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계(四季)의 숲과 바람의 붓 ― 장필순이라는 장르
- 작성일 2018-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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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인터뷰]
사계(四季)의 숲과 바람의 붓
― 장필순이라는 장르
이민하
누군가를 만난다는 건 그 사람의 숲 속으로 들어가는 일이다. 거기에 발자국 하나 찍는 일이다. 어떤 발자국은 찍히자마자 지워질 것이고 어떤 발자국은 그 사람의 생을 따라 움직인다. 그래서 나는 늘 멈칫했던 것 같다. 누군가와 이야기를 섞는다는 건 그 사람과 인생을 엮는 일이다. 어떤 매듭은 엮이자마자 풀릴 것이고 어떤 매듭은 '추억'처럼 단단해질 것이다.
언젠가 여기까지 썼을 때 그녀와 만나기 위한 긴 여정을 예감했던 건 아니었다. 올봄 원고 청탁이 왔을 때 불현듯 그녀가 떠올랐다. 막연한 향수(鄕愁)가 일었다. 봄바람이 불면서 그녀의 체취가 풍겼던 건지도 모른다. 나는 무작정 그녀에 대한 생각을 한 걸음씩 뗐다. 우리 사이엔 멀고 먼 시간과 공간이 놓여 있었다. 여름엔 잠시 생각을 멈췄다. 8월 8일 소중한 분이 세상에서 떠나간 날, 그녀는 8집 앨범을 세상에 내놓았다. 위로처럼, 따뜻한 '품'처럼. 그렇게 그녀가 다시 나타났다. 가을바람이 불던 날, 그녀에게 긴 편지를 썼다. 세상의 모든 설렘은 무언가를 향할 때 싹트는 것이다. 편지를 전하려고 인스타그램을 터널처럼 뚫었다. 폰이 구형이라 앱플레이어 PC버전을 깔았다. 고작 이삼일간의 일이지만 마음으로는 산을 넘고 물을 건넜다. 다음 날 따뜻한 답장이 날아온 건 남쪽 끝 제주에서였다. 현실적인 거리감을 그제야 실감했다. 더욱이 앨범 발매 이후 그녀는 바쁜 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그녀의 비밀스러운 숲을 엿보려던 나의 계획은 이미 실패한 것일까.
나는 숲속의 미아가 된 기분이었다. 우리는 두 번의 길이 엇갈렸다. 10월 초 '서울숲재즈페스티벌' 일정 중 잠깐 만날 수 있다고 했지만 나는 부담을 주는 것 같아 급하진 않으니 편하신 날로 잡아 달라고 했다. 11월 중순 다시 약속을 정했지만 그녀의 연락은 다른 이에게 닿았다. 제주로 내려가기 직전에야 문자를 확인한 그녀가 공항에서 전화를 했다. 어이없는 실수를 했다고 미안해했다. 노래 부를 때의 낮고 느리고 따뜻한 목소리였다.
이상하게 엇갈렸네요. 나도 모르게 다른 사람에게 톡을 보냈어요.
언니 바쁘신 줄 알고 저도 문자만 했어요. 연락 없으셔서 아프신가 했고요.
혹시 다음주라도 괜찮겠어요? 내가 왜 그쪽으로 톡을 보냈을까.
이제라도 연락이 돼서 정말 기뻐요. 뭔가에 홀리셨던 것 같아요(웃음).
나야말로 봄부터 홀려 있었다. 멀리서 그녀의 윤곽이 잡힐 듯 말 듯 헷갈렸다. 그럴수록 마음이 고집을 부렸다. 다른 말로 그것은 '그리움'이었다. 나도 모르게 뿌려진 마음의 씨가 봄과 여름, 가을 내내 저 혼자 자랐다. 그녀를 향해 봄부터 무작정 시작한 여행이 '어느새' 겨울 초입에 이르러 있었다. 충동과 망설임, 갈망과 엇갈림이 톱니바퀴처럼 맞물리는 순간에도, 그럴수록 나는 이 여행을 중도에 포기할 수 없었다. 그건 나를 찾아가는 여행이기도 했다. 11월 23일 오후, 이촌동에서 우린 만났다. 우여곡절이 많았기에 웃음부터 나눴다. 그리고 시집과 음반을 선물로 나누었다. 내겐 제주산 수국향 드레스퍼퓸도 품에 안겼다. 어눌하고 느린 내가 그녀에 비하면 폴짝폴짝 잘도 뛰어다니는 토끼 같아 보였던 이상한 오후. 내가 알기론 정작 그녀가 토끼띠다. 나는 양띠. 우리 앞에 풀밭 같은 오후가 펼쳐져 있었다.
언니, 많이 춥죠? 제주 날씨는 어때요?
거기도 이제 추워졌죠. 그런데 서울 추위랑은 달라요. 뭐랄까, 바람이 날카롭거나 차가운 게 아니라 그냥 센 바람이라고 할까.
아침을 맞으러
: 바람 잦은 언덕 위에 그 누가 찾아올까
어깨에 멘 통기타가 잘 어울리던 싱어송라이터 장필순에게 아주 긴 밤이 찾아왔을 것이다. 80년대 초반 '햇빛촌'과 '소리두울' 시절을 지나 독보적인 목소리를 세상에 퍼뜨리며 혼자 날갯짓을 시작한 그녀에게 90년대는 빛과 자유로움으로 가득 찼을 것이다. 2000년대라는 벽에 가려져 음악 공동체인 '하나음악'이라는 둥지를 잃으면서 그녀는 지친 날개로 공중을 떠돌았을 것이다. 명반으로 꼽히는 6집 앨범(<Soony 6>, 2002)을 황금빛 깃털처럼 남기고, 2005년 회색 도시를 떠나 맞이한 제주의 첫 아침은 어땠을까.
― 처음엔 주변의 쓰레기 치우느라 정신없었어요. 몇 개월 지나서야 천천히 둘러볼 여유가 생겼죠. 오히려 집 구하러 다닐 때 막 설레고 들뜨고 그랬어요. 제주를 처음 봤을 때 완전 딴 세상 같았거든요. 내가 그런 사람인 줄 몰랐는데 벌레도 안 무섭고, 당시엔 다 쓰러져 가는 폐가들도 정말 많았는데 그런 집 구경하는 것도 너무 좋은 거예요. 콩기름 발라서 반질반질한 옛날 마루에 먼지 쌓여 있는 그런 거 보면서 매력을 느낄 거라고는 생각 못 했거든요.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에서만 자랐으니까.
― 언니가 워낙 목가적인 취향을 타고나셨나 봐요.
― 사람들하고 잘 어울리지는 못해도 혼자 도전도 잘하고 대담한 건 있는 것 같아요. 험한 일들이 많았거든요. 땅도 일궈야 하고 장작도 패고.
― 언니도 장작을 팼어요?
― 같이 했죠, 형 혼자서 하기엔 많으니까. 다행히 둘이 잘 맞았던 것 같아요.
삼십 년 지기 음악 동지인 조동익과 제주 애월읍 소길리 한라산 중턱에 뿌리내린 지 13년. 그곳에도 이웃이 있고 마을이 형성돼 있는 걸까. 해발 300미터의 집이란 어떤 풍경일까. 지상의 구름이 안개 되어 깔려 있는 곳?
― 옛날엔 위쪽으로 펜션이 있는 정도였는데 지금은 사람들이 많이 살아요. 단절된 공간에서 살다 보니까 청결이나 동물에 대한 인식은 옛 관습이 남아 있어요.
― 주민 분들과 융화하거나 소통하는 데 불편함도 많으셨겠어요.
― 일단 문 밖에 잘 안 나가요. 이웃들이 오히려 좀 답답해할 수 있는데 지금은 워낙 그런 사람이려니 해요. 음악을 한다고 하니까 처음엔 마을 운동회 때 노래하라고 그러기도 했죠. 그래서 내가 그랬어요. 이장님, 제가 거기 가서 노래 부르면 가사도 그렇고 분위기도 그렇고 우울해져요(웃음). (이)효리 부부 이사 오고 방송에 언급되고 알려지면서 좀 다른 가수란 걸 인지하시고 조심하시더라고요. 원래 노래할 일 없으면 집하고 마당밖에 몰라요.
― 저도요. 특별한 일 없으면 안 움직여서 몇 달씩 안 나갈 때도 많아요. 쓰는 거, 일하는 거 다 집에서 하고 종일 고양이들하고 뒹굴고(웃음).
― 그런데 환경이란 게 망가지는 건 한순간이잖아요. 요즘의 리더들은 잘 먹고 잘사는 일에만 집착하니까 같이 사는 것에 대한 고민이 덜한 것 같아요. 누군가 잘살게 되면 다른 누군가는 무너지고 원망이 늘고 화가 쌓이고.
나는 집 주변의 경관이나 그녀의 눈으로 바라보는 제주 풍경을 내심 기대했는데 그녀는 의외로 사람들 이야기를 많이 한다. 관광지로 주목받으면서 훼손되는 환경이랄지 관광 사업들의 조급증이나 부작용들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졌다. 그녀 스스로가 하나의 풍경으로서 자연의 일부가 된 것 같았다. 나직하고 느린 말투에 가끔씩 흥분이 섞이면 투박하고 희미한 신음처럼 들렸다. 굴착기로 파헤쳐진 흙처럼, 가지가 꺾인 나무처럼. 그럼에도 그녀가 키워 낸 잎들은 푸르고 반짝거리고 무성해져서 지친 이들에게 끝없이 그늘을 벗어 주는 것이다. 잃었던 둥지 대신 이제는 자신의 몸을 새로운 둥지에 내주는 입장이기도 했다. '하나음악' 뮤지션들이 다시 뭉친 '푸른곰팡이'가 그 숲에 있었다.
누군가 곡을 쓰고 누군가는 가사를 쓰고 피아노와 기타가 연주를 하고 그 사이로 목소리가 스며든다는 것. 비가 대지에 스미듯 사물에 스미듯, 그러고는 세상이 한순간 짙은 색을 띠게 된다는 것. 그런 어우러짐과 흘러감 속에서 곡과 가사를 주고받을 때, 연습을 하며 합을 맞출 때, 세상의 잡음을 차단하며 녹음을 할 때, 그러고는 문을 나서며 우리 한잔 할까? 이런 말이 낙엽처럼 툭 떨어질 때, 음악이란…. 시는 늘 사람들의 벽들 사이 차갑고 따뜻한 마찰음 속에서 혼자 내게로 왔다. 비에 젖은 길고양이처럼. 나는 내 시를 지키려고 벽들 사이에 남아 있다. 그녀가 그녀의 음악을 지키려고 먼 곳으로 떠났듯이. 그 숲에는 그녀만의 무지개가 있을까.
내가 좇던 무지개
: 비가 오는 거리를 걸으며 어둠 속에 흘러내리고 싶어
제주에서의 첫 정규 앨범인 7집 <SOONY SEVEN>(2013)은 6집 이후 11년 만에 만들어졌다. 그리고 5년 만인 올해 여름 8집 앨범 <soony eight : 소길花>가 나왔다. 전체적으로 그리움이 짙게 배어 있는 건 '소길花' 연작 싱글 작업 중에 음악적, 정신적 버팀목이었던 조동진이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그가 그녀에게 남긴 첫 가사(<아침을 맞으러>)와 마지막 가사(<저녁 바다>)가 담겼다. 그의 동생들인 조동익, 조동희와의 호흡은 물론 많은 동료 음악가들의 손길도 실렸다. 인터뷰와 평론, 사진들이 묶인 북클릿에는 그녀가 곡마다 덧붙인 짤막한 사연들이 시작 노트처럼 펼쳐진다. 풍성한데 고요하고 다채로운데 정갈하다.
― 이번 앨범은 특히 한 곡 한 곡이 다 빼놓을 수 없는 수작인데 모두 엮이면서 유기적인 맥락이랄까 한 권의 책이 된 것 같아요.
― 고마워요. 뭐랄까, 음악 안에 힘은 있되 외양적으로는 정적인 분위기를 의도했어요.
― 그래서 자꾸 빠져드나 봐요. 너무 정교해서 첫인상은 클래식 느낌인데 들을수록 묘한 끌림과 깊이가 있어서 빠져들더라고요. 잔잔하게만 보이던 물결 속에 막상 몸을 담그면 끝없이 빠지는 것처럼요.
퍼내도 퍼내도 맛이 닳지 않는 깊은 손맛 같은 특유의 서정성이 전자음이라는 감각적인 그릇에 담겨 있는 이 앨범은 그러나 음미할수록 포만감이 들지 않는다. 끝내는 공복감이 남는다. 부족해서가 아니라 완벽해서다. 진심을 다해 경청했을 때의 탈진 같은 것. 쓸쓸함과 따뜻함, 사람과 자연, 삶과 죽음, 빛과 어둠, 현실과 몽환, 어쿠스틱과 전자 음악이 충돌 없이 어우러지는 지점을 넘어 경계 자체가 무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 한편으로는 무척 회화적인 느낌도 들어요. 리듬감보다는 색채감이랄까, 제주에서의 삶이 자연스럽게 배어들었을 것 같아요. 사운드가 캔버스가 되고 가사가 풍경이 되고, 언니의 목소리가 그 사이를 천천히 흘러 다니는 하나의 붓이라는 느낌.
― 워낙에 가사들도 그렇고 전체적으로 그랬던 것 같아요. 사실 러브 스토리 말고 인생 이야기를 회화적으로 풀기는 쉽지 않은데 난 좀 신경 쓰는 편이에요. 그런 면에서는 동진이 형님한테 배운 것도 많고.
― 그분은 정말 간결한 가사나 정적인 멜로디로도 선이 살아 있는 그림을 만드셨던 것 같아요. 참, 리워크 작업도 하셨잖아요, '소길花' 연작과 번갈아가면서. 그 앨범은 언제쯤….
― 유통 방법이며 이후 행보들에 대해 정해진 다음에요. 이제는 현실적인 면도 생각해야겠더라고요. 사람들과의 정신적인 소통에는 불만이 없는데 하나음악 기반의 소중한 앨범들이 다른 사람들 손에서 휘둘리니까. 5집, 6집, 7집 앨범들 모두 동익 오빠와 힘들게 만든 내 음악인데….
― 5집은 실험성과 대중의 사랑을 아우른 명반으로도 불리잖아요. 그중 <이곳에 오면>이 저는 제일 좋아요(웃음).
― 그 앨범은 피아노를 거의 안 썼어요. <나의 외로움이 널 부를 때>만 빼고 전곡이 기타 드럼 베이스만 썼거든요. 그래서 사운드가 깔끔하죠. 처음에는 연주가 왜 이래? 허전한데? 이런 반응이었는데 들을수록 매력 있다고 하더라고요.
<어느새>는 워낙 알려진 명곡이고 <나누니니나> 같은 초창기 곡들도 너무 좋아요. <그대가 울고 웃고 사랑하는 사이>는 정말 자주 들어요. 그거? 내가 제일 좋아하는 노래, 7집이에요. 아녜요 언니, 하나 옴니버스 1집 때예요. 아, 헷갈렸네. 혹시 <그리고 그 가슴 텅 비울 수 있기를>…? 그러네(웃음). 저도 언니 노래 중 제일 많이 듣는 곡이거든요. 그리고 <햇빛>, <고백>, <맴맴>, <난 항상 혼자 있어요> 같은 곡들, 6집과 7집이 너무 좋아요. 정말 힘들게 만든 앨범들이에요. 1집과 2집은 도와주는 사람이 많았고 3집은 동익 오빠가 프로듀싱을 했고 4집부터는 둘이 함께 만든 거거든요. 동익 오빠가 워낙 에너지가 커서. 언니 음악들에 조동익 님 특유의 작곡이나 편곡, 연주 스타일이 스며 있어서 두 배로 좋아요. '어떤날'에 대한 향수가 있는 저 같은 사람에겐.
― 참, <내가 좇던 무지개>도 정말 좋아해요. 1992년에 나왔잖아요. 언니가 가사 쓰신 곡인데 그때 언니가 좇던 무지개는 뭐였나요?
― 그 가사는 객관적인 시선으로 쓴 거예요. '내가'라기보다는 '우리'? 8집엔 개인적인 사연을 담았지만 그거 빼고는 거의.
― 아, 그것도 궁금했어요. 언니의 음악에선 주관적 감정이나 구체적인 일상이 잘 안 보이더라고요. 사람들을 위해 비워 두는 느낌? 언니 노래 속에 들어가 있으면 누구나 다 내 이야기가 되는 거죠.
― 누구나 공감한다기보다는 어떤 삶의 자리에 있건 외로움을 타는 사람들? 뭔가 마음 한구석이 비어 있는 사람들을 위한?
― 그럼 언니가 말하는 '무지개'란 뭘까요? 희망? 꿈?
― 글쎄요…, 그냥 삶 아닐까? 어떤 목표를 향해 좇아서가 아니라 그냥 삶 자체가 꿈이고 무지개일 수 있으니까.
그대가 울고 웃고 사랑하는 사이
: 그대가 지금 할 수 있는 건 푸른 꽃밭에 물을 주는 것
1집 앨범 타이틀곡 <어느새>를 통해 장필순이라는 이름이 세상에 각인되던 1989년 그해, 아직 어리고 소심하던 여자 애의 눈에 그녀는 뮤지션이기 이전에 멋지고 당당한 어른이었다. 자고로 이십 대란 나이는 한 살 한 살의 깊이와 결이 다른 법이다. 건국대 정문 근처에 십여 명의 청춘들이 옹기종기 모여든 라이브 전문 카페가 있었다. 기타 치면서 노래하는 아르바이트 학생들과 무명의 전업 가수들이 섞여 있었다. 그중에는 범접할 수 없는 동명의 시인에 대한 경외감 때문에 시를 일찍 접었다는 '최승호'라는 이름을 가진 내 또래의 국문과 학생도 있었다. 당시로서는 흔한 대학가 풍경이었고 내게도 즐겁고 유익한 아르바이트였지만 그러한 안전망에도 불구하고 현장 공개에 응할 정도로 나는 아직 가족의 그늘에 묶여 있던 때이기도 했다.
언니, 혹시 그 시절 기억나세요? 기억이 잘 안 나요. 너무 오래전 일이라…. 당연한 일이에요. 제 삶에선 색다른 경험이지만 언니의 긴 음악 여정에서는 너무도 짧았던 시기이니까요. 그땐 너무 바쁘기도 했고. 맞아요, 언닌 노래 마치면 바로 이동했거든요. 언니 솔로 데뷔 방송 나올 땐 모두 지켜보며 손뼉 치면서 응원했었어요. 정말요? 함께 노래하던 사람들? 1집 앨범 준비하시면서 저에게 가사 써 주지 않겠냐고도 하셨어요. 그때 제가 국문과 학생이었으니까(웃음). 아, 그랬구나(웃음).
그녀는 다른 이들의 관심과 선망의 대상이기도 했다. '햇빛촌'과 '소리두울' 활동으로 이미 대학가와 언더그라운드 기반을 다져 놓은 터였다. 그런 그녀를 스칠 때마다 철로 위를 묵묵히 달려가는 기차랄까, 그 기차가 밤새 묻히고 온 바람이랄까 그런 이미지가 풍겼다. 어설픈 내 귀로도 그녀의 짙은 음색과 담백한 창법은 다소 감상적이던 당시의 풍속도를 벗어나 대중음악의 지평을 넓힐 준비가 돼 있음을 감지했거나 최소한 기대했던 것 같다. 그해 여름 나의 엄마는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와 남자 형제들 사이에서 겉돌던 나는 이탈을 꿈꾸었을 것이다. 그녀의 노래를 빌리자면 그 시절에 '내가 좇던 무지개'였다. 하지만 나는 내가 꾸리고 싶던 세계에서 실패했고 나로부터도 방치된 채 내 삶에서 빠져 있었다. 아주 천천히 내 안으로 돌아와 뒤늦게 등단을 했다. 그리고 철로 밖에서의 한 시절의 나는 폐기되었다. 그렇게 시라는 철로로 갈아탄 것이 2000년. 하지만 시인이라는 옷은 조금 닳고 색이 바랬을 뿐 길들여지지 않는다. 사실 난 올해 시 쓰다가 여러 번 중얼거렸었다. 이러다 절필할지도 몰라. 하지만 시의 기쁨은 늘 절필의 위기를 아슬아슬하게 넘어가 주었다. 장필순의 음악 인생 36년은 어떨까. 솔로 활동만 쳐도 자그마치 29년. LP나 CD라는 음반 시대를 지나 MP3에서 스트리밍 서비스 시대로 흘러오면서 음악 현장에 있는 사람으로서 느끼는 이질감이나 아쉬움 같은 건 없을까.
― 좀 아쉽지. 음반도 그렇고 책도 그렇고 실물로 만들어져서 손으로 직접 만지는 것에 대한 낭만이랄까, 그런 게 거의 사라졌으니까.
― 음반에 대한 욕구는 확실히 희박해진 것 같아요. 유통 방식도 변했지만 제작 여건의 어려움도 있다고 들었어요. 싱글이나 EP 앨범에도 익숙해지고 그런 만큼 소모 주기도 짧고요. 하지만 조금씩 발표하고 나서 나중에 정규 앨범으로 묶는 건 좋은 것 같아요. 시집이 대부분 그렇거든요. 시인들이 문예지에 한두 편씩 발표 후 적절한 시기에 묶는 거죠.
― 이번 8집을 처음 그런 식으로 했는데 나쁘지 않더라고요. 곡을 다 모아서 앨범 내려면 시간이 걸리니까 3~4년은 옛날 노래 부르고 그랬거든요. 민하 씨가 얘기한 것처럼 음반에 대한 개념이 거의 상실됐지만 난 그래도 정규 음반은 꼭 내고 싶어요. 외국은 선호도 1위가 LP래요. 2위가 음원이고 CD가 꼴찌래요. 다시 그런 음질을 원하는 거지. 무언가 소장하는 기분이나 의미도 있고.
― 한편으론, 한두 곡씩 발표 후 정규로 묶는 방식이 좋은 건, 숨은 곡들을 대중이 덜 놓치게 해 주니까요. 옛날 음악들은 앨범 발매 후 타이틀곡 위주로 활동하다 보니 묻히는 곡이 많았잖아요.
― 응, 그러네. 근데 난 1집 때 말고는 타이틀곡 위주로 활동하진 않았어요. 그냥 내가 부르고 싶은 노래, 그날 무대 분위기에 맞는 노래를 불러요. 지금은 그래도 마음의 여유가 생겼지만 예전에는 내 분위기에 안 맞는다거나 음악 장르별로 구색 맞추는 식의 공연엔 안 갔어요. 차라리 대중이 덜 모이더라도 어쿠스틱 콘서트에는 갔어요. 사실 난 통기타 가수라고 불리는 것도 참 어색하거든요. 여전히 통기타 음악이 숨 쉬고 있지만 늘 다른 음악, 세련된 음악, 시대에 맞는 음악을 하고 싶고. 좀 더 욕심을 부리자면 앞서가고 싶고. 어린 후배들이 보았을 때도 저 나이에도 저런 음악을 할 수 있구나, 그런 멋있는 사람이고 싶어요.
― 저도요(웃음). 음악들을 꼼꼼히 듣다 보니 언니가 변화를 주고자 했던 지점들이 보이더라고요. 저도 기존의 패턴들 답습하지 않으려고 애쓰는데 갈수록 시 쓰는 일이 힘들어요. 자기 검열에 더 엄격해지고. 백지 상태에서는 늘 갓 등단한 신인처럼 헤매게 돼요. 아직 18년밖에 안 돼서 그런가.
― 아휴, 오래됐네.
― 언니는 36년이잖아요. 언니에 비하면 피라미죠(웃음). 그래서 저는 어린 후배들한테도 '선생님' 소리 못 듣겠어요. 내가 누굴 가르치는 것도 아닌데. 감독도 코치도 아니고 같은 선수끼리(웃음).
Door
: 문을 열고 싶어 노란색 안에 텅 비었지만 가득 차 있어
나도 늘 문(門)을 열고 싶고, 문(文)을 열고 싶었다. 텅 비었지만 가득 차 있는. 밀릭(millic)의 앨범 <Vida>에서 그녀의 목소리를 처음 접했을 때 종일 들었었다. 이런 건 설명이 필요 없다. 그냥 좋으니까.
― 지난해였죠? 밀릭하고의 작업은 어떠셨어요? <Door>는 너무 좋아서 정말 자주 듣거든요. 그 곡은 꼭 언니의 음색이 아니면 안 되는 곡 같아요.
― 고마워요. 밀릭에게 연락이 왔을 때 내가 고민하니까 집까지 찾아왔더라고요. 강아지들 때문에 내가 꼭 필요한 일 아니면 자리를 안 비우니까. 그쪽에서 녹음한 걸 보내면 내가 노래해서 보내고 의견 교환하고 그런 식으로 했죠. 녹음실에 같이 앉아 할 수 없다면 그 방법밖에 없으니까 피처링이나 그런 부탁을 받으면 서로에 대한 신뢰가 없으면 되게 힘들어요. 이승열 씨하고도 그런 식으로 했어요. 굉장히 음악성 있고 매력 있는 분이에요.
― 그건 몰랐는데 찾아봐야겠네요. (* 이승열 정규 4집 <V>에 <Bluey>라는 멋진 음악이 실려 있었다.) 젊은 뮤지션들하고 작업하면서 받게 되는 에너지 같은 게 있나요? 테크닉과 감각이 다르잖아요.
― 그렇죠. 그래서 그 친구들이 내게 원하는 건 오히려 테크닉이 없는 걸 원해요.
― 맞아요, 오리지널리티 같은 거.
― 사실 예전엔 나도 좀 신경 썼었죠. 근데 요즘은 테크닉, 기교 이런 걸 빼 버리니까 이젠 아예 잘 안 돼요.
― 최근 <어느새> 2년 전 라이브 영상을 보다가 든 생각인데, 초창기의 <어느새>와는 너무 다른 거예요. 그땐 보사노바 리듬 때문인지 청각적인 율동감이 두드러졌었는데 그 영상에서는 편곡이나 세션의 영향도 있겠고 음색이나 호흡의 변화도 있겠지만 한 소절 한 소절 한숨처럼 내뱉고 읊조리는 것이 마치 시 같다고 느껴졌어요. 그 사이사이에 틈과 여백이 많아져서 시의 행간 같았거든요.
― 늘 배워 가면서 시간의 흐름에 맞게 변화하는 거죠. 예전에는 내 목청과 음색을 잘 살릴 수 있는 방법을 생각했다면 지금은 그때그때 목 컨디션에 맞게 전달을 가장 잘할 수 있는 방법을 찾으려고 해요.
― 그래서 흡입력이 더 생겼나 봐요.
―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타성에 젖지 않는 거예요. 재능이 거기에 다다르지 않더라도 제자리걸음하지 않고 변화해 보려고 노력해야 새로운 나를 보여 줄 수 있는 것 같아서.
― 저도 동감이에요. 어떤 창작이든 두려움 없는 새로움은 없으니까요.
예전의 장필순이 풍경 사이를 유영하는 느낌이었다면 지금의 그녀는 그것들을 담으려고 물러앉은 배경 같다. 모든 사물이, 빛과 그림자가 보일 듯 말 듯 안개처럼 고여 있는 그녀의 목소리에 스몄다가 빠져나가는 느낌이랄까. 그녀는 애써 그것들을 붙잡거나 따라가려는 미동도 않고 그 자체로 시간을 투과시키는 것 같았다. 거기에 세월의 유연함이 더해져 무엇이든 깃들 수 있는 자연의 품이 된 것일까. 그녀의 라이브 영상들을 찾아보다가 표정 하나하나에 깃들었다가 가까스로 풀려나는 이야기들이 들리는 것 같아서 어느 날 난 울컥했었다.
그리고 그 가슴 텅 비울 수 있기를
: 우리 가슴 속에 강물 흐르길 썩어 들지 않도록 쉼 없이 흐르길
― 이제 겨울이에요. 겨울 하면 조동진이잖아요(웃음). <겨울비>, <겨울숲>, <진눈깨비> 같은 곡들. 며칠 전에는 종일 그분 음악을 들었어요. 처음 인연은 어떻게 시작되신 거예요? 하나음악 때요?
― 아뇨, 그 전에 이십 대 때. 그때 한창 옴니버스 공연이 많았거든요. 대학로에 파랑새소극장이라고 있었어요. 들국화 첫 공연이 있었는데 그때 (전)인권이 오빠 부탁으로 게스트를 한 거예요.
― 아, 정말요? 저도 고등학교 친구들하고 들국화 공연 봤었거든요.
― 그때 거기서 들국화 공연과 동익 오빠, (하)덕규 오빠 들이 모여서 하는 공연이 격일로 있었거든요. 처음에는 동익 오빠를 먼저 알았어요. 그리고 '따로또같이'도 알고 있었는데 (이)주원 오빠가 동진 오빠의 학교 후배로 각별한 사이였거든요. 그 오빠들이 모두 동진 오빠를 깍듯하게 모셨고 동진 오빠 집엔 항상 후배들이 많았어요. 나도 들락날락거렸고 파고다극장에서 같이 공연도 하고 그러면서 친해졌죠. 그 후 동진 오빠가 하나음악 하면서 내 5집이 나왔고 6집이 나오고서 하나음악이 문을 닫은 거죠.
조동진은 포크 음악계의 대부이자 이른바 '우리 시대의 가객'이다. 지난해 여름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나는 <작은 배>를 웅얼거리며 조용히 이별했다. 하지만 그는 지금도 이렇게 우리들 사이에 있다. "아주 멀리 떠날 수 없네." 그가 되뇌었듯이.
― 저는 올해 소중한 선생님 두 분을 잃었어요. 저를 문단에 낳아 주신 이승훈 선생님은 아버지 같은 분이었고, 황현산 선생님은 제가 무심한 편인데도 엄마처럼 마음으로 많이 챙겨 주셨거든요.
― 아, 나도 기사에서 봤어요.
"그 집 고양이 다섯 마리 잘 있지?" 선생님은 가끔 농담을 하셨다. 우리집엔 고양이가 네 마리다. 밖에 잘 나가지 않는 나를 걱정하시며 은근슬쩍 고양이들 안부에 버무리셨다. 올여름 장맛비가 시작될 무렵, 얇은 카디건을 처음 선물로 보내 드렸다. 언젠가 무슨 시상식 뒤풀이 자리에서 모 평론가가 입은 니트를 보시곤 색이 참 예쁘다고 하셨던 와인색을 골랐다. 춥고 서늘한 마지막 여름. 예쁘고 따뜻한 옷을 입으면 기분이 좋아지실까 봐. 병원에서 마지막으로 뵈었을 때 희미하게 천천히 세 마디 하셨던 게 내겐 유언으로 남았다. "곧 나아질 거야. 울지 마. 별 수 없어…." 나아진다는 건 선생님의 몸이 아니라 남겨진 슬픔에 대해서였을까. 문득문득 복받치지만 슬픔은 금세 가라앉을 것이다. 마지막 말씀처럼 별 수 없는 거다. 삶과 죽음, 기억과 망각….
내 방 창 너머엔 텅 빈 시간을 가늠할 수 없는 오래된 빈집이 있고 담벼락에 달라붙은 담쟁이 넝쿨이 정물화처럼 그려져 있다. 바람이 깨울 때만 넝쿨은 펄럭이며 몸을 뒤챈다. 그 위로 햇살 무늬가 피었다 지고 비가 축축이 스몄다 마르고 그렇게 시간이 보이지 않게 쌓여만 간다. 그러다 어느 날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는 것이다. 무얼 잃은 것처럼, 놓친 것처럼. 우린 늘 죽음의 그림자를 끌며 사는데도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누군가 떠나간 게 아니라 내가 그들을 떠나왔구나. 내가 되돌아갈 수 없구나. 그런데 창 너머의 빈집에는 길고양이들이 산다. (어떤 이에겐) 시처럼, (어떤 이에겐) 음악처럼. 하루에도 수시로 우리 건물 화단으로 건너와 밥을 먹고 간다. 슬픔을 지속하는 일이 가능하기나 할까. 그렇게 순간순간 장필순의 목소리가 다가와 있었다. 고양이의 눈빛처럼 고요한 그녀의 음색이 우리의 삶 구석구석을 얼마나 오래 어루만지며 위로했던 것일까.
아름다운 이름
: 사랑이란 것 내가 아닌 누굴 위해 낮고 낮은 그 이름
숲이 우거진 그녀의 집마당에는 여덟 마리의 개들이 뛰어다닌다. 개똥, 달래, 완두, 냉이, 에이프릴, 까뮈, 콩이, 몽이. 이웃에서 새끼 때 분양받은 개똥이 빼고는 모두 유기견들이다. 마당 한편에는 생명을 다한 강아지들과 고양이가 묻혀 있다. 얌미, 순돌, 쉼, 아롱, 아찌. 길 위에서 떠돌던 삶과 죽음이 그렇게 함께 살고 있다. 유기견과의 인연은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힘겹게 가꾼 그대의 숲"(<아름다운 이름>에서)이 되기까지.
― 처음엔 우연히요. 나무에 끈으로 묶여서 비를 철철 맞고 있는 아이가 있었어요. 어렵게 주인을 찾아 데려왔는데 그 애는 3년을 24시간 짖었어요. 트라우마가 심해서인지. 또 한 아이는 뼈만 남은 채 해수욕장 앞에서 일주일을 서성거렸다고 해요. 아는 분이 그 애를 이틀 동안 보호하시다가 사진을 보내 주셨길래 내가 데려왔죠. 또 어떤 아이는 다리 하나 못 쓰는 요만한 앤데 숲속에다 버린 거예요, 비 오는 날. 내가 가끔 유기견을 데려오니까 아는 분에게서 연락이 왔더라고요. 그렇게 한두 마리 데려오다 보니….
― 그런 연락 자주 받으시겠어요?
― 그래서 이제는 더 이상 돌보는 것은 못 한다고 하죠. 그런 건 정확해야 해요.
― 맞아요. 본인이 힘들면 강아지들도 힘들어지니까. 저는 주변의 길고양이들 챙기는데 딱 거기까지가 제 역량 같아요. 저도 아픈 길고양이가 우연히 눈에 띈 후로 시작했어요. 식구가 된 네 마리도 길고양이 출신이지만 더 이상 집에 들이는 건 공간적, 경제적 여력이 없어 욕심을 못 부리겠어요.
그녀는 어려서부터 동물과 친했다고 한다. 나도 어렸을 땐 강아지들과 함께 살았다. 그래서인지 동물원이 싫었다. 갇혀 있는 걸 구경하는 것 같아서. 나는 자주 만나는 길고양이에게는 이름을 준다. 이름의 뜻과 발음으로써가 아니라 이름을 불러 줄 때의 사랑과 온기를 그대로 느끼니까. 그렇게 스쳐간 고양이 이름이 백 가까이 될 듯싶다. 그녀에게는 그런 이름이 몇 배 더 있을 것이다.
― 주변에서 도와 달라고 하면 그런 데는 가요. 강아지 페스티벌 같은 데 재능 기부도 하고, 얼마 후엔 '카라'에서 후원을 위한 행사도 있는데 노래도 하고, 제주에서 유기견 돕기 행사 하면 바자 물품이나 의상 같은 거 기증하고 그런 정도.
― 혹시 사람들과의 마찰이나 불화 같은 건 없으세요? 길고양이들 밥 주러 다니다 보면 눈치도 많이 보고 부딪치기도 하거든요. 그런데 지난 일 년간 고양이 산문을 연재하는 동안 길고양이에 대한 편견이 없어졌다는 얘기를 꽤 들었어요. 안 그래도 십 년간 만났던 길고양이들에게 책으로 묶어 선물하고 싶었는데 누군가 한 사람이라도 인식이 바뀐다면 더 의미 있을 것 같아요. 언니도 반려동물을 유기하는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을 것 같은데요?
― 이제는 공익 광고 같은 데에도 나와야 할 때라고 생각해요. 우리 같은 사람이 아무리 얘기해 봐야 영향력이 없으니까. 동물을 싫어하는 사람들은 사람에 대해서도 똑같더라고요. 무서운 살인 사건들 보면 동물로 먼저 실험하는 경우도 많고. 사람이 동물들과 공존을 할 줄 알아야 인간다워지는 거죠.
― 법적인 처벌만이라도 확실해졌으면 좋겠어요. 사실 예비 살인마들을 사회가 방조하는 셈이잖아요.
― 그런 학대 영상들도 불편하다고 피하지 말고 지켜봐야 해요. 그래야 느낄 수 있으니까. 얼마 전엔 로드킬 당한 아이 때문에 우울했어요. 봉사자 중엔 차 트렁크에 삽과 곡괭이를 넣고 다니는 사람도 있어요.
죽음마저도 버려진 아이들을 언제든지 묻어 주기 위해서다. 내가 가장 충격 받았던 현장은 얼굴이 뭉개진 어린 고양이였다. 그것도 질주할 일 없는 골목에서였다. 겨울엔 특히 추위를 피해 자동차의 엔진룸이나 타이어 같은 데 끼어들어 자는 길고양이가 많아 위험하다. 그래서 운전자가 시동을 걸기 전에 보닛에 노크를 한번 하자는 캠페인이 있다. '라이프 노킹'. 단 몇 초의 관심이면 된다.
― 사람들이 너무 바쁘고 조급한 것 같아요. 저도 바쁠 땐 정신없지만 가끔 종일 고양이들만 바라봐도 시간이 안 아깝거든요(웃음). 어떤 사람들은 시간 단위도 아니고 분 단위, 초 단위로 살잖아요. 그러면 평생 쫓기면서 살 텐데. 자기 자신에게도 쫓기면서.
― 나는 시계 안 봐요(웃음).
마지막 질문을 던질 차례다. 비슷한 질문을 받을 때마다 긴장하고 곤혹스러워 뜸을 들였던 그것. 주절주절 할 말이 많은데 딱히 할 말이 없게 만드는 그것. 새롭거나 특별한 대답을 기대해서가 아니라 진지하게 우물거리는 그녀의 입과 표정이 궁금했다. 천천히 생각하고 띄엄띄엄 말하던 그녀가 이번엔 의외로 단호했다.
― 가수 장필순에게 음악이란?
― ……나는 실, 음악은 바늘(웃음).
아, 실과 바늘? 그것이 '삶과 죽음'으로도 들렸다. 그녀의 호쾌한 웃음소리와 함께.
*
서로가 모르는 먼 시간을 지나 우리는 '어느새' 적당히 가벼워진 눈빛과 적당히 내려앉은 어깨로 마주 앉아 있었다. 29년 전엔 꿈꾼 적 없는 나이였다. 그리고 그해 쓰지 못한 가사를 내 딴에는 이제야 썼다. 장필순이라는 아름다운 음악에 대한 길고 긴 노랫말. 어느 날 주머니에 깊이 두 손을 찌르고 차가운 밤의 모퉁이를 돌아 집으로 오는 길에 그녀는 눈처럼 내려와 머리를 덮고 귓가를 스칠 것이다. 그렇게 맴돌다 창가 화단에 쌓일 것이다. 어느 날의 햇빛에 소리도 없이 녹을 것이다. 그리고 다시 첫눈처럼 기다려질 것이다. 일부러 찾지 않으면 눈에 띄지 않았던 건 그녀가 늘 우리들 곁에 있었기 때문이다. 포크에서 모던록으로, 일렉트로닉 사운드로 자유로이 장르를 갈아타며 시간의 흐름 속에서 우리와 동행했다. 목소리가 크지 않고 세지 않고 나서지 않아서 드러나지 않았을 뿐. 우리가 지쳐 있을 때 머리맡에 작고 낮은 읊조림을 크리스마스 선물처럼 두고 갔던 것이다. 그러나 그건 거짓말. 선물은 없다. 상자 안은 금방 텅 빌 것이고 포장 리본은 금세 낡아 어디론가 사라질 테니까.
우리는 다시 혼자 남는다. 그녀의 음악은 듣고 나면 왠지 텅 비어 버린다. 손으로 움킬 수 없는 기억처럼, 끈으로 묶이지 않는 시간처럼, 흘러가고 흩어진다. 그녀가 장필순이라는 붓을 쓰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리들 가슴을 따뜻하게 쓸어 주면서 쓸어버린다. 그러니까 장필순이라는 붓은 추억을 그리면서 동시에 지우는 붓이다. 바람처럼 그녀가 지나가고 나면 우리는 아까보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깨어난다. 우리는 누군가에게서 그렇게 사라져 왔다. 하지만 괜찮아. 그 누구의 빈자리든 남아 있어서. 우리는 사라진 사람들과 함께 크리스마스를 보내고 새해를 맞을 것이다. 빈자리는 누군가를 위한 것이 아니라 빈자리를 위한 것이다. 슬픔은 끝내 슬픔에게로 돌아간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의 이야기를 빼고 그 자리에 누구나 힘들고 우울한 순간 겪게 되는 감정들을 끌어와 자신의 입으로 통과시킨다. 노래를 듣는 사람들의 독백을 위해 자신의 입을 빌려 주는 것이다. 그 입으로 장필순은 우리에게 속삭이듯 노래한다. 다 사랑받는 건 아냐. 행복한 것도 아냐. 그래도 Merry Christm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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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2018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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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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