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내가 나일 그때
- 작성일 2019-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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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내게 내가 나일 그때
최은미
창용이 오빠한테 전화가 왔다. 추석 연휴를 앞두고서였다.
모르는 번호로 걸려온 전화에서 창용이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 유정은 처음엔 어리둥절했고 몇 초 뒤엔 깜짝 놀랐다. 하던 일을 멈추고 유정은 휴대폰을 두 손으로 잡았다.
"창용이 오빠? 그 창용이 오빠?"
그러고선 막상 별다른 말을 하지 못했다. 잘 지냈냐고 묻기에는 꽤 오랜 시간이 지나 있었던 것이다. 한 삼십 년? 어떻게 살았냐고 묻는 게 더 어울릴 것 같았지만 그렇게 묻기에는 어떻게 살고 있는지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었다.
창용이 오빠와 통화를 끝내고 나서 유정은 아이의 방으로 갔다. "소은아, 방금" 책상에 휴대폰을 괴어 놓고 틱톡 영상을 찍고 있던 소은이 휴대폰을 보면서 응? 했다. "방금, 창용이 오빠한테 전화가 왔어." 그 말에 소은이 헐, 하며 유정한테로 고개를 돌렸다. "창용이 오빠? 그 창용이 오빠?" 유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창용이 오빠가 누구인가. 아이가 어렸을 때 유정은 자신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시시때때로 짜내곤 했다. 소은은 전래동화나 유정이 급조한 이야기에는 별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 자신의 엄마가 직접 등장하는 유정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좋아했다. 엄마가 어렸을 때 혼난 이야기, 어렸을 때 싸운 이야기, 어렸을 때 운 이야기, 어렸을 때 삐친 이야기, 어렸을 때 절교한 이야기. 거기엔 유정의 초등학교 친구들과 선생님, 동네 사람들과 가족들이 번갈아가며 등장했다.
엄마, 수정이 머리카락에 껌 붙은 얘기 해줘. 엄마, 유태가 코피 터진 얘기 해줘. 엄마, 창용이 오빠가 자전거 태워 준 얘기 해줘. 네다섯 살 무렵의 소은은 수정이와 유태와 창용이가 자기 친구라도 되는 것처럼 그렇게 부르며 이야기를 졸랐다.
그 이야기들 속에서 창용이 오빠는 하나의 에피소드로만 등장했다. 유정이 4학년인가 5학년일 때, 아마도 4학년에서 5학년에 걸친 때, 언제까지인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할머니가 돌아가신 4학년 여름방학 이후부터인 건 기억나는 그 무렵, 유정은 학교가 끝나면 혼자서 느지막이 집에 걸어가곤 했다. 그러면 창용이 오빠가 자전거를 타고 가다 "유정아" 하고 불렀다. 한 학년 위이던 창용이 오빠는 많지 않은 전교생 중에서 유정과 가장 가까운 이웃에 살았고, 그렇게 그 무렵 유정은 가끔씩 창용이 오빠의 자전거를 얻어 타고 집에 갔다.
어느 날 유정이 반 친구들, 그러니까 수정이 미진이 혜미 이런 애들이랑 교문 앞에 모여 있을 때였다. 자전거를 끌고 지나가던 창용이 오빠가 언제나처럼 유정을 보더니 말했다. "유정아, 타고 갈래?" 친구들과 서 있던 유정은 순간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고, 창용이 오빠를 향해 이렇게 쏘아붙였다. "내가 오빠 자전거를 왜 타?"
이 대목이 되면 소은은 미간을 약간 찡그린 채로 안타까우면서도 신나는 표정이 되어 유정한테 집중했다. 유정은 최선을 다해 그 시절로 돌아가선 내처 말했다. "내가 뭐 그동안 고마워서 탔는 줄 알아?" "그깟 자전거!" "흥!" 그러면 소은은 외쳤다. "엄마 진짜 못됐다!" "창용이 오빠한테 왜 그랬어?" "나중에 만나면 미안하다고 해." 그러면 유정은 알았어, 알았어, 하며 다섯 살 소은의 흥분을 가라앉히곤 했다. 그때만 해도 어떻게 알았겠는가. 창용이 오빠와 정말로 연락이 닿을 줄은.
"유태도 잘 있지?"
창용이 오빠가 유태 안부를 물었다.
"유태야 뭐, 잘살죠."
이런저런 소식을 묻고 전하면서 창용이 오빠는 한 달 전에 아버지 장례를 치렀단 얘기를 했다. 창용이 오빠의 아버지. 유정은 키가 크고 마르고 얼굴이 붉던 그 아저씨의 모습이 기억났다. 창용이 오빠의 아버지는 동네의 유명한 주정뱅이였다. 술에 취해 아무데서나 잠들었고 술에 취해 다리에서 떨어져 팔이 부러졌으며 술에 찌들어 간이 계속 쪼그라들었다. 유정은 그 아저씨가 한 달 전까지 계속 살아 있었다는 게 더 놀라웠다.
"나 아직 미산 산다, 유정아. 유태랑 한번 놀러와."
창용이 오빠는 자신이 "그냥 노가다"를 해서 먹고살고 있으며 아이들이 다섯 살, 일곱 살이라는 얘기를 했다. 와이프에 대해서도 짤막하게 한 마디를 했다. 전화를 끊기 전에 유태의 전화번호를 물었고, 또 한 번 말했다. 놀러 오라고.
*
언제 한번 갈게요, 라고 말하면서도 유정은 정말로 창용이 오빠를 만나러 미산에 가게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통화를 하고 두 달도 지나지 않아서 유태의 차를 타고 서울양양고속도로를 달리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 추석이 지나고 9월도 마저 지나고 10월도 막 지나서, 유정은 미산에 가고 있었다. 토요일이었고 11월의 두 번째 날이었다. 내설악 단풍객들이 미산으로 몰려드는 시기였다. 차가 막힐 거라며 유태는 아침 일찍부터 전화로 유정을 깨웠다.
조수석에 앉아 유태가 내비게이션에 도착지를 입력하는 걸 볼 때부터 유정은 뭔가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게 뭔지 딱히 잡히지 않아서 유정은 구리 톨게이트를 빠져나가기 전부터 하나씩 꼬투리를 잡고 있었다.
"야, 유태야."
"어."
"너 내가 사준 차량용 공기청정기 아직 설치 안 했니? 왜 안 했니? 내가 그거 한 시간이나 검색해서 고른 거야. 너랑, 올케랑, 내 조카의 건강을 위해서."
유정은 글로브 박스를 열어 이것저것 뒤적이다 탁, 소리가 나게 닫고는 운전 중인 유태를 쳐다봤다.
"야, 유태야."
"어, 왜."
"넌 왜 맨날 그렇게 구부정하게 앉니? 조셉 필라테스 선생님이 그러셨어. 배는 근육으로 된 복대다. 배에 힘 좀 주고 앉아."
요금소가 가까워졌는지 양옆으로 차들이 늘어났다. 유정은 의자에 몸을 파묻고는 눈앞 대시보드에 앉아 있는 주먹만 한 아이언맨을 쳐다봤다.
"쟤한테서 이상한 냄새 나."
하이패스 차선으로 들어서며 유태가 피식 웃었다.
"누나, 그거 방향제야."
유정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다시 등을 기댔다.
"그러니까 방향제는 설치하면서 내가 사준 공기청정기는 안 달았다는 거네. 유태야, 지금 향기가 중요하니? 공기 질이 중요하지?"
요금소를 나오자 흩어졌던 차들이 다시 몇 줄로 좁혀들었고 유태는 속도를 높였다. 소소한 시비가 오갔지만 차 안의 기류는 나쁘지 않았다. 주말에 남편이나 아내나 아이 없이 어딘가를 가고 있다는 자체로 유정도 유태도 일단 휴가에 가까운 기분이었다. 게다가 그 옛날 같이 놀던 고향 오빠와 고향 형을 삼십 년 만에 만나는 날이 아닌가. 하필 이때에 미산에 가는 게 내키지 않았지만 어쩌면 내키지 않아서 유정은 충동적으로 가겠다고 했다.
"애들 용돈은 오만 원짜리로 줘야겠지?"
유태는 창용이 오빠의 가족들도 같이 만나는 게 신경이 쓰이는 모양이었다.
"창용이 형 와이프 말이야, 형수라고 부르면 되겠지? 나보단 당연히 어리겠지?"
"야, 유태야."
"어."
"시끄러워."
유정은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려 괴고 창밖을 보았다. 차가 경춘북로로 들어서고부턴 바로 눈앞으로 키 큰 나무들이 지나갔다. 가을 물이 한창이었다. 하늘은 구름 없이 맑았고 미세미세 앱도 파란색으로 최상이었다. 유정은 국도를 달리는 동안만이라도 가을 풍경에 넋을 놓아 보고 싶었지만 초반의 꼬투리에 복수라도 하듯 유태가 잔소리를 시작했다.
"누나, 오늘 매형도 없고 소은이도 없어서 노파심에서 하는 얘긴데, 오늘만은 말이야, 다른 건 몰라도 지읒자로 시작하는 욕은 좀 참아 줘."
"뭐, 좆?"
유정은 커피를 들어 한 모금 마셨다.
"알았어. 삼십 년 만에 고향 오빠 만나는데 좆은 좀 그렇지. 좆 대신 족으로 할게."
"그거나, 그거나."
"야, 유태야, 족이랑 좆이 같니?"
"지난번 추석 때도 그래. 매형이랑 소은이랑 다른 식구들 있을 땐 아무 소리 안 하다가 집에 나만 남으니까 아주 막말을. 누나는 만만한 게 나밖에 없지."
"유태야."
유정은 커피를 홀더에 내려놓았다.
"아니다."
무슨 말인가를 하려다가 유정은 창밖을 보았고, 잠시 뒤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마석 터널을 지나는가 싶었는데 휴대폰에서 고개를 들어 보니 어느새 산은 멀리 물러나고 단조로운 도로가 직선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서울양양고속도로로 들어선 것 같았다. 한참을 말없이 운전만 하던 유태가 갑자기 기지개를 켜듯이 아아- 하는 소리를 냈다.
"아아- 삼십대가 두 달밖에 안 남았다니."
그러더니 들으라는 듯 숨을 크게 내뿜었다. 유정은 유태를 힐끗 쳐다보곤 고개를 돌렸다. 어쩌라는 건지. 유정은 하던 검색을 계속했다. 유정의 오늘 관심사는 내린천휴게소였다. 산천을 내려다보며 공중에 떠 있다는 휴게소였다. 양방향 통합형에 4층짜리 통유리 건물로 되어 있다는 휴게소. 실내외 어디에서도 다리와 도로의 불빛을 조망할 수 있다는 휴게소. 하지만 운전자들은 그닥 들어가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휴게소. 바로 미산 그 동네의 허공에 세워진 휴게소였다.
2년 전 서울양양고속도로가 동홍천에서 양양 구간을 추가 개통한 뒤로 유정은 미산에 가보지 않았다. 그 구간은 유정이 열두 살 때까지 살았던 동네 위를 지났고, 동네가 내려다보이는 곳에 터널과 다리와 상공형 휴게소를 만들어 놓았다. 유정의 오늘 목표는 동네로 내려가지 않고 내린천휴게소에만 머물다 오는 것이었다. 인제 인터체인지에서 곧장 휴게소로 들어가 거기서 창용이 오빠의 가족들을 만나고 다시 인터체인지로 빠져나와 서쪽 도로를 타고 돌아오는 것. 창용이 오빠는 집으로 오라고도 했고 이장님네 식당에 가자고도 했지만 피차 부담이었다. 내린천휴게소에는 실내놀이터도 있고 널찍한 푸드코트에 전망 카페는 물론 인제의 특산 맛집들도 있었다.
"근데 술을 안 파네. 황태집도 있고 두부집도 있는데 휴게소라서 술을 안 팔아."
유정이 검색창을 닫으며 말했다.
"이래저래 잘 됐네. 내 생각에도 휴게소가 딱이야. 매형도 없고 소은이도 없는데 누나가 술까지 먹으면 내가 그 뒷감당을 어떻게 해."
"야, 유태야, 니가 나를 감당해 본 적이 있기나 하니?"
"서울서 같이 자취할 때 기억 안 나나 보네. 누나가 술 먹고 툭하면 그 노래 있잖아, 왁스의 '화장을 고치고', 내가 그때 생각만 하면 진짜."
그 말에 유정은 허리를 굽히며 흐흐흐흐, 웃었다.
"야, 유태야, 내가 그 노래 끊은 지가 언젠데. 넌 나를 너무 몰라."
유태가 피식 소리를 냈다.
"내가 누나를 왜 몰라. 누나가 스트레스 받으면 뭐부터 찾는지 내가 제일 잘 알걸? 나는 누나가 어디에 뭘 숨겨 놨는지 다 알아."
유정은 이번엔 좀 길게 흐흐흐흐흐흐, 웃고는 정색을 하고 유태를 쳐다봤다.
"야, 유태야."
"어."
"아는 척하지 마. 족같으니까."
유태가 입을 꾹 다물더니 1차로로 차선을 바꿨다.
"야, 유태야."
"아, 왜."
"말 나온 김에 '화장을 고치고'나 한번 듣자."
"싫어. 그 노래 싫어. 전주만 들어도 싫어!"
유태가 고개를 흔들어댔다. 확실히 평소보다 오버스러운 반응이었다. 사실 유태는 출발 전부터 어딘지 모르게 들떠 있었다. 어쩌면 추석 때부터 이미 그랬다. 가족 단톡방에 방정맞은 이모티콘을 올려대며 기분을 감추지 못했다. 유태는 오늘 창용이 오빠를 만나기 전에 볼일이 하나 있었다. 땅을 계약하기로 한 것이다. 그렇다. 유태는 고향에 땅을 사고 있었다. 고속도로 건설 계획이 발표될 즈음에, 착공이 시작되기 전에, 개통 직전에, 유태는 미산을 자주 오갔다. 양양에 살면서 유태에게 토지 매매 정보를 알려주는 것은 막냇삼촌인 재상이 삼촌이었다.
"멀미 나?"
터널이 자주 나오기 시작하자 유태가 물었다. 도로 옆의 산세가 험해지는 걸 보니 홍천쯤으로 들어선 것 같았다.
"유태야. 이참에 다 말해 봐. 누나 어떤 게 또 맘에 안 드는지. 다 말해, 다."
유태는 이런 말에 잘 걸려들었다.
"누나는 같은 말을 두 번씩 할 때가 있어. 그것도 바로 이어서."
"내가 그런 최악의 버릇이 있을 리가 없어."
"소은이한테 한번 물어봐."
터널 안에서 깜빡이도 없이 차 하나가 시야를 치고 들어왔다. 눈앞으로 그 차가 계속 보이자 유정은 차를 물고 늘어지기 시작했다. 저건 족이 하는 운전이야. 차체만 봐도 족의 기운이 느껴져. 저거 봐 저거. 미친 거 아니야? 내장이 한번 찢어져 봐야 정신을 차리지.
유태가 한숨을 쉬더니 말했다.
"누나는 누나가 공격적인 건 알고 있지?"
유정은 대꾸를 하지 않았다.
유태가 이어 말했다.
"난 소은이가 걱정될 때가 있어."
그 말에 차 안의 기류는 갑자기 가라앉았다. 유정은 유태가 그 말은 하지 않는 게 좋았겠다고 생각했다. 이 대목에서 소은이 얘긴 하지 않는 게 좋았다. 유정은 잘 잡고 있던 근육들이 흔들리는 느낌이 들었고 팔을 뻗어 차 창문 위의 손잡이를 잡았다. 길고 짧은 터널들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터널은 계속 나왔고, 산도 계속 나왔고, 끝났는가 싶으면 다음 터널 입구가 또 나타났다. 터널을 열 개는 넘게 빠져나왔을 때 유정은 못 참고 소리를 질렀다.
"아이언맨 저 새끼 좀 어떻게 해봐. 눈에서 계속 불 나오잖아. 터널 지날 때마다 계속 나오잖아!"
유정은 정말로 멀미가 올라올 것 같았다. 유태는 LED 라이트가 어쩌니 직구가 어쩌니 하더니 그게 보배드림 일부 회원들한테만 돌아간 사은품이라고 했다.
"윽. 유태야."
유정은 긴급하게 유태를 부르며 입을 틀어막았다.
"나 니 차에 토해도 돼?"
유태가 사색이 되더니 재빨리 도착 시간을 확인하는 게 보였다. 유정은 입을 막았던 손을 풀고는 유태를 쳐다봤다. 유태한테는 이런 협박이 먹혔다. 가증스런 새끼. 내린천휴게소가 2킬로 남았다는 표지판이 지나갔다. 곧 차에서 내릴 수 있다는 것만 생각하며 유정은 속을 눌렀다. 창용이 오빠네와의 약속 시간은 한 시간이 좀 넘게 남아 있었다. 유태가 슬쩍 눈치를 보더니 땅 계약하는데 같이 가겠냐고 물었다. 유정은 대꾸 없이 유태를 쳐다봤다. 그걸 물어봐야 아느냐는 표정으로.
*
코끝에 와 닿는 공기를 가늠하며 유정은 이맘때라고 생각했다.
유정은 이맘때의 공기를 알고 있었다. 갑자기 아침이 확 추워지는 때였다. 자고 일어났는데 잠들기 전하고 기온이 너무도 다를 수 있는 때. 바람이 반나절만 불었는데도 나뭇잎이 다 떨어져 내릴 수 있는 때. 눈앞의 산과 주차장을 둘러싼 나무들을 보면서 유정은 가깝고 먼 이맘때들을 떠올렸다.
일 년 전 이맘때, 유정은 동네의 익숙한 길을 지나다니면서 길지 않은 산문 한 편을 썼다. 청탁서가 왔던 9월과 글을 쓰던 10월, 11월, 송고를 하고, 교정 파일을 주고받고, 글이 실린 겨울호 문예지가 우편함에 도착하던 초가을부터 초겨울까지의 시간들이었다. 두세 달의 시간 동안 유정은 소은에게 독감 주사를 맞히고, 에어코튼 레깅스를 주문하고, 글을 쓰고, 두부를 구워먹고, 핑크뮬리를 보러 가고, 글을 쓰고, 같은 반 남자 아이가 소은에게 '못생겨타 ㅅㅂ'라고 보낸 문자를 보고, 담임선생님과 상담을 하고, 글을 쓰고, 문학상 수상 축하 메시지들을 받고, 감사의 답을 하고, 글을 썼다.
유정은 청탁 취지문에 있던 문장들을 아직 기억하고 있었다. '창작자로서 당신이 부딪히는 표현할 수 없는 것은 무엇입니까.' '표현할 수 없는 것이 당신의 작업을 어떤 방향으로 굴절시킵니까.' 유정은 자신을 가장 부딪히게 하고 굴절시켰던 것에 대해 쓰고 싶었고, 그래서 썼지만, 일 년이 지난 지금은 그 글을 쓴 것을 후회하고 있었다. 그리고 다시 미산에 와 있었다.
유정은 유태가 내려주고 간 양양 방면 뜰에 서 있다 휴게소 1층으로 들어갔다. 유태와 창용이 오빠의 가족들이 도착하고 나면 집에 돌아가기 전까진 혼자 있을 시간이 없을 거였다. 유정은 1층 카페에서 커피를 한 잔 사고는 아직 할로윈 장식이 남아 있는 휴게소 여기저기를 둘러봤다. 휴게소라기보다는 쇼핑몰 한쪽에 와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유정은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4층까지 올라갔다. 서울 방면 주차장과 이어진 출입구로 나가니 꽤 크게 조성돼 있는 공원이 나왔다. 눈앞으로 미산의 산이 보였고, 터널에서 바로 뻗어 나온 내린천교가 1층에서보다 가까운 눈높이로 건너다보였다.
유정은 빈 벤치를 찾아 앉고는 휴대폰을 들고 메시지를 적었다.
'선생님, 미산에 잘 도착했습니다.'
등산복을 입은 사람들이 유정의 옆으로 무리지어 지나갔다. 유정은 몇 마디를 더 했다. 선생님, 내린천휴게소 화장실이 너무 좋아요. 입구에는 화장실 약도가 그려진 전광판이 있고요, 안에는 무선 감지 센서가 있어요. 차문이 여닫히는 소리들이 들렸다. 선생님, 여기에 있으니 꼭 미산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런데 눈앞에 있는 저 산을 보니, 미산이 맞는 것도 같아요.
벤치형 그네 쪽에서 아이 둘이 뛰어다니는 게 보였다. 작은 아이가 큰아이를 쫓아가다 주저앉아서는 "마햬줘. 마햬줘." 하며 떼를 썼다. 리을 발음이 안 되는 걸 보니 네다섯 살 정도인 것 같았다. 아이들을 쳐다보면서 유정은 몇 마디를 더 했다. 소은이도 저맘때 저랬습니다, 선생님. 오로라를 오요야라고 하고 사랑해를 사양해라고 하고.
"무슨 선생님?"
유태 목소리였다.
"혹시 조셉 선생님?"
떼를 쓰던 작은 아이가 결국 울음을 터뜨리자 엄마로 보이는 여자가 그쪽으로 걸어갔다. 아이를 훌쩍 들어 올려 안으며 여자가 이쪽을 보았다. 유태와 함께 있는 유정을 보더니 여자는 눈이 마주쳐서 어쩔 수 없다는 듯 어색하게 웃었다. 이어서 유정의 시야를 가리며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남자가 "이야-"라고 하면서 유정 쪽으로 휘적휘적 걸어왔다. 유정은 벤치에서 일어났다. 남자가 다시 한 번 "이야--" 하더니 유정의 어깨를 툭 쳤다.
"창용이 오빠?"
유정은 키가 크고 마르고 얼굴이 불그레한 사십 줄의 남자를 잠시 멍하니 쳐다봤다. 창용이 오빠는 모자를 막 벗고 나온 것처럼 머리카락이 조금 눌려 있었고 작업복처럼 보이는 반 집업 티셔츠에 목에 넥 밴드 이어폰을 걸고 있었다. 이어서 그네 쪽에 있던 아이 둘과 여자가 다가왔다.
유정은 창용이 오빠의 와이프를 보면서 반갑다고, 만나서 반갑다고 말했다. 인사를 나누는 동안 창용이 오빠 와이프가 유정의 머리와 귀고리와 트렌치코트에 빠르게 눈길을 주었다 거두는 게 느껴졌다.
내린천휴게소의 정수는 4층에 다 모여 있다며 창용이 오빠는 일행을 로컬푸드 건물 쪽으로 데려갔다. 실내의 푸드코트와 별도로 행복장터 옆으로 로컬푸드 식당 두엇이 문을 열고 있었다. 아이들은 실내로 들어오지 않고 바로 자작나무 시소 쪽으로 뛰어갔다. 일행은 밖이 환하게 내다보이는 통유리 옆의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애가 열두 살이라고? 다 컸네."
유정이 시소를 타는 아이들을 내다보자 창용이 오빠가 말했다.
"다 크긴요. 아직도 마트 가면 뽀로로주스부터 찾아요."
"열두 살이면 아직 애지 뭐."
창용이 오빠가 말했다.
"앤데, 요샌 또 틴트를 시뻘겋게 바르고 싶어서 아주 환장을 해요."
요새 애들이 빠르지 뭐, 하더니 창용이 오빠가 말을 놓으라고 했다. 마을에서 창용이 오빠의 가족들을 만나서 차를 같이 타고 올라왔다는 유태는 창용이 오빠를 삼십 년 만에 만난 게 아니라 삼십 년 동안 만나 온 듯 굴었다. 창용이 오빠 와이프한테도 벌써 형수, 형수, 하며 실실거리고 있었다.
음식이 나오기 시작하자 창용이 오빠 와이프가 아이들을 불렀다. 아이들이 황탯국에 밥을 말아 몇 숟갈 뜨고 다시 뛰어나가자 창용이 오빠 와이프도 따라 나갔다. 그러곤 주로 밖에서 시간을 보냈다.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그 옛날 미산으로 돌아갔다. 유태의 관자놀이에는 쥐불놀이를 하다 덴 자국이 아직도 남아 있었는데 유정도 창용이 오빠도 그날 같이 쥐불놀이를 했었다.
"오빠, 기억나죠. 유태가 깡통을 머리 위에서 신나게 돌리다가 갑자기 확 멈췄잖아요. 그러니 불이 머리로 떨어지지. 진짜 왜 그랬니?"
그때 깡통에 불을 담아 동네 아이들한테 하나씩 쥐여 준 건 재상이 삼촌이었다.
"몰라. 왜 그랬지? 계속 돌리면서 천천히 내려놔야 한다고 삼촌이 분명히 말해 줬는데."
그때 같이 놀던 친구들은 유정처럼 초등학교 고학년 때나 못해도 중학교 때는 춘천이나 서울, 강원도의 다른 도시로 이사를 갔다. 미산에서 고등학교를 마치고 여전히 미산에 살고 있는 건 창용이 오빠 외엔 거의 없었다.
"오빠. 미진이랑 상철이 기억나죠. 내가 수능 끝나고 걔네랑 연락이 돼서 춘천에 놀러갔었잖아요. 근데 상철이가요, 자기가 고3 때 원빈이랑 같은 반이었다고 계속 그 얘기만 하는 거예요. 배 타고 중도 들어가면서도 원빈 얘기, 닭갈비 먹다가도 원빈 얘기."
그러자 창용이 오빠가 집사람이 원빈을 좋아한다고 말했다. 유정은 자작나무 시소 쪽을 내다봤다.
"원빈 좋아하시는구나……."
주차장에서 나온 사람들이 식당 앞을 가로질러 가자 시야가 가려졌다.
"오빠, 나는 있잖아요,"
유정은 한숨을 한 번 쉬고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나는요 요새, 아무도 좋지가 않아요. 아무도."
황태구이가 커다란 접시에 담겨 나왔다. 창용이 오빠가 접시를 밀어 주며 먹으라고, 먹으라고 말했다. 양념장 냄새에 유태가 손뼉을 치며 젓가락을 들었다. 실내놀이터로 들어갔는지 자작나무 존에는 창용이 오빠 와이프도 아이들도 보이지 않았다. 도착 때만 해도 등산객들이 많이 보이더니 지금은 가족 단위의 나들이객들이 더 보였다. 가을 꽃 축제 홍보 게시판 뒤쪽으로 은행나무들이 노랗게 줄지어 서 있었다.
창용이 오빠가 식당 주인한테 뭔가를 더 주문하더니 너네를 만나서 참 좋다고, 오늘 기분이 너무 좋다고 말했다.
"나도 그래요, 오빠. 나도 참 좋아요. 날씨까지 좋아."
유태가 동탄에 산다고 하자 창용이 오빠는 군 제대 후 수원에 있는 도미노 피자 매장에서 일했던 얘기를 했다. 그러다 안성으로 가 골프장 짓는 데서 잠깐 있었고, 객지 생활이 힘들어 일찌감치 미산으로 돌아왔다고 했다. 창용이 오빠는 인제 인터체인지로 이어지는 고가를 가리키며 저 도로를 내가 닦았지, 했다가 그냥 노가다 신세라는 말을 반복했다. 유태는 S사 과장의 고달픔을 늘어놓다가 다 때려치우고 미산에 와서 살고 싶다는 말을 했다. 오늘 계약한 땅에 집을 지을 거라고 했고 와이프가 요새 자기를 자꾸 갈군다는 얘기를 했다. 대기업 다니니까 대기업 다니는 와이프를 얻는구나, 창용이 오빠가 유태를 보며 말했고 유정을 보면서 어떤 글을 쓰느냐고 물었다. 창용이 오빠는 드라마 동백이 같은 걸 한번 써보라고 했고, 셋은 잠시 향미의 행방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메밀전병과 함께 주인이 서비스라며 오미자절임을 내왔다. 창용이 오빠는 유정과 유태 쪽으로 자꾸 접시를 밀었다.
"재상이 삼촌이 미산 가까이 살 줄은 몰랐어. 유정이 너 5학년 마친 다음에 전학 가고 다음 핸가, 유태랑 다른 식구들도 다 이사 갔잖아."
부모님들끼리는 그 후에도 경조사 때 종종 연락을 주고받은 듯했지만 그마저도 소식이 완전히 끊긴 건 십 년도 더 전이었다. 창용이 오빠가 유정의 연락처를 알게 된 건 두 달 전 지자체 행사장에서 재상이 삼촌을 만나서였다.
유정은 눈앞에 앉아 있는 마흔넷의 창용이 오빠를 보면서 삼십여 년 전의 인물, 아버지 술주정을 피해 유정의 집으로 건너와 울곤 하던 그 소년을 떠올렸다. 울음을 그친 창용이 오빠가 의기소침하게 앉아 있으면 재상이 삼촌이 이런저런 놀거리를 만들어서 유태와 유정과 함께 놀게 해주곤 했다.
유정은 어쩌면 그런 글을 쓰고 싶었다. 책이 나오면 창용이 오빠한테 택배로 보낼 수 있는 책. 유태한테, 엄마한테, 외가 친척과 친가 친척, 사촌동생들, 시댁 어른들, 소은이 친구의 엄마들한테도 거리낌 없이 선물할 수 있는 책. 유정은 죽기 전에 청소년 소설을 꼭 한 번은 써보고 싶었고 거기에 남자 청소년이 등장한다면 그 모델은 늘 창용이 오빠일 거라고 생각해 왔다.
"오빠."
유정은 유태한테 탕을 덜어 주고 있는 창용이 오빠를 불렀다.
"응."
"그때 상처받았죠. 나 때문에."
"응?"
"내가 오빠한테 그깟 자전거라고 해서. 나 때문에 오빠 상처받았죠. 그쵸."
"니가 그랬어?"
"……."
유정은 젓가락을 내려놨다.
"그깟 자전거라고 했잖아요, 내가."
유정은 기억하고 있었다. 창용이 오빠가 그때 체육복을 입고 있었는지 겨울 점퍼를 입고 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았지만, 교문 앞에 함께 있던 친구들이 수정이 미진이 혜미였는지 미진이 현정이였는지는 분명치 않았지만, 유정이 쏘아붙였을 때 창용이 오빠가 순간 뻘쭘해 하던 것과 친구들 사이에서 유정이 스스로에게 느낀 당혹스러움, 그 순간의 그 복합적인 공기만은 기억하고 있었다.
"내가 너 몇 번 자전거를 태워 주긴 했지."
"몇 번이 아니라 꽤 오래 태워 줬어요."
그 무렵 유정은 집에 늦게 가려고 학교 청소함을 빙빙 돌곤 했다. 꽤 오래 그랬다.
"그깟 자전거가 아니라 그따위 자전거라고 한 거 아니야, 누나?"
먹는 동안 조용하다 싶던 유태가 냅킨으로 입을 닦으며 클클 웃었다.
"황태나 먹어 유태야."
유정은 유태가 구겨 놓은 냅킨을 유태한테 던지고는 일어섰다.
*
내린천교의 교각은 반 정도만 눈에 들어왔다. 휴게소에 있으니 유정은 백 미터 높이라는 저 교각 아래에 마을이 있다는 게 실감이 되지 않았다. 4층 공원에서 나무 덱으로 뻗어 올라간 곳에 야외 전망대가 있었지만 유정은 공원에 그냥 선 채로 전망대로 걸어가는 사람들을 쳐다봤다. 몇몇이 뒤를 돌아 일행에게 손을 흔들고는 다시 걸어 올라갔고, 몇몇이 앞선 일행을 부르며 느린 속도로 뛰어갔다. 그 사이에서 자작나무 이파리들이 조용히 흔들리고 있었다.
산등성이에 걸쳐 있는 햇빛의 양을 보고 유정은 오후 4시쯤 됐겠구나 생각했고, 휴대폰을 보자 정말 4시였다. 어떤 감각들은 기이할 정도로 끈질기게 잠복돼 있다 이렇게 불쑥 능력을 발휘하곤 했다. 미산의 산을 보며 오후 전체를 보내는 게 열두 살 이후로 처음인데도 유정은 산등성이의 빛만 보고도 시간을 알아맞히는 것이다. 이제 저 산에 얼마나 빨리 저녁이 오는지, 얼마나 빨리 땅이 그늘지고 얼마나 급격히 기온이 떨어지는지, 매캐하고 메마른 공기가 어떻게 초겨울 대기를 채우며 어둠을 몰고 오는지 유정은 잘 알고 있었다.
일 년 전 이맘때 그 산문을 발표한 이후로 유정은 재상이 삼촌의 연락을 받지 않고 있었다. 마지막 통화는 수상 축하 전화였다. 잘했다고, 장하다고, 재상이 삼촌이 말했다. 유정은 감사하다고 말했다.
몇 주 뒤 소은과 함께 영화를 보고 나왔을 때 유정은 재상이 삼촌한테 부재중 전화가 와 있는 것을 보았다. 유정은 다시 전화하지 않았다. 며칠 뒤 다시 전화가 걸려왔다. 휴대폰에 뜨는 그 오랜 호칭을 내려다보면서 유정은 이전과는 또 다르게 자신을 눌러 오는 이 새삼스러운 소름의 정체가 무엇일까 생각했다. 유정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걸려오는 전화의 간격을 보면서 유정은 자신이 전화를 받지 않는 것에 대해 재상이 삼촌이 서운해 하거나 괘씸해하고 있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며칠 뒤 재상이 삼촌은 유정의 엄마에게 전화를 해 유정의 남편 전화번호를 물었다. 엄마는 누구네 김장김치가 잘 됐다거나 올해 무값이 비싸다는 말을 하듯 아무렇지 않게 그 말을 전하면서 재상이 삼촌한테 윤 서방 전화번호를 가르쳐줬다는 말을 했다. 그러면서도 왜 재상이 삼촌의 전화를 받지 않는지 유정에게 묻지 않았다.
유정은 이전을 생각했다. 그 산문을 쓰기 이전. 친족 성폭력 얘기를 쓴 유정의 소설이 유정의 자전적 경험을 모티프로 한 것임을 밝히기 이전. 재상이 삼촌이 전화를 하면 받고 들렀다 가라고 하면 들르던 이전.
유정은 아무것도 알 수가 없었다. 가족들이 그 글을 읽은 것인지, 읽었다면 누가 읽고 누가 못 읽은 것인지, 그들이 알고 있는지, 모르고 있는지, 알면서 모르는 척하는 것인지, 글로 써서 발표까지 해놓고 왜 자신은 가족들한테 정식으로 얘기하지 못하고 있는 것인지, 직접 말은 못 하지만 이렇게 썼으니 알아서 알아채 주길 바라는 것인지, 계속 모르길 바라는 것인지, 아무것도 알 수가 없었다.
분명한 것은 가족들은 모두가 이전의 상태에 있고 유정 혼자 이후의 상태로 와 있다는 것이었다. 그 글을 쓴 뒤 유정은 더 이상 이전처럼 그러려니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유정 자신을 제외한 모든 상황은 이전과 그대로였다. 그 불일치가 자신을 어떻게 휘저을지 유정은 그 산문을 송고할 때까지도 알지 못했다. 유정은 그 글을 써서 발표하는 것만으로도 무언가가 일단락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삼십 년이나 지난 일 따위 이제 자신은 치고 나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예상치 못한 타격이 온다 해도 유정 스스로 감당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럴 근력이 이제는 있다고 생각했다. 피해 사실을 말한 뒤 새로운 상황이 시작될 거라고는, 유정 자신의 경우에는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누군가 외투 끝을 잡아당기는 느낌에 유정은 뒤를 돌아봤다. 창용이 오빠의 큰아이였다. 일행들이 식당 밖에 모여 서 있었다. 유태가 얼른 오라고 손을 흔들었다.
유정은 나란히 서 있는 창용이 오빠 부부를 보면서 큰아이 손을 잡고 그쪽으로 걸어갔다. 밖에서 오래 놀아서인지 아이 손끝이 차가웠다. 유정이 다니던 초등학교의 병설유치원에 다니고 있는 아이였다. 자신이 매일 걸어 다니던 교문 앞길을 이 아이도 매일 지나다니겠구나 생각하면서 유정은 일행을 따라 공원 쪽으로 걸어갔다.
곳곳에 해가 지기 직전의 빛이 낮게 내려와 있었다. 분수 물줄기처럼 하얗게 핀 무늬억새 사이에서 사람들이 계속 사진을 찍었다. 붉은 열매가 달려 있는 팥배나무 가지를 가리키면서 작은 아이가 "아빠, 저거 따주세요." 하니까 창용이 오빠가 안 된다고 했다. 유태가 옆에서 걸어가면서 자기 아이와 같은 나이인 작은 아이를 유심히 보았다. 아마도 유태의 아이는 내일부터 아빠한테 존댓말 훈련을 당하겠지, 유정은 유태의 뒤통수를 보면서 생각했다.
"근데 인제양양 터널이 정말 그렇게 길어요?"
도로 개통을 기념해서 세워 놓은 조형물을 구경하다 유정이 묻자 창용이 오빠 와이프가 "끝이 없어요." 했다. "끝이 없구나……." 유정이 중얼거리자 큰아이가 그 터널에는 물방울도 있고 구름도 있다는 말을 했다. 운전자의 정신이 혼미해질까 봐 터널 중간 중간에 디자인 조명이 있다고 창용이 오빠가 말했다.
조금 뒤처져 걸으며 일행들을 보고 있으니 유정은 어느 낯선 가족에 끼여 소풍을 온 듯 갑자기 가벼운 마음이 들었다. 그러자 오늘 중으로 미산을 무사히 떠날 수 있을 것 같은 확신이 들었다. 문제될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강렬한 느낌. 조증 상태로 돌입한 것이다.
창용이 오빠 와이프는 무릎을 덮는 니트 스커트에 크림색 슬립온을 신고 있었고 머리카락이 승모근 아래까지 길게 내려왔다. 집에서는 머리를 풀고 있을 짬이 없을 것인데 오늘 모처럼 풀고 나온 것 같았다. 이런 날은 사진을 찍어야 했다.
유정은 무늬억새 앞을 가리키며 창용이 오빠 와이프한테 아이랑 서보라고, 서보라고 말했다. 창용이 오빠 와이프가 어색해하면서도 아이와 함께 가서 섰다.
"요새 인싸맘들은 아이를 던지면서 찍는대요."
유정은 카메라 앱을 열며 말했다.
"던져 보세요. 애를 던져 보세요."
유태가 무슨 주책이냐는 표정으로 유정을 봤지만 유정은 좋은 사진이 나올 거라는 예감을 버릴 수 없었다. 창용이 오빠 와이프가 주위를 한 번 보더니 아이의 겨드랑이에 양손을 끼우고 아이를 하늘 높이 던져 올렸다. 아이가 까르르 하면서 엄마를 내려다보고 엄마도 고개를 젖히고 아이를 올려다봤다. 머리카락도 차르르 떨어지고 무늬억새는 눈이 부셨다.
유정은 사진이 너무 마음에 들었다.
다섯 시가 막 넘었을 뿐인데도 해가 넘어가 버리자 날은 금세 어둑해졌다. 아이들이 돈까스를 먹고 싶다고 했다. 유태도 푸드코트에서 전망을 보고 싶다고 했다. 밤이 되면 내린천교에 조명이 들어오는 것 말고는 볼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창용이 오빠가 말했다.
"맞아. 밤에는 산도 안 보여."
휴게소 실내로 들어가는 일행을 유정은 이번에도 좀 뒤처져 따라갔다. 편의점 옆의 캡슐토이 뽑기 앞을 지나며 아이들이 계속 뒤를 돌아보자 유태가 아이들을 데리고 그 옆의 동전교환기로 달려갔다. 유태가 지폐를 연이어 넣으며 레버를 돌리자 동전이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아이들은 신나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유태의 아이도 그 또래여서일까. 유태는 아이들이 뭐에 환호하는지 잘 알았다.
유정은 푸드코트 입구에 서서 커다랗게 걸려 있는 내린천휴게소 전경 사진을 쳐다봤다. 완전히 어두워지기 전의 저녁 무렵, 조명이 막 밝혀진 휴게소 건물을 상공에서 찍은 사진이었다. 비행접시 같기도 하고 야광 삼각자 같기도 한 기이한 건축물이었다. 유정은 허공에 떠 있는 저 삼각 접시의 어느 변에 유정의 일행이 서 있는 걸까 가늠해 보다 푸드코트 안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좋은 자리를 막 잡았다는 표정으로 창용이 오빠 와이프가 유정을 부르고 있었다.
유정은 그쪽으로 걸어가면서 선생님한테 한 번 더 중계를 했다. 선생님, 내린천휴게소 푸드코트가 너무 좋아요. 스타필드 푸드코트보다 열 배쯤 좋아요. 테이블이랑 의자가 너무 새것이고요, 약간 공항 느낌도 나고요, 천장에서 뭐가 자꾸 반짝거려요. 그리고 저분은 선생님과 나이가 비슷해 보여요.
통유리 맞은편 벽면 쪽으로 커다란 삼각창이 이어져 있었고 그 아래마다 팔인용 원형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정말 좋은 자리였다. 유정은 그 테이블 끝에 창용이 오빠 와이프와 잠시 마주 앉아서 전광판의 대기 번호가 바뀌는 것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그러다 눈이 마주치면 조금 웃었고 다시 전광판을 쳐다봤다. 다음 번호에 창용이 오빠 와이프가 훌쩍 일어나 가버리자 유정은 테이블에 혼자 남았다. 아주 잠깐의 시간이 지났을 뿐인데도 삼각창 밖은 어둠이 몰려와 주유소 불빛과 인터체인지 불빛 너머로 산 윤곽이 빠르게 묻혀 가고 있었다. 공원을 거닐던 것이 좀 전의 저 밖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그곳은 전혀 다른 좌표 위처럼 느껴졌다. 정신을 똑바로 붙들고 있지 않으면 울증 상태로 바로 곤두박질칠 수도 있었다. 되는 일이 아무것도 없을 것이며 아무것도 감당하지 못할 것이고 아마도 무슨 일인가를 저지를지도 몰랐다.
유정이 음식을 받아서 돌아오니 팔인용 테이블 중앙에서 작은 아이가 종알대고 있었다. 자기가 할 수 있다며 엄마의 밥을 비비더니 유태한테 만두 하나를 주면서 딸기 맛이라고 우겼다. 맥락도 없이 토끼랑 어디를 가봤다는 얘기를 시작했고 다시 내가 한다고, 내가 한다고 떼를 썼다. 심술이 났나 싶었는데 금세 큰아이 손을 잡고 푸드코트 옆의 실내놀이터로 달려갔다.
사랑스러웠지만, 유정은 사랑스러운 아이들을 보면 급격히 침울해지곤 했다. 유정은 갑자기 소은이가 보고 싶었다.
아이들이 눈에 보이는 곳에서 놀고 있었기 때문에 이제 창용이 오빠 와이프는 아이들 핑계도 대지 못하고 테이블에 앉아 있어야 할 것이었다. 대화거리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어 유정은 친구들의 연인이나 배우자를 소개받는 자리에서 종종 그랬듯 창용이 오빠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몇 개 꺼냈다. 당신의 배우자가 어린 시절에 어떤 개구쟁이였는지, 얼마나 어린이다웠고 어떨 땐 또 얼마나 의젓했는지. 하지만 유정은 창용이 오빠 와이프가 창용이 오빠의 어린 시절을 별로 궁금해 하지 않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유태라면 이런 자리에서 두 사람이 어떻게 만났는지 그런 걸 묻고도 남을 성격이었지만 유태는 그것에 대해 묻지 않았다. 아마도 창용이 오빠와 창용이 오빠 와이프는 지금껏 그런 질문을 한 번도 받아 보지 않았을 가능성이 컸다.
"그래도 형수, 한국말 잘하시네요."
몇 마디 한 것도 없는데 유태가 창용이 오빠 와이프한테 그렇게 말했다.
"많이 늘었어. 너무 늘어서 탈이지."
창용이 오빠가 와이프를 보고 웃으며 말했다. 이어서 창용이 오빠는 큰아이가 태어났을 때 마을에서 잔치가 벌어졌던 얘기를 꺼냈다. 미산에서 6년 만에 들린 아기 울음소리였다고 했다. 2년 뒤에 창용이 오빠네서는 다시 아기 울음소리가 들렸고, 이후 5년 동안 아기 울음소리가 안 들리자 마을 어르신들이 요새 들어 부쩍 셋째 낳으란 인사를 건넨다고 했다.
"형수가 아직 이십대신데 무슨 걱정이에요."
유태가 창용이 오빠를 보면서 말했다.
"미산에서 애 낳고 사는 형이 애국자다, 애국자야."
그러더니 유태는 잊고 있었다는 듯 점퍼 주머니에서 호두과자를 꺼냈다.
"드세요, 형수. 영자미식회에서 나온 거라길래 형수 드리려고 샀어요."
유정은 호두과자를 자기 쪽으로 당겨 왔다.
"디엔 씨, 먹지 마세요. 저 새끼가 독 섞었을지도 몰라요."
유정은 진지하게 한 말인데 디엔 씨가 조금 웃었다.
막 걸음마를 시작한 아이 손을 잡고 한 남자가 테이블 옆을 지나갔다. 아기 띠를 한 여자가 음수대 쪽으로 급하게 걸어갔다. 더없이 어울려 보이는 연인이 이인 테이블에 마주 앉아 우동을 먹고 있었다. 미산 같은 데서는 한 번도 살아 보지 않았을 것 같은 곱게 늙은 부부가 막 자리를 찾아 앉는 게 보였다. 저 사람들은 여기에 왜 온 걸까, 유정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미산이 정말 추워요."
유정과 유태가 미산의 추위를 익히 알고 있다는 걸 알고는 디엔 씨가 말했다.
"맞아요. 미산 정말 추워요."
유정은 그렇게 말하고 다시 삼각창을 보았다.
"하우양이라고, 처가가 거기야. 호치민에서도 한참 내려가."
창용이 오빠가 말했다.
유정은 또 불현듯 소은이가 보고 싶었다.
실내놀이터가 시들해졌는지 큰아이가 오더니 창용이 오빠한테 "아빠, 스티커북 사주세요." 했다. 작은 아이도 달려오더니 "아빠, 나도 사주세요." 했다. 창용이 오빠가 디엔 씨한테 만 원짜리 한 장을 건넸다. 디엔 씨가 가자, 가자, 하면서 아이들을 데리고 편의점으로 갔다.
"형, 내년에 학부형이네?"
유태가 말하자 창용이 오빠가 한숨을 쉬었다. 디엔 씨가 애들한테 몇 십만 원짜리 전집을 사주고 싶어 해서 허리가 휠 것 같다고 했다. 맥포머스 블록 얘기를 꺼냈을 땐 한바탕 했다고 했다.
"한국말 늘더니 한국 여자들 하는 거 다 하고 싶어 해서 큰일이다."
그러더니 창용이 오빠가 말했다.
"나는 그냥 노가단데."
유정은 창용이 오빠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오빠. 일 끝나면 이장님이랑 술 먹지 말고 검색 좀 해요. 개똥이네 사이트 가면 중고 전집 싸게 나온 거 많아요."
그 말에 창용이 오빠가 유정을 보았다.
"유정이 넌 안 그러지?"
"……?"
"작가니까 비싼 전집에 안 낚이고 얼마나 알아서 책을 잘 사주겠어."
"……."
"애 밥 안 먹는다고 숟가락 들고 쫓아다니면서 안달하고. 유정이 넌 안 그럴 거 아니냐."
그렇게 말하며 창용이 오빠가 조금 웃었다.
유정은 의자에 등을 기대고 삼각창을 보았다.
뭔지 모르게 기분이 좀 족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유태가 자기 발을 가리키면서 창용이 오빠한테 무슨 말인가를 했다. 형, 누나는 족 말하는 거야, 족, 아마도 이런 식의 말을. 뭔가를 모르는 척하는 말을. 생각만 했을 뿐인데 저게 왜 저러나 싶어 유정은 유태를 불렀다.
"야, 유태야."
들리지가 않는지 유태가 대답이 없었다.
"유태야."
안 들리는 것 같았다.
유정은 부르기를 그만두고 다시 삼각창을 보았다.
유태와 창용이 오빠가 호두과자를 먹으면서 뭐라고 큭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뚜렷이 잡히지 않는 그 큭큭거림을 듣고 있자 유정은 이상하게 발밑이 서늘해지는 느낌이 들었고, 갑자기 어떤 예감이 들었다. 곧 자신만 혼자서 어딘가로 이동할 것 같다는 예감. 소리 없이 곤두박질치게 될 것 같다는 예감.
호두과자를 먹으면서 창용이 오빠가 유정을 보았다.
"유정이 넌 초등학생일 때도 뭐랄까, 분위기가 좀 남달랐잖아. 다른 애들이랑 달랐어."
"……."
"뭔가 좀 오묘한, 그런 게 있었어."
시간은 일곱 시가 막 가까워지고 있었다. 밖은 완전히 어두워졌고 어두워질수록 삼각 접시만이 도드라지게 떠오르고 있다는 감각이 점점 분명해졌다. 유정은 발밑에 들어찬 허공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없었다. 아이들이 스티커북 하나씩을 손에 들고 돌아왔다. 디엔 씨가 거스름돈 이천 원을 창용이 오빠한테 건넸다. 그리고 유정을 보았다. 유정은 앉아 있던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었지만 십 분 전과는 전혀 다른 좌표 위로 옮겨가 있었다.
첫날 했던 말을 생각해 보라고 선생님이 말했다.
유정이 고개를 저을 때마다 선생님은 유정의 이름을 불렀다.
유정 씨, 첫날 했던 말을 생각해 보세요.
그러면 유정은 말했다.
선생님, 저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제가 여기에 오는 게 맞는지 모르겠어요. 이젠 그만 오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됩니다.
선생님이 말했다.
그냥 앉아만 있다 가셔도 됩니다.
금요일 2시마다 한 시간씩 시간을 비워 놓겠다고 선생님이 말했다. 유정 스스로 그곳까지만 걸어오라고 말했다. 전화까지는 하면서도 오지 않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고 말했다. 그곳은 유정이 지금 살고 있는 동네에 있는 지하철역 근처의 한 상가건물 5층이었다. 흰색 원탁 테이블이 있었고 리모콘이 있었고 어피치가 그려진 정사각형 티슈통이 있었다.
그곳에 처음 전화를 했던 한 달여 전에도 유정은 말했다. 제가 여기에 전화하는 게 맞는지 모르겠어요. 유정은 그곳이 어떤 곳인지 알고 있었지만 자신이 그곳에 전화를 해도 되는지, 할 만한 것인지 판단할 수 없었다. 유정은 그때 무엇도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태였지만 어떻게 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 것 같았기 때문에 집에서 가장 가까운 곳을 찾아냈다.
그때 유정이 붙든 생각은 하나였다. 노트북 앞에 앉아 글을 쓰는 것만으로는 타인으로부터도 자신으로부터도 스스로를 지킬 수 없다는 것이었다. 삼십 년 전의 시간들도, 일 년 전부터 시작된 새로운 상황도 유정은 더 이상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유정은 받아들여야 했다. 그동안 전전해 온 육아 우울증과 부모 상담과 부부 상담과 만성적인 정신질환들이 아니라 어려서 받은 성 학대, 그 문제를 직접적으로 마주하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는 걸 받아들여야 했다.
그래서 유정은 전화를 했다. 저쪽에서 말했다. 네, 맞습니다. 여기에 전화하시는 게 맞습니다.
그곳에서 유정은 어쩌면 빠져나오고 있다고 생각한 질문으로 계속 되돌아갔다. 내가 왜 이런지 모르겠어요. 나는 왜 이런 걸까요. 내가 왜 이런 거죠? 그러니까 나는 왜 이러냐구요, 선생님. 나는 왜요. 왜 나한테. 왜 나는.
유정은 그런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테이블 위에 놓인 질문에 제대로 답을 하지 않았던가.
'그 일이 일어나게 한 원인이 나에게 있다.'
매우 그렇다. 그렇다. 다소 그렇다. 조금 그렇다. 전혀 아니다.
유정은 그중 어디에 표시해야 할지 알고 있었다.
'내가 그렇게 행동했기 때문에 그 일이 일어났다.'
유정은 아니라고 답할 수 있었다.
'누군가 다른 사람이었다면 그런 상황에 빠지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거기엔 아니라고 답할 수가 없었다.
유정은 거기에 아니라고 답해지지가 않았다.
유정은 자신이 무언가를 잘못하지 않았다는 건 납득할 수 있었지만 자신이 잘못된 존재가 아니라는 건 여전히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죄책감은 가까스로 넘어설 수 있어도 수치심은 여전히 거대한 벽이었다.
유정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계속 고개만 젓고 있으면 선생님은 다시 유정을 불렀다.
유정 씨, 유정 씨는 그때 아동 여성이었고 가해자는 성인 남성이었습니다.
그러면 유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선생님, 맞아요. 그렇습니다. 그래요, 선생님. 이건 누가 봐도 분명합니다. 맞아요, 선생님. 이건 웬만한 족들한테도 시원스레 합의가 되는 비참함일 겁니다.
그런데도요, 선생님. 그런데도, 그럼에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정은 자신이 늘 피하고 싶었던 벽 앞에 서면 선생님이 어떤 말을 해도 그 자리에 제정신으로 앉아 있기가 힘들었다. 선생님 얘기를 들을 땐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다가도 집에 돌아와 혼자 남으면 다시 처음으로 되돌아갔다. 되돌아갈 때마다 유정은 자신을 오랫동안 파먹어 온 그 끈질긴 충동을 제어하기가 힘이 들었다.
"오빠."
유정은 창용이 오빠를 불렀다.
실내놀이터에서 아이들이 트램펄린을 뛰고 있는 게 보였다. 조그만 몸들이 탄성을 받아 일정한 리듬으로 튀어 오르고 있었다.
"내가 얼마 전에 술을 끊었거든요."
디엔이 저만치에서 텀블러에 물을 받는 게 보였다.
"왜 끊었는지 알아요?"
"왜 끊었는데?"
"술 먹으면 자꾸, 죽고 싶어져서요."
유정은 그 말이 얼마나 공허하게 흩어지는 말인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유정은 그 말이 거기에 있는 사람 중 하나를 찌를 수 있다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유태는 더 이상 웃고 있지 않았다. 유정이 스스로를 충분히 공격할 수 있다는 걸 유태는 아는 것이다. 그게 가족들한테 어떤 상처를 남길 수 있는지 유태는 이미 아는 것이다.
미산 내린천휴게소 4층의 삼각창 옆에서 그 말을 내뱉고 나서 유정은 다시 한 번 깨달았다. 자신이 유태를 얼마나 다치게 하고 싶어 하는지. 유정은 유태를 피 흘리게 하고 싶었다. 울음도 나오지 않을 만큼의 고통을 주고 싶었다. 유정이 마침내 무너지는 그 순간에 가장 힘들어할 사람이 유태이길 유정은 바랐다.
유정은 그대로 일어나 기다란 푸드코트를 걸어 나왔다. 출입문을 열고 나와 전망대의 나무 덱을 빠르게 걸어 올라갔다. 오후와는 비교도 안 되는 차가운 바람이 머리와 어깨로 쏟아져 내려왔다. 전망대 끝까지 걸어 올라가 유정은 난간을 붙잡고 섰다. 위를 보며 숨을 들이켰다. 어둠에 묻혀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이 세상의 어떤 산과도 다른 경사를 가진 미산의 산이 앞에 있었다.
유정은 숨을 내뱉으며 뒤를 돌았다. 불을 밝힌 내린천휴게소가 눈앞으로 떠올라 왔다. 거대한 진공관 같은 통유리 안에서 사람들이 천천히 흘러 다니고 있었다. 유정은 숨을 몰아쉬면서 삼각 접시 아래의 고가도로를, 미산을 스쳐가는 차들을, 공원 위에 점점이 떠서 이쪽 길로 이어지는 가로등을 바라봤다. 나무 덱을 따라 누군가 위로 올라오고 있었다.
디엔은 유정의 얼굴을 한번 보고는 유정에게 유정의 휴대폰과 가방을 건넸다. 유정은 고맙다고 해야 할지 미안하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그냥 고개만 끄덕였다. 그러고는 디엔과 잠시 11월의 산바람 속에 서 있었다. 휴게소와 도로 불빛 너머로 터널 아치와 내린천교에 조명이 들어온 것이 보였다. 교각 기둥들도 희미하게 불을 밝히고 있었다. 저 불빛들 사이 어디쯤에 유정이 열두 살까지 살았던 마을이, 그리고 지금 디엔이 살고 있는 마을이 있을 것이었다.
유정에게 미산은 너무도 벗어나고 싶은 곳이었지만 또한 너무도 그리운 곳이었다. 그곳의 많은 것을 그리워하지 않으려고 애써 왔지만 유정은 여전히 그곳의 많은 것들이 그리웠다. 어떻게 안 그리울 수가 있을까. 이맘때의 마른 깻단 냄새가, 이맘때의 생무 냄새가, 새 공책 냄새가, 발을 씻던 따뜻한 물이, 어떻게 그리울 수가 있을까.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
유정은 양손으로 얼굴을 덮고 서서 입김인지 소리인지 알 수 없는 것을 손가락 사이로 흘려보냈다.
나무 덱을 내려오면서 유정은 디엔에게 전화번호를 물었다. 돌아가면 사진을 보내 주겠다는 말과 함께. 그러고는 유태한테 메시지를 보냈다.
'가자.'
흡연부스에 있다는 답이 왔다. 유정은 공원 끝 쪽으로 걸어갔다. 인터체인지로 이어지는 작은 도로 건너 유리부스에서 유태가 걸어 나왔다. 부스 안에서 희미한 불빛이 나올 뿐 사방이 어두컴컴했다. 유태는 도로 이쪽으로 건너오지 않고 우두커니 서서 유정을 보기만 했다.
"이제 가자고."
흡연부스에서 몇몇 사람이 걸어 나와 유태와 유정 옆을 지나갔다. 왼쪽에서 온 택시 한 대가 유정과 유태 사이의 도로를 지나 인터체인지로 빠져나갔다. 그리고 다시 사방은 조용해졌다. 왜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 몰랐다. 그렇게 한참을 서 있으니 유정은 어쩌면 유태가 모든 걸 다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나."
유태가 유정을 불렀다. 유태의 목소리를 듣자 유정은 다시 유태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잠시 뒤엔 다시 유태가 다 알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곧이어 다시 그럴 리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정은 간신히 척추를 지탱하고 서서 유태를 봤다.
선생님은 유정에게 말했다. 가해자는 유정과 전혀 다른 기억을 갖고 있을 수 있다고. 유정이 소설에서 가정했던 상황과도 완전히 다를 수 있다고. 유정이 짐작하거나 상상할 수 없는 반응을 할 수도 있다고. 하지만 지금의 유정에게 그런 것들은 중요하지 않았다. 유정은 가해자를 처벌받게 하고 싶은 생각도 없었고 이제 와 사과를 받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유정이 원하는 것은 유태를 계속 보는 것이었다. 엄마를 계속 보고, 단톡방에 올라온 조카 사진을 보고, 소은이의 소식을 전하며 몇 달에 한 번이라도 둘러앉아 웃을 수 있는 것이었다. 유정도 알고 있었다. 유정이 그 말을 한다고 해서 가족들이 유정을 안 보진 않을 거라는 걸. 유정이 두려운 것은 유정 자신이 가족들을 안 보게 되는 것이었다. 유정이 두려운 것은, 무언가를 체념한 채로 계속 가족들을 보면서 그런 자기 자신을 다시 혐오하게 되는 것이었다. 유정이 원하는 것은 어떤 분열도 겪지 않고 제정신으로 가족들을 보는 것이었다.
유정은 선 채로 조금씩 가슴을 두드렸다. 유태를 건너다보면서 유정은 가슴을 두드렸다.
유태야.
넌 왜 계속 거기에 머무르려고 하니.
넌 왜 니가 어디에 서 있는지 알려고 하지 않니.
흡연부스의 불빛이 점점 흐려졌다.
"누나."
유태가 유정을 불렀다.
"누나는"
말을 바로 잇지 못하고 유태가 숨을 골랐다.
"누나는 한 번이라도, 소설보다 먼저, 가족들 생각을 해본 적이 있어?"
"……."
"누나한테 누나 소설 말고, 다른 사람이 있어?"
"……."
뒤쪽에서 웅성대던 불빛들이 어딘가로 조금씩 밀려갔다. 유정은 무엇도 짐작할 수 없었지만, 유태가 어떤 소설 때문에 그러는지 알 수 없었지만, 어쩌면 모든 소설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유정이 쓴 모든 것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런 생각이 들자 지난 추석 직후의 시간들처럼, 유정 자신이 단련해 왔다고 느낀 근력들만으로는 어떤 것도 지탱할 수 없다는 느낌이 들었다.
선생님,
유정은 유태를 아프게 하고 싶은 순간이 수없이 많았지만 유태가 유정의 소설 때문에 다치길 바라진 않았다. 그건 유정이 가장 견딜 수 없는 방식이었다. 그건 유정을 가장 미치게 만드는 일이었다.
선생님, 유태가 소설 얘기를 합니다.
선생님, 유태가 저를 원망합니다.
유태가 저쪽에 저렇게 서서, 저를 원망합니다. 꼼짝도 안 하고 저렇게 서서 저를 원망합니다. 너무도 제정신인 채로 저를 원망합니다. 선생님, 유태가 제가 쓴 글을 원망합니다.
저는 여기 더 서 있을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선생님.
저는 이제 더 서 있을 수가 없습니다.
저는 제가 쓴 어떤 글도 더는 견디지 못할 것 같습니다, 선생님.
저는 이제 할 수 있는 게 없습니다.
저는 이제 갈 수 있는 곳이 없어요.
저는 제 비명을 저 혼자 듣고 있었을 뿐입니다.
혼자 지르고 혼자 듣고 있었던 겁니다.
유정 씨,
첫날 했던 말을 생각해 보세요, 유정 씨.
유정은 고개를 저었다.
유정 씨는 빠져나오고 싶다고 했어요. 오랫동안 갇혀 있던 원래 그래의 세계에서 유정 씨는 빠져나오고 싶다고 했습니다. 자신을 비껴서 나오는 게 아니라 자신을 통과해서 나오고 싶다고 했어요. 그렇게 조금씩 빠져나오고 있다고 했습니다. 빠져나올 수만 있다면 어쩌면 죽지 않을 수 있을 것 같다고 했어요.
하지만 선생님, 저는 다시 끌려 돌아갔습니다. 어떻게 할 수도 없이 처음으로 되돌아가 주저앉았습니다. 다시 미산 그곳으로 처박혔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선생님을 찾아왔잖아요.
유정 씨.
선생님 저는
그때 느꼈어야 했던 것을 그때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럴 수 있습니다, 유정 씨.
선생님 저는 그때
느끼지 말았어야 했던 것을 느꼈습니다.
유정 씨,
느끼지 말았어야 하는 것은 없습니다. 유정 씨가 무엇을 느꼈든, 그 이유로 폭력이 폭력이 아닌 게 되지는 않습니다.
유정은 고개를 저었다.
유정은 계속 고개를 저었다.
유정 씨, 가해자는 유정 씨가 태어나면서부터 봐오던 사람입니다. 유정 씨에게 너무도 친밀했던 사람입니다.
유정은 계속 고개를 저었다.
계속 고개를 저었다.
그것으로는 부족합니다, 선생님. 그런 말만으로는 너무도 부족합니다. 어떤 걸 끌어와도 이 미칠 것 같음을 담아낼 수가 없습니다. 어떤 말로도 이 기막힘을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어떤 글로도 아무것도 이해받을 수가 없습니다. 저는 미쳐버릴 것입니다, 선생님.
유정 씨.
선생님은 제가 어떻게 버티길 바라시나요.
여기서 더 어떻게 버틸 수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선생님은 아시잖아요. 어떤 말들이 되돌아오는지 아시잖아요. 피해 사실을 말한 글에 어떤 소름끼치는 논리가 덧씌워지는지 선생님은 아시잖아요. 그런 글에 제가 속수무책으로 베일 수 있다는 거 아시잖아요. 흔들리지 말라는 말이 저를 얼마나 더 힘들게 하는지 아시잖아요.
알아요, 유정 씨.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 앞에 유정 씨의 동생이 서 있다는 것도 알아요. 유정 씨의 동생이자 유정 씨 딸의 삼촌이 저기에 서서, 유정 씨를 보고 있다는 것도 압니다.
유정은 가슴을 내리쳤다.
내리치고 내리쳤다.
제가 글을 그렇게 쓴 것입니다. 제가 그따위로 쓴 거예요. 제가 이 지경으로 쓴 것입니다.
유정 씨, 유정 씨는 쓰면서 조금씩 이겨내고 있었어요.
전혀 아닙니다, 선생님. 저는 아무것도 이겨낸 것이 없습니다. 이 모든 걸 글로 쓰기 전에는 이렇게 힘들지가 않았어요.
유정 씨,
저는 너무 지쳤습니다, 선생님.
이제 한 방울의 기력도 남아 있지가 않아요.
여기까지도 충분히 버거웠습니다.
제가 원하는 것은 언제나 하나였어요.
몸 안의 모든 수분, 모든 피를 빼내고, 모든 습기를 말리고, 비틀고, 보이지 않는 입자로 갈고 갈아서, 완전히 부수어서, 이 세상에서 완벽하게 없애버리는 것. 몸을 없애는 것. 이 지긋지긋한 몸을 없애는 것. 이해받지 못하는 몸을 없애는 것. 유정이 오랫동안 원해 온 것은 그것이었다.
반병의 와인만으로도, 뜻하지 않은 장소와 불현듯 살아난 말이 기폭제가 되어서, 유정 자신도 예상치 못한 어느 날에, 폭풍 뒤에 남는 압도적인 외로움을 이기지 못한 어느 날에, 아주 오랫동안 유정을 파먹던 그 마음을 실행할 수도 있다는 걸 유정은 알았다.
그런 순간엔 자신이 아끼던 어떤 것도 자신을 붙잡아 주지 못할 거라는 걸 유정은 알고 있었다. 소은이 스케치북에 적어 준 사랑한다는 말조차도. 때마다 손질해 쓰던 캄포 도마도, 아침마다 손이 가던 섀도도, 드물게 마음에 들어서 SNS에 올려 둔 자신의 모습도, 당장이라도 쓰고 싶어서 마음을 부풀게 했던 다음의, 그다음의 소설들도, 아무 소용이 없어지는 순간이 올 수도 있다는 걸, 그 순간에 언제든 질 수도 있다는 걸 유정은 알고 있었다.
알고 있어서, 유정은 계속, 계속, 소리조차 나오지 않아서, 계속, 가슴을 쳤다. 유태도, 흡연부스도, 어떤 것도 이젠 보이지가 않은 채로, 서 있는 것인지, 무릎이 꺾인 것인지, 아무것도 알 수 없는 채로, 계속, 가슴만 내리찍었을 뿐인데, 찍어버렸을 뿐인데, 있는 힘을 다해 몸을 찍어버렸을 뿐인데 갑자기 고함소리가 들리면서 눈앞이, 달려오려는 유태의 모습을 저만치로 밀어버리면서 차 한 대가, 유정의 앞으로 다가와 유정을 낚아채 실었다.
누군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화를 내고 있었기 때문에 유정은 더 이상 어쩌지 못한 채 차가 빠른 속도로 인터체인지를 빠져나가는 것을, 고가를 돌기 시작하는 것을, 삼각 접시의 불빛이 까마득하게 멀어지는 것을 보았다. 교각 기둥이 점점 눈앞으로 다가오는 것을 보고서야 유정은 차가 마을로 내려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유정은 디엔이 계속 베트남어로 흥분하고 있는 걸 들으면서 쓰러지듯 눈을 감았다.
*
바람이 불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창문 밖엔 자귀나무가 있는 것 같았다. 마른 콩꼬투리 같은 열매 껍질이 바람에 쓸릴 때 나는 소리였다. 이맘때에 가장 시끄럽고 스산한 소리를 내는 나무가 자귀나무였다는 생각을 하면서 유정은 눈을 떴다. 이불 아래에 놀이매트가 깔려 있는 걸 보니 유정은 아이들 방에서 잠이 든 것 같았다. 몸을 일으키려다가 허리 위쪽으로 통증이 느껴져 유정은 잠시 숨을 골랐다. 날이 다 밝지 않은 새벽이었다.
유정은 소리 나지 않게 문을 열고 뒤꼍으로 나갔다. 밭 위로 얇게 서리가 내려와 있었다. 한쪽엔 다 뽑지 않은 배추가 시든 채 누워 있었고 한쪽엔 보랏빛이 나는 갓이 빽빽이 자라나 있었다. 윗집과 경계가 되는 밭 가장자리로 검게 썩은 장작과 녹이 슨 접이식 의자들이 포개져 있는 게 보였다. 유정은 여전히 소리를 내고 있는 자귀나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벽에 걸린 마른 시래기 단 위로 스카이라이프 안테나가 동그랗게 하늘을 향하고 있었다.
유정은 집 벽을 돌아 마당으로 나갔다. 엘피지 가스통과 빈 소주병 수십 개를 지나 돌아가자 아이들 씽씽카와 자전거가 나왔다. 유정은 디엔과 창용이 오빠가 사는 마당에 서서 저만치로 보이는 교각 기둥을 올려다봤다. 유정의 기억보다 물이 훨씬 줄어든 내린천이 그 아래로 흐르고 있었다. 유정과 유태와 창용이 오빠네 예전 집들은 저 천 건너에 있었다. 창용이 오빠의 아이들은 학교가 훨씬 가까워졌겠구나 생각하면서 유정은 마당에 있는 평상으로 가 앉았다.
디엔이 문을 열고 나오며 몸이 괜찮으냐고 물었다. 주먹으로 좀 두드렸을 뿐인데 왜 이렇게 쑤시는지 모르겠다고 하자 디엔이 평상에 걸터앉으며 말했다. 주먹이 아니라 폰으로 이렇게, 이렇게 내리찍고 있었다고. 유태보다 자기가 먼저 알아챘다고. 유정은 자신을 기어코 마을로 데려 온 눈앞의 여자를 물끄러미 보다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웃었다.
창용이 오빠와 유태는 밤새 현리에서 술을 마시고 사우나에 갔다고 했다. 거기에서 해장까지 하고 올 모양이었다. 유정은 사진을 보내 주려고 카톡을 열었다가 디엔의 프로필 사진에 있는 상호를 보았다. 상호 옆에 디엔의 휴대폰 번호와 계좌번호와 시술 항목이 적혀 있었다. 남녀 자연눈썹. 콤보눈썹. 반영구 아이라인. 틴트입술. 속눈썹 연장. 속눈썹 펌. 이걸 다 직접 하냐고 하자 디엔이 그렇다고 했다. 백 프로 예약제 출장인데 유정에게는 특별히 오늘 해줄 수 있다고 했다. 유정은 다음에, 다음에 꼭 예약을 한 뒤에 하겠다고 했다.
마당에 햇빛이 반 찼을 무렵 유정은 디엔과 함께 아이들을 깨워 오뚜기 미역국 라면을 끓여 먹었다.
아이들은 어제 휴게소에서 산 신비아파트 스티커북을 펼치고 한참을 놀았다.
유정은 소은에게 전화를 해볼까 하다가 학교 쪽으로 혼자 산책을 나갔다. 호박 넝쿨이 말라 있는 길을 따라 걷다 보니 학교 생태텃밭 팻말이 보였다. 생각보다 더 가까웠다. 교문 앞 오르막길을 따라 노란 메리골드가 피어 있었다. 관사로 갈라지는 길 쪽의 시멘트 담이 놀라울 정도로 예전과 그대로였다. 유태가 수박바 봉지를 끼워 놓던 시멘트 블록을 찾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창용이 오빠가 자전거를 세워 두던 곳도 어디쯤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유정은 교문 옆에 있는 사자 동상 앞에 걸터앉았다.
거기에 앉아서 유정은 선생님을 만났던 첫날을 생각했다.
경기북부해바라기센터 진술녹화실 테이블에서 선생님과 문서를 작성하던 날을. 심리 상담을 받기 위해 필요한 절차였다. 선생님이 물어봐서 유정은 대답했다. 정확하진 않지만 할머니가 돌아가신 4학년 여름방학 이후부터였던 것 같아요. 유정은 선생님이 문서에 '1987년 여름 이후'라고 적는 것을 보았다. 그런 뒤 선생님은 유정 앞으로 문서를 돌려놓아 주었다. 문서에는 가해자의 이름을 적는 난이 있었다. 그래서 유정은 이름을 적었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너무도 익숙하고 너무도 낯선 이름을, 그곳에 유정이 직접 적었다. 2019년 10월 4일에.
유정은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도, 환갑쯤이 되더라도, 자신이 센터에 전화를 걸던 2019년 가을을 기억하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신호가 가고 네, 라는 목소리가 들리고, 어떻게 찾아와야 하는지 적혀 있던 그 웹 발신 문자를 받던 과정 모두가, 유정에게 얼마나 절실한 응답이었는지를 유정은 아마도 기억하게 될 것이다.
디엔에게 메시지가 왔다. 유태와 창용이 오빠가 집에 왔다고 했다. 둘은 아직도 술이 덜 깬 것 같았다. 운전은 유정이 하기로 했다. 창용이 오빠는 어머니께 갖다 드리라면서 양파와 감자를 한 상자씩 실었다. 유정은 고맙다고 말했다. 유정은 정말로 고마웠다. 그때 자전거를 태워준 것도 어제 황태구이를 사준 것도. 집에 가면 병원에 가서 엑스레이를 찍어보라고 디엔이 말했다. 유정은 전화해요, 라고 인사할까 전화할게요, 라고 인사할까 망설이다가 디엔에게 말했다.
"속눈썹 펌, 꼭 디엔 씨한테 하러 올게요."
유정은 디엔에게 인사했다.
"전화할게요."
유정은 운전석에 앉아서 그들 가족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사이드 미러를 바라봤다. 아이들과 창용이 오빠, 디엔의 모습까지 담 저쪽으로 다 사라졌을 때 유정은 문득 마당 평상에 함께 놓여 있던 것들을 떠올렸다. 못이 박혀 있는 각목과 잘 익은 감 서너 개, 손때가 탄 로프와 주먹맨드라미 몇 송이.
유정은 사이드브레이크를 내렸다.
유태는 뒷좌석에 널브러진 채 차가 터널 벽을 뚫어도 모를 것처럼 자고 있었다.
차는 인터체인지를 빠져나가 곧바로 터널로 진입했다.
유정은 머릿속이 하얘지도록 액셀러레이터를 밟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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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2019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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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리자
- 2025-06-01
그리고 밤과 가을이 김연수 1 지난여름, 정기에게는 세 가지 고민이 있었다. 하나는 눈에 문제가 생겼다는 것. 길을 걸어갈 때면 날벌레들이 달려드는 것 같아 혼자 손사래를 친 적이 여러 번이었다. 기사를 쓰려고 책상 앞에 앉으면 머리 뒤쪽에서 번개 같은 게 번쩍이기도 했다. 노안이 찾아온 건 벌써 몇 년 전의 일이었다. 그때 안과에 가서 진료를 받고 안경도 새로 맞췄다. 나이가 들면 서서히 시력이 나빠지리라고만 생각했지, 거기에 더해 전에 없던 것들이 보이는 증상까지 생길 줄은 미처 몰랐다. 그런 처지가 되고 보니 책 읽는 일이 힘들어졌다. 평생의 즐거움이었던 독서가 성가신 일이 되면서 생활은 성기어지고 마음은 허술해졌다. 더 오래전, 나이가 들면 활자 같은 건 멀리하고 자연을 벗 삼아 소일하며 세속적 가치관에 물든 마음을 고치리라 생각하던 때가 있었다. 그때는 은근히 노년을 기대하기도 했지만, 그런 시절은 너무나 빨리 지나갔다. 두 번째는 포항에서 에너지공학과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딸 민지와의 관계가 점점 멀어진다는 점이었다. 그건 서울과 포항이라는 지리적 거리감 때문만은 아니었다. 작년에 집을 새로 구하면서 민지는 아빠인 정기에게 도와달라고 부탁을 해 왔다. 그 과정에서 이사의 이유가 언제부터인가 짝꿍처럼 붙어 다니던 여자 선배 희선과 같이 살기 위해서라는 사실을 그는 알게 됐다. 그는 민지와 희선이 단순한 선후배 사이가 아닐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몇 번 딸에게 희선에 대해 물었지만, 민지의 반응은 모호했다. 그러다가 정기는 그 일에 대해 더 묻지 않게 됐다. 한 번은 민지가 “나는 아빠가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 아닐 수도 있어요”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앞뒤 대화의 맥락으로는 그 일에 대한 답변이 아니었음에도 정기는 둘 사이의 관계에 대한 질문의 대답으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마지막 고민은, 자신이 담당한 부고란에 누구의 죽음을 다룰 것이냐는 점이었다. 최종 후보는 미국의 SF 소설가와 전 여당 대표, 둘 중 하나였다. 아무도 읽지 않는 신문 부고란에 누구를 쓰든 무슨 상관이겠느냐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정기에게는 앞의 두 고민만큼이나 심각한 고민이었다. 앞의 두 고민은 과거의 일에서 비롯된 결과를 수습하는 것이었지만, 세 번째 고민은 미래를 결정하는 것이라고 정기는 생각했다. 과연 소설가냐, 정치인이냐. 정기의 고민은 여름만큼이나 깊어졌다. 2 노트북 화면 너머로 신문사 후배인 은영이 지나가고 있었다. “휴가는 즐거웠어?” 정기가 알은체를 했다. “줄곧 비만 내렸잖아요. 태풍이 온다는데 어떻게 해요?” 잔뜩 낯을 찌푸리며 은영이 말했다. “태풍이 온다는 예보가 있었으면 가지 말았어야지.” “그런 거 따지고 들면 아무 데도 못 가죠. 태풍 지나갈 때 제주 안 있어 봤죠? 그게 진짜 여름이더라구요. 바람이 몰아치는데, 어휴, 엄청났어요. 그러더니만 휴가 마지막 날이 되
- 관리자
- 2025-06-01
바람 부는 날 정기현 단지는 어둠에 잠겨 있었다. 펜스와 인접한 아파트 건물들은 가로등 불빛을 받아 그 형태를 짐작할 수 있었으나, 단지 안쪽으로 시선을 옮기면 어둠의 수심이 깊어져 모든 것이 감추어졌다. 아침이고 저녁이고 긴긴 태양 볕 아래 그 흉물스러움을 남김없이 드러내던 여름과는 달리, 겨울의 단지는 어딘가 의뭉스러워 보였다. 이야기를 가득 품은 고성처럼 보이기도 하였다. 내가 살고 있는 주택 앞, 단군 이래 최대 규모의 재건축 단지라는 별칭이 붙은 아파트 단지는 조합원과 건설사 간 충돌로 공사가 중단되어 짓다 만 아파트 건물들이 2년 동안 그대로였다. 1만 5천 가구를 수용할 수 있다며 대대적으로 착공에 들어갔던 대규모 단지는 2차선 통행로를 중심으로 양분되어 있었는데, 문득 그 길을 걷고 싶다는 생각이 든 것은 이번 겨울부터였다. 출근 버스를 타기 위해 정류장까지 가려면 펜스가 세워지기 전보다 30분씩은 더 둘러 걸어야 했다. 고개를 푹 숙이고, 아직 잠에서 온전히 깨어나지 못한 상태로 정류장까지 걸을 때면 아파트 중앙 통행로에서 불어오는 거센 바람 소리가 들려왔다. 솔바람, 산들바람 아니고 토네이도에 가까운 세기였다. 물론 토네이도를 직접 겪어 본 적은 없지만···. 사람 하나는 거뜬히 날려 버릴 듯 기세 좋은 바람이었다. 단지 바깥은 바람 한 점 없이 잠잠했으므로, 이는 분명 바람길을 잘못 낸 시공 탓에 불어 대는 건물풍일 터였다. 거센 바람에 펜스가 흔들리며 콰챵- 하는 소리를 낼 때면 살을 에는 새벽녘 추위도 어쩐지 더욱 견디기 어려워져 굳게 잠긴 펜스를 원망하게 되었다. 자물쇠를 열고 단지 가운데 통행로로 다닐 수 있다면 그 끝의 버스 정류장에 금세 도달할 텐데. 아침마다 30분씩은 더 자고 나올 수도 있을 텐데. 내게는 바람쯤이야 잠을 조금이라도 더 잘 수 있다면 얼마든지 견딜 수 있는 문제였다. 한파 특보 경보 문자가 알람보다도 일찍 울려 잠을 깨웠던 날, 나는 빌라 현관을 벗어나 오른쪽 인도로 걷는 대신 길 건너 펜스 쪽으로 향했다. 펜스 출입구에는 주먹만 한 자물쇠가 굳게 걸려 있었다. 화풀이라도 하듯 자물쇠를 세게 두 번 당겨 보았는데 그것만으로도 자물쇠가 훌렁 풀려 버렸다. 펜스 안쪽으로 손을 쏙 넣어 자물쇠가 걸려 있던 걸쇠를 풀고 출입문을 열자 눈앞에 펼쳐진, 소리로만 접하던 바람의 길. 이용자가 나 혼자뿐이라 길은 실제 너비보다도 광활해 보였다. 건축 자재들, 내부 설비들이 군데군데 널브러져 있었고 고목처럼 주차되어 있는 승합차도 몇 보였다. 길 가장자리에도 단지로의 진입을 막는 펜스가 설치되어 있어 잠시 길과 나뿐인 세계에 진입한 것만 같았다. 통행로는 야트막한 고갯길이었다. 바람은 듣던 대로 거세었다. 나는 두 손으로 외투를 꼭 여민 채 거센 바람에 맞서 걸었다. 두 발이 동시에 떨어지는 순간 바람에 휘말려 공중으로 붕 떠오를 것 같아 한 발이 떨어지면 다른 한 발은 땅에 꼭 붙어 있도록 의식하며 걸어야 했다. 고갯길의 고
- 관리자
- 2025-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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