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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못하는 짐승(A Dumb Animal)

  • 작성일 2022-04-01

[단편소설]



말 못하는 짐승(A Dumb Animal)



강병융





경고합니다!


본 작품은 매우 폭력적이고,
상당히 충격적일 수 있으니


기력이 없는 짐승,
소중한 생명을 임신한 존재,
선천적으로 몸과 마음이 약한 생명체는


절대 독서를 삼가시기 바랍니다.

1.


저는 ‘말 못하는 짐승’입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본디 ‘짐승’입니다.
본래 짐승인데, 말까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인간의 언어로 정의하자면, 짐승이란 “몸에 털이 나고 네 발을 가진 동물”입니다.
우습고도 슬픈 것은 인간들도 가끔 스스로를 ‘짐승’이라고 부른다는 것입니다.
“매우 잔인하거나 야만적인 사람”을 비유적으로 부를 때, ‘짐승’이라는 말을 씁니다.


인간들은 야만적이고 잔인할 때만 ‘짐승’이 되지만, 저희는 다릅니다. 그 이유는 명확히 모르겠습니다만, 저희는 잔인해도, 그렇지 않아도 그저 ‘짐승’입니다. 야만적이어도, 비야만적이어도 그냥 ‘짐승’입니다.


하여튼, 저는 말을 못하는 짐승이 되었습니다.
어떤 분들은 이렇게 물으실지도 모르겠네요. 세상에 말하는 짐승도 있냐고?
물론, 세상에 인간의 말을 하는 짐승은 없습니다. 인간의 말을 따라 하는 동물은 있지요.
예전에 저는 인간의 말이 아닌, 저희들의 말을 했었지요.
하지만 이제는 인간의 말은 물론이고, 짐승의 말도 하지 못하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저는 아예 소리도 내지 못하는 짐승이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저는 아예 침묵의 존재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니까 저는 아예 표현이 어려운 생명체입니다.


‘멍멍’도 못 하고,
‘왈왈’도 못 하고,
‘꿀꿀’도 못 하고,
‘야옹’도 못 하고,
심지어 ‘바우와우(bowwow)’도 못 하고,
물론 ‘미야우(meow)’도 못 하고,
‘오잉크(oink)’도 못 합니다.


그냥, 찍소리도 못 내는 짐승입니다.


소리뿐만 아닙니다.
표정도 사라져 버렸습니다.


비숑 프리제(Bichon Frise)와 같이 또랑또랑하게 귀여운 표정은 물론 지을 수 없고, 퍼그(Pug)같이 심드렁함도 드러내지 내지 못합니다. 시바 이누(Shiba Inu)처럼 큰 눈으로 누군가를 노려보면서도 상대를 미소 짓게 하는 재주도 전혀 없습니다. 두 눈을 질끈 감고도 앙증맞은 표정을 짓는 것은 상상도 못 합니다. 바셋하운드(Basset Hound)처럼 뒷모습만으로 인간들의 시선을 묶어 둘 능력도 전혀 없습니다.


사실, 이 지경이 되기 전에도 인간들이 저를 사랑스럽게 봐주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먹은 음식물을 소화하여 항문으로 내보낸 찌꺼기 같은 존재라고 했죠. 네, 맞습니다. ‘똥개’라고 불렀던 것이죠. 영어로는 ‘뒤섞인(mixed) 짐승’, 그러니까 ‘잡종’이라고 불렀고요.



2.


그날 이후입니다.


그날 이후, 저는 찍소리도 못 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제겐 표정도, 표현도 없습니다.
모든 음이 완벽하게 소거되어 버렸고, 표정이 싹 제거된 그런 짐승일 뿐입니다. 다행스럽게도, ‘공감(empathy)’할 수 있는 능력과 ‘실천(execution)’할 수 있는 능력은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제게서 사라져 버린 것이 더 소중한 것인지, 제게 남은 것이 더 소중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세상 모든 존재가 그렇듯, 저 또한 저의 능력 내에서 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았습니다. 능력 밖의 일을 꿈꾸는 것을 망상이라고 합니다. 저는 그런 망상을 혐오합니다.


지금부터 이 두 가지 능력으로 한 일을 말해 볼까 합니다.
공감과 실천으로 가능했던 일!
공감 그리고 실천!


어떤 분들께는 제 이야기가 무척 충격적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요즘 세상에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충격적인 것들 투성이지만, 그래도 걱정이 됩니다.


그래서 미리 경고해 둡니다.
기력이 없는 존재, 소중한 생명을 임신한 짐승, 천성적으로 몸과 마음이 약한 생명체인 경우라면, 절대 이야기를 듣지 마십시오.
절대!
‘절대’입니다.


저의 이야기만큼이나 당신들의 감정이라는 것도 소중할 테니까요. 당신이 인간이든, 인간이 아니든.
하지만 어떤 인간들은 감정보다는 욕구가 더 중요하다고 믿고 산다는 것을 잘 압니다. 그들은 자기들 멋대로 그 더러운 욕구를 ‘자유’라고 부릅니다. 그런 인간들이 제 이야기를 꼭 들었으면 좋겠습니다만, 그런 존재들은 늘 다른 일로 바쁘지요. 글이라는 것은 읽지 않고, 진지한 순간이란 것은 그들에게 존재하지 않는 시간이죠.



3.


인간들은 그렇게들 말하죠.
세상 어디나 사람이 사는 것은 다 비슷하다고 하지요.
더 똑똑한 존재도, 더 잘사는 부류도 크게 다르지 않다고들 합니다.
인간은 다들 인간이라고.


지구에서 인간들에게 가장 살기 좋은 나라에서도 제가 겪은 일과 비슷한 일이 합법적으로 가능했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인간들이 가장 살고 싶어 하는 곳에서, 그것도 이런 무시무시한 일이 불과 얼마 전까지 합법적이었다죠.
그 나라에서는 무엇보다도 ‘인간’의 기본적 욕구와 표현의 자유, 개인의 자유와 선택을 중요하게 생각하던데, 그래서인지 정부는 인간들이 마음껏 욕구를 풀 수 있게 해줬고, 이를 위해 인간들의 자유와 선택의 폭을 자신들 마음대로 넓혀 줬던 것 같습니다. 자유와 선택이라는 이름의 야만 혹은 폭력 혹은 그 이상의 죄라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덕분인지, 때문인지 일부 인간들이 취향에 따라 짐승들을 ‘선택’한 후, 입과 다리를 꽁꽁 묶어 둔 채, ‘자유’롭게 ‘욕구’를 풀 수 있었답니다. 단돈 몇 푼만 주면요.
물론, 그 돈을 받은 측은 희생당한 짐승이 아닌, 그 짐승을 꽁꽁 묶은 인간들이었고요. 그런 ‘미친’ 자유가 없었던 다른 나라 인간들도 그 나라로 몰려가 자유를 마음껏 누렸다고 합니다.


인간들이 말한 세상 사는 것은 어디든 다 비슷하다는 그 말이 맞네요.
더 똑똑한 척하는 존재도, 더 잘사는 부류도 크게 다르지 않네요,


그렇게 자유를 누리는 행위를 “짐승섹스관광(animal sex tourism)”이라고 불렀지요.1)


하지만 그런 일과는 상관없이 그 나라는 매년 지구에서 가장 살기 좋은 나라 중 하나로 불리고 있습니다.
인간들이 살기 가장 좋은 나라,
인간들 기준의 최고의 나라,
물론, 인간들이 정한 그런 기준에 부합하는 나라.2)
일부에서는 이제라도 인간의 그 ‘미친’ 자유가 제한되어서 정말 다행이라고들 떠들지만, 사실 21세기까지 그런 일이 있었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히 ‘다행’이 아닌 ‘불행’입니다.3)
그저 놀랄 만한 일입니다. 그저 화나고 슬픈 일입니다.
더군다나, ‘휘게(Hygge) 라이프’가 있는 곳이라고 떠들며, 작지만 소소한 행복의 중요성을 운운하는 나라에서, ‘라곰(Lagom)’이라는 절제 속 안락함을 추구한다고 떠벌리는 나라에서 말입니다.
그 나라의 법무부는 몇 년 전, 수의사들의 조사 결과를 인용해 다음과 같이 발표했습니다. 병원에서 치료를 받은 짐승들의 고통 중 약 17%가 인간과의 섹스와 연관되어 있다.4) 다시 말하자면, 짐승 열 마리 중에 적어도 한두 마리는 인간과 섹스를 하다가 병원에 갈 정도의 병을 얻었다는 말입니다. 인간의 선택이 만든 동물의 고통.


‘섹스’라고 말했지만, 그건 폭력적 강간입니다.
잔인하다는 말로는 턱없이 부족한 바로 지독한 폭력!

1) 영국 《로이터》 2015년 4월 21일자 〈덴마크, 짐승섹스관광 반대 움직임에 수간 금지(Denmark bans bestiality in move against animal sex tourism)〉
https://www.reuters.com/article/us-denmark-bestiality-idUSKBN0NC1YM20150421



4.


이제,
바로 그 지독한 폭력,
제 눈앞에서 펼쳐졌던 폭력에 관해 이야기할 참입니다.


제가 살고 있는 이 나라 인간들도, 소확행과 인간의 욕구를 존중하는 그 나라 인간들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인간은 인간이죠. 쓰레기는 쓰레기인 것처럼.


모든 폭력은 그릇된 선택에서 시작됩니다.
모든 폭력은 폭력의 몰이해에서 비롯됩니다.
존재 A가 존재 B를 선택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폭력이지요. 이런 경우 대부분 존재 B에게는 아무런 선택권이 없기 때문입니다. 폭력이 시작되지 않으려면, 선택 전에 대화가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선택’은 폭력으로 이어집니다. 당장은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그렇게 되고 맙니다.



5.


그 인간은 제 딸을 ‘선택’했습니다.
태어난 지 3개월밖에 되지 않은 딸을 선택했습니다.5) 그 인간이!
폭력의 대상으로 제 딸을 선택한 것이지요.
우발이라는 말은 여기서 적용되지 않습니다. 우연이라는 것도 전혀 부합하지 않습니다. 철저하게 사전에, 완벽하게 미리 짜여진 행동이었습니다. 설사 그 선택이 우발적이었고, 우연에 의한 것이라 해도 용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2) 미국 〈CNN〉 2022년 3월 18일자 “2022년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들(The world's happiest countries for 2022)”
https://edition.cnn.com/travel/article/worlds-happiest-countries-2022-wellness/index.html
3) 영국 《인디텐던트》 2015년 4월 24일자 “수간의 심리학: 왜 동물과 섹스를 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있을까?(Why Would Anyone Want to have Sex with an Animal? The Psychology of Bestiality)”
https://www.independent.co.uk/life-style/love-sex/why-would-anyone-want-to-have-sex-with-an-animal-the-psychology-of-bestiality-10201158.html
4) 영국 〈BBC〉 2015년 4월 22일자 “덴마크, 수간 금지법 통과(Denmark passes law to ban bestiality)”
https://www.bbc.com/news/newsbeat-32411241
5) 한국 《세계일보》 2019년 6월 18일자 “‘3개월 강아지인데’ 20대男 ‘수간’ 강력 처벌 요구 靑 국민청원 20만 돌파”
http://www.segye.com/newsView/20190618502260?OutUrl=naver


수천 장의 사진을 보고, 보면서 흐뭇한 표정으로 키득거렸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중 한 장 속 제 딸을 선택한 후에 예약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또 악마적인 흥분을 느꼈겠지요.


그때, 저는 철창 안에 있었습니다.
인간들이 죄를 지었을 때나 들어가는 그 철창 안에 있었습니다. 물론, 저는 아무런 죄를 짓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안에 들어가 있어야 했습니다. 선택을 강요당한 것입니다. 그 이유는 아무도 말해 주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철창 안에 들어갈 수 있는 걸 고맙게 생각해야 한다고 강요했습니다. 그 안에 갇혀 지켜보았습니다. 그 안에서 으르렁거려도 보았습니다.


그 인간은 제가 보는 앞에서 청색 테이프로 딸의 입을 꽁꽁 묶었습니다. 아주 천천히, 아주 세게 숨을 쉬기 어려울 정도로 빈틈없이 주둥이를 테이프로 감아 돌리고 돌리고 또 돌렸습니다. 이미 저의 고통은 분노로 치환되었고, 딸의 고통은 두려움으로 변한 듯했습니다.
철창 안에서 움직일 수 없는 힘없고 나약한 부모의 모습으로, 비극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자식의 아픔에 속수무책인 제 모습에 스스로 아주 큰 좌절감을 느꼈습니다.


딸의 모든 것을 지켜봤습니다.
딸은 제 눈을 피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한순간도 놓치지 않았습니다. 고스란히 한 동작, 한 동작을 눈에 담았습니다. 기억하고 있어야 합니다. 잘못된 것을 바꾸기 위해선, 그것을 발전이라고 불러도 좋고, 복수나 보복이라고 해도 괜찮습니다. 기억이 세상을 바꿀 수 있습니다. 망각이야말로 퇴보의 첫걸음입니다.
그래서 극도로 슬펐고, 극한의 고통이 제 마음과 몸을 괴롭혔음에도 그 눈빛, 그 숨결, 그 눈물, 털의 미세한 떨림까지 기록했습니다.


제 머리에,
제 마음에,
제 몸에,
제 피에,
제 뼈에
그렇게 새겨 두었습니다.


딸이 아주 조금 움직여 보려고 하자, 그 인간은 딸을 가차 없이 후려쳤습니다. 주먹으로 머리를 세게 때렸습니다. 악마의 주먹보다 작은딸의 머리가 힘없이 꼬꾸라졌습니다. 딸은 바로 기절했습니다. 딸의 다리를 미동도 할 수 없게 꽉 묶더군요. 묶여 있는 모습 자체가 고통으로 읽혔습니다. 딸은 분명히 눈을 감고 있었지만, 감은 눈 위로 고통과 슬픔이 보였습니다.


그리고, 그 인간은 기다렸습니다.
나중에 깨달았습니다. 그 인간이 했던 행동 중에 그 ‘기다림’이 가장 잔혹한 짓이었다는 사실을.
그는 핸드폰을 켜고, 무언가를 봤고, 키득거렸습니다. 애인에게 전화를 해서 사랑한다는 말도 했습니다.


사랑.
‘사랑’이라는 단어 앞에서 딸이 깨어났습니다.


그러자, 그 인간은 애인과의 대화를 마치고 미소를 지었습니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분명히 매우 숙련된 모습으로 움직였습니다.


바로 백팩에서 작은 파우치를 꺼냈습니다. 그 안에는 여러 가지 색의 콘돔이 있었습니다. 빨강, 주황, 노랑, 초록, 파랑, 남색, 보라. 천천히 다양한 색들을 살피더니 빨간색 콘돔을 들었습니다. 포장지를 뜯더니 콘돔의 냄새를 한번 쓰윽 맡았습니다. 그리고 다시 씨익 웃었습니다. 전에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사악한 미소였습니다.


- 딸기향! 좋네!


그 인간은 바지를 내렸습니다. 성기는 이미 발기되어 있었습니다. 거대한 성기를 딸기향 빨간 콘돔 안으로 밀어 넣었습니다. 바지를 벗지도 않은 채 그렇게 콘돔을 꼈습니다. 분명히 매우 숙련된 모습으로 움직였습니다.


그리고 그 거대하고 새빨간 성기를 딸의 몸 안에 쑤셔 넣었습니다.
미소를 지으면서,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소리를 질렀습니다. 모든 힘을 다해 소리를 질렀습니다.
지랄을 했습니다.
발광을 했습니다.


그러자, 그 인간이 고개를 돌려 저를 봤습니다. 그리고 빨간 성기를 덜렁거리며 다가왔습니다.


저는 계속 지랄을 했습니다.
저는 계속 발광을 했습니다.


그 인간은 철창을 열더니, 무언가로 제 머리를 후려쳤습니다.
전원이 꺼졌습니다.
제 의식의 전원도, 제 신체의 전원도 꺼져 버렸습니다.



6.


다시 눈을 떴을 때, 깨달았습니다.
말을 못하는, 찍소리도 내지 못하는, 아무런 표정도 지을 수 없는, 그래서 아무것도 제대로 표현할 수 없는 짐승이 되어버렸다는 사실을.


저는 그렇게 말 못하는 짐승이 되었습니다.
저는 그렇게 표현을 모르는 짐승이 되었습니다.


대신, 머리를 심하게 맞은 후, 공감할 수 있는 능력과 실천할 수 있는 능력은 더 강해졌습니다. 인간 정도의 지적 능력도 생겼습니다. 짐승의 평균보다 아주 조금 더 높은 수준의 지적 능력이라고 할 수 있죠. 인간을 이해하는데, 인간을 이용하는 데 도움이 되는 수준의 능력입니다.
그리고 인간과 비슷한 실천 능력이 생겼습니다. 그러니까, 무자비하고, 자연의 법칙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이기적으로 마구 실행할 수 있는 그런 능력이요. 과한 폭력과 지나친 살인에 아주 관대할 수 있는 마음가짐이 생겼습니다.


새로운 종류의 공감 그리고 실천이 가능해졌습니다.


하지만 제게서 사라져 버린 능력이 더 소중한 것인지, 조금 변형되긴 했지만 제게 남아 있는 능력이 더 소중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세상 모든 존재가 그렇듯, 그것이 살아 있든 그렇지 않든, 저 또한 저의 능력 안에서만 무언가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7.


꽤 긴 시간 무척 슬펐습니다. 표현할 수 없는 나날들이, 아니 표현하면 죄스러운 시간들이 이어졌습니다. 울지도 못했습니다. 슬픈 표정조차 지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매일 밤, 그 인간의 몸에서 절제되지 않는 채 터져 나왔던 징그럽고, 악마적인 신음소리를 들었습니다. 듣고 또 들었습니다. 관계를 마친 후, 킥킥거리는 가볍디 가벼운 웃음소리도 들렸습니다. 그 인간이 내뱉었던 ‘사랑’이라는 단어들도 제 머리 위를 부유했습니다. 멈추지 않고, 돌고 또 돌았습니다. 그것이 환청인지, 그것이 기억의 일부인지 정확하지 않았습니다. 한 가지 정확한 것은 그것은 진정 거대한 고통이라는 사실뿐이었습니다.


저는 결심했습니다. 무언가를 해야겠다고. 반드시 해야겠다고. 제가 가진 두 가지 능력으로.
그것을 복수라고 불러도 좋습니다. 그냥 잔인한 짓이라고 말해도 상관이 없습니다. 짐승 같은 행위라고 해도 좋습니다. 비인간적이라고 해도 괜찮습니다. 저는 어차피 인간이 아니니까요.
심지어 짐승만도 못하다는 말도 상관없습니다. 그런 말을 들어도 제가 짐승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으니까요. 그 역시 인간이 정한 기준이긴 하지만.



8.


그때부터,
실천을 결심한 순간부터 인간들을 모았습니다.
‘수협(獸協)’이라는 이름의 조직을 만들었습니다.
‘수협’, ‘수간을 사랑하는 인간들의 협동조합’.


인간들 사이에서 보안이 철저하다고 알려진 메신저에 작은 방을 하나 만들었습니다. 아무런 홍보도 하지 않았고, 아무도 초대하지 않았지만 짐승의 냄새를 맡은 인간들이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클럽이라고 이름을 붙였지만, 무엇을 하는 모임인지는 직접적으로 밝히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인간들이 가입 여부를 묻기 시작했습니다. 가입을 시켜 달라고 징징댔습니다. 저는 가입이 복잡하고, 까다로운 척했지만, 모두를 일괄 승인했습니다.
그중에는 진짜 행위를 미치도록 원하는 인간도 있었고, 진짜 행위를 하려는 인간들을 감시하려는 또 다른 인간도 있었고, 이도 저도 아닌 정체가 불분명한 부류도 있었습니다. 제겐 다 같은 인간이었습니다. 쓰레기가 다 같은 쓰레기인 것처럼.


인간들은 이런 유의 일에 극도로 자발적입니다.
인간들이 어느 정도 모이자, 예상대로 첫 번째 부류의 인간들이 가장 빨리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서로를 조합원으로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그중 한 20대는 자신이 했던 일을 자랑스럽게 떠벌리면서 리더의 역할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자신은 길거리에서 만난 짐승을 강제로 범하고, 그 기분이 너무 좋아졌다는 내용을 떠들었는데, 조합들은 그 20대를 진심으로 부러워했습니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아무도 요청하지 않았는데, 20대는 자신의 행동을 찍은 동영상을 ‘수협’ 채팅방에 공유했다는 것입니다. 동영상 밑에 20대는 자랑스럽게 이렇게 썼습니다.


- 이제 저 새끼는 똥도 제대로 못 싸고, 똥을 질질 흘린다. 아주 정신이 나간 것처럼 침을 질질 흘리면서 사람들을 슬슬 피해.6) 가끔 동네에서 보는데, 나를 슬슬 피한다고. 그 꼬라지를 보는 것이 하는 것만큼 좋다고. 인간 새끼들이랑 하는 것보다 저것들이랑 하는 것이 더 좋아. 돈도 안 들고 그냥 길거리에서 주워 와서 하면 된다. 길거리에서 저것들이 꼬리치는 것만 봐도 존나 흥분된다고!


20대 남자의 진솔한 고백 후에 조합원들은 더욱 가까워졌습니다. 한 인간, 두 인간 경험담을 내놓기 시작했습니다. 돈독해진 조합원들은 협동조합답게 어서 돈과 힘을 모아 목표한 바를 이루자고 했습니다.


조합원들의 단합과 믿음을 확인한 후, 저는 인간들에게 돈을 보내라고 했습니다.
인간들은 의심 없이 제게 돈을 보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날짜와 장소를 정하자 좋다고들 했습니다.


화끈한 수간과 수간 후 맛있는 식용을 위해 협찬을 받고 있다는 글을 올리자 연락이 오기 시작했습니다. 협찬할 짐승들의 목록이 올라왔습니다.


개,
고양이,
소,
양,
말,
뱀,
토끼,
너구리,
곰,
비둘기,
펭귄,
도마뱀까지.

6) 《한국경제신문》 2019년 5월 22일자 “이천 수간 사건 ‘공분’…20대 男, 생후 3개월 강아지에 성행위”
https://www.hankyung.com/society/article/2019052221537


종류와 숫자가 계속 늘어 갔습니다.
물품 협찬도 이어졌습니다. 너무 얇아서 착용하지 않은 것 같은 착각까지 든다는 최고급 수간용 콘돔, 관계 후 과다출혈 등이 발생했을 시 뒤처리가 깔끔한 동물섹스용 특수 패드, 관계 후 바로 식용하기 위해 털 제거가 용이하도록 제작된 초강력 특수 토치, 동물과의 성관계 시 쾌감을 극대화해 준다는 지용성 러브 젤까지. 저는 그저 주는 대로 다 받겠다고 했습니다.


사실, 저는 ‘그’ 인간의 가입 신청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잔인하게, 그리고 느긋하게 그 인간을 기다리고 있었던 겁니다.


조용히,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기다렸습니다. 올 것을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수협의 조합원들은 서로 정보를 공유하며 친목을 도모했습니다. 제가 기획한 공식적인 모임이 있기 전까지 같은 지역에 사는 회원들은 서로 만났고, 개별적인 활동들을 했습니다.
그 활동들을 보고 있자니 미칠 것 같았습니다. 인간들은 그 활동을 동영상으로 만들어 공유했습니다.7) 하지만, 조용히,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참았습니다. 또 참았습니다. 수협의 명성이 서서히 인간들 틈 사이로 스며들었습니다. 그리고 퍼져나갔습니다. 멀리 멀리까지.


그리고 예상대로, 드디어 그 인간이 수협에 등장했습니다.
저에게 가입 여부를 묻는 메일이 왔습니다. 저는 그 인간에게 특별히 가입을 위해 진정성을 증명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야만 승인이 가능하다고 했습니다. 그 인간은 망설임 없이 동영상 하나를 보냈습니다. 망설임이 없는 행동, 그것이 그 인간이 지닌 악의 진정성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9.


딸의 모습이 담긴 동영상이었습니다.


그 인간의 시뻘건 성기가 기절한 딸의 몸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부터 시작하는 동영상이었습니다. 모든 것을 파괴하는 순간부터 시작하는 동영상. 딸은 놀라 몸을 일으켰습니다. 그러자 그 인간은 흥분의 미소를 지으며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딸은 움직임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했지만, 불가능했습니다.
조금씩 움직이던 그 인간은 뭔가 느낌이 리얼하지 않다며, 자신의 성기를 덮고 있던 콘돔을 벗겨냈습니다. 빨간 콘돔을 집어 던지고 소리를 지르면서 미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더 흥분된 얼굴로 딸을 범했습니다.


피가 흘렀습니다.
딸의 몸에서 피가 흘러내렸습니다.
시뻘건 피가 딸의 몸을 타고 주르르 흘러내렸습니다.


하지만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 인간은 피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하던 행위를 이어 갔습니다. 더 격하게, 더욱 강렬하게, 더더더욱 잔인하게.
사정을 한 후, 바닥에 떨어진 피와 정액을 보고, 욕 한마디를 내뱉고, 딸의 목덜미를 잡아 개수대로 집어 던졌습니다. 입과 다리를 묶인 채로 성기에서 피를 흘리던 딸은 그렇게 내팽개쳐졌습니다.


그 인간은 물티슈로 자신의 성기를 대충 닦고 바지를 올렸습니다.
동영상은 거기서 끝났습니다.

7) 《디스패치뉴스》 2016년 2월 4일자 “반려견 성폭행하며 영상 촬영…인면수심 동물학대男”
https://www.dispatch.co.kr/462578


진정성이 충분히 느껴졌습니다.
인간의 진정성이 느껴지는 동영상이었습니다.
그 진정성이 차고도 넘쳐서 분노를 불렀습니다.
저는 바로 그 인간에게 가입이 완벽하게 승인되었다고 했습니다.
특별히 환영의 말도 남겼습니다. 조합원들에게도 특별한 분이 함께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첫 번째 공식 모임의 장소와 날짜를 말해 주면서 반드시 참석하라고 통보했습니다. 그 인간뿐만 아니라 회원 모두에게 재공지를 했습니다.



10.


- 파티에 참석해 주세요. 마흔 자리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선착순이 아니고, 선별합니다. 선별 기준은 ‘진정성’입니다. 본인이 반드시 초대를 받아야 하는 특별한 인간임을 증명해 보세요.


일부 회원들은 저의 독단적인 선별에 대해 반발을 했지만, 대부분은 자신의 특별함을 갖가지 방법으로 증명하려고 노력했습니다.
두 마리와 한꺼번에 관계를 가졌다고 주장하며 성기가 벌겋게 부풀어 오른 두 마리의 강아지 사진을 보낸 인간, 포유류는 물론이고 조류까지 섭렵했다면서 처참하게 당한 새들의 사진을 모아 보낸 인간, 북유럽에 가서 직접 체험한 ‘짐승섹스관광’을 구구절절 설명한 뒤, 성매매 비용을 지불한 뒤 영수증도 받았다며 1,000크로네(Krone)짜리 영수증을 스캔해서 보낸 인간, 개보다는 고양이가 좋다면서 나체로 고양이 수십 마리와 침대에서 뒹구는 영상을 보낸 인간, 구강성교까지 가능하다면서 자신이 돼지의 성기를 핥는 사진을 보낸 인간, 짐승과의 관계가 남성만의 전유물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하며 자신의 조랑말 파트너 사진을 보낸 여성, 다들 ‘쪼이는’ 맛이 좋아 치와와를 좋아하지만 자신은 종을 가리지 않는다고 주장하며, 그 이유가 자신의 성기가 충분히 거대하기 때문이라면서 성기 사진을 찍어 보낸 인간까지.


인간들의 구구절절함을 읽는 동안 몸과 마음이 부들부들 떨렸지만 참았습니다.
냉정하게 ‘그 인간’을 포함해 마흔 명을 뽑아 첫 파티에 초대할 명단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한 인간, 한 인간에게 정성스럽게 초청장을 보냈습니다.



11.


특히, 그 인간에게는 원래 약속된 시간보다 조금 일찍 오라고 말했습니다.
특별한 분이시니 특별한 ‘맛’을 먼저, 따로 보여드리고 싶다고 했습니다. 조용히 들어오셔서 느낌이 가는 대로 맛을 보시면 된다고 했습니다.
다른 인간들에게는 절대 약속 시간 전에 오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건 일종의 규칙 위반, 반칙 같은 것이라고 엄중하게 경고했습니다.


저는 그 인간을 먼저 보고 싶었습니다.
단둘이 있고 싶었습니다.


약속된 날짜가 되었습니다. 정해진 카페에서 그 인간과 다른 인간들을 기다렸습니다.


지시대로 그 인간은 30분 일찍 왔습니다.
약간 긴장한 얼굴로 카페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빈 카페를 둘러보더니 안도하는 표정을 지었습니다. 그리고 준비된 특수 콘돔을 보더니 씩 웃으며 바지를 내렸습니다. 성기는 이미 발기된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그 인간은 준비된 콘돔이 아닌, 자신의 파우치 속의 노란 콘돔을 착용했습니다.


- 레몬향! 좋네!



12.


저는 침대에 얌전히 앉아 죽은 척 기다렸습니다. 그 인간이 저를 알아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조금 떨리기도 했습니다. 역겨운 레몬향이 느껴졌지만, 참았습니다.
콘돔을 낀 그 인간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저를 발견했습니다.
묶여 있지 않은 모습을 보더니 다소 당황한 표정을 짓더군요. 저는 일부러 더욱 얌전한 척을 했습니다. 미동도 하지 않고 그 인간이 다가오기만을 기다렸습니다.


분노가 차올랐지만, 제 얼굴에는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저는 표정이 없으니까요.
욕을 마구 했지만, 입 밖으로는 아무런 소리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저는 찍소리 못 내는 짐승이 되었으니까요.


그 인간은 다가왔고, 제가 움직이지 않자 안도의 표정을 지으며 제 엉덩이를 툭 쳤습니다. 저는 아주 천천히 고개를 돌렸습니다. 무표정하게 말이죠.
그 순간, 그 인간의 미소를 잊을 수가 없습니다.
콘돔 속에서 팽팽하게 부풀어 있던 성기도 머릿속에서 지울 수 없습니다.


진짜 행복한 미소였습니다.
진짜 흥분한 성기였습니다.


저는 무표정하게 그 ‘진짜’를 찢어버리고 싶었습니다. 아주 무심하게 말입니다. 진정 태연하게 말입니다. 그 인간은 제가 자신과 같은 성(性)임을 확인하더니, 활짝 웃으며 “오호라 정말 특별한 맛인데”라고 한마디 하더니, 제 항문 주위를 만지작거렸습니다. 그러더니 갑자기 손가락을 항문 안으로 쑤셔 넣었습니다. 숨이 꽉 막혔습니다.



13.


바로 그 순간, 저는 뛰어올랐습니다. 힘차게 뛰어올랐습니다.
그 인간의 목까지 단숨에 뛰어올랐습니다.


빠르고 정확하게 목덜미를 꽉 하고 물었습니다. 날카로운 이빨이 부드러운 목살을 폭 하고 뚫었습니다. 목에 구멍이 뽕하고 났고, 그 구멍에서 피가 퐁퐁 솟구쳤습니다. 쫘악 아름답게 피어오르는 붉은 꽃과 같았습니다. 어둠을 밝히는 폭죽과 같았습니다. 눈이 부셨어요.


그 인간은 아프다고 오만상을 썼지만, 소리를 꽥꽥 지르면서 나뒹굴었지만, 아파 보이지도 불쌍해 보이지도 않았습니다. 괴성은 귀를 즐겁게 했어요. 콘돔 속 성기는 여전히 거대한 상태였습니다.
저는 발톱으로 그 인간의 눈알을 뽑아버렸습니다. 하나를 뽑고, 나머지 하나도 뽑았습니다. 인간의 눈알은 생각보다 컸지만, 생각보다 잘 뽑혔습니다. 그리고 눈알을 짓밟았습니다. 빠지직거리는 소리가 났습니다. 그렇게 경쾌할 수가 없었습니다. 발바닥에 느껴지는 물컹하며 터지는 촉감이 정말 좋았습니다. 터진 눈알이 바닥을 더럽혔지만, 바닥의 얼룩도 아름다워 보였습니다.


그 경쾌한 아름다움이 참 좋았습니다.


목을 물어뜯었을 때는 발작을 하며 날뛰더니, 눈알까지 빼버리자 바닥에서 간신히 파닥거릴 뿐이었습니다. 움직일 기력도 없었던지 간신히 쌕쌕거리며 숨만 쉬고 있었습니다.
그 인간의 성기는 여전히 발기된 상태였습니다.


잠시 뒤, 다른 인간들이 들어왔습니다. 인간들은 그 인간을 보고 크게 놀란 것 같았습니다. 웅성거렸습니다. 저는 그 뒤로 인간들이 거기서 무슨 짓을 했는지 모릅니다. 인간들의 다리 사이로 조용히 카페를 빠져나왔으니까요.


참, 나오는 길에 카페에 불 지르는 일도 잊지 않고 했습니다.
물론, 불을 지르고 문도 단단히 걸어 잠그는 것도 잊지 않았습니다.


저는 인간적인 실천력이 있는 짐승이니까요.
하지만 여전히 말 못하는 짐승입니다.


아시다시피,
‘멍멍’도 못 하고,
‘왈왈’도 못 하고,
‘꿀꿀’도 못 하고,
‘야옹’도 못 하고,
심지어 ‘바우와우(bowwow)’도 못 하고,
물론 ‘미야우(meow)’도 못 하고, ‘오잉크(oink)’도 못 합니다.


찍소리도 못 내는 짐승이지요.
소리뿐만 아닙니다. 표정도 없습니다.


터키시 앙고라(Turkish angora)처럼 뚱하면서 또랑또랑한 귀여움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러시안 블루(Russian Blue)와 같이 친구들에게는 따뜻한, 낯선 이들에게는 차가운 눈빛을 구별해서 보내지도 못합니다. 스코티시 폴드(Scottish fold)처럼 두 귀를 접어 시큰둥한 표정을 지으며 누군가를 호기심에 빠지게 할 줄도 모르죠.


그렇습니다.
저는 여전히 그저 그런 ‘말 못하는 짐승’입니다.
인간의 언어로 정의하자면, 짐승이란 “몸에 털이 나고 네 발을 가진 동물”입니다.











강병융(Kang Byoung Yoong)
작가소개 / 강병융(Kang Byoung Yoong)
그림 : Danny Im

2013년부터 슬로베니아 류블랴나에 살고 있다.
명지대학교와 모스크바국립대학교에서 문학을 공부했고, 현재 류블랴나대학교 아시아학과 교수이다.
장편소설 『상상 인간 이야기』, 『Y씨의 거세에 관한 잡스러운 기록지』, 『나는 빅또르 최다』, 『손가락이 간질간질』, 소설집 『무진장』, 『여러분, 이거 다 거짓말인 거 아시죠?』 , 에세이 『아내를 닮은 도시』, 『사랑해도 너무 사랑해』, 『도시를 걷는 문장들』 등을 펴냈다.


《문장웹진 2022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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