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보영-일기
- 작성일 2020-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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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 비평]
이에 《문장웹진》은 웹진이라는 매체의 특성과 공적 지면이라는 점을 활용해 '본격비평'의 장을 열어 보려 한다. 분량의 제한 없이 정액의 원고료로 자유롭게 투고를 받아 아래와 같이 게재한다.
문보영-일기
최가은
1. 새벽 시, 새벽 일기
시간은 새벽 두 시. 강의실 내부는 평소보다 더욱 적막하다. “일기병 환자분들, 반갑습니다.” 중앙에 앉아 있던 한 여인이 유쾌한 인사와 함께 침묵을 깨면, 사람들은 둘러앉아 각자의 일기를 쓰기 시작한다. 모임을 주최한 여자 역시 자신의 일기를 써나가는데, 제목은 「버려진 물건」 이며 우연히 길에서 인형을 발견했던 어느 하루에 관한 이야기이다.1)
도서관에 책을 반납하고 돌아오던 길이었다. 전봇대 밑에 놓여 있던 “하얗고 거대한 대가리”와 우연히 눈이 마주친 ‘나’는 그 눈빛을 무시하지 못해 인형을 집으로 가져온다. 웬 대가리 하나와 함께 들어서는 ‘나’ 때문에 놀란 가족들은 저마다 한 마디씩 건네는데, 그것은 주로 “버려진 인형은 주워 오면” 안 된다는 무시무시한 경고 혹은 짜증에 가깝다.
그리고 인형에 관한 미신쯤은 가볍게 넘길 줄 알아야 한다며 가족들을 안심시켰던 ‘나’에게 그날 밤, 믿고 싶지 않은 일이 실제로 일어나게 된다. 떨리는 ‘나’의 손에 가까스로 들려 있는 핸드폰. 형형색색 펼쳐진 인스타그램 피드 너머로 보이는 그것은……. 얼마 전 헤어진 그놈의 지나치게 아름답고도 무탈한 일상이었던 것이다. 무언가 상서롭지 못한 물체가 ‘나’의 손에 들려 있는 것만은 확실해 보인다. 인형을 다시 버리는 만행을 저질러야 하는 걸까. ‘나’는 도무지 잠이 오지 않는다.
일기를 마무리 지은 여자는 옆에 놓인 ‘거대한 대가리’의 머리를 “네 번” 쓰다듬으며 묘한 웃음을 흘린다. 일기 왕에게 전달되기 위해 인형은 오늘 특별히 이곳 강의실로 옮겨진 것이다. 영문을 모르는 환자들은 자신들의 일기병 증상을 현란하게 선보인다. 여자 옆에 고고히 앉아 있는 저 ‘대가리’를 쟁취해 내겠다는 일념 하나로.
1) 문보영, 「버려진 물건」, 블로그 일기(2018.07.21.)
2. 비평 바깥의 언어, 문보영의 일기
시인 문보영이 독자와의 만남을 위해 설계한 프로그램, ‘새벽 시 새벽 일기’의 한 풍경이다. 각자의 일기장을 매개로 교감하는 시인과 독자 간의 이 기묘한 만남은 ‘문보영 월드’에 한해서라면 그다지 낯선 이야기가 아니다. 이들이 꾸린 수상한 공동체는 여전히 다양한 형태로 지속 중이기 때문이다.2) 문보영은 등단 이듬해인 2017년, 제36회 ‘김수영문학상’을 수상하며 첫 시집 『책기둥』(민음사, 2017)을 발표한다. 비교적 이른 시기의 시집 발간과 활동 초반부터 이어진 거침없는 행보, 그에 값하는 작품 생산력은 지난 몇 년간 한국 시단에 가장 자주 등장했던 시인 중 하나로 그를 기억하게 한다. 시단으로의 잦은 소환과 출현은 자연스레 그를 비평의 장 내부로 호명하는 동력이 되기도 했는데, 호기롭게 제 영역을 구축해 나가는 시인의 걸음에 더해졌던 해석은 대부분 “전혀 다른 종”(김언), 즉 ‘신선함’이라는 평가로 수렴된 바 있다.
그런데 대개의 문보영 독법이 발간된 두 권의 시집3)과 지면에 발표되는 신작 시편으로 그 대상을 한정하고 있는 것과 달리, 위의 풍경은 문보영을 향한 평단 밖의 관심이 ‘일기’를 중심으로 한 흐름을 분명하게 형성하고 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지난 새벽의 풍경이 문보영 독법에서 쉽게 소거되곤 하는 사정, 즉 이를 향한 비평장의 소홀한 관심이 다소 어색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시인에게 ‘일기’라는 매개가 단순한 이벤트성 소재 이상의 의미를 지니기 때문이다.
문보영의 세계를 ‘신선함’으로 의미화 하는 해석 틀에서 이탈하기 위한 방식이든, 아니면 그 내부에서 문보영만의 ‘오리지널리티’를 구축하기 위한 방식이든, 우리는 위의 풍경을 더욱 주시할 필요가 있다. 새벽 강의실의 장면은 ‘일기’를 매개로 한 특유의 읽기와 쓰기의 영역을 암시하며, 그 영역에서 구성되는 문보영의 ‘일기 주체’가 차지하는 특수한 위상 역시 시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보영의 일기에는 무엇보다 먼저, ‘독자’라는 불투명한 집단의 의미가 구체화되어 개입한다. 문학비평/장 내부에서 유통되는 개념으로서의 담론화된 ‘독자’와는 조금 다른 맥락에서, 문보영의 ‘일기’는 분명하게 가시화된 ‘독자 집단’을 생산의 토대로 하는 것이다. 이 집단의 가시적 개입은 ‘일기’라는 장르가 동시대 문학장 내부의 언어로 배치되지 않는다는 사실과 관련해 중요한 의미를 획득한다. 말하자면 그들은 문보영의 일기를 하나의 장르적 글쓰기로 생산하게 하는 최초의 기반이자, 이를 지속 가능하게 하는 기본 동력으로서, 동시대 문학장의 명료한 장르 경계4) 또한 방해한다.
문보영이라는 이름과 일기라는 장르, 그리고 독자 집단 사이에 형성된 이 긴밀한 관계가 대체로 문학비평의 장 바깥에서 포착되고 또 독해된다고 한다면, 현 시점 비평의 언어로 분류될 수 없는, 혹은 분류되지 않는 이러한 특징들이 한국 문학 비평 언어와 지식 체계 속 ‘문학 장르’의 경계 또한 암시할 수 있다는 것5)이다. 나아가 문보영의 쓰기는 ‘일기’라는 장르를 장르화하는 방식을 통해 이들 독자가 곧바로 쓰는 자의 자리로 이동하게 한다는 점에서 별개의 주목을 요하기도 한다. 문보영의 일기와 관련한 ‘독자-쓰기’의 문제는 ‘일기’라는 장르의 특성을 구체화하기 위해 검토되어야 할 또 하나의 분석 대상6)이라는 의미이다. 하지만 이러한 독자 ‘개념’을 작동시키는 주된 요인으로서 문보영의 ‘일기-쓰기’가 먼저 검토되어야 한다는 문제의식 하에, 그가 쓰는 ‘일기’가 정확히 어떤 지점에서 관습적인 ‘일상의 기록’과 구별되는가, 즉 문보영 일기의 문학적 가능성을 질문하는 것을 이 글의 주된 목표로 한다.
일기가 부정할 수 없는 그의 문학적 자산7)의 일부라는 사실과, 그럼에도 그의 일기를 시적 세계와는 분리된 지점에서 독해해야 할 필요성 등은 이 같은 맥락에서 요청된다. 이를 본격적으로 들여다보기 위해서, 문보영과 독자 집단이 문학적 글쓰기로서의 ‘일기’라는 장르를 향유하는 모습을 구체적으로 독해하려 한다. 문보영의 일기는 개인 블로그라는 한정된 내밀한 집단에서 공유되기도 하고, 공개적인 지면과 ‘산문집’이라는 작품의 형태로 공개되기도 한다. 하지만 본론에서 논할 문보영 일기의 ‘내밀함’과 ‘진실’의 복잡한 층위에 집중하기 위해 이 글은 그의 개인 블로그에 공개되었던 일기만을 분석 대상으로 삼는다.
2) ‘새벽 시, 새벽 일기’는 고양시립아람누리도서관에서 기획한 행사 〈독서야행 : 당신이 잠든 사이〉 중 한 프로그램이다. 문보영은 이외에도 아카데미 ‘읻다’와 함께한 강의를 비롯하여 다양한 일기 쓰기 강의를 연속으로 진행한 바 있다. 그는 자신의 시작(詩作) 강의에서 일기가 차지하는 지분에 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수업에서는 저를 포함해 수강생이 블로그 일기를 공유합니다. 참여는 개인의 자율적 선택에 맡깁니다. 여기에서 일기는 하루의 일과, 개인의 고백이라는 좁은 의미로 사용하지 않고, 짧은 산문, 장르에 구애되지 않는 글을 의미합니다.” 이는 강의 명에 ‘일기’가 등장하지 않는 수업에도 해당되는 내용인데, ‘시가 아닌 것과 시쓰기’라는 강의의 과제 역시 “매주 일기를 씁니다.”이다.
3) 문보영, 『책기둥』, 민음사, 2017; 문보영, 『배틀그라운드』, 현대문학, 2019.
4) 주요 문예지, 신인문학상을 비롯한 다수의 문학상에서 행해지는 장르 구분 등 동시대 문학 ‘공론장’이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장르에 일기가 포함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굳이 덧붙일 필요가 없을 것이다. 작품의 형태로 출간되는 해외 유명 작가들의 일기, 작고한 국내 작가들의 일기 선집 등은 해당 작가/작품 세계관의 연속적 맥락에서 발표되고, 또 소개된다. 이러한 사례는 동시대 문학 비평의 언어가 개입하는 ‘담론적’ 형태의 장르론, 혹은 작가론으로서의 ‘일기’로 분류하기 어렵다.
5) ‘수기’와 ‘수필’ 혹은 ‘자전적 글쓰기’라는 장르가 문학장의 폭발적인 관심을 얻었던 시기가 있다. 김미정의 지적처럼, 그것은 1980년대 부정기간행물의 활황(대안매체)과 함께 활발하게 제기되었던 ‘장르 해체론’의 영향이다. 하지만 당시 문학장에 개입했던 수기, 논픽션, 르포 등의 다양한 장르들은 향후 제도적, 미학적 지지를 지속적으로 받지 못하면서, 즉 비평의 언어 속에서 제대로 의미화 되지 못하면서 주류 담론의 바깥으로 점차 밀려난다. 그에 따르면, 한국 문학이 제도화되며 조밀한 시스템을 구축해 나간 과정과 장르의 고착화는 상동적인 관계에 있다. (김미정, 「현장-신체-정동, 다른 미적 체험의 가능성을 묻는다」, 『움직이는 별자리』, 갈무리, 2019, 314쪽.) 특히 이처럼 스스로를 고백하는 ‘수기’와 같은 형태가 대개 당시의 문학장 바깥에서 분출하던 ‘하위 주체-노동자, 여성’ 등의 언어였다는 점, 나아가 이들 하위 주체 내부에서도 성별을 비롯한 다양한 위계가 발화의 방식과 그 형태에 영향을 미쳤다는 지적 등을 차례로 고려한다면, (홍지혜, 〈1980년 여성 노동자 글쓰기가 놓인 자리-무크지 『우리들』, 『함성』, 『햇살』의 투고글을 중심으로〉, 《구보학보》 25, 구보학회, 2020.) ‘일기’를 향한 비평적 개입의 문제는 주류 문학장의 담론 배제/포섭의 작동원리와 관련해 접근될 필요가 있다.
6) 가령 출판과 편집의 매개 없이 작가와 일대일로 거래를 이루는 집단이라는 점에 주목해, 이들을 단순한 ‘소비자’나 ‘피드백’의 형태로 상상하는 것 역시 한계가 있다. 일기-독자 문제의 핵심을 놓치기 않기 위해서는 정확히 ‘일기’를 통해서만 구성/해체되는 특수한 지점의 독자를 상정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실물적 집단으로서 특정 장르 글쓰기의 한 기반이 되었던 이들 독자층은 일기를 다시 일기로서 장르화하는 문보영의 글쓰기를 통해 독자로서의 수용 방식을 재맥락화 한다. 상술한 매체들과 관련한 독자와의 만남, 혹은 읽기-쓰기의 관계가 문보영 개인의 고유한 영역은 아니지만, 이들 ‘일기 집단’은 쓰는 자와 읽는 자라는 기존 작가-독자와의 관계를 내파하며 ‘일기’라는 장르를 동시대 문학 장르로 구축하는 일에 참여한다는 맥락에서 접근될 필요가 있다. 이에 대한 자세한 분석은 차후의 과제로 남긴다.
7) 문보영의 ‘일기’ 범주에 속하는 창작 활동은 다양하게 이뤄지고 있다. 유튜브 영상 일기인 ‘어느 시인의 브이로그’(a poet’s vlog)와, 독자들에게 이메일, 혹은 우편으로 일기를 배달해 주는 ‘일기 딜리버리’가 대표적이다. 한편, 문보영의 산문집, 『사람을 미워하는 가장 다정한 방식』(쌤앤파커스, 2019.), 『준최선의 롱런』(비사이드, 2019.), 『불안해서 오늘도 버렸습니다』(웨일북, 2020.)는 그간의 일기를 갈무리한 것이라는 점에서 일기 텍스트에 가장 근접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출판 과정을 거쳐 ‘작품’이 된 일기 텍스트들은 여전히 비/공식적으로 게시되어 불특정 다수의 접근을 허용하고 있는 블로그 일기와는 엄연히 구별된다.
3. ‘일기’라는 장르 속 일기 주체
시인이 이끄는 ‘일기병 공유단’. 이들이 형성하는 관계가 꽤나 복잡하고도 특수한 의미망 속에 있다고 주장할 수 있다면, 그것은 단연 ‘일기’ 고유의 특성 때문일 것이다. 문보영의 일기를 읽다 보면 가장 먼저 이런 질문이 떠오른다. 일기는 단순히 산문의 여러 갈래 중 하나, 혹은 보다 더 사적이고 내밀한 산문적 글쓰기의 일환일까.
작가와 동일한 ‘나’를 서술자로 내세운다는 점에서 일기는 ‘에세이’ 혹은 ‘수필’과 공통점을 지닌다. 이들과 일기가 구별되는 지점이 있다면 그것은 내면성의 차원이다. 말 그대로 일기란 개인의 내밀한 일상을 기록하는 행위, 즉 진짜 ‘나’에 가까운 무엇으로 여겨지는 것을 기록하는 장이다. 정제된 언어로 시도하는 다른 어떤 장르의 글쓰기보다도 날것의 나를 기록하고 고백하는 장이라는 데서 일기의 본래적 속성이 발생한다. 그런데 사정은 생각만큼 단순치 않다. 오롯이 일기만이 지닌 내밀함의 특성은 그것의 깊이보다 성격에서 더욱 뚜렷해지는 것 같기 때문이다. 롤랑 바르트는 일기 주체의 성격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이 기록들 안에 들어 있는 놀라운 어떤 것은 황폐화된 주체,
그러니까 또렷한 정신 상태 때문에 폐허가 되어버린 주체다.8)
8) 롤랑 바르트, 『애도일기』, 김진영 옮김, 이순, 2012. 40쪽.
어머니를 잃은 슬픔을 일기로 기록하던 그는 어느 날 문득, 그 속의 ‘나’를 돌아본다. 이곳에는 언제나 철저히 망가진, “황폐화된 주체”가 있다. 그가 보기에 놀라운 것은 주체를 이처럼 폐허로 만드는 것이 다름 아닌 그의 “또렷한 정신 상태”라는 사실이다. 바르트가 묘사하는 일기 속 주체는 극도로 내적이고도 은밀한 개인의 상태를 기록하지만(“황폐화된 주체”), 일기의 특성상 그 황폐함은 잠재적 외부를 의식하는 가운데(“또렷한 정신 상태”) 더욱 내밀해진다. 사후에 개입될(지도 모르는)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는 행위는 내면을 고백 중인 주체의 진정성을 방해한다. 그러나 이 방해가 영원히 부재하는 일기쓰기란 어떤가. 일기를 쓰는 나, 즉 일상을 기록하는 자는 일기의 기본적 속성인 ‘비밀스러움’을 보장받지 못하게 된다. 타인과의 연결 가능성을 완전히 차단당한 내면의 기록은 독백에 불과하다. 나에 대한, 나를 향한 이 간극 없는 말 걸기 속에서 주체는 침잠의 한계를 느낀다.
내가 필요로 하는 건 홀로 있음이 아니다. 그건 (작업의) 익명성이다.
나는 분석적 의미에서의 “작업”(애도 작업, 꿈 작업)을 진정한 “작업”으로
완전히 바꾸려고 하고 있다. - 글쓰기 작업9)
9) 롤랑 바르트, 위의 책, 142쪽.
온전히 “홀로 있음”은 일기의 서술자가 필요로 하는 상태가 아니다. 그는 작업의 “익명성”을 원하는 것인데, ‘익명’이란 타인에 대하여 자신의 이름을 숨기는 상태이다. 숨겨진 상태로서 드러나는 것. 지속적이고도 은밀한 타자의 방해만이 ‘일상의 기술’(분석적 의미의 “작업”)을 ‘일기’(진정한 “작업”)로 만든다. 요컨대 일기 속의 ‘나’는 언제나 익명을 갈구하면서도 읽히는 것을 전제로 하는 곤경 속에서 스스로를 고백하는데, 다소 모순적인 이 내면의 원리야말로 일기가 지닌 문학적 가능성의 암시이기도 한 것이다.
이처럼 일기를 아주 “교묘한 텍스트”로 만드는 것은 일기 속 ‘나’의 활용과 역할에 내재한 복잡성이다. 일기 주체를 구성하는 원리에 따르면, 그것은 기본적으로 ‘저자=나’라는 “진솔함”의 공식을 바탕으로 성립되어야 한다. 저자가 인용부호를 통해 공식적으로 창안해 낸 ‘새로운’ 혹은 ‘허구의’ 주체인 ‘나’와는 구별되는 나. 그러나 이 진솔함은 타인의 시선을 의식함으로써 획득하는 “인위적 진솔함”이기에, ‘저자=나’라는 공식은 일기 주체의 타당성을 곧바로 훼손하며, 일기의 ‘나’는 그러한 정체의 균열 속에서만 탄생하고 또 지속된다.10) 단계적 모호성을 지닌 ‘나’의 “진솔함”을 매개로 일기 텍스트는 저자의 실제 삶과 작중의 삶 사이에서 끝없이 배회하는데, 이와 같은 중층적 발화 행위의 망 속에서 일기의 ‘나’는 여타의 글쓰기 속 ‘나’와는 구별되는 방식으로 쓰인다.
요컨대 일기 텍스트 속에서는 ‘작가’ = ‘나’ 사이의 공식보다 훨씬 복잡한 층위의 긴장이 발생하며, 그 ‘긴장’이야말로 일기 주체가 쓰기를 지속하게 하는 주된 동력이라는 의미이다. ‘일기’ 장르에 관해 ‘내면’이 여전히 중요한 요인으로 개입한다면, 이는 그간의 한국 문학이 주체의 진실한, ‘본질적인’ 내면을 재현하는 문학적 양상 속에서 발견해 냈던 ‘진정성’ 혹은 ‘포스트-진정성’ 담론과 구별된 지점에서,11) 나아가 ‘진정성’의 전유 주체를 심문하는 것으로 그것을 탈오염화했던 바로 그 의미12)로부터도 구별된 지점에서 독해되어야 한다.
말하자면, ‘일기’와 ‘내면’의 관계는 세계와 불화하는 주체가 참된 자아와의 사이에 건설하는 공간으로서의 ‘내면’13)의 층위가 아니라, 문학이라는 제도가 구성의 원인으로서 개입하는 ‘내면’, 즉 ‘진정한 내면(원인)’과 ‘표현으로서의 글쓰기(결과)’가 “자리를 교대하며 뒤섞이는 인과의 복잡성을 수락하는 종류”14)의, 재독된 가라타니적 층위에 노골적으로 가깝다. 인용자의 전개에 따라, 글쓰기를 통해 구성된 ‘내면’에 대해, “공통감각을 형성하고 동질성을 결집할 수 있는 처소로서의 ‘내면’을 배태하는 ‘문학’”15)의 원리와 작용을 꾸준히 의심한 것이 가라타니라고 한다면, 문보영의 일기 주체에게도 그 의심은 여전히 유효하다. 그는 쓰기를 통한 “더 옳고, 더 좋은” 주체 형성에 대한 ‘의심’을 바탕으로 하는 주체이며 나아가 의심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것으로써 다음의 일기-쓰기로 이행하는 ‘나’이다. 단순히 믿지 않는 것 혹은 믿지 않는 척하는 것으로 더욱 강박적인 믿음을 행하는 것과는 구별되는 태도. 문보영의 ‘비밀’에는 그보다 집요하고 치밀한 지점이 있다.
10) 롤랑 바르트, 『롤랑 바르트, 마지막 강의』, 변광배 옮김, 민음사, 2015, 339쪽.
11) 배하은은 90년대 한국 문학장 내부로 ‘내면’이 소환된 과정을 비판적으로 살핀 바 있다. 그것은 80년대 문학에 대항한 세대·담론 전환의 한 실천이면서, ‘문학성’과 ‘예술성’이라는 ‘미학적 차원’이자, 동시에 ‘탈자본주의적 공간’이라는 ‘정치적 차원’으로 의미화된 문학적 헤게모니다. (배하은, 〈만들어진 내면성 – 김영현과 장정일의 소설을 통해 본 1990년대 초 문학의 내면성 구성과 전복 양상〉, 《한국현대문학연구》 50, 한국현대문학회, 2016.)
12) 같은 맥락에서 인아영은 이 ‘만들어진’ 내면성의 전유 주체를 심문하는 방식을 택한다. 이때의 ‘진정성’이 일종의 윤리적/미학적 의미를 획득할 수 있었던 과정을 젠더의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것이다. (인아영, 〈눈물, 진정성, 윤리 – 한국 문학의 착한 남자들〉, 《문학동네》, 2019 겨울호.)
13) 김홍중, 『마음의 사회학』, 문학동네, 2009. 32쪽.
14) 민경환, 〈풍경을 다시 크롭하기 2〉, 《문장 웹진》, 2020, 8월호.
15) 민경환, 위의 글.
4. 일기병 공유단, 그들이 요구하는 ‘비밀’의 정체
이때 ‘일기병 공유단’의 존재가 부각된다. 앞서 살핀 대로, ‘일기병 공유단’은 ‘나’의 가장 비밀한 지점을 표현하는 매체로 문보영의 일기를 이해하거나 이에 공감할 수 없으며, 그 내용을 단순히 전달받는 것으로서 독해를 완료할 수도 없다. ‘문보영-나’의 내밀함이 보장하는 ‘진실’의 층위가 그의 일기에서 상당히 복잡하고도 혼란스러운 방식으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며칠 전부터인가, 이제 더 이상 비밀을 말하고 다니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내 비밀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보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비밀을 털어놓고 나면 마음을 졸이게 된다. 상대방을 만날 때마다 비밀을 검진 받으러 가는 기분이 든다. 아직 네 비밀 건재하니? 어디 한번 살펴보자. 나는 내 비밀이 다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고, 내 비밀에 포함된 다른 누군가까지 보호해야 한다.16)
16) 문보영, 「비밀」, 블로그 일기(2018. 12. 08.)
문보영의 일기에서 ‘비밀’과 ‘진실함’의 층위, 그리고 그 표현 양태로서의 ‘일기’는 결코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문보영의 텍스트 속에서는, 앞서 살핀 ‘일기 주체’의 모순과 긴장이 ‘일기(비밀)’의 핵심이라는 점이 분명하게 인지되고 있으며, 그 사실이 일기-쓰기를 통해 끊임없이 암시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일기, 즉 ‘비밀’에 접근하는 이들은 비밀에 대한 일종의 반응을 한다. “아직 네 비밀 건재하니? 어디 한번 살펴보자.” 일기 주체에 따르면 일기의 독자는 이와 같은 ‘가정된’ 반응을 내재하고 있는데, 이러한 반응은 ‘사실’의 층위와 다른 의미의 진실로서 일기 쓰기에 개입한다. 그 반응은 다름 아닌 일기 주체 내부에서 작동하는 ‘상상된’ 반응으로, 쓰기를 가능케 하는 주된 요인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그는 ‘진실’과 ‘비밀’을 알려야 한다는 강박 속에서, 그리고 그 요구를 의식하는 한에서 자신의 내밀함을 다루며 “비밀을 털어놓”을 수 있게 된다.
그의 일기에 매우 자주 등장하는 ‘인력거’, ‘호저’, ‘흡연구역’, 그리고 숱한 동료 작가들의 실명 등이 실제 작가 개인의 친구이자 지인이라는 사실은 마치 ‘하이퍼-리얼리즘’의 한 형태처럼 일기를 통해 다시 실제로서 증명된다. 그들은 그날 묘사된 일기의 사진-증거물로 나타나거나, 문보영과 함께 일기의 발신인-서명으로 직접 등장하기도 하는 것이다. ‘자전거’와 ‘자전거에 함께 타는 반려돈 말씹러’, ‘주식으로서의 피자’ 등은 그의 영상 일기에서 실물로서 출현하며, 언어로 묘사된 ‘나의 방’ 구석구석의 면면과 그 속에서 치르는 ‘불면과의 사투’는 그가 구조화한 그림으로, 나아가 실제 카메라 렌즈에 포착된 실증으로 우리의 눈앞에 현현된다.
메일링 서비스를 구독하는 이들에게 문보영의 일기는 때때로 작가의 ‘자필’로 쓰인 우편의 형태가 되어 도착하기도 한다. 바야흐로 일기의 독자는 문보영의 일기 쓰기가 ‘진짜 나’에 관한 이야기임을 지속적으로 확인 받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동시에 인지하게 되는 것은, 당연하게도 그것에 일치하면서도 끝없이 미끄러지(려 하)는 ‘문보영-나’ 사이의 간극이다. ‘나’는 이들에게 비밀을 털어놓고, 비밀을 진짜 비밀로서 승인 받는 동시에, 자신의 비밀이 “다치지 않도록 조심”하고, 비밀을 요구하는 이들로부터 그것을 철저히 “보호”하기 때문이다.
이때 ‘진실함’의 증명과 그것에의 요구(라고 가정되어진 일기 주체의 강박)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이것을 단순히 ‘진짜’를 둘러싼 저자와 독자 사이의 팽팽한 놀이의 층위에 방치하지 않으려면, 문보영 일기론의 핵심, 즉 ‘일상 연습’이라는 개념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일상 연습’은 문보영 일기의 출발점이 ‘일상이 파괴되었다는 감각’, 즉 일종의 극단적인 우울감으로부터 시작된다는 사실과 관련된다. 우울의 감각은 그의 텍스트에서 ‘불면의 밤’과 ‘공황’ 등 질병의 증세로서 묘사되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이 세계가 ‘나’로부터 한 발 떨어진 곳에서, ‘나’로부터 한 발 떨어진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특정한 세계감(感)의 한 발현이라고 볼 수 있다. 시 「배틀그라운드」에 묘사된 바에 따르면 ‘나’는 늘 나의 “바깥에 존재”하는 “원을 향해” 뛰어야 하는 방식으로 존재한다. “우리는 원을 향해 뛰”고, “원을 향해 뛰어야” 하지만, 원이 생기는 데는 “약간의 운이 작용”하기 때문에 이것은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며, ‘원’의 이 같은, 도무지 끝이 없는 반복적 재생은 ‘나’의 불안의 근원이 된다.
오빠는 말했다. 본인은 불안을 배틀그라운드 숲에서 다 써버린다고. 기초대사량으로 하루 동안 소비해야 할 불안을, 배틀그라운드를 하면서 다 소비한다고. ‘정말이지…. 언제 죽을지 모른다니까. 얼마나 불안한지…,’ 오빠는 말한다. 불안을 다 소비해서 현실에서는 불안이 없단다.
(…)
새로운 생명을 얻은 오빠는 배틀그라운드 바닥에서 뭔가를 다시 주워 먹고 힘을 내 원을 향해 뛰었다. 무서워, 무서워, 무서워엉…. 오빠는 작은 비명을 내질렀고 오빠의 불안적 미래 뒤에서 나는 불안에 대해 연구했다.
(…)
고통과 불안 없이 지하철을 타고 있는 나 자신을 나에게 보여주고 싶어서 그랬다.17)
17) 문보영, 「불안 그라데이션 기능 탑재 요망」, 블로그 일기(2018. 11. 15.)
‘원’과 ‘자기장’의 작동원리 속에서 가능한 “오래 살아남는”18) 것이 이곳의 목표이지만, 동시에 이곳의 원리는 “죽을 수도 없거나 끝없이 죽”게 만드는 ‘시뮬레이팅’이라는 의미에서 어떤 삶-죽음도 실상 최종적인 무엇이 될 수 없게 한다.19) 남는 것은 오직 불안뿐이다. 이때 문보영의 세계에서 중요한 것은 하루치의 ‘기초대사량’으로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불안이, 다름 아닌 이 ‘원’의 세계, 즉 ‘배틀그라운드’ 내에서 모조리 소비되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문보영의 일기 주체가 ‘내면’이라는 공간에서 형성되는 주체를 그저 믿는 것도, 믿지 않는 것도 아니라는 가정이 사실이라면, 그에게 이 전장(戰場) 바깥의 세계 따위는 없다. 그가 형성하는 이야기가 무료하고 권태로운 ‘세계’를 피해 그 ‘바깥’에서 구축하는 “기기묘묘한 이야기”, “기기묘묘한 모험”20) 박상수, 『책기둥』 해설.
정도로 해석될 수 없는 이유이다. 오빠가 ‘배틀그라운드’라는 메타적 전장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몫의 불안을 소비하듯, 일기의 주체는 ‘일기’라는 메타적 일상에서 ‘나’에게 주어진 만큼의 불안을 소비해야만 한다. 소비를 위해 ‘나’가 우선적으로 시도하는 것은 불안을 ‘연구’하는 작업이다.
위의 일기에서 ‘나’는 앤드리아 피터슨의 에세이집 『불안에 대하여』의 한 문장을 인용하는데, 인용문은 “불안을 세밀하게 나누고 자세하게 들여다”보는 것이야말로 그의 일기가 일차적으로 몰두하는 작업임을 암시한다. 말하자면 불안을 모조리 소비하거나, 최소한 감당 가능한 수준으로 전환하기 위해 ‘관찰’과 ‘묘사’, 즉 일상의 기록(“분석적 의미에서의 작업”)이 요구된다는 것이다. ‘나’는 ‘배틀그라운드’에서 불안을 소비하는 오빠의 불안한 미래 뒤에서, 다시 불안을 소비하는 방식에 대해 연구하며, 연구의 과정을 기록한다.
18) 조대한, 〈이토록 낯설고 익숙한 세계〉, 《자음과모음》, 2019 겨울호.
19) 민경환, 〈덜 죽은 시체를 안 사랑하기 시작하는 거짓말 속에서〉, 《크릿터》 2호, 2020.
20) 박상수, 『책기둥』 해설.
5. 장르로서의 글쓰기, ‘거짓 맹세’
몇 번의 연재에서 제발트에 대해 떠든 이유 또한 비슷한데, 결국 제발트도 브이로그의 문학 버전이기 때문이다. 일상이 파괴된 우울증 환자로 지내면서 나를 일으킨 건 브이로그였다. 사람들이 별거 안 하며 사는 모습, 야망 없이 살아가는 모습, 아침에 일어나서 밥 먹고 똥 싸고 양치하고 산책하며 비둘기 똥을 만나는 모습을 보면 나도 아침에 일어나서 밥 먹고 똥 싸고 양치하고 산책하며 비둘기 똥 만나서 웃는 걸 하고 싶어진다. 브이로그와 제발트는 인생의 디폴트값으로서의 욕망을 연습하게 해준다.21)
21) 문보영, 위의 글.
‘불안 연구’, 즉 관찰과 묘사라는 기록을 통해 문보영의 일기 주체가 궁극적으로 목표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는 일기를 통해 불안과 거리를 두는 것으로 일상을 살아내는 나 자신을 진정한 ‘나’의 모습으로 구축하고, 그것을 다시 ‘나’에게 보여주며, 나를 속여 내려 한다. 요컨대, 문보영에게 일기는 ‘나’가 모방하고 연습해야 할 대상으로서의 ‘나’를 담은 거울이며, 때때로 나조차 나 자신의 ‘진정한 비밀’로 믿을 만큼 ‘내면’의 구축과 그 효과에 있어 매우 강력한 힘을 지닌 무엇이다.
세상에는 “일상을 살 줄 아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으며, 문보영은 자신이 “후자”라고 말한다. 그에게 이러한 일상은 사는 것이 아니라 끝없는 ‘연습’의 대상인데, “인생의 디폴트값으로서의 욕망”을 연습하기 위한 대상은 ‘야망 없이도 살아갈 수 있는 모습’과 같이 다소 관념적인 형태이거나, 혹은 “밥 먹고 똥 싸고 양치하고 산책”하는 습관적인 행위이기도 하며, 그러한 행위 전시의 “문학 버전”인 ‘제발트’라는 또 하나의 텍스트이기도 하다. 그중 가장 중요한 대상은 일기로 형성된 진정한 ‘문보영-나’와 그 텍스트이다.
잘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전혀 안 그랬어요. 밥도 안 먹고, 안 씻고, 울기만 하던 나날이었거든요. 그래서 걸음마 하듯 일상을 꾸려 나갔어요. 일상을 사는 데 연습이 필요하더라고요. 밥 잘 먹는 내 모습을 브이로그로 시청하면서 따라했어요. 선 영상 후 따라잡기랄까요.22)
22) 문보영, 유계영 인터뷰 중 문보영의 말. 〈어느 시인의 브이로그―시가 아닌 것들을 내 삶에 초대하기〉, 《문학선》 2020 가을호.
일상을 살아가는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다시 일상을 살아가는, 즉 “선 영상 후 (그 모습을–인용자) 따라잡기”는 이른바 ‘내면 도출’의 역행 과정에 대한 설명이다. 자신의 ‘내면’ 혹은 ‘진짜 자아’로 설정된 그 일상을 ‘관찰’하며 그것을 자신의 삶 속에서 역으로 ‘반복’하는 이와 같은 인생 연습과 그 자체로서 삶-쓰기라는 일기는 그에게 “진정한 의미의 작업”이 된다. 이처럼 일기-쓰기와 일기-쓰기로서 삶의 방식을 지속하는 태도는 일기로 형성되는 ‘주체-나’에 대한 ‘의심’과 그 의심의 연장선에서 행해지는 거짓된 맹세로 읽힐 여지가 있다.
자기 전에 꼭 성경을 읽는다. 신과 약속을 했기 때문이다. 정신머리가 나가서 잊을 때가 있다. 그러면 다음날 바로 전기 충격을 당하는 식이다. (…) “그는 거룩하신 하나님이시오 질투하는 하나님이시니”라는 말은 성경에 빈번하다. 하느님은 거룩하게 질투하는 존재인 것이다. 그는 본인이 질투가 많다고 말하고, 그러니까 알아서 좀 맞추라고 한다. 나는 그런 그의 성격이 좋아서 자꾸 성경을 읽는다. 그는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을 죽도록 싫어하며, 자신을 기만하는 자를 견디질 못한다. 그는 정말 약하다. 이따금, 말도 안 될 흉악범을 구원하기도 하지만, 때에 따라 그저 물건을 훔쳤을 뿐인 아간을 죽인다. 일관성이랄 게 없는 것이다.23)
23) 문보영, 「날 너무 좋아해서 내가 쓸모없다는 걸 받아들여달라는 것이죠」, 블로그 일기(2018. 12. 19.)
그것은 ‘나’가 신을 대하는 방식과 유사하다. 신은 이 세계의 주조자로 가정된다는 점에서 ‘나’가 지니고 있는 불안의 근본 원인이다. ‘나’의 신은 유독 질투가 많아 자기 외엔 누구도 섬기지 못하게 하고, 사람들로 하여금 “알아서 좀 맞추라고” 닦달하는 황당하고 무능한 존재이며 그 자신 나약하고, 일관성이 없고, 무엇보다 “횡설수설”한다. 하지만 그의 횡설수설을 믿지 않는 대가는 꽤나 혹독한데, 다음날 바로 치고 들어오는 “전기 충격”이 그것이다.
그는 일관성이랄 게 없고 이런 횡설수설 때문에 자꾸 믿게 된다. 사실적이기 때문이다. (…) 성경을 제대로 읽은 사람은 신을 떠나기도 한다고, 인력거가 그랬다. 신은 자기 자신을 미화하지 않기 때문이다.24)
24) 문보영, 위의 글.
앞서 민경환이 재독했던 가라타니의 ‘내면’과 ‘문학’의 의심스러운 인과/상호관계는 문보영의 일기 주체의 ‘생의 연습’에 중요한 활용 장소가 된다. 요컨대 ‘삶을 연습’하는 행위로서의 글쓰기를 결국 ‘나’의 진짜 삶에 일치시키는 것을 궁극적인 목표로 삼지만, 이로부터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불가능의 ‘간극’에 대해서도 외면할 수 없는, 혹은 외면하지 않는 자세, 그것을 가능케 하는 것이 바로 이 ‘일기’라는 장소인 것이다. 그 속에서 이어 가는 ‘거짓으로서의 맹세’는 다시 ‘분석적 의미의 작업’을 ‘진정한 작업’으로 이행하는 과정을 끝없이 반복하게 하는 동력일 뿐이다. ‘거짓’과 ‘맹세’ 사이의 틈을 노리며 불안을 소비하는 그에게 일시적으로 허락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시간 기술자”라는 ‘나’의 모형과 역할이다.
“시간 여행을 떠나서 잘못된 과거를 수정해야 해!”
게임을 시작할 때마다 크루아상 쿠키는 말한다. 이 다짐이 좋아서 하루에 몇 시간씩 쿠키런을 한다. 쿠키의 대사가 일기를 쓸 때의 심정과 비슷하다. 크루아상 쿠키는 시간 여행기를 타고 비행한다. (…) 경기를 마치면 시간 에너지를 모을 수 있고, 시간 에너지가 꽉 차면 시간을 수리할 수 있다.
내가 이 게임에서 제일 좋아하는 부분은, 쿠키가 앞으로만 달린다는 점이다. 쿠키에게는 뒤로 가는 능력이 없다. 쿠키는 가만히 있어도 저절로 앞으로 달리게 되어 있다. 앞으로 가는 것만 가능한데, 그게 과거를 수리하는 길이라고 한다. 과거를 수리하기 위해 과거로 돌아갈 필요가 없다. 그냥 앞으로 미친 듯이 달리기만 하면 그게 과거를 수리하는 거란다. 크루아상 쿠키는 말한다.
“나만 믿어! 뭐든 고쳐 줄게!”
“최고의 시간 기술자가 될 거야!”25)
25) 문보영, 「사랑을 선택하지 않는 사랑에 관하여」, 블로그 일기(2020. 11. 10.)
“나만 믿어! 뭐든 고쳐 줄게!” 단언하는 ‘나’와 “최고의 시간 기술자가 될 거야!(그래서 과거를 수정해야 해!)”라고 절박하게 다짐하는 ‘나’는 그의 일기에서 동시적으로 존재한다. 앞으로 달리는 것만이 가능하지만, 앞으로 미친 듯이 달리기만 한다면, 잘못된 과거-나를 ‘수리’할 수도 있는 공간-일기. 그 속에서 문보영의 일기 주체가 행사하는 거짓으로서의 맹세는 냉소와 명랑 따위로 환원되지 않는 “글쓰기-의지”이자, 그 자체 “글쓰기-작업”26)이다. 쿠키런의 달리기를 일기-쓰기에 비유했던 ‘나’ 역시 바르트의 말을 인용하며 그 의지-작업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난 아무 희망도 없다네, 그렇지만…….”
“난 표류를 선택한다네, 그래서 계속한다네.”27)
26) 롤랑 바르트, 변광배 옮김, 『롤랑 바르트, 마지막 강의』, 민음사, 2015.
27) 롤랑 바르트, 김희영 옮김, 『사랑의 단상』, 동문선, 2004. 9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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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2020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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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의 자리 2비평의 자리 2 최가은 1. 너는 변호인이자 시해자로서, 죽은 작가의 약점과 결점을, 네 작업에 알맞은 누추한 진실을 건져낼 수 있는 교묘한 질문들 속으로 그녀를 유인할 것이다. 너는 그 질문들 속에 죽은 작가와 함께 살았던 사반세기 동안의 시간을 반성적으로 재구성할 수 있는 은밀한 함정들을 설치하여, 그녀가 자신의 얼굴이라는 투명한 거울을 대면하도록 부추길 것이다. 죽은 작가의 아내는 네 속임수와 거짓말에 치가 떨릴 것이고, 그날 너를 집으로 들여놓은 것을 자책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너는 진실의 조각을 발설해야 할 의무가 있으며, 죽은 작가의 아내는 네게 진실의 일부를 공유한 것을 후회할 것이다. 너는 미열 같은 흥분 속에서 응답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초인종 소리가 멎었다. 너는 다시 초인종을 눌렀다. 여전히 저택 안에서는 아무런 응답이 들리지 않았다. 대문은 완강하게 잠겨 있었다.1) 소설은 ‘죽은 작가’라는 기호 아래 결집하고 흩어지는 ‘너’의 운동으로 가득 차 있다. ‘너’는 누구인가. ‘너’는 무언가를 좇는 자. 불가해한 형태로 유폐된 어떤 진실을, 진실의 환영을, 혹은 환영을 덮치는 기억을 추격하는 자이다. 누추한 진실을 누비기 위한 거짓, 투명한 거짓을 뭉개기 위한 진실 사이를 정신없이 횡단하는 ‘너’는 그 무언가의 “변호인이자 시해자로서”, “진실의 조각을 발설해야 할 의무”를 지녔다고 주장한다. 다시, ‘너’는 누구인가. ‘죽은 작가’에 관한 단편소설을 쓰기 위해 그의 흔적을 찾는 중이라는 ‘너’는 그의 문학적 “유산”을 “냉혹하게 적출”하는 “문학적 해체”, 혹은 일종의 자기기만에 불과한 “문학의 우상을 살해하는 퍼포먼스”2)를 준비하는 자이다. “숭배”와 “모독” 사이의 간극과, 그 간극을 오가는 자의 공포를 요란하게 발설하며 초조한 기대로 가득 차 있는 자이기도 하다. ‘너’는 은밀하게 설치한 네 함정에 의해 ‘죽은 작가’와 ‘죽은 작가의 아내’가 “자신의 얼굴이라는 투명한 거울을 대면하도록 부추길” 수 있다고 믿는다. ‘죽은 작가’보다 언제나 한 발 앞선 ‘앎’과 ‘진리’를 확보한 것이 ‘너’의 자리이기 때문이다. ‘너’는 그들로부터 진실에 관한 특권적 “의무”를 지닌 그들의 미래, 다시 말해 우리의 현재이다. 곧 맞이하게 될 무력하고 무지한 과거의 몰락 앞에서 흥분한 현재는 초인종을 누른다. 한 번, 그리고 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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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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