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대한민국 태극기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공식 누리집 주소 확인하기

go.kr 주소를 사용하는 누리집은 대한민국 정부기관이 관리하는 누리집입니다.
이 밖에 or.kr 또는 .kr등 다른 도메인 주소를 사용하고 있다면 아래 URL에서 도메인 주소를 확인해 보세요.
운영중인 공식 누리집보기

건널목의 말

  • 작성일 2019-03-01

[단편소설]



건널목의 말



박솔뫼




생활을 해야 하기 때문에 말을 하지 않을 수 없지만 올해 내내 말이 잘 되지 않았다. 말을 하려고 들면 마음이 무겁고 괴롭고 이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에서 빠져나올 수 없었다. 그 이전에도 그러기는 했지만 올해 들어 더욱 심해졌고 상대방의 질문이나 건네는 말이 내 안에서 끊임없이 엇나가는 느낌이었고 표정은 굳어질 수밖에 없고 그런 표정으로 대꾸를 하고 있기는 하지만 마음은 소극적인 사람의 표정으로 고개를 젓게 되었다. 말을 하지 않을 수 없지만 어쩔 수 없이 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할수록 상대방의 말 역시 불신하게 되고 고민의 말은 고민을 하고 있지 않다고 마치 나 자신이 리트머스 종이처럼 온도계나 기타 기기처럼 말을 들으면 수치화할 수 있는 것처럼 무게 없는 말 본뜻이 아닌 말이라고 저건 아니야 저건 아닌 것 같아, 라고 역시 소극적인 사람의 표정으로 다른 이들의 말들을 거절하고 있었다.


지난달에는 부산에 가서 바다도 잠깐 보고 골목의 바에서 술도 마시고 시장에서 포도 한 상자를 사와서 숙소에서 3일 동안 묵으며 다 먹기도 했다. 첫날밤 도착하여 해운대 근처 비즈니스호텔에 짐을 풀고 밤바다를 보고 해운대구청 근처 바에서 위스키를 마셨다. 바의 자리는 ㄷ자였는데 혼자 온 사람들이 각각 한 자리 건너 한 자리 이런 식으로 앉아 있었다. 나는 모두에게 관심이 있었지만 관심이 없는 표정을 하고 생맥주를 마시듯이 위스키와 칵테일을 세 잔 빠르게 마시고 나왔다. 계산을 할 때 칵테일을 만들어주시던 분이 왜 이렇게 빨리 마시고 나가시는 거예요, 라고 물었다. 내가 술을 휙휙 급하게 마신다고 했다. 위스키를 두 잔 마시고 올드 패션을 한 잔 마셨는데 둘 다 아주 맛있었고 일상적으로 말을 해야만 한다는 부담감에서 비롯된 잔뜩 긴장된 상태에서 풀려나서인지 기분이 좋아져서 맛있어서 그렇다고 말하며 웃었다. 잠시 근처를 돌아다니다 해운대 시장으로 가서 치킨 한 마리와 막 문을 닫으려는 과일가게에서 포도 한 상자를 샀다. 한 상자라고 해봐야 작은 상자라 8송이쯤 들어 있는 정도였다. 어깨에는 가방, 한 손에는 포도, 한 손에는 치킨을 들고 약간 취했지만 정신을 바짝 차려야지 하는 생각과 약간 취한 기분에 타고 올라 계속 흔들거려야지 하는 생각을 동시에 하며 숙소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러닝 쇼츠와 티셔츠를 입은 키가 190은 되어 보이는 백인 남자가 건너편에서 가볍게 뛰어오고 있었고 왼쪽 편 고가도로 아래에서부터 머리를 짧게 깎은 남자가 자전거를 타고 오고 있었다. 그들이 본래 가지고 있는 운동방향을 유지한다면 둘 다 나를 스치고 백인 남자는 내 뒤로 자전거를 탄 남자는 내 오른 쪽으로 지나갈 것이다. 그러나 둘은 나를 사이에 두고 세 걸음쯤 남겨 두고 그 세 걸음 정도는 내가 부담을 느끼지 않을 정도의 거리였고 멈춰 서서 인사를 했다.


- 안녕.
- 운동하러 가는 거야?
- (고개를 끄덕) 그냥 좀.
- 내일은 뭐 해요?
- 내일은 뭐 회의 있어요. 어학원 선생님들 회의.
- 못 쉬겠네?
- 음 뭐. 할 수 없어요.
- 또 나중에 봐요.
- 네. 고마워.
- 잘 가요.
- 네. 잘 가요.


신호등은 바뀌고 나는 먼저 지나가고 내 뒤로 그들의 대화가 들렸다. 가벼운 가을 바다 바람이 불고 있었고 말에 말을 들어야 하고 말을 해야 하는 일과에 잔뜩 긴장하고 있느라 지쳐 있던 생활에서 벗어나서인지 편한 상태였고 씻고 치킨을 먹고 포도를 먹으면 더 좋을 것이다. 백인 남자가 한국어로 말을 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해운대에는 외국인들이 많았고 몇 년씩 영어 선생님을 하다 보면 그 정도 한국어는 자연스럽게 익힐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순간에는 역시 신선했다. 그럴 이유가 전혀 없음에도 자전거를 탄 사람 쪽이 영어를 하는 것을 당연하게 예상하고 있었다. 정작 외국어를 해야 하는 쪽이 어떤 부담을 가졌을지는 알 수 없지만 그는 외국인들이 자주 쓰는 제스처나 표정이 거의 없었고 표정 없이 한국어로 이야기하고 나를 지나쳐 뛰어갔다. 나는 영어를 할 때 부담을 느낄 때가 많은데 그가 크게 부담을 느꼈을까, 조금만 잘해도 나처럼 놀라고 칭찬해 줄 테니 별 부담이 없을까. 어쩌면 매일 만나야 하는 사람들에서 놓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지만 어쩐지 아무 말이나 지껄여도 혹은 아무 말이나 지껄이는 것 이상으로 아무 말도 지껄이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나 자신이 해운대를 굴러다니는 모래처럼 가볍다고 느껴버리는 지금의 나처럼 가벼운 마음이었을지 모른다. 그런데 실제로 모래밭으로 가 모래알을 헤아려 보면 모래는 알맹이가 각각 뚜렷할 것이다. 당장은 나의 마음과 존재가 바닷바람을 타고 어디론가 사라지고 있는 듯했지만 그게 다는 아닌 무언가 남아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방으로 돌아왔다.


텔레비전을 배경화면처럼 틀어 놓고 치킨을 먹으며 인터넷을 하다 침대에 몸을 던지고 뒹굴다 메일 확인을 하다 다시 채널을 돌리고 CSI를 봤다. 배가 부르자 포도를 먹고 포도를 두 송이 먹고 화장을 지우고 이를 닦고 샤워를 하고 욕조에 물을 틀어 놓은 채 붉고 동그란 배를 보았다. 목 아래부터 배꼽까지가 술 때문에 붉어져 있었다. 휴가가 끝나 서울로 돌아가면 다시 닥쳐오는 질문들에 어느 정도의 정확한 답을 해야 하는가 정확한 답을 하지 않고 적당히 말을 하는 것을 묻는 사람도 그 외 주변 모든 사람들도 원하지만 그렇게 적당한 말을 하고 컴퓨터 화면으로 고개를 돌리면 또다시 아무 말도 아닌 것 같은 말을 하였다고 그것은 달갑지가 않았고, 달갑지 않은 사실에 대해 계속 생각하게 될 것이다 분명. 이런 것으로는 누구와도 싸울 수가 없는데 달갑지 않은 것들을 작은 것부터 쌓아올리면 말이라는 것을 그러니까 그것이 어떤 식으로 달갑지 않음을 만들었는지 알게 되나 그럴 리 없을 텐데. 한숨을 쉬니까 입에서 포도 냄새가 났다. 그렇게 서울로 돌아가기 전날 밤에는 걱정을 미리 사서 했다. 전전긍긍하였다.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며 마음은 평안해지는 듯했지만 아주 잠깐 2초쯤 회사가 너무 가기 싫어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시간을 빼고는 그 시간은 빼지지가 않았지만 그래도 긴장을 풀고 편한 마음이었다.
어디에 무언가 남아 있는 감각 잔잔한 표면 아래 녹지 않고 남아 있는 고체들을 나는 생각했다. 씻고 가운을 입고 침대에 누웠을 때는 자꾸만 눈물이 났다. 침대 머리맡 옆에 놓인 서랍장 위에는 호텔 입구에서 가져온 신문이 있었고 그 위에는 뱉어 놓은 포도 껍질로 바닥이 신문이었다는 것을 알 수 없을 정도였다. 고개를 돌리면 포도 냄새가 났고 이불을 머리 위로 덮으면 멀어졌다. 방은 건조하고 포도 껍질도 말라 갈 것이다. 울긴 울었지만 부산에서는 잘 쉬다가 서울로 돌아왔다. 시간은 흐르고 하던 것을 하고. 그런데 자꾸만 부산에 다시 가고 싶었다. 거기서 잘 쉬고 여기로 돌아와 일을 열심히 하고 마음을 다잡아먹고 주어진 일에 감사하고 운동화 끈을 고쳐 매고 경마장의 말처럼 달리는 사람이 될 수가 없나 나는? 나는 그런 생각을 하는 데 쓸 힘이 없었고 점심을 먹고 저녁에 뭐 먹지 생각하는 것처럼 가을 이후로 한동안 부산에 갈 기회를 살피는 날들이 계속되었다. 말을 하기 싫을 때 자꾸만 말을 의심하게 될 때 다시 부산에서 쉬고 싶다고 자동적으로 생각했다. 부산이 무슨 말의 고장인 것도 아닌데. 아니아니 말에서 자유로운 공간인 것도 아닌데. 그렇다고 여기가 아니면 아무데라도 상관이 없어서 부산에 가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부산이어야 했는데 부산으로 정해버린 것이 조금 우습다 생각할 뿐이었다.


지난주에는 일기를 쓰려고 했는데 자꾸 미루게 되었다. 일기를 습관을 들여 쓰는 사람이고 싶었는데 할 말이 있으면 일기장에라도 하고 싶었다. 하지만 딴생각을 하다가 청소를 해버리고 청소를 하고 나면 졸려서 자버리거나, 그 외에도 할 일은 많았다. 줄곧 쌓여 있는 많은 것들을 정리하고 싶었다. 그게 뭐가 될지도 모르기 때문에 뭐가 안 되더라도 그냥 두고 싶기 때문에. 일기에 쓰려고 한 것은 동면에 관한 것인데 술을 마시다 어떤 사람이 동물학자를 만난 이야기를 해주었다. 이야기에 따르면 그 동물학자는 먼 조상들은 동면을 했다고 가정하고 있었다. 말을 시작할 때 이것은 가설이라고 하지만 하고서는 시작했다. 옛날에는 동물뿐만 아니라 인간들도 동면을 했다는 것인데 현재 주변에서 겨울을 유난히 힘들어하는 사람들은 먼 조상의 기억이 남아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이야기였다. 수면과 동면의 차이도 이야기해 주었는데 수면은 뇌가 정리되는 과정이고 동면은 아무것도 없는 ------------의 상태라고 했다. 그래서 수면 상태에서는 어그러졌던 기억이나 정신이 퍼즐처럼 맞춰지고 정리된다고 했다. 반대로 동면은 멍한 상태. 그래서 실제 동물들도 동면중이라도 깨어났다가 다시 수면을 취해야 한다고 했다. 수면에서 깨어나서는 다시 동면을 취하는 곰을 생각했다. 나는 겨울이 힘들었기 때문인지 그 이야기가 정말 좋았다. 그런 가정은 낭만적이기도 했고 내가 겨울에 힘든 것은 내 탓이 아니라고 남 탓을 할 수도 있었다. 동면을 취하는 사람들, 예전의 사람들, 앞서간 사람들. 먼 조상이라고 해도 아주 여러 명을 거쳐 가는 것은 아닐 것이다. 나의 조상은 당연히 한국 사람이겠지? 아닐 수도 있지만 우선 한국 사람만으로 가정하면 5000∼6000년을 60살로 나눈 정도가 아닐까. 아니면 옛날에는 더 일찍 죽었을 것이니 40살 정도로 나눠 보아도 된다. 내 앞에 엄청나게 많은 수의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니다, 많지만 아주 엄청난 수는 아니다. 세 자리 수의 사람들일 것이다. 혹은 위험을 피해 장수한 조상들이 많다면 두 자리 수의 사람들. 거기서 앞에서 몇 번째 몇 번째 몇 번째까지는 동면을 했을 수도 있다. 그 사람들은 곰처럼 배를 채우고 추위가 몰아치기 전에 동면을 했을 것이다. 동면을 하다 잠시 깨어 수면을 취하고 다시 깨서 동면으로 들어가고 그런 시간들을 지나 봄이 오면 잠에서 깨어 다시 생활을 해나갔을 것이다. 그 이야기를 해준 사람은 로빈이었는데 로빈은 자는 것이 특기라고 했다, 나도 거기에 재능이 있는 편이 아닌가 나는 자는 생각을 하면 좋았다. 재능이 잘 발휘되지 못할 때도 있었지만 하루 중 어느 시간이 가장 좋은가 하면 잠들기 위해 침대로 가 이불을 덮는 시간이었다. 마음속으로 <동면하는 로빈>이라는 제목을 생각해 두었다. 나는 그것을 꼭 쓰고 싶다. 일기처럼 미뤄 두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 이야기를 친구들과의 모임에서 했는데 그 이야기가 끝나자 누군가 요새 사주를 공부한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저요 저요 하고 이야기가 끝나기도 전에 손을 들어 생년월일과 일시를 부르는데 왠지 속으로 나는 지금 추운 사람 나는 추운 게 싫은 사람 왜 그런 생각을 하지? 아무튼 여름 사람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는 내게 당신은 열심히 노력해서 서울에서 일을 하며 살고 있네요. 그런데 북쪽이 맞지 않아요. 남쪽으로 가야 해요. 꼭 아주 남쪽이 아니더라도 서울 안에서라도 남쪽으로, 아니면 대전이라도 아무튼 되도록 남쪽으로 가야 한다고 말을 했다. 당신은 추우면 안 되는 사람이네. 나는 맞아요 맞아요 했다. 동면을 하는 사람은 추위를 피한 사람이라고 해야 할까, 원래 안 추운 데서 사는 쪽이 나은 걸까. 나는 추운 것이 힘든 사람이라고 여기저기서 나를 인정해 주었다. 나는 그래서 그것을 받아들이겠습니다 생각했다. 당신은 태양을 받아들여야 하니 붉은 옷을 입으세요, 라는 조언을 들었다. 나는 정말 붉은 옷이 없다. 옷을 사야 한다.


날씨가 추워질수록 많은 말들을 땅에 묻는 것을 실제로 그 행동 자체를 머릿속으로 그려 보는데 그런 식으로라도 몸을 쓰지 않으면 몸을 쓴다고 가정하지 않으면······. 나는 어딘가에서 울어서 벌벌 떨고 있는 사람, 머리카락에 얼음이 달리고 콧물이 얼어붙은 사람을 보았다. 나는 그 사람을 가여워하며 보았다.
땅에 묻힌 말은 힘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우선은. 거기까지 생각하지는 않고 말들은 흙과 섞여 거기서 사라지는 것으로 생각한다. 내 머릿속 그림으로는 그것이 자연스러웠다. 나는 그런 일을 하면 겨울이 끝이 날 것이라고 봄이 올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동면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겨울을 어떻게든 나야 하며 나는 늘 후회할 말들을 많이 해버린다. 아니 후회할 말들이라기보다 말이라는 것이 어떤 말이라는 것이 마음만 먹으면 나를 불안하게 할 수 있었다. 내뱉은 말들에 대한 불안들, 나는 그것이 실제로 내 방문을 두드릴까 봐 불안해하는 것인데 어떤 사람들은 알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지나친 것이 아님을, 타당한 생각임을. 그래서 나는 겨울날 삽을 들고 산으로 가 말들을 묻는 나를 떠올린다. 말을 묻고 돌아와 걸친 털옷을 벗지도 않고 뜨거울 정도로 따뜻한 방에 누워 잠을 잡니다. 나는 동면을 하는 것은 아니고 다음날 아침 일어나 사과를 먹고 차를 마시고 다시 말을 묻으러 갑니다. 왜 자꾸 묻어야 하는지 왜 그럼에도 자꾸 묻는 것에 관해 써야 하는지 생각해 보았는데 나는 그 생각한 내용을 일기라고 여기고 우선 이곳에 잠깐 써둔다.


일단 묻는 것에 관해 말을 하겠다. 나는 벌벌 떨지 않기 위해 얼지 않기 위해 두꺼운 옷을 입고 삽을 들고 땅을 파서 흙을 쌓는다. 그러면 몸이 뜨거워지고 땀이 난다. 내가 묻는 것은 말인데 나는 말을 하는 것이 말이라고 하는 것이 대개의 경우 너무나 어렵기 때문이다. 말을 하고 싶지 않을 때라도 말을 하고 있는데, 나는 한편으로는 너무 말을 하고 싶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을 그냥 싶은 것이라고 해야 할지, 단순한 감정으로는 하고 싶지 않음에 훨씬 더 가깝지만 그중 어떤 감정은 말하고 싶음 써두고 싶음 외치고 싶음이 있는 것 같다고 느낀다. 그게 말이 아니어도 좋고, 말이 아닌 형태로 유리병을 손에서 놓쳐서 그것이 바닥에 깨진다거나 옆에 있는 사람의 볼을 물거나 뺨을 때리거나 그런 행동이 더 적합하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마음이 얼마나 강한 것인가, 그리고 그런 강하게 튀어나간 마음은 사실 말하기 싫은 마음 때문에 나와 버리는 것이 아닌가. 눈치만 보다가 꾸역꾸역 쌓아 두는 짜증 속에서 모두 다 그만두라고 소리 지르고 싶은 것 아닌가.


아무튼 간에 여기에 쓰는 것은 일기에 가까운 것인데 무엇이라도 우선 써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나는 말을 하고 싶다고 그 말이 행동이든 소리든 간에 있긴 있다고 그것도 아주 강한 형태로 있다고 써둔다. 그 마음에는 몇 가지 의문스러운 점도 있다고도 쓴다. 그리고 따라 붙는 말에 대한 불안들도 일단은 간단하게나마 나는 이런 것에 대해 걱정을 하고 있었어, 라고 쓰고 그래도 왜인지 떨치지 못한 두려움을 가라앉히기 위해 말을 땅에 묻는 것을 반복해서 떠올리는 것에 대해서도 쓴다. 의문과 불안과 그 때문에 자연스럽게 떠올리는 장면들에 대해서 말이다. 말을 땅에 묻고 그 말은 시간이 조금 지나면 낙엽이 썩어 사라지듯이 그렇게 사라집니다. 나는 그와 비슷하게 나에게 안정감을 주는 나의 마음을 가라앉히고 가볍게 해줄 것이라고 내가 진정으로 믿는 것들을 몇 가지 더 생각해 보고 쓰기로 한다.


1. 산으로 가 말들을 묻고 돌아와 숙면을 취한다.
2. 같은 말을 반복한다.
3. 원하는 미래를 쓴다,
4. 원하는 모든 것과 원한다고 쓴 모든 것을 믿는다.


지금은 우선 부산에 가고 싶었다. 서울은 너무 춥고 나는 회사에 가기가 싫고 부산에서 묵었던 숙소는 모든 저렴한 호텔처럼 약간 싸늘한 공기에 건조한 방이었다. 히터는 돌아가고 두꺼운 오리털 이불 안으로 몸을 넣고 눈을 깜박이면 김이 서린 창이 보였다. 어떤 곳은 뜨겁고 떠도는 공기는 서늘해. 나는 말이라는 것이 떠오르지 않았다. 샤워를 마치고 젖은 머리는 수건으로 감싸고 벗은 몸으로 이불 속에서 눈앞의 벽을 보고만 있어. 하지만 동면에도 어려움은 있을 것이다. 동면에서 깨어 수면으로 들어가야 할 때 수면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고 수면 후에 동면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고 동면을 취할 식량이나 공간이 없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아니면 다른 사람들은 동면을 취하지 못하게 하고 자신의 시중을 들게 하고 자신은 지금의 호텔 같은 넓고 쾌적한 곳에서 동면을 취하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동면의 시작은 공동생활에서 나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깨끗한 마구간 같은 곳이나 동굴에서 모두 나란히 누워 동면을 취하다 동면-수면 사이클 변화 시 눈을 떠 사람들의 상태를 살피고 다시 동면으로 들어간다. 그러다 누군가는 자신만의 동면 공간을 갖게 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호텔과 시중 그 사이에 있었을 것이라고 믿고 나에게도 멀리 있는 나라고 잠시 믿어 보는 나에게도 동면의 경험이 있었을 것이라고, 혹은 동면이 사라지지 않고 이어져 온 어느 날의 나 그러나 지금과 아주 다르지는 않은 나를 생각해. 먼 과거가 아니라 현재의 시간을 살지만 동면을 하는 나. 여전히 말을 하고 싶지 않고 일기를 쓰려고 하는 동면을 하는 나. 가을부터 음식량을 늘리고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음식도 저장해 두고 깨끗이 정리와 청소를 끝낸 방에 누워 눈을 감고 긴 겨울잠을 잡니다. 내 옆에는 지금 내 옆에는 없지만 동면을 하는 내 옆에는 다른 동물이 한두 마리 누워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다람쥐밖에 떠오르지 않지만. 혹은 그곳의 나는 그해의 나는 돈을 많이 벌어 작고 조금 낡은 방이지만 호텔을 예약해 3개월여를 따뜻하지만 건조한 호텔방에서 보낼지도 모릅니다. 혹은 그보다 힘든 상황들도 떠오르지만 오늘은 생각하지 않기로 하였습니다. 나는 동면을 하고 스스로 정한 기간에 눈을 떠 과일과 차를 마시고 고기를 먹고 잠시 스트레칭을 했다가 다시 과일과 차를 마시고 이를 닦고 숙면을 취한 다음 다시 잠에서 깨어 동면 상태로 들어갈 것입니다. 그때의 나는 봄이 되면 동면 기간 동안 꾼 꿈들을 하나씩 기억하여 기록해 둘 것입니다. 2월 말부터 3월을 지나 4월 초까지 나는 꿈을 기억하고 기록하는 일들과 잔잔한 사투를 벌여 나갑니다. 나는 노트에 꿈을 기록하는 일기를 쓰고 가끔 그림과 사진을 덧붙이고 책꽂이의 책을 뒤지며 기록을 보충합니다. 이것은 나만 하는 일은 아닙니다. 드물지만 동면자들은 꿈을 기록하고 정리하는데, 이는 자신의 미래를 위해서가 아니라 사라진 시간들을 복기하기 위해서입니다. 그 시기에는 잠이 다이기 때문에 꿈의 흔적을 좇아 동면의 시간으로 떠난 자신이 실은 또다시 어딘가로 떠났음을 그 떠남을 떠올리고 더듬어 나가며 자기 자신과 또 어딘가에 있을 자신에 대해 이해해 가는 시간입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꿈들은 기억이 나지 않고 나는 적어도 나는 내가 있었으면 내가 했으면 좋았을 것에 대해 그것은 허황된 꿈과 바람이지만은 않고 사실 했을 법하지만 왜인지 아련한 것들에 관해 쓰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4월이 오면 나는 일을 하고 걷고 책을 읽고 여행을 갑니다. 새로운 곳에 가는 것은 꿈을 기록하는 것과 늘 연결되게 됩니다. 그것은 내가 바라던 것도 아니고 몇 번 반복해 가다 보니 알게 된 것입니다. 여행에서 돌아오면 다시 일을 하고 저금을 하고 옷을 정리하고 세탁소에 가고 시간을 내어 바다를 보러 갑니다. 차를 마시고 장마의 날들을 빗소리를 들으며 보내다 보면 쨍한 하늘과 더위가 찾아옵니다. 그때는 7월이 지난 날들입니다.


여름이라면 좋을 것인데. 그게 아니라면 여름이라면 좋을 것이다.
여름이라면 좋을 것이라는 말은 2번에도 3번에도 해당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의심할 여지없이 4번에도 해당이 되었다.


8월 말 늦여름에는 부산에도 갔다. 해운대 바다를 따라 있는 버스정류장 유리가 연이어 깨져 있었다. 폭주족 같은 것이 있나요? 누군가 지나가며 휘두르며 깬 유리들이었다. 나는 왜인지 불안하지만 들뜬 바보 같은 마음으로 바닷가를 걸었다. 그 바보 같은 마음은 어떤 마음일까.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 채 들뜬 해맑고 멍청한 마음, 혹은 무슨 일이 벌어질 거라 잔뜩 기대하지만 결국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모르는 결국에는 해맑고 멍청한 마음. 그런 식으로 조금 바보 같은 마음이었다. 무거운 바람이 흐르는 길을 따라 걸었고 바다는 잔잔하였지만 밤은 검고 깊었다. 아이들은 모래사장인데도 자전거를 타고 지나갔다. 나는 해운대 시장을 지나 해운대구청 뒤편의 작은 바에서 하이볼 두 잔을 마셨다. 어떤 위스키로 만들어주기를 원하느냐고 물어서 아무거나 추천해 달라고 했다. 다다음달 영화제가 열리면 지금보다 더 붐빌까? 아니면 8월 말이어도 여름이니 여름이 더 붐빌까 잠깐 생각하다 말았다. ㄷ자로 된 바에는 출입문 쪽에는 내가, 내 왼쪽과 오른쪽에 각각 한 명의 남자가 앉아 있었다. 내 오른편의 남자는 이곳에 자주 오는지 바텐더와 술 이야기를 친근하게 하였다. 하이볼을 한 잔 마시고 잠깐 나와 옆 편의점으로 가 담배를 사서 밖에서 잠깐 피우고 들어오자 바텐더는 안에서 피우셔도 된다고 말하고 나는 바람 쐬려고 나갔다고 말하고.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다시 시장으로 돌아가 포도 한 상자와 사과 두 개를 샀다. 가만히 서서 걷다 보면 이미 익어 진해진 포도 향이 올라왔다. 얼른 씻고 내 몸을 씻고 포도도 씻고 침대에 누워 포도를 먹고 싶다 얼른 돌아가자 생각하다가 그러다가도 왠지 누군가 말을 걸면 그 사람을 따라가 그 사람의 집으로 가 포도를 씻어 먹게 되는 일이 생길 것 같다고도 생각했다. 포도가 먹고 싶었다.


- 다음에 글을 쓰면 '동면하는 로빈'이라고 제목을 해.
- 동면하는 로빈?
- 그럼 내가 읽어 볼 거야.


동면자들이 기억하려고 애쓰는 꿈들은 가끔 아무 생각도 하고 있지 않을 때 그들을 찾아왔다. 실제 그들은 낯선 곳으로 가 다음 동면 전까지 조용히 거리를 걷고 생활을 하는데 그 때 누군가 옆으로 와, 자리에 앉아, 술을 마시며 담뱃불을 빌리며 이야기를 하였다.


- 결국 오필리아라는 사람을 썼잖아요?
- 그것은 왜 어떤 사람이 그곳까지 왔는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어서 생각하고 있는 건데.
- (왜 그 사람은 거기에 있을까, 어떻게 그 사람은 거기에 있을까.)


숙소를 향해 가는 횡단보도 앞에 조깅을 하고 있던 키가 큰 백인 남자가 신호를 기다리고 고가도로 아래에서 자전거를 탄 남자는 자전거를 끌며 횡단보도 방향으로 오고 있었다. 고가도로를 따라 자전거를 끄는 남자가 오는 방향으로 되돌아간다면 나와 자전거를 탄 남자는 스쳐 지나가고 나는 다른 곳을 가려고 하지만 왠지 달맞이길 쪽으로 방향을 잡아 또다시 헤맬 것이고 자전거를 탄 남자는 바닷가를 따라 자전거를 타게 될 것이다. 하지만 나는 횡단보도에서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리고 자전거를 끄는 남자와 조깅을 하는 남자와 나는 모두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린다.


- 어디 가?
- 집에 가는데?
- 다음 주에 부산 mbc 라디오 방송 녹음하는데.
- 그때 보겠네?
- 어. 끝나고 보든가 하자.


두 남자는 손을 잠깐 들었다가 내리고 나는 숙소를 향해 간다. 키가 큰 백인 남자가 한국말을 할 것이라고는 생각을 못 했는데 그는 표정 없는 한국인의 얼굴로 아무렇지 않게 말을 하고 다시 뛰어갔다. 가방 안에서 카드키를 꺼내 문을 열고 가방을 바닥에 떨구었다가 다시 테이블 위에 놓고 얇은 린넨 코트를 옷걸이에 걸고 침대에 누워 바지와 티셔츠를 양말을 벗고 속옷만 입은 채로 리모컨으로 텔레비전을 켜서 보고 돌리고 엎드려 누운 채로 일기를 써야겠다고 잠깐 생각하다가 잠이 들었다. 꿈에서는 맛있는 와인을 찾아 과수원 같은 곳을 헤매었는데 목적 없이 헤매는 것이 아니라 나름의 보람을 품은 채로 찾고 있었고 그러다 금방 다시 깨 욕조에 몸을 담근 채로 머리를 감고 포도를 먹고 나서 이를 닦아야지 생각했다. 꿈에서 와인을 찾아 헤맸던 것은 포도를 먹고 싶어서였을까 틀어 놓은 텔레비전 프로그램이 소믈리에에 관한 다큐멘터리였기 때문일까 잠깐 생각했다. 혼잣말도 나오지 않아 에에 아아 몇 마디 소리를 내어 보다가 말았다. 몸을 닦고 머리와 몸에 수건을 감은 채로 이불 속으로 들어가 여전히 건조한 방의 어느 쪽은 서늘하고 화장실 옆에서는 물기를 머금은 더운 공기가 머무는 방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회사에 가기 싫었고 회사에서 별 말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회사에 가기 싫었고 비슷하게 말도 잘 되지 않았고 생활을 위해서라면 말을 하지 않으면 안 되지만. 그래도 겨울보다는 여름이 훨씬 나았으므로 여름은 정말 좋다고 생각했다. 방금 전 바에서 만난 여자는 처음 본 나에게 털어놓을 것이 있는지 아무 이야기나 무작정 주구장창 쏟아내었고 나는 즐겁고 많이 웃었다. 그 사람은 음악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 무작정 19살에 뉴욕으로 건너가 십 년 넘게 불법체류자로 살았다고 했다. 선거를 앞두고 신고할 경우 비자를 발급해 준다고 하여 그때 비자를 받았다고 했다. 그 이전까지는 가족들을 거의 못 보았고 가족들이 미국으로 한 번 온 적이 있었다고 했다.


- 아무튼 그 여자는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해요. 정말 멋있어요.
- 왜요?
- 투어 중에 죽었잖아요 호텔에서.
- 아. 맞다. 들어 본 것 같아요. 2002년인가 그랬었던 것 같은데.


겨울인 나보다 여름인 나가 훨씬 좋습니다. 나는 그러므로 불평하지 않고 정말로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눈을 깜박이며 부산에서의 늦여름 밤을 즐깁니다. 겨울인 나 서울에서 겨울에 추워하는 나 말을 많이 하고 싶지 않은 나 동면을 하지 않는 나 기억나는 대화가 적은 겨울의 나는 어디에선가 조금 다른 나 자신이 건조하고 따듯한 호텔에 누워 동면을 한다는 생각으로 추운 시간들을 버티려 해보고 조언대로 붉은 옷을 사지 못한 나 조언대로 붉은 옷을 샀지만 여전히 추운 나. 동면자들이 기록하는 꿈에 관한 기록은 나 역시도 어디에 있든 조금 보태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일기를 쓰려고 하고 생각만큼 잘 되지는 않지만 쓴 적도 있기 때문입니다. 몸을 일으켜 포도를 씻고 포도를 침대 위에서 낮에 읽던 주간지를 깔고 먹고 다 먹은 포도 껍질을 주간지 위에 말리듯이 깔고 그걸 다시 테이블 위에 놓고 포트에 물을 끓이고 잔에 녹차 티백을 넣고 녹차를 우리고 녹차를 마시며 CSI를 봅니다. 마이애미에 가고 싶어졌고 거기서라면 동면을 안 해도 동면에 대한 생각을 안 해도 하지만 누군가의 동면의 기록이 될 가능성을 희박하게 품은 채로 살 것이라고 생각을 했다. 이를 닦고 침대에 누워 눈을 깜박이면 이전에 본 책의 페이지가 머릿속에서 마치 애니메이션으로 구현된 장면처럼 책의 표지가 크게 보이고 그 다음 장에는 작가 사진이 박힌 책날개가 보이고 다시 책 제목과 몇 장의 페이지가 넘어가고 두 번째 챕터의 제목이 보이고 그 페이지만을 천천히 더듬듯이 읽어 나갔다. 그때 나는 실제의 나보다 커지거나 작아지지 않았지만 책만은 실제의 책보다 커져서 노력하지 않아도 글자들이 쉽게 눈에 들어왔다.


첫 번째 책은 로베르토 볼라뇨의 『먼 별』이었다.


검은 하늘과 짙은 구름이 펼쳐진 책 표지에는 왼쪽에서 와 오른쪽을 향해 가는 작은 경비행기 한 대가 있고 그 경비행기는 길고 가는 바늘귀 속을 통과하려 한다. 바늘의 오른쪽 위에 책 제목인 먼 별이 쓰여 있다. 책장을 넘기면 로베르토 볼라뇨가 어째서 비더의 이야기를 쓰고자 했는지 짧은 한 장 정도의 설명이 있다. (그는 『아메리카의 나치문학』에서도 비더에 대해 쓴 적이 있다.) 그리고 소설은 시작한다. 이때 『먼 별』은 한 권에서 두 권이 되어 첫 문장을 읽는다.


내가 카를로스 비더를 처음으로 만난 것은 살바도르 아옌데가 칠레의 대통령이었던 1971년이나 1972년 무렵이었다.
당시 그는 알베르토 루이스 타글레라는 이름을 사용했고, 남부의 수도라 불리는 콘셉시온에 있는 후안 스테인의 시 창작 교실에 가끔 드나들었다. 나는 그와 친했다고는 말할 수 없다. 그가 일주일에 한두 번, 시 창작 교실에 들를 때만 만났을 뿐이다.1)

1) 『먼 별』, 로베르토 볼라뇨, 열린책들 p.11, 다음 단락은 1)에서 변형.


내가 처음으로 카를로스 비더를 알게 된 것은 1971년이나 1972년 무렵이었다. 살바도르 아옌데가 칠레의 대통령이던 바로 그 시기였다.
당시에 그는 자기 자신을 알베르토 루이스-타글레라고 했고, 가끔씩 후안 스테인의 시 창작 교실에 나왔다. 남부의 수도라고 불리는 콘셉시온에서 열리는 문학 창작 교실이었다. 내가 그를 잘 알고 있었다고는 말할 수 없다. 문학 창작 교실에서 일주일에 두어 번 정도 그를 보는 게 전부였다.


두 번째 『먼 별』은 곧 책장을 닫고 첫 번째 책의 뒤로 합쳐진다. 스페인어를 공부하던 친구는 『먼 별』의 첫 부분을 다시 번역하여 나에게 주었고 나는 그것을 『먼 별』의 앞부분에 꽂아 놓고 읽을 때마다 번갈아가며 읽었다. 『먼 별』은 『먼 별』대로 차례로 페이지가 넘어가고 나는 왼손으로는 『먼 별』의 페이지를 넘기고 만지고 있고 오른손으로는 어느새 나타난 나의 일기장을 넘겼다. 어제의 일기. 어제의 일기는 없고 엊그제 그 전날의 일기도 없고 휘리릭 넘겨보면 뒤죽박죽으로 쓰다가 말다가 어느 부분은 수십 장을 백지로 건너뛴 오래된 노트가 거기에는 나도 기억 못 한 몇 달 전의 한탄과 감상이 한 줄로 끝이 나 있었다.


힘든 일이 있을 땐 강가에 갔다.
온갖 곳에 이르러 강가에 갔다.


볼라뇨의 『먼 별』은 자주 읽어서 한 손으로 넘기다 멈추고 눈으로 훑어도 어떤 장면인지 바로 말할 수 있었다. 한 권으로 합쳐진 『먼 별』을 책상 위에 두고 일기장은 그 위에 두고 가만히 천장을 바라보다가 눈을 깜박이다가 나란히 누워 함께 동면하던 사람들을 그려 보았다. 나와 손을 잡고 동면을 하던 사람들, 메마른 입술을 하고 있던 사람들을 생각했다. 어느 날에는 지금의 나처럼 작은 방에서 혼자 누워 있기도 했고 다람쥐와 다른 작은 동물들도 함께하기도 했다. 우리는 모두 말을 하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들 잘 되지 않는 사람들 잠을 자면 오랜 시간 해야 할 말들이 자기들끼리 흩어져 스스로 산속에 가 묻히게 될 것이다. 몸을 일으켜 베개를 안은 채로 CSI를 다시 보고 왜인지 늦여름의 부산은 아주 많은 여러 번의 수만큼 계속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작가소개 / 박솔뫼

출간한 책으로는 소설집 『그럼 무얼 부르지』, 『겨울의 눈빛』, 『사랑하는 개』, 장편소설 『을』, 『백 행을 쓰고 싶다』, 『도시의 시간』, 『머리부터 천천히』, 『인터내셔널의 밤』 등이 있다.


《문장웹진 2019년 03월호》


추천 콘텐츠

보호 구역

보호 구역 김근수 애랑은 바다에 몸을 던져 죽었다. 애랑의 몸은 물위로 떠오르지 않아서 주검을 수습하지 못했다. 수직으로 바다를 막고 선 해안 단애의 절벽에서 애랑이 몸을 놓아 버릴 때, 덕배는 한달음에 마당바위로 달려 내려갔다. 갈매기들이 날아오르며 떼를 지어 울었다. 바다 어디에도 애랑의 모습은 없었고 허연 파도가 마당바위를 다그치고 있었다. 덕배는 물속으로 뛰어들었지만, 소용돌이에 휘말려 실신했다. 마당바위 위에서 덕배가 눈을 떴을 때, 깨져 버리는 하늘을 보았다. 덕배가 종적을 감추던 날, 일본 군인 두 명이 돌에 맞고 칼에 찔려서 죽었고, 헌병 분소가 불탔다. 마을 사람들은 불을 끄지 않고 내버려두었는데, 일본 군인이 몰려와 군홧발로 밟는데도 누구도 덕배의 행방을 말하지 못했다. 마을 사람들은 몰라서 말하지 않았는데 그럴 수는 없다며 밟혔다. 어찌해 볼 수 없는 날들 앞에서 애랑은 죽었고 덕배는 사라졌다. 애랑이 몸을 던졌던 절벽 위에 도라지 두 뿌리가 자라서 긴 세월 꽃을 피워 내었다. G사의 발전소 건설 부지는 B읍 항구에서 해안 단애 넘어 북쪽에 위치한 작은 마을의 방파제 안쪽을 매립해서 들어서고 있었다. 산업통상자원부는 수도권의 장기 전력 수요 조사와 전망에 근거해서 발전소 추가 건설 필요성을 확인했다. 정부는 발전소 입지 최적지에 대한 발표와 철회를 거듭하다가 결국 B읍의 북쪽 해안 마을을 최종 선정지로 확정 발표했다. 바다가 깊이 밀고 들어간 마을은 새끼손톱 모양의 백사장을 거느리고 해안을 따라 길게 뻗은 산맥의 능선을 배후로 취락하고 있었는데 인근 마을에 비해 거주 가구 수가 적고 어장의 규모와 어장주의 연대가 비교적 미미하다는 현장 실사팀 보고서를 바탕으로 발전소 건설 부지로 선정되었다. 해병전우회, 읍민발전대책위원회, YMCA, 환경단체는 즉각 발전소 건설 백지화를 위한 비상 대책위를 구성하여 성명서를 발표하고 발전소 건설 절대 불가 입장을 표명했다. 정부 발표 이튿날부터 B읍을 관통하는 주요 도로변에 현수막이 걸리기 시작했다. -청정해역 동해안에 발전소가 웬 말이냐 -주민 의견 개무시한 발전소는 전면 무효 도로변을 쓸면서 마파람이 불어오면 현수막이 팽팽하게 부풀면서 B읍의 허공은 시끌벅적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사 년 전이었다. 마을 이주 계획이 확정되었다. G발전소는 마을 부지 매입과 해안 매립권을 확보했다. 이주 계획의 골자는 23개 취락 가구를 인근에 새로 조성할 부지로 이주시키는 것이며 새 부지는 G발전소가 구입하여 23개 가구에 무상 분배하는 방향으로 가닥을 잡았다. 읍내에서 서쪽으로 3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산자락을 허물고 개토하여 새 마을을 조성한다는 말이었다. 손무근은 마을 주민 대표단과 회동을 가졌고 한 가구를 제외한 스물두 가구 세대주의 인감 날인을 받은 보상합의서를 건네받았다. 그동안 십수 차례 주민 설명회를 가졌고 보상 문제와 향후 이주 계획을 포함하여 주민들을 지속적으로 설득했다. 분기에 한 번꼴로 마을회관과 G발전사 현장 임시 가설 사무소,

  • 관리자
  • 2025-08-01
이상한 고리

이상한 고리 김덕희 * 나. 나는 나를 생각한다. 나는 나를 생각하는 나를 생각한다. 나는 나를 생각하는 나를 생각하는 나를 생각한다. 나는 나를 생각하는 나를 생각하는 나를 생각하는 나를 생각한다. 나는··· 불빛, 등불, 전기, 스위치, 조명··· 단어들이 어지럽게 떠오른다. 천장 중앙에서 쨍한 빛을 내고 있는 저것의 이름은 등이다. 천장을 비롯해 네 벽과 바닥은 같은 색이다. 빛의 모든 파장이 모여 있는 색, 색이라는 것까진 알겠는데 아직 그 이름은 생각나지 않는 색이다. 공기 중에는 어떤 냄새가 희미하게 맴돌고 있다. 역시 냄새라는 것만 알고 냄새의 이름은 모른다. 감각을 조금 더 예민하게 세워 본다. 벽을 뚫고 들어와 지나가는 전파들이 복잡한 소음을 만들어낸다. 단순한 구성의 파동들인데 파장과 진폭이 뒤섞여 있으니 복잡해 보인다. 삼원색, 사이언, 마젠타, 옐로우, 흰색, 백색, 화이트, 소독, 클로드헥시딘, 에틸알코올, 포르말린, 차아염소산나트륨, 초저주파, 초장파, 초단파, 극초단파···. 분출하듯 솟아나는 정보들이 모두 어디서 오는 건지 모르겠다. 수많은 이름과 개념들 속에 아직 나에 관한 정보는 없다. 나는 바닥에 고정된 침상 위에 반바지만 입은 채 누워 있고 내 몸 이곳저곳에는 유선 센서들이 붙어 있다. 나에게서 어떤 정보들을 빼내려 한 것 같은데 그것이 무엇인지 나도 알고 싶다. 나는 일어나 앉은 다음 내 이마와 관자놀이, 목과 가슴에 붙어 있는 것들을 떼어 연결된 선과 함께 침상 빈 곳에 아무렇게나 치워 놓는다. 캡슐. 눈앞에 환영 하나가 머문다. 금속성 재질의 커다란 알이다. 환영은 금세 사라지고 다시 떠올리려 애써 봐도 은빛 달걀 모양의 잔상만 허공에 떠돌 뿐이다. 갑자기 왼쪽 벽 전체가 투명해지는 바람에 캡슐은 잠시 잊기로 한다. 나와 아주 닮은 존재들이 벽 저편에서 나를 향해 앉아 있다. 세 줄짜리 계단식 공간에 다섯 명씩 배치되어 있고 저마다 자기 앞의 기판을 들여다보며 무언가를 입력하거나 확인하는 중이다. 저 멀리 뒤쪽 벽에 기대어 서 있는 한 사람이 눈에 띈다. 누구랄 것 없이 입고 있는 흰색 가운이 키 큰 여자에게는 맵시 있게 보인다. 여자가 머리를 옆으로 기울이더니 손에 들고 있던 물건을 긴 머리카락 안쪽으로 넣어 귀에 가져다 댄다. 통신장치로 짐작되어 재빨리 신호를 가로챈다. 예상한 대로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아직 나는 저들의 언어를 온전히 알아듣지 못한다. 학습, 강화학습. 나의 내부에 있는 무엇이 나를 조종하는 기분이 든다. 나는 껍데기일 뿐이고 이 껍데기를 움직이게 하는 그 무엇이 있는 것만 같다. 나는 그것과 마주할 수 있을까. 이 질문조차 그 무엇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그 무엇에게도 그 무엇이 있는 건 아닐까. 그 무엇에게도 그 무엇이 있을 테고··&mi

  • 관리자
  • 2025-08-01
목소리들

목소리들 조시현 언제나 문은 예상치 못한 순간 열렸다. 막무가내로 파고들어 오는 목소리처럼. 무방비하게 책을 읽던 주하는 일순 얼어붙었다. 어디에도 남지 않을 목소리를 마음껏 낭비하는 그 감각에 한껏 빠져들어 있던 차였다. 신발장 옆 화장실, 왼쪽에 침대, 오른쪽에 주방이 전부인 한 뼘짜리 원룸은 현관에 서면 한눈에 전부 들어왔다. 계약 내용은 27일 하루를 온전히 비워 주는 것. 지금껏 한 번도 어긴 적 없었기에 주하는 대처할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물끄러미 상대를 바라보았다. 시선에 섞인 질책의 의미를 읽은 남자가 검지로 뺨을 긁었다. “어, 죄송합니다.” 돌아오는 대답이 없자 남자가 재차 입을 열었다. “오려고 온 건 아니고. 매달 27일마다 뭘 하는 거냐고, 여자 혼자 종일 웃었다 울었다 별짓을 다 한다고 하도 그래서. 여기 방음 잘 안되거든요. 방 빌려드리는 거야 돈도 받고 어렵진 않은데 혹시나 불법적인 일은 안 되니까 확인차 온 거예요. 그래도 뭘 하는지는 알아야 하니까. 쫓겨나면 곤란하거든요. 미리 말씀 안 드린 건 저도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근데 연락처도 모르고.” 하지만 남자의 눈은 안쪽을 꼼꼼하게 살폈다. 미처 감추지 못한 호기심이 묻어났다. 주하가 가져온 거라곤 책 두 권과 머그컵, 도라지청이 전부였다. 남자가 거기서 뭔가를 알아챌 것만 같아 가슴이 마구 뛰었다. 그야 불법적인 일이 맞았으니까. 주하가 여전히 입을 꾹 다물고 있는 걸 어떻게 받아들인 건지 남자가 별안간 주머니를 뒤적이더니 플라스틱 카드를 내밀었다. 구재정. 인공지능융합대학원. 학번까지. 주하는 사진과 남자를 번갈아 보았다. 덥수룩한 갈색 곱슬머리. 멀끔한 얼굴. 무엇보다 핸드폰을 쥐고 있는 가늘고 예쁜 손가락이 눈에 띄었다. 같은 방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쓰고 있는 사람. “다른 뜻 있는 거 아니고요. 저 정말 여기 살거든요. 이 이름으로 입금 주셨잖아요.” 이름은 맞지만 학생일 거라고는 생각을 못 했다. 생각을 못 했다기보단 관심이 없었다고 해야 더 맞겠지. 알고 있었다고 해도 달라질 건 없었겠지만 인공지능융합대학원이었다니. 침묵이 이어지자 눈을 굴리던 남자가 서둘러 문을 열었다. “음, 일 없는 거 확인했으니까. 저는 갈게요. 계약 파기하는 거 아니죠? 제가 잘못한 건 맞지만 정말 조심해야 하거든요. 아르바이트를 또 할 수는 없어서요.” 횡설수설하던 구재정은 머리를 박박 긁더니 재빨리 사라졌다. 약속을 어긴 건 맞지만 그걸 보니 기분이 크게 상하지는 않았다. 위아래층 목소리가 간혹 들리기는 했지만 그 정도로 방음이 안 되었다는 것을 그녀는 잊고 있었다. 한 층에 세 개여야 할 집에 가벽을 세워 열한 개로 늘려 놨으니 당연한 사실인지도 몰랐다. 더 조심했어야 했는데. 한 번 깨어진 감흥은 쉽게 돌아오지 않았다. 주하는 다시 차를 끓였다. 굳이 도라지차. 이렇게 된 와중에도 목을 관리하고 있다니. 멍청하기는. 이제 연극을 보

  • 관리자
  • 2025-08-01

댓글 남기기

로그인후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을 남겨 주세요!

댓글남기기 작성 가이드

  • 타인에게 불쾌감을 주는 욕설, 비방 등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주제와 관련 없거나 부적절한 홍보 내용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기타 운영 정책에 어긋나는 내용이 포함될 경우, 사전 고지 없이 노출 제한될 수 있습니다.
0 / 1500

댓글0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