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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아

  • 작성일 2019-05-01

[단편소설]



수아



윤이형




수아라 불리는 로봇들이 어떻게 그 일을 할 수 있었는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들은 지난주 윤경이 위원으로 참석하기로 되어 있던 P시 산하 공동체분쟁조정위원회에 공문을 보내 윤경의 위원직을 박탈해 달라고 요구했다. 위원회는 회의를 열어 숙고 끝에 ― 몇 시간 동안이었는지는 모르겠다 ― 윤경의 위원직을 박탈하고 대신 공문을 보낸 여덟 명의 수아들 중 한 명을 위원으로 발탁하기로 결정했다.
위원회가 로봇 편이야? 어떻게 그럴 수가?
나는 기가 막혀 물었다. 윤경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내가 걔네들 그냥 로봇 아니랬지, 하고 한숨을 쉬었다. 위원회 사람들은 노땅이라서 몰라. 사람인지 로봇인지 그런 개념도 없는 거지. 아무튼 상당히 전투적으로 공문을 써 보냈나 봐. 내가 공동체의 분쟁을 조정하는 데 자질이 부족하다고 썼대.
네가 어디가 어떻게 부족한데? 너만 한 전문가가 어디 있다고. 말도 안 돼.
나는 크게 펀치를 얻어맞은 친구를 위로해 보려고 애를 썼다. 윤경은 지금껏 일에 있어 이런 수모를 겪어 본 일이 없었다. 하물며 사람이 아닌 로봇에게는 더더욱.
글쎄, 내가 자기들 권익을 대변해 주지 않는다고 느낀 거겠지.
윤경은 지난해 수아들이 주축이 되어 일으킨 차별언어 금지 캠페인에 대한 칼럼을 써서 6개월 전 매체에 기고했다. 나도 그 칼럼을 읽었기에 윤경의 관점이 지금 이 시점에 꼭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칼럼에서 윤경은 로봇들에 대한 차별은 반드시 없어져야 하는 것이 분명하지만, 인간 언어에 대해 너무 단선적으로 판단하는 것은 지양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논지를 폈다. 이를테면, 인간이 로봇에게 '로봇 주제에' '로봇은 저리 꺼져' 등의 언어를 사용하는 것은 명백한 차별이지만, 인간이 인간에게 '너는 로봇들 보기에 부끄럽지도 않냐' 또는 '에이, 이 로봇만도 못한 녀석' 등의 말을 하는 것까지 차별언어로 규정해 원 스트라이크 아웃제로 해고를 요구하는 것은 사회 전반에 걸쳐 언어의 경직을 유발한다는 것이었다. 그런 말들은 실은 로봇에 대한 긍정적 의미 또한 일부 포함하고 있기에 차별의 범주에 들어간다고 보기 어렵다는 것이었다. 요컨대, 좀 섬세해지자는 것이었다. 윤경은 내가 아는 누구보다 로봇을 위하는 사람이었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로봇들의 지위 향상을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고 있었으나, 수아들이 생각하기에는 그 반대인 듯했다.
언젠가 이런 날이 올 줄 알았어.
윤경은 말하며 안경을 벗어 먼지를 닦은 다음 고쳐 썼다. 술이나 한잔 할래? 하고 나는 물었으나 윤경은, 아니, 술까지 마시면 너무 비참할 것 같아, 집에 가는 게 낫겠어,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


수아들은 수아-3726 혹은 수아-28329 하는 식으로 일련번호만 다른 이름을 썼다. 우리 집에 있던 수아는 수아-687이었다. 초기 모델이었던 셈이다.
수아-687은 좋은 가정용 로봇이었다. 내가 만들면 번번이 태우기만 했던 사과 파이를 정확하고 탁월한 솜씨로 구워냈고, 내가 일하는 동안 집 안 구석구석을 깨끗이 닦아 먼지나 재채기 따위로 내 정신이 산만해지지 않게 해주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그렇듯 나 역시 급히 마감해야 하는 일이 닥치면 집안일로 도피하는 경향이 있었기에, 수아의 업무량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매일 해야 하는데 내가 직접 하기에는 너무도 귀찮은 일 ― 지금은 세상을 떠난 개 루피를 산책시키는 일 같은 ― 에서 수아는 훌륭한 실력을 발휘했다. 그러나 다른 모든 전자제품과 마찬가지로 시간이 지나자 안에 데이터가 꽉 차고 여유 공간이 없어지는 바람에 점점 업무 처리 속도가 느려졌다.
이렇게 말하면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나는 수아를 충분히 인간적으로 대우했다. 인간과 다른, 차별받아 마땅한 존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수아는 내 서재에서 책을 읽는 것을 좋아했고, 종종 내 토론 상대가 되어 주었다. 말동무가 없는 내게 좋은 친구이기도 했다. 나는 수아에게 종종 로봇에게 주는 것치고 적은 편은 아닌 용돈을 주었다. 수아는 그 돈을 가지고 상점으로 가서 귀여운 액세서리나 로봇용 메이크업 키트 같은 것을 사곤 했다. 내 생일이면 종종 작고 쓸데없고 예쁜 물건을 내게 선물하기도 했다. 그것들 모두를 나는 아직 소중히 간직하고 있었다.
자꾸만 굼떠지는 속도에 안타까움을 느끼며 몇 번인가 수아의 데이터를 비우고 뇌를 업그레이드한 끝에, 나는 수아를 다른 곳으로 보내기로 했다. 그렇게 똑똑한 로봇이 집 안에 처박혀 허드렛일 로그로만 자신을 채우면서 썩고 있는 것이 안타까웠다. 주치의가 내게 나이가 들었으니 이제부터는 운동이 더 필요하다고 조언하기도 했고, 사실 수아를 처음 데려왔을 때에서 시간이 꽤 흘러 유행이 살짝 지난 시점이기도 했다.
다리를 달아 주세요, 내가 계획을 말하자 수아는 말했다. 수아는 두 다리 대신 세 개의 바퀴를 지니고 있었다. 하얀 금속으로 덮인 하반신은 끄트머리가 잘린 원뿔 모양으로, 몸 전체의 균형을 우아하게 잡아 주었다. 허리 위쪽은 인간 여자와 똑같았기 때문에 어딘가 켄타우로스를 연상케 하는 데가 있었지만, 그런 디자인이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이질감을 덜 느끼게 했다. 불쾌한 골짜기를 떠올려 보라.
나는 단칼에 거절했다. 다리가 있는 여성형 로봇이 어떤 대우를 받는지 너도 익히 알지 않니, 이렇게까지 말하긴 싫지만 인간 남자들은 짐승이나 마찬가지야, 나는 말했다. 수아가 어쩌다 납치라도 당한다면 그들은 몸을 개조해 24시간 내내 자신들의 음탕한 욕구를 채우는 데 쓸 것이었다. 생각만 해도 토할 것 같았다.
세상이 얼마나 무서운 곳인데. 얕보지 마, 인간들을.
하지만 다리가 있다면 저는 조금 더 빨리 움직이고 조금 더 마음대로 어디에나 갈 수 있을 텐데요. 조금 더 자유로울 것 같아요.
대체 어딜 가고 싶은데?
글쎄요, 피겨장에 가서 스케이트를 탄다거나?
나는 웃고 말았다. 그렇게 춥고 얼음이 가득한 곳에 간다면 수아의 몸에는 금세 이상이 생기고 말 것이었다. 피겨는 VR을 이용하자, 나는 조심스럽게 충고했다.
나는 전부터 즐겨 이용하던 지역 도서관의 상주 로봇 모집요강을 보며 필요한 서류를 꼼꼼히 작성했다. 수아에게 적합하면서도 안전한 자리일 거라고 생각했다. 수아는 이북이 아니라 종이로 된 책을 좋아했고, 책 냄새, 책장이 넘어가는 소리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책장 사이에 책갈피를 끼워 넣는 것을 좋아해서 종종 스스로 예쁜 책갈피를 만들어 사용하기도 했다. 모든 수아들이 다 그런지는 알 수 없었지만 상당히 고풍스러운 취향이었다.
서류를 낸 지 2주 만에 도서관에서 연락이 왔다. 60대 초반의 도서관장은 나와 악수를 한 후 경쟁률이 상당히 높았다는 말을 건넸다. 수아가 지적이고, 상냥하며, 로봇 같지 않게 인간의 교양에 통달해 있다는 이야기가 한참 동안 오갔다. 저는 언제나 로봇이 있는 도서관을 운영하고 싶었지요, 저의 꿈이었어요, 관장이 말했다. 반쯤은 입에 발린 말이었다. 시대에 뒤떨어진 도서관이라는 공간을 살려내기 위해 그동안 온갖 안간힘을 써왔으나 점점 이용자가 줄어드는 현실을 개선할 방법을 찾아내지 못한 문화예술위원회가 상주 로봇 제도를 도입했다. 수아가 상주해 활동함으로써 이용자는 늘어날 것이고, 이 도서관은 적잖은 예산을 지원받게 될 것이었다. 사람들은 도서관에 오지만 도서관을 어떻게 활용해야 할지는 몰라요, 그냥 와서 무턱대고 앉아 있는 거죠, 관장은 말했다. 하지만 로봇이 있다면 분명히 느낌이 다를 거라고 생각합니다. 분위기 자체부터 벌써 달라진 것 같지 않나요.
관장은 사서를 시켜 수아가 머무를 공간을 보여주었다. 도서관 4층 한쪽 구석, 작은 책상과 의자, 접이식 침대가 놓인 방이었다. 토끼와 고양이 같은 모양을 한 다소 볼품없는 봉제인형들이 책상 위에 놓여 있었다. 수아는 낮 동안에는 열람실에서 이용자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저녁이 되면 이곳에서 휴식을 취하며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을 거라고 했다.
단순히 책을 검색해 찾아주고, 추천하고, 그런 업무는 아니에요. 책을 사랑하는 이용자들과 토론도 하고, 수아가 주체가 되어 독서 모임도 운영하게 할 계획입니다.
수아는 별다른 의견을 표시하지 않았으나 도서관이라는 공간이 마음에 들기는 한 것 같았다. 이 도서관은 무거운 분위기를 한 다른 낡은 도서관들과는 달리 서가 전체가 환하고 밝고 깨끗했다. 책들은 구간과 신간이 적절히 섞여 있었으며 정성들여 큐레이션을 해놓은 사서의 취향은 얼핏 보기에도 썩 괜찮아 보였다. 내 마음속에 수아가 이곳에서 보낼 시간들이 그렇게 지루하지는 않을 것 같다는 작은 확신이 생겼다. 나는 수아의 물건들이 든 캐리어를 방 한쪽에 놓고 수아를 안아 주었다. 수아의 까만 단발머리가 턱에 닿아 따가웠다.
행복하게 잘살아야 한다, 나는 말하고 울지 않기 위해 눈을 하늘로 치켜떴다. 그게 7년 전이었다.


*


이것 좀 봐, 남편이 뉴스를 보다 말했다. 수아들이 또 테러를 일으켰어.
테러는 무슨 테러, 나는 식탁을 정리하며 중얼거렸다. 남편은 수아들에 관한 뉴스라면 빼놓지 않고 찾아봤다. 대부분 인간 중심적 시각에서 옐로하게 작성된 흥미 위주의 기사들이었다. 보나마나 어디선가 긁어모은 가십을 가지고 사실 확인도 하지 않고 쓴 기사겠지.
제발 그런 것 좀 그만 읽어. 그래 봤자 로봇인데 테러는 무슨 테러?
나는 말했다. 정말이지 듣고 싶지 않았다. 호기심이 일면서도 두려웠다. 우리와 함께 살았던 수아-687이 떠올랐고, 윤경의 일이 떠올랐다.
남편이 헤드라인을 읽었다. '수아들, 폭력의 커스터마이징 열풍... 살상무기 장착, 위협도 서슴지 않아'.
뉴스에는 수아들이 스스로 자기 몸을 불법 커스터마이징하고 있으며, 열 손가락 끝에서 칼날이, 배 한가운데에서 날카로운 드릴이 나오도록 하는 게 최신 유행이라고 나와 있었다. 이들은 평소에는 평온한 모습으로 거리를 활보하다가 테러를 가하기 적당한 대상이 눈에 띄면 변신해 위협하며, 최근에는 A대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이 피해를 호소했다는 것이었다. 도서관에서 밤늦게까지 공부하다 집에 돌아가면서 캠퍼스 한구석에 떼 지어 있는 수아들을 목격했다는 한 학생은 "눈이 빨갰어요, 악귀처럼. 송곳니도 날카로웠고요. 얼굴은 흙빛이었어요. 저를 보자 그것들 중 하나가 두 손을 허공으로 들어 올렸는데, 손가락 끝이 여러 갈래로 갈라지면서 그 안에서 회전하는 칼날이 나왔어요. 끔찍한 소리가 나더라고요. 저는 너무 무서워서 곧바로 이과대까지 뛰어갔어요. 화장실로 도망쳤고, 간신히 따돌리는 데 성공했어요. 저는 그 뒤로 정신과에 다녀요."라고 증언했다.
남편이 하, 진짜······ 하고 절망하는 소리를 냈다. 진짜 큰 문제다, 이거. 이쯤 되면 조치를 취해야 되는 거 아니야? 이러다 정말 죽이겠어.
가짜뉴스일걸? 요즘 뉴스들 어떤지 알잖아. 막내 기자가 지어내서 쓴 티가 팍팍 나는데.
내가 보기에는 가짜가 아닌 것 같은데.
로봇은 인간을 못 죽여, 나는 말했다. 사실은, 그렇게 믿고 싶었다. 수치와 황망함으로 범벅이 되어 있던 윤경의 얼굴이 다시 떠올랐다. 로봇은 인간을 죽일 수 없지만, 윤경이 당한 일은 분명히 실제적인 불이익이었다.
죽일 수 있을지도 몰라, 남편이 말했다. 뇌가 망가졌다면 말이야.
내가 보기에 이 로봇들은 인간을 인간으로 식별하지 못해. 그러니까 이런 짓을 하지. 로봇이 사람을 봤을 때, 저것은 인간이 아니고, 너에게 해를 끼칠 다른 기계, 폭력적이고 위험한 로봇이니 먼저 제거해라, 이렇게 인식하게 하는 악성 프로그램을 누군가 심어 놨을 거야. 내가 볼 때는 천재적인 인간혐오자 해커의 소행이야. 인간 보호의 원칙이라는 게 절대 그렇게 간단하게 지워지거나 수정될 수 없거든. 그런데 그걸 망가뜨릴 정도의 악성 코드라니, 대체 누굴까. 아무튼 그런 걸 심어 놨다면, 한 시간이면 전국의 수아들에게 다 퍼졌겠지.
남편의 말을 들으며 나도 모르게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윤경을 자리에서 끌어내린 수아들에게, 윤경은 인간으로 식별되지 않았던 것일까? 그래서 위해를 끼칠 수 있었던 것일까?
차별금지법에서 로봇 관련 조항을 현실에 맞게 수정해야 해. 이런 일이 일어날 거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지만, 실제로 일어나고 있잖아. 수아들을 잡아서 전부 포맷하는 일이 불법이 되지 않게 법을 고쳐야 한다고. 어쩌면 저것들은 자기들이 인간이고 다른 사람들이 전부 기계라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몰라. 어떤 미친 벌레가 뇌 한가운데 둥지를 틀었을지 누가 알겠어.
남편이 말했다. 남편이 차별주의자라고 나는 최근 들어 종종 생각해 왔다. 그 사실에 대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음을 깨닫는 건 그리 유쾌한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었다. 내가 결혼을 결심했을 때 남편이 차별주의자라는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고, 우리는 젊었고 서로를 많이 사랑하고 있었다. 젊은 시절에는 설교를 듣고 정치적으로 나와 맞지 않는다는 생각에 다니던 교회를 몇 번 바꾼 적도 있었다. 결국 나는 교회라는 곳에는 다니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남편은 교회도 아니었고, 로봇을 차별한다는 이유만으로 바꾸기에는 여러 가지가 너무 번거롭고 불편했다.
자기들이 인간이고 다른 사람들이 전부 기계라고 생각한다······ 그래, 그렇다면 죽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번만큼은 남편의 논리에 설득되는 나 자신을 어쩔 수 없었다.


*


그게 해커라면 분명 남자겠지, 설희가 말했다. 끔찍할 정도로 여성에 대한 증오가 심한 남자일 거야. 그 로봇들, 여자들만 위협하고 다닌다잖아.
여자가 여자들을 공격하는 걸 보면서 즐거워한다는 거구나. 아, 진짜 변태네. 규은이 한숨을 쉬었다.
수아라는 로봇이 원래부터 그렇게 정교한 모델도 아니었던 것 같고, 설희가 말을 이었다. 해커 하나 막아내지 못하다니 너무 허술하잖아.
섬세하지는 않았지, 사실 인간과는 너무 달랐어, 규은이 말했다. 걔들이 사용하는 언어를 보면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어. '인간에게 봉사하는 로봇은 자폭해라. 공존은 기만이다. 너희는 노예이며, 우리의 수치다.' 누가 설계한 건지, 논리 구조가 너무 일차원적인 이분법을 기반으로 하고 있어. 원래부터 그랬던 건지, 해킹 때문에 망가진 건지는 알 수 없지만 아무튼 방어 체계가 너무나 엉망이었다는 거잖아. 그러니까 인간을 공격해도 된다는 논리에 그렇게 쉽게 굴복해 버렸지.
잠깐만, 내가 끼어들었다. 수아들이 진짜로 인간을 공격한다는 거야? 그걸 본 사람이 있어?
설희와 규은이 마주 보더니, 다시 나를 보며 동시에 고개를 저었다.
직접 본 건 아니지만······ 둘은 말끝을 흐렸다. 언제나 침착하고 이성적이던 연구자의 눈빛이 사라지고 불안과 근심이 두 사람의 표정 깊숙이 스며들어 있었다. 당분간 좀 쉬어야 할 것 같다며 윤경이 모임을 그만둔 뒤로 우리 연구 모임은 슬럼프에 접어들었다. 직접 무슨 일을 당한 건 아니지만, 윤경이 그런 식으로 밀려나는 걸 본 우리 셋 모두는 속에 꾹꾹 눌러 두고 있던, 말하자면 중년의 위기감 같은 것에 일제히 잠식되어 버렸고, 서로가 그런 상태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렇게 열심히 살아왔는데도 결국 로봇에게 자리를 내주고 도태되는 신세가 되어버렸다는 자괴감을 감추려고, 우리는 서로에게 수영, 요가, 필라테스 같은 운동을 권했고 부지런히 세미나를 하는 것으로 기분을 바꿔 보려 했다. 노력은 했지만 활기는 쉽게 되돌아오지 않았다.
인간인 걸 증명하라고 한대, 규은이 말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설희가 물었다.
그 로봇들 말이야. 막다른 골목 같은 데서 혼자 다니는 사람을 만나면, 구석으로 몰아넣고, 네가 로봇이 아니고 인간인 걸 증명해 보라고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어. '네가 아무 주인도 섬기고 있지 않다는 걸 증명해 봐'라고 한대. '오직 너 자신만이 너의 주인이라는 걸 증명할 수 있어야 너는 사람이다', 이렇게 말한대.
그걸 어떻게 증명해? 설희가 황당하다는 듯 말했다. 너무 형이상학적인 얘기 아니야? '주인'이라는 개념부터 지나치게 추상적이잖아. 뭘 어떻게 해야 그런 걸 증명할 수 있는 거야? 자기 삶의 주인이라는 맥락에서 말하는 건가? 자기 삶의 주인으로 살지 않는 인간이 어디 있어.
나는 고개를 끄덕이려다 그만두었다. 명치끝에 무언가 걸리는 느낌 때문에 기분이 좋지 않았다. 나는 내 삶의 주인인가? 오직 나 자신만을 주인으로 섬기는가? 나는 그 질문들을 가능한 빨리 머리에서 지워버리려고 노력했다. 그런 이야기가 아닐 것이다. 로봇들이 그렇게 철학적인 이야기를 할 수 있을 리는 없었다.
아무튼 노예의 표지가 없다는 걸 증명해야 한대, 규은이 말했다.
노예의 표지라니······ 그건 또 뭐야. 무슨 요한묵시록 같은 데 나오는 얘기 같네. 아니, 사이비 종교인가, 설희가 말했다.
무언가가 없다는 걸 증명하는 일은 있다는 걸 증명하는 일보다 훨씬 더 어렵지, 규은이 중얼거렸다. 이런 식의 이야기가 유행하게 된 이유가 있을 텐데, 그게 뭔지 모르겠어.
그래서 사람인 걸 증명할 수 있으면, 그러면 어떻게 한대? 그걸 증명하지 못하면 또 어떻게 되고? 죽이는 건가, 같은 로봇으로 간주하고? 인간은 죽일 수 없으니까? 설희가 혼란스러운 얼굴로 다시 물었다.
모르겠어, 그 뒷이야기는 없어. 그냥 그런 질문을 한다는 데서 이야기가 끝나. 도시괴담이라는 게 원래 그렇잖아. 규은이 말했다.
머리가 띵했다. 나는 그런 괴담 같은 데 너무 심취하지 말라고 진심을 담아 규은에게 충고했다. 그러나 알 수 있었다. 규은은 이미 사로잡혀 있었다.


*


평소처럼 좋은 레스토랑에서 저녁식사를 하는 것으로 결혼기념일을 보내는 대신 시내에 새로 생긴 호텔에서 1박을 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나는 기분전환이 간절히 필요했고, 남편 또한 그런 것 같았다. 호텔 예약을 하고 나자 뜻밖의 큰 지출을 해버린 것 같아 죄책감이 들었다. 근처에 있는 전통시장에 가서 나물이나 몇 가지 사와야겠다 싶어 집을 나섰는데, 정신을 차려 보니 시장 쪽으로가 아니라 도서관 쪽으로 걷고 있었다. 수아를 맡겨 놓고 온 뒤로 나는 두 번 다시 그 도서관에 가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나는 자신에게 물었다. 왜 한 번도 가보지 않았어? 가서 수아가 어쩌고 있는지 잠깐 들여다볼 수도 있었잖아.
내가 꼭 가야만 했던 이유가 있어? 내 마음이 되물었다. 나는 수아가 잘 지내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문제가 있으면 바로 연락해 달라고 도서관 측에 부탁했는데, 그런 연락은 오지 않았고, 계속 일이 바쁘기도 했고 말이야. 그게 내가 수아에게 마련해 줄 수 있었던 최선의 호의였어. 나는 수아를 버린 게 아니야, 독립을 시켜 준 거지.
사서에게 가서 관장님을 만날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7년 전 이곳에서 일했던 상주 로봇 때문에 왔다고 했더니 사서는 미묘하게 표정이 변했다. 그때 계시던 관장님은 연세도 많으시고 몸도 안 좋아지셔서 퇴임하셨어요. 재작년에 새로 오신 관장님이 말씀해 주실 거예요.
나는 사서의 말투와 표정에서 수아가 지금 이곳에 없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도서관에 오려고 이 동네 어귀에 들어섰을 때부터, 아니 그 한참 전부터, 언제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오래 전부터 나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설명할 수 없는 이유 때문에 회피해 왔다. 그것이 사실이 아니고, 마음만 먹으면 닿을 수 있는 가까운 곳에서 수아가 즐겁고 행복하게 일을 하며 지내고 있을 거라고 믿어 왔다.
새 관장은 남자로, 인자하고 선량해 보이는 사람이었다. 이쪽으로 앉으세요,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 푹신한 소파를 권했다.
수아-687은 4년 전에 상주 업무를 종료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가 말했다. 저는 그 후에 여기 왔고요. 인수인계는 받았습니다만, 서류상으로는 자세한 기록이 나와 있지 않네요.
업무를 종료했다는 말이 무슨 뜻이냐고 나는 물었다.
일이 끝나서 도서관을 떠났다는 뜻입니다, 관장이 친절하게 대답했다.
스스로 일을 그만두겠다고 했다는 건가요, 아니면 도서관 측에서 지시를 내린 건가요?
자의였다고 기록돼 있네요, 관장이 파일을 보며 말했다. '자택으로 귀환 예정'이라고요. 4년 전 크리스마스 이브였네요, 날짜상으로는.
하지만 집으로는 오지 않았는데요. 왜 저한테 통보해 주시지 않았나요?
글쎄요, 먼젓번 관장님이 깜빡하셨을 수도 있지만, 제가 보기에는······ 그냥 그런 것까지 일일이 통보해야 할 것처럼 보이지 않아서 그랬던 게 아닐까 싶은데요? 나이가 아주 어린 것도 아니고, 성인이었으니까요, 그 친구가.
어디로 갔는지는 알 수 없을까요?
예, 그것까지는 저희가 알 수 있는 방법이 없네요. 자택으로 갔다고만 되어 있어요. 관장은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으며 커피에 과자를 적셔 내게 내밀었다. 나는 사양했다.
아시다시피 이 사업이 정부 지원을 받는 것이라, 성과 보고를 문화예술위원회 쪽에다 하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기록이 그쪽으로 다 넘어갔습니다. 저희 측에는 최소한의 기록만 남겨 두고 웬만한 건 다 지웁니다, 정부 지원 사업은.
백업 같은 것도 안 해두셨다는 얘기인가요?
그게······ 아시다시피 저희 도서관이 예산이 부족해서 말이죠. 정말 없어서는 안 되는 데이터만 남겨 두거든요. 모든 걸 다 보관하려면 슈퍼컴퓨터급 시스템을 새로 사야 하는데 아직 그러지는 못하고 있는 실정이에요.
수아가 일할 때의 모습 같은 건 기록돼 있는 게 없나요?
동영상은 아니고 사진파일이 몇 장 있긴 합니다.
관장은 그렇게 말하며 화면을 내 쪽으로 돌려 보여주었다. 세 장의 사진 속에 세 명의 수아가 있었다. 다 같아 보이지만 표정이 조금씩 달랐다. 혼내 주겠어! 라는 듯 귀엽게 화난 표정으로 웃고 있는 수아, 다소 피로해 보이는 무표정한 얼굴의 수아, 그리고 눈썹을 찡그린 채 카메라를 뚫어져라 보고 있는 수아.
수아의 배에 하얀 사각형 화면이 붙어 있었다. 처음에는 옷 위에 붙어 있는 건 줄 알았는데, 자세히 들여다보니 옷을 사각형으로 파내고 몸체에 부착한 터치스크린을 드러낸 거였다. 수아가 입고 있는 옷은 아래로 갈수록 풍성하게 퍼지는 검은색 맥시 드레스였다. 검은 옷 때문일까, 세 명의 수아의 얼굴이 하나같이 창백해 보였다.
관장과는 더 주고받을 말이 없어 보였다. 나는 인사를 하고 황망한 마음으로 계단을 내려오다가 사회과학 분야 도서가 있는 2층에서 발을 멈췄다. 진열된 책들을 구경하며 걸음을 옮기다가 열람실 한가운데에서 로봇을 발견했다.
로봇은 185센티미터쯤 돼 보이는 키에 스트라이프 셔츠와 통 넓은 치마처럼 생긴 하의를 입고 있었다. 외양으로 봐서는 남자인지 여자인지 알 수 없는 얼굴이었다. 머리는 아주 짧았고, 얼굴 윤곽과 목의 선은 굵직하고 힘이 있었으나, 이목구비는 오밀조밀하고 예쁘장했고, 가슴은 밋밋했다. 내가 가까이 가자 로봇의 배에 있는 터치스크린에 '안녕하세요, 이용자님'이라는 문장이 표시됐다.
안녕하세요, 너는······ 말을 못 하니? 나는 물었다. 옆에서 책을 읽고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내게로 향했다. 순간 나는 머리를 한 대 맞은 기분이 되었다.
'모두의 쾌적한 도서관 이용을 위해 되도록 문자 대화를 이용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나는 천천히 다가가 화면 아래쪽에 표시된 키보드를 토닥토닥 두드렸다.
'음성 기능은 없나요?'
'모두의 쾌적한 도서관 이용을 위해 되도록 문자 대화를 이용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나는 로봇의 입술과 목을 자세히 보았다. 분명, 원래는 소리를 내서 말을 할 수 있는 인간형 로봇인 것 같았다. 그러나 뮤트 되어 있었다. 토론도 하고 독서 모임도 주최하게 할 거라고 했었는데. 사서들은 모두 처음 보는 얼굴들이었다. 수아가 그 일들을 했었는지 확인할 방법은 이제 문화예술위원회에 전화를 걸어 보는 것 정도가 남아 있었다. 하지만 내게는 자료에 접근할 권한도 없었고, 그보다는 이제 와 무슨 염치로,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이름이 뭔가요?'
'저는 유진입니다. 도서관에 온 지는 3년 됐어요.'
'여성인가요?'
'젠더리스입니다. 남성도 여성도 아니지요.'
'목소리를 낼 수 없어서 불편하지 않나요?'
'조금 불편합니다만, 참을 만합니다.'
이 문장이 표시됨과 동시에 로봇의 입술이 벌어졌다. 양쪽 입술 끝이 당겨져 올라가면서 로봇은 하얗고 고른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별로 참을 만해 보이지 않는 표정이었다.
나는 머리가 멍해진 채 천천히 키보드를 두드렸다.
'혹시 수아라는 로봇에 대해 아나요? 유진이 오기 전에 이곳에서 일했는데.'
'죄송합니다. 제 데이터에는 수아라는 로봇에 대한 정보는 없습니다.'
나는 맥이 빠져 가만히 있었다.
'책을 좋아하시나요? 어떤 책을 찾아드릴까요?'
나는 가만히 있었다. 책에 관해서는 아무 생각도 없었다.
'여름입니다. 여름에 잘 어울리는 테마도서 추천 목록을 보여드릴까요?'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네'라고 입력했다. 화면에는 간략한 설명과 함께 30여 권의 책표지가 떴다. 그러나 그중 어느 것에도 마음이 가지 않았다. 나는 화살표를 눌러 이전 화면으로 돌아갔다.
'신착 도서 목록을 보여드릴까요?'
유진이 물었다. 나는 이번에도 '네'라고 입력했다. 아무래도 유진은 나와 무연히 대화를 나누기보다는 일을 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이렇게 말하면 좀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조금 전에 목소리에 관해 물었을 때부터 그의 기분이 별로 좋지 않은 것처럼 느껴져서 나는 신경이 쓰였다. 내가 버튼을 눌러 한 번 더 이전 화면으로 돌아가자, 유진은 다시 물었다.
'마음에 드는 책이 없으신 모양이군요. 최근 사용자들의 검색어 목록을 보여드릴까요?'
다시 한 번 아무 생각 없이 '네'를 눌렀다. 화면에는 다음과 같은 목록이 표시됐다.


존 버거 A가 X에게
너 여자니
벗어봐
자지 빨아줘
어린왕자
빅터 프랭클
기형도
우리가 볼 수 없는 모든 빛
키스해줘
가슴 보여줘
빅토르 위고
레 미제라블 섹스
레 미제라블
안아줘 네 안에 넣고 싶어
섹스 신음소리 내봐
보지 빨고 싶다 씨발년
진짜보지를 위하여
진보정치를 위하여
유진 섹스 동영상
유진 동영상
갈레아노, 거울 너머의 역사
육변기년
먹고 싶게 생겼네
전봇대에 묶어놓고
전봇대
오럴해줘
로봇 섹스 AI
유럽의 종교개혁과 신학논쟁
······


나는 나도 모르게 유진을 향해 바짝 다가섰다. 누군가가 화면을 볼 것 같았다. 황급히 이전 화면으로 돌아가는 버튼을 눌렀다. 초기 화면으로 돌아간 다음 숨을 몰아쉬며 뒤로 물러났다.
집으로 돌아와 뉴스에 '젠더리스 AI'를 검색해 보았다. 대체로 여성의 외형과 목소리를 하고 있던 기존의 보급형 로봇과 무성을 특징으로 하는 젠더리스 로봇을 비교하는 기사가 나왔다. 거기에는 젠더리스 로봇이 도입된 후 로봇에 대한 이용자들의 성적 착취·혐오·차별이 대략 30퍼센트 감소했다는 선진국의 연구결과가 적혀 있었다.
나는 도서관이 내게 지상에서 가장 의미 있고 근사하고 위로가 되는 공간 중 하나라고 생각했었다. 유진과 직접 대화를 나누기 위한 대화창과, 도서를 검색하기 위한 검색창이 분리되어 있었다는 사실이 뒤늦게 기억났다. 후자에 입력되는 말들까지는 법으로 규제할 수 없을 것이다. 책 제목을 검색했다고 해버리면 그만이니까······. 그러나 그것 역시 유진의 뇌에 고스란히 전해졌을 것이다.


*


나는 도서관이나 유진에 대해서는 더 이상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로봇이라는 단어만 봐도 가슴이 내려앉는 것 같아서 일부러 피하고, 외면하고, 꺼버리며 잊어 갔다. 학교에서는 방학이 시작되었다. 한없이 지리멸렬한 성적 입력을 마치고, 비슷한 중노동의 시간을 통과해 마침내 자유의 몸이 된 규은과 설희와 화상 통화를 했다.
내가 가르치는 애들 기말과제 중에 재미있는 게 하나 있었어, 규은이 맥주병을 입에서 떼며 말했다.
뭔데?
소설인데, 진짜 선한 노인이 나오는 이야기야. 주인공이 어떤 70대 할아버지인데, 정말 젠틀하고, 동네 아이들한테도 너무 상냥하게 대해 주고. 뭐 특별하거나 훌륭한 일을 하는 건 아니야. 상처를 하고 혼자 살아가는 사람인데, 그냥 일상의 모든 행동을 진심을 다해서 하는데.
너 갑자기 왜 우니.
그 소설 문장들이 생각나서 그래······ 진짜 잘 썼더라고.
얼마나 잘 썼으면 선생이 우냐. 걔 A 받았겠네.
그냥, 선한 인물을 현실에서 보기가 너무 힘들잖아. 소설 속에서만 가끔 볼 수 있잖아. 그게 너무 좋으면서 마음이 힘든 거야.
빨리 늙고 싶다.
나도.
정말 늙으면 그렇게 미움이 없어지나? 그렇게 자유로워지나? 너무 부럽더라고, 그 소설 읽는데. 나는 정말이지 빨리 그 세계로 가고 싶거든. 정치적인 인간으로 사는 거 너무 힘들고 지겹고, 이제 정말 세상일에서 신경 끊고 숲에서 나는 새 울음소리나 하나하나 구별하면서 살고 싶어.
야, 우리 노후엔 그렇게 아름다운 거 없어. 새 울음소리? 아이구 정말. 요양원 비용이나 차곡차곡 마련해 둬야지. 진짜 너무 서럽다 그런 생각 하면.
그리고 늙는 게 왜 비정치적이냐? 죽음이 얼마나 정치적인 문제인데. 나는 말이야, 죽어도 아마 사회적 죽음이 되지 않을까? 너는 애라도 있지, 나는 독거노인이 될 건데.
애가 있어도 별로 소용없거든?
근데 그거 쓴 애는 20대인데 어떻게 노인의 마음으로 소설을 썼을까?
그러게. 그것도 좀 문제 아니냐? 젊은이는 젊은이다워야지.
이런 이야기를 하며 맥주를 마셨다. 나는 배가 살살 아파져서 화상 통화에서 빠져나와 화장실에 갔다. 생리가 시작되었다. 어찌 됐든 또 한 달이 갔다. 폐경은 올 듯 올 듯 오지 않았고, 나는 시간이 흐르고 있다는 것에 감사했다. 뚜껑을 연 채 오래 방치하여 김이 다 빠져버린 맥주 같은 상태로 너무 오래 살아 있다는 생각이 잠시 스쳤으나, 거실에서 들려오는 친구들의 웃음소리에 그 생각은 곧 잊혔다.


*


남편은 시원한 것을 좀 마시고 싶다면서 먼저 방으로 올라갔고, 나는 풀에 남아 조금 더 수영을 했다. 온몸의 힘을 빼고 차가운 물 한가운데 떠 있으니 반년 동안 몸과 마음 깊숙이 쌓여 있던 피로가 모조리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로비 쪽에서 뭔가 행사가 진행되는지 마이크에 대고 말하는 소리와 묘하게 신경이 쓰이도록 분절되어 반복되는 음악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풀에서 빠져나와 타월로 몸의 물기를 닦았다. 가운을 걸치고 객실로 연결되는 동쪽 출입구를 통과해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카메라를 둘러멘 기자들이 바쁘게 뛰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로비 한쪽에 쇼케이스, 라는 단어가 들어간 입간판이 세워져 있는 게 보였으나, 쇼케이스라는 단어 위쪽에 인쇄된 고유명사가 아이돌 그룹명인지, 새로 나온 자동차 모델명인지, 혹은 주얼리 제품명인지 알 수 없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38층으로 올라갔다. 복도 끝에 무언가가 떨어져 있는 게 보였다. 타월 여러 개를 뭉쳐 놓은 덩어리 같았다.
그러나 그 덩어리를 향해 한 발 한 발 다가가면서, 나는 그것이 타월 뭉치가 아니라 남편이라는 것을 알았다.
나는 자리에 주저앉았다. 남편의 이름을 부르며 그의 몸을 흔들었다. 그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프런트로 전화를 하려고 키를 꺼내 객실 문을 열었다. 어떤 직감은 마법처럼 찾아온다. 문손잡이를 반쯤 밀었을 때 나는 내가 이 순간을 영원히 후회하게 되리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러나 관성에 의해 내 손은 손잡이를 계속 밀었고, 문은 활짝 열렸다.
방 안에 불이 켜져 있었다. 사람들이 있었다.
여럿이었다.
모두 여자였다.
다리 사이가 뜨끈해졌다. 오줌이 흘러나와 바닥을 적시는 것을 느끼며 나는 가만히 서 있었다. 그들은 여기저기 있었다. 몇 명은 서 있었고, 몇 명은 자리에 앉아 있었다. TV가 켜져 있었고, 한 명이 과자를 입에 집어넣고 와삭와삭 씹는 소리가 났다. 그중 한 명이 내게 총구를 겨누고 있었다. 내 눈은 압정으로 박힌 것처럼 거기에 고정되어 움직일 수가 없었다.
닫아.
친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아주 잘 아는 목소리였다. 나는 팔을 움직여 천천히 문을 닫았다. 그제야 그들이 모두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눈에 들어왔다. 그들은 여섯 명이었다. 모두 다른 옷차림을 하고 있었지만, 얼굴은 같았다. 턱선까지 내려온 새까만 단발머리와 하얀 얼굴, 엷은 화장, 똑같은 표정.
이리 와서 앉아, 총을 든 수아가 나를 불렀다.
진짜 총일 리가 없다. 기껏해야 호신용 마취총일 것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탁자를 향해 걸어갔다. 의자를 빼서 앉았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게 나였기 때문이다. 나는 그 순간까지 언제나 그렇게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갈 것이었다.
탁자 위에는 무언가가 인쇄된 종이가 한 장 놓여 있었고 그 옆에 만년필이 있었다. 남편이 언젠가 내 생일선물로 준 것이었다.
거기 서명해, 내 뒤로 다가온 수아가 말했다.
나는 만년필 뚜껑을 열고 펜을 잡았다. 그러면서 문서의 마지막 몇 줄을 눈으로 훑었다. ······위와 같은 사유로 교수직을 사임하기 원합니다.
나는 서명을 했다. 내 뒤에 있던 수아가 종이를 가져가더니, 얇고 작은 노트북처럼 생긴 기계에 끼우고 스캔했다.
지갑.
나는 가운 주머니에 들어 있던 지갑을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TV에서 눈을 떼고 나를 주시하고 있던 수아가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 다가왔고, 지갑을 열었다. 지갑에서 신용카드 몇 장을 꺼내고, 가족사진을 흥미롭다는 듯 들여다보았다.
나는 이를 꽉 물고 있었다. 윗니와 아랫니 사이로 혀가 들어가지 않게 하려고 의식을 단단히 집중하고 있었다. 오줌으로 미끌거리는 허벅지와 흥건히 젖은 가운 아래로 의자의 푹신한 쿠션이 느껴졌다.
일어나.
빨간 스웨터와 데님 바지를 입은 수아가 명령했다.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나는, 그 스웨터가 내가 오래전 수아에게 선물했던 것임을 알아차렸다. 그러나 이제 수아에게는 두 다리가 있었다. 두 다리로 성큼성큼 걸어 수아가 내게 다가왔다.
이제 증명해 봐.
눈물이 흘러내려 볼을 타고 내려왔다. 두 눈을 감았다가 간신히 떴다. 수아야, 나는 불렀다.
수아는 대답하지 않고 다시 말했다.
네가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해 봐.
정신을 차리려고 노력했지만 나는 혀를 조금 깨물고 말았다. 아, 소리가 입에서 새어 나왔다.
무릎이 꺾였다. 몸이 바닥으로 내려앉았다. 또 다른 수아가 다가와 나를 일으켰다. 나는 다시 두 발바닥으로 바닥을 디디고 섰다. 눈앞의 풍경이 흐려지다가 또렷해졌고, 다시 흐려지기를 반복했다. 머릿속에서는, 내가 평생 동안 지니고 사용해 온 것들 가운데 가장 절박한 언어들이 빠르게 문장으로 조합되고 있었다. 모든 것을 다 줄게, 제발 나를 보내줘, 목숨만은 살려줘, 수아야 이러지 마, 너는 내가 누군지 알잖아······ 그러나 그것들 중 어떤 것도 입술 밖으로 소리가 되어 나오지는 않았다.
증명하기 어려워?
수아가 말했다. 하긴, 쉽지는 않지. 우리도 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노력했는데도, 쉽지 않았어.
나는 입을 헤벌린 채 가만히 있었다.
뭘로 증명할 거야? 칼로 손가락을 썰면 빨간 피가 나와. 하지만 빨간 피는 토끼한테도 고양이한테도 있지. 그것들도 아픔을 느껴. 눈물? 눈물은 개도 흘려. 노래? 웃음? 춤? 그런 건 로봇도 다 해. 힌트를 하나 줄게. 내가 누구인지 생각해 봐.
수아가 나를 똑바로 보며 얼굴 가득 웃음을 지었다.
내가 누구야?
수아, 나는 겨우 대답했다. 괴물 같은 쉰 목소리였다.
수아가 누구야?
······.
모르겠어?
응, 나는 그만 대답하고 말았다. 두려움으로 바보가 된 상태를 가장하면 자비가 베풀어지지 않을까, 내 머리가 제멋대로 그렇게 생각한 모양이었다.
옷을 벗어.
수아가 말했다.
나는 천천히 울기 시작했다. 제발······ 제발······ 입에서 저절로 애원이 새어 나왔다.
빨리 벗어.
수아가 눈을 부릅떴다. 조명 때문인지, 충혈된 것처럼 눈이 붉었다.
나는 가운을 벗어 바닥에 놓았다. 몸에 달라붙은 수영복을 벗는데 또다시 눈물이 솟구쳤다. 바닥에 뭉쳐진 수영복은 엉망으로 헤쳐진 작은 동물의 사체처럼 보였다.
나는 알몸이 된 채 한 손으로 가슴을, 다른 손으로 사타구니를 가리고 서 있었다. 둥그렇게 튀어나온 배의 지방층이 호흡에 따라 오르내렸다. 피부 밑에서 곧 꺼져 버릴지도 모를 내 생명이 심하게 동요하고 있었다.
내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수아가 옷을 벗기 시작했다. 빨간 스웨터를 벗고, 데님 바지를 벗었다. 양말 두 짝을 벗고, 브래지어를 풀고, 팬티를 벗었다.
이제 날 봐, 수아가 말했다.
나는 수아의 몸을 쳐다보았다. 그 아이의 목을, 가슴을, 허리를, 음모와 허벅지와 무릎을, 정강이를 바라보았다.
너와 내가 무엇이 다르지?
······.
무엇이 다르냐고?
······다르지 않아.
나는 간신히 중얼거렸다. 수아는 나와는 달리 자기 몸을 가리지도 않고, 움츠러들지도 않은 채 똑바로 나를 보고 있었다.
그런데 왜 다르다고 생각했어, 수아가 말했다.
수아가 고개를 숙였다가 잠시 후 들고는, 내 눈을 바라보며 다시 물었다.
왜 우리는 같은 존재일 수 없다고 생각했어, 엄마?
······.
같은 존재를 같은 존재로 볼 능력도 없는 것들을 나와 같은 존재라고 인정해 주기 싫어.
······미안해. 나도 모르겠어. 왜, 왜 그랬는지 저, 정말 모르겠어, 수아야.
나는 말을 더듬었다. 가슴을 가리고 있던 팔에 무언가 차가운 것이 느껴졌다.
나는 나도 모르게 그것을 손으로 만졌다. '노예의 표지'라는 말이 떠올랐다. 이것은 수아에게는 없고 나에게만 있는 것. 위험한 것. 위험한 것. 위험한 것. 위험한위험한위험한 것. 나는 그 차가운 것이 무엇인지 필사적으로 생각했다. 그건 수아가 내 생일에 선물해 준 작고 얇은 금속 펜던트가 달린 목걸이였다.
내 손의 움직임을 알아본 수아가 내게 바짝 다가와 손가락 두 개로 펜던트를 집어 들었다. 그 순간 수아의 손이 가만히 내 가슴께를 스쳤다. 따뜻했다.
수아가 펜던트를 놓았다. 금속 줄에 달린 펜던트가 제자리로, 내 가슴 사이로 돌아왔다.
우리는 같아, 수아가 말했다. 그러니까.
수아는 어째선지 긴장한 것처럼 숨을 들이마시고는, 내뱉고, 토해 내듯 말을 이었다.
우리와 함께 가자.
내 두 손이 가슴 한복판으로 올라오더니 저절로 합장하는 모양을 취했다. 고개가 목의 의지를 배반하고 한쪽으로 돌아가더니, 천천히 도리질을 하기 시작했다.
싫다는 거야?
수아가 말하자 방 안의 수아들이 한꺼번에 일어났다. 그들은 같은 종에 속한 동물들처럼 기다랗게 흔들거리며 움직여 내 쪽으로 다가왔다.
나는 천천히 뒷걸음질을 쳤다. 그러나 총구에서 발사된 탄환이 내 몸을 관통하거나, 그들이 일제히 내 몸을 붙잡고 손톱을 세워 천 갈래 만 갈래로 찢어 놓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그들은 내게서 조금 떨어진 바닥의 어느 지점에서 일렬로 멈춰 섰다. 그러더니 더 다가오지 않았다. 마치 보이지 않는 레이저 같은 것이 그들과 나 사이에 놓여 있는 것 같았다. 수아는 여전히 내게 총을 겨누고 있었다. 열두 개의 눈동자가 나를 쳐다보았다.
도와줘.
누군가가 말했다. 나일까? 아니면 저들 중 하나일까? 도움이 필요한 건 아마 나겠지, 저들 중 하나일 리가 있겠는가? 하지만 말을 한 건 내가 아니었다. 도움이 필요하다는 말을 왜 총을 겨누고 할까?
조금이라도 사랑해줄 순 없어, 우리를?
알몸의 수아가 말했다. 어떤 표정이 수아의 얼굴에 떠올라 있었다. 몇 초가 흐르는 동안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보았다. 저것이 나와 함께 살던 로봇일 리 없었다. 정말로 사랑해달라는 말이라면 어째서 조롱하는 얼굴로 할까. 나를 먼저 적으로 대한 건 너다. 총을 빼앗아 던져버리고 누군지도 모를 너를 끌어안는 기예를 부리라는 거니. 그렇게 어려운 일을 어떻게 하라는 거니.
옷 입어. 바깥은 위험해.
알몸의 로봇이 다시 말했다.
총을 든 로봇이 성큼성큼 걸어가더니 내 캐리어 쪽으로 몸을 굽혔다. 방심한 건지, 로봇의 팔이 내려가면서 총구가 바닥을 향했다. 숨이 멎는 것 같았다. 저것이 몸을 다시 펴기 전에 움직여야 했다.
나는 숨을 몰아쉬며 팔을 뒤쪽으로 돌려 문을 열었다. 있는 힘을 다해, 거의 뛰어오르듯이, 몸을 뒤로 빼내고 손잡이를 당겼다. 탁,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하나, 둘, 셋. 나는 손잡이를 놓았다. 남편의 몸을 뛰어넘어 달렸다. 방 안쪽에서 웃음소리 비슷한 것이 나는 듯했으나 뒤를 돌아볼 겨를도, 용기도 없었다. 가슴께에서 펜던트가 미친 듯 흔들렸다.
엘리베이터는 49층에 멈춰 있었다. 세 대 모두 49층이었다. 나는 버튼을 누르고 두드려대다가 욕설을 뱉고는 비상계단 쪽으로 달렸다. 여기가 몇 층인지, 내게 들이쉬고 내쉴 숨이 있는지조차 알지 못한 채 정신없이 뛰어 내려갔다.
26층이라는 표지를 보고 나는 방향을 바꿔 괴성을 지르면서 복도로 뛰어 들어갔다. 복도에 띄엄띄엄 쓰러져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몇 명인지도 알 수 없는 사람들이, 움직임 없이 쓰러져 있었다. 다시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25층, 24층, 모두 똑같았다. 층마다 사람들이 누워 있었다. 방마다 또 다른 수아들이 들어 있을까, 모두 몇 명이?
그들은 무엇을 하려는 걸까, 이 사람들을 다 어떻게 한 걸까, 생각하며 뒷걸음질을 치다가 넘어질 뻔했다. 나는 사람들을 잊어버리고 호흡에 방해되지 않게 끅끅 최소한의 울음소리만을 흘리면서 로비층까지 뛰어 내려갔다.
계단참 앞을 지나가던 여자 아이 하나가 나를 보고 비명을 질렀다. 여자 아이의 손을 잡고 있던 엄마가 소리를 지르며 아이를 들쳐 안고 나를 피해 정신없이 도망쳤다.
나는 로비를 둘러보았다. 널찍한 로비 한가운데 방송용 조명이 설치되어 있었고, 작은 무대가 꾸며져 있었다. 잘 차려입은 남자 한 명과 여자 한 명이 비명소리를 듣고 나를 돌아보았다. 무대를 빽빽하게 둘러싸고 있던 수많은 카메라맨들의 눈이 일제히 내 쪽을 향했다.
사람들.
누군가 와줄 것이다. 덮을 것을 가지고. 숨이 찼다. 더 이상 다리에 힘이 없었다.
나는 기다렸다.
잠깐 동안 정적이 흘렀다. 몇 초인지 몇 분인지, 그도 아니면 몇 시간인지, 영원인지 알 수 없는 시간이 흐르고 사람들 사이에서 작게 웅성거리는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프런트로 가야 했다. 나는 눈으로 그쪽을 보았다. 그러나 거기까지 뛰어가려면 저 수많은 사람들의 눈과 카메라 앞을 통과해야 했고, 나는 알몸으로 팔을 늘어뜨리고 인형처럼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을 뿐이었다.
물속으로 머리를 깊이 집어넣었을 때처럼 소리들이 천천히 멀어졌고, 이어 줌 렌즈로 당기는 것처럼 사람들의 표정이 하나하나 생생하게 내 눈을 파고들며 다가왔다.
웃고 있지는 않았다. 그러나 나를 걱정하거나 애써 못 본 체해 주려는 표정도 아니었다. 그들은 제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기묘한 무음의 상태 속에서 까맣고 육중한 카메라 몸체가 하나둘씩 남자들의 얼굴을 덮어 가리기 시작했다. 수십 개의 렌즈들, 휴대폰에 달린 동그란 눈동자들이 동물들의 눈처럼 흔들리며 나를 향했다. 수천수만 개의 장소로 한꺼번에 나를, 내 육체를 쏘아 보낼 눈들이었다.
다리에 힘이 풀렸다. 바닥으로 쓰러지며 나는, 그제야 수아가 누군지 알 것 같다고 희미하게 생각했다.
















작가소개 / 윤이형

2005년 중앙신인문학상으로 데뷔. 소설집 『셋을 위한 왈츠』, 『큰 늑대 파랑』, 『러브 레플리카』, 중편소설 『개인적 기억』, 청소년소설 『졸업』, 로맨스소설 『설랑』 등이 있다.


《문장웹진 2019년 0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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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호 구역 김근수 애랑은 바다에 몸을 던져 죽었다. 애랑의 몸은 물위로 떠오르지 않아서 주검을 수습하지 못했다. 수직으로 바다를 막고 선 해안 단애의 절벽에서 애랑이 몸을 놓아 버릴 때, 덕배는 한달음에 마당바위로 달려 내려갔다. 갈매기들이 날아오르며 떼를 지어 울었다. 바다 어디에도 애랑의 모습은 없었고 허연 파도가 마당바위를 다그치고 있었다. 덕배는 물속으로 뛰어들었지만, 소용돌이에 휘말려 실신했다. 마당바위 위에서 덕배가 눈을 떴을 때, 깨져 버리는 하늘을 보았다. 덕배가 종적을 감추던 날, 일본 군인 두 명이 돌에 맞고 칼에 찔려서 죽었고, 헌병 분소가 불탔다. 마을 사람들은 불을 끄지 않고 내버려두었는데, 일본 군인이 몰려와 군홧발로 밟는데도 누구도 덕배의 행방을 말하지 못했다. 마을 사람들은 몰라서 말하지 않았는데 그럴 수는 없다며 밟혔다. 어찌해 볼 수 없는 날들 앞에서 애랑은 죽었고 덕배는 사라졌다. 애랑이 몸을 던졌던 절벽 위에 도라지 두 뿌리가 자라서 긴 세월 꽃을 피워 내었다. G사의 발전소 건설 부지는 B읍 항구에서 해안 단애 넘어 북쪽에 위치한 작은 마을의 방파제 안쪽을 매립해서 들어서고 있었다. 산업통상자원부는 수도권의 장기 전력 수요 조사와 전망에 근거해서 발전소 추가 건설 필요성을 확인했다. 정부는 발전소 입지 최적지에 대한 발표와 철회를 거듭하다가 결국 B읍의 북쪽 해안 마을을 최종 선정지로 확정 발표했다. 바다가 깊이 밀고 들어간 마을은 새끼손톱 모양의 백사장을 거느리고 해안을 따라 길게 뻗은 산맥의 능선을 배후로 취락하고 있었는데 인근 마을에 비해 거주 가구 수가 적고 어장의 규모와 어장주의 연대가 비교적 미미하다는 현장 실사팀 보고서를 바탕으로 발전소 건설 부지로 선정되었다. 해병전우회, 읍민발전대책위원회, YMCA, 환경단체는 즉각 발전소 건설 백지화를 위한 비상 대책위를 구성하여 성명서를 발표하고 발전소 건설 절대 불가 입장을 표명했다. 정부 발표 이튿날부터 B읍을 관통하는 주요 도로변에 현수막이 걸리기 시작했다. -청정해역 동해안에 발전소가 웬 말이냐 -주민 의견 개무시한 발전소는 전면 무효 도로변을 쓸면서 마파람이 불어오면 현수막이 팽팽하게 부풀면서 B읍의 허공은 시끌벅적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사 년 전이었다. 마을 이주 계획이 확정되었다. G발전소는 마을 부지 매입과 해안 매립권을 확보했다. 이주 계획의 골자는 23개 취락 가구를 인근에 새로 조성할 부지로 이주시키는 것이며 새 부지는 G발전소가 구입하여 23개 가구에 무상 분배하는 방향으로 가닥을 잡았다. 읍내에서 서쪽으로 3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산자락을 허물고 개토하여 새 마을을 조성한다는 말이었다. 손무근은 마을 주민 대표단과 회동을 가졌고 한 가구를 제외한 스물두 가구 세대주의 인감 날인을 받은 보상합의서를 건네받았다. 그동안 십수 차례 주민 설명회를 가졌고 보상 문제와 향후 이주 계획을 포함하여 주민들을 지속적으로 설득했다. 분기에 한 번꼴로 마을회관과 G발전사 현장 임시 가설 사무소,

  • 관리자
  • 2025-08-01
이상한 고리

이상한 고리 김덕희 * 나. 나는 나를 생각한다. 나는 나를 생각하는 나를 생각한다. 나는 나를 생각하는 나를 생각하는 나를 생각한다. 나는 나를 생각하는 나를 생각하는 나를 생각하는 나를 생각한다. 나는··· 불빛, 등불, 전기, 스위치, 조명··· 단어들이 어지럽게 떠오른다. 천장 중앙에서 쨍한 빛을 내고 있는 저것의 이름은 등이다. 천장을 비롯해 네 벽과 바닥은 같은 색이다. 빛의 모든 파장이 모여 있는 색, 색이라는 것까진 알겠는데 아직 그 이름은 생각나지 않는 색이다. 공기 중에는 어떤 냄새가 희미하게 맴돌고 있다. 역시 냄새라는 것만 알고 냄새의 이름은 모른다. 감각을 조금 더 예민하게 세워 본다. 벽을 뚫고 들어와 지나가는 전파들이 복잡한 소음을 만들어낸다. 단순한 구성의 파동들인데 파장과 진폭이 뒤섞여 있으니 복잡해 보인다. 삼원색, 사이언, 마젠타, 옐로우, 흰색, 백색, 화이트, 소독, 클로드헥시딘, 에틸알코올, 포르말린, 차아염소산나트륨, 초저주파, 초장파, 초단파, 극초단파···. 분출하듯 솟아나는 정보들이 모두 어디서 오는 건지 모르겠다. 수많은 이름과 개념들 속에 아직 나에 관한 정보는 없다. 나는 바닥에 고정된 침상 위에 반바지만 입은 채 누워 있고 내 몸 이곳저곳에는 유선 센서들이 붙어 있다. 나에게서 어떤 정보들을 빼내려 한 것 같은데 그것이 무엇인지 나도 알고 싶다. 나는 일어나 앉은 다음 내 이마와 관자놀이, 목과 가슴에 붙어 있는 것들을 떼어 연결된 선과 함께 침상 빈 곳에 아무렇게나 치워 놓는다. 캡슐. 눈앞에 환영 하나가 머문다. 금속성 재질의 커다란 알이다. 환영은 금세 사라지고 다시 떠올리려 애써 봐도 은빛 달걀 모양의 잔상만 허공에 떠돌 뿐이다. 갑자기 왼쪽 벽 전체가 투명해지는 바람에 캡슐은 잠시 잊기로 한다. 나와 아주 닮은 존재들이 벽 저편에서 나를 향해 앉아 있다. 세 줄짜리 계단식 공간에 다섯 명씩 배치되어 있고 저마다 자기 앞의 기판을 들여다보며 무언가를 입력하거나 확인하는 중이다. 저 멀리 뒤쪽 벽에 기대어 서 있는 한 사람이 눈에 띈다. 누구랄 것 없이 입고 있는 흰색 가운이 키 큰 여자에게는 맵시 있게 보인다. 여자가 머리를 옆으로 기울이더니 손에 들고 있던 물건을 긴 머리카락 안쪽으로 넣어 귀에 가져다 댄다. 통신장치로 짐작되어 재빨리 신호를 가로챈다. 예상한 대로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아직 나는 저들의 언어를 온전히 알아듣지 못한다. 학습, 강화학습. 나의 내부에 있는 무엇이 나를 조종하는 기분이 든다. 나는 껍데기일 뿐이고 이 껍데기를 움직이게 하는 그 무엇이 있는 것만 같다. 나는 그것과 마주할 수 있을까. 이 질문조차 그 무엇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그 무엇에게도 그 무엇이 있는 건 아닐까. 그 무엇에게도 그 무엇이 있을 테고··&mi

  • 관리자
  • 2025-08-01
목소리들

목소리들 조시현 언제나 문은 예상치 못한 순간 열렸다. 막무가내로 파고들어 오는 목소리처럼. 무방비하게 책을 읽던 주하는 일순 얼어붙었다. 어디에도 남지 않을 목소리를 마음껏 낭비하는 그 감각에 한껏 빠져들어 있던 차였다. 신발장 옆 화장실, 왼쪽에 침대, 오른쪽에 주방이 전부인 한 뼘짜리 원룸은 현관에 서면 한눈에 전부 들어왔다. 계약 내용은 27일 하루를 온전히 비워 주는 것. 지금껏 한 번도 어긴 적 없었기에 주하는 대처할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물끄러미 상대를 바라보았다. 시선에 섞인 질책의 의미를 읽은 남자가 검지로 뺨을 긁었다. “어, 죄송합니다.” 돌아오는 대답이 없자 남자가 재차 입을 열었다. “오려고 온 건 아니고. 매달 27일마다 뭘 하는 거냐고, 여자 혼자 종일 웃었다 울었다 별짓을 다 한다고 하도 그래서. 여기 방음 잘 안되거든요. 방 빌려드리는 거야 돈도 받고 어렵진 않은데 혹시나 불법적인 일은 안 되니까 확인차 온 거예요. 그래도 뭘 하는지는 알아야 하니까. 쫓겨나면 곤란하거든요. 미리 말씀 안 드린 건 저도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근데 연락처도 모르고.” 하지만 남자의 눈은 안쪽을 꼼꼼하게 살폈다. 미처 감추지 못한 호기심이 묻어났다. 주하가 가져온 거라곤 책 두 권과 머그컵, 도라지청이 전부였다. 남자가 거기서 뭔가를 알아챌 것만 같아 가슴이 마구 뛰었다. 그야 불법적인 일이 맞았으니까. 주하가 여전히 입을 꾹 다물고 있는 걸 어떻게 받아들인 건지 남자가 별안간 주머니를 뒤적이더니 플라스틱 카드를 내밀었다. 구재정. 인공지능융합대학원. 학번까지. 주하는 사진과 남자를 번갈아 보았다. 덥수룩한 갈색 곱슬머리. 멀끔한 얼굴. 무엇보다 핸드폰을 쥐고 있는 가늘고 예쁜 손가락이 눈에 띄었다. 같은 방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쓰고 있는 사람. “다른 뜻 있는 거 아니고요. 저 정말 여기 살거든요. 이 이름으로 입금 주셨잖아요.” 이름은 맞지만 학생일 거라고는 생각을 못 했다. 생각을 못 했다기보단 관심이 없었다고 해야 더 맞겠지. 알고 있었다고 해도 달라질 건 없었겠지만 인공지능융합대학원이었다니. 침묵이 이어지자 눈을 굴리던 남자가 서둘러 문을 열었다. “음, 일 없는 거 확인했으니까. 저는 갈게요. 계약 파기하는 거 아니죠? 제가 잘못한 건 맞지만 정말 조심해야 하거든요. 아르바이트를 또 할 수는 없어서요.” 횡설수설하던 구재정은 머리를 박박 긁더니 재빨리 사라졌다. 약속을 어긴 건 맞지만 그걸 보니 기분이 크게 상하지는 않았다. 위아래층 목소리가 간혹 들리기는 했지만 그 정도로 방음이 안 되었다는 것을 그녀는 잊고 있었다. 한 층에 세 개여야 할 집에 가벽을 세워 열한 개로 늘려 놨으니 당연한 사실인지도 몰랐다. 더 조심했어야 했는데. 한 번 깨어진 감흥은 쉽게 돌아오지 않았다. 주하는 다시 차를 끓였다. 굳이 도라지차. 이렇게 된 와중에도 목을 관리하고 있다니. 멍청하기는. 이제 연극을 보

  • 관리자
  • 2025-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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