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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물고기들

  • 작성일 2019-06-01
  • 조회수 5,480

[단편소설]



밤의 물고기들



박선우




그 사람을 만난 날이 떠오른다. 초여름 저녁, 그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내게 남겨진 장면들이 잇달아 떠오른다. 그 밤 우리가 정신 나간 사람들처럼 주고받은 대화, 얼음이 든 잔에 가득 흘려 넣은 진홍빛 위스키, 정체 모를 흰 가루, 그리고 오랜 정적 끝에 터져 나온 흐느낌까지. 그 기억의 편린들은 좀처럼 휘발되지 않을 것 같고, 어느덧 나의 일부분으로 스며든 듯하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왜 어떤 순간들은 불청객처럼 찾아와 남은 생을 고스란히 들여도 소거할 수 없는 얼룩을 남기고 떠나버리는 것일까. 어째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것일까.
그 사람이 우리 집에 온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나는 병원 당직실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노란색 스탠드 불빛 아래에서 몸을 잔뜩 웅크린 채 사직서가 수리되었다는 통보문을 읽고 있었다. 하얗고 긴 종이에는 내 이름과 직함, 근무 시작일과 종료일, 병원장의 붉은색 인장이 찍혀 있었다. 그뿐. 레지던트 기간을 포함해 대학병원 피부센터에서 8년 넘게 근무한 이력이 종이 한 장에 담겨 있었다. 그 종이는 특별히 무겁거나 가볍지 않았다. 껄끄럽거나 매끄럽지도 않았고, 유난히 뻣뻣하거나 유연하지도 않았다. 그건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다. 나는 그 사실을 받아들이느라 바로 옆 수의병동에서 근무하던 누나가 당직실까지 찾아와 그 사람 이야기를 꺼냈을 때 반박할 타이밍을 놓쳐버렸다. 그러니까 어째서 그 사람을 우리 집에 들여야만 하냐는, 다른 거처를 알아봐 줄 수 없겠냐는, 차라리 돈을 보태 줄 테니 호텔 방을 잡아 주라는 식으로 거부 의사를 밝히지 못한 것이다.
시간이 지나고 보니 그러지 않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누나가 그 사람에게 쏟아 붓는 애정은 각별했다. 나는 누나가 타인에게 — 후두염으로 진료를 받으러 온 구관조나 산후우울증에 걸린 레트리버가 아닌 사람에게 — 그토록 다정하고 배려 넘치게 구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 물론 누나의 호의에는 의무감이랄까 측은지심이 복잡하게 뒤섞여 있었으므로, 나는 두 사람이 나란히 서서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보았을 때 내심 그럼 그렇지, 라고 생각했다. 누나에게 그 사람은 중성화 수술을 받고 밤거리를 헤매고 다니는 길고양이와 다름없는 존재인 것 같았다.
그 사람은 오픈리 게이였고, 프리랜서 북디자이너였으며, 5년 남짓 동거해 온 연상의 남자 친구와 결별한 상태였다. 누나의 말에 따르면 그 사람은 분노와 상실감을 극복하지 못한 나머지 몸담고 있던 프로젝트에서 줄줄이 하차했으며, 밤마다 친구들을 불러 모아 술을 퍼마셨고, 종로와 이태원의 클럽들을 전전하며 아무 남자랑 섹스를 했다. 그런 식으로 한 달 가까이 흥청망청 지내고도 성이 차지 않았는지 오피스텔 보증금을 빼 장기 해외여행까지 다녀왔다. 그러니 지금은 돈 한 푼 없고 딱히 머무를 곳도 없는 신세라고 했다. 한마디로 대책 없는 인간이었다. 어떻게 서른네 살이나 처먹고 — 나와 동갑이었다 — 그런 식으로 삶을 꾸려 나갈 수 있는 거지? 물론 나는 누나에게 그런 속내를 꺼내 놓지 않았다. 당시에는 거부감을 드러낼 이유가 전혀 없었다. 알 게 뭐람. 일면식조차 없는 게이가 집도 절도 없이 떠돌아다니다가 객사하거나 말거나. 문제는 그 사람이 우리 집 — 정확히는 누나가 재건축을 염두에 두고 매입한 32평형 아파트 — 에 들어와 당분간 신세를 지겠다고 했을 때 발생했다. 말이 좋아 당분간이지 정황상 몇 주일을 — 혹은 몇 달을 — 뭉개고 있을지 몰랐다. 그러므로 나는 뒤늦게나마 누나에게 따져 물어야 했다. 어떻게 그런 중대한 결정을 동거인인 나와 한마디 상의도 없이 내릴 수 있느냐고 말이다.
야, 너나 잘해.
누나는 별 같지도 않은 소리를 들었다는 듯 입술을 실룩였다. 너야말로 해외 펀드니 뭐니로 적금 다 날려먹고 여기 들어와 산 지가 몇 년째야. 대체 언제 독립하나 기다리고 있었는데, 응? 나랑 한마디 상의도 없이 사직서를 내? 성질 같아서는 너부터 쫓아내고 싶거든.
나는 대꾸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 방으로 들어왔다. 침대에 누워 앞으로 맞닥뜨리게 될 상황들을 상상해 보았다. 사실 나는 그렇게 꽉 막힌 사람이 아니었다. 여태껏 동성애를 반대한 적도, 갈 곳이 없어 떠도는 난민이나 부랑자를 배척해야 한다고 생각한 적도 없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별 관심 없었다. 누가 누구랑 섹스를 하든, 국경을 넘어 헤매고 다니든 말든 나한테 피해만 끼치지 않는다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게 내 입장이라면 입장이었다. 입장이랄 것도 없었다. 나는 그저 외부인을 사적인 공간에 들여야 한다는 상황 자체가 좀 성가실 뿐이었다. 그 사람이 고등학생 때 아우팅 당한 게이이며, 부모와 의절한 채 지내 왔고, 경제관념이 희박하며, 섹스 중독일지 모른다는…… 뭐 그런 사실들과는 아무 상관없이 말이다. 처음에는 그런 거라고 믿었다. 실제로 그 사람이 우리 집 현관문을 열고 들어와 거실 소파에 떡하니 앉기 전까지는 말이다.





누나는 대학교 시절 성소수자 동아리에서 그 사람을 처음 만났다. 누나가 한때 — 9개월 정도 — 레즈비언이던 시기의 일이었다. 당시 누나는 과 동기 여학생에게 난생처음 느껴 보는 감정을 발견했고 — 그래, 이게 진짜야 — 홀린 듯이 만남을 이어 갔다. 동성혼이 합법화된 네덜란드로 이민을 떠나는 절차까지 알아봤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 여학생이 다른 년과 붙어먹으면서 — 누나의 표현이다 — 다시 이성애자의 세계로 돌아왔다. 한마디로 금지된 세계의 맛만 봤다. 누나는 한때의 방황을 청산하고 나니 유일한 전리품처럼 그 사람과의 우정이 남았더라고 했다.
그 사람은 누나가 만취하여 헤어진 여자 친구의 옥탑방으로 쫓아가려 할 때마다, 동아리실 문을 걷어차고 소란을 일으킬 때마다, 수면제 과다복용으로 응급실에 실려 갈 때마다 새벽같이 나와 그 뒤치다꺼리를 해주었다. 지극한 보살핌으로 누나를 다독여 주었고, 매섭게 으름장을 놓기도 했으며, 남은 생을 어떻게 견뎌내야 할지 밤새도록 대화 상대가 되어 주었다.
그러니까 내가 무사히 학업을 마치고 사람 구실을 하게 된 건 다 그 애 덕분이야.
누나는 그 사람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 놓을 때마다 늘 그런 식으로 마무리를 짓곤 했다. 이 모든 게 그 사람 덕분이라고. 그럴 때마다 나는 모래를 한 줌 집어 삼킨 듯 목구멍 안쪽이 껄끄러워지곤 했는데 — 누나는 내게 도움을 청하거나 힘든 기색을 보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 그런 감정을 차마 털어놓지는 못했다.
네가 뭐 따로 할 건 없어.
그 사람이 귀국하기 전날 밤, 누나와 나는 부엌 식탁에 마주 앉아 손님맞이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저녁 식사는 내가 준비해 놓을 테고, 술은 네가 퇴사 선물로 받은 와인이 남아 있으니까 그걸로 하면 돼. 7시쯤일 것 같아. 내가 공항에서 그 애를 픽업해 집으로 데려오면 말이야. 그럼 너는 같이 밥 먹고 웃고 이야기 좀 나누다가 얌전히 네 방으로 들어가서 자면 돼.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니잖아. 누나는 내 얼굴을 잠시 들여다보더니 덧붙였다. 살갑게 대해 줘. 괴로운 상황에 처한 애니까.
스스로 자처한 괴로움이지. 나는 식탁에 왼팔을 걸친 채 상체를 틀어 앉았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돈을 다 써버린 거래. 그렇게 행동하는 사람을 제정신이라고 할 수 있나.
누나는 식탁 위로 팔을 뻗어 내 손등을 가볍게 어루만졌다. 이제 와서 그런 말 하면 뭐 해. 누구한테나 감당하기 힘든 시기는 있기 마련이잖아. 막 나가고 싶을 때가 있다고.
호모라서 그런가. 나는 툭 내뱉었다. 순 제멋대로네.
아, 진짜. 누나는 내 손등을 탁 소리 나게 내리쳤다. 입 조심해. 너 그딴 소리 한 번만 더 해봐. 주둥이를 확 쳐버릴 테니까.
그냥 하는 말이야. 나는 얻어맞은 손등을 문지르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아니, 솔직히 그렇잖아. 이해가 안 돼. 보통 사람은 애인이랑 헤어졌다고 그렇게까지 자기 삶을 내팽개치지 않는다고.
누나는 내 얼굴을 물끄러미 건너다보았다. 그렇겠지. 머리카락을 귀 뒤로 쓸어 넘기면서 말했다. 너야 그렇겠지.
무슨 뜻이야.
글쎄. 누나는 어깨만 으쓱해 보였다. 그냥 하는 말이야.





이튿날 오후, 누나는 붉은색 폭스바겐을 몰고 인천국제공항으로 향했다. 나는 누나가 현관을 나서는 순간부터 좌불안석이 되었고 — 대체 왜? — 거실 소파 한가운데에 앉아 텔레비전을 보는 둥 마는 둥했다. 월드컵 기간이라 어느 채널을 틀어도 축구 중계와 하이라이트 재방송이 한창이었다. 나는 냉장고에서 하이네켄 맥주병을 꺼내 와 홀짝거렸고 이따금씩 벽에 걸린 시계를 올려다보았다. 지금쯤이면 둘이 만나고 있겠지, 차 트렁크에 캐리어를 싣고 웃고 떠들면서 이쪽으로 오고 있겠지, 다리를 건넜을 거야, 도중에 카페에 들러 커피를 한 잔씩 마셨을지도 모르고, 둘이서 무슨 작당을 했을지 알아, 어쩌면 그놈이 운전대를 잡았을지도, 슬슬 경사로를 올라 아파트 주차장에 들어섰을 거야, 감히 우리 집 호수가 적힌 자리에 차를 세우고 있겠지, 같은 생각을 쉬지 않고 떠올렸다. 그런 상념들이 머릿속에 차오르는 걸 막을 수가 없었다. 나는 어째서 내가 이렇게 예민하게 구는지 영문을 알지 못했고, 한쪽 다리를 덜덜 떨며 맥주만 연거푸 들이켰다. 그러다가 마지막 모금을 삼킬 즈음 현관 쪽에서 도어록 장치가 해제되는 소리를 들었다. 고개를 돌리자 라임색 캐리어를 한쪽씩 나눠 든 두 사람이 집 안으로 들어서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 사람은 키가 얼추 2미터는 되어 보였다. 빡빡 깎은 머리에, 오른쪽 귀에는 새끼손톱만 한 링 귀걸이를 하고 있었다. 떡 벌어진 어깨를 감싼 연푸른색 하와이안 셔츠는 조금만 힘을 주면 단추가 터져 나갈 것처럼 가슴 부근이 팽팽했다. 무엇보다 그는 목덜미부터 양쪽 손등에 이르기까지 국화꽃과 잎사귀 문신으로 도배가 되어 있었다. 그제야 나는 누나를 통해 그의 사생활을 낱낱이 전해 들었음에도 용모에 관해서는 일절 들은 바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의 외모는 내가 막연히 상상해 온 이미지와 사뭇 다르다는 느낌을 주었는데, 실제로 그를 본 후에는 내가 이전까지 어떤 모습을 상상해 왔는지 좀처럼 떠올릴 수 없었다.
나는 텔레비전을 끄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현관으로 다가가자 누나는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인사해, 동생이야, 하고 나를 가리켰다. 그는 미소를 띤 채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라고 굵직한 저음으로 말했다. 그러면서 자기 이름도 덧붙였는데, 나는 평소와 다르게 실실거리는 누나가 신경 쓰여 그걸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다.
고맙습니다. 기꺼이 받아 주셔서요.
그가 악수를 청하듯 오른손을 내밀었을 때에는 얼결에 두 손으로 맞잡았다.
뭘요. 저도 반갑습니다. 나는 멋쩍게 웃어 보인 뒤 손을 빼고 돌아섰다. 들어오세요. 누추하지만 뭐, 당분간이니까요.
우리는 함께 거실로 자리를 옮겼다. 소파로 향하는 내내 누나는 그의 옆얼굴을 빤히 올려다보며 조심해, 캐리어는 저쪽에 내려두고, 피곤하겠다, 어지러운 건 좀 괜찮아, 같은 말을 쉬지 않고 반복했다. 그때마다 그는 피식 웃거나 고개만 저을 뿐 이렇다 할 대답은 하지 않았다. 그와 누나는 2인용 가죽 소파에 나란히 걸터앉았고, 나는 베란다에서 의자를 가져와 그들과 마주 보는 위치에 놓고 앉았다. 의자는 마호가니 재질로, 누나가 작년에 인터넷으로 충동 구매한 물건 중 하나였다. 등받이에 진녹색 쿠션이 달려 있고, 팔걸이에 스핑크스가 음각으로 새겨져 있어 다소 으스스한 느낌을 주는 앤티크 가구였다. 누나는 배달되어 온 날 딱 한 번, 그 의자에 앉아 봤을 뿐 — 사진으로 보던 거랑 느낌이 좀 다르네 — 이후로는 그것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까지 그것의 존재를 까맣게 잊고 지냈다. 나는 그날 처음으로 마호가니 의자에 앉게 됐는데, 우리 집에 그런 물건이 존재해 왔다는 사실이 새삼 놀라웠다.
있어 봐. 마실 것 가져올 테니까. 이윽고 누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둘이 동갑인 건 알지? 편하게 이야기 나누고 있어. 그러더니 나를 향해 은근한 눈빛을 보냈다. 이번 기회에 서로 친해지면 좋잖아.
누나 말마따나 그와 나는 거실에 남았다. 그는 상체를 숙인 채 양쪽 팔꿈치를 무릎에 괴는 자세로 앉아 있었다. 피로가 몰려오는지 연신 목덜미를 주물렀고, 심호흡을 하듯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가 뱉어냈다. 그때마다 그의 근육질 상체가 팽팽하게 부풀어 올랐다가 가라앉는 모습을 나는 지켜보았다.
피곤하시겠어요. 나는 예의상 먼저 말을 꺼냈다. 오는 길이 막히진 않았나요.
괜찮았어요. 그는 상체를 일으키며 고개를 앞뒤로 까닥였다. 그 시간에 그 정도면 막힌 것도 아니죠. 정말 괜찮았어요.
하필 퇴근시간대랑 겹쳐서 걱정했는데요. 나는 하나도 걱정하지 않았으면서 되는 대로 지껄였다. 여행은 어떠셨나요. 어느 나라에 다녀오신 거죠?
여기저기요. 그는 고개를 연신 까닥대며 말했다. 마치 혼자서만 어떤 음악을 듣고 있고, 그 리듬에 완전히 빠져 있는 듯했다. 처음부터 어느 나라가 목적은 아니었어요. 그냥 여행 자체가 목적이었지.
그러셨구나. 나는 거참 정신 못 차리고 방황하는 사춘기 같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뭐, 기억에 남는 곳이 있을 법한데요.
으음. 그는 고갯짓을 멈추더니 잠시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교토요. 맞아, 교토가 있었네. 막 생각났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나를 건너다보았다.
교토 좋지요. 나는 시선을 피하며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거기서 뭐가 좋으셨는데요.
딱히 좋았던 건 없어요. 그는 고개를 다시 까닥거리며 말했다. 그냥, 어느 나라를 가도 거기가 거기고, 이렇다 할 흥미나 의욕도 없어서, 일주일 넘게 푸껫 리조트에서 머물던 때였어요. 교토는…… 헤어진 남자 친구 인스타그램을 보다가 충동적으로 가게 됐지요. 그 인간이 나랑 헤어지고서 3박 4일인가 교토에 혼자 여행을 다녀왔더라고요. 그래서 그가 돌아다닌 경로를 그대로 따라다녀 봤어요. 첫날밤에는 교토타워에 올라가 도시 야경을 내려다봤고, 둘째 날에는 청수사에 들러 바가지에 약수를 가득 받아 마셨죠. 그러면 몸에 깃든 병이 낫는다나 뭐라나. 셋째 날에는 나라사슴공원에 갔어요. 도다이지에서 향도 피우고 백 엔짜리 운세도 뽑았고요. 마지막 날에는 우지마을에서 말차푸딩이랑 센베를 먹었습니다. 그 인간이 했던 그대로요. 그게 다예요.
왜요. 나는 별 생각 없이 물었다. 무슨 이유가 있나요.
그는 내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순간 처음으로 그와 눈이 마주쳤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눈동자는 연한 갈색이었다. 볕에 그을린 피부는 부드럽고 탄력 있어 보였고, 오른쪽 뺨에는 눈물 자국처럼 일정한 간격으로 점이 세 개 있었다.
살면서 그래 본 적 없으세요? 그가 놀랍다는 듯이 말했다. 그냥, 그 사람이 머무른 장소에 한번 가보는 거요.
나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우연히 마주치길 바라는, 뭐 그런 건가요.
아니요. 그는 자세를 고쳐 앉더니 검지로 제 볼을 톡톡 두드렸다. 그렇다기보다…… 오히려 반대에 가까워요. 거기에 없다는 걸 확인하러 갔달까. 없음을 보러 간 거죠.
그때 누나가 탄산수병과 얼음이 든 잔을 쟁반에 담아 내왔다. 테이블에 그것들을 하나씩 내려놓으며 그와 내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둘이 대화가 통하나 보네. 여태 무슨 이야기했어?
아무것도. 그는 상체를 뒤로 젖히며 누나를 향해 싱긋 웃었다. 당신이 얼마나 매력적인 여자인지 이야기했지.
누나는 갑자기 웃음을 터뜨리더니 그의 등을 찰싹 내리쳤다. 하여간 알아줘야 해. 그러더니 그 사람 옆자리에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그의 왼쪽 팔과 허벅지에 착 달라붙다시피 했다.
그즈음 나는 누나가 내가 알던 사람이 아닌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부모님의 이혼으로 중학생 때부터 떨어져 살긴 했으나, 그래도 드문드문 얼굴을 보며 지냈는데, 같은 병원에서 근무하게 되고는 3년 넘게 한집에서 살기까지 했는데, 그동안 한 번도 마주친 적 없는 사람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파에야 데우고 있어. 누나는 다리를 꼬고 앉아 탄산수를 한 모금 삼키더니 말했다. 자기, 가스파초 좋아하지? 그거랑 타파스. 그린샐러드랑 칠레산 와인도 준비해 뒀어.
그는 겸연쩍게 미소를 지었다. 고마워. 나를 곁눈질하고는 손에 쥐고 있던 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어쩜 그렇게 내 마음을 잘 아시는지.
파에야? 내가 의아한 얼굴로 쳐다보자 누나는 약간 성가시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왜, 뭐 문제 있어?
아니, 문제라기보다. 나는 누나가 그런 요리를 할 줄 안다는 사실을 그때 처음 알았다. 파에야가 대체 뭐야.
스페인 요리예요. 그가 나긋한 어조로 설명했다. 해산물볶음밥이라고 생각하시면 돼요. 사프란이란 향신료가 들어 있어서 특유의 감칠맛이 나는데…… 아, 그거 오징어바게트랑 먹으면 딱인데.
오징어바게트! 누나가 느닷없이 손뼉을 치더니 그의 무릎을 잡고 흔들었다. 맞아, 그때 진짜 맛있었는데. 그것도 같이 준비할 걸 그랬네.
오늘만 날인가, 뭐. 그가 팔을 길게 뻗어 누나의 어깨를 감쌌다. 다음에 같이 먹자. 그때는 소주도 한잔하고 말이야.
좋아. 누나는 일말의 거부감도 없이 그의 품에 안겨 있었다. 다음에 같이 먹자. 마냥 그러고 있었다.
나는 말없이 두 사람을 쳐다보기만 했다.
아 참. 오래지 않아 누나가 몸을 빼내며 말했다. 이러다가 다 태워먹겠네. 나 먼저 부엌에 가서 세팅하고 있을게. 너네는 천천히 와.
아니야. 그런데 그가 누나의 손목을 잡고 부드럽게 만류했다. 내가 할게. 종일 음식 준비하느라 힘들었을 텐데. 이제 좀 쉬어.
무슨 소리야. 누나는 웃으면서 그의 널찍한 가슴을 주먹으로 때렸다. 하긴 뭘 해. 넌 손님이잖아. 비행기 타고 오느라 피곤했을 텐데, 그런 사람을 부려먹을 수야 없지. 그러더니 내 쪽을 흘끗 쳐다보았다. 쟤는 이럴 때 뭐 하나 거들어 준 적이 없다니까.
뭐가. 나도 모르게 볼멘소리가 나왔다. 가끔 도와주잖아. 빨래랑 청소도 하고.
아, 네. 누나는 빈정거리듯 말끝을 늘어뜨렸다. 도와주셨죠. 제가 다 해야 마땅한 일인데 가끔 도와주셨죠.
우리끼리 하자. 그가 웃으면서 달래는 투로 말했다. 어차피 세 사람이나 할 일은 아닌 거 같고. 내가 도울게. 그래야 마음이 편하겠어.
둘은 사이좋게 부엌으로 향했다. 이윽고 개수대 바닥에 물줄기가 쏟아져 내리는 소리, 컵과 그릇이 식탁 위에 차례대로 놓이는 소리, 싱크대 서랍이 열린 다음 쾅 하고 닫히는 소리, 두 사람이 조그맣게 대화를 나누다가 키득거리는 웃음소리 따위가 들려왔다.
그동안 나는 마호가니 의자에 앉아 텔레비전만 봤다. 평소 응원하던 독일 축구팀이 아르헨티나 팀과 치르는 예선 경기를 지켜보았다. 독일 공격수가 두 차례나 페널티킥을 실축하는 바람에 팀 전체에 패배의 기운이 드리워 있었다. 수비수들은 의욕을 잃은 채 느릿느릿 뛰어다녔고, 감독은 팔짱을 끼고 앉아 아랫입술만 핥았다.
야, 밥 먹어. 그때 부엌에서 누나가 소리쳤다. 와서 밥 먹으라고.
나는 텔레비전을 끄고 의자에서 일어났다. 빌어먹을. 고개를 돌려 보니 어느새 저녁 어스름이 베란다까지 짙게 몰려와 있었다. 밖이 캄캄했다. 나는 왠지 녹초가 된 기분으로 그 아득한 너머를 건너다보았다.





저녁 식사는 예상외로 싱겁게 마무리되었다. 누나는 레이스가 달린 보랏빛 앞치마를 두른 채 식탁 위로 음식들을 가져다 날랐다. 나는 누나가 흥얼거리는 콧노래를 들으며 그의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하나같이 처음 보는 요리들이었다. 식기들도 평소에는 꺼내 놓지 않던 포트메리온이었다.
다들 배고프지?
그런데 누나가 앞치마의 리본을 풀고 그와 나 사이에 앉았을 때였다. 가스파초인지 뭔지를 한 국자 뜨려는 순간, 선반에 놓아 둔 누나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용인에 위치한 동물원에서 사고가 발생했다는 소식이었다. 수컷 기린이 저보다 덩치 큰 암놈과 짝짓기를 하던 중 무리하게 점프를 시도하다가 뒷다리 고관절이 끊어졌다고 했다.
하여간 사내새끼들이란.
누나는 혀를 끌끌 차며 레지던트들과 문자메시지를 주고받았다. 병원에서 장비를 챙긴 다음 동물원으로 응급수술을 하러 가야 한다고 했다. 누나는 자기 방에서 남색 카디건을 걸치고 나와서는 먹어, 둘이서 먹고 있어, 라고 말하며 현관 쪽으로 걸어갔다. 나는 이런 경우가 처음도 아니어서 그래, 조심히 다녀와, 라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는데 그는 갑자기 안색이 어두워지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왕좌왕하다가 현관으로 가서는 누나를 따라 신발을 신으려고 했다.
아니야, 혼자 가도 돼. 누나는 손을 휘휘 저으며 내 쪽을 슬쩍 건너다보았다. 가긴 어딜 간다고 그래. 몸무게만 1톤이 넘는 기린이야. 수술하는 데만 한나절은 걸릴 테고. 그러니까 넌 여기 있어. 좀 쉬라고. 네가 편해야 내 마음도 편하니까.
그래도. 그는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기어 들어가는 음성으로 말했다. 그럼 바래다주기만 할게.
택시 타고 가면 돼. 일순 누나는 참지 못하고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이러지 마 정말. 네가 이러면 내가 어떻게 가니. 손을 뻗어 그의 얼굴을 조심스레 어루만졌다.
애틋해 돌아가시겠군. 그사이 나는 파에야를 한 숟가락 퍼서 입에 넣었다. 샐러드와 가스파초도 잔뜩 욱여넣고 씹었다. 맛있네. 잔에 와인을 채워서는 벌컥벌컥 들이마셨다. 음식들이 하나같이 입에 맞아 성질이 났다.
누나가 현관을 나서자 그는 잠자코 부엌으로 돌아왔다. 내 맞은편 자리에 걸터앉았고, 그를 위해 차려진 음식들을 멀거니 내려다보았다. 저, 실례가 안 된다면. 어느 순간 상체를 일으키며 말했다. 먼저 일어나도 될까요?
나는 양볼이 미어지도록 음식을 입에 넣은 채 그를 건너다보았다. 식사는요?
괜찮아요. 그는 맥없이 웃어 보였다. 갑자기 피곤해서요. 샤워 좀 하려고요.
그는 거실로 나가 모퉁이에 세워 놓은 캐리어 앞에 쪼그려 앉았다. 거기서 세면도구가 든 파우치와 갈아입을 옷가지를 주섬주섬 챙겨 들었다. 나는 벽 너머에서 샤워기가 물을 세차게 쏟아내는 소리를 들으며 저녁 식사를 이어 갔다. 그러니까 외간 남자가 홀딱 벗고 샤워를 하는 동안 그를 위해 차려진 잔칫상을 혼자서 꾸역꾸역 해치워 갔다. 뭔가 어긋났고 잘못되었다는 느낌을 받았으나 그게 다 저 사람 탓이려니 생각했다. 애당초 그가 우리 집에 발을 들여놓은 것 자체가 정상적인 일이라고 볼 수 없었으니 말이다. 나는 새삼 남자가 남자를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일까 생각해 보았다. 그러니까 그게 뭐야. 거기에 무슨 미래가 있긴 한가. 결실이 있을 수 있나. 그럼 대체 무엇을 위해서 그런 짓을 하는 거지. 내 말은…… 어째서 모두가 뜯어말리는 짓을 기어코 해버리느냐는 거야. 그냥 좀 참고 살면 되잖아. 남들 몰래 하거나. 그 편이 훨씬 쉽고 안전하잖아.
이윽고 욕실 쪽에서 들려오던 물소리가 뚝 끊어졌다. 그가 희고 얇은 티셔츠에 사각팬티에 가까운 반바지 차림으로 문을 열고 나왔다. 그즈음 나는 식사를 마치고 거실에 먼저 나와 있었다. 소파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앉아 있었다.
그는 사용한 수건을 세탁 바구니에 집어넣다가 불이 꺼진 부엌에 눈길을 주었다. 아, 저기. 상체를 틀어 내게 허락을 구하듯이 물었다. 제가 설거지를 좀 할까 봐요.
놔두세요. 나는 무뚝뚝한 어조로 대꾸했다. 누나가 와서 할 거예요.
내일 아침에나 온다면서요. 그가 부엌 쪽으로 넘어질 듯 몸을 기울였다. 밤새 일하고 온 사람한테 설거지까지 맡길 수 있나요. 저대로 두면 냄새도 많이 날 텐데.
그러지 말고요.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술이나 한잔할래요? 바로 옆 찬장으로 가 와인 잔을 두 개 꺼내 들었다. 부엌에 가면 새 와인이 있을 거예요.
그는 내가 말한 대로 와인을 가져왔다. 병을 테이블에 내려놓고는 잠깐 망설이다가 마호가니 의자에 걸터앉았다. 의자는 몸집이 큰 그가 앉기에 다소 불편해 보였으나 우리는 그것에 대해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와인은 금세 동이 났다. 우리는 주거니 받거니 쉬지 않고 술만 들이켰다. 나는 다시 찬장을 뒤져 누나가 아끼는 글렌피딕과 발베니를 꺼내 들었다. 부엌에서 위스키 잔과 얼음도 새로 가져왔다. 우리는 마시고 또 마셨다. 마치 그것 외에는 함께할 수 있는 일이랄까 접점이 없는 사람들처럼 그랬다.
맞다, 좋은 게 있어요.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캐리어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연갈색 종이봉투를 가져와서는 안에 든 내용물을 보여주었다. 시큼한 향을 풍기는 흰색 가루였다. 그는 그것이 마닐라에서 유행하는 위스키 첨가제라고 했다. 술에 꽃향기를 더해 주고 숙취를 예방해 주는 효과가 있다고 말이다. 어때요? 그는 씨익 웃으며 나를 쳐다보았다. 같이할래요?
나는 그게 최음제 같은 거면 어쩌나 생각했다. 그걸 먹고 인사불성이 된 나를 그가 덮치기라도 하면 어쩌나 하는 염려가 들었다. 저 덩치 큰 빡빡이가 나를 엎드리게 만든 다음 강제로…… 그러다가 쓸데없는 걱정을 하고 있다는 자각에 헛웃음을 지었다. 좋아요. 나는 흔쾌하게 응했다. 먹고 죽자고요.
그는 반쯤 남은 위스키 병에 정체 모를 가루를 모조리 들이부었다. 병의 주둥이를 엄지로 틀어막은 다음 칵테일을 제조하듯 리드미컬하게 흔들었다. 그리고 그가 내 술잔을 가득 채워 주었을 때, 나는 내가 거의 만취한 상태임을 깨달았다. 눈앞의 잔을 들어 몇 모금을 더 삼키게 되면, 거기에 뭐가 들었든 얼마 안 가 곯아떨어지게 되리라고 확신했다.
그럼에도 나는 마셨다. 그렇게 막무가내로 마셔댄 건 처음이었다. 평소에 나는 술이 꽤 센 편이었고, 음주에 관해서는 자제력도 강한 축이었다. 주량을 넘어설 정도로 마셔서 필름이 끊기거나 주사를 부린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그 밤, 나는 어째서인지 정신을 약간 놓다시피 했다. 그가 따라 주는 족족 들이켰다.
당신 같은 사람은 처음이에요. 얼마 후 나는 실없이 웃으며 혀 꼬부라진 소리를 냈다. 솔직히 말할게요. 나는 동성애자를 처음 봐요. 이렇게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눠 본 적도 처음인 것 같고요. 여태껏 살면서요. 아, 물론 제 주변에 있긴 했겠죠. 그렇지만 당신처럼 여봐란 듯이 구는 사람은…… 정말이지 처음이에요.
한 번도 없었다고요? 그 역시 취했는지 벌게진 얼굴로 웃었다. 그럴 리가요. 곰곰이 생각해 보세요. 아마 수도 없이 마주쳤을 거예요. 나 같은 사람 말이에요. 지금도 주변에 수두룩할 거고요.
그래서 나는 생각해 봤다. 병원에서 근무하던 시기뿐 아니라 고등학교, 중학교 시절까지 기억을 되짚었다. 어느 때든 호모같이 구는 애들이 꼭 한둘은 있었다. 걔네들 이름이 뭐였더라. 우리는 그 애들을 계집애, 창녀, 걸레 같은 별명으로 부르곤 했다. 이유 없이 따귀를 때리거나 책가방을 뺏어 창밖으로 던져버린 적도 있었다.
그 시절 나는 내가 아닌 누군가가 되어 보는 일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나는 나였고, 거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아무 문제도 없어야 한다는 것, 그게 중요했다. 나는 굳이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되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실은 다른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믿었다.
그것참. 그가 나를 바라보며 짧게 숨을 내쉬었다. 재밌는 분이네요.
나는 그를 향해 턱을 치켜들었다. 뭐가요.
그냥요. 그는 슬며시 미소 지으며 팔걸이에 몸을 기댔다. 세상에는 참 여러 종류의 불행이 있는 것 같아요. 나 같은 불행, 당신 같은 불행. 우리는 불행으로만 하나가 될 수 있는 것 같네요.
나는 전혀 불행하지 않은데요.
그러시구나. 그는 코를 찡긋해 보이더니 반쯤 남은 위스키를 한입에 털어 넣었다. 손에 쥔 잔을 어루만지다가 느릿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얼마 전에 사직서를 내셨다고 들었어요. 내가 말없이 쳐다보자 그는 어깨만 살짝 으쓱해 보였다. 8년 넘게 근무한 직장을 이렇다 할 이유도 없이 때려치우셨다고요.
문득 그가 나에 관해 어디까지 알고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누나가 내게 그에 관한 이야기를 시시콜콜 떠들어댄 것처럼, 그에게 내 이야기를 얼마나 떠벌렸을까 하는 의구심에 가슴 한편이 뻐근해졌다. 누나는 내 비밀을 속속들이 아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한집에 같이 살게 되면서 누나는 내 비밀을 캐내는 걸 유난히 즐겼다. 작은 비밀이라도 털어놓지 않으면 우리 사이가 그것밖에 안 되냐는 둥 피 섞인 남매라고 해봤자 역시 남보다 못하다는 둥 온갖 트집을 잡으며 서운해 했다. 그래서 나는 비밀을 만들어낼 수밖에 없었다. 그중에는 장교로 군 복무하던 시절에 병사들이 내 거길 빨아준 이야기도 있었다. 누나가 한때 레즈비언이었다는 사연을 털어놓은 직후였을 것이다. 당시 나는 그에 상응할 만한 일탈이랄까 굴곡점이 내 삶에 거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런 이야기를 꾸며냈다. 사실 그건 완전히 거짓말도 아니었다.
그걸 이 새끼가 알고 있으면 어쩌지.
불현듯 그런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이 새끼가 내 걸 빨아주겠다고 달려들면 어쩌지. 다 안다고. 이런 플레이를 꽤나 즐긴다는 걸 안다면서 말이야.
종일 사람들 피부만 들여다보셨다고요. 그가 들고 있던 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물었다. 좀 궁금하더라고요. 매일 낯선 사람들 피부만 들여다보고 있으면 무슨 생각이 드나요.
무슨 생각은요. 나는 퉁명스러운 어조로 답했다. 아무 생각도 안 들어요. 피부는 그냥 피부죠. 껍데기예요.
아. 그는 테이블에 고인 물방울을 검지로 슥 문질러 닦았다. 그래서 때려치우셨구나.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캐리어 쪽으로 향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고꾸라질 것처럼 휘청거리면서도 용케 넘어지지 않았다. 그는 아까보다 오래 가방을 뒤적여 뭔가를 찾아냈다. 돌아와서는 마호가니 의자가 아닌 소파에, 바로 내 옆자리에 걸터앉았다. 순간 그의 허벅지가 내 다리에 닿았다.
자. 그는 손에 쥔 것을 자랑스레 내밀었다. 이것 좀 보세요.
뭔데요. 나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대꾸했다. 그는 비실비실 웃으면서 한번 보세요, 신기할 거예요, 라고 말했다. 그것은 손바닥만 한 크기의 플라스틱 공이었다. 안에는 점성이 높고 투명한 액체가 가득 들어차 있었다. 그는 그걸 조심스레 내 손에 넘겨주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플라스틱 공 한가운데에는 아주 조그마한 진홍빛 너울 같은 것이 일렁이고 있었다. 안에 뭐가 있네요. 이게 뭐예요?
코이 잉어예요. 그가 말했다.
잉어라고요?
모르셨구나. 그는 이를 드러내며 환히 웃었다. 코이는 자신이 처한 상황과 환경에 맞춰 성장하는 물고기인데요. 가정용 어항에 넣어 두면 5센티미터 남짓 자라고, 큰 수족관에 옮겨 놓으면 행동반경이 넓어진 만큼 10센티미터에서 30센티미터까지 자라나요. 강에 풀어주면 1미터가 훌쩍 넘게 커지고요. 그는 코 밑을 문지르다가 덧붙였다. 그래서 태어나자마자 이렇게 좁은 공간에 가둬 놓으면 티끌만 한 크기로 평생을 살게 된답니다.
나는 플라스틱 공을 다시금 들여다보았다. 붉은 비늘 같은 형체가 미세하게 꿈틀거리는 듯했다. 이게 살아 있는 잉어라고요?
네.
얼마 안 가 그는 웃음을 터뜨렸다. 아, 농담이에요, 농담. 커다란 손바닥으로 내 등을 잇달아 내리치고는 어깨에 팔을 둘렀다. 실은 아무것도 아니에요. 이건 그냥…… 리몬이라는 항구도시에서 사온 장난감인데요. 아무래도 불량품 같아요. 그의 숨결이 내 귓등을 간질였다. 안에 든 이물질이 뭔지는 저도 잘 모르겠어요.
그때 나는 가만히 있었다. 그가 나를 거의 안고 있다시피 했음에도 그랬다. 그의 겨드랑이가 내 오른쪽 어깨에 닿아 있었고, 그곳을 통해 축축한 열기가 전해져 왔음에도 나는 그를 뿌리치지 않았다. 이제 와서 다시 생각해 봐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오히려 나는 어떤 충동을 억눌러야만 했다.
짧은 농담을 끝으로 그는 입을 꾹 다물었다. 내게서 손을 거두고 술잔을 몇 차례 비우더니 흐릿한 눈빛으로 테이블의 모서리를 내려다보기만 했다. 마치 뭔가를 견디는 사람처럼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기도 했다. 그러다가 한순간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흐느끼듯 울음소리를 토해 냈다.
나는 당황하여 그를 쳐다보았다. 취했군. 그의 어깨를 다독여 주려다가 가까스로 손을 거두었다. 취해서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아. 원래도 제정신은 아니었던 것 같지만. 나는 머뭇거리다가 공연히 내 잔을 움켜쥐었고, 절반 넘게 남아 있던 술을 들이켰다. 순간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한 충격이 느껴졌다. 취기가 한꺼번에 몰려오면서 눈앞이 어질했다. 손끝에 저릿저릿한 감각이 일어날 정도였다. 그때 나는 테이블에 올려 둔 원형의 플라스틱을 내려다보았다. 무슨 생각으로 그랬는지 모르겠다. 희미해져 가는 의식의 꼬리를 붙든 채 나는 그 공을 들여다보기만 했다. 정말이지 그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의 설명을 들은 뒤여서인지 뭔지 더는 아무런 움직임도 느껴지지 않았고, 특별한 빛깔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건 그저 이물질에 불과했다.
이후에 기억나는 장면은 없다. 나는 그가 흐느끼는 음성을 들으며 서서히 정신을 잃어 갔다. 그 지경이 되도록 취한 적은 난생처음이었고 다시는 없을 것 같다. 이제 내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건 그런 것뿐이다. 내 남은 생에 더는 어떠한 변화도 일어나지 않으리란 것 말이다.





다음날 누나는 정오를 훌쩍 넘겨서야 돌아왔다. 나는 그즈음 내 방 침대에서 깨어났고, 어리둥절한 상태로 거실에 나와 앉아 있었다. 살갗에 닿는 볕이 따스해 자꾸만 졸음이 쏟아졌다. 집 안을 둘러보니 그 사람은 이미 떠나고 없었다. 테이블에 어질러 놓았던 술병이며 개수대에 쌓아 둔 그릇들까지 말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대단하네. 현관에 들어선 누나는 내 몰골을 보자마자 한숨을 쉬었다. 누가 보면 네가 집도 절도 없는 떠돌이인 줄 알겠다.
그리고 시간은 여느 때처럼 흘러갔다. 그가 떠나고 오래지 않아 나는 새로이 구직 활동을 시작했다. 이전과 비슷한 조건의 일자리를 얻었고 똑같은 짓을 반복했다. 종일 낯선 사람들 피부만 들여다보는 일, 껍데기를 하얗고 매끄럽게 만들어주는 일 말이다. 트러블을 압출하고 각질을 벗겨낸 다음 가능한 하얗게 — 거의 창백하게 — 탈색시키는 일. 이른바 미백이라 일컫는 피부 대청소. 그래, 나는 의사라기보다 청소부에 가까웠다. 모두가 내게 그것을 원했으므로. 한창 바쁠 때에는 아침에 눈을 뜨고 잠자리에 들기 직전까지 내 앞에 놓인 껍데기들을 죄다 쓸고 닦아야 했다. 눈에 보이지도 않을 만큼 자디잔 불순물까지 레이저로 소각해 치워야 했다. 그런 식으로 몇 해를 흘려보내고 나니, 어느 날 누나가 불룩해진 배를 들이밀며 말했다. 이제는 정말 집을 나가 줬으면 한다고, 자신이 키워야 할 애는 한 명으로 족하다고 말이다.
이제 나는 한 달에 한 번, 마지막 주 일요일에만 누나의 집으로 향한다. 회색 볼보를 몰고 한강을 건너 손님의 자격으로 그곳을 방문한다. 한때 내가 살았던 집의 호수가 적힌 주차 구역에 차를 세운 다음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 초인종을 누른다. 그러면 누나와 조카 녀석이 현관까지 나와 나를 맞이한다. 우리는 식탁에 빙 둘러앉아 저녁 식사를 함께한다. 근황을 늘어놓고 가끔은 준비한 선물도 주고받는다. 찻잔이 식어 갈 즈음 포옹을 나누고 웃으면서 헤어진다.
그뿐.
하지만 어린 조카를 만나고 돌아오는 밤이면, 그러니까 누나와 나의 피가 절반쯤 섞였을, 병원에 익명으로 생식세포를 팔아넘긴 남자의 피가 절반쯤 섞였을 그 녀석을 만나고 돌아오는 밤이면, 나는 맹렬한 속도로 달리는 차 안에서, 달빛을 머금은 채 반짝거리는 강 한복판에서, 그 아이가 그 사람처럼 자라나면 어쩌지, 하고 생각한다. 그 아이가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존재로 성장하면 어쩌지, 그러면 나는 그 아이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을까, 내가 그 아이를 사랑할 수 있을까, 누군가를 제대로 사랑할 수 없다면 그 잘못은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닐까, 뭐 그런 생각을 말이다.
그 밤, 그 사람과 술잔을 기울이며 나누었던 대화도 떠올리게 된다. 그의 굵고 나직한 음성, 반복적인 고갯짓, 팔뚝에 어지러이 새겨진 꽃과 이파리들, 뼈마디가 도드라진 손, 뜨거운 체온이 담긴 허벅지, 그리고 그가 내게 보여준 원형의 플라스틱까지. 그 안에서 조그마한 불씨처럼 일렁이던 잉어의 몸짓은 지금도 눈앞에 선하다. 사실 그건 잉어가 아니었음에도, 어째서인지 내게는 잉어로 남아 있고, 그렇게 새겨져 버린 듯하고, 그건 돌이킬 수 없는 듯하다. 어쩔 수 없는 문제라는 게 늘 발생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 밤이면 집에 돌아와 혼자 샤워를 하면서, 물줄기를 따라 조용히 수음을 저지르면서,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은 뒤 침대에 기어들면서, 머리맡의 스탠드를 끄고 베개에 머리를 뉘면서, 마치 내가 누군가의 실수로 만들어진 불량품 같다는 생각을 한다.
















박선우

작가소개 / 박선우

2018년 자음과모음 신인문학상으로 등단.


《문장웹진 2019년 0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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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5-01
미시적 동물

미시적 동물 서이제 아무리 비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이렇게까지 비가 내리는 건, 원치 않았을 것이다. 지난 새벽부터 내린 폭우는 온 세상을 뒤집어 놓았다. 하천은 범람했고, 교통은 순식간에 마비되었다. 지하철역이 폐쇄된 것은 물론이고 버스 운행마저 중단되었다. 지대가 낮은 지역에서는 자동차들이 배처럼 떠다녔다. 뉴스에서는 하루 종일 각 지역 홍수 피해 현황과 구조 소식을 보도했다. 강풍에 간판이 날아가고 백 년 된 나무마저 쓰러졌다고 했다. 곧이어 집이 침수되어 대피한 사람들의 인터뷰가 나왔다. 돼지나 오리와 같은 농가의 동물들이 물살에 휩쓸려 가는 모습이 나왔다. 누군가 휴대폰으로 촬영한 산사태 영상이 나왔다. 흙더미가 무너져 내리며 순식간에 도로를 덮치는 장면이었다. 지금쯤 너는 어떻게 되었을까. 무사히 살아남았을까. 혹시라도 흙더미 속에 완전히 파묻혀 버린 건 아닐까. 아마도 비가 그치기 전까지, 아니, 비에 젖은 땅이 다시 딱딱하게 굳어지기 전까지는 너의 생사를 직접 확인하기는 힘들 것이다. 슬프게도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집안에 틀어박혀 실시간 뉴스를 들여다보는 일뿐이었다. 비가 그치기만을 바라면서, 망가진 일상이 회복되기를 바라면서. 저녁에는 설상가상으로 전기마저 끊어졌다. 창문을 열어보니 온 세상이 어두웠다. 거리는 이미 시커먼 흙탕물에 잠긴 상태였고, 불 꺼진 신호등과 가로수만 물 위로 불쑥 솟아 있었다. 어디에서도 사람을 찾아볼 수 없었다. 아마 미리 대피했거나 꼼짝할 수 없이 집안에 갇혀 있겠지. 나 또한 물이 빠지기 전까지는 집 밖으로 한 발짝도 나갈 수 없었다. 그날 밤 무서운 꿈을 꾸었다. 집안까지 물이 들어왔던 것이다. 물은 점점 불어 침대 높이만큼 차올랐고, 나는 침대에 누운 채 흙탕물 아래로 가라앉았다. 얼른 몸을 일으키려고 했지만, 생각처럼 되지 않았다. 일어나려고 애를 쓸수록, 내 몸은 물에 젖은 스펀지마냥 점점 더 무거워지기만 했다. 어마어마한 물의 무게가 나를 짓누르는 느낌이었다. 잠에서 깨어난 후에도 그 느낌은 한동안 지속되었다. 거대한 힘에 짓눌려 꼼짝할 수 없었던 것이다. 손가락 하나도 까딱할 수 없을 정도였다. 폭우로 기압이 낮아진 탓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원래 비가 오면 항상 몸이 피로했으니까. 한편 창밖에서는 빗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 엄마는 내게 화를 낼 때마다 아빠를 들먹이곤 했다. 너는 어떻게 네 아빠랑 하는 짓이 똑같니. 내가 아빠를 연상케 하는 게 불쾌하다는 듯이, 내게 눈을 흘기면서. 그러나 정작 아빠는 내가 엄마를 쏙 빼닮았다고 했다. 그래서 꼴 보기 싫다는 건지,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내가 생각하기에 나는 그 둘을 모두 닮아 있었다. 외모나 성격, 심지어 건강 상태까지.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도 않고, 딱 반반씩. 어디에선가 듣기로 자식은 부모의 얼굴을 닮는 게 아니라, 장기를 닮는 거라고 했다. 장기가 닮아 얼굴이 닮는 거라고. 아빠는 간이 안 좋았고, 엄마는 위와 갑상선이 약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불행한 사실은 둘 다

  • 관리자
  • 2025-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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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건

  • 길리

    어쩜 이렇게 잘 쓰시나요. 읽고나서 제목의 의미를 한번더 생각했어요

    • 2019-06-01 08:41:09
    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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