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 틴더 유
- 작성일 2020-07-01
- 댓글수 0
[단편소설]
아이 틴더 유
정대건
‘184 76 32’. 키, 몸무게, 나이만 적혀 있는 프로필. 집에서 2km 떨어져 있던 호와 틴더에서 매치된 건 지난밤이었다. 몸이 좋은 타입은 아니었는데 쌍꺼풀 없는 눈에 고른 치열이 마음에 들어서 ‘라이크(LIKE)’를 눌렀다. 메시지를 주고받아 보니 영화를 한다고 했다. 틴더에는 어쩜 그렇게 예술가 지망생들이 많은지, 절반이 예술가 지망생 아니면 금융맨이다. 내가 여의도 IFC몰 14층 사무실에서 흐드러지게 핀 벚꽃을 보고 있다고 메시지를 보냈더니, 금융권에서 일하느냐고 따분한 질문을 해서 조금 실망했다. 금융권에서 근무 시간에 틴더 돌리고 있는 나 같은 애를 써줄 리가 있나. 내가 일하는 곳은 여유 있는 업무와 낮은 연봉을 ‘워라밸’이라는 단어로 포장한 외국 피자 프랜차이즈의 본사다. 화제는 취미와 취향으로 넘어갔고, 호가 노아 바움백의 영화를 전부 봤다고 했을 때, 만나기로 마음먹었다.
금요일 밤 홍대 술집에서 만난 호는 어깨는 넓은데 팔뚝에는 근육이 머문 흔적조차 없었다. 서로 본명은 묻지도 않았다. 호의 이름이 진짜로 호든 승호든 호식이든 어차피 내가 연애할 사람 찾는 것도 아니고 오늘 술자리가 재밌으면 상관없었다.
“솔 씨는 틴더로 사람 많이 만나 봤어요?” 진부한 시작에 나는 “그럼요, 새로운 사람 만나서 술 마시는 거 좋아해서.” 하고 샐쭉 웃었다. 세 시간 전만 해도 엑셀 회계장부를 들여다보고 있었기에, 처음 보는 호의 얘기를 들으며 도시의 풍경이 낯설어지는 게 즐거웠다.
호는 데이팅 앱으로 만나서 일 년 정도 연애한 적이 있다고 했다. 묻지도 않았는데, 퍽보이는 아니라고 어필하는 거였다. 말은 무슨 말을 못 할까. 진지한 만남을 지향한다더니 잠수타버린 남자를 두 번이나 겪은 뒤로 나는 틴더남들을 잘 믿지 않았다.
플러팅 하는 거 보는 재미로 나오는 건데, 호는 오늘 나를 꼬시는 게 목적이 아니라 사람과의 대화에 굶주렸다는 듯이 많은 이야기를 쏟아냈다. 듣자하니 영화감독 데뷔를 준비하다가 잘 풀리지 않은 모양이었다. 속한 곳도 없고, 이제는 정말 친구도 없어서 팟캐스트만 듣는다고 했다. 얘기를 듣는 동안, 호의 바짝 깎은 손톱과 길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눈에 들어왔다.
이번엔 내가 이야기할 차례였다. 일 년간 연애한 남자친구가 알고 보니 양다리를 걸치고 있었고, 심지어 그 여자와 약혼한 사이였다는 유쾌하지 않은 이야기. 그 사실을 말하면 내 일 년이 정말 그렇게 요약되어 버리는 게 끔찍해서 입을 닫았다. 그냥 연애하지 않은 지 삼 년은 됐다고 말했다.
술을 마신 지 몇 시간 안 돼서 우리가 일하는 환경은 아주 다르지만 (그다지 닮고 싶지 않은) 비슷한 점이 많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둘 다 엿 같은 이혼 가정에서 자랐다는 것, 연애에서 늘 속거나 버려진 쪽이라는 것, 관계가 시작되기도 전에 관계의 끝을 생각하는 점이 그랬다.
“우리 졸라 없어 보인다. 불행과 상처를 소중한 자산처럼 삼지는 말자.”
2차에 가서는 내가 먼저 말을 놨다. 호는 내가 차갑고 못되게 말하는 게 좋다고 했다.
“나는 지금 유령이야.”
취기가 오른 호가 잔을 비우며 푸념했다. 나쁘게 끝난 연애 이후로 아무도 만나지 않았더니 2년 동안 자기를 찍은 사진이 한 장도 없더라는 거였다. 틴더에서 별별 사람을 다 만나 봤지만 폰을 건네며 자기 사진을 찍어 달라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이 남자는 외로움으로 어필하는 스타일이구나. 나도 좀 취했는지 짠하게 느껴졌다. 얼굴이 붉어진 호의 사진을 찍자마자 호의 폰에 메시지 창이 떴다. 보려고 그런 건 아닌데…….
[Chloe : 저는 왕십리 쪽 살아요.]
틴더 메시지였다. 오호, 클로이도 만나려고 하셨어? 그 메시지는 우리 사이에 감춰져 있던 사실을 드러냈다. 수십, 수백 명의 사람에게 ‘라이크’를 눌렀고, 클로이를 만나서도 이런 외로움을 토로했을 거라는 것, 서로에게 스페어처럼 얼마든지 대체 가능한 존재라는 것 말이다. 당황한 호의 표정이 얄미우면서도 귀여웠다.
“왜, 뭐 어때서. 내 틴더도 보여줄까?” 내가 웃으며 말했다.
그때부터였다. 우리 사이에 흐르는 분위기가 묘하게 공모자처럼 변한 것은. 원래도 가벼웠지만 한없이 더 가벼워졌다. 우리는 틴더에 왜 그렇게 잭, 제이, 클로이, 클레어가 많은지를 이야기하며 깔깔 웃었다. 술이 쭉쭉 들어가고 뭐든지 말할 수 있는 기분이었다. 불콰해진 호가 약간 슬픈 눈빛으로 말했다.
“나, 틴더에서 만난 애랑 자고 불 꺼진 모텔 방에서 전 여친 생각하면서 운 적 있었다.”
내가 정색하며 호에게 뭔가를 달라는 듯이 손바닥을 내밀었다.
“야, 그건 내 캐릭터니까 저작권료 내놔.”
우리는 킥킥거리며 소주를 두 병 더 비운 뒤 술집을 나섰다. 이제 어디로 갈지 결단을 내려야 하는 2차와 3차 사이의 시간, 골목에 서서 담배를 한 대 피웠다.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커플이 빗자루로 골목을 쓸고 있는 환경미화원 곁을 지나갔다. 이제 좀 피곤한데 눈치 없는 호는 어디 가자는 말도, 오늘 밤 같이 있자는 말도 하지 않고 눈을 반짝이며 재잘거렸다.
“나는 <실버라이닝 플레이북>처럼 문제 있는 둘이 만나서 사랑에 빠지는 힐링 로맨스 영화 엄청 좋아해. 나도 언젠가는 그런 영화를 만들고 싶고.”
현실에서 문제 많은 둘이 만나면 힐링은 무슨…… 지옥 급행열차 타는 거야, 속으로 생각하면서 호를 위아래로 훑었는데 꽤 괜찮아 보였다. 술이 들어가기 전엔 뭘 믿고 운동도 안 한 거야, 그랬는데. 이렇게 알코올 보정이 무섭지. 키 멀대 같고 입술 뚱뚱한 거 하나 믿고 그랬나 보다 싶었다. 나는 키스하고 싶어져서 그렇게 해버렸다. 한 번 잤다고 사랑에라도 빠진 것처럼 구는 남자면 곤란한데, 엉기면 안 되는데……. 조금 아쉬울 정도로만 키스하고 내가 한 발짝 떨어져 씨익 웃자, 호의 입술이 자석처럼 다시 붙었다.
신촌에 널린 모텔을 놔두고 종로로 가자는 내 말에 호는 의아해했으나 순순히 따랐다. 집이 아닌 곳으로 향하는 새벽 택시를 타면 늘 신난다.
다음날, 모텔 골목을 빠져나와 맛나분식으로 호를 이끌었다. 난 단지 종로에서 이 떡볶이를 먹고 싶어서 외박하는 거야, 했더니 호가 피식 웃었다. 열두 시부터 개시하는 매콤하고 꾸덕한 쌀 떡볶이는 체크아웃하고 바로 먹으면 딱 제 맛이다. 우리가 나란히 앉은 긴 의자는 자꾸 덜컹거렸고, 호와 내 머리에서는 같은 향의 모텔 샴푸 냄새가 났다.
헤어지기 전에 호는 내게 뭔가 하고 싶은 말을 참는 표정이었다. 호의 눈빛에서 기대와 불안을 읽었을 때 나는 도망치고 싶어졌다. 호는 잠시 내 어깨에 얼굴을 파묻고 나를 끌어안았다. 잘 들어가. 우리 둘 다 연락한다는 말은 없었다. 햇살이 눈부신 오후 한 시 한낮의 종로3가역 앞에서 그렇게 헤어졌다.
*
― 미안해. 미안하다는 말이 얼마나 엿 같을 줄은 아는데…… 그날은 그냥 엉망진창이 되고 싶은 기분이었어.
다음날, 호가 컨디션은 괜찮으냐고 메시지를 보내와서 내가 반나절 만에 답했다. 뭐가 미안하다는 건지, 네가 뭐 사귀자고 한 것도 아니고, 자자고 조른 것도 아닌데. 한 방 맞은 기분이겠지. 나는 호에게 사실은 애인이랑 안 좋게 헤어진 지 얼마 안 됐고 누굴 일대일로 만날 처지가 아니라고, 사람들을 많이 만나고 있다고 털어놓았다. 호는 그럼 왜 연애 안 한 지 오래됐다고 거짓말한 거냐며 그냥 자기도 하루만이라고 생각했으면 좋았겠다고 했다. 나도 겪어 본 일이었다. 호의 기분을 상상해 봤다. 아직 감정에 어떤 이름을 붙여 주기도 전에, 드물게 품은 기대감에 대해 누군가 소리 내 비웃는 것 같은 기분.
― 폴리아모리 같은 거야?
― 아냐. 나는 그저 누구와도 사랑에 빠지지 않으려는 것뿐이야.
― 대화가 잘 통하는 것도 나 혼자 착각인 거야?
― 아니, 나도 너랑 대화가 유독 재미있고 한데. 내가 시도 때도 없이 셀카 보내고, 책임지지도 못할 말 하고, 그런 거로 오해 사고 상처 준 적이 많거든…….
침묵이 흐르는 채팅창에 호의 표정이 보이는 듯했다. 너무 상심 말고 고작 틴더에서 만난 사이인 걸, 하며 금방 극복하기를.
― 알았어. 그런데 내가 매력 없는 사람으로 느껴져서 비참하다.
그 말을 들으니 정말 미안해졌다. 오늘은 틴더 돌리지 말고 얌전히 혼자서 마셔야지. 차라리 호가 내게 욕을 하고 사라져 버리면 속이 편할 텐데 호는 좀 끈질긴 편이었다.
― 그럼 나랑 친구 하자. 자자고 하거나 귀찮게 안 할게. 다른 틴더남들 만나 봐야 노잼일걸.
나도 딱히 단짝 친구 같은 건 없었다. 그나마 연애할 땐 애인이 제일 친한 친구가 되는데, 끝나면 그게 다 사라져 버리니까. 애착을 가졌던 누군가 떠나고 떨어져 나가는 건 아무리 반복해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쉽게 만나고 쉽게 헤어질 수는 있지만, 어떤 관계를 유지하는 건 어려웠다. 이제 나는 붙였다 뗐다를 많이 해서 접착력이 떨어진 칫솔걸이 같았다.
― 내가 착각만 안 하면 되는 거 아니야? 걱정 마. 내가 들이댈 일 없을 거야.
호가 한 그 말은 결국 두 사람의 감정이 얽히고 마는 드라마의 클리셰 대사처럼 보였다. 대부분의 남자는 이런 상황에서 마음을 닫고 떠나갔기에, 그렇게 자신의 감정 상태를 차근차근 말하는 호가 여유 있어 보이기도, 동시에 절박해 보이기도 했다. 호는 다만 절대로 자신을 속이지만 말아 달라고 거듭 당부했다. 호와 나는 클리셰와 싸워 보기로 했다.
*
독거 젊은이인 우리에게 가까이 사는 동네 친구라는 건 여러모로 좋은 점이 많았다. 우리는 종종 저녁을 같이 먹거나 술을 마시며 금세 가까워졌다. 나는 잠 들면 정확히 두 시간 후에 깨는 고약한 수면장애가 있는데, 새벽에 깨어 있는 호와 메신저로 ‘ㅋㅋㅋㅋ’를 남발하며 죽이 잘 맞았다. 나도 틴더남들이 늘 재밌는 건 아니었다. 나는 허탕을 치면 새벽까지 하는 우동집으로 호를 불러내 그날 만난 남자에 대해 수다를 떨었다. 그러다 함께 따릉이를 타고 홍제천을 따라서 한강까지 가기도 했다.
한번은 내 부탁으로 집에 놓고 온 USB를 호가 회사에 가져다줬다. 다급한 자료였기에 로비에서 USB를 건네받으며 연신 고맙다고 했다.
“동네에 백수 친구 있으니까 좋지?” 호가 말했다.
“네가 왜 백수야. 감독님이지. 너도 일하잖아.”
친해지고 나서야 호가 단편영화로 상도 받고 나름 주목받았었다는 것을 알게 됐다. 호는 오 년 전 일이라며 다 옛날 일이라고 했다. 호는 몇 년째 시나리오를 쓰며 학원 강사와 촬영 보조 등 잡다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는데, 늘 쫓기는 사람처럼 조급해 보였다. 나는 호에게 너는 끈질기니까 할 수 있을 거라고 격려했다.
나는 평일에는 한 번, 주말에는 자유롭게 틴더 5부제를 하면서도 줄기차게 관계를 피해 다녔고, 호는 외로움을 못 이겨 가끔 틴더를 돌리며 끈질기게 관계를 찾아다녔다. 나는 틴더에서 로맨스(백마 탄 왕자)를 찾아다니는 호를 ‘틴더렐라’라고 불렀다.
초여름에 호가 모처럼 틴더에서 만난 희주와 종묘 돌담 아래서 와인을 마신 밤을 이야기하며 들떠 있었다. 희주는 휴학하고 연극 쪽에서 조연출 일을 하는 대학생이었는데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고 했다. 그 이후 몇 번 만난 희주가 연락이 잘 안 되자 호는 시름시름 마음고생을 했고, 희주의 연락을 받으면 또 금세 피어났다. 결국 그 에피소드는 호가 희주에게 ‘바빠서 만날 시간이 없다’는 차가운 말을 들으며 끝이 났다. 호를 만나서 밥도 먹고 대화도 나누려면 여섯 시간은 확보해야 하는데, 차를 가지고 있는 열 살 연상의 파트너와는 두 시간만 시간이 나도 만날 수 있다는 거였다. 섹스 얘기였다. 참, 대단하다, 싶었다. 멍한 표정의 호에게 떡볶이나 먹으러 가자고 어깨를 두드렸다.
나는 그 무렵 프로필에 ‘신촌에서 자취하고 잘 취하는 생태계 교란종’이라고 적어 둔 바텐더 잭을 만나고 있었는데, 어느 모로 보나 호와는 다른 사람이었다. 아트시네마가 어디 붙어 있는지도 모르고 영화라고는 마블 영화밖에 본 게 없어서 길게 대화를 나누다 보면 공허해졌지만, 농담을 잘하고 가벼운 게 좋았다. 잭의 원룸에서 자고 온 날, 호와 동네 단골 식당에서 카레라이스를 먹었다. 평소처럼 가릴 것 없이 잭의 몸이 나쁘지 않았다고 수다를 떨었는데, 잭과 사귈 거냐고 호가 물어서 나는 그냥 캐주얼한 관계라고 했다.
“왜 나랑은 캐주얼한 관계를 안 하는 건데?”
갑작스러운 호의 물음에 나는 약간 당황해서 둘러댔다.
“우리는 한 번 해프닝이 있었으니까. 다시 그러면 안 될 거 같은데……. 그리고 너는 함부로 만지면 안 될 것 같고 막 그래.”
“아닌데! 나 정말 맘대로 만져도 되는데!”
호는 쿨한 사람들의 클럽에 자기도 입장시켜 달라는 듯이 안달했다. 그렇다고 호가 내게 다가오거나 하지는 않았다. 어쩌다 내 원룸 자취방에 야식을 먹으러 와도 호가 끈적하게 구는 일은 없었다. 호는 내가 자신에게 그다지 성적 매력을 느끼지 않는다는 사실, 내가 그저 모두를 스페어로 두려는 외로움 많이 타는 애라는 것을 받아들인 것 같았다.
하루는 내 방에 모여 잭콕을 만들어 마셨다. 호와 나는 술에 취해 붉어진 얼굴로 이랑의 〈가족을 찾아서〉를 틀어 놓고 큰 소리로 따라 불렀다. 내 안에 있는 그 노랠 찾아서 내가 살고 싶은 그 집을 찾아서 내가 사랑할 그 사람을 찾아서 내가 되고 싶은 가족을 찾아서. 호는 정말 노래를 못 불렀고,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것처럼 얼굴이 엉망으로 일그러졌다. 그러던 중에 호가 폰을 보더니 눈물을 줄줄 흘렸다. 구글 포토에 ‘2년 전 오늘’이라며 전 여친 사진이 떴다는 거였다. 몇 년째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는 호에게 그 애인이 “넌 대체 잘하는 게 뭐야?” 하고 구박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내 지난 연애가 떠올라서 그렇게 함부로 하는 사람을 도대체 왜 만난 거냐고 따지듯 언성을 높였다. 호는 내가 화를 내자 놀란 듯싶다가 자기도 왜 그렇게 자신을 학대하는 사람에게 구걸하듯 애정을 바랐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구질구질한 건 질색이었다. 그렇다고 내가 과거에 머물러 있는 호를 끄집어내 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난 이제 남의 불행에 대해서도 나의 불행에 대해서도 귀 기울이지 않을 거야. 우울증약도 더는 먹지 않을 거고. 난 그냥 가벼운 게 좋아.
그때 뾰로로롱, 하고 경쾌한 소리가 울렸다. 그래 이런 거. 가볍고 기대를 하게 만드는 소리. 새로운 매치가 있습니다! 익숙한 틴더 알림이었다. 내 폰인 줄 알았는데 호의 폰이었다. 나는 깔깔 웃으며 호가 매치된 29살 민경의 프로필 사진을 함께 봤다. 사진 속의 민경은 베니스를 배경으로 자신감 넘치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행복한 가정에서 사랑받고 자랐어요. 비슷한 환경에서 자란 분과 만나고 싶어요.’
틴더에 너무도 어울리지 않는 자기소개 템플릿 같은 프로필이어서 웃음이 나왔다. 나는 호가 그녀와 채팅하는 것을 실시간으로 구경하며 호에게 심각한 사람인 것을 티 내지 말라고 코치해 줬다.
*
“‘나는 아빠 같은 남자랑 결혼할 거야’라는 말을 하는 사람이 실재하더라고.”
호는 민경과 첫 데이트에서 비건 레스토랑을 가봤는데 생각보다 좋았다며 다음에 같이 가자고 했다. 우리는 ‘경희궁의 아침’이라는 오피스텔에 산다는 그녀를 희궁이라고 불렀다. 얘기를 듣자 하니 희궁은 약사였고, 어릴 때 캐나다에서 자랐고, 가정에 충실한 ‘넘버원 대디’ 밑에서 공주님처럼 사랑받고 큰 사람 같다고 했다. 그래, 우리 집처럼 바람난 아빠가 끝까지 양육비도 안 주거나, 호네 집처럼 중학생 자식에게 누구랑 살지 결정하라고 강요하는 부모만 있는 건 아니지……. 그런 희궁이 호기심에 해본 틴더에서 처음 만난 게 호라는 거였다. 내가 저런…… 하는 표정을 짓자 호는 내가 뭐 어때서, 했다. 희궁은 데이팅 앱에 프로필로 BMW 차 키나 롤렉스시계 사진 같은 걸 올려 둔 남자들이 많다면서 그들이 애처롭다고 했다.
“자기는 무미건조한 일을 하는 사람이라 나를 멋지다고 생각한대. 내 꿈을 응원한대.”
호의 목소리가 한 옥타브는 올라가 있었다. 나는 기대에 부푼 호를 보면서 다큐멘터리에서 보았던 수컷 군함새의 터질 듯 부풀어 오른 붉은 목주머니가 떠올랐다. 세상에서 가장 빠른 새라는 군함새처럼 호는 빠르게 희궁에게 빠져버렸다.
“잘해 봐.” 나는 순수하게 응원하는 마음으로 말했다.
“잘해 보긴…… 내가 누구를 만나냐……”
호는 어차피 자기는 잠시 스쳐 지나갈 버스정류장 같은 거라며, 아직 자기가 사람구실을 못 하고 있으니 어쩔 수 없지 않으냐고 체념 조로 말했다. 나는 너를 그렇게 여기지 말라고, 네가 원하는 게 안정감이면 ‘제대로 된’ 연애를 하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내가 할 소리는 아닌 거 같아 말을 삼켰다.
어느 날 새벽 1시에 호에게서 ‘혹시 깨 있으면 잠깐 통화해도 돼?’ 하고 카톡이 왔다. 무슨 일인가 싶어 전화를 걸었다.
“떨어졌어…….”
그 무렵 호는 공모전 결과를 기다리며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호는 좌절감을 털어놓았다. 자기가 잘못된 길을 선택한 것 같다고, 삶이 나아지리라는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고, 이제는 단절된 관계들이 우울하게 만든다고, 자려고 불을 끄고 눕기만 하면 눈물이 흐른다고 했다. 나는 호의 사정은 잘 모르니 가망도 없는 영화 같은 거 그만 하고 지금이라도 취업을 하라고 말하진 않았다. 끊기 전에 호가 먹먹한 목소리로 말했다.
“솔아, 목소리 들려줘서 고마워…… 정말 고마워…….”
떨리는 목소리에 혹시나 우는소리를 하는 자신을 내가 질려 할 거라는 조심스러움도 묻어 있었다. 힘내. 난 너 응원하니까, 하고 빤한 말밖에 할 수 없었지만 얼마간 진심이었다. 그렇지만 이런 모습이 계속된다면 내가 호와 멀어지게 되리라는 걸 예감했다.
호는 무너질 때마다 동등한 관계에서는 하지 않는 표현을 자주 했다. 같이 밥을 먹어 줘서 고마워. 같이 시간을 보내 줘서 고마워. 나를 견뎌 줘서 고마워. 그럴 때마다 그런 표현을 쓰지 말라고 했다. 호의 표현처럼 내가 호를 ‘견뎠던’ 것은 사람에게 많은 것을 기대하던 예전의 내 모습을 호에게서 봤기 때문이었을 거다. 그런 호의 반복되는 태도에 나도 모르게 우리 사이가 동등하지 않은 것처럼 생각할 때가 있었고, 그게 불편해졌다.
*
선임자가 퇴사하면서 주말에 혼자 사무실에 출근해 처리해야 할 업무가 있었다. 마침 호의 생일이었는데, 희궁은 가족들과 해외여행을 갔다고, 약속도 없다고 해서 호를 여의도로 불렀다. 자, 생일선물, 하며 내가 까치발을 하고서 호의 목에 방문증을 걸어 줬다. 호는 일부러 쾌활한 모습을 보이는 것인지 지난밤과는 달랐다. 14층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호는 공룡박물관에 처음 간 아이처럼 흥분해서 주먹을 꼭 쥐고 나 진짜 고층 성애자인데, 하며 호들갑을 떨었다.
“걸리면 큰일 나는 거 아니야?” 호가 물었다.
“잘리기밖에 더 하겠어.”
150개의 의자가 놓인 14층 사무실은 텅 비어 있었다. 크고 흰 대리석 테이블이 있는 회의실에 들어서자 통유리 너머로 옛 방송국 건물들, 국회의사당, 한강, 한강 건너 상암 하늘공원, 푸른 하늘과 구름이 시원하게 펼쳐졌다. 매일 보는 풍경이지만 감탄하는 호를 보니 새삼 박봉이긴 해도 이 전망은 최고의 복지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로드의 <Liability>를 틀어 놓고 호와 떨어져 앉아서 각자의 일을 봤다. 호는 그곳에 머무는 몇 시간 동안 노트북으로 뭔가를 쓰는 데 열중했다. 그 모습이 평화로워 보여 사진을 찍었다. 통유리로 쏟아져 들어오는 강렬한 태양 빛이 뜨거웠다. 호는 네 덕분에 호사를 누린다, 의자도 고급이야, 하며 뒤로 몸을 젖히고 일광욕을 했다.
“자본주의의 꼭짓점에서 돈 한 푼 벌 수 없는 글을 쓰고 있다니 묘하다.”
호는 내게 ‘돈, 한, 푼, 벌, 수, 없는’은 엄청난 띄어쓰기지 않으냐고 웃으며 말했다.
“상 타면 상금 있잖아? 다음에 상 타면 네가 모로코 음식 사.”
호는 오케이! 하고 눈을 반짝이며 구체적인 목표가 생겨서 기쁘다고 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호와 나는 석양에 따뜻한 금빛으로 물들어 갔다.
“이 짧은 시간을 촬영에서 매직 아워라고 해. 이때를 놓쳐버리면 큰일 나니까 모든 스태프와 배우가 긴장하고 집중하는데, 그때 기분이 진짜 좋아. 짧기 때문에 소중하지.” 호가 말했다.
짧기 때문에 소중하다. 그 말이 내 짧은 틴더 데이트들에도 적용될 수 있을까. 모든 희소한 건 가치 있는 거야? 그럼 네 잦은 눈물은 가치가 작고? 하늘은 붉은빛과 푸른빛이 물감처럼 풀어지며 섞였다가 금세 어두워졌다.
초밥집에서 저녁을 먹은 우리는 여의도 한강공원을 함께 걸었다. 습하지 않고 시원한 강바람이 불어왔다. 탁 트인 한강공원은 여름밤 피서를 나온 인파로 에너지가 넘쳤다.
“저거 도대체 무슨 뜻일까.”
내가 ‘아이 서울 유’ 조형물을 가리키며 말했다. 기분이 무척 좋아 보이는 호가 갑자기 아이 서울 유 조형물에 뛰어올라가 외쳤다.
“이놈의 도시는 정말 유혹만 많고 인기는 없다?”
“그렇다고 네가 시골에 간다고 인기가 있겠니.”
호가 실실거렸고 나도 히쭉 웃음이 나왔다.
“내가 너의 세컨드라고 생각하면 별론데 서로의 스페어라고 생각하니까 오히려 든든해.”
호가 활짝 웃으며 한 말에 나도 동의했다. 그 와중에도 호는 우리 서로에게 비수를 꽂지 말자고, 언젠가 자기와 친구가 하고 싶어지지 않더라도 차단하고 잠수 타는 짓은 하지 말자고 당부했다. 뭘까, 왜일까, 이 애는 왜 행복한 순간에도 그걸 온전히 누리지 못할까. 호가 참 외로운 사람이라고 느껴졌다. 그리고 나는 호에게 어떤 사람으로 기억될까 생각했다.
“나중에 내 얘기도 써줘. 틴더에서 만난 애들 중에 내가 제일 재미있지?”
“그건 그래.”
“기분 좋다. 적어도 지루한 사람은 아닌 거니까.”
*
가을 들어 야근이 잦아지고, 호가 희궁과 본격적인 데이트를 시작하면서 우리는 한동안 얼굴을 보지 못했다. 그래도 메신저는 활발했는데, 호는 내게 보여주기라도 하듯이 희궁과 함께 나와 갔던 떡볶이 맛집을 가고 홍제천에서 자전거를 탔다. 희궁에게는 그런 소박한 데이트가 오히려 매력으로 다가온 모양이었다. 둘의 만남은 생각보다 오래 지속됐다.
월 마감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날, 목덜미와 등줄기에 으슬으슬하게 오한이 일었다. 나는 혼자 있고 싶지 않은 기분에 사로잡혀 폰을 들었다. 신촌에서 자취하는 바텐더 잭은 바에서 일하는 시간이었다. 언제 40대 돌싱을 만나 보겠나 싶어 밥 한 끼 했던 IT 프로그래머 마리오는 연락을 씹었다. 프로필에 ‘Hello, Stranger’를 적어 놨던 취준생 토비는 바쁘냐는 내 연락에 정색하며 [누나, 저 애인 생겼어요] 하고 답장이 왔다. 그렇다고 틴더를 돌리고 [안녕하세요] 따위를 주고받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평소처럼 호에게 전화를 걸어 뜨끈한 떡볶이를 같이 먹자고 했다.
“민경 씨가 싫어할 거야.”
호가 말했다. 희궁의 호칭이 바뀐 게 우스웠다.
“그럼 민경 씨한테 말하고 와. 친구인데 뭐 어때.”
호는 대답하는 데 한참이 걸렸다.
“다른 남자들 많잖아……. 다른 애들 불러.”
“뭐래. 너랑 먹고 싶다고.”
그냥 쉽게 거절할 수 있는 일을 쩔쩔매는 호의 태도가 어딘지 거슬렸다.
“뭐야, 너 연애라도 해?”
“아냐, 아직은…….”
“웃긴다, 너. 너랑 내가 뭐, 무슨 사이라도 돼?”
잠시 정적이 흘렀고, 호가 낮은 어조로 되물었다.
“그래. 우리가 무슨 사이냐?”
“네가 스페어 어쩌고 했잖아. 스페어가 뭐 이래.”
대화는 이어지지 않고 계속 엇나갔다.
“민경 씨는 이런 거…… 이해 못 할 거야.”
그 말이 기분 나쁘게 들렸다.
“너 걔랑도 틴더에서 만난 거 아니야?” 내가 코웃음 치며 비아냥거렸다. “그럼 그냥 너도 나랑 캐주얼한 사이로 지내.”
내가 별 생각 없이 내뱉었다. 수화기 너머에서 긴 침묵이 이어졌다. 전화가 끊어졌나 싶을 정도로 숨소리도 들리지 않아 여보세요? 하고 물었다.
“미안하다.”
호는 그 말을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
상수역에 있는 잭이 일하는 바에서 나는 술기운에 취해 있었다. 호가 갑자기 할 말이 있다고 해서 이곳으로 불렀다. 호가 도착했을 때, 내가 잭과 낄낄거리고 있자 호는 경계하는 눈초리였다. 지난밤 찾아오지 않은 게 마음에 걸렸던지 호는 줄 게 있다며 인형을 건넸다. 쇼핑백에 안 들어갈 정도로 커다란 이케아 코끼리 봉제 인형이었다. 인형은 부들부들한 게 만지자마자 바로 기분이 좋아졌다. “이쪽은 감독님이야.” 잭에게 호를 소개했다. 호는 괜한 얘기를 한다는 듯 눈치를 줬다. 호에게 “잭 알지?” 하며 소개하자, 잭이 일하는 곳이라는 것을 몰랐던지 놀라는 표정이었다. 호는 내 앞니에 립스틱이 묻어 있다고 칠칠치 못하다며 엄지손가락으로 닦아 줬다. 우리는 이렇게 가까운 사이야, 하고 보여주는 것처럼 어딘지 부자연스럽고 잭을 의식하는 행동이었다. 호가 잭도 대화를 들을 수 있는 바 자리가 불편하다는 신호를 보여서 자리를 옮겼다.
“뭔데 그래?”
“민경 씨가 진지하게 만나 보자고 했어.”
나는 호의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호는 초조한 기색이었다.
“그럼 뭐가 문제야?”
“이런 사람이 내게 고백하는 건 평생에 드문 일일 거야.”
나는 그렇게 말하는 호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런 사람’부터 ‘평생’ 어쩌고저쩌고 호의 어휘 선택이 다 별로였다. 호는 마치 내게 허락을 구하는 것처럼 굴었다. 대체 무슨 허락?
‘너 같은 애랑은 달라.’
그날의 대화를 떠올리면 호가 그렇게 말하지도 않았는데, 나는 그 말을 들은 것 같았다. 목소리도 알지 못하는 희궁이 소리 내서 템플릿을 읽는 것도 같았다.
‘행복한 가정에서 사랑받고 자랐어요. 비슷한 환경에서 자란 분과 만나고 싶어요.’
그렇지 못한 사람은 배제되어 버리는 기분이 드는 그 말. ‘그 여자는 프로필에 그렇게 써두고 넌 왜 만난대?’라는 말이 떠올랐고, 그 악독한 말이 내 입을 간질였다.
“별로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내가 약간 비웃듯이 말하자, 호는 발끈했다.
“내가 좋아하는지 아닌지는 네가 어떻게 아는데?”
“네가 그 여자 좋다고 하는 걸 들은 적이 없는데? 만날 그 여자가 너한테 품은 호감만 말하잖아.”
호는 뭔가를 몰래 하다 들킨 아이처럼 눈이 동그래졌다. 호가 다급하게 쥐어짜듯이 말을 뱉었다.
“너 저번에 나한테…… 캐주얼한 관계로 지내자고 한 건 뭐였어?”
왜 이 맥락에서 그것을 묻는지 코웃음이 났다. 호는 내게 연애 비슷한 감정을 느끼고 있었던 걸까. 그 또한 나를 속인 것 같아 화가 났다. 나는 몸을 뒤로 빼며 목소리를 높였다.
“넌 너무 심각한 사람이라서 너랑은 캐주얼한 관계도 하고 싶지 않아.”
그 말을 들은 호는 나쁜 선고를 받은 사람처럼 표정이 굳어서 시선을 떨궜다. 그 정도 충격을 받으리라고는 예상치 못해서 내가 급히 덧붙였다.
“네가 좋고 나쁨을 말하는 게 아니야. 단지…….”
“내가 언제…… 너한테 먼저 캐주얼한 관계로 지내자고 했어?”
호는 들릴 듯 말 듯 내뱉었다. 호는 나를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했다.
“너 왜 사람을 보지도 않고 말해?” 내가 따지듯 물었다.
호는 굳어버린 얼굴을 어쩌지 못하고 한참을 침묵하다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전 여친이 내가 똑바로 쳐다보면 무섭다고 했어…….”
호와 나 사이에 어색한 정적이 흘렀다. 나는 맥주를 홀짝이며 재미없으니 분위기 흐리지 말고 다른 얘기를 하자고 했다. 호는 여전히 시선을 내리깔고 중얼거렸다.
“넌 내가 사라져도 대체할 친구들이 많겠지…….”
아주 작은 목소리였지만 또렷하게 들렸다.
“그래서? 내가 타격이 없을 거라고 생각해?” 나는 발끈해서 입을 마구 놀렸다. “네가 이런 애라는 걸 그 애가 봐야 하는데.”
내가 정신을 차렸을 땐 호가 내게 줬던 코끼리 인형을 번쩍 들고 서 있었다. 뭐야 내놔, 하며 낚아채려 했지만 나보다 이십 센티미터는 큰 호에게 팔이 닿지 않았다. 내가 눈을 맞추려 했지만 호는 입을 꾹 다물고 끝까지 시선을 피했다. 나를 쳐다보면 분노를 쏟아낼 것 같아서인지 눈물을 흘릴 것 같아서인지 알 수 없었다. 호의 굳게 닫힌 입은 끝내 열리지 않았다. 호는 이내 순순히 코끼리 인형을 내게 건네고 바를 나섰다.
그 후로 며칠간 호에게서 연락이 없었다. 나는 사과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이 꼴로밖에 말할 줄 몰랐다. [삐졌냐?] 호는 메시지를 읽고도 답이 없었다. [스페셜 텐동 사줄게] 해도 호는 여전히 답이 없었다. [나 말고도 인간관계 많잖아. 너 또 그렇게 말하고 싶지?] 답이 없었다. 이렇게 또 관계 하나 망쳤구나. 재수 없는 새끼. 한참 뒤에 답이 왔다.
― 나도 나를 보호해야지.
그냥 그렇게 왔다. 뭐라 덧붙이는 것조차 부질없다는 듯. 비난도 없었다. 말을 함부로 하는 나의 무딤이 자신에게 위험이 된다는 듯. 고개를 떨구고 있던 호의 어두운 표정이 어른거렸다.
*
계절이 두 번 지나가는 사이 틴더에서 독일 남자를 한 달 정도 만나고 헤어졌다. 나는 만나지도 않고 그에게 이별을 통보했고, 이번에야말로 내가 누굴 진득하게 만날 상태가 아니라는 걸 확인했다. 드물게 만난 남자들에게 연애 생각이 없다고 밝혔고, 그들이 연애하고 싶어하는 낌새를 보이면 매번 도망쳤다.
회사에서 회의실을 이용하다가 노랗게 물드는 석양을 볼 때면 가끔 호가 생각났지만 연락할 마음은 들지 않았다. 내게 호감을 가진 사람을 곁에 두었고, 가볍고 유쾌한 친구들이 있었다. 그래도 가슴 한편에 뭔가 걸려 있는 기분이었다. 차라리 호와 연애를 하다 헤어졌으면 싫어졌거나 했을 텐데 은은하게 미안함과 상실감이 있었다.
어느 날 답답한 마음에 정처 없이 걷다 보니 여의도 한강공원이었다. 여름밤 생기 넘치던 공원은 겨울의 끝자락에 인적도 없이 황량했다. 호가 뛰어 올라갔던 아이 서울 유 조형물을 보며 나는 문득 카톡 창을 열고 호에게 메시지를 적었다.
― 상처 주는 말 해서 미안해. 넌 누구보다 복잡한 거 같으면서도 버블티 하나로 세상에서 제일 행복해하는 단순한 애잖아. 구글 포토 ‘추억 속 오늘’ 같은 건 끄고. 안정감을 찾고. 매사에 의미를 부여하는 걸 귀한 재능으로 알아봐 주는 사람을 만나.
전송 버튼을 누르려다가 나답지 않다며 지워버렸다.
*
― 솔 씨, 저 상 탔어요. 모로코 음식 사준다고 했던 약속 지키고 싶어요.
웬 존댓말. 전혀 상상해 본 적도 없는 호의 연락이었다. 5달 만이었다. 반갑고 고마웠다. 무슨 상이냐고 물었더니 신춘문예 시나리오 부문이라고 했다.
― 신춘문예라니, 왠지 멸치에다 깡소주 잘 마실 거 같다.
― ㅋㅋㅋㅋ 강소주가 표준어야. 나 익명으로 발표하고 싶어서 필명 고민 중이야.
― 익명? 미쳤어? 나 같으면 틴더 프로필 sinchoonmunye로 바꿨다.
― 미쳤나 봐 ㅋㅋㅋ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대화가 이어졌다. 호는 살던 곳의 계약이 끝나면서 성동구로 이사 갔다고 했다. 나는 더 이상 동네 친구는 아닌 호가 어떻게 달라졌을지 궁금했다.
우리는 이태원의 모로코 음식점에서 만났다. 호는 자기에게 직장이 생긴 것도 아니고, 생활이 달라진 건 하나도 없다고 했다. 게다가 이번에 쓴 시나리오는 상업성과는 거리가 멀어서 영화화되기는 어려울 거라고 덧붙였다. 호의 평온한 태도가 예전과 달리 조금은 여유로워 보였다.
“사람들이 축하해 주는데 정작 너한테 축하를 받지 못해서 별로 기쁘지 않더라고. 시상식 뒤풀이에서 내내 슬픈 생각만 들었어.”
“으이구, 또 울었어?”
나는 전 여친의 사진을 보고 툭하면 서럽게 울던 호를 떠올리며 물었다.
“아니, 울지는 않았어.”
호가 담담하게 말했다. 우리가 서로에게 눈물 한 방울의 사이도 되지 않는다는 게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그 담백함이 좋았다. 우리가 뭐 애증의 연애를 한 것도 아니니까, 이 정도로 가볍게 화해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많이 우울해하더니 그래도 글을 완성했네.”
“네 덕분이야.”
“뭐가?”
“나 추위 많이 탔는데 그럴 때마다 여의도의 햇살을 떠올렸어.”
호가 빙긋이 웃었다.
“나는 정말 네가 아니면 유령이었어. 그 시기를 함께 보낸 사람이 너밖에 없었어.”
호가 ‘그 시기’라고 표현하는 걸 들으니 정말로 한 시기가 지나간 느낌이었다.
“그리고 나는 끈질기니까 할 수 있을 거라고 네가 그랬잖아.”
내가 근거도 없이 쉽게 한 그런 말조차도 그때의 호에게는 필요한 말이었다고 했다. 내가 호에게 무엇을 해주었나 생각해 봤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적적할 때 불러냈던 새벽들만 떠올랐다. 호가 나를 필요로 할 때 나는 큰 위로를 줄 만큼 여유로운 인간이 아니었다. 그저 시간을 같이 보내며 밥을 먹고 술을 마시고 시시껄렁한 농담을 나눴을 뿐이었다.
나는 낯간지러운 순간을 못 견뎌서 화제를 돌렸다. 희궁과는 어떻게 됐냐고 물었다. 호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냥 흐지부지됐어.” 잘 만나고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않았지만 내 예상을 깼으면 하는 마음도 있었다. 요즘은 누구 안 만나냐는 물음에 호는 고개를 저었다.
“요새는 틴더도 안 해.”
나는 그럼 무슨 데이팅 앱 해? 하고 놀리고 싶었지만 참았다.
“비슷한 패턴으로 또 누구에게 빠지고, 가까워지고, 멀어지고, 아파하고, 그렇게 계속 돌아가는 컨베이어 벨트가 있다면 나는 스위치를 꺼두고 싶어. 이제 아예 거기에서 내려오고 싶어.”
호는 정말로 지친 기색이었다.
“그래. 뭐, 꼭 누구를 만나야 하는 건 아니니까.”
우리는 노아 바움백의 신작이 개봉되면 같이 극장에 가자는 약속을 나눴다. 헤어지기 전 호는 요즘 식물에 애정을 쏟고 있다고 말했다.
“고양이를 기르고 싶은데 여력이 안 돼서 식물을 기르기 시작했어. 그런데 만질 수 없어서 아쉬워. 자꾸 만지면 잎사귀가 열을 받아서 시들어 버리더라고.”
*
그 만남 이후 몇 달이 흘러 호와는 연락이 뜸해지고 예전처럼 지내지 않게 되었다. 물리적으로 멀어진 거리 때문만은 아니었다. 내게는 새벽 두 시에 카톡으로 ‘ㅋㅋㅋㅋ’를 나눌 다른 친구가 생겼다. 호도 내가 아닌 누군가를 찾았을까.
방의 불을 끄고 잠들기 전 침대에 누워서 틴더를 돌렸다. 나는 타투이스트, 군인, 디자이너, 다양한 남자들의 프로필을 넘기다가 익숙한 풍경을 보고 멈췄다. 햇살 가득한 여의도 회사 회의실에서 노트북을 보고 있는 남자, 호였다. 닉네임은 ‘춘’이었다. 풋, 하고 웃음이 났다. 틴더 안 한다더니. 그래, 틴더는 계절 같은 거니까. 나는 한참을 그 사진을 보고 있었다. 어쨌든지 호가 혼자 있으려 하지 않는다는 게 짠하고 안심이 됐다. 호의 프로필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I TINDER U’
‘ㅋㅋㅋㅋ’ 웃으며 호에게 이거 뭐냐고 캡처해서 보낼까 생각했다. 내게 ‘아이 틴더 유’가 ‘얼마든지 네게서 사라질 수 있다’라면, 호에게는 ‘아이 틴더 유’가 ‘어쩌면 나와 잘 맞는 사람을 만날 수 있을 거야’라는 낭만적인 말일 거였다. 여전히 그곳에서 무언가를 찾는지, 이제는 잠들기 전에 울지는 않는지, 정말로 호가 잘 맞는 누군가를 만났으면. 새벽 두 시, 어플에 뜬 수천 명의 사람 중에 대체할 수 없는 나의 스페어, 나의 친구 호는 이제 나로부터 17km 떨어져 있다.
|
《문장웹진 2020년 07월호》
추천 콘텐츠
바이킹을 타자 윤성희 1 나는 혼자 여행을 떠나 본 적이 없었다. 겁이 많아서 그런 건 아니었다. 버스나 기차를 타고 먼 곳을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토요일이면 걸어서 삼십 분 거리에 있는 호숫가의 트럭 카페에 가서 삼천 원짜리 커피를 사 먹거나, 퇴근길에 내가 좋아하는 정자에 가서 가끔 맥주 한잔을 마셨다. 그게 나에겐 여행이었다.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랬는데 최근에 그 장소들을 잃어버렸다. 먼저 정자에 불이 났다. 정자는 내가 졸업한 고등학교 교문 옆에 있었다. 학교는 가파른 언덕길을 올라가야 해서 늘 숨을 헐떡이며 등교를 해야 했다. 여름에는 교복 겨드랑이가 땀에 젖곤 했다. 교문 옆에는 작은 공원이 있었고 거기에는 운동기구와 동네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정자가 있었다. 내가 고등학생 때는 거기서 매일 철봉을 하는 할아버지가 있었다. 비가 오는 날도 눈이 오는 날도 늘 철봉을 했다. 그리고 지각을 하는 학생들에게 잔소리를 했다. 지금은 조금 늦는 거지만 나중에는 아주 많이 늦게 된다고. 이제 운동기구는 없어졌고, 아마 할아버지도 돌아가셨겠지만, 정자는 그대로 남아 있었다. 혼자 술을 마시고 싶은 날이면 나는 그곳에 갔다. 가기 전에 편의점에 들러 닭 다리 모양의 과자와 맥주 한 캔을 샀다. 맥주는 텀블러에 옮겨 담았다. 너네는 공부해라. 나는 맥주나 마시지. 하교하는 아이들을 보며 몰래 맥주를 마시면 기분이 좋아졌다. 텀블러 안에 술이 있다는 걸 아무도 모른다는 사실이 통쾌했다. 바람까지 불어 주면 근심 없는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정자에 불을 낸 사람은 고등학교에 재학 중인 학생이었다. 시험을 망쳐 기분이 우울한데 정자에서 사람들이 웃고 있는 걸 보니 화가 나서 그랬다고 뉴스에서 아이는 말했다. 나는 불에 탄 정자 사진을 찍어 민정에게 보냈다. ‘헉, 낙서도 사라졌어?’ 민정이 물어서 나는 그렇다고 답했다. 정자 기둥에는 연경의 낙서가 있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우리는 거기서 치킨을 시켜 먹은 적이 있었다. 그 시절에 우리 학교는 점심시간에 몰래 나가 치킨이나 떡볶이를 배달시켜 먹는 게 유행이었다. 그날 연경은 닭 다리를 우리에게 양보했다. 그리고 정자 기둥에 이런 낙서를 남겼다. ‘닭 다리 양보한 사람은 평생 복 받을 것!’ 연경은 프라이드치킨을 좋아했다. 나는 편의점에서 닭 다리 과자를 살 때 꼭 프라이드맛만 샀다. 핫숯불바베큐맛은 절대 먹지 않았다. 민정에게 새로 정자가 지어지면 같은 자리에 같은 낙서를 하자고 말했다. 민정이 꼭 그러자고 답을 보냈다. 그날 밤에 나는 친구들과 학교 운동장에서 훌라후프를 하는 꿈을 꾸었다. 땀에 젖은 겨드랑이를 보며 서로 웃었다. 삼 년 전, 나는 엄마의 병간호를 핑계로 고향에 왔다. 그 전에 나는 서울의 한 무역회사에서 일을 했는데 상사인 경리실장이 횡령을 하고 잠적하는 일이 생겼다. 동료 직원과 함께. 퇴근 후 우리 셋은 자주 어울렸다. 우리는 같은 먹방 유튜버를 좋아했다. 그래서 새 영상이 올라오면
- 관리자
- 2025-09-01
법의 아름다움 길란 출근 시간이 되기 20분 전에 부속실에 도착했다. 우선 판사님들의 책상을 청소했다. 강 판사님의 책상 위에 올려진 커피잔도 치우고, 정 판사님 책상 위에 있는 사도신경이 새겨진 크리스털도 지문 자국 하나 남지 않게 조심히 닦았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교회에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지만 사도신경의 내용만큼은 다 외워 버렸다. 크리스털을 닦고는 재판에 필요한 자료를 정리해 정 판사님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판사님께서 읽으시기 편하게 글씨 크기를 키워서 출력한 자료도 옆에 두었다. 남들은 나보고 오버한다고들 하지만, 엄마는 이런 게 다 업무 능력이라고 했다. 판사님들께서 안 보는 척하면서 다 보고 있을 거라고. 책상 청소를 마치고 책장과 벽에 걸린 십자가의 먼지를 털어내고 있을 때 정 판사님께서 부속실에 들어오셨다. “권 기사, 좋은 아침이에요.” “안녕하세요 판사님. 좋은 아침입니다. 커피 한 잔 드릴까요?” “그럼 좋지.” 그렇게 말하며 판사님은 책상에 앉으셨다. “매번 고마워요. 따로 뽑기 힘들 텐데.” 판사님이 큰 글씨로 뽑은 자료를 들어 보이셨다. “아니에요. 제가 판사님 업무 도와드리는 거로 돈 받는 거잖아요.” 최대한 사교성을 끌어올려 너스레를 떨었다. “내년에 부서 바뀌면 어떡하나. 권 기사가 아주 내 버릇을 나쁘게 들여놨어.” 판사님이 웃으며 말하셨다. 머신으로 커피를 내리고 있으니 강 판사님과 이 판사님께서도 부속실에 들어오셨다. 강 판사님과 이 판사님께도 인사를 하고 커피를 드렸다. 판사님들께서는 고맙다고 하시고는 안에서 편하게 일하고 있으라고 말해 주셨다. 나는 판사님들께 인사를 하고 부속실 안에 있는 속기실에 들어왔다. 판사님들과 분리된 나만의 공간이었다. 법원에서 일하기 전에는 판사들이 권위적인 사람들일 것이라고 막연히 생각했는데, 실제로 겪어 본 판사님들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행정 업무를 처리하고 점심을 먹고 나니 어느덧 2시가 다 되어 가고 있었다. 나는 속기용 키보드와 공판 자료들을 챙겨 법정에 들어왔다. 대기석에는 사람이 스무 명 정도 앉아 있었다. 속기사석에 앉아 그들을 둘러보았다.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자부터 60대 남성까지 성별과 나이가 다양했다. 눈에 띄는 것은 단연 휠체어에 앉은 사람이었다. 곧 검사분들이 재판장에 들어와 검사석에 자리를 잡았다. 정 판사님께서도 공판 시간에 맞춰 입정하셨다. 재판이 시작되었다. 판사님께서 첫 번째 사건의 번호를 부르고, 피고인의 이름을 부르고, 인적 사항을 확인했다. 검사가 기소의 이유를 밝혔다. 횡령죄였다. 나는 빠르게 손을 움직였다. 법정 안에서 발화되는 모든
- 관리자
- 2025-09-01
모든 공원에는 이름이 있다 조재윤 그녀는 공원에게 이름을 지어주기로 했다. 그녀의 퇴근길이 비탈이 될 즈음, 공원은 나타난다. 사 차선 도로와 맞닿아 있는 공원은 아스팔트의 바깥이 아닌 일부처럼 보인다. 넓지도 좁지도 않은 너비의 내부엔 몇 개의 운동기구와 나무 벤치밖에 없다. 옅은 주황색 가로등 불빛 아래 놓여 있는 나무 벤치에 앉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여느 공원에서든 흔하게 볼 수 있는 흐느적거리며 산책하는 사람 또한 없다. 그녀는 자정에 가까운 퇴근길의 경로를 공원 입구로 바꾼 적이 없다. 공원 뒤편 아파트 단지가 있지만 단지 내에 이미 공원이 존재하기 때문에 이곳을 찾는 주민 또한 없다. 과자 부스러기를 뿌려 주는 주민이 없기 때문에 비둘기 또한 없다. 공원엔 나무도 없다. 나무가 없기 때문에 참새 또한 없다. 그녀는 공원 앞에 놓여 있는 낡은 표지판을 들여다본다. 공원의 이름은, 무슨무슨 혹은 땡땡 공원이다. 무슨무슨 혹은 땡땡에 적혀 있던 글자는 칠이 벗겨져 알아볼 수 없다. 없는 게 너무 많은 공원은 이름 또한 없다. 그녀의 원룸 창문을 열면 또, 공원이 나타난다. 언덕 위 원룸에서 보는 공원은 더 작고 조악해서 뭉쳐 놓은 모래 더미 같다. 그녀는 공원의 이름을 유추해 본다. 본래의 이름. 무슨무슨에 들어갔던 글자들. 하지만 머릿속엔 텅 빈 공원이나 길옆 공원 같은 공원의 민낯을 드러내는 이름만 떠오른다. 그녀는 공원의 이름을 아무것도 없는 공원으로 지어야 할까 생각하다가 그런 이름을 지어 주기엔 공원이 가엾게 느껴져 머릿속에서 지운다. 시간은 밤 열두 시를 향하고 있다. 그녀는 힘겹게 나무 벤치를 비추고 있는 가로등 불빛을 바라보며 락을 떠올린다. 락에게 공원의 이름짓기를 도와달라고 말하고 싶지만 락이 오는 시간은 아직 멀고 멀었다. 오후 한 시. 한낮의 해가 지구의 정수리에 오도카니 설 때, 락은 온다. 따르릉 따르릉 소리를 내며. 따르릉 따르릉. 그녀는 방 안을 울리는 소리를 따라 해본다. 따르릉 따르릉. 전화벨 소리보다는 자전거의 경적 같다고 생각하지만 따르릉만큼 자신의 벨 소리를 정확하게 표현할 단어는 없다고 수긍하며 따르릉 따르릉 비켜나세요, 흥얼거린다. 전화를 받자 락이 인사한다. 안녕. 오늘은 그늘이 많은 날이야. 그녀도 인사한다. 안녕. 오늘은 햇볕이 따뜻한 날이야. 근데 따뜻하다는 말은 여름과 정말 어울리지 않는 말 같아. 락이 웃으며 말한다. 그늘이 필요한 날이었는데 딱 좋네. 서늘해. 그녀가 답한다. 바깥에 까마귀가 많아. 까마귀가 전깃줄에 줄지어 앉아 있으면 글씨 위를 까맣게 그은 밑줄 같아. 락이 잠시 뜸 들이다 말한다. 오늘 점심은 소고기뭇국이었어. 나는 무보다 소고기가 더 많이 들어 있길 바라지만 언제나 무가 더 많아. 그래서 소고기뭇국의 이름은 소고깃국이 아니라 뭇국이지. 락의 말이 끝나자 그녀가 이어 말한다. 해가 따뜻할 땐 이불을 널어야 하는데. 그러고 보면 여름은 언제나 이불을 널어놓기가 좋은
- 관리자
- 2025-09-01
저번까지 읽은 이후로 이어보시겠어요?
선택하신 댓글을 신고하시겠습니까?
댓글0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