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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의 다카코

  • 작성일 2020-01-01

[단편소설]



이지의 다카코



정은우




이지는 다카코의 전화를 제때 받지 못했다. 마침 점심시간이라 사무실에는 이지와 케빈뿐이었다. 이지는 케빈에게 양해를 구한 후 다카코에게 전화했다. 다카코가 있는 서울과 이지가 있는 뉴욕 사이에는 열세 시간의 시차가 있었다. 그러나 다카코는 통화연결음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전화를 받았다. 그녀는 입원 중이라고 했다.
"괜찮으신 거예요?"
"고작 일사병이야."
다카코는 별일 아니라는 양 코웃음을 쳤다. 그녀는 집 바깥에 둔 선인장 화분에 물을 주러 나갔다가 쓰러졌다고 했다. 옆집 대학생이 그녀를 발견해 병원까지 데려다주었다. 이제는 옆집에서 아무리 시끄럽게 굴어도 불평할 수 없겠네, 다카코는 진심으로 분한 눈치였다. 그녀는 이지에게 제주행 비행기 탑승 일자와 퇴원 예정일이 겹치는지 확인해 보라고 채근했다.
"괜찮으신 거예요?"
"당연하지. 고작 일사병인데. 너희 외할머니한테 말하지 마라."
"제주도랑 병원 중 어떤 거요?"
"둘 다지. 언니 뒤집어져."
"지금이라도 솔직하게 털어놓으시는 건 어때요?"
"뒷감당은 어쩌고?"
다카코의 말마따나 고백 후 마주할 상황이 더 난처했다. 몇 년 전 이지의 남동생 영수가 친구들과 한국으로 여행을 다녀온 적이 있었다. 그때 외할머니는 입에 거품을 물 정도로 화를 냈다. 영수는 외할머니에게 한국이 얼마나 안전한 곳인지 해명하려 들었다. 자정이 지나도 거리는 밝고 사람들도 많이 다닌다고. 외할머니는 좀처럼 화를 누그러뜨리지 않았다. 영수는 결국 다시는 한국에 가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서울만 해도 난리법석을 떠는데 제주도라니. 이지는 외할머니가 얼마나 화를 낼지 상상조차 하기 두려웠다.
"그런데 선인장은 사막에 사니까 더위에 강하잖아요."
"강하면 뭐 하니?" 다카코가 가당찮다는 어조로 말했다. "한국 날씨가 얼마나 더운데. 선인장도 가시 끄트머리가 갈색으로 탈 정도야."
그녀는 통화 마지막에 여권을 꼭 챙기라고 당부했다. 이지가 스마트폰을 내려놓자 맞은편 파티션에 앉은 케빈이 그녀에게 과자 봉지를 내밀었다. 얼마든지 가져가. 이지는 사양하지 않았다. 케빈은 누구와 통화했는지 물었다
"이모할머니."
"맞다. 같이 여행 간다고 했지. 대단하네. 난 우리 이모할머니와 함께라면 근처 월마트도 가고 싶지 않은데." 케빈이 울먹거리는 척했다. "꼭 돌아와야 해. 이지."
"그사이에 설계도가 통과되면 생각해 볼게."
"망했네. 도안 보니까 한 층 다 뜯어야 하던데." 그가 투덜거렸다. "안 돼, 내 아시안 동포가 사라지면 난 멸종 위기라고."
케빈다운 농담이었다. 작년 말 그는 친형의 파혼 때문에 가족들의 전화에 수시로 시달려야만 했다. 설계사무소 동료들은 대체로 좋은 사람들이었다. 다만 그들은 케빈이 그 전화를 한 통이라도 못 받거나 도중에 끊을 경우 어떤 참사를 맞게 될지 상상하지 못했다. 소장은 케빈이 클라이언트와 회의 도중 전화를 받으러 나가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케빈은 특유의 익살로 푸념과 하소연을 섞어 열심히 사과했다. 덕분에 소장을 비롯한 모두가 웃으면서 사건은 일단락되는 듯싶었다. 그로부터 몇 달 후 미술관 설계팀 명단에서 케빈이 누락되기 전까지는. 케빈은 명단을 확인하자마자 말없이 소장실로 향했다. 설계사무소에 들어오는 의뢰는 자질구레한 개축이나 확장이 다수였다. 신축은 드물었다. 특히 미술관은 더했다. 사무소에서 미술관 의뢰를 맡은 후 케빈은 가끔씩 구글 뷰로 미술관이 들어설 부지를 살펴보곤 했다. 침착하고 진지한 눈빛이었다. 이지는 일하는 척하면서 케빈의 옆모습을 곁눈질했다. 낯설게 느껴졌지만 싫지는 않았다. 명단은 별다른 소요 없이 수정되었다. 이지는 케빈에게 소장을 어떻게 설득했는지 물어보았다. 케빈은 어깨를 한 번 으쓱하더니 대답했다. 형이 두 번째로 파혼하는 일은 없을 거라고 했지.
그 후로 케빈은 사무실에서 가족과 통화하지 않았다. 이지는 왠지 아쉬웠다. 그녀는 예전에 케빈이 중국어로 어떻게 말하는지 들은 적이 있었다. 케빈은 어두컴컴한 복도 구석에 서서 아주 느리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누군가에게 말을 건넸다. 그는 평소에 공격적으로 들릴 만큼 빠르게 말했다. 가끔 몇몇 친한 사람들과 대화할 때면 그 기세도 살짝 누그러졌지만. 이지는 중국어를 몰랐다. 다만 그가 더듬거리면서도 침착하게 한 마디씩 이어 나가고 있다는 것만큼은 알 수 있었다.


다카코는 처음으로 이지에게 악수를 청한 어른이었다. 이지는 당시 열 살 어린애에 지나지 않았다. 어른들은 보통 이지와 영수 남매를 다짜고짜 껴안거나 머리를 쓰다듬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남매의 의사는 묻지 않았다. 다카코는 이지가 손을 내밀 때까지 잠자코 기다렸다. 그녀는 흰 실로 섬세하게 짜인 장미무늬 레이스 장갑을 끼고 있었다. 나뭇가지처럼 곧고 가느다란 손은 무엇이든 잡으면 놔주지 않을 것 같았다. 이지는 망설인 끝에 겨우 손을 내밀었다. 다카코는 이지의 손을 지그시 잡았다가 얼른 놓았다. 조그만 새를 감싸듯 조심스럽고 서투른 손길이었다.
그 후 다카코는 매해 추수감사절마다 남편 미노루와 함께 미국에 왔다. 이지의 외할머니는 하나뿐인 여동생이 고작 사나흘밖에 머무르지 않는다고 불평했다. 다카코는 일본과 샌프란시스코를 오갈 시간을 내느라 얼마나 힘든지 아느냐고 맞섰다. 하루라도 집을 비우면 정원이 엉망이 된다면서. 외할머니 말을 한 번도 거스른 적이 없었던 이지와 영수로서는 그저 놀랍기만 했다. 다카코는 단순한 손님이 아니라 이 집안의 군주였다. 그녀와 맞설 적수는 없었다. 다카코가 조카 손주인 이지와 영수에게 이모할머니 대신 이름으로 부르라고 강권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너희는 미국인이잖니."
"그럼 이모할머니 진짜 이름은 뭔데요?"
"다카코." 다카코는 아이들의 반박을 일축해 버렸다. "너희 외할머니도 지금은 마리아잖아. 싫으면 부르지 마라."
다카코의 말마따나 이지와 영수는 미국에서 태어났고 영어가 더 익숙했다. 하지만 외할머니를 이름으로 부른 적은 없었다. 게다가 다카코가 있는 동안 집 안에서 한국어만 써야 했다. 남매가 할 줄 아는 한국어라고는 표준 한국어 교본에 나오는 표현이 다였다. 남매의 부모는 종종 한국어 단어를 혼동해서 말문이 막히곤 했다. 다카코의 남편 미노루는 한국어를 한마디도 할 줄 몰랐다. 결국 추수감사절 식탁에서 유창하게 떠드는 사람은 외할머니와 다카코뿐이었다. 둘의 이야기는 속사포처럼 오갔지만 이지와 영수 남매의 귀를 사로잡기 충분했다. 남매는 외할머니의 손가락이 오사카의 양말 공장에서 일하느라 갈고리처럼 휘어버렸다는 이야기나 외할아버지를 따라 미국으로 이민 오는 동안 겪었던 고초는 이미 들은 터였다. 그러나 외할머니가 외할아버지와 데이트를 하던 중 발목을 접질리거나 다카코의 하오리를 슬쩍 입고 나가서 다카코와 목청 높여 싸웠다는 건 금시초문이었다. 가끔 이야기에는 표준 한국어 교본에 없는 단어들도 나왔다. 영수는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다가 넌지시 그 점을 지적했다. 다카코는 불쾌한 기색을 내비쳤다.
"네가 배운 건 육지 말이야."
"그게 맞는 말이래요."
"그럼 함부로 엿듣고 참견까지 하는 건 맞는 행동이라던?"
그녀는 고작 열세 살 먹은 조카 손자라고 해서 봐주지 않았다. 영수는 어깨를 떨군 채 제 방에 틀어박혔다. 이지는 모른 척했다. 그 사건 이후 누구도 다카코와 외할머니의 대화에 끼어들지 않았다.
한편 다카코의 남편인 나카하라 미노루는 누구에게든 다정한 사람이었다. 그는 늘 상냥한 눈빛으로 모두를 지켜보았다. 그의 트렁크는 미국에 올 때마다 선물로 가득 차 있었다. 그중 태반은 이지와 영수 차지였다. 이지는 물에 넣으면 한 장씩 꽃으로 피어나는 종이접기에 빠졌고 영수는 소금으로 만든 비스킷이 짜지 않고 달콤하다며 놀라워했다. 간혹 미노루가 남매에게 영어로 몇 마디 말을 걸었다. 그의 영어는 고전 희곡에서나 나올 법한 긴 어휘투성이였고 어조는 고색창연했다. 되레 남매가 무슨 뜻이냐고 되물어 볼 때가 많았다. 미노루는 고심 끝에 좀 더 쉬운 단어를 찾아내거나 그 뜻을 풀어서 설명했다. 그러면 다카코는 남매에게 영어도 할 줄 모르냐며 핀잔을 주었다. 다카코와 외할머니가 회포를 푸는 동안 미노루는 뉴욕의 고서점을 순례하면서 책을 사 모았다. 그의 빈 트렁크는 책으로 가득 찼다. 그는 남매에게 벽을 헐어 방 두 칸을 커다란 서재로 만든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책을 읽을 때마다 들리는 새소리를 제법 그럴듯하게 흉내 내기도 했다.


공항 바깥은 아직 찌는 듯이 더운데도 다카코는 발목까지 내려오는 치마에 긴 카디건을 걸치고 있었다. 늘 끼고 있는 레이스 장갑도 여전했다. 다카코는 역시 다카코였다. 덕분에 이지는 가지각색의 트렁크와 사람들로 붐비는 공항에서 다카코를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그녀는 새삼 반가운 마음에 다카코를 향해 손을 흔들었지만 다카코는 샐쭉한 표정으로 눈을 흘겼다.
"요즘 미국에서는 머리카락을 풀어헤치고 다니는 게 유행이니?"
다카코는 늘 귀밑까지 닿을락말락한 길이의 단발을 고수했다. 이지는 머쓱하게 웃은 후 산발이 된 머리카락을 하나로 묶었다. 다카코는 혀를 짧게 찬 뒤 가방에서 손바닥만 한 종이 상자를 꺼냈다.
"괜히 비행기에서 칠칠맞게 흘리지 말고 지금 제대로 앉아서 먹어라."
이지는 순순히 의자에 앉았다. 상자에는 무심하게 뚝뚝 자른 검은색 떡과 조그만 포크가 들어 있었다. 이지가 좋아하는 와라비 모치였다.
"콩가루랑 꿀은요?"
"바라는 것도 많구나." 다카코는 면박을 준 후 조그만 봉지를 건넸다. "콩가루야. 꿀 대신 설탕을 섞었어."
와라비 모치는 이 끝에 닿을 때 단단한 듯싶다가도 이내 쉽게 쪼개졌다. 씹으면 고소하고 달달했다. 이지는 열심히 모치를 먹었다.
"너희 외할머니는 별말 없던? 상견례에 빠진다는데."
"상견례요?" 이지는 간신히 그 단어의 뜻을 떠올렸다. "그냥 가족 여행이죠. 리사는 한국인이 아니라 라티나예요. 부모님이 멕시코 사람이거든요."
라티나? 다카코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리사는 영수와 결혼할 사람이었다. 가족들은 리사와 영수가 있는 플로리다로 가족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부모님은 숙소를 예약하고 함께 식사할 레스토랑을 물색하느라 바빴다. 거동이 불편한 외할머니조차도 손자며느리를 만나기 위해 기꺼이 남동쪽 끄트머리까지 비행기를 타겠다고 나섰다. 그녀는 평소 비싸다고 가지 않았던 미용실에 가서 머리카락을 갈색으로 염색했다. 이지를 제외한 가족 전원이 들떠 있었다. 이지는 급하게 출장이 잡혀서 플로리다 여행에 낄 수 없다고 둘러댔다. 하나밖에 없는 남동생과 일 중 무엇이 중요하냐는 꾸중을 예상했지만 아무도 못마땅한 기색을 내비치지 않았다. 외할머니조차 별말 없이 그 변명을 수긍했다. 영수는 되레 이지를 다독였다. 결혼식은 내년이니 서두를 필요는 없다고 했다. 이지는 그 말이 자신에 대한 배려인지 그들의 안도인지 잠시 의문이 들었다.
"이지, 리사라는 애는 뭘 좋아하니?"
이지는 다카코의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연거푸 재채기만 했다. 콩가루 때문이었다. 다카코는 천천히 먹으라고 타박했다. 간신히 재채기가 멎자 이지는 천천히 남은 모치를 먹었다. 공항의 천장은 까마득하게 높고 환했다. 그 빛은 매끄러운 바닥에 반사되어 곳곳을 밝혔다. 바닥 위로 수천 개의 트렁크 바퀴들이 오가는 소리와 사람들이 나누는 대화가 거침없이 쏟아졌다. 그 가운데 어두운 구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공항은 여러 곳에서 온 사람들을 한데 모았다가 제각기 가야 할 곳으로 흘려보냈다. 아무리 허둥대거나 안절부절못하는 사람이더라도 결국 자신이 타야 할 비행기를 타고 떠났다.
이지와 다카코도 무사히 제주행 비행기에 탑승했다. 기내 스피커로 제주도에 관한 설명이 흘러나왔지만 귀담아듣는 승객은 몇 없었다. 이지는 열심히 귀를 기울였지만 종종 천혜의 자연 같은 어려운 단어들이 튀어나왔다. 다카코는 좌석에 앉자마자 눈을 감아버렸다. 이지는 그녀에게 물어볼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그저 다카코의 안색만 살필 뿐이었다. 다카코는 늘 끼고 다니던 레이스 장갑을 무릎 위에 고이 개켜 놓았다. 벨트 잠금쇠 위로 포갠 그녀의 창백한 손등은 푸른 혈관들로 한껏 이지러져 있었다. 이지는 고개를 돌려 창 너머 하늘을 보았다. 액자처럼 반듯하게 잘린 하늘은 푸르고 평온했다.
오래전 다카코 내외는 이지와 약혼한 정준에게도 선물을 주었다. 선물은 흑단으로 만든 펜 받침대였다. 그 펜 받침대는 모양새가 매끈하고 날렵했다. 별다른 장식은 없었지만 거무스름한 표면은 묘한 빛을 머금고 있었다. 어디 하나 허투루 마감된 구석이라곤 찾기 어려웠다. 이지의 파혼 후 누구도 그 아름다운 받침대의 행방을 묻지 않았다. 다카코도 마찬가지였다.
이지는 스카이프로 리사와 통화했다. 그녀가 플로리다에 가지 못해서 유감이라고 말하자 리사는 살짝 벌어진 앞니를 남김없이 드러내면서 웃었다. 괜찮아요. 이지. 이지는 리사가 좋았다. 하지만 자신이 다카코와 제주도에 가지 않았다 한들 가족 여행에 동참했을지 확신할 수는 없었다.


다카코는 두 조카 손주들을 편애하지 않았다. 다만 영수보다 이지라는 이름을 더 마음에 들어 했다. 세상을 좀 편하게 살아가야지. 정준도 처음에는 이지의 이름이 영어 단어에서 따온 줄 알았다고 했다. 한국에서 흔히 쓰는 단어는 아니라고도 덧붙였다. 이지라는 이름은 어머니가 지어 준 것이었다. 어머니는 영어로 발음하고 표기하기 쉬운 한국 이름을 찾느라 주립 도서관의 몇 안 되는 한국어 서적과 인터넷 문서들을 샅샅이 살폈다. 한국이든 미국이든 작명은 어려운 일이었다. 어머니는 이지라는 이름을 외할머니의 불교 경전에서 찾았다. 이성과 감성이라는 두 관문을 거쳐 사물의 본질을 꿰뚫고야 마는 진리. 그러나 사람들은 이지의 이름을 영어 단어로 오해하거나 제멋대로 판단했다. 어머니가 작명에 들인 노력이나 이름의 멋들어진 의미가 무색할 정도였다. 그 후 영수의 이름은 아버지가 따로 지었다.
정준은 자초지종을 듣고 난 후 정중하게 사과했다. 묘한 위로였다. 미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이지와 달리 정준은 한국에서 취업 비자로 미국에 왔다. 그는 비자를 얻기 위해 인터뷰와 심사, 포트폴리오까지 수많은 관문을 거쳤다. 여비를 마련하는 일도 쉽지 않았다. 이지는 정준이 왜 미국을 택한 것인지 궁금했다. 정준의 대답은 평소와 달리 짧았다. 새로운 삶을 살고 싶어서. 정준은 그가 그리는 설계도처럼 군더더기 없고 곧은 사람이었다. 벽이 있으면 넘고 전봇대가 있으면 뽑아야 한다는 마음가짐이지. 정준의 말마따나 그는 클라이언트의 부당한 요구에 뜻을 굽히지 않았고 자신의 의견을 솔직하게 피력했다. 이지는 그런 정준이 좋았다.
하지만 정준의 태도나 마음가짐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도 있었다. 정준의 아파트 관리인은 며칠째 수도를 고쳐 주지 않았다. 정준은 아파트 관리인이 자신의 영어를 못 알아듣는 척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집주인에게 정중한 항의 메일을 몇 통씩 보냈지만 답장은 없었다. 길거리에서 마주치는 어린아이들은 정준을 향해 눈꼬리를 길게 잡아당겼다. 정준은 그 아이들에게 지나치다 싶을 만큼 고함을 치기도 했다. 그가 비극이라고 생각했던 일들은 이지에게 사소한 일상일 뿐이었다. 아파트 관리인들은 대부분 불친절했고 아이들은 반응할수록 더 심하게 놀리곤 했다. 이지는 정준이 좀 더 세련되게 대처하길 바랐다. 재치 있는 대꾸가 어렵다면 웃거나 못 본 척 무시하는 것도 방법이라면 방법이었다. 그녀는 정준이 일종의 열병을 앓고 있다고 생각했다. 시간이 지나면 정준도 점차 적응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정준의 영어는 좀처럼 늘지 않았다. 사용하는 어휘 수도 점점 줄어들었다. 종종 그는 아예 영어로 말하기를 포기했다. 대신 한국어로 중얼거리는 빈도가 높아졌다. 이지는 그의 한국어를 다 알아들을 수 없었다. 얼추 이해하는 척했지만 물이 새는 천장에 임시로 방수용 스프레이를 뿌리면서 버티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때마침 그들이 근무하는 설계사무소에서 새로운 프로젝트를 진행하게 되었다. 이지는 차라리 바쁜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둘은 시계추처럼 규칙적으로 설계사무소와 집만 오갔다. 불친절한 아파트 관리인이나 시끄러운 아이들을 신경 쓸 겨를조차 없었다.
정준은 떠났다. 클라이언트가 그의 설계도를 세 번 반려한 후였다. 정준은 이메일로 이지에게 파혼 의사를 밝혔다. 이지는 그의 아파트로 달려갔지만 이미 텅 비어 있었다. 정준에게 계속 전화를 걸었지만 그는 받지 않았다. 영수는 누나의 파혼 소식을 듣고 화를 냈다. 너무나도 쉽게 정준을 배신자로 몰아세웠다. 이지는 정준을 비난하고 싶지 않았다. 분하거나 슬프기는커녕 홀가분했다. 파혼 통보는 일종의 항복 선언에 가까웠다. 영수는 깔끔하고 튼튼해 보이는 건물이라면 그만큼 축대와 합판, 철골과 시멘트로 토대가 단단하게 구축되어 있다고 믿는 사람들에 속했다. 그러나 누수 흔적도 없는 깨끗하고 단단한 외벽을 뜯어내면 뒤틀린 축대와 곰팡이, 뚜렷하게 금이 가고 구멍이 뚫린 시멘트 내벽을 발견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 이지는 정준이 한국으로 돌아갔다고 믿었다. 며칠 후 경찰이 설계사무소로 찾아오기 전까지는. 정준은 마트 지하주차장에서 강도와 마주쳤다. 단순히 위협과 절도로 무마될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정준은 있는 힘껏 저항했고 발사된 총알은 그의 관자놀이에 박혔다. 며칠 후 정준의 페이스북에는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글들이 올라왔다.
이지는 다니던 설계사무소를 그만둔 후 방에 틀어박혔다. 가족 중 누구도 그녀의 방문을 두드릴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러던 중 미노루의 전화가 왔다. 그는 이지에게 나가사키에 놀러오라고 권했다. 네가 좋아하는 종이접기를 사줄게. 그는 아직도 이지가 트렁크 속 장난감에 눈을 반짝이던 어린애인 줄 아는 모양이었다. 이지는 저도 모르게 웃어버렸다. 통화가 끝날 즈음 미노루는 이지를 초대하자고 먼저 말을 꺼낸 사람은 다카코라고 말했다. 믿기 어려운 말이었다.


다카코는 제주도에서 줄곧 일본어만 썼다. 그녀는 호텔 주소를 적은 쪽지를 택시 기사에게 건넬 때도 일본어로 말했다. 택시 기사도 일본어로 제주도 방문을 환영한다고 인사를 건넸다. 호텔 직원은 택시 기사보다 유창한 일본어로 그들을 안내했다. 그는 다카코를 나카무라 부인이라고 불렀다. 이지가 할 줄 아는 일본어라곤 간단한 인사말 정도였다. 그녀는 방에 들어설 때까지 입도 벙긋하지 않았다. 직원은 트렁크를 방까지 옮겨 주었다. 다카코는 바로 소파에 가로누웠다. 그녀의 낯빛이 파리했다. 이지는 방과 방을 돌아다니면서 전기 포트를 찾았다. 간신히 포트에 물을 끓이는 동안 다카코가 손가락으로 캐리어를 가리켰다. 캐리어에는 차통과 거름망 등 간단한 다구가 들어 있었다. 이지는 나름 노력했지만 미처 거르지 못한 찻잎들이 잔 가장자리를 둥둥 떠다녔다. 그 점만 빼면 제법 그럴싸했다. 다카코는 두어 모금 정도 차를 마신 후 소파 앞 탁자에 잔을 내려놓았다. 이지는 제 몫으로 우린 차를 홀짝거렸다. 차는 너무 쓰고 떫었다.
"오늘은 쉬세요. 내일부터 움직여요. 어디 가실래요?"
"내일." 다카코는 이마를 손으로 덮은 채 뇌까렸다. "너나 구경하고 오렴."
이지는 포트에 남은 물을 확인한 후 조심스럽게 방을 나왔다. 복도에는 붉고 두툼한 카펫이 깔려 있었다. 얼마나 푹신한지 발소리조차 나지 않았다. 이지는 복도를 수차례 왕복한 끝에 다카코가 있는 방문 앞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방문에 귀를 댄 채 무슨 소리라도 나길 기다렸다. 그 너머는 잠잠했다. 이지는 데스크로 내려가 영어로 된 관광 지도와 책자를 모조리 챙겼다. 호텔 로비의 가죽 소파에서 살펴본 결과 대부분 비슷한 내용이었다. 제주도는 어딜 가든 테마파크와 박물관, 공원과 아쿠아리움 등 구경거리로 가득했다. 책자는 그 구경거리들에 대해 온갖 미사여구와 찬사를 퍼붓고 있었다. 그리고 잊지 못할 추억을 선사할 것이라는 약속도 남발했다. 이지는 하릴없이 그 모든 경로와 이동시간을 구글 지도로 살펴보았다. 그녀는 내일 동선을 짠 후 페이스북에 접속했다. 그녀는 영수가 가족들이 플로리다에 잘 도착했다며 보낸 메시지에 스티커를 보냈다. 광고 메시지는 삭제했다. 케빈이 보낸 메시지도 있었다. 내 아시안 동료가 그리워. 그의 익살은 여전했다. 이지는 망설였으나 이내 능청을 섞어 답장했다. 나도 내 아시안 동료가 보고 싶네.


이지는 미노루의 전화를 받고 두 달 후 나가사키에 도착했다. 봄 막바지라 벚꽃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다카코와 미노루의 집은 불그스름한 기와를 올린 목조 가옥이었다. 회색 돌담을 둘러친 가옥은 인근의 콘크리트 주택들에 비해 돋보였다. 이지가 담이 너무 높다고 말하자 다카코가 맞받아쳤다. 너 같은 참견꾼들 때문이지. 집은 두 사람이 사는 것치고 넓었다. 그러나 늘 먼지 하나 없이 깨끗했다. 종종 이지가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할 때면 방과 방 사이를 오가는 바람소리가 들렸다. 다카코는 이지가 온종일 방 안에 틀어박혀도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다. 다만 다다미에 과자 부스러기를 흘리거나 이부자리를 시원찮게 정돈할 때만 매섭게 꾸짖곤 했다. 미노루는 종일 서재에서 책을 읽었다. 어릴 적 이지와 영수에게 들려준 이야기대로 벽을 터서 만든 서재였다. 얼마나 책이 많은지 책장에 빽빽하게 꽂혀 있을 뿐 아니라 바닥에도 첩첩이 쌓여 있었다. 미노루는 그중 영어로 된 소설책 몇 권을 골라 이지가 묵고 있는 손님방 선반에 꽂아 두곤 했다. 이지는 그 책들을 훑어보거나 노트에 설계도를 끼적거리면서 무료하게 시간을 보냈다.
이지의 외출이라고는 일주일에 두어 번 다카코 내외와 산책을 나가는 게 다였다. 시끌벅적한 아케이드를 지나면 고적한 나가시마가와 강가가 나왔다. 이지와 다카코가 한국어로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미노루는 태평하게 강만 구경했다. 다카코는 종종 이지가 아직 태어나지 않았던 과거의 이야기를 드문드문 늘어놓았다. 이지는 외할머니가 막 일본으로 건너왔을 때 공장에 취직했다는 이야기는 익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다카코가 전통 과자 가게 점원으로 일했다는 사실은 몰랐다. 이지가 알기로는 당시 외할머니나 다카코나 할 줄 아는 일본어가 거의 없었다. 과자 가게 사모님은 처음에는 고양이 손이라도 빌린다는 마음으로 다카코를 마지못해 임시 점원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다카코는 나비 날개처럼 얇은 종이들을 구김 하나 없이 몇 장씩 겹쳐서 포장하고 복잡한 매듭도 너끈히 묶을 만큼 손끝이 야무졌다. 일본어는 잘 못해도 눈치가 빨라 손님들이 원하는 과자를 진열장에서 집게로 흠집 하나 없이 집어냈다. 그사이 점점 일본어 실력도 늘었다. 가게 사모님은 다른 일본인 점원을 뽑는 대신 다카코를 견습 점원으로 채용하기로 했다. 꼼꼼하고 눈치 빠른 일본인 점원은 수두룩했지만 다카코만큼 손이 아름다운 사람은 없었다. 다카코의 손은 사슴뿔처럼 희고 곧았다. 미노루는 다카코의 손에 반해 수시로 가게를 드나들었다. 그는 다카코에게 거미줄처럼 섬세하게 짜인 레이스 장갑을 선물했다. 미노루가 선물한 레이스 장갑이 열 켤레를 넘어갈 즈음 다카코는 그의 청혼을 받아들였다.
"가게 사모님이 얼마나 실망했는지 몰라. 네 눈을 믿었는데 골라도 고작 이런 사람을 고르냐면서 대놓고 핀잔을 주더라니까. 듬직한 맛도 없는 가무잡잡한 섬 출신 서생이라니 일찍 병사할지도 모른다고 했어."
"못됐네요."
"함부로 말하지 마라." 다카코는 엄중하게 이지를 꾸짖었다. "사모님은 내가 직인과 결혼해서 가게를 이었으면 했어."
과자 가게 사모님은 슬하에 자식을 일찍 떠나보냈다고 했다. 미노루를 탐탁하게 여기지는 않았지만 다카코의 지참금까지 마련해 주었다.
"부모님이나 다름없는 분이셨어."
"가게도 그냥 물려받으면 되잖아요."
"실례야. 적당히 맛만 있으면 된다고 으스대면 가게 이름에 먹칠하는 꼴이지. 손님에게 내놓는 과자는 전심전력으로 만들어야 해."
"과자가요?"
"사모님이 너무 기대했어." 다카코는 손으로 이마를 가볍게 훔쳤다. 날씨는 선선했다. "더 이상은 무리였어."
이지는 무심코 다카코의 손을 보았다. 다카코의 손등을 감싼 하얗고 섬세한 장갑 너머로 파란 힘줄이 도드라져 있었다. 미노루가 다가와 다카코를 부축했다. 이지는 미노루가 있던 자리에 서서 강을 보았다. 강은 끈덕지게 흘러갔고 그 위로는 해가 하얗게 내리쬐고 있었다. 간혹 단단하고 불투명한 물줄기 아래로 그림자처럼 어두운 빛깔의 돌들이 비쳤다.
이지가 나가사키에서 머무른 시간은 나비처럼 흔적이나 소리 없이 날아갔다. 정원에 단풍이 질 무렵 다카코는 이지가 쓰던 홑겹 이불을 빨아서 넣고 도톰한 솜이불을 꺼냈다. 반나절 내내 햇볕에 말린 이불에서는 정원의 풀 냄새가 났다. 이지는 그 위에서 마음껏 뒹굴었다. 구상한 설계도는 한 장도 완성하지 못했고 포트폴리오도 그대로였다. 다카코는 이지를 왜 나가사키에 초대했는지 묻지 않았다. 조카 손녀를 위로하거나 격려하는 일도 없었다. 다카코는 다카코였다.
얼마 후 이지는 미국으로 돌아가겠다고 말했다. 머리가 하얗게 세기 전에 돌아가는구나. 다카코는 톡 쏘아붙였다. 그녀는 이지가 떠나는 날까지 하루도 거르지 않고 와라비 모치를 만들어주었다. 미노루는 이지에게 알록달록한 비단 공을 선물했다. 공은 구를 때마다 맑은 방울소리를 냈다.


기껏 제주도에 왔지만 다카코는 근 이틀 내내 호텔에 붙어 있었다. 그녀의 동선이라곤 객실과 호텔 로비를 오가는 것이 다였다. 흔한 르네상스풍 외관과 달리 호텔 내부는 거무스름한 철제 프레임과 유리 등 현대적인 자재로 지은 반구형 돔이었다. 돔의 유리벽은 바깥의 시선을 전면 차단했다. 하지만 안에서는 바깥 풍경을 구경할 수 있었다. 바람에 흔들리는 야자수 잎 끄트머리까지 선명하게 보였다. 로비 바닥은 옅은 상아색 대리석이었고 기하학적인 문양의 카펫으로 덮여 있었다. 카펫을 따라 걷다 보면 고객들을 위한 공간이 나왔다. 그곳에는 팔걸이가 달린 일인용 소파들과 간이 테이블이 자리했다. 다카코는 그중 한 소파에 앉아서 손바닥만 한 일본어 문고본만 읽었다. 다 읽으면 다시 첫 장으로 돌아갔다.
이지는 렌터카로 제주도 곳곳을 쏘다녔다. 그녀는 아쿠아리움에서 어두운 물속을 하염없이 보면서 안내판의 물고기들을 찾는가 하면 테마파크에서 다른 관광객들의 사진을 찍어 주기도 했다. 제주도는 어딜 가나 구경거리가 있었다. 테디 베어 박물관도 그중 하나였다. 박물관 전시실을 다 돌아도 이지는 테디 베어와 제주도가 무슨 상관인지 알 수 없었다. 단 하나 테디 베어 박물관에서 정기적으로 엘비스 프레슬리 쇼를 공연한다는 점은 제법 흥미로웠다. 이지는 무심코 케빈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짤막한 퀴즈였다. 테디 베어 박물관에서 엘비스 프레슬리 쇼가 열린다면 엘비스로 가장한 사람이 나올까, 아니면 엘비스로 가장한 테디 베어가 나올까?
이지는 답장을 기다리는 대신 차로 해안도로를 달렸다. 차라곤 한 대도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망고 주스를 파는 푸드 트럭을 발견했다. 트럭 주인은 이지에게 어디서 왔느냐고 물었다. 이지가 미국에서 왔다고 대답하자 한국어를 잘한다는 칭찬이 돌아왔다. 주인은 미국에 비하면 제주도는 고산과 성산을 반나절 만에 오갈 수 있을 만큼 작다고 말했다. 이지는 기내 방송에서 들은 단어를 떠올렸다.
"그래도 천혜의 자연이죠?"
"용케도 그런 단어를 아네." 주인은 석연찮은 어조로 대답했다. "다들 그래서 여기가 천국인 줄 알더라고. 여기도 사람 사는 곳인데."
주인은 외딴 도로에서 누가 차를 태워 달라고 부탁해도 수락해서는 안 된다고 당부했다. 특히 혼자 다니는 여자는 조심해야지. 그는 강도를 만나면 차라리 뭐든 다 줘버리라고 했다. 죽느니 어떻게든 사는 편이 낫지. 이지는 잠자코 망고 주스만 마셨다. 주인은 그녀의 안녕을 빌어 주었다. 해브 어 나이스 트립. 이지는 그의 영어 발음을 칭찬했다. 그 칭찬이 꽤 흡족했던 모양인지 주인은 도로변까지 나와 손을 흔들었다. 이지는 푸드 트럭과 주인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달렸다. 트럭에서 흘러나오는 노래 소리가 희미해지고 이내 들리지 않을 즈음 그녀는 도로변에 차를 세웠다. 그리고 차 안에서 짧게 울었다.
푸드 트럭 주인이 한 조언은 이지에게 진저리가 날 만큼 익숙한 말이었다. 미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안전한 곳은 어디에도 없었고 안전해질 수도 없었다. 정준은 이지에게 한국을 떠난 이유를 말해 주지 않았다. 이지는 그가 미국에 품고 있는 기대와 희망을 이해하지 못했다. 도움을 바라거나 무지를 드러내면 얕잡아 보이기 마련이었다. 그녀는 미국이라는 곳에서 살아남기 위해 곳곳에 도사린 위험의 가능성들을 애써 무시했다. 화내느니 웃고 맞서느니 포기하면서 세련되게 넘기는 편이 나았다. 어설프게 호의를 보이거나 저항하면 죽을 수도 있었다. 살아남아야 했다. 그녀는 그 방식에 익숙해져 자신이 세련된 척하고 있다는 사실마저 잊어버렸다. 설령 정준에게 그 사실을 고백한다 한들 달라지는 것은 없었을 것이다. 얻는 건 기껏해야 얄팍한 동정뿐.
정준의 죽음에 대해서 이지를 탓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녀는 그저 정준의 전 약혼녀에 불과했다.


미노루는 나가사키의 가옥에서 눈을 감았다. 이지가 새로운 설계사무소에 취직해서 다섯 번째로 프로젝트를 맡을 즈음이었다. 다카코는 홀로 미노루의 초상을 치렀다. 이지를 비롯해 가족들이 도와주겠다고 나섰지만 다카코는 완고하게 거절했다. 추수감사절까지 한 달도 채 남지 않은 참이었다. 그녀는 비행기표도 환불할 수 없으니 혼자서라도 미국으로 오겠다고 말했다. 이지는 다카코가 도착할 시간에 맞추어 공항으로 마중을 나갔다. 다카코는 한참 후에야 게이트로 나왔다. 그녀는 숄더백 하나만 들고 있었다.
"트렁크는요?"
"없어졌어." 다카코는 숄더백을 단단히 움켜쥔 채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어차피 이거면 충분해."
분실된 트렁크는 끝내 찾을 수 없었다. 미노루는 없었지만 추수감사절은 작년과 다를 바 없이 흘러갔다. 다만 종종 대화가 맥없이 끊길 때가 있었다. 저녁 식탁에서 외할머니를 필두로 각자 짤막하게 기도했다. 다카코 차례가 되자 그녀는 평소처럼 아멘만 내뱉는 대신 잠시 입술을 달싹였다. 그러더니 일본어로 몇 마디 중얼거린 후 입을 다물었다. 아멘은 이어지지 않았다. 다음 차례인 영수가 대신 아멘을 말하면서 추수감사절 기도를 마무리했다.
다카코는 금세 나가사키로 돌아갔다. 그러고는 얼마 안 되어 한국에 가겠다고 전화로 통보해 왔다. 외할머니는 전화를 스피커 모드로 바꾼 후 떨리는 손으로 담배에 불을 붙였다.
"조만간 한국에서 전쟁이 난다잖니. 정 가고 싶으면 나중에 같이 가자. 지금은 아니야."
"언니는 나중에도 안 갈 거잖아."
수화기 너머에서 다카코가 날카롭게 대꾸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이지는 일부러 등을 돌린 채 커튼을 걷었다. 바깥은 맑았다.
"다 잊어버렸니, 우리가 거기서 어떻게 나왔는지? 뭘 더 바라니. 정 외로워서 그런 거면 여기 와서 나랑 살자." 외할머니는 말문이 막힌 양 잠시 허공을 주시했다. 희뿌연 담배 연기가 그녀의 얼굴을 뒤덮었다. "우리는 더 욕심 부리면 안 돼. 그러면 벌 받아."
다카코는 단호하게 반문했다.
"왜?"
통화를 마친 후 외할머니는 한참 동안 소파에 파묻힌 채 담배만 피웠다. 이지는 외할머니의 눈꺼풀이 잘게 떨리는 모습을 보았지만 차마 말릴 수 없었다. 외할머니는 가끔씩 다카코에게 일본에 남아 있는 사람들의 안부를 묻곤 했다. 연락이 끊겼다고 대답하면 외할머니의 낯빛은 창백해졌고 연락하고 있다고 대답하면 화색이 돌았다. 죽었다는 소식에는 안타까워했다. 일본에서는 죽은 사람을 화장하고 그 재를 가족들이 모셨다. 죽어서도 못 돌아가네. 한번은 다카코가 그렇게 중얼거린 적이 있었다. 그러자 외할머니가 일갈했다. 지옥에는 무엇 하러 가니.
다카코는 끝내 서울에 집을 얻었다. 이지의 어머니는 제 이모인 다카코가 걱정된다는 이유로 아버지의 친척들을 수소문했다. 덕분에 아버지도 모르는 먼 친척들이 서울에 산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다카코는 이지의 어머니가 불러 주는 연락처를 순순히 받아 적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 머나먼 친척들에게 단 한 번도 연락하지 않았다.


이지는 전기 포트에서 물이 끓는 소리에 눈을 떴다. 제주도에서 맞는 마지막 날이었다. 아직 동이 트지 않았는지 방 안은 어둑어둑했다. 다카코는 이지에게 방금 우린 차 한 잔을 내주었다. 차는 쌉싸름하니 단맛이 감돌았다. 쓰기는커녕 가라앉은 찻잎도 없었다.
"오늘 차 쓸 수 있니?"
"쓸 수 있죠. 공항 가서 반납하면 되니까요. 어디 가실래요?"
다카코가 지도에서 손가락으로 짚은 곳은 호텔에서 십오 분 남짓 떨어진 해변이었다. 다카코는 호텔 조식 시간까지 기다릴 수 없다는 양 성화를 부렸다. 이지는 텅 빈 배를 움켜쥔 채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갔다. 다카코는 조수석에 앉아 이지의 입에 사탕을 넣어 주었다. 사탕이 다 녹을 즈음 차는 목적지에 다다랐다. 해변 입구에는 금모래 해변이라는 팻말이 꽂혀 있었다. 다카코는 그 이름이 마음에 안 드는 눈치였다. 이지는 안전벨트를 풀었다.
"내릴까요?"
"아니." 다카코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잠깐이면 돼. 아주 잠깐만. 넌 자렴."
이지는 좀처럼 눈을 붙일 수 없었다. 그녀는 다카코의 부탁으로 자동차 헤드라이트도 껐다. 바다는 어둠침침했다. 파도가 해변으로 밀려왔다가 회색 포말만 남기고 물러났다. 하늘이 점차 옅어졌지만 두텁고 짙은 안개가 주변을 감싸고 있었다. 그 사이로 하늘을 향해 날카롭게 치솟은 소나무 숲과 야트막한 언덕이 어슴푸레하게 보였다. 언덕에 거무스름한 형체가 서 있었다. 사위가 차차 트이면서 그 정체가 드러났다. 돌탑이었다.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었고 높낮이는 달랐지만 서로 어우러지면서 능선을 그렸다. 그 묘하게 완만한 선은 바다를 향해 엎드린 채 무언가를 간절히 비는 사람의 형체 같았다.
안개가 완전히 걷히자 푸른 하늘이 드러났다. 차창 너머 해변은 햇빛을 받아 금빛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이지의 눈에는 한 폭의 그림처럼 평화롭고 아름다워 보였다. 다카코는 한참 동안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그 광경을 묵시했다. 이내 그녀는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제 충분해. 그만 가자. 이지는 그제야 다카코가 레이스 장갑을 벗어 두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지가 차에 시동을 걸자 다카코도 다시 레이스 장갑을 꼈다. 차는 해변을 벗어나 도로로 진입했다. 공항까지 얼마나 남았는지 알려주는 표지판이 보였다. 이지는 라디오를 틀었다. 날씨 예보가 나왔다.
"비행기는 제때 뜨겠네요."
"다행이지. 여긴 언제 비바람이 내리칠지 모르거든."
다카코는 평소처럼 새침하게 대꾸했다. 이지는 한결 마음을 놓았다.
"요 며칠은 맑았는데요."
"운이 좋았지. 폭풍이라도 불면 이 차도 뒤집어질걸."
"그러면 돌탑은 왜 쌓아 뒀대요. 폭풍우가 오면 위험하잖아요."
"그런 것도 모르니? 대학 공부는 헛으로 했구나."
다카코의 목소리에는 한심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이지는 풀죽은 목소리로 돌탑의 의미는 안다고 중얼거렸다. 한국뿐 아니라 어느 나라든 돌탑을 쌓으면서 소원을 비는 풍습이 있었다. 이지는 텍사스에서는 세계 돌쌓기 챔피언십도 열린다고 첨언했다. 다카코는 큰 소리로 콧방귀를 꼈다.
"높이는 중요하지 않아. 누굴 이기려고 쌓는 것도 아니고."
"왜 쌓는지 모르겠어요. 어차피 무너질 텐데."
"함부로 다른 사람들을 바보 취급하지 마라." 다카코가 날카롭게 반박했다. "그만큼 간절한 거니까."
이지는 다카코의 말에 동의하기가 어려웠다. 돌탑을 쌓아야 할 만한 소원이라면 이루어질 가능성이 희박하기 마련이었다. 아무리 간절하게 빌고 바란다 한들 바다가 그 소원을 들어주기나 할까. 돌탑 무리처럼 바싹 엎드린 채 구차해지고 싶지 않았다. 여태껏 이지는 그렇게 살아왔다. 차라리 포기하고 물러나는 편이 낫다고 여겼다. 하지만 그런 변명과 자족 뒤에는 후회만 남았다.
"무너지는 게 무서워서 쌓지도 않고 징징거리는 건 바보들이나 하는 짓이야."
"무섭다고 말한 적은 없는데요."
"어쨌든 핑계잖니." 다카코가 단정했다. "쌓아야 탑이라도 되지. 아니면 돌 더미일 뿐이야."
라디오에서는 일기예보가 끝나자 클래식 음악이 흘러나왔다. 귀에 익었다. 다카코는 나지막이 그 멜로디를 흥얼거렸다. 이지는 무슨 곡이냐고 물었다.
"기억 안 나니?" 다카코가 핀잔을 주었다. "아침마다 들어 놓고."
이지는 간신히 무슨 곡인지 기억해 냈다. 그리그의 페르귄트 모음곡 중 하나였다. 미노루는 아침마다 이 곡을 틀어 놓았다. 아침잠이 많은 다카코를 깨우는 그 나름의 방법이었다. 이지도 이 곡의 서두를 여는 느리고 또렷한 플루트 소리로 잠에서 깨곤 했다.
"미노루는 왜 한국어를 배우지 않았어요?"
미노루는 영어뿐 아니라 수많은 언어를 사전으로 독학했다. 그가 맘만 먹었더라면 한국어도 충분히 배웠을 터였다. 다카코는 순순히 대답했다. 이지의 예상 밖이었다.
"결혼하기 전에 미노루가 물어본 적은 있어. 자신이 한국어를 할 줄 아는 편이 좋지 않겠느냐고. 나를 위해서. 내가 말하고 싶은 게 있을 때 자기가 못 알아들으면 미안하다고." 다카코는 잠시 간격을 두고 덧붙였다. "그래서 배우지 않아도 된다고 했어. 아니.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어."
"미노루는 서운하게 여기지 않았어요?"
"뭐든 알아야 직성이 풀리는 양반인데 당연히 서운했겠지." 다카코는 잠시 미간을 좁힌 채 일본어로 몇 마디를 뇌까리다가 다시 한국어로 짤막하게 정정했다. "고맙지."
곡은 서두와 달리 점점 희미하고 부드럽게 끝을 맺었다. 이지는 나가사키에서 맞았던 아침을 떠올렸다. 미노루는 거실에서 신문을 읽으면서 모두 깨어날 때까지 기다리곤 했다. 이지가 이층 손님방에서 거실로 내려올 때면 창문은 정원을 향해 열려 있었다. 미노루는 읽던 신문을 반으로 접고 이지에게 인사했다. 잘 잤니? 그의 안경테는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 이지는 누군가를 기다리고 누군가가 기다려 주는 아침이 그리워졌다. 묻지 않았지만 다카코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그녀의 추측일 뿐이었다.
공항에서 렌터카를 반납한 후 이지는 페이스북 메시지를 확인했다. 그녀는 가족들에게 간단하게 안부를 전한 후 케빈이 보낸 메시지를 읽었다. 긴 메시지였다. 케빈은 답을 잘 모르겠지만 계속 생각하고 있다고 적었다. 이지는 달아오른 볼을 손바닥으로 꾹꾹 누르면서 메시지를 마저 보았다. 그는 이지에게 돌아오면 함께 저녁을 먹자고 쓴 후 보고 싶다고 짤막하게 덧붙였다. 익살이나 허풍 없이. 이지는 쓰고 지우기를 반복하다가 겨우 답신을 보냈다.
이지는 미국으로 가기 전 다카코가 사는 빌라에 잠깐 들렀다. 다카코가 말했던 선인장은 그녀의 부재 동안 말라죽었다. 이지는 목장갑을 낀 손으로 화분에서 죽은 선인장을 뿌리째 뽑아냈다. 선인장 가시들은 다카코의 말처럼 새까맣게 타 있었다. 다카코는 손수건 끄트머리로 눈가를 누르면서 우스갯소리처럼 말했다. 지긋지긋해라. 내년 여름은 어떻게 버틸지. 이지는 내년 한국의 여름이 덥지 않길 바랐다.


다음 해 봄에 이지는 케빈과 약혼했다. 이지는 다카코에게 조만간 케빈과 한국에 가도 되냐고 물었다. 다카코는 오게 되면 와라비 모치 만드는 법을 알려주겠다고 말했다. 네가 제대로 따라할 수 있을지나 모르겠지만. 심술궂은 말도 여전했다. 그러나 이지와 케빈이 클라이언트들의 변덕과 싸우면서 미술관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사이 시간은 속절없이 지나갔다. 다카코는 천식이 도져 병원에 입원했다. 숨을 쉴 때마다 폐에 가래가 쌓였다. 그녀는 그 가래들을 끊임없이 뱉어내야 숨을 쉴 수 있었다. 다카코가 중환자실에서 조용히 숨을 거두었을 때 외할머니는 며칠 내내 통곡했다. 다카코의 장례는 그녀가 한 번도 연락하지 않았던 머나먼 사돈 친척들이 대신 맡아서 치렀다.
이지는 뒤늦게 도착했다. 그녀는 다카코가 마지막으로 머물렀던 빌라에서 유품을 정리했다. 미노루의 유골함은 현관 옆 선반에 놓여 있었다. 이지는 다카코와 미노루의 유해를 바다에 뿌리기로 했다. 그녀는 케빈에게 물었다. 어느 바다에 뿌릴까? 케빈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천천히 결정하라고 말했다. 내가 거기로 갈게. 이지. 이지는 간호사로부터 다카코가 늘 들고 다녔던 손가방을 전해 받았다. 가방에는 다카코가 제주도에서 읽었던 일본어 문고본과 손수건, 그리고 늘 끼고 다녔던 레이스 장갑 한 켤레가 들어 있었다. 이지는 장갑을 손바닥에 올려놓은 채 눈을 감았다. 마치 악수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레이스 장갑은 끊어진 올 하나 없이 가볍고 부드러웠다.


















정은우

작가소개 / 정은우

2019년 창비 신인문학상 소설 부문 등단.


《문장웹진 2020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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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중 하나

그중 하나 정은우 누군가 문을 두드렸고, 그녀는 문을 열었다. 실수였다. 올 사람도, 올 물건도 없었다. 음식 배달도 하루에 한 번 시킬까 말까였다. 뒤늦게 손잡이를 잡아당겼지만 소용없었다. 이미 새까만 구둣발이 문 사이에//문틈 사이로 끼어든 후였다. 구둣발은 그녀에게 전할 말이 있다고 했다. 순간 모르는 사람을 집에 들였을 때 벌어질 수 있는 사건 사고들이 그녀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사람들은 그녀를 불쌍히 여기는 한편 누가 먼저 문을 열었는지 짚고 넘어가려 할 터였다. 그녀는 그 어떤 교훈의 사례도 되고 싶지 않았다. 저는 신을 믿지 않는데요. 저도 신을 믿지 않습니다. 뭘 살 돈도 없어요. 뭘 팔려고 온 게 아닙니다. 구둣발은 물러설 기미가 없었다. 한낮의 복도는 조용했다. 그녀가 사는 오피스텔은 관처럼 길고 좁은 원룸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구조였다. 사는 사람은 많아도 서로 알고 지내는 사람은 없었다. 누군가 도와주리라고 기대하진 않았다. 그녀는 문고리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올 사람이 있다고, 그녀는 말했다. 구둣발은 말만 전하고 가겠다고 받아쳤다. 다음에 오면 안 되냐고 물었다. 구둣발은 시간이 없다며 딱 잘랐다. 문밖에서 말하라고 하자 본인이 맞는지 확인해야 한다면서 문만 열어달라고 했다. 그녀는 결국 문을 열었다. 구둣발은 신고 있는 구두처럼 옷이며 가방, 손에 든 패드까지 온통 검은색이라는 점만 제외하면 평범해 보였다. 내일이라도 금방 잊을 만큼 흔한 얼굴이었다. 구둣발은 패드와 그녀를 번갈아 본 다음, 약속대로 간단하게 말했다. 죽어주십시오. 그녀는 뒤로 물러섰다. 앞으로 달려가서 구둣발을 밀어내고 문을 잠그는 모습을 상상했지만, 몸은 움츠러들기만 했다. 구둣발은 흉기를 꺼내거나 달려들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그녀는 물었다. 왜 절 죽이려고 하세요? 저는 죽이겠다고 하진 않았습니다. 살인은 위법입니다. 죽어달라면서요? 어디까지나 권고입니다. 죽여버리겠다는 말이라면 모를까 죽어달라니, 권할 만한 사안도 아니었고 부탁치고는 무례했다. 하다못해 정수기 판매사원만큼의 정성은 있어야 하지 않나. 구둣발은 그녀에게 미안해하거나 안타까워하지 않았다. 정수기 판매사원들은 언제 어디서든 정수기의 과학적 구조며 필터의 효능 등 정수기의 장점들을 줄줄이 읊어댔다. 듣다 보면 집에 정수기 한 대쯤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약정 기간과 위약금, 싱크대를 뚫고 일정 주기로 필터 점검이 필요하다는 건 계약 이후에서야 알았다. 제가 왜 죽어야 하나요? 당신이 왜 살아야 합니까? 그녀는 말문이 막혔다. 딱히 둘러댈 거리가 없었다. 즐겨 보던 드라마는 오래전에 끝났고, 다니던 회사는 망했다. 사귀던 사람과는 헤어진 지 오래였다. 그녀의 삶은 단순했다. 늘 둘 중 하나였다. 일하거나 일하지 않거나, 눈을 감거나 뜨거나. 중학생이었을 적 그녀는 변호사를, 고등학생이 돼서는 동시통역사를 꿈꿨다. 둘 다 돈

  • 2024-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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