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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세계

  • 작성일 2020-01-01

재세계(reworlding)

김지연


지나간 일은 다 잊자
지나간 일은 다 잊는 거야


그는 이 대사의 다음 장면에서 죽었다
영화 속에서 영화는 계속될 것 같았고
그 사람은 영원히 아무것도 잊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모든 것을 영원히 잊게 될 것이다


핸드폰 불빛이 신경 쓰여서 도무지 영화에 집중할 수 없었어
극장에 꽉 들어찬 어둠은 그 작은 불빛 하나 숨겨 주지 못하고
주인공은 십이월 밤거리의 쏟아지는 불빛 때문에 맞은편에서 다가오는 것도 알아보지 못한다


오래된 거리를 걸으면 가로수들은 영원히 자랄 것 같다 정원수의 손에서 떨어지는 잎사귀와 뚝뚝 분질러지는 나뭇가지의 미래를, 잔디가 깎이는 동안 우수수 떨어지는 머리통을 다 기억하면서


십이월은 어디에서나 커다란 나무에 작은 전구들이 주렁주렁 매달리고
불빛이 들어오고
빛을 끄고 불을 켜면 다 똑같아 보이는


세계의 근원은 이제 전기라고
인간은 빛보다 한참 느린 속도로 움직이면서 원하는 만큼의 빛을 만들 수 있다
운전자가 죽은 다음에도 계속 달릴 자동차를 가질 수 있다


이것은 생명의 낭비를 줄여 주는 기술입니다
그러나 너무 환한 곳에서는 생명을 낭비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높은 조도에서는 사물을 정확하게 인지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밝게 빛나는 하늘과 흰옷을 입은 사람을 구별하기란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세계는 점점 더 낮은 조도로 진화하고 있어
매년 이십 퍼센트 정도의 광량이 감소하고 있대


희박한 태양광 아래에서 낮아지는 조도의 세계에서 우리는 함께 희박해지겠지 정말 좋은 일이다 좋은 미래가 오면, 도로 위에서 공들여 식별해야 할 산 것들이 없는 그런 미래가 온다면 생명이 낭비되는 일도 없을 거야


앞서 걸어가는 사람의 등에 죽은 짐승의 등이 포개져 있다
너는 어쩜 죽어서도 이렇게 따뜻하고 부드러운지
짐승의 등을 어루만지며

아름답다 감탄하는 사람들이 모두 사라진 자리에서 아름다움은 시작되었다
이것은 전기로 작동되는 신이 들려준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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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리자
  • 2025-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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