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의 반대말
- 작성일 2020-0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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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의 반대말
나희덕
벽의 반대말은 해변이라고
그녀는 말했다
해변은 무한히 열려 있는 어떤 곳이라고
해변은 어디에나 있다고
그리고는 아스팔트 위에 모래를 퍼나르고 나무를 심고 파라솔을 꽂고 수영복 차림의 사람들을 데려다 해변을 만들었다 강렬한 태양을 박아 두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녀가 완성한 해변에서 사람들은 벽을 잊은 채 누워 있고
파도처럼 어디선가 밀려오고 어디론가 밀려가고
삶이라는 질병에서 잠시 놓여나고
이 해변에는 벽을 두려워하는 영혼들이 모여들었다
어쩌면 벽을 사랑하는 영혼들이
어머니의 장례식을 끝내고
이제는 잠자리에 들어 열두 시간 동안 실컷 잘 수 있겠구나,*
생각할 때의 은밀한 기쁨이라든가
해변의 발코니에서
소금기 가득한 바람을 맞으며
새나 구름, 빗방울을 기다리며 앉아 있을 때
더 이상 나의 것이 아니게 된 어떤 삶**을
알아차리게도 되는 것이다
그러니 벽의 반대말은
집도 방도 문도 창문도 천장도 바닥도 아니다
차라리 해변에서 들려오는 슬픈 노랫소리나
견딜 수 없는 눈동자 같은 것
더 이상 어디로도 가지 않으려 할 때 벽은 문득 사라지니까
*는 45쪽, **는 154쪽에서 인용(알베르 카뮈, 『이방인』, 김화영 역, 책세상,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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