 고발과 대항 의식을 읽어 내기엔 여전히 충분하지 않은 키워드이기도 하다. 수록작이기도 한 ‘사기(史記)꾼’이라는 제목은 충실한 아키비스트(archivist)이자 교란하는 트릭스터(trickster)라는 상반된 함의를 모두 내포한다. 혹은 아키비스트의 본령이 트릭스터일 수밖에 없음을 일깨우는 것인지도 모른다. ‘사기(史記)꾼’으로서 김희준은 고대부터 이어져 내려온 신화와 성서, 동화 등 무수히 집적된 공동체적 기억의 편린을 환상적으로 중첩하고 그로테스크하게 변형시킨다. 그리고 이렇게 비틀고 왜곡하는 지점에서 김희준만의 원형적 이미지가 접속 면의 틈을 찢고 출현한다. 그의 시의 근간을 형성하는 태(胎)가 익숙한 공통의 근원 서사에서 발생했을지언정 반복적으로 그려지는 성교와 번식, 근친과 식인의 모티프는 공포스러운 재생 감각으로 연결되며 그만의 개인적 이미지로 일관되게 수렴하는 것이다. 바르부르크의 언급대로 이미지가 생물학적 필연성의 산물이라면, 김희준이 강박적으로 봉합하고자 한 거대 명제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인류는 종교, 예술, 문학 등 다양한 방법을 경유하여 원초적 두려움으로부터 자신과 공동체를 보호하며 종의 계승을 보존해 왔다. 출생과 소멸에 대한 두려움은 어느 인간도 피해 갈 수 없기에 해결할 수 없는 보편타당한 종의 운명 앞에서 이를 추상화하고 거리를 둠으로써, 또 사회적 집단 기억을 대를 이어 계승함으로써 두려움을 봉합하고 파토스를 안정시켜 온 것이다. 마찬가지로 김희준은 그 자신의 개인적 이미지를 개발하고 반복적으로 중첩시킴으로써 이미지의 기원에 대한 대답을 동시대에 가장 분명하게 제시하며 등장했다. 김희준에게 있어 기원을 더듬는 일은 그 계보를 추적하는 것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신화적 세계관을 축조하고 공고히 하는 데 있다. 그리고 이때 감지되는 건 신화와 동화의 알레고리 이면에 자리한 가부장적 폭력에 대한 고발과 저항 의식이며 더 나아가 발생과 소멸에 대한 인간의 근원적 두려움이라 할 수 있다. ⓒ엄윤채 (@90r1p) 2. 재생하는 네버랜드 김희준의 시 속에서는 무언가가 끊임없이 쏟아져 내린다. 그것은 주로 ‘소나기’이지만 때로는 “불”이기도 하고(「인류도감」) “아이”이거나 “유성”(「백색소음」), “사내”(「페스티벌」), “밀도 높은 당신” 혹은 “저녁”(「오후를 펼치는 태양의 책갈피」, 「테트리스 적응기」), &ld
- 관리자
- 2025-05-01
저번까지 읽은 이후로 이어보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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