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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가 지하철 할 때

  • 작성일 2020-09-01

[단편소설]



여자가 지하철 할 때



이미상




1



수진은 매일 얼굴에 세로선을 긋는다. 정수리에서 시작해 눈썹을 지나 콧방울을 거쳐 입술을 쓸며 죽 내리긋는다. 그럼 일순 정적이 흐르는데 약간 상투적인 정적이다.
어차피 곧 난리가 날 거면서.
아니나 다를까 수진의 머리가 곧 반으로 쪼개진다.
처음은 아프다. 쪼개지는 순간은. 사과 머리를 칼로 탁, 칠 때 사과가 느낄 법한 통증이다. 다음은 리본이 풀리는 것과 같다. 머리가 밖으로 동그랗게 말리고 갈라진 얼굴이 흘러내린다. 난초 잎처럼 힘없이 벌어져 덜렁대는 얼굴 두 쪽. 얼굴I, II의 탄생.
‘갈까?’
수진이 팔뚝을 긁으며 말한다.
“누자미. 누자미.”
갓 태어난 얼굴I은 말이 서툴다.
얼굴Ⅱ가 눈을 깜빡인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수진이 웃으며 말한다. 셋 다 같은 생각이다. 동同, 동同, 동同. 삼동이 맞다. 삼두가 맞다고 해야 하나. 하하하. 어쨌든 흔치 않은 일이다. 오늘은 시작이 좋다. 라-디-다 라라. 노래가 절로 나온다. 라-디-다 라라 라-디-라 라라 라라라……



2



“마스크 쓰셨나요?”
마스크를 쓰지 않은 사람에게 역무원이 묻는다. 그런 역무원을 수진과 얼굴들이 보고 있다.
“여- 여-”
들어오는 열차를 향해 얼굴I이 외친다.
어느 세월에.
이번 얼굴들은 유독 말이 느리다. 이런 속도라면 언제 여- 여-가 아니라 열차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할까? 마스크 안 쓴 사람에게 마스크 쓰셨나요? 묻는 역무원의 심중을 어느 세월에 이해할까? 과연, 자알났다, 에 기분 나빠할 날이 올까?
그러나 수진은 좋은 선생이다. 더 머리 나쁜 얼굴에게도 말을 가르쳤다. 16' 얼굴 XIV도 나중에는 잘났다와 자알났다를 구분했으며 죽기 직전에는 둘 사이에 별 차이가 없다는 것까지 깨달았다. 그러니 이번에도 수진은 얼굴들에게 말을 가르칠 수 있을 것이다. 수진이 교재를 편다.


1. 역무원은 시각장애인이 아니다. (모를 일! 그러나 편견 파트는 나중에.)
2. 역무원은 시민이 마스크를 쓰지 않았다는 것을 안다.
3. 그런데 왜, 마스크 쓰셨나요? 하고 물었을까?


수진과 얼굴들의 얼굴이 돌아간다. 차창 밖 시민이 역무원에게 침을 뱉은 것 같다. 수진이 어깨를 으쓱한다.
‘연습문제를 풀어 보자.’


괄호 안에 알맞은 말을 넣으시오.
(     ) 마스크 쓰셨나요?


평일 오후의 지하철은 한산하다. 수진이 선 곳 앞좌석에 세 사람(남1, 여2), 노약자석에 한 사람(남1)이 있을 뿐이지만 수진은 서서 간다. 얼굴Ⅰ은 행맨, 얼굴Ⅱ는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놀이 중이다. 지하철이 지상을 달린다. 강이 흐르고 철교가 지나간다. 다시 지하를 달린다. 정차. 얼굴Ⅰ, Ⅱ가 각각 손잡이, 선반에서 내려와 출입문에 달라붙는다. 출입문 창에 동그란 입김 두 개가 생긴다. 출입문이 열린다. 출입문이 닫힌다. ‘울지 마.’
아무도 타지 않자 얼굴들이 울음을 터뜨린다.
‘문제나 풀자. 내가 하나 풀어 주지. 다음부터는 스스로 풀기. 괄호 열고.’


(선생님, 놀라지 마시고요, 심호흡하시고요. 괜찮고요, 저도 알고요. 이러실 분 아니시죠. 지금 자신도 모르고 계세요. 얼마나 기절초풍하실까! 놀라지 마시고요, 정신 붙들어 매시고요, 천천히, 입 한번 더듬어 보세요.) 마스크, 쓰셨나요?


‘어때? 감이 오지? 이제 해봐.’
얼굴들은 아직 눈물바람이다.
'아이참. 딱 하나만 더 해준다. 잘 들어. 괄호 열고.'


(명령이라뇨, 선생님. 지적이라뇨, 선생님. 다시 한 번 녹음을 들어 보실까요? 마스크 쓰십시오, 가 있으실까요? 안 쓰시면 안 됩니다, 가 있으실까요. 없으십니다. 저는 명령하는 사람이 아니라 챙기는 사람입니다. 저에게는 시민을 챙길 의무가 있고 시민은 저의 챙김을 받으실 권리가 있으세요. 부디 권리를 불행사하지 마세요. 챙김을 챙기세요. 감히 챙기나니 시민님, 지금,) 마스크, 쓰셨나요?


수진이 눈물범벅인 얼굴들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다정하게 말한다.
‘가나다는 잊어도 이건 잊지 마. 말하기의 제1원칙.’
수진이 손바닥을 동그랗게 말아 공 만드는 시늉을 하며 속삭인다.
‘언제나 말을 예쁘게 굴릴 것. 몰아세우지 말고 상처 주지 말 것. 왜냐면.’
이렇게 수진이 양껏 잘난 체를 하고 있는데…….
누군가 지나간다.
누구?
수진이 뒤돈다.
여자다.
수진이 주변을 빠르게 스캔한다.
인원 현황 : 일반석 (남1, 여1) 노약자석 (남1)
한 명이 빈다.
남자 옆, 옆 여자가 도망쳤다.
여자는 벌써 차량연결통로 앞이다.
여자가 손잡이를 잡고 수진을 돌아보며 웃는다.
‘등신. 난 간다.’
여자가 다음 칸으로 사라진다.
갑자기 수진의 왼뺨이 차갑다. 누가 내 뺨에 얼음을 댔나? 수진이 눈만 살짝 돌린다. 남자가 수진을 보고 있다. 몸을 앞으로 길게 빼고 물끄러미 수진을 보고 있다. 수진은 이럴 때마다 궁금하다. 정말 발목이 따이면 어떤 느낌일까? 이렇게 추울까? 터진 발목으로 피가 줄줄 흘러나가 몸에 피가 한 방울도 안 남은 것처럼 이렇게 온몸이 추울까? 머리만 미친 듯이 뜨겁다. 다시 피가 오르더니 순간 솟구친다.
남자가 나를 보고 있다.
남자가 나를 보고 있어.
수진이 뛰려는 순간,
“정신 차려.”
얼굴I이 말한다.
“지금 가면 죽어.”
얼굴II가 수진의 다리를 야무지게 옭아맨다.



3



얼굴의 도약이란 얼마나 경이로운가!
불과 몇 초 전만 해도 얼굴I이 할 수 있는 말이라곤 '여-'와 '누자미'뿐이었다. 지금 얼굴I은 수진에게 맹비난을 퍼붓고 있다. 경보輕步-경보警報? 놀랄 노자다. 동음이의어 말장난까지 구사하다니! 돌이켜보면 16', 17', 18', 19' 얼굴들도 그랬다. 수진이 말을 잘 가르쳐서가 아니라 위기 앞에서 능력이 급신장했다. 16' 얼굴 XIV 가라사대, 위기는 최고의 스승. 구구단을 못 외우는 아이가 있다면 그랜드 캐니언으로 데리고 가라. 절벽에 세워 두고 구구단을 외워 보게 하라. 주기율표까지 외울 것이다!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수진이 차량연결통로를 본다. 통로는 텅 비었다. 여자는 이미 갔다. 계속 가고 있다.
어디까지? 3-2? 3-3? 4-6?
설마 10-2?
혹시 4-5에서 4-6으로 넘어가다 노인에게 공격을 당하진 않았을까?
문 똑바로 닫아, 개년아!
정차. 입김. 열림. 노원(no one).
'울지 마.'
수진이 얼굴들을 달랜다. 얼굴들이 수진을 문다. ("세상에는 경보-경보를 발령하는 사람과 경보-경보에 뛰는 사람이 있어. 왜 우리가 루저에게서 태어났어야 해!")
수진은 과거로 돌아간다. 과거로 간 수진은 해야 했던 일을 한다. 그러나 그 즐거운 상상은 이내 후회로, 해야 했지만 하지 않은 일의 잔인한 목록으로 바뀌고 만다.
수진은 해야 했다. 팩트를 꺼내야 했다. 팩트로 정탐해야 했다. ‘승객 위험도’를 작성해야 했다. 가장 기본적인 승객 위험도조차 그녀는 작성하지 않았다. 그것만 있었어도 여자에게 당할 일은 없었다.


남자1: 몸 수그림 중. 위험 미정. 관찰 요망.
(※ cf. 품속 사물에 따른 위험도 : 산 위험 10점. 칼 위험 9점. 없음 위험 5점. 비둘기 위험 4점.)
여자1: 남자 옆. 뜨개질 중. 위험 0.5점.
여자2: 남자 옆, 옆. 이동 중. 위험 4점.


수진은 노인 남자1 ― 70대 이상은 따로 채점 ― 의 점수를 매기기 위해 체크 리스트를 작성해야 했다.


하지정맥류를 앓고 있는가? yes. 지팡이가 있는가? no. 걷기가 가능한가? yes. 뛰기가 가능한가? maybe. 산 소지 시? 귀하의 도망 속도와 노인의 돌진 속도의 차이 값을 구하시오. 양陽? 음陰?


"뭐 빼먹은 거 없어?" 얼굴I이 한심해하며 묻는다. 수진이 못 알아듣자 얼굴I이 하나뿐인 눈알을 굴린다.
“티-티!” 그제야 수진은 기억해 낸다.
수진은 처음으로 돌아간다. 수진은 해야 했다. 팩트를 꺼내고, 팩트를 열고, 팩트로 염탐해야 했다, 티 나지 않게, 티 나게 눈알을 굴리며. 그럼으로써 남자1에게 다음의 메시지를 전달해야 했다. 잘 보세요, 나 지금 눈알 굴리고 있어요, 콘택트렌즈 돌아갔어요, 나 지하철에서 화장 고치는 여자 아니에요, 증거 채택 바랍니다.
아 됐고요.
그냥 뛰면 안 돼?
그냥 막 뛰면 안 돼?
누구보다 빠르게 남들과는 다르게,
하는 애송이를 보면, 수진은 옛날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 옛날 옛적에 고양이 빠니가 살았습니다. 티베트어로 빠니는 물입니다. 빠니는 전 애인의 고양이였어요. 빠니는 침대 밑에서 기어 나와 멍청한 얼굴로 섹스 하는 우리를 지켜보곤 했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애인이 말했어요. "언니, 미안해용." 빠니는 화가 났어요. 애인이 엄지로 뒤통수를 억지로 눌렀기 때문이에요. 빠니는 풀쩍 뛰어 도망갔어요. 빠니는 피 묻은 휴지를 굴리며 놀았어요. "빠니 탓만도 할 수 없는 게, 그거." 애인이 파인애플처럼 틀어 올린 내 앞머리를 쳤어요. 앞머리가 흔들렸어요. 그러자 빠니는 또! 눈이 맛이 갔어요. "고양이는 말이다." 애인이 내 얼굴에 연고를 발라 주며 말했어요. "아직도 뭐가 움직이면 요러고 본다. 그러다 확 달려들어. 매일 인간이 주는 사료를 먹고살면서도 사냥 본능이 죽지 않은 게지." 쥐돌이 시간이 돌아왔어요. 빠니는 가짜 깃털을 향해 용맹하게 달렸답니다!
뭔 소리?
뛰지 말라고. 세상에는 활어만 먹는 놈들도 있어. 움직이면 미쳐. 좋아 환장해. 고개 싹 돌리고 따라와. 개뛰문 모르니? 개는! 뛰면! 문다. 언제나 스슥 도망가야 해. 스슥.
여자2도 스슥 도망갔다. 엉덩이로 의자를 쓸다 슥 일어나 곧장 걸었다. 얼마나 무서웠을까! 수진도 여자2의 용기만큼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녀는 목숨을 걸었다. 어느 지하철 시인은 이렇게 썼다…… 나에게서 떠나가는 그녀의 뒤통수 / 과녁의 정중앙처럼 / 내 온 마음을 끄네……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수진의 마음이 저며 온다. 그럴 수만 있다면. 수진도 목숨을 걸 것이다. 여자2를 앞지를 것이다. 먼저 갈 것이다. 3-2로. 안전지대로. 꿈의 칸으로. 절대 뛰진 않을 거야. 개뛰문을 기억하자. 개는! 뛰면! 문다. 고개만 살짝 들 것이다. 마치 무언가를 찾는 사람처럼.
약한 냉방을 원하시는 고객님을 위한 차량입니다. 수진은 손부채질을 할 것이다. 다음을 말하기 위해. 이 칸 너무 덥네요. 아쉽지만 다음 칸으로 가야겠어요. 절대 당신을 피하는 건 아니랍니다!
약한 냉방을 원하시는 고객님을 위한 차량입니다가 없다면? 수진은 가방을 뒤진 뒤 팔을 비빌 것이다. 다음을 말하기 위해. 이 칸 너무 춥네요. 아쉽지만 다음 칸으로 가야겠어요. 절대 당신을 피하는 건 아니랍니, 남자는 생각할 것이다. 칠칠치 못한 여자로군. 카디건을 안 챙기다니. 춥냐? 내, 보내 주지. 가라. 수진은 간다. 조빠르게. 조용하고 빠르게. 뒤돌지 않고. 3-2로. 천국으로.


섬세한 집중력이 우리를 구한다
우리?
두 팩트를 아는 우리


"그런데 너는 어떻게 했지?"
얼굴I이 매섭게 닦아세운다.



4



수진은 안다. 여자가 어떻게 지하철 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다. 그런데 막상 지하철만 타면 딴전만 해댄다. 그러곤 후회한다('해야 했는데……'). 무엇이 수진을 아는 대로 행하지 못하게 막는가. 인식과 실천을 잇는 다리는 대체 어디에서 끊겼는가. 싹싹 비는 수진을 보며, 얼굴I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혹시 존심 상해?"
놀란 얼굴II가 신문을 놓친다.
"화내지 마. 나 지금 이해하려고 죽기 살기로 노력 중이니까."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수진이 고개를 든다.
'내가 자존심 하나 때문에 우리 모두를 죽음으로 밀어 넣는 그런 사람으로 보여?'
얼굴I이 남자1을 본다. 이제 그는 대놓고 수진을 보고 있다. 고개 숙인 남자에서 고개 돌린 남자로 발전한 것이다. (※ cf. 고개 각도에 따른 위험도 : 고개 약간 숙임 위험 10점. 고개 돌림 위험 7점. 고개 많이 숙임 위험 6점)
"나도 네가 달라졌다고 믿었어. 하지만 아니었어." 얼굴I이 침통해 하며 말한다. "너에게는 저항심이 있어. 너도 다 알잖아. 지하철을 타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런데 너는 하지 않아. 아는데 안 하는 거야. 네 속에 뭔가가 너를 막고 있어. 그게 뭘까? 나는 결국 자존심이라고 생각해. 너는 저치한테 자존심이 상한 거야. 저치의 비위 맞추기가 비위 쏠려 못 하겠는 거지."
수진이 울컥한다. 기억 저편에서 어떤 목소리가 들려온다. 공포의 3F. Fight-Flight-Freeze. 잽잽원투. 더 세게! 더 세게! 앞에 있다 생각하고. 갑자기 머리가 깨질 것 같다.
"너는 착각하고 있어." 얼굴I이 차갑게 말한다. "남자의 비위를 맞추면 네가 지는 거라고, 너뿐 아니라 모두가 함께 지는 거라고, 바짓가랑이 아래를 기는 거라고 생각하지."
'아니야. 나는.'
"쯔쯔."
얼굴I이 검지를 흔들며 제지한다.
"그래서 자꾸 너 자신을 위험에 빠트리는 거야. 너보다 훨씬 불리한 여자도 빠져나가는 마당에 혼자 지옥에서 허우적대는 거지. 나는 오랜 고찰 끝에 인간이 자존심을 버리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어. 하지만 너는 자존심을 버릴 필요가 없어. 애초에 잃은 적도 없으니까. 남자를 한번 봐봐."
수진이 고개를 바로 하고 눈알만 살짝 돌리는데,
"쯔쯔."
"시-하향법을 써야지."
수진이 눈을 더 내리깐다. 남자가 안 보인다. 수진은 남자의 신발만 볼 수 있다.
"저 남자, 무슨 생각 하고 있을까? 틀린 질문. 옳은 질문은 이거야. 저 남자에게 무슨 생각이 심겼을까?"
지하철이 지상을 달린다. 비가 내린다. 창문에 붙은 빗방울이 반짝인다. 수진은 얼굴I의 말이 듣기 싫다. 자연의 적당한 미美. 사람을 주눅 들게 하는 장엄미가 아니라 슬며시 미소 짓게 하는 빗방울의 귀여움이 수진의 마음을 가볍게 만든다.
잽잽원투.
수진이 놀라 자빠진다.
"옳지."
얼굴들이 다가와 수진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얼굴I이 이어 말한다. "저치의 마음은 너에게 달렸어. 네가 저치의 마음을 가지고 노는 거야. 네가 눈알을 굴리면, 저치는 너를 동정하겠지. 아아. 저 여자. 안경 안 써보려 애쓰는구나. 일회용 렌즈를 일주일 동안 쓴 걸 테지. 돈 아끼느라. 기특하다. 사는 데까지 살아 보려 애쓰는구나. 결막염 걸린 빨간 눈을 하고. 굿 럭 투 유. 살아가길. 귀여운 아가씨 하겠지. 반대로 네가 눈알을 안 굴려 봐. 마음이 백팔십도 바뀔 거야. 요즘 년들 참 대놓고 화장 고쳐. 얼굴 한번 대차게 망가져 봐야 저 짓거리 고치지 하겠지. 저들은."
얼굴I이 도도하게 남자를 내려다본다.
"쥐야."
얼굴I은 아주 오만해 보인다.
"네가 만든 미로를 빙빙 도는 실험 쥐. 발바닥을 전기로 지지면 아이 아파! 밥을 주면 아이 좋아! 하지. 모든 건 너에게 달렸어. 네가 저들의 생각을 주조해. 손가락을 밀어 넣어 뇌를 주물럭거려. 신처럼. 그런데 왜 네가 자존심이 상해? 저들을 그냥 둬. 네가 설계한 미로를 신나게 돌게."
"찍찍."
수진이 볼을 긁는다.
멀리서 얼굴들이 날아와 창문에 달라붙는다. 반쪽짜리 얼굴들이 감속하는 열차에 매달려 외눈으로 안을 들여다본다. 수진이 창문 너머로, 기어가는 달팽이를 유리 아래서 구경하듯, 정찰 중인 얼굴들을 본다. 얼굴은 늘 진지하다. 그래서 우스꽝스럽다. 이 얼굴의 주인들 ― 승차 전 미리 정찰대를 보내는 분별 있는 여자들 ― 은 다른 칸에 탈 것이다. 3-2 또는 6-4. 정차. 입김. 열림. 노원(no one). '울지 마.'
통로에 새로운 얼굴들이 꽉 들어찬다. 벌써 소문을 들은 그들이 수진을 비웃는다. 그러면서도 자신과 수진과 남자1 사이의 거리를 시종 측정한다. 균형이 깨지면 바로 떠날 것이다. 또 한 번 경보輕步-경보警報를 울리며. (수진 / 뜨개질 여자 / 남자1 사이의 거리는 얼굴II가 측정 중이다.)
"어쩌면 너는 너만 살아남는 것이 불편한지도 모르지."
얼굴I이 말한다.
"잰걸음으로 저만 쏙 빠져나가느니 차라리 패닉 한 무리에 뒤섞여 정신없이 뛰는 게 속 편하겠지. 네 웅대한 상상 속에서 너는 차라리 밀쳐지는 사람이니까. 탈출구를 향해 손을 뻗기보다 손 뻗은 사람들의 발밑에 깔리길 은밀히 소망하지. 숭고한 일이야. 나는 생존이 모든 것의 앞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 어떤 일은 목숨을 걸 가치가 있지. 그래, 걸어. 그때처럼 또 걸어 봐. 우린 갈게."
잽잽원투.
'잘못했어요.'
수진이 싹싹 빈다.
'용서해 주세요.'
"찍찍."
수진이 볼을 긁는다.
볼에서 뾰루지만 한 얼굴이 나오려고 한다. 금세 얼굴은 골무만 해진다. 입이 먼저 뚫리는 걸 보니 할 말이 많은 모양으로,
"남자는 여자."
이제 눈을 뜨고,
"하기 나름."
죽은 사람의 성대모사를 하더니,
"의 변주. 시덥."
딸꾹.
"잖은. 연대의."
딸꾹.
"적. 처단하라. 킥킥."
갓 태어난 아기 얼굴이 이쁜 짓을 한다. 얼굴 I, II가 어이쿠 하며 맞장구친다. 아기 얼굴이 애교를 부리며 은근슬쩍 커간다. 어이쿠 잘한다 우리 아기 잘해 얼굴들이 환호한다. 아기 얼굴이 완전히 빠져나오려는 순간 ― 순간 스치는 승리감 ― 얼굴II가 와삭 문다. 와그작 씹는다. 툭 떨어지는 핏덩이. 사산된 가여운 아기 얼굴.



얼굴III가 되지 못하고 죽은 아기 얼굴을 위한 전사前史



모임 홈페이지 대문에 적힌 모든 이를 환영합니다 문구를 두고 안평대전이 벌어졌다. 16년의 일이다.
평파派의 승리로 끝났지만, 애매한 승리였다. 회원의 절반인 안파派를 모임에서 몰아내고 (안파는 패배에 안도했다) 나머지 절반, 승리의 주역인 평파가 한 일은 모임에 나오지 않는 것이었다. 둘의 차이는 회비였다. 안파는 회비를 안 냈고 더는 회원이 아니었다. 평파는 회비를 냈고 여전히 회원이었다. 그리고 두 파 모두 모임에 나오지 않았다.
모임에 나오는 사람은 수진뿐이었다. 그녀만이 품위 있게 쇠락한 ― 누군가 고양이 사료를 담은 햇반 그릇을 내놓으면 누군가 사료를 붓고 햇반 그릇만 챙겨 가는 ― 골목에 있는 사무실로 정기 모임을 열러 나왔다.
안파는 안전파의 약자로 모든 이를 환영합니다 문구를 삭제할 것을 주장했고, 평파는 평등파의 약자로 유지할 것을 주장했다. 홈페이지에 웰컴 사인을 걸어 둔 이상 누구라도 모임에 올 수 있었다. 위험한 사람도 ― 안파의 말이다 ― 아직 충분히 안전'감'을 주지 못한 사람도 ― 평파의 말이다 ― 불쑥 들어오기만 하면 되었다. 그들에게는 환영받을 권리가 있었다.
더는 그렇게는 안 된다고, 그 일 이후 몇몇 사람이 마음을 굳혔고 후로 지난한 안평대전이 이어졌다.
이 모든 일이 일어난 사무실이 있던 골목은, 두엇 문단을 들여 묘사할 만큼의 가치는 있는 곳이다. 바로 앞 골목에서 젠트리피케이션이 끝나는 바람에 집값 상승이 오다 만 그곳은, 시가 쇠락한 동네에 청년 예술인과 활동가를 들여보내며 품었을 법한 / 품었어야 할 기대가 자연스레 구현된 곳이었다. 사무실 골목 사람들은 무언가를 증명하려는 듯 서둘러 들뜨지 않고 얌전히 개성적이며 마을을 살리기보다 마을에 살려 했다.
오종종한 화분에 둘러싸인 작은 슈퍼마켓과 늙은 타투이스트의 숍, 돼지껍데기 집과 이십 년째 운영 중인 출판사 '단명'이 있던 기찻길 골목……. 안파와 평파 모두 그리움으로 추억하는 그곳 이야기에, 그러나 아기 얼굴들은 지겨워하며 하품한다. 그러곤 양 무릎으로 빠르게 기어 네 문단을 거슬러 올라 그곳에서 서성대지 않고 손쉽게 죽 내려온 눈들을 호되게 꾸짖기 시작한다.
"'위험한' 사람? 어떻게 그런 말을 그렇게 쉽게 할 수 있어? 너도 알고 나도 알잖아, 하는 식으로 우리 모두 네 생각에 동의하는 양, 그것이 공인된 것인 양, 굴지 마. 대체 '위험한' 사람이 어떤 사람이야? 그 말을 쓰려거든 위험한 사람에 대한 네 사적 정의부터 밝혀." 흥분한 평파 사람이 공중 따옴표를 그리며 말했다. 그러자 안파 사람이 눈알을 굴리며 말했다. "좋아. 내가 정의를 내려 주지. 위험한 사람이란!"
눈알 사람이 공중 따옴표 사람에게 얼굴을 바짝 갖다 대며 말했다.
"네가 옆에 안 앉으려고 하는 사람. 어때, 심플하지?"
"심플? 대단히 복잡한데?"
눈알 사람이 또 눈알을 굴리며 설명하기 시작했다. "누가 너에게 '위험한 사람이란 어떤 사람입니까' 물었다고 생각해 봐. 넌 어떤 정치인을 떠올리겠지. 하지만 그 대답에는 대상이 빠져 있어. 그 정치인은 사회에 위험한 사람이고, 그건 정말 위험한 사람은 아니지. 너는 네가 욕하는 정치인 옆에 앉을 수 있어. 출판기념회 같은 데에서 우연히 만난다면 외려 기를 쓰고 옆에 앉으려 할 거야. 그런 네가 평대가 왔을 땐 어디에 앉았더라? 가슴에 손을 얹고 돌이켜봐. 너는 잊었을지 몰라도 나는 기억해. 그리고 너도 기억하지. 왜냐하면 너나 나나 평대 옆은커녕 그로부터 가장 먼 곳에 앉으려고 했으니까. 그게 위험한 사람의 정의야. 네 도주로의 출발점. 마주치는 순간 뒤돌아 뛰고 싶게 만드는 사람."
수진이 화장실에 갔다. 요의 때문은 아니었다. 다들 수진을 너무 쳐다봤다.
"아아, 정다운 논리. 또 그 소리니? 쎄함은 과학이다? 참고로 쎄함은 정말 과학이야. 가빈 드 베커의 『범죄신호』만 읽어도 알 수 있지. 하지만 말이야." 공중 따옴표 사람이 슬슬 말의 시동을 걸기 시작했다.
눈알 사람이 머리를 흔들며 말을 끊고 들어왔다. "처음 평대가 왔을 때 몇몇은 용기를 냈어. 다음날 조심스레 단체 채팅창에 썼지. '근데…… 그 사람 좀 이상하지 않아?'"
"용기?"
"용기지. 다들 알지만 말 못 하는 걸 터뜨렸으니까."
"다들? 제발 나는 빼줘."
"그때도 그랬지. 다들 뻔뻔했어. 이랬잖아. '어제 그 사람이 이상하다고? 나는 전혀 모르겠던데? 그리고 자기야. 애당초 세상에 이상하고 안 이상하고가 어딨어. 그러는 자기는 안 이상해? 우리 다아 이상해! 우리 다아 미쳤어!' 그래 놓곤 평대가 오면 다들 문 앞에 옹기종기 모여 앉는 거야. 여차하면 튈려고."
"나왔다! '이상한 사람'."
공중 따옴표 사람이 휘파람을 불곤, 눈알 사람이 껴들기 전에 재빨리 이어 말했다. "나는 그 말보다 비겁한 말을 들은 적이 없어. 차라리 위험한 사람이 낫지. 이상한 사람은 위험한 사람의 완곡어. 위험하다고 말하고 싶지만 위험은 감수하기 싫어서 이상함의 두 측면, 두려움과 매혹 중 매혹에 살짝 발을 들이고 있는 것이지. (공중 따옴표 시작) 여차하면 (공중 따옴표 종료) 튈려고."
"말장난. 말장난. 말을 믿지 말지어다. 오로지 '착석 위치'만 믿을 것!"
"그래."
공중 따옴표 사람이 두 손을 번쩍 들었다. 항복하듯. 항복의 제스처로 안심시키곤 반격하려는 듯.
"그래, 알았다, 치자. 저 사람 위험하고, 곧 사고 칠 거고, 재수 없음 오늘 나 죽을 수도 있고, 그거 다 안다, 치자. 그럼? 그래도 돼? 배척해도 돼? 모든 이를 환영합니다 지우고, 사람 가려 들이고, 그건 괜찮아? 나는 홈페이지에서 만민 환영의 기치를 슬그머니 내리느니 차라리 써 붙이는 게 낫다고 생각해. 안녕하세요! 저희는 사람을 가려 뽑습니다! 엄선합니다! 셀렉합니다! 안심하세요! 모든 이를 환영합니다에 우리의 모든 가치가 달려 있다는 걸 왜 몰라. 평대를 일단 환영, 우리 솔직해지자, 솔직히 환영하진 않았지. 커피 한잔 내주는 것이 환영의 정의가 아니라면. 여하튼 그를 일단 모임에 들이는 것과 들인 후에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피하는 것은 천지 차이야. 우리가 어떤 행위 하기 이전의 사람을 우리와 같은 사람으로 보느냐 마느냐, 평등을 추구하느냐 마느냐의 문제라고."
공중 따옴표 사람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는 눈알 사람의 응수를 기다리며 한껏 고양됐다. 그러나 눈알 사람은 급격히 침울해져 있었다. 눈알 사람은 문을 보고 있었다. 살짝 열린 문틈으로 계단이 보였다. 순간순간 각도에 따라 날카롭게 빛나는 은빛 계단 손잡이도. "저기 있지. 재미없다." 눈을 문에 고정한 채, 몸만 비틀어 손으로 책상을 짚어 나가며 눈알 사람이 말했다. "네가 옳아. 옳다 그르다 지겨워." 그가 필통에 펜을 담기 시작했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저 문을 닫고 싶을 뿐이야. 오로지 머릿속에 그 생각밖에 없어."
눈알 사람이 가방을 챙겨 사무실을 떠났다. 계단을 내려가는 발소리가 작아지다 사라졌다. 발소리의 부재-음이 남은 사람들을 조용히 뒤흔들었다. 눈알 사람은 갔다. 여기 없다. 그래도 되는 것이다.
논쟁이 끝나자 흥분의 물결이 급속도로 무섭게 잦아들었다. 조용하고 평화로운 저자극 상태가 사람들을 두려움에 떨게 했다. 뭐라도 하지 않으면 그때 그 지옥으로 다시 처박힐 것이다. 문을 닫아버릴까? 모든 이를 환영합니다를 형상화한 것이 사무실의 열린 문이었다. 누구든 저 틈으로 들어올 수 있다.
"노, 노, 노. 성차를 빼먹으면 안 되지."
새롭게 등판한 사람이 물결의 한쪽 끝을 잡고 세차게 펄럭였다. 다시 파도가 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허겁지겁 파도에 올라타 깊은 곳에 박힌 기억으로부터 도망쳤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감정이었다. 서로 기꺼이 경멸하며 사람들은 의식 바로 밑에서 출렁이는 공포심을 잊으려 했다. 그들은 같은 강에서 나온 다른 물줄기였다.)
"너는 평등의 가치는 절대적인 것으로 드높이면서 안전은 무가치한 것으로 치부하는데 그건 네가 남자이기 때문이야."
"에?" 항의하려다 말고 공중 따옴표 사람이 주변을 둘러봤다. "갑자기 여기서 여남이 왜 나와?" 평파 여자가 그의 눈빛을 받아 말했다. (우리는 여기서 명명이 바뀐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왜 나오긴 왜 나와. 까놓고 말해." 안파 남자가 공중 따옴표 남자를 보며 말했다. "자기랑 나랑 인도 다녀왔잖아. 그게 얼마나 큰 특권인지 몰라? 안전 이슈에 있어서 남자는 무조건 입을 닫아야 해. 그럼 너는 이렇게 말하겠지. 우리 다 그 자리에 있지 않았냐고. 우리 다 평대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겁에 질리지 않느냐고. 맞아, 무서워. 너희가 문을 못 닫게 해서 더 무섭고 더 미치겠어. 하지만 여자들의 두려움은 우리의 것과 질적으로 달라." 안파 남자가 잠시 멈춰, 여성 동지들의 얼굴을 벅찬 마음으로 둘러봤다.
"우리의 공포는 여기, 이 사무실에 국한돼. 우리는 사무실을 떠나며 공포도 두고 가. 하지만 여자들은 공포를 간이나 췌장처럼 몸에 지니고 다녀. 떨구고 갈 수 없어. 어디로 가겠어? 우린 사무실을 떠나면 그만이지만 여자들에게 있어 사무실 밖은 사무실 밖 나름의 수천 가지 평대가 피어나는 또 다른 사무실인걸. 여자들의 두려움에는 역사가 있어. 켜켜이 쌓인, 뭐랄까, 지층적 두려움이라고나 할까? 우리의 얇고 호들갑스러운 두려움과는 완전 다르다구."
"저기."
안파 여자가 불렀으나, 남자는 흥분에 젖어 듣지 못했다.
"야!"
그제야 남자가 돌아봤다. 엄마의 칭찬을 바라는 순진무구한 아이의 미소를 지으며.
"너 그만 말해."
"응?"
"네 말 다 맞아. 근데 맞는 말도 하지 마."
남자가 당황해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얼굴에서 삐친 기운을 완전히 지우진 못했다.
"그러게 왜 네가 우리 선언문을 쓰냐. 그리고 부탁인데." 평파 여자도 남자를 구박했다. "시도 때도 없이 네 맘대로 나를 여자 박스에 넣지 말아 줄래? 내가 들어가고 싶을 때 알아서 들어갈 테니까. 오케이?" 이제 남자는 완전히 기분을 잡쳤다. 그러자 속에서 '평대스러움'이 조금 스멀댔다.
"나는 작은 집은 싫어." 평파 여자가 문 밖을 가리키며 말했다. 여자의 손을 따라, 그녀가 그리는 가상의 선을 따라 사무실이 커졌다. "손톱 조반월만 한 집이라도 문 앞에 모든 이를 환영합니다 팻말을 걸면 그 집은 그 어느 집보다 큰 집이 돼. 모두를 들일 수 있는 가능성이 무한의 집이 되게 해. 우리를 끝없는 집에 살게 해. 그러니 이 싸움은, 무한의 집을 지켜 얻는 것과 잃는 것 사이의 싸움일 테지. 얻는 것은 보잘것없어. 그 어떤 일에도 환대를 포기하지 않은 우리 자신에 대한 자부심, 그리고 극히 드물게 일어나는 새로운 사람이 선사하는 세계관의 확장 같은 것이겠지. 그리고 뭘 잃을까. 잃음의 끝은 뭘까. 목숨일 거야. 우리가 살짝 맛보기로 몸소 경험한 바와 같이."
"그래도 나는 작은 집은 싫어. 누구든 날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지층적 두려움'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안파에 집어넣으려 한다면, 그럼으로써 집뿐 아니라 여자라는 상자도 작게 만들려 한다면 내가 또 그 꼴은 못 봐요."
"가자."
안파 여자가 담뱃갑을 챙기며 일어났다. 두 여자는 싸우느라 흡연 욕구를 너무 오래 참았다. 두 여자가 베란다로 나가 담배를 피웠다. 난간 아래를 보초병처럼 살피며 두 여자는 사이좋게 웃었다.
"누구였더라? 이름 까먹었다. 요즘 내가 이래요." 안파 여자가 말했다.
"힌트나 내놔."
"외국인이고 콧수염 길렀고 특이한 나라 교수인데……."
베란다 안쪽 사람들도 말소리를 죽인 채 스무고개에 합류했다. 수진도 교수의 얼굴은 떠올랐지만 이름이 기억나지 않아 바늘에 안 들어가는 실을 꿰는 양 애가 탔다.
안파 여자가 이어 말했다. "어쨌든 그 외국인 교수는 지하철에서 칼 든 남자를 만난 적이 있어. 허리춤에 긴 칼을 찬 아랍계 남자가 타자마자 칼을 뽑았대. 그러곤 승객 한 사람, 한 사람의 얼굴을 유심히 들여다봤어. 그러다 무슨 생각에선지 다시 칼을 넣고 종교 음악을 듣다 끌려 나갔다는데."
사람들은 벌써 노르웨이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교수는 한 칼럼에서 그 공포의 순간을 아랍계 이민자들의 삶과 비교해. 그러곤 결론을 내리지. 만일 그날 자신의 모가지가 날아갔어도 항의할 수 없었을 거라고. 왜냐하면 날아간 머리통은 백인 중산층 고학력자로서 그동안 자신이 누린 삶과 지은 죄에 대한 대가니까. 참수로 죄를 갈음한단 거지. 나아가 참수가 개인에게는 비극일망정 그로써 집단적 셈은 맞아떨어진단 거고."
수진은 가늘게 들어오다 퍼지는 담배 연기를 좇으며 잠자코 두 여자의 이야기를 들었다.
"엉뚱하게도 말이야." 안파 여자가 골목을 주의 깊게 살피며 말했다. "가끔 지하철에 탈 때 그 교수를 생각해. 교수의 자리에 나를 놓지. 그리고 과연 내 모가지가 베어질 때 나에게도 그처럼 고상한 생각이 주어질까? 고개를 젓게 돼. 아아, 나는 죽는구나. 비참하고 끔찍하게 가는구나. 그래도 암말 말자. 한 짓이 있고 이제 당할 차례이니……. 그럴 수 있을까? 그렇게 호젓하고 대차게 갈 수 있을까? 그러다 지하철을 둘러보면 알게 돼. 내 죽음은 좀스럽겠다. 테러의 비극적 희생자가 되는 게 아니라 잡범에게 잡스러운 죽음이나 당하겠구나. 갑자기 주제파악이 돼."
누군가 안에서 외쳤다. “잡스런 죽음? 누가 그런 나쁜 말을 해?”
“죽음의 잡스런 포장.” 안파 여자가 말을 바로잡고 계속해서 말했다. “적어도 교수가 맞닥뜨린 잠재적 테러리스트, 그래, 그는 그렇게 말하지, 는 위대한 성전을 치르는 사람으로서 초월적인 진지함을 보였어. 그것이 죽을 때 위안이 되지는 않겠지만. 그리고 ‘나의 살인자’는 미래에 폴리스라인에 서서 테러범의 확신과 광기조차 갖추지 못한 채, 그것에도 미달한 채, 번듯한 의식도 기도도 없이, 그런 웰-메이드 쇼도 없이, 어디서 주워들은 단어 몇 개 웅얼대다 슬리퍼 질질 끌며 끌려가겠지. 그 슬리퍼가 나를 괴롭혀. 길고 더러운 발톱이 삐져나온 싸구려 슬리퍼. 그 조야하고 상스런 슬리퍼가 내 죽음까지 초라하게 만들어. 너무 한심해서 진지한 애도조차 왠지 계면쩍어지는 거야. 그래서.”
“여기, 티슈.”
평파 여자가 티슈를 건네받아 안파 여자에게 건넸다. 안파 여자는 껑충 뛰다 멀리 날아가고 있었다.
“그건 수의였어. 수의였다고 생각해. 죽음이 하나의 이미지로 남는다면 그게 더러운 발톱과 슬리퍼여선 안 되는 거잖아. 그래서 그건 수의였어. 형광 실로 수놓은 수의.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고귀하고 거대하게 물결치는 수의를 입혀 보냈어, 하늘로, 우리가, 포스트잇을 붙여. 그런 건데. 여자라는 게 그런 건데. 어쩌다 너는 평등 따위.”
“그냥.”
친구의 이야기를 묵묵히 듣던 평파 여자가 가볍게 말했다. “내 곤조지, 곤조. 감정 문제!” 그러나 그녀는 속으로 말하고 있었다. 울지 마. 친구야, 울지 마. 그렇지만 그건 너의 죽음은 아니야. 너의 살인자는 아니야. 그건 약간은…… 도둑질이야. 하지만 그녀는 말할 수 없었다. 자신의 냉정함에, 차갑게 거리를 두는 도덕심에 겁먹었기 때문이었다. 대신 그녀는 명랑하게 안을 향해 소리쳤다.
"우리 이거 하난 분명히 하자. 우리 중에서 수진이 제일 용감해. 언제나 수진이 평대 옆에 앉았어."



5



바스락, 바스락, 휙.
바스락, 바스락, 휙.
검은 비닐봉지. 털실. 허공을 찌르는 팔꿈치.
"아까비!"
얼굴들이 탄성을 내뱉는다.
"거의 찔렀는데!"
그들은 펜싱 게임을 관람 중이다. 다시, 바스락, 바스락. 비닐을 훑으며 올라가는 털실. 휙! 토끼춤 추듯 확 벌어지는 팔.
실패다. 이번에도 뜨개질 여자의 팔꿈치는 남자를 찌르지 못했다.
푹 찌름 좋으련만. 그럼 남자도 푹 찌를 텐데. 그럼 우린 갈 텐데 3-2. 이제 다시 남자는 고개를 숙이고 ― 위험 6점 ― 수진과 얼굴들은 여전히 3-1이고 정차마다 노원(no one)이고 수진은 생각하는 창문 중이다.
"많이 반성했어?"
'응.'
"생각하는 창문 해제."
수진이 목을 푼다. 터널 광고를 좇느라 뻑뻑해진 눈알을 진짜로 굴린다.
바닥에 아기 얼굴의 핏자국이 남아 있다.
"불쌍해?"
얼굴I이 묻는다. "그리워?"
'아니.'
얼굴들이 남자1 옆에 앉은 (용감한) 뜨개질 여자를 애틋하게 바라본다.
"그래도 안 내리고 계속 있어 주니 얼마나 고맙니." 얼굴I이 공중 키스를 날린다.
위험도 0.5점에 빛나는 뜨개질 여자는 미끼 여자다. 미끼 여자는 남자가 칼을 빼 들면 가장 먼저 찔리고 산을 뿌리면 가장 먼저 탄다. 뜨개질 여자가 가면 수진이 미끼 여자다. 사람들이 시간을 벌려고 내던진 살코기.
바스락, 바스락, 획! 바스락, 바스락, 획!
뜨개질 여자의 정신 사나움에 수진은 감사하다. 노래가 절로 난다. 부산한 미끼는 보배. 개뛰문을 기억하자. 개는! 뛰면! 문다. 바스락, 바스락, 휙! 바스락, 바스락, 라-디-다. 바스락, 바스락, 라-디-다 라-디-다 라라라. 이제 두 정거장 남았다. 수진은 햇반 그릇을 챙겼나 확인하려다 관둔다. 끝까지 집중하자! 라-디-다 라-디-다 라라라.
수진이 고개를 든다.
바스락이 없어졌다.
"에구구. 내 정신 봐."
어느새 여자가 수진 뒤에 와 있다.
"지났나?"
고개를 빼든 여자가 벽에 붙은 노선도를 보며 역 이름을 중얼댄다.
멀리서 들려오는, 잽잽원투.
바스락.
"아직 아니네. 살았다!"
뜨개질 여자가 몸을 돌린다. 멈춘다. 그녀는 어디에 앉을 것인가. 뜨개질 여자가 걷는다. 다시 돌아간다. 미끼의 자리로.
누가 내 머리에 꿀을 부었지? 달콤한 꿀 같은 안도감이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흘러내린다. 뎅뎅뎅. 열차가 들어간다. 이제 한 정거장. 뜨개질 여자가 걷다 말고 뒤돈다. 수진을 흘낏 본다. 장난기 어린 표정. 정차. 입김, 열림, 노원(no one). ‘울지 마.’ 뜨개질 여자가 갑자기 내린다. 닫힘. 출발. 뜨개질 여자가 창밖에서 손을 흔든다. 3-1. 남자 그리고 수진.
얼굴I이 비명을 지른다.
뜨개질 여자가 노선-연막을 쳤다. 노선도를 보는 체하며 에구구 내 정신 좀 봐 하며 티 나게, 티 나지 않게 남자를 물 먹였다. 남자는 두 번 당했다. 그는 삼세번주의자일까? 아니면, 내가 두 번은 참아도 세 번은 못 참지주의자일까?
"어떡해! 어떡해!"
공포에 질린 얼굴I이 눈물을 터뜨린다.
수진은 의외로 잠잠하다. 넋을 잃고 마음의 신기한 행로를 구경 중이다. 수영 선수가 반환점을 돌아 나오듯 끝까지 간 공포가 분노가 되어 오고 있다. 미친 짜증이 세찬 물살을 가르며 오고 있다.
수진이 가방을 붙잡는다. 만져지는 유리병. 내 소중한 산.
"안 돼."
얼굴I이 훌쩍인다.
"죽어."
그때, 얼굴II가 명령한다.
"죽어!"
거대한 손이 되어 수진을 후려친다.
"죽으라고!"
수진이 덜덜 떨며 주문을 외기 시작한다.
'나는 나무다.'
자리에 앉는다.
'나는 아주 아주 깊이 뿌리 내린 나무다.'
눈을 감는다. 고개를 떨군다. 팔을 늘어뜨린다. 몸에 힘을 뺀다. 뺀다. 뺀다. 더 뺀다. 나무뿌리가 땅속을 파고들듯 서서히 몸이 아래로 깊이 박힌다. 아래로 더 아래로……. 발목에 시멘트를 매단 시체가 해저로 빨려들듯 아래로 더 아래로…….
얼굴들도 밤의 호박꽃처럼 쪼그라든다. 바람 빠진 풍선처럼 축 늘어진다. 수진과 얼굴들은 납작하고 납작해져 거의 사라진다. 마지막으로 조용한 기도소리가 차내를 맴돈다. 하늘의 누군가시여, 부디 저희의 의사擬死를 가엽게 여기소서…….



눈 감기 게임



"다음날 프랑스 사람들은 모처럼 갠 날을 즐기러 공원에 나왔어. 살던 대로 살았어. 테러에 맞서기 위해."
교수의 칼럼은 15' 샤를리 에브도 사건의 맥락에서 쓰였다. 평파의 설득이 이어졌다. "나는 테러 다음날 공원에 나온 사람들을 생각해. 그들의 저항은 그저 몸을 펴는 것이었어. 테러는 우리를 콩벌레로 만들어. 몸을 똘똘 말고 웅크리게 해. 살던 대로 못 살고 작게 살게 해. 둘 중 하날 고르라며 종주먹을 들이대. 열린 세상에서 닫혀 살거나, 닫힌 세상에서 열려 살거나. 나는 감히 말해 보는 거야. 열린 세상에서 열려 살자고. 아무리 무서워도. 용감하게. 용감한 수진처럼."
그러더니 어느 날 평파가 선생님을 모셔왔다. 자기방어술 선생님은 오자마자 말했다. 이론 수업부터 좀 할게요. 공포에는 세 가지 반응이 있어요. 다들 두 개로 아는데 세 개예요. 싸움. 도망. 얼음. 공포의 3F. Fight-Flight-Freeze. 밑에서부터 거슬러 올라가는 거예요. 언 몸을 깨우고, 뛰고, 싸우는 거죠. 다시 파이터가 됩시다. 잽잽원투. 앞에 있다 생각하고. 잽잽원투. 열린 문을 향해 울며 주먹을 뻗는 사람들. 그들은 그때나 지금이나 자기 마음을 모른다.
신념이 이긴 자리에 모든 이를 환영합니다는 남았지만 모든 이를 환영할 이들은 사라졌다. 안파는 안 왔고 평파는 온다고 하고 안 왔다. 갑자기 무슨 일이 생긴 사람들의 문자가 사무실에 홀로 앉은 수진에게 쇄도했다. 수진은 환대를 독박 썼다. 16' 평대 때 그러했듯이.


새 사람 옆에 앉는 사람은 새 사람의 어미 새가 된다. 수진은 평대 옆에 앉았고, 평대의 어미 새가 됐다.
어미 새는 늘 온유하며 긴장한다. 어미 새는 아기 새의 작은 신호도 놓치지 않는다. 어미 새는 아는 얘기에 웃지 않는다. 사람들과 함께 웃는 대신 함께 웃지 못하는 아기 새의 기분을 헤아린다. 아기 새는 민망함에 몇 번 따라 웃다가 토라져 버린다. 왜 웃느냐 하면요, 전에 이런 일이 있었거든요……. 어미 새는 친밀한 사람끼리 축적한 시간을 아기 새에게 통역한다. 둘만의 대화로 아기 새를 소외감으로부터 구한다. 그 뒤로 주욱 로렌츠의 새끼 오리 같은 평대를 돌보는 것이다.
수진이 특별해 어미 새가 된 게 아니란 걸 아는 것이 중요하다. 누구든 어미 새가 될 수 있다. 방법은 간단하다.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내쉰다. 손을 가볍게 털고 입을 푼다. 들숨에 자기 자신을 자신으로부터 떼내고, 날숨에 자신을 상대에 포갠다. 이제 그의 눈으로 세상을 볼 수 있다. 그의 마음을 느낄 수 있다. 이제 그가 하고 싶을 말을 상상하고 바로 그 말을 할 수 있도록 정교히 고안된 질문을 던진다. 아기 새는 신나서 쫑알댄다. 어미 새는 대시보드의 개처럼 부지런히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니까 이 끔찍이 쉬운 일을 수진이 전담하게 된 데에는 수진의 의지 말고 다른 이유는 없었다. 아무도 강요하지 않았고 그랬기에 수진은 할 수밖에 없었다. 면제가 수진에게 그 일을 하게 한 것이다.
그것은 내규, 정확히는 내규 3조 2항과 관련된다. 일하지 않은 자, 먹기만 하라! 직업이 없으면 (있어도 중위소득 50% 이하면) 회비와 뒤풀이비가 면제됐다. 모임 사람들이 자랑해 마지않는 그 규칙 덕에 회비를 못 낼 형편의 사람도 모임에 올 수 있었고 ― 평파의 말이다 ― 별별 평대가 다 꼬였다 ― 안파의 말이다. 수진도 그중 하나였다. 종종 회비를 낼 수 있었지만 원칙상 얻어먹어야 했다. 엠티가 끝나고 챙겨 가야만 했던 햇반, 쥐포. 대신 이거라도 하게 해주세요! 제발요! 개수대 앞에서 수진은 얼마나 실랑이했던가. 수진은 설거지라도 하고 싶었지만 내규 4조 1항에 의하면 설거지는 월초 개시되는 설거지 당번 표에 따라야 한다.
수진은 다른 3조 2항 수혜자들과 함께 참크래커를 트러플 오일에 찍어 먹으며 생각했다. 세상에 공짜는 없어. 나는 처지 노동 중이야. 존재 노동 중이야. 내 덕에 저 사람들, 단차를 느낄 수 있어. 베풀 수 있어. 언제나 베푸는 쪽 기분이 나은 법이지. 베풂 당하는 쪽보다. 나는 절대 고마워하지 않을 거야……. 그러나 감사는 감정이고, 감정은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자꾸 고마워져 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고마움은, 염치는 때로 사람에게 가장 헐하고 험한 일을 시킨다.


수진이 문을 향해 의자를 돌리고 앉는다. 복도 창문이 보인다. 계단이 보인다. 아무도 없음이 보인다. 아무도 없음이 아무도 없음이던 시절은 끝났다. 오늘날 수진에게 아무도 없음은 갑자기 튀어나옴의 전조다. 수진은 문을 열어 둔다. 모임 시작 5분 전. 갑자기, 급히, 집에, 회사에, 고향에 무슨 일이 생긴 사람들의 문자가 날아든다.
수진이 일어난다. 훈련 시간이다. 적에게 힘껏 주먹을 날리자! 잽잽원투. 그런데요, 여러분. 그러심 안 돼요. 자기방어술 선생님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돈다. 정말 달려드심 안 돼요. 여러분이 정말 파이터는 아니세요. 아니요. 파이터 맞는데 정말 파이터는 아닌 거예요. 이게요. 원래 말이 안 돼요. 엉망진창이에요. 어쨌든, 다시! 잽잽원투! 연속 펀치! 강펀치!
주먹을 날리며 수진은 훈련송을 부른다. '나 진짜 성산대교 건넜거든? 진짠데 갑자기 어린이집에서…….' 훈련송은 윤형주의 <미운 사람>을 개사한 것이다. 한 박자 쉬고, 두 박자 쉬고, 세 박자마저 쉬고 하나둘 셋 넷. 돈빵을 못 하면 몸빵을 하세요. 아 미운 사람. 잽!잽! 몸빵을 못 하면 맘빵을 하세요. 아 미운 사람. 원!투! 미운 사람. 아 미운 사람. 얄미운 사람들.
수진은 안평대전을 뒤집어 놓을 수도 있었다. 그녀는 이럴 수 있었다. 헤이, 거기, 당신들. 나 왜 설거지 못 하게 해? 설거지 순서는 정하면서 어미 새 순서는 왜 안 정해? 돈빵이 몸빵보다, 몸빵이 마음빵보다 낫다는 걸 왜 몰라? 왜 옆에 안 앉았어? 웃지 마. 그치? 맞지? 사실 무서웠지? 눈썹 내리지 마. 안쓰러워하지 마. 신나지 마…….
그랬더라면 사람들은 스타카토로 말했을 것이다.
(스타카토) 환대 일임의 조건 근간에 계급 있음을 통찰 못 한 자신을 혁신코자
(또 다른 스타카토) 교차성을 삶-화하지 못함을 통렬히 반성하며
(합창) 저희에게 깨달음을 주신 수진에게 특별한 우정과 감사를 전합니다아…….
언젠가, 누군가, 아마도 경찰이 수진에게 왜 사무실에 혼자 있었느냐고 물으면 수진은 말할 생각이었다. ‘누군가는 평등의 대가를 치러야 하니까요.’ 그 말을 하는 수진은 비참하지 않다. 헐겁게 비아냥대는 것도 아니다. 그 순간 그녀는 자부심으로 빛난다.
(어쨌든 수진도 한때는 평파였던 것이다. 또한 어느 시기, 어느 무리에서 그녀는 평대다.)
수진이 다시 의자에 앉는다. 복도에서 먼지 섞인 바람이 불어온다. 이제 정말 용기를 내야 할 타이밍이다. 타이머를 맞추고 수진은 눈을 감을 것이다. 가만히 의자에 앉아 눈을 감고 1분을 버틸 것이다. 어둠 저 끝에서 돌진해 오는 공포를, 기억을, 감은 눈으로 볼 것이다. 눈 안 감기 게임을 거꾸로 하는 사람처럼 눈 안 뜰 것이다.
눈꺼풀은 그러나 왜, 눈을 덮자마자 튕기듯 올라가는 걸까. 눈 감는 인형을 자꾸 일으켜 세우는 것처럼 눈은 왜 발작하듯 자꾸 뜨이는 걸까. 수진은 묶인 듯 의자에 앉아 파닥거리는 속눈썹이 만드는 검은 잔영을 보며 열린 문을 향해 눈을 깜빡였다.



6


"살았다!"
'살았다!'
수진과 얼굴들이 환희에 차 지하철 계단을 뛰어오른다. 수진이 껑충 뛰자 얼굴들이 토끼 귀처럼 펄럭인다. 불그죽죽한 절단면이 허공에서 손뼉 치듯 짝, 소릴 내며 붙었다 떨어진다. 온몸에 팅팅 튕기는 얼굴들!
구름이 걷히고 햇빛이 비쳐 셋에게 환한 테두리가 생긴다. 셋은 생의 기쁨을 만끽한다. 얼굴I이 훌쩍이며 말한다. "누구더라? 오늘은 어제 죽어간 사람들이 그토록 살고 싶어 했던 내일이라고." 아무도 오버, 라고 하지 않는다. 핀잔하지 않는다. 수진은 잠시 육교에 서서 폐건물 ― 속 드럼통 속 폐목재에 박힌 뾰족한 못 ― 을 보며 낡은 명언이 지닌 무게를 느낀다.
수진과 얼굴들이 육교에서 뛰어 내려와 사무실을 향해 달린다. 걷는다. 느리게 걷는다. 점점 느려진다. 셋 다 죽도록 피곤하다. 얼굴들이 포대 자루처럼 질질 끌려온다. 길바닥에 물똥이 길게 이어진다. 사무실은 언제나 아득히 멀다. 수진은 믿을 수 없다. 오늘 집을 나와 한 일이 20분 동안 지하철을 탄 게 다라는 걸 도저히 믿을 수 없다.



*참고 : “극단주의”에 대한 감상, 박노자

















이미상

작가소개 / 이미상

2018년 웹진 《비유》에 「하긴」을 발표하며 등단. 제10회 젊은작가상 수상.


《문장웹진 2020년 0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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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데오

히데오 서장원 히데오에겐 몇 가지 비밀이 있었는데, 그중 하나는 그의 친부가 일본인이며 그가 어린 시절을 일본 교토에서 보냈다는 것이다. 어느 저녁나절, 한적한 거리를 걷던 중에 히데오는 이 사실을 내게 말해 줬다. 이후 히데오는 어린 시절에 대해 조금씩 더 들려주었고, 나중에 나는 히데오의 생애 초반에 일어난 일들을 하나의 이야기로 꿸 수 있게 됐다. 히데오가 태어난 곳은 교토 외곽으로, 한국 사람들이 떠올리는 여행지 교토와는 거리가 먼 평범한 주택가였다. 히데오는 그곳을 자세하게 기억하지는 못했다. 습한 여름 날씨나 우듬지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 거대한 나무들에 대해 말하면서도 그것이 정말 자기 기억인지 교토에 대해 보고 들은 뒤 상상해 낸 이미지인지 구분하기 어렵다고 덧붙이곤 했다. 교토에서 있었던 일 중 히데오가 확실하게 기억하는 건 모두 나쁜 경험이었다. 이를테면 초등학생 시절 책상 가득 자이니치나 조센진, 총 같은 단어가 적혀 있던 풍경이나 동급생 남자애들이 그의 가방을 걷어차며 드리블 시합을 했던 일, 그를 조롱하려고 반 아이들이 케이팝 노래를 개사해 불렀던 일, 그런 사건들. 한번은 같은 반 아이들에게 얻어맞아 코뼈가 부러진 적도 있었다. 그날 저녁에 히데오의 부모는 아들을 위해 나고야로 이주하는 일을 의논했다. 히데오의 아버지는 아들을 불러 앉히고 나고야에서는 어머니가 한국 사람이란 사실을 숨겨야 한다고 경고했다. 히데오는 그 말에 깜짝 놀라서 식탁 앞에 앉아 있는 어머니를 바라봤다. 어머니가 아버지의 말에 동의했는지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히데오가 아는 한, 히데오의 어머니는 자신이 한국인임을 숨기려 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 순간 어머니는 눈을 내리깔고 남편도 아들도 바라보지 않았다. 아버지가 다시 말했다. “어쨌든 우리는 여기서 계속 살 거니까, 그렇게 하기로 하자.” 그날 밤, 히데오는 코의 통증과 식도로 넘어오는 피, 어머니의 고요한 얼굴과 나고야에서 보낼 새로운 나날의 환영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다만 히데오의 부모는 나고야행을 두고 갈팡질팡했고, 히데오로서는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과정을 거쳐 이혼을 결정했다. 이혼 후 히데오의 어머니는 아들을 데리고 경기도의 친정으로 돌아갔다. 이후 히데오는 일본인 아버지와 일본에서의 삶을 철저히 숨겼다. 나에게 고백하기 전까지 누구에게도 자신의 첫 번째 이름 히데오를 말해 주지 않았다. 내가 히데오를 처음 본 건 연극원 강의실에서였다. 아직 벚꽃도 피지 않은 3월, 나와 히데오를 포함해 여덟 명의 학생이 강의실에 책상을 둥글게 붙여 앉았다. 그해 연극원에서는 입학이 예정된 학생들을 모아 15분 내외의 단막극, 일명 “짤막극”을 만드는 프로젝트를 신설했다. 입학 전에 그룹별로 모여 공연을 준비하고, 3월 개강과 동시에 연극원 소극장에서 공연을 올리는, 이색적인 신입생 환영회라 할 수 있었다. 학보사는 이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신입생 그룹 중 하나를 인터뷰하기로 결정했는데, 그해 들어 나에게 처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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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밤과 가을이

그리고 밤과 가을이 김연수 1 지난여름, 정기에게는 세 가지 고민이 있었다. 하나는 눈에 문제가 생겼다는 것. 길을 걸어갈 때면 날벌레들이 달려드는 것 같아 혼자 손사래를 친 적이 여러 번이었다. 기사를 쓰려고 책상 앞에 앉으면 머리 뒤쪽에서 번개 같은 게 번쩍이기도 했다. 노안이 찾아온 건 벌써 몇 년 전의 일이었다. 그때 안과에 가서 진료를 받고 안경도 새로 맞췄다. 나이가 들면 서서히 시력이 나빠지리라고만 생각했지, 거기에 더해 전에 없던 것들이 보이는 증상까지 생길 줄은 미처 몰랐다. 그런 처지가 되고 보니 책 읽는 일이 힘들어졌다. 평생의 즐거움이었던 독서가 성가신 일이 되면서 생활은 성기어지고 마음은 허술해졌다. 더 오래전, 나이가 들면 활자 같은 건 멀리하고 자연을 벗 삼아 소일하며 세속적 가치관에 물든 마음을 고치리라 생각하던 때가 있었다. 그때는 은근히 노년을 기대하기도 했지만, 그런 시절은 너무나 빨리 지나갔다. 두 번째는 포항에서 에너지공학과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딸 민지와의 관계가 점점 멀어진다는 점이었다. 그건 서울과 포항이라는 지리적 거리감 때문만은 아니었다. 작년에 집을 새로 구하면서 민지는 아빠인 정기에게 도와달라고 부탁을 해 왔다. 그 과정에서 이사의 이유가 언제부터인가 짝꿍처럼 붙어 다니던 여자 선배 희선과 같이 살기 위해서라는 사실을 그는 알게 됐다. 그는 민지와 희선이 단순한 선후배 사이가 아닐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몇 번 딸에게 희선에 대해 물었지만, 민지의 반응은 모호했다. 그러다가 정기는 그 일에 대해 더 묻지 않게 됐다. 한 번은 민지가 “나는 아빠가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 아닐 수도 있어요”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앞뒤 대화의 맥락으로는 그 일에 대한 답변이 아니었음에도 정기는 둘 사이의 관계에 대한 질문의 대답으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마지막 고민은, 자신이 담당한 부고란에 누구의 죽음을 다룰 것이냐는 점이었다. 최종 후보는 미국의 SF 소설가와 전 여당 대표, 둘 중 하나였다. 아무도 읽지 않는 신문 부고란에 누구를 쓰든 무슨 상관이겠느냐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정기에게는 앞의 두 고민만큼이나 심각한 고민이었다. 앞의 두 고민은 과거의 일에서 비롯된 결과를 수습하는 것이었지만, 세 번째 고민은 미래를 결정하는 것이라고 정기는 생각했다. 과연 소설가냐, 정치인이냐. 정기의 고민은 여름만큼이나 깊어졌다. 2 노트북 화면 너머로 신문사 후배인 은영이 지나가고 있었다. “휴가는 즐거웠어?” 정기가 알은체를 했다. “줄곧 비만 내렸잖아요. 태풍이 온다는데 어떻게 해요?” 잔뜩 낯을 찌푸리며 은영이 말했다. “태풍이 온다는 예보가 있었으면 가지 말았어야지.” “그런 거 따지고 들면 아무 데도 못 가죠. 태풍 지나갈 때 제주 안 있어 봤죠? 그게 진짜 여름이더라구요. 바람이 몰아치는데, 어휴, 엄청났어요. 그러더니만 휴가 마지막 날이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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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부는 날

바람 부는 날 정기현 단지는 어둠에 잠겨 있었다. 펜스와 인접한 아파트 건물들은 가로등 불빛을 받아 그 형태를 짐작할 수 있었으나, 단지 안쪽으로 시선을 옮기면 어둠의 수심이 깊어져 모든 것이 감추어졌다. 아침이고 저녁이고 긴긴 태양 볕 아래 그 흉물스러움을 남김없이 드러내던 여름과는 달리, 겨울의 단지는 어딘가 의뭉스러워 보였다. 이야기를 가득 품은 고성처럼 보이기도 하였다. 내가 살고 있는 주택 앞, 단군 이래 최대 규모의 재건축 단지라는 별칭이 붙은 아파트 단지는 조합원과 건설사 간 충돌로 공사가 중단되어 짓다 만 아파트 건물들이 2년 동안 그대로였다. 1만 5천 가구를 수용할 수 있다며 대대적으로 착공에 들어갔던 대규모 단지는 2차선 통행로를 중심으로 양분되어 있었는데, 문득 그 길을 걷고 싶다는 생각이 든 것은 이번 겨울부터였다. 출근 버스를 타기 위해 정류장까지 가려면 펜스가 세워지기 전보다 30분씩은 더 둘러 걸어야 했다. 고개를 푹 숙이고, 아직 잠에서 온전히 깨어나지 못한 상태로 정류장까지 걸을 때면 아파트 중앙 통행로에서 불어오는 거센 바람 소리가 들려왔다. 솔바람, 산들바람 아니고 토네이도에 가까운 세기였다. 물론 토네이도를 직접 겪어 본 적은 없지만···. 사람 하나는 거뜬히 날려 버릴 듯 기세 좋은 바람이었다. 단지 바깥은 바람 한 점 없이 잠잠했으므로, 이는 분명 바람길을 잘못 낸 시공 탓에 불어 대는 건물풍일 터였다. 거센 바람에 펜스가 흔들리며 콰챵- 하는 소리를 낼 때면 살을 에는 새벽녘 추위도 어쩐지 더욱 견디기 어려워져 굳게 잠긴 펜스를 원망하게 되었다. 자물쇠를 열고 단지 가운데 통행로로 다닐 수 있다면 그 끝의 버스 정류장에 금세 도달할 텐데. 아침마다 30분씩은 더 자고 나올 수도 있을 텐데. 내게는 바람쯤이야 잠을 조금이라도 더 잘 수 있다면 얼마든지 견딜 수 있는 문제였다. 한파 특보 경보 문자가 알람보다도 일찍 울려 잠을 깨웠던 날, 나는 빌라 현관을 벗어나 오른쪽 인도로 걷는 대신 길 건너 펜스 쪽으로 향했다. 펜스 출입구에는 주먹만 한 자물쇠가 굳게 걸려 있었다. 화풀이라도 하듯 자물쇠를 세게 두 번 당겨 보았는데 그것만으로도 자물쇠가 훌렁 풀려 버렸다. 펜스 안쪽으로 손을 쏙 넣어 자물쇠가 걸려 있던 걸쇠를 풀고 출입문을 열자 눈앞에 펼쳐진, 소리로만 접하던 바람의 길. 이용자가 나 혼자뿐이라 길은 실제 너비보다도 광활해 보였다. 건축 자재들, 내부 설비들이 군데군데 널브러져 있었고 고목처럼 주차되어 있는 승합차도 몇 보였다. 길 가장자리에도 단지로의 진입을 막는 펜스가 설치되어 있어 잠시 길과 나뿐인 세계에 진입한 것만 같았다. 통행로는 야트막한 고갯길이었다. 바람은 듣던 대로 거세었다. 나는 두 손으로 외투를 꼭 여민 채 거센 바람에 맞서 걸었다. 두 발이 동시에 떨어지는 순간 바람에 휘말려 공중으로 붕 떠오를 것 같아 한 발이 떨어지면 다른 한 발은 땅에 꼭 붙어 있도록 의식하며 걸어야 했다. 고갯길의 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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