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소다 낙뢰
- 작성일 2022-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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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식소다 낙뢰
양기연
미로 뒤 통로엔 방치된 튤립 두 송이가 있다. 초기 안보다 규모를 줄이면서 낙오된 조형물이다. 잎도 없다. 이 미터가 넘는 목조 뼈대와 노란 플라스틱 꽃송이뿐이다. 한쪽에 바짝 몸을 붙여 걸으면 일직선으로 통근이 가능하지만 부러 그 사이를 걷는다. 즐거운 비명과 돌림노래처럼 뒤섞인 테마송 소리가 조금씩 가까워졌다. 몇 주간 오픈만 했더니 소란스러운 출근길이 낯설었다.
목공방 뒤 직원용 화장실에 들렀다. 입구 바로 옆에 세면대 두 개, 정면 칸막이 너머 소변기 두 개. 마지막으로 왼쪽에 좌변기 세 개. 모조리 문이 닫혀 있었다. 살이 섞이는 소리, 달아오른 체취, 지린내, 비린내, 그리고 두더지탈…… 닫힌 문을 볼 때마다 온갖 기억이 머릿속을 침범한다. 그중 가장 큰 비중은 두더지 인형탈이 좌변기에 앉아 있는 모습이다. 머리는 물통 위에, 몸통은 변기 뚜껑 위에, 신발은 가지런히 바닥에. 투명 고글 너머 작고 검은 눈과 마주쳤던 순간을 떠올린다. 한쪽 장갑에 두 번 접힌 종이쪽지가 들어 있었다.
차례대로 좌변기 칸의 문을 밀쳤다. 정작 안에는 아무것도 없다. 그런데도 후두부가 조이듯 아픈 건 빛 때문이다. 칸마다 달린 LED 전구알들. 흰색 변기가 무대 위 주인공처럼 반짝였다.
휴대폰 알람이 울렸다. 팔만 이천이십 원 출금. 전세대출금 이자를 내는 날이었다. 탈의실로 향하며 통장 잔고를 확인했다. 이번에도 전 애인은 관리비를 입금하지 않았다. 잔액을 보며 25일에 날아올 각종 고지서의 예상금액을 셈해 보다가 관뒀다. 출근할 시간이었다.
상자에서 두더지 인형탈을 꺼냈다. 먼저 아이보리색 장갑을 꼈다. 두꺼운 몸통을 입은 후에는 두 손을 맞잡는 일이 쉽지 않았다. 갈색 몸통을 집어드는데, 일반 캐스트들이 들어왔다. 눈이 마주치지 않도록 고개를 숙이고 어깨끈을 정리했다. 캐스트들은 한쪽에 모여 앉아 잡담을 나눴다. 어젯밤 강도사건이 화제였다. 이번엔 바로 옆 사펑빌리지 NPC 캐스트가 당했다. 범인은 할인 쿠폰과 궁사 아이템을 대거 훔쳐 달아났다. 한산한 오전 시간대라 목격자도 없었다. 넘어진 캐스트는 넓적하고 네모난 로봇 몸통을 가누느라 뒷모습조차 보지 못했다. 그래서 이번에도 검거가 어려울 것 같다는 이야기였다.
세계를 구해 줄 용사를 찾습니다!
펜타랜드의 캐치프레이즈다. RPG 콘셉트의 테마파크로 네 개의 구역이 있다. 사이버 빌리지, 스팀 빌리지, 디 빌리지, 페어리테일 빌리지. 구역마다 콘셉트는 달랐지만 멸망하는 세계를 구해야 한다는 기본 전제는 같았다. 방문객들은 세상을 구할 용사로서 원하는 직업을 선택한다. 직업별 아이템을 가지고 각종 어트랙션 탑승 및 체험을 하며 경험치를 쌓는다. 인형탈을 쓴 NPC 역할의 캐스트에게서 미션을 받아 보너스 경험치를 쌓을 수도 있다. 사실 어트랙션은 다른 테마파크와 크게 차이가 없었다. 다만 구역마다 다른 분위기로 건물, 상점, 숙소가 하나의 마을처럼 조성되어 그 리얼함이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몇 달 전 어린이 감전사고가 일어나면서 방문율이 대폭 감소했다. 펜타랜드는 반값 이벤트도 열고 디 빌리지 지하에 새롭게 주점도 열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주요한 대책은 코스튬 이벤트였다. 마법 지팡이 외엔 모두 유료였던 상품들을 대여에 한해 무료로 지급했다. 조금씩 매출이 회복되던 중 소소한 문제가 생겼다. 코스튬의 익명성을 빌려 몇몇 고객들이 NPC 캐스트를 덮치기 시작했다. 50레벨에만 지급하는 오십 퍼센트 할인쿠폰이 목적이었다. 숙소나 주점에서 사용하기 위해서였다. 초기 펜타랜드는 범인에게 출입금지를 내리는 선에서 조용히 덮으려 했다. 감전사고의 여파로 조심해야 할 때였다. 그러나 한 캐스트가 기물에 머리를 부딪치면서 결국 법적 강경 대응 공지문을 올렸다.
그러자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일이 흘러갔다. 사건이 수면 위로 떠오르면서 강탈이 만연해졌다. 틱톡에 올라온 ‘펜타랜드 GTA’라는 제목의 동영상이 시발점이었다. 강도사건은 펜지타라는 이름으로 챌린지화 되어 유행했다. 범행 대상은 오로지 인형탈을 쓴 NPC 캐스트들이었는데, 인형탈이 그들을 보호해 주니 괜찮다고 어떤 유튜버는 말했다. 그때부터 할인쿠폰은 부차적인 전리품이 됐다. 오로지 재미와 스릴만이 목적이었다.
방문객이 훌쩍 늘었다. 펜타랜드는 캐스트들에게 머리보호대를 지급했다. 검거율은 저조했다. 경중이 다소 무거운 강도는 법적으로 처벌했지만, NPC가 다치지 않은 사건은 갈취품을 수거하고 한 달 입장 금지를 내리는 선에서 끝냈다. 캐스트들 사이에서는 소문이 돌았다. 코스튬 때문에 특정이 어렵다는 말은 거짓이고, 의도적인 방임이라는 이야기였다.
몸통에 다리부터 집어넣고 팔을 넣었다. 익숙한 악취가 올라왔다. 몇 주 내내 차고 있던 깁스 속 살내 같은 시큼한 냄새. 마지막으로 머리보호대를 착용한 뒤 머리를 뒤집어썼다. 두더지탈은 눈이 아닌 주둥이에 시야 확보 구멍이 있었다. 내 눈과 위치가 맞지 않아 꼭 한쪽 눈을 감아야만 밖이 보였다. 가만히 앉아 좁고 어두워진 시야에 적응했다. 조금씩 밖이 선명해졌다.
천진우한테 연락했더니 안 받는다더라. 진짜 뭐 있나 봐.
그 말을 하는 캐스트의 목소리가 은근했다. 천진우. 줄곧 기다리던 이름이었다. 곧 화제는 다른 이야기로 넘어갔다. 나는 탈의실을 나섰다. 폐쇄된 목공방을 지나자 밖은 그새 해가 지고 있었다.
펜지타 시초의 범인은 천진우다. 이런 소문이 돌기 시작한 건 목격자로 나선 한 캐스트의 증언 때문이었다. 20대 초반 슬랜더 체형의 남성. 키는 180cm 후반. 밝은 갈색 머리. 반팔 티 밑으로 보이는 왼팔의 붉은 자국. 그 자국이 결정적인 증거였다.
부당해고를 당했으니 엿을 먹이려는 거다, 억울할 만도 하다, 자기만 죽기 싫었던 거다…… 사실은 감전사고도 의도적이었던 건 아닐까? 억울한 천진우의 분풀이라는 추측으로 시작된 소문은 마구잡이로 뻗어 나갔다. 원래부터 양아치 같은 놈이고 사생활도 난잡하며 퇴사한 S도 C도 사실은 천진우가 원인이고…… 그 말대로라면 온갖 사건사고의 원인이 천진우였다.
천진우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처음에는 굳게 확신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흔들렸다. 나는 펜타랜드 밖 천진우에 대해 거의 알지 못한다. 사는 동네도, 다니는 학교도 몰랐다. 어쩌면…… 천진우일지도.
나는 페스츄리 같은 사람이었어요. 겹겹이 소문에 짓눌려 살았거든요.
의심이 싹틀 때마다 나는 활시위에 유약을 바르던 손을 떠올렸다. 붓을 천천히 움직이며 천진우는 말했다. 툭툭 어깨나 머리를 밀치며 진위를 물어 보는 무리도 있었다고. 그때마다 항상 사실을 밝혔지만, 그들은 믿지 않았다. 천진우의 이야기는 단순하고 명확했다. 그러나 그건 그들이 원하는 진실이 아니었다.
미로 내부 중정이 내 기본 위치였다. 석순처럼 생긴 아이템 보관소 옆이다. 미로 입구를 통과했다. 인조잔디가 깔린 바닥은 언제나 축축하다. 운영시간 내내 안개를 분사하는 데다가 거대한 튤립 꽃송이들에 가려져 햇빛이 잘 들지 않아서다. 벌써 교대시간이 다 됐는지 튤립 속 전구에 불이 들어왔다. 바닥이 분홍색과 노란색으로 어지럽게 물들었다. 번갈아 눈을 감으며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코너를 돌던 순간이었다. 좁은 격자무늬 시야로 노을 진 하늘이 가득 찼다. 둥그런 두더지 배 위가 묵직해졌다. 그제야 누가 날 밀쳤고 내가 뒤로 넘어갔음을 알았다. 펜지타다. 내가 펜지타의 표적이 됐다. 팔다리를 버둥거리자 뭉툭하고 좁은 것이 왼팔을 짓눌렀다. 주둥이 구멍 사이로 목검 손잡이가 보였다. 리히텐베르크 무늬가 새겨져 있었다. 범인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확인하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선 인형탈을 벗어야 했다. 있는 힘껏 온몸을 비틀었다. 범인이 체중을 실어 날 짓눌렀다. 몸통 앞주머니를 마구 뒤적이는 손길이 느껴졌다. 아직 교대 전이라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범인이 벌떡 일어나 도망쳤다.
빠르게 몸을 굴려 바닥을 짚고 일어났다. 한쪽 눈을 감고 범인의 행방을 찾았다. 검은 모자를 쓴 남자였다. 남자는 목검으로 잎사귀 사이를 미친 듯이 내려치고 있었다. 튤립은 꽃잎부터 잎까지 모두 목조로 만들어졌다. 뚫릴 리가 없었다. 벽을 통과할 수 있으면 미로가 아니었다. 비웃으며 다가가려는데, 뚫렸다. 남자가 사이를 비집고 사라졌다. 초록색 나뭇조각이 우수수 떨어졌다. 뒷모습만 봐도 천진우보다 작고 말랐다. 하지만…… 아직 얼굴을 확인하지 못했다. 틈새로 검은 모자가 점차 멀어져 갔다.
나는 부서진 틈새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
문 좀 닫고 다녀요. 탄내 들어가니까.
첫 대화의 시작은 천진우의 핀잔이었다. 수없이 탈의실을 들락거렸는데도 목공방 캐스트를 제대로 본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점프슈트를 입고 목에 투명 고글을 걸친 남자. 대충 고개만 끄덕이고 목공방을 지나 탈의실로 들어갔다. 뒤로 문을 밀긴 했는데, 완전히 닫지는 못했다. 그날 이후 꽉 닫힌 문만 보면 숨이 막혔다.
의자에 앉아 로커에 몸을 기댔다. 아직 봄의 끝자락이라 에어컨이 켜지지 않았다. 온몸이 땀에 절었다. 등이 후끈거렸지만 여기선 옷을 갈아입을 수 없었다. 기숙사에서부터 인형탈을 입고 출근하기 때문이었다. 퇴근해야 하는데, 일어날 힘이 없었다. 밥도 먹기 싫었다. 유난히 햇볕이 뜨거웠던 날이었다.
목 부근을 펄럭이며 앉아 있는데, 천진우가 들어왔다. 아마 직접 문을 닫기 위해서였거나 한 번 더 핀잔을 주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격자무늬 너머 눈이 마주쳤다. 금방이라도 한마디 할 것처럼 벌어졌던 입술이 닫혔다. 잠시 날 바라보던 천진우는 말없이 물을 떠왔다.
덥죠.
네.
나가요. 목공방은 에어컨 켜져요.
멍하니 올려다봤다. 천진우가 장갑 끝을 살짝 쥐고 끌어당겼다. 기왕 잡은 거 좀 벗겨 달라 했더니 어이없다는 듯 작게 웃으며 그렇게 해줬다.
천진우의 안내를 따라 작업대 옆에 앉았다. 바로 위에 달린 환풍구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돌아갔다. 손에 닿는 공기가 시원했지만 인형탈 안은 여전했다. 너무 더워서 벗을까 잠시 고민하다가 관뒀다. 잠깐만 앉아 있다 갈 거였다. 굳이 맨얼굴을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
고객 닉네임이 붙은 마법 지팡이, 활, 목검들이 한쪽에 순서대로 놓여 있었다. 천진우가 맨 앞 단도 크기의 목검을 도마 위에 올렸다. 젖은 붓으로 날만 흠뻑 적시고 끝에 살짝 못을 박았다.
고압이니까 조심해요. 요즘 얘가 말썽이에요.
트랜지스터 가동 버튼을 누르며 천진우가 말했다. 탄내와 함께 포도송이 같은 무늬가 새겨졌다. 표피가 벗겨지는 것처럼 갈라지는 끝부분이 빨갛게 반짝거렸다. 리히텐베르크 무늬. 지나가며 결과물만 구경했지 작업 과정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천진우는 넓은 붓으로 이따금 무언가를 펴 발랐다. 방향을 지시하는 것처럼 그쪽으로만 무늬가 뻗어 나갔다.
그건 뭐예요?
유약이요. 식소다 용해한 거.
왜 바르는데요?
일시적으로 전류가 통할 수 있게 만들어 주는 거죠. 나무는 절연체잖아요. 그래서 고압을 넣어도 일직선으로 전류가 흐르지 못해요. 무늬가 나뭇가지 같죠?
그나마 잘 통하는 곳으로 뻗어 나가느라 그래요.
그렇군요.
언제 저녁에 휴게 있는 날 있어요?
왜요?
또 와서 봐요. 저녁엔 자국 빨갛게 잘 보여요. 멍 때리기 좋아요. 그땐 탈도 벗고요. 덥잖아요.
그렇게 말하면서 천진우가 씩 웃었다.
마침 다음날이 미들 근무였다. 천진우는 이번엔 화살대에 무늬를 새기고 있었다. 전날과 달리 고글을 쓰고 있었다. 리히텐베르크 빛이 비친 안경알이 분홍색으로 물들었다. 작업을 방해하면 안 될 것 같아 입구에 서서 가만히 기다렸다. 트랜지스터, 환풍구, 미로 입구 스피커에서 들리는 페테 빌리지 테마송, 상점 전용 테마송이 뒤섞여 소음이 가득한데도 천진우 주변만 왠지 고요했다. 천진우는 그런 분위기가 있었다. 과묵한 성격은 아니지만 산만하거나 방정맞아 보이지 않는.
날 발견한 천진우가 움찔 놀랐다. 슬쩍 손을 들어 올려 인사했다.
저녁에 보니까 무섭네요. 인형 눈이 너무 작아. 앞은 어떻게 봐요?
입으로요.
가슴을 쓸어내리며 천진우가 너스레를 떨었다. 잠시 고민하다가 인형탈을 벗었다. 에어컨 바람이 닿자 땀에 젖은 피부가 따끔거렸다. 떡진 머리부터 상기된 얼굴까지, 엉망일 꼴이 신경 쓰였다. 좀 머쓱해서 잠깐 다른 곳을 봤다. 천진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리 오라는 듯 손만 흔들었다.
앉아요.
뒤쪽 보조 조명을 제외하고 모든 불이 꺼졌다. 전면 창으로 들어오는 가로등 빛 덕분에 깜깜하지는 않았다. 돌아온 천진우가 다시 트랜지스터를 가동했다.
낮보다 확실히 선명히 보였다. 리히텐베르크는 처음엔 빠르게 마구잡이로 뻗어 나갔다. 끝이 갈라지는 순간이 가장 빨랐다. 곧 두껍고 큰 중심 가지가 생기면서 속도는 조금씩 느려졌다. 중심은 마그마가 흐르는 길 같았다. 주변의 잔가지들도 반짝였지만 중심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천진우는 무늬가 끊이지 않도록 끊임없이 유약을 덧발랐다. 화살대 하나가 완성될 때까지, 그렇게 우리는 조용히 앉아 있었다.
그 후 근무가 겹치는 날마다 목공방에 갔다. 하지만 퇴근 시간이 같은 날에는 가지 않았다. 회식하러 가자거나 다 같이 다른 빌리지에 놀러 가자는 권유 때문이었다. 소외당하는 사람을 챙겨야 한다는 강박이라도 있나? 나는 계속 거절했다. 천진우는 별로 개의치 않는 눈치였다. 서운해 하지도 강요하지도 않았다. 그 덕에 관계가 불편하지 않았다. 확실히 천진우는 편한 사람이었지만…… 누가 됐든 긴 시간을 함께하는 게 아직 피곤하고 힘들었다. 삼십 분 혹은 한 시간이면 충분했다.
누나는 어쩌다 펜타랜드에서 일하게 됐어요?
……천진우 씨는요?
저는 이거 하고 싶어서요. 제가 사실 번개 맞은 적이 있거든요.
구라.
진짠데? 고등학생 때 비 오는 날 축구 하다가 맞았어요. 그래서 삼 년 내내 해리 천으로 불렸어요. 왼쪽 팔에 길게 번개 흉터가 남았거든요. 이거랑 비슷해요. 사람 몸도 절연체라서. 암튼 알바 찾다가 이거 보고 바로 지원했죠.
진짜로?
의외로 번개 맞고 살아남은 사람 많아요. 그래서 누나는 왜 하는데요. 인형탈 알바 힘들잖아요. 특히 여름에는 탈주자 엄청 많고, 요즘도 배정 바꿔 달라고 다들 난리라던데.
나는 전면 창 너머로 눈길을 돌렸다. ‘꽃의 나라’가 보였다. 거대한 분홍 튤립 안쪽이 생화 꽃밭으로 조성된 포토 스팟이었다. 튤립 밖에 삼각대가 서 있었다. 꽃밭에서 팔짱을 끼고 나온 커플이 사진을 확인했다. 그걸 지켜보다가 충동적으로 입을 열었다.
나는 전 남친 때문에요. 그 개새끼가 내 집에서 딴 년이랑 섹스 하는 걸 봐버렸거든요. 차마 그 집에서 살 수가 없어서 숙식 되는 데 찾다가 왔어요.
전세대출을 받아 투룸으로 이사를 했다. 자취를 시작한 이후 원룸을 벗어난 건 처음이었다. 홀로 집안 정리를 대강 끝낸 후에야 애인이 왔다. 이미 소원해진 관계였다. 애인은 내가 부동산 발품을 팔 때도 이삿짐을 싸고 옮길 때도 바쁘다는 핑계로 일절 도와주지 않았다. 그런 주제에 같이 살자는 말을 했다. 제 셋방보다 넓은 내 집이 좋아 보인 모양이었다. 월세 너무 비싸다, 전세 좋네, 나도 대출받을까. 은근하게 티를 낼 때는 최선을 다해 모르는 척했다. 침실 말고 나머지 방은 어떻게 할 거야, 나 들어와서 살까? 그런 소리도 모르는 척했더니 결국 직설적으로 동거를 말했다. 자신이 관리비를 부담하겠다 했다. 달갑지 않았지만, 나는 그 관계에 미련이 많았다. 거절하면 이대로 미적지근한 관계를 유지하다가 헤어지게 될 것 같았다. 그게 싫어서 받아들인 동거였다.
나는 원래 화장실 문을 잘 닫지 않았다. 창문이 없어 환기가 잘 안 됐다. 그날도 외출 전에 샤워를 하고 분명 활짝 열어 놓고 나왔다. 예상보다 이른 시간에 귀가했을 때, 문이 닫혀 있었다. 애인이 왔다 갔나. 다 마르기 전까진 문 좀 열어 놓으라니까. 그런 생각을 하며 어두운 거실을 지나 화장실로 향했다.
벌컥, 문을 열었다. 땀 냄새가 섞인 습기와 강렬한 백색등 빛이 쏟아져 나왔다. 그 속에서 애인의 벗은 등을 봤다. 그 옆으로 뻗은, 검은 스타킹을 신은 다리도. 얼마나 급했는지 미처 다 벗지 못한 바지가 허벅지에서 달랑거렸다.
아직도 의아한 건 그 광경을 직면하기 전까지 어떤 전조도 의심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현관에 놓인 다른 사람의 신발, 문틈으로 새어 나오던 불빛을 보고도 의문을 갖지 않았다. 신음은커녕 숨소리조차 듣지 못했다. 그 모든 징조를, 사정하며 움찔거리는 애인의 허벅지 근육을 망연히 바라보다 뒤늦게 벼락처럼 이해했다.
언젠가 우리는 헤어질 거고, 그 시점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가끔 나도 모르게 끝을 상상하고는 했다. 상상 속에서, 둘 중 누구도 울지 않았다. 우리는 날카로운 말로 서로를 공격하는 쪽이 어울렸다. 아마 좋은 이별 따위는 못 할 거라고, 그렇게 생각은 했지만. 이런 식은 예상에 없었다.
당장 나가랬더니 애인은 빌빌댔다. 셋방도 이미 뺐고, 돈도 없다며 한 번만 봐달라고. 헤어져도 되지만 어차피 각자 방이 있으니 같이 사는 건 문제없지 않냐면서.
결국 오빠를 불렀다. 내가 본가에 있는 동안, 오빠가 대신 애인을 내쫓고 비밀번호를 바꿨다. 다시 집으로 돌아갔을 때 애인의 물건은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도 도저히 거기서 먹고 자고 생활할 수가 없었다. 모아 둔 돈을 전세금에 다 넣어 당장 이사를 하는 것도 여의치 않았다. 본가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가족들에게 할 말이 없었다. 엄마는 내가 애인과 동거했다는 것조차 몰랐다. 오빠가 언제까지 비밀을 지켜 줄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숨길 수 있을 때까지 숨기고 싶었다.
나는 종일 모로 누워 화장실을 바라보았다. 그때 조명은 켜둘수록 더 밝아진다는 사실을 알았다. 꿈틀거리는 근육이 세세하게 다 보일 정도로 강렬했던 밝기. 그들은 얼마나 오래 있었던 걸까. 전 애인은 쫓겨나자마자 관리비 자동이체를 해지했다. 더 연체하면 단전하겠다는 고지문이 왔지만 나도 무시했다. 차라리 전기도 수도도 다 끊겼으면 했다. 그러던 중 펜타랜드 아르바이트를 발견했다. 2인실 십만 원. 식사 40회 제공.
그래서 내가 만날 문 열고 다니는 거예요. 닫혀 있으면 안에서 그 새끼들이 또 섹스하고 있을 것 같거든요. 잊으려고 할수록 더 또렷해져요. 차라리 화장실에서 시체라도 발견했으면 좋겠어. 그럼 그것만 생각나겠죠.
삼각대를 정리하고 커플은 미로로 걸음을 옮겼다. 천진우는 대답이 없었다. 다 뱉어버리자 후회가 밀려왔다. 뭐가 자랑이라고 말했을까. 어쩌면 천진우의 제안을 계속 거절하는 이유에 대해 변명하고 싶었던 걸지도 몰랐다. 전혀 변명이 된 것 같진 않지만. 어색하게 소리 내어 웃으며 슬쩍 천진우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언제부터 날 바라보고 있었던 걸까. 바로 눈이 마주쳤다.
나도 뭐 하나 말해 줄까요.
뭔데요.
벼락 맞은 남자의 대표적인 부작용이 있어요. 나 발기부전이에요.
진짜로?
진짜로.
천진우가 능글맞게 웃으며 어깨와 눈썹을 동시에 들썩였다. 벼락 맞았다는 소리부터 발기부전까지 다 믿기지 않았지만, 어쨌든 날 위로하려는 것 같아 나도 어깨를 으쓱이다가 웃어버렸다.
*
두꺼운 몸통이 이토록 원망스러운 적이 없었다. 팔과 어깨는 들어갔는데 배에서 걸렸다. 남자는 점점 멀어져 갔다. 틈새에서 몸을 빼고 미로를 달렸다. 나는 눈 감고도 미로를 돌아다닐 수 있었다. 남자가 사라진 방향은 막다른 길이었다. 왼쪽 코너를 돌자 또 노란 튤립 이파리를 헤집고 있는 뒷모습이 보였다. 아까가 요행이었다. 원래라면 뚫리지 않는 게 당연했다.
팔을 잡고 돌려 얼굴을 확인하려고 했는데, 속도를 줄이지 못하고 넘어지면서 남자를 깔아뭉갰다. 비키라며 악쓰는 남자를 짓눌렀다. 모자를 벗겼다. 검은 머리. 전혀 다른 얼굴. 젊은 남성이라는 점을 제외하고는 닮은 점 하나 없었다. 애초부터 난 소문을 믿은 적 없었다. 천진우는 그럴 사람이 아니다. 알고 있으면서 난 뭘 확인하고 싶었던 걸까.
나와 교대 예정이던 근무자가 소란을 듣고 달려왔다. 안전관리팀도 출동했다. 나는 그때까지 남자를 짓누르고 있었다. 요원들이 범인을 끌고 갔다. 현장에서 잡힌 데다 기물 파손까지 했으니 법적 처벌을 면치 못할 듯했다. 내게는 일단 의무실에 가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직원 의무실은 기숙사에 있었다.
천진우가 해고된 후 튤립 목공방은 폐쇄되었다. 중요한 기구들과 전시 상품들은 모조리 다른 공방으로 흩어졌다. 전면 창으로 노을빛이 들어왔다. 텅 빈 작업대와 가구들만 은은하게 빛났다. 리히텐베르크 무늬를 기다리는 온갖 아이템들도, 이미 새겨진 전시상품도, 트랜지스터도, 펜치도 없었다. 장검이 걸려 있던 안쪽 벽에 남은 자국이 유일한 흔적이었다. 조용하고 낯설었다. 두더지 머리를 벗어 작업대에 내려놨다. 먼지 쌓인 작업대를 쓸어 보다가 서랍을 열었다. 못 몇 개가 굴러다녔다. 유약통도 하나 있었다.
목공방을 자주 드나들면서 종종 작업을 도왔다. 그날도 나란히 앉아 천진우는 지팡이, 나는 목검에 유약을 바르고 있었다.
천진우 씨네 방은, 화장실에서 냄새 안 나요?
입사부터 쭉 함께했던 룸메이트가 나간 뒤, 화장실에서 이상한 냄새가 났다. 문을 닫지 못하니 방에서도 악취가 진동했다. 창문을 종일 열어 놔도 사라지지 않았다. 사감실에 문의하자 하수구 문제라며 청소하라는 답변만 돌아왔다.
무슨 냄새요? 담배 냄새는 가끔 올라오던데.
구정물 냄새요. 걸레 냄새 같은 거. 청소해 봤는데도 계속 냄새가 올라오네요.
우리는 안 나는데…… 수도관 문제 아니에요? 그거 식소다랑 식초 사서 뿌리고 뜨거운 물로 청소하면 좀 괜찮아져요.
그래요?
진짠데.
배수구 클리너로도 해결되지 않았다. 고작 그런 걸로 악취가 사라질 것 같진 않았다. 내가 의심하자 부루퉁한 표정을 짓던 천진우는 탈의실에 인형탈을 놓고 가라고 했다.
늦은 밤, 노크 소리에 문을 열었다. 두더지가 있었다. 놀라서 비명을 지르려는데 두더지가 내 입을 막았다. 아이보리색 장갑과 몸통 사이, 팔목이 훤히 드러났다. 여자 키에 맞춰진 탈이라 다리도 마찬가지였다. 방으로 들어온 두더지가 머리 탈을 벗었다. 천진우였다. 앞주머니에서 식초와 유약이 나왔다. 편의점에 식초가 없어 식당 이모에게 얻어왔다면서 천진우가 씩 웃었다.
누나는 여기 언제까지 할 거예요?
집 나가고…… 전세금 돌려받으면 그만둬야죠.
나는 20개월 꽉 채우려고요. 그럼 누나가 먼저 그만둘 수도 있겠네. 아쉽다.
바닥 하수구와 세면대에 식소다와 식초를 부었다. 뜨거운 물은 십 분 후에 부어야 했다. 우리는 옆방에 들릴까 봐 작은 목소리로 소곤대며 얘기를 나눴다. 뜨거운 물을 붓고 나니 정말 냄새가 옅어졌다. 대신 식초 냄새가 조금 났다. 다시 몸을 구겨 두더지 인형탈을 쓰고 천진우는 돌아갔다.
그날 밤 나는 밀려 있던 관리비를 해결했다. 그 집에 다시 돌아가 살지는 않을 거지만 언제나 머릿속 한편을 차지하고 있던 연체료를 없애고 싶었다. 대신 그 자리에 발목과 팔목이 훤히 드러난 두더지를 앉혔다.
유약을 꺼내 앞주머니에 넣고 서랍을 닫았다. 탈의실에 두더지 머리만 내려놓고 의무실로 향했다. 두 개의 튤립 사이를 통과했다. 천진우와 함께 출근하던 날 알게 된 그의 버릇. 시큼한 냄새가 코끝을 맴돌았다. 인형탈 세탁 주기는 보통 육 개월에 한 번이었다. 전에는 남의 땀과 체취가 고스란히 밴 탈을 입는 것이 달갑지 않았다. 나는 적어도 한 달에 한 번 세탁해 달라는 건의를 주기적으로 넣어 왔다. 멈춘 것은 천진우가 해고당한 이후부터다. 여전히 역겹지만, 그 속에 천진우의 흔적이 섞여 있다는 생각을 하면…… 참을 만해졌다.
혹시 모르니 오늘은 퇴근하라는 진단이 내려졌다. 나는 지금이라도 교대하겠다고 했다. 등과 어깨가 조금 아팠지만 일하지 못할 만큼은 아니었다. 일하는 게 편했다. 쉬고 있으면 온갖 잡념 때문에 오히려 괴로웠다.
미로로 돌아가 평소대로 근무했다. 주로 아이템 보관소 옆에 우뚝 서서 고객들을 상대한다. 숨겨진 두더지굴에 대한 힌트를 주고, 미션 달성 조건을 제대로 수행했는지 확인하고, 보상으로 스티커를 건넨다. 한가해지면 근처 미로를 순찰한다. 고객들과 마주치면 손을 잡고 중정으로 안내한다. 막다른 구석에서 과한 스킨십을 하는 커플들을 단속한다. 두더지굴 속 기계 두더지도 확인한다. 다른 날과 같았다. 끊임없이 천진우 생각을 하고 있다는 점 역시도.
*
내 퇴근과 천진우의 휴게 시간이 겹친 날이었다. 함께 점심을 먹자는 제안에 처음으로 응했다. 조금 일찍 찾은 목공방은 텅 비어 있었다. 천진우의 점프슈트가 의자에 걸쳐져 있었다. 일단 탈을 벗고 휴대폰을 확인했다. 별다른 연락은 없었다. 일단 땀에 전 손을 씻고 세수하고 싶었다. 화장실 안으로 들어서자 담배 냄새가 났다. 뒤쪽은 캐스트들의 암묵적인 흡연구역이었다. 혹시 천진우일까. 비누로 손과 얼굴을 씻고 화장실 뒤편으로 향했다.
천진우였다. 벽에 비스듬히 기대선 채 흡연 중이었다. 바람이 훅 불었다. 젖은 얼굴에 닿는 바람이 따뜻하고 건조했다. 여름의 초입이었다. 달콤한 나무 냄새와 담배 냄새가 났다.
어, 누나. 일찍 왔네요.
담배를 끄려는 걸 고갯짓으로 말리고 옆에 섰다. 사복 차림은 처음 봤다. 흰 무지 티에 청바지. 반팔 밑으로 드러난 왼팔에 진짜로 리히텐베르크 무늬가 있었다. 다가가 살폈다. 가까이서 보니 흉터가 아닌 타투 같았다. 천진우가 멋쩍게 웃으며 반팔을 걷어 올렸다.
이젠 없어요. 사실 그게 흉터라기보단 화상 자국이거든요. 평생 갈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빨리 없어지더라고요. 그게 싫어서 첫 월급 받자마자 똑같은 모양으로 타투 했어요.
……
이 누나 또 안 믿네. 내가 그렇게 거짓말쟁이 같아요?
좀 그런 편이죠, 인상 같은 게.
억울하네. 어깨에는 흉터 조금 남았어요. 봐요.
천진우가 어깨를 낮췄다. 길게 이어진 붉은 타투 사이, 진짜 흉터가 있었다. 타투보다 조금 옅은 색이었다. 나도 모르게 그 위를 더듬었다. 깜짝 놀랐는데 아무 말 없기에 타투까지 만져 봤다. 타투는 매끄러웠고 흉터는 약간 튀어나와 있었다.
그럼 발기부전도 진짜예요?
……그것도 확인해 볼래요?
눈이 마주쳤다. 나는 잠시 고민했다. 성적 접촉을 거절한 뒤 찾아오는 어색한 기류를 알고 있었다. 거절하면, 아마 오늘 점심이 마지막이거나 아님 그것마저도 함께하지 못 할 수도 있었다. 한 번만. 다짐하며 바지춤으로 잠시 시선을 내렸다가, 고개를 저었다. 천진우가 싫지 않았다. 하지만 꿈틀거리는 벌거벗은 등과 엉덩이를 다시 마주할 자신이 아직 없었다.
여느 때와 같이 천진우는 별로 개의치 않았다. 나는 아니었다. 정적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사과했다. 바보 같은 짓이라는 걸 아는데도 입이 열렸다.
별걸 다. 누나, 제 별명이 해리 천이었다고 했잖아요. 사실 번개 흉터 말고도 이유가 하나 더 있어요. 내가 살아남은 아이거든요. 그때 친구도 옆에 있었는데…… 나만 살았어요. 나무토막과 인간의 차이점은 재생 능력이 있냐 없냐예요. 전 흉터가 평생 남길 바랐거든요? 근데 화상 치료받을수록 점점 없어지더라고. 아마 벼락 직격타로 맞았을 부분만 빼고요. 그럴수록 걔도 나한테서 점점 옅어지는 것 같아서 싫었어요.
그렇게 말하는 천진우의 얼굴은 덤덤했다. 눈이 마주치자 씩 웃기까지 했다. 나는 그 표정의 의미를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전혀 잊지 못한 사람이 숨기기 위해 짓는 미소. 여전히 조금은, 거짓말일지도 모른다고 여겼는데 진짜였다.
아무튼…… 나 누나한테 거짓말한 적 없어요.
……발기부전도?
네, 그것도.
그럼 넌 섹스 때문에 날 배신할 일은 없겠구나. 그런 생각을 했지만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우리는 발을 맞춰 두 개의 튤립 사이를 지그재그 통과했다. 기숙사 식당에서 천진우는 돈가스를, 나는 제육덮밥을 먹었다. 시간이 남아 근처 노점에서 츄러스를 하나 사 나눠 먹기도 했다. 우리는 점심시간을 꽉 채워 보내고 헤어졌다. 나는 기숙사로, 천진우는 다시 목공방으로.
그리고 그날 저녁 천진우는 해고되었다.
우리가 흡연구역에 있던 그때, 아이 한 명이 목공방에 몰래 들어갔다. 아이템들을 만지작거리던 작은 손이 펜치 끝에 닿았다. 하필 고장 난 트랜지스터였다. 아이는 그대로 감전됐다. 퇴근하던 캐스트가 발견하고 밀쳐냈지만, 응급실로 향하던 구급차 안에서 끝내 숨졌다. 고작 여덟 살짜리 아이가 펜타랜드에서 감전사고를 당해 사망했다는 소식이 대서특필됐다. 펜타랜드는 천진우를 책임자로 세워 해고했다. 전원을 꺼도 가끔 전류가 흐르니 고쳐 달라고, 천진우가 꾸준히 건의를 넣었던 사실은 숨겨졌다.
아이의 부모는 안전관리 소홀을 사유로 펜타랜드를 고소했다. 펜타랜드는 사고에 대한 보상금을 지급하겠다 했지만, 사망 책임은 인정하지 않았다. 목공방이 아닌 구급차 안에서 숨졌다는 이유였다. 나는 그 소식을 다음날 출근해서 알았다.
그 후 천진우와는 연락이 닿지 않았다. 부재중 통화 두 번과 ‘괜찮아?’로 시작하는, 읽히지 않은 카톡 하나가 우리의 마지막이었다.
*
마지막으로 미로를 순찰했다. 빠져나가지 못한 사람들을 모두 내보내고, 한 바퀴 더 확인했다. 중정으로 돌아와 보관소 문이 제대로 잠겼는지 체크했다. 퇴근 시간이었다.
부서진 벽에 ‘공사 중’ 팻말이 붙어 있었다. 나는 두더지 머리 탈을 벗고 그 앞에 내려놓았다. 단면은 알록달록한 조명에 물들어 있었다. 목검으로 잎사귀를 내려치던 남자의 뒷모습을 떠올렸다. 조형물이 허물어질 때 느낀 당혹감이 아직도 생생했다. 아주 나중에, 오늘을 회상할 때 아마도 그 장면이 가장 먼저 떠오르지 않을까.
천진우가 해고당한 다음날에도 나는 출근 전 화장실에 들렀다. 습관적으로 좌변기 칸을 열어젖혔다. 안에는 두더지 인형탈이 앉아 있었다. 인사라도 하는 것처럼, 한쪽 손이 몸통 구멍 안에 걸쳐져 있었다.
시체는 못 구했어요.
장갑 속 쪽지에는 그렇게 적혀 있었다. 천진우는 언제 이곳에 두더지를 앉혀 뒀을까. 목공방으로 돌아간 후 상황이 급박하게 전개됐을 텐데. 나는 펜타랜드 밖 천진우에 대해 거의 알지 못했다. 개인 연락처가 무용지물이 되자 내게 남겨진 건 무성한 소문과 그 쪽지 하나뿐이었다.
천진우는 어디서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흉터가 사라지는 게 싫었다며 웃던 얼굴과 왼팔의 붉은 타투가 어른거렸다. 내게 천진우는 나를 위해 두더지를 변기에 앉혀 놓고 간 사람이었다. 천진우를 감전사고로 기억하는 건 싫었다. 연락이 끊긴 이유 따위는 잊고 싶었다.
앞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뭉툭한 장갑 끝에 유약 통이 닿았다. 뚜껑을 열었다. 부서진 틈새에 유약을 모조리 부었다. 며칠 후면 틈새는 복구될 것이다.
그전에 이곳에 벼락이 떨어졌으면 했다. 식소다가 마르기 전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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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2022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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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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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리자
- 2025-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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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리자
- 2025-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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