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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의 방

  • 작성일 2017-03-01
  • 조회수 6,068

[단편소설]



조의 방



박상영



일을 마친 후 창문 앞에 서서 담배를 피웠다. 검은 유리창에 바니의 얼굴이 비쳤다. 노란 가발이 땀에 젖어 이마에 엉겨 붙어 있었다. 붉은 눈, 토끼 머리띠를 하고 있는 내 모습이 이제는 꽤 익숙했다. 콘솔 위에 올려놓았던 아이스커피를 들이켰다. 그래도 갈증이 가시지 않아 안에 있는 얼음까지 모조리 씹어 먹었다. 찬 커피를 마시고 나면 비로소 일이 끝났다는 기분이 들었다. 일을 마친 후 아이스커피를 마시는 게 습관처럼 굳었다.
남자가 몸을 뒤척이며 신음소리를 냈다. 침대 머리에 걸어 놓은 수갑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가방에서 열쇠를 꺼내 남자의 팔목에 감긴 수갑을 풀었다. 팔목에는 쓸린 자국이 나 있고, 등과 엉덩이에 푸르게 멍이 들어 있었다. 나는 그것을 노동의 증거라고 불렀다. 콘솔 위에 올려 둔 돈을 토트백에 넣고 객실 문을 열었다. 예약이 연달아 잡혀 시간이 촉박했다. 다행히 걸어서도 갈 수 있을 만큼 가까운 거리의 건물이었다.


오피스텔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곧바로 화장실 쪽으로 향했다. 로비에 앉은 경비원의 시선이 내 등을 좇는 게 느껴졌다. 나는 화장실 속 장애인 칸으로 들어가 닫힘 버튼을 눌렀다. 유리문이 닫혔다. 토트백을 선반에 내려놓자 노트북과 가발, 진갈색의 마 로프가 가방 밖으로 삐쭉 튀어나왔다. 나는 빠르게 가죽 옷을 벗어 가방에 집어넣고, 흰 원피스를 꺼내 입었다. 그리고 거울 앞에 서서 가발을 벗고 화장을 지웠다. 바니의 붉은 입술과 눈두덩의 펄이 빠르게 지워졌다. 이제 유나의 얼굴이 되어야 할 차례였다. 시간이 촉박했지만 다행히 유나는 간단한 메이크업만 하면 되는 캐릭터였다. 아이라인을 그리고, 핑크빛 아이섀도를 옅게 발랐다. 핀셋으로 인조 속눈썹을 집어 속눈썹 위에 붙였다. 접착제가 마르기를 기다린 후 렌즈 케이스에서 컬러 렌즈를 꺼내 동공에 올려놓았다. 눈을 몇 번 깜빡이자 청회색 눈동자가 드러났다. 잠시 거울을 바라보다 가방에서 긴 생머리 가발을 꺼내 썼다. 내 얼굴이지만 나와는 다른 사람이었다.
거울 속에 유나가 있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꼭대기 층인 삼십층 버튼을 눌렀다. 엘리베이터 한쪽 벽면에 채광창이 나 있었다. 나는 유리창에 손을 짚은 채로 도시의 전경을 바라보았다. 유리창을 통해 본 도시는 검은 물속에 잠겨 있는 것처럼 보였다. 건물과 건물 사이를 어둠이 가득 채우고 있었다. 엘리베이터가 속도를 내자 몸이 아주 조금 떠올랐다. 마치 진공관 속에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높이 올라갈수록 더 많은 것들이 더 희미하게 보였다. 손바닥에 땀이 맺혀 유리가 끈끈하게 느껴졌다. 손의 온도가 조금씩 올라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고, 살이 닿은 부분마다 유리가 페인트처럼 흘러내릴 것 같았다.
“유리는 고체가 아주 높은 온도에서 끓어올랐다가 투명하게 녹아버린 상태를 의미해. 우리가 보고 있는 모든 유리는 인간이 인식하지 못할 만큼 아주 천천히 흐르고 있는 액체인 거야.”
문득 떠오르는 조의 목소리. 그는 나에게 사소한 상식이나 실없는 얘기를 전해 주는 것을 좋아했다. 아마도 함께 대학을 다니던 때였을 것이다. 조가 펜으로 내 손등에 뭔가를 썼다.
우리는 하나인 상태.
나는 낙서를 하는 조의 손을 살짝 치고, 손등의 글씨를 문질렀다. 잉크는 잘 지워지지 않았다.
유리창에 대고 있던 손이 축축해졌다. 손을 치마에 닦았다. 삼십층에 도착해 엘리베이터 문 앞에 섰다. 유리문에 피곤해 보이는 한 여자가 비쳤다. 살구색 립스틱을 꺼내 입술에 덧바르니 한결 더 유나의 얼굴로 보였다. 이가 드러나게 활짝 웃어 보았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웃는 얼굴이 반으로 갈라졌다.
삼십층엔 문이 하나밖에 없었다. 가까이 다가서자 불투명한 문이 자동으로 열렸다. 문 뒤에 남자가 서 있었다. 남자는 주름이 하나도 잡히지 않은 깨끗한 셔츠와 면바지를 차려입고 있었다. 가죽으로 된 실내용 슬리퍼를 신고 있어서 걷을 때 발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얼굴에서 노화의 기색을 찾을 수는 없었지만 풍기는 분위기는 중후했다. 나이를 종잡을 수 없는 모습이었다. 나는 남자를 따라 집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남자의 집은 인테리어 잡지의 한 페이지를 그대로 옮겨 놓은 것 같았다. 천장이 높고 벽 없이 탁 트인 구조라서 집이 몹시 넓어 보였다. 신형 가전제품과 가구들이 알맞은 자리에 배치되어 있었다. 남자의 외관처럼 몹시 깔끔한 집이었지만 이상한 점이 하나 있었다. 욕실 안에 있어야 할 샤워부스가 거실 한복판에 놓여 있었다. 허허벌판에 놓인 큰 화병처럼 뜬금없어 보였지만, 티를 내지는 않았다. 나는 유나이니까. 나는 소파에 가방을 내려놓고 다소곳하게 다리를 모으고 앉았다. 남자가 나를 보고 상기된 표정으로 말했다.
역시. 당신은 제가 원하는 걸 줄 수 있는 분입니다.
물론이죠. 제가 제공해 드릴 수 있는 서비스를 알려,
남자가 두 번째 손가락을 들어 나의 말을 막았다.
일단 제 얘기를 들어 보시죠. 시간을 할애할 만한 가치가 있는 이야기입니다.
예. 그러십니까. 일단 제가 해드릴 수 있는,
남자는 계속해서 내 말을 끊고 자기 할 말만 했다.
지금부터 제가 하는 얘기를 받아들이기 힘드실 수도 있습니다. 저에게는 아무에게도 털어놓지 못할 비밀이 하나 있거든요. 나이가 많지 않은 제가 이뤄 놓은 것들을 보고, 사람들은 흔히 부모님의 덕을 봤다고 생각하곤 하더군요. 사실 저는 가진 것이 없이 태어나 자수성가한 사람입니다. 가진 게 없을 때는 세상의 모든 것이 제게 등을 돌리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 누구도 제가 그 자리에 있다는 것을 눈치 채지 못했죠. 그때의 저는 마치 공기처럼 없는 존재가 되는 데 익숙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돈, 이라는 것을 벌고 나자 모든 것들이 달라져 버렸습니다. 다들 저를 찾고, 저를 바라보고, 제게 미소 지었습니다. 관심은 마약 같은 것이더군요. 처음에 저는 사람들 사이에 있는 제가 너무나도 좋았습니다. 더 많은 사람들의 더 많은 관심을 갈구하며, 그들의 시선 끝에 내가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며 하루하루를 보냈습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깨닫고야 말았습니다. 그들이 보고 있는 게 제가 아니라는 사실을요. 그들은 저를 통해 성공에 대한 희망을 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저 저를 성공의 도구로 여겼을 뿐, 애초에 제가 누구인지 관심도 없었던 것이죠. 그것을 깨달은 후 저는 진짜를, 진정성 있는 삶을 찾아나서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렇군요.
처음에는 이런 제 욕망을 받아들이는 게 힘들었습니다. 교회 사람들에게 털어놓을 수 없는 비밀이 생기는 게 두렵기도 했고요. 저 자신을 고치기 위해 노력도 해보았습니다. 기도 모임에도 나가고 치료의 은사를 받은 분들을 찾아다니기도 해보았죠. 그러나 아무것도 바꿀 수 없었습니다. 저는 남들과는 다른, 진짜를 바라는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이야기가 점점 더 길어지고 있었다. 경험상 자신의 이야기가 가치가 있다고 믿는 사람일수록 권위적이고 고압적인 성격을 가졌을 확률이 높았다. 작가나 교사, 목사가 가장 고 위험군의 진상 고객인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길고 지루한 대화도 예약된 시간을 소진하는 효율적인 방법 중 하나이긴 했다. 일전에 도심 외곽의 요가 센터로 유나를 호출한 고객의 경우가 그러했다. 요가 센터는 폐업 후 군소 종교단체의 도장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오십대쯤 되어 보이는 남자는 나에게 공허한 죽음의 기운이 서려 있다며, 제사를 지내야 한다고 했다. 나는 요가 매트에 앉아 그들의 손을 잡았다. 그들은 나를 위해 물을 뿌렸고, 울었고, 나에게 슬픔과 죄를 고백하라고 했다. 별달리 고백할 게 없었던 나는 결국 있는 힘을 다해 사는 게 힘드네요, 라고 한 마디를 짜낸 후 콧물을 두어 번 삼켰다. 그들은 몹시 감동한 표정으로 내 마음을 다 이해하고 있으며, 자신들도 같은 길을 걸어왔다고 했다. 그리고 자신들의 신의 은총으로 새로운 삶을 살게 된 것처럼 나 역시 새로운 삶을 살게 될 것이라고 했다. 어쨌든 매일 다른 삶을 살고 있기는 했으므로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들은 내게 약속한 금액을 지불했다. 만족스러웠던 노동의 날로 기억하고 있다. 남자도 뭐 그런 방식으로 전도를 하는 것일까. 옵션에 포함되지 않은 요구만 하지 않는다면 상관없지만 지루하게 느껴지는 건 별수 없었다. 남자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내 앞에 섰다. 그리고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진짜를 맛본 사람들에 대해서 알고 계십니까.
잘 모르겠습니다만. 알려주시겠어요?
예.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죠. 전 당신의 배설물이 필요합니다.
배설물을 요구하는 남자의 말투나 태도가 너무나도 정중해서 대단히 귀중한 물건이나 지분 같은 것을 양도하라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럴 때 당황하거나 불편한 기색을 내비치는 것은 유나의 윤리 강령에 어긋나는 행동이었다. 사실 당황할 것도 없었다. 내가 상대하는 다른 고객들에 비하면 남자의 요구는 평범한 편에 속했으니까. 자신의 성기에 크고 무거운 과일을 던져 달라고 요구한 고객에게는 사과 여덟 알과 배 세 알, 멜론 네 개를 순차적으로 던져 주었다. 엎드린 자신의 등에 성경책을 올려놓고 읽어 달라고 한 고객도 있었다. 그는 요한묵시록 페이지가 넘어가는 소리를 들으며 수음했다. 제공되는 서비스가 희소할수록 가치가 높아졌으므로 내게는 손해 볼 것이 없는 장사였다. 그런데 지금 나는 이 남자 앞에서 정체모를 당혹스러움과 불편함을 느끼고 있었다.
남자는 거실 한가운데에 있는 샤워부스로 다가가 문을 열었다. 부스 안엔 투명한 유리 좌변기와 금박을 입힌 샤워기가 설치되어 있었다. 변기는 세공사가 만든 공예품처럼 정교하게 조각되어 작은 우물처럼 보였다. 사용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보여주기 위해 만들어진 공간 같았고, 그래서 일종의 미술 작품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남자는 그곳을 제단, 이라고 불렀다.
제단에서 필요한 것을 공급해주시면 됩니다.
아 그것은,
남자는 내 말을 끊고 자신이 내 배설물을 사야만 하는 이유에 대해 일방적으로 늘어놓았다.
역사적으로 대변, 그러니까 인분을 이용해 욕망을 채운 경우는 수없이 많습니다. 메소포타미아 지방에서는 싸움에서 이긴 부족이 진 부족의 인분을 섭식하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이는 피지배층의 본질을 꿰뚫는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일본의 토속 신앙 중에는 똥을 신으로 모시는 교단도 존재합니다. 정조 시절에는 왕실의 기인들이 창작 활동에 임하기 전에 똥을 섭식했다고 하더군요. 똥만큼 인간의 본질에 닿아 있는 대상은 없습니다. 내장에서 나온 배설물이야말로 인간의 근간이자 존재의 기초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진짜, 라는 말이죠.
나는 입술에 힘을 주고 하품을 참았다.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남자는 그런 나를 보며, 내가 일종의 동정심이나 동질감 같은 것을 느끼고 있다고 판단한 것 같았다. 남자가 더욱 신나서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맞습니다. 이런 저를 이해하실 거라고 믿었습니다.
차라리 개랑 얘기하는 게 낫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그것은 유나에게 적합한 발상은 아니었다. 나는 애매하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는 주기적으로 똥을 공급해 주면 그때마다 거액을 지급하겠다고 했다. 평소에 내가 한 시간 일하고 받는 돈의 다섯 배 가까이 되는 금액이었다. 그는 지금처럼 불안정한 시대에 배설물만큼 안정적인 생산과 수입이 보장되는 상품이 어디 있겠느냐는 말도 덧붙였다. 투자설명회에서 자본을 유치하는 젊은 사업가와 같았다. 연설을 마친 남자는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 또한 화사한 표정을 무너뜨리지 않고 애교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스캇 플레이는 제 옵션 사항이 아니세요, 고객님. 다른 분에게 요청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남자의 이마에 땀이 고이기 시작했다. 입이 마르는지 말할 때마다 입술이 쩍쩍 붙었다.
아닙니다. 꼭 당신이어야만 합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남자는 갑자기 리모컨을 들어 텔레비전을 켰다. 그리고 볼륨 버튼을 최고로 올렸다. 거실 곳곳에 놓인 커다란 스피커에서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새까맣던 텔레비전 화면 속에 한 남자의 얼굴이 반짝 떠올랐다. 화면 속의 남자는 젊다기보다는 앳된 것에 가까운 얼굴이었다. 어린 남자는 골똘한 표정으로 촬영되고 있는 카메라를 확인하고 침대로 가서 누웠다. 남자는 옷을 입고 있지 않았다. 희미하게 물소리가 들렸다. 그는 침대에 앉아 한참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방 안은 어두웠다. 커튼 사이로 햇빛이 희미하게 새어 들어왔고, 남자의 얼굴에 길게 코 그림자가 내려앉았다. 이따금 다리 모양의 그림자가 방 안으로 드리워졌다가 사라졌다. 침대 뒤쪽 벽에 무지갯빛으로 홀로그램이 반사됐다. 자세히 보니 벽에 스티커 사진이 잔뜩 붙어 있었다.
물 떨어지는 소리 사이로 노랫소리 같은 게 들렸다. 찬송가였다. 믿음, 사랑, 구원과 같은 단어들이 물소리와 함께 희미하게 부서졌다. 기시감이 일어났다. 당연한 일이었다. 내가 아주 잘 아는 공간이었으니까.
화면 속의 방은 조의 방이었다.


그 시절, 나의 어깨는 언제나 활처럼 동그랗게 접힌 채로 굳어 있었다. 등록금과 생활비를 벌기 위해 하루 종일 일을 했고 매 순간 팽팽하게 긴장하며 살았기 때문이었다. 수업을 들은 후 자정이 다 될 때까지 일을 하고 집에 들어오면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쓰러져 자기 일쑤였다. 일요일, 일주일 중 단 하루가 내게 허락된 유일한 휴식의 시간이었다. 나는 그 순간을 조와의 시간으로 채웠다.
조의 방에 누워 있으면 창문을 통해 사람들의 발이 지나가는 게 보였다. 그곳에서 창문을 열면 먼지가 바닥에 가라앉았다. 비가 오면 창을 타고 빗물이 흘러 내려와 벽지가 축축해졌다.
우린 주말마다 그 방에 온종일 누워 있었다. 무료하게 늘어져 잠을 자다 보면 시끄러운 음악소리가 들려왔다. 베개를 뒤집어써도 노랫소리는 집요하게 머리를 울렸다. 조는 바로 옆 건물이 교회이기 때문에 일요일마다 이런 고문을 당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자세히 들어 보니 노래 가사에 믿음과 사랑, 구원과 같은 단어들이 가득했다.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 믿음과 사랑에 대처하는 방법을 찾았다. 노랫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면 키스를 하고 간증이 이어질 때쯤 섹스를 했다. 사람들이 짐승처럼 울부짖는 소리가 들리면 우리도 함께 소리를 질렀다. 난 밧줄을 잡듯이 조를 안았다. 조의 등을 파고드는 열 개의 손가락엔 나의 일상이, 그러니까 간신히 지탱해 온 삶이 모조리 걸려 있었다. 조 역시도 한 몸인 것처럼 나를 그러안았다. 조가 뜨거워진 채로 내 속에 들어왔고, 나도 뜨거워졌다. 우리는 같은 속도로 달아올라 함께 끓었다.
조와 섹스에 열중하다 보면 모든 것들이 투명해졌다. 조의 살결이 닿은 부분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내 손끝이 파고들어 있던 조의 등도 녹아내렸다. 움직일 때마다 우리의 몸이 조금씩 뭉크러졌다. 외피부터 천천히 몸이 흘러내리고, 뼈대만 남은 우리는 퍼즐처럼 서로 갈비뼈를 맞댄 채로 누워 있었다. 신경과 뇌까지 다 녹아 없어져 버렸고, 그래서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결국 우린 액체가 되어 방 안에 고여 버렸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살이 우리의 몸을 통과해 방바닥에 맺혔다.
섹스를 마치고 땀에 젖어 침대에 쓰러질 때쯤 예배의 끝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다. 그리고 신도들이 꾸역꾸역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우리는 함께 누워 창문으로 그들의 가벼운 발걸음을 보았다.
섹스를 하고 나면 몹시 배가 고팠다. 나는 조의 발가락을 입에 집어넣었다. 조는 내 손가락을 물었다. 우리는 손가락 발가락의 지문이 쪼글쪼글해질 때까지 서로를 물고 누워 있었다. 내 옆에 누운 조는 몹시 편안해 보였다. 조 옆에 누우면 일주일 내내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신경들이 모두 느슨해졌다. 나는 몸의 그 어떤 부분도 의식하지 않은 채 그저 누워 있을 수 있었다.
잠을 자거나 섹스를 하거나 치킨을 시켜먹어도, 시간이 남았다.
우린 조의 집을 빠져나와 함께 거리를 걸었다. 수갑을 나눠 끼고 있는 것처럼 서로 손을 꼭 잡은 채였다. 대개는 교회 옆에 있는 오락실에 가서 2인용 사격 게임을 했다. 둘이 함께라면 뭐든지 이길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우린 번번이 첫 번째 스테이지도 통과하지 못하고 죽었다. 적들의 총을 잔뜩 맞아서 화면이 산산조각 나 있고 조와 나의 캐릭터가 피를 흘리며 누워 있었다. 게임을 하다가 질리면 스티커 사진을 찍었다. 볼에 바람을 불어 넣거나 이마를 맞대고 사진을 찍었다. 사진 속 하얗게 보정된 우리의 모습이 이상해서 한참 동안 웃었다. 우리는 방에 돌아와 함께 찍은 스티커 사진을 벽에 붙였다. 텅 비었던 벽이 우리의 사진으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하루하루는 길었지만 일주일은 짧았다.
일 년이 지나고 벽 하나가 우리의 얼굴로 가득 찼다.


화면 속의 조와 수는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절벽을 향해 질주하듯 움직이던 그들은 연료가 떨어진 것처럼 순식간에 움직임을 멈췄다. 신음소리가 길게 울려 퍼졌고 화면이 꺼졌다. 난 까만 화면을 멍하니 쳐다봤다. 얼굴이 뜨거워지는 게 느껴졌다. 그러나 평정심을 잃지 않기 위해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고, 티 나지 않게 심호흡을 했다. 나는 유나이니까.
남자는 어느덧 내 옆에 바짝 다가와 앉아 있었다. 난 소파에서 일어나 남자의 앞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섰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동영상 속에 나오는 여자가 유나 씨입니까?
아니에요.
해사하게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거짓말은 아니었다. 동영상 속 여자는 수이지 유나가 아니었다.
방금 전 처음 당신을 봤을 때 제가 아는 분이라 확신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전 잘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이 순간을 위해 살아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죄송하지만 옵션 사항이 아닌 것을 제공해 드리기가 곤란해요, 고객님.
원하는 것을 주신다면 섭섭지 않게 대가를 지불하겠습니다.
남자는 대학을 다니느라 빌린 학자금 대출까지 해결할 수 있을 정도의 금액을 제시했다. 잠시의 당혹스러움에 대한 대가치고는 몹시도 후한 금액이었고, 내게는 합리적인 제안이었다. 스무 살부터 일을 하면서 깨달은 단 하나의 진실은 노동은 언제나 어느 정도의 비참함을 수반한다는 것이었다. 더 많은 돈을 위해 더 많은 수치를 견디는 건 세상의 이치였다. 큰돈을 벌 기회가 목전에 다다랐음에도 기분이 탐탁지 않았다.
하필 왜 저를.
꼭 당신이어야만 하니까.
고객들이 특이한 요구를 하는 경우는 많았지만 남자처럼 절실해 보이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고심하다가 천천히 팬티를 내렸다.
고객님, 출장비와 기본 수당은 별도입니다.
절망스럽던 남자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고지에 다다른 것 같은 남자의 얼굴을 보니 왠지 역겨워졌다. 온갖 더러운 것들을 잔뜩 머금은 침을 뱉어 주고 싶었지만 그것은 유나의 옵션이 아니었다. 평정심을 유지하며 시선을 바닥에 고정하고 미소를 지었다. 남자는 샤워부스 옆에 선 채로 나에게 손짓했다. 원피스 단추를 풀며 천천히 샤워부스 앞에 다가갔다. 크리스털 변기가 거대한 샐러드 볼처럼 보였다. 소름끼치는 기분이 들었지만 나는 유나였다. 유나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 부드러운 어깨선이 강조되도록 어깨를 안으로 접은 채 천천히 원피스를 끌어내렸다. 옷을 다 벗은 뒤 커다란 샐러드 볼 위에 앉았다. 남자가 눈을 껌뻑이며 나를 쳐다봐 온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생산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샤워부스의 문을 닫았지만 오히려 남자에게 관찰당하고 있다는 느낌이 더욱 강하게 들 뿐이었다. 눈을 감고 나 자신에게 말했다. 난 어항의 금붕어다. 난 지금 물로 가득 찬 수족관 속에 있다. 난 물 안에 배설한다. 난 방금 씻어 올린 샐러드처럼 싱싱하고 예쁜 똥을 싸기 위해 태어난 존재이다. 나오라는 건 나오지 않고 대신 땀이 비질비질 나왔다. 남자가 샤워부스의 문을 열더니 내 손목을 꽉 붙잡았다.
그렇게 전쟁터에 끌려 나온 것 같은 표정이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나는 치아 여덟 개를 드러내며 억지로 웃었다. 어금니를 꽉 깨문 채였다. 남자는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전 수 씨의 진짜를 원합니다. 저 속의 당신을 보세요.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남자는 까만 텔레비전 화면을 가리키며 유나가 아닌 수의 이름을 불렀다.
전 유나예요.
당신은 당신이 누구인지 아는 사람입니다.
네, 압니다. 유나라니까요.
남자는 내 손목을 더욱 꽉 쥐면서 내 가발을 벗기려 했다. 난 남자의 손을 뿌리치고 바닥에 떨어진 원피스를 주워 입었다. 그리고 소파 쪽으로 걸어갔다. 남자가 나를 뒤따라오며 말했다.
당신은 진짜를 아는 사람입니다. 오로지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게 당신이라는 사람입니다. 동영상 속에서 전 욕망을 향해 질주하는 순수한 눈빛을 보았습니다. 모든 게 거짓인 세상에서 그게 얼마나 대단한 건지 모르는 건가요?
죄송하지만 제가 해드릴 수 있는 게 없는 거 같네요.
나는 바닥에 떨어진 팬티와 원피스를 주워 입었다. 그리고 남자의 말을 무시한 채 가방을 싸기 시작했다. 남자는 거칠게 내 어깨를 잡고 샤워부스 쪽으로 날 밀쳤다.
수, 당신의 진짜 모습을 원합니다.
남자는 또박또박 나의 이름을 말했다. 난 가방을 내려놓고 남자를 쳐다보며 말했다.
원하신다면 이름을 바꿀 수 있어요. 그것은 옵션 중 하나입니다.
아니. 당신은 마지못해 뭔가 하는 그런 사람이 아닐 텐데요.
저 정확히 그런 사람이랍니다.
남자가 고압적으로 샤워부스 속으로 나를 밀어 넣으려 했다. 이상하게 오기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난 문턱에 발을 걸치고 버텼다. 남자는 더욱 세게 나를 밀었다. 발목이 떨리기 시작했고 결국 난 부스 안으로 꼬꾸라져 들어갔다. 변기에 어깨가 부딪혔다. 어깨를 부여잡고 조용히 무릎을 꿇고 앉았다. 구타와 복종. 이건 유나의 옵션이었다. 남자는 나에게 가발을 벗고 렌즈를 뺄 것을 요구했다. 그것은 유나의 옵션이 아니었기 때문에 거절했다. 남자는 샤워부스 안으로 한 발짝 더 들어와 한쪽 손으로 내 턱을 움켜잡고 다른 쪽 손으로 가발을 벗기려 했다. 핀을 많이 꽂았기 때문에 잘 벗겨지지 않았다. 남자가 우악스럽게 잡아당겨 머리카락이 뽑혀 나가고 있었다. 내가 몸부림을 치자 남자가 머리를 잡고 있던 손을 놓고 내 뺨을 때렸다. 난 약간 눈물을 글썽이며 남자의 손길에 몸을 맡겼다. 빨갛던 볼에 감각이 없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시 남자가 나의 이름을 부르며 가발을 잡아당겼다.
수. 수. 수.
그는 계속해서 유나가 아니라 수를 외쳤다. 단음절을 끊어 발음하는 남자의 목소리는 확신에 차 있었다. 마치 이름을 부르면 곧바로 달려오는 애완동물을 찾는 듯한 모습이었다. 심장이 요동치고 얼굴에 열이 오르기 시작했다. 남자가 나를 보고 크게 웃으며 말했다.
드디어 제가 찾던 그 눈빛이 나오는군요.
내 속 어딘가에 균열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나는 고개를 돌려 남자를 힘껏 밀친 후 정강이를 걷어찼다. 남자가 휘청하다 균형을 잃고 샤워부스 벽에 어깨를 부딪쳤다. 남자가 부딪친 자리를 두어 번 쓰다듬은 후 곧장 나의 가발을 낚아챘다. 그리고 우악스러운 손길로 내 머리를 변기에 처박았다. 물이 얕아서 뺨이 변기 바닥에 부딪혔다. 남자는 한 손으로는 내 목을 잡고 다른 손으로 가발을 잡아당겼다. 머리카락이 뜯겨 나가고 귀에 물이 들어오는 게 느껴졌다.
물고문. 이것 역시 유나의 옵션이었다. 고통을 줄이며 상대방을 만족시키는 방법은 잘 알고 있었다. 물속에서 눈을 천천히 깜빡였다. 가발 몇 가닥이 수면에서 검게 물결치고 있었다. 크리스털에 반사된 빛과 그림자가 수면 아래에 일렁였다. 숨을 멈춘 채로 조용히 어깨에 힘을 뺐다. 그리고 입으로 천천히 기포를 내보냈다. 액체의 세상. 그 속에선 모든 것이 천천히 흘러내렸다. 청각과 시각과 촉각이 모두 느슨해지고 내가 세워 둔 모든 것들이 하나둘 흘러내렸다. 호흡을 멈추고 천천히 셋을 셌다.
남자의 손에 힘이 빠져나가는 게 느껴졌다. 머리에 아슬아슬하게 붙어 있던 가발과 머리망이 그의 손을 따라 딸려 올라갔다. 나는 빠르게 몸을 들어 올려 남자의 손에서 가발을 낚아챘다. 그리고 체중을 실어 힘껏 남자를 밀쳤다. 남자가 휘청했다. 그때를 놓치지 않고 팔꿈치로 남자의 얼굴을 후려쳤다. 팔꿈치에 딱딱한 것이 닿는 게 느껴졌다. 남자가 짧은 비명을 지르며 밖으로 나가떨어졌다. 재빨리 부스 안에서 문을 닫고 걸쇠를 내렸다. 넘어진 남자의 코에서 피가 한 줄기 흘러내렸다.
숱이 적은 내 머리카락이 미역줄기처럼 얼굴에 달라붙어 있었다. 인조 속눈썹은 떨어져 나가 버렸고 원피스의 어깨 부분이 찢겨져 있었다. 온몸이 헛헛하게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내 몸이 분노하고 있었다. 진심이라고 부를 만한 그 어떤 것들도 하지 않는 게 이 일의 본질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이상했다. 더 이상 내 안에 유나는 없었다. 아니, 비어 있다고 생각했던 내 안에 자꾸만 생소한 감정이 차올랐다. 어쩌면 남자가 말하는 진짜라는 것이 이런 것일지도 몰랐다. 비어 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 나는 어느새 수가 되어버린 것일지도 몰랐다. 그런데 어쩌지. 수가 됐을 때의 행동 강령은 준비해 놓지 않았다. 그때 남자가 고개를 주억거리며 몸을 일으켜 앉았다. 정신을 차린 모양이었다. 남자는 셔츠 소매로 코피를 닦으며 나를 쳐다봤다. 그는 웃고 있었다. 내 몸 안에서 분노가 더욱 뜨겁게 차오르기 시작했다. 난 크게 소리를 질렀다. 그 어떤 언어라고도 볼 수 없는 소리가 내 안에서 흘러나왔다. 남자는 방금 전보다 더 크게 소리 내 웃었다. 빠른 속도로 영사기를 돌리는 것처럼 온갖 말들과 감정들이 내 안에 빠르게 흘러 들어왔다.
남자의 세계에 균열을 만들고 싶어져 버렸다. 나는 변기 옆에 놓여 있던 금색 샤워기를 들고, 변기에 그것을 힘껏 내리쳤다. 바위를 치는 것 같은 묵직한 소리가 났으나 변기에는 조그마한 상처도 나지 않았다. 팔목에 힘을 잔뜩 주고 다시 한 번 변기를 때렸다. 역시나 변기는 멀쩡했고 변기 속에 들어 있는 물에 잔잔한 파문만 일었다. 나는 방향과 각도를 바꿔 가며 변기를 내리쳤다. 변기에는 작은 흠집 하나 나지 않았다. 오히려 방향을 바꿀 때마다 색을 바꿔 가며 영롱하게 빛날 따름이었다. 호스 이음새를 돌려 샤워 꼭지를 뺐다. 머리만 남은 샤워기를 들고 뒤쪽으로 가서 변기의 머리 쪽을 내리쳤다. 소용없는 일이었다. 온몸에 땀이 흐를 때까지 애를 써 봐도 아무것도 바뀌는 건 없었다.
더럽게 튼튼하게도 만들어 놨네.
남자는 흥분한 표정으로 샤워부스의 문을 밀고 있었다. 걸쇠가 걸린 문은 조금 덜컹거리기만 할 뿐 열리지 않았다. 뭐 하나 튼튼하지 않은 것이 없는 집이었다. 난 들고 있던 금색 샤워 꼭지를 샤워부스의 문 쪽으로 집어던졌다. 샤워 꼭지가 유리문에 부딪혔다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남자가 비열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제 진정성 있는 결과물을 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진정성 같은 소리 한다.
편협하시군요. 당신은 단 하나의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마음, 그리고 그것에 실패했을 때 세상이 쪼개지는 절망감을 알고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요. 난 당신에게서 떨어져 나간 것을 원합니다. 그러니까 당신의…….
남자가 일장 연설을 늘어놓는 사이 조심스럽게 걸쇠를 풀었다. 샤워부스의 문을 잽싸게 열었다. 유리문이 남자의 머리를 때렸다. 남자가 중심을 잃고 뒤로 쓰러졌다.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샤워기 꼭지로 남자의 머리를 내리쳤다. 남자의 머리에서 파열음이 울렸다. 뭔가 균열이 간 것이 틀림없었다.
미친놈. 똥은 그냥 똥이지.
내가 어떤 모습으로 똥을 싸든, 어떤 이름으로 똥을 싸든 그건 그냥 똥이었다. 하긴 어떤 이름으로 불려도 나는 나다. 단 한순간도 내가 아니었던 적이 없었고 앞으로도 나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남자는 내게 똥뿐만 아니라 그런 진실을 강요했다. 내 앞에 누워 있는 것은 그에 대한 대가였다.
조심스럽게 남자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남자는 정신을 잃은 채 불규칙적으로 호흡하고 있었다. 나는 가방에서 마 로프를 꺼냈다. 여섯 번을 삶은 뒤 기름을 먹여 제작한 바니의 로프였다. 정신을 잃은 남자를 엎드려 눕힌 뒤 가슴부터 허리까지 로프로 칭칭 감았다. 팔목과 발목도 나비 모양의 굵은 매듭으로 포박했다. 남자가 벗어나려 애쓰면 애쓸수록 마 로프는 남자의 살에 더 깊이 파고들 것이다. 나는 가방에서 징이 박힌 힐을 꺼내 신었다. 그것 역시 바니의 것이었다.
나는 유나도, 바니도, 그 무엇도 아닌 채 묶여 있는 남자의 앞에 섰다. 구두 앞코로 남자의 등을 살짝 건드려 보았다. 별 반응이 없었다. 발등으로 남자의 옆구리를 밀자 남자의 몸이 조금 움찔했다. 그는 아직 살아 있었고 그가 만들어 놓은 세상 역시 티끌 하나 바뀌지 않은 채 그대로였다. 그게 견딜 수 없이 싫었다. 바닥에 두어 번 발을 구르자 구두 굽에서 맑은 소리가 울려 퍼졌다. 나는 있는 힘껏 남자의 옆구리를 찼다. 남자가 비명을 지르며 눈을 번쩍 떴다. 번데기처럼 몸을 구부리고 있는 남자의 여기저기를 걷어찼다. 남자의 비명소리가 집 안에 울려 퍼졌다. 외모와 어울리지 않는 고음역대의 비명이라 마치 누군가 더빙을 해놓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러고 보니 남자의 집은 모든 게 너무 완벽해 어딘가 모르게 세트장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렇다면 내게 주어진 배역은 무엇일까. 잘 모르겠다. 다만 확실한 것은 남자를 때리고 밟을수록 더 신이 난다는 점이었다. 바니가 아닌 다른 존재로서 누군가를 이토록 열중해서 때려 본 건 처음이었다. 한참 동안 신나게 남자를 때리다 보니 나는 내 자신을 남자를 때리기 위해 존재하는 사람처럼 느끼기 시작했다. 남자가 결박에서 벗어나기 위해 여러 번 몸을 뒤틀다가 이내 고통에 몸부림치며 포기했다. 그는 번데기처럼 동그랗게 몸을 만 채 흐느끼기 시작했다.
왜 내 말을 듣지 않습니까. 내가 바라는 단 하나를, 그것을, 도대체 왜.
남자는 고작 단 하나를 얻지 못한 주제에 모든 걸 다 잃은 것처럼 서럽게도 울었다. 목이 쉬어라 우는 남자가 한 번도 울어 보지 않은 갓난아이처럼 느껴졌다. 조용하라는 의미로 얼굴을 한 번 더 걷어찼다. 가방에서 공 모양의 재갈을 꺼내 남자의 입에 물렸다. 남자는 그 후로도 얼마간 신음소리를 내며 몸을 뒤틀었으나 이내 잠잠해졌다. 탈진한 것 같았다. 바라고 바라던 침묵이 찾아왔지만 아직 부족했다. 분이 덜 풀린 나는 탈진한 남자를 내버려둔 채 크리스털 변기로 달려갔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반짝거리고 있는 그것을, 이 난리 중에도 흠집 하나 나지 않은 그것을 깨부수고 싶었다. 마지막 남은 모든 힘을 쥐어짜 내 변기를 걷어찼다.
뭔가가 깨지는 소리가 났다.
구두 굽이 조각나 바닥에 떨어졌다. 구두가 만신창이가 되었다. 변기는 멀쩡했다. 더 이상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나는 바닥에 주저앉은 채 한참 동안 변기를 멍하니 바라봤다. 팔로 바닥을 디디고 일어서려고 하는데 신발 속 발가락에서 뭉근한 통증이 느껴졌다. 구두를 벗었다. 엄지발톱 아래에 피가 맺혀 있었다. 살짝 눌러 봤는데 눈물이 핑 돌 만큼 아팠다. 반대쪽 신발도 벗고 맨발로 일어나 보려고 했지만 더 강한 통증이 밀려왔다. 결국 엉거주춤하게 자리에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남자가 누운 채로 젖은 기침을 했다. 남자의 입에서 나온 진득한 피가 로프를 타고 흘러내렸다. 내 엄지발톱은 점점 더 검붉은 빛으로 변해 가고 있었다. 크리스털 변기와 샤워부스는 흠집 하나 남지 않은 채, 오히려 이전보다 더 아름답게 빛나는 것 같았다. 부서진 건 나와 남자뿐이었다.
동이 트기 시작했다. 커튼 하나 달아 놓지 않은 창문으로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눈이 부셔서 잠깐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나는 바닥에 떨어진 리모컨을 집어 화면을 켰다. 재생 버튼을 누르자 검은 화면 너머로 익숙한 물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조가 욕실에 들어가자마자 나는 방 안을 뒤지기 시작했다. 책장과 침대 사이를 샅샅이 살피고 행거를 차례대로 훑었다. 휴지통과 서랍장을 뒤질 때까지 그런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조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 때쯤 테이블 위에 개켜 놓은 옷가지가 보였다. 그 속에 손을 집어넣었다. 조의 바지와 팬티 사이에 핸드폰이 놓여 있는 게 보였다. 물이 떨어지는 소리가 멎었다. 조가 나오기 전에 핸드폰을 제자리에 돌려놓고, 침대 위에 앉았다.
조와 섹스를 마친 후 나는 사람들의 발소리를 들으며 누워 있었다. 조가 낮게 코를 골기 시작했다. 내 가슴 위에 올라와 있는 조의 팔을 치우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이전과는 다른 일상이 이미 펼쳐지고 있었다. 나는 옷더미 속에서 핸드폰을 찾았다. 화면을 누르자 동영상 저장 폴더가 떴다. 핸드폰 속에는 총 서른 개의 동영상 파일이 있었다. 첫 번째 파일의 날짜는 조와 내가 사귀기로 한 지 두 달 정도 지난 후였다. 기록은 꽤나 오래 지속됐다. 난 동영상을 일일이 클릭해 재생했다.
화면으로 남녀가 뒤엉킨 모습이 흘러나왔다. 그것은 이전에 조와 내가 함께 봐온 섹스 동영상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 속에 있는 사람이 우리라는 사실만이 다를 뿐.
동영상의 날짜가 흘러갈수록 조와 나의 머리카락이 길어졌다가 짧아졌고, 창밖에서 들어오는 햇살이 밝았다가 다시 잦아들었다. 동영상 속의 우리는 같은 공간에서 언제나 함께였다. 화면 속 조그마한 사람들은 진짜, 깊이 사랑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 속의 사람들이 나나 조가 아니라 그냥 모르는 여자와 남자였다면 감동해서 조금 울어버렸을지도 모르겠다.
발바닥에 꽂혀 있던 마개가 뽑힌 것처럼 내 안에 모든 것들이 빠르게 쓸려 내려갔다. 날 뜨겁게 해줬던 것들이 땅바닥으로 다 스며들어 버렸다. 그래서 난 순식간에 비어버렸다. 아메리카노를 담았던 일회용 잔처럼. 온갖 찌꺼기들이 잔뜩 남아 있는 채로.
내가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일상이 반걸음씩 멀어지고 있었다. 난 마치 수족관 속의 관상어를 바라보듯 그들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들은 내게 유리 한 장으로 가로막힌 그런 존재들이 되어버렸다.


나는 절뚝거리며 남자에게로 다가갔다. 옆으로 누워 있는 남자의 맞은편에 얼굴을 바라보고 누웠다. 그는 눈을 반쯤 뜬 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재갈을 물려 놔 말을 하고 싶어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나는 남자의 피에 젖은 얼굴을 바라보았다. 남자의 시선이 내 얼굴에 고정됐다. 남자는 유나도, 바니도, 수도 아닌 누군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게 당신이 말하는 진짜인 걸까.
남자의 얼굴에 옅게 미소가 비쳤다. 기진맥진한 기색을 숨기지 못한 표정이었다. 남자가 필요로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남자는 도대체 수의 어떤 점에서 진짜를 발견했던 것일까. 나로서는 알 수 없었지만 다만 하나만은 확신할 수 있었다. 애초에 난 누구도 아니었으니, 내 똥도 아무것도 아닌 누군가의 똥일 뿐이다. 일단 세상에 내놓고 나면 그냥 더럽고 냄새나는 덩어리에 불과할 것이다. 나처럼.
정말 갖고 싶어?
남자는 아주 천천히, 몸을 움찔거렸다. 그렇다는 의미겠지. 그러나 아쉽게도 남자는 진짜 수, 를 그의 어떤 것도 가질 수는 없을 것이다. 그것은 세상에 없는 것. 나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그리고 남자의 뒤틀린 몸을 넘어 창가 쪽으로 걸어갔다. 오른쪽 발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계속 한쪽으로 몸이 기울었다. 남자의 신음소리가 들렸지만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채광창으로 빛이 잔뜩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해가 뜨고 있었다. 빛 속에서 어깨까지 늘어진 젖은 머리카락과 시커멓게 때가 탄 맨발, 멍이 든 발톱까지. 나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것들이 드러났다. 나는 천천히 창가에 앉았다. 유리창 너머의 도시는 마치 거대한 어항에 담겨 있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누군가는 저 속에서 눈을 비비며 일어나고 밥을 먹고 화를 내고 사랑을 하겠지. 유리창에 흐릿하게 내가 비쳤다. 모든 게 명료한 세상에서 유일하게 희미한 내가 눈에 밟혔다. 그게 싫었다. 손을 들어 내가 비친 자리를 문질렀다. 당연히 내 흔적은 사라지지 않고 그대로였다. 바람이 불어 가로수가 흔들렸다. 나무에 아슬아슬하게 붙어 있던 죽은 나뭇잎이 바람을 타고 떨어져 내렸다. 이따금 차가 지나갔다. 움직이지 않고 그대로 있는 것은 유리창뿐이었다. 아니, 언젠가는 이 유리창도 아래로 흘러내리게 될 것이니까, 변하지 않는 건 없었다. 나는 유리창에 몸을 기댔다. 차갑고 단단한 감촉이 꼭 조의 몸 같았다. 눈을 감았다.


마지막으로 조의 방에 갔던 날. 조와 나는 등을 맞대고 앉아 있었다. 우리는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참 동안 방 안에 침묵이 감돌았다. 나는 장판이 노랗게 일어난 부분을 손톱으로 뜯으며 조에게 물었다.
조. 나한테 하고 싶은 말 없어?
별로.
그래.
너는?
나도 없어.
나는 뜯어낸 장판 조각을 손톱으로 꾹꾹 눌렀다. 그리고 방 안을 바라보았다. 언제나 눅눅한 이불과 외피가 해진 인형과 뽀얗게 먼지가 내려앉은 바닥과 그 위에 고인 우리 둘의 그림자를. 어두운 벽 한쪽 구석에서 홀로그램이 반짝거렸다. 그 반짝임이 너무 사소해서 왠지 웃음이 나왔다. 방 안을 이루고 있는 것들은 그대로인데, 모든 것들이 다 달라진 것처럼 느껴졌다. 이제 이곳의 일부가 될 일은 영원히 없겠구나. 손바닥만 한 창문 너머로 빛이 일렁이고 있었다. 그것을 바라보며 조에게 물었다.
조, 에로 오빠 기억나?
그게 누군데.
옛날에 우리 같이 봤었던 그 일본 야동에 나왔던 고추 큰 오빠.
아, 그 수염 난 남자.
어. 성의 없게 섹스 하던 에로 오빠.
갑자기 그 사람이 왜.
어제 죽었대.
왜 죽었대. 자살?
아니. 맹장염인가 뭔가. 아무튼 병 걸려서 갑자기 죽었대.
그렇구나.
죽었다는 말 듣고 그 사람 나오는 야동 틀어 봤는데 기분 되게 이상하더라. 죽은 사람이 거기서 고추 세우고 있으니까.
이상할 게 뭐 있냐. 원래 다 그래.
그래, 그렇겠지. 원래 다 그런 거겠지.


눈을 뜨니 이미 아침이 되어 있었다. 깜박 잠이 든 모양이었다. 나의 오른쪽 발이 잔뜩 부어 우스꽝스러운 꼴이 되어버렸다. 아무래도 뭔가 단단히 잘못된 것 같았다. 일어서 보니 발을 디딜 수 없을 정도로 통증이 심했다. 나는 한쪽 발을 절며 샤워부스 쪽으로 걸어갔다. 냉찜질을 해야 할 것 같아 변기 옆의 샤워기를 들고 물을 틀었다. 샤워헤드가 빠져버린 금장 호스에서 굵은 물줄기가 흘러나왔다. 변기에 앉아 그것을 엄지발가락에 대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물이 차가워 입술이 떨렸다. 오른발부터 종아리를 타고 한기가 올라왔다. 시계를 보니 벌써 아침이었다. 문득 매일 밤 꼭 해야 하는 일을 빼먹은 게 떠올랐다. 나는 찬물이 쏟아지는 호스를 바닥에 내려 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거실이 순식간에 물바다가 되었다. 나는 미끄러지지 않기 위해 조심하며 소파로 걸어갔다. 그리고 커다란 토트백을 거꾸로 뒤집었다. 노란 가발과 붉은 로프, 핑크색의 딜도와 러브젤, 양초 세 개와 파우치, 망사 스타킹, 노트북이 젖은 바닥에 떨어져 흩어졌다. 떨어진 노트북을 집어 들고 옷자락에 물기를 닦았다. 어디 앉을 데가 없나 주위를 둘러보다 한 발짝도 더 움직일 기운이 나지 않아서 바닥에 누워버렸다. 등이 축축하게 젖어드는 게 느껴졌다. 벽면이 모두 유리로 되어 있기 때문인지 아니면 젖은 바닥 때문인지 마치 욕조에 누워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노트북을 열어 배 위에 올려놓았다. 바탕화면에 있는 ‘조의 방’이라는 이름의 폴더를 클릭했다. 수십 개의 동영상과 그것을 캡처한 파일이 떠올랐다. 익숙한 손길로 파일 공유 사이트를 열어, 동영상 파일과 캡처한 사진을 함께 업로드 했다. 십 분쯤 지나 업로드가 완료되었다는 알림창이 떴다.
하얀 화면에 조와 수의 얼굴이 섬처럼 떠올랐다.
그것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 인터넷 창을 껐다. 그리고 조의 방, 폴더를 지워버렸다.
그 시절의 우리가 조용히 봉인됐다.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게 느껴졌다. 노트북을 옆으로 치워버리고 바르게 누웠다. 아무리 자세를 고쳐 누워도 편하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조의 방 말고 다른 곳에서는 단 한 번도 편히 누워 본 적이 없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귓바퀴에 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등과 엉덩이는 이미 다 젖어버린 지 오래였다. 이대로 물에 잠기는 건가. 괜히 웃음이 나왔다. 찬물이 내 온몸을 감쌌다. 뜨거운 물을 좀 뒤집어쓰고 싶은데 손가락 하나 까딱할 기운이 나지 않았다. 그래서 그냥 누워 있기로 마음먹었다.
그냥 이대로 내가 다 녹아버렸으면 좋겠다. 내 속에 남아 있는 쓸데없는 찌꺼기들과 함께 하수구로 흘러내려가 버렸으면. 조급해할 필요는 없었다. 액체는 그저 아주 천천히 흐르고 있을 뿐이었다. 도시의 저 깊은 곳에서부터 모든 것들이 용해되고 있는 게 분명하니까. 곧 하수도가 잠기고, 수도관이 잠기고, 바닥이 잠기고 나를 감싸고 있는 모든 것들이, 세상이 잠기게 될 것이다. 녹아 없어질 것이다. 그 속에서 우리는 모두 하나가 될 것이다. ■














박상영
작가소개 / 박상영

1988년 대구 출생. 단편 소설 <패리스 힐튼을 찾습니다>로 2016년 <문학동네> 신인상을 수상하며 등단. 성균관대학교 프랑스어문학과, 신문방송학과 졸업. 동국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수료. 자살직전회(구,조울증 환우회)소속.


《문장웹진 2017년 0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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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4-01
성한 입

성한 입 이현석 아기 앓는 소리에 눈을 떴다. 박명이었고 아직 분유 먹일 시간은 아니었다. 어두운 잠귀를 이유로 밤 당번을 자처한 것은 나였으나 의지와 달리 본성은 강했다. 아내가 자리끼 컵을 산산조각 냈을 때도 세상모르고 코만 곯았다는데 율이와 둘이 잔 뒤로는 아이가 내는 작은 소리에도 눈이 금방 뜨였다. 바닥에 깔아 둔 매트리스에서 몸을 일으킨 나는 아기 침대를 내려다보았다. 율이는 아무 일 없다는 듯 두 눈을 꼭 감은 채 입을 오물거렸다. ‘아빠가 또 속았네.’ 잠은 설쳤어도 흐뭇했다. 이 작은 목숨이 간밤을 또 무사히 넘겼구나. 그 마음을 얹고 도로 몸을 뉘었는데 다시 잠에 들지는 못했다. 아기방 창문에 맺힌 물방울이 거슬렸다. 창문은 밤새 돌린 가열식 가습기 탓에 부러 흩뿌린 것처럼 흥건했다. 문득 재건축 조합 단톡방에서 보았던 잡담이 떠올랐다. 유명 로펌을 다니느라 바쁜 딸과 얼마 전 개원한 의사 사위를 대신해 손주 둘을 보느라 겨우내 가습기를 틀었더니 옷장 안에서부터 피어난 검은 곰팡이가 벽면 한쪽을 잡아먹었다는 이야기였다. 시황 따라 일이 억은 우습게 에누리하는 아파트에서 곰팡이 걱정이라니. 직면한 현실과 지난봄 우리 부부가 치른 비현실적인 가격 사이의 뚜렷한 차이에 헛웃음이 나왔다. 물론 현실만 따지면 놀랍지 않았다. 아파트는 인혁당 재건위 사건으로 박정희 정권이 삼화토건 회장 도예종, 매일신문 기자 서도원, 경북대학교 총학생회장 여정남 등 여덟 명을 국가보안법 위반, 내란예비음모 등으로 사형을 선고한 지 하루도 지나지 않아 형을 집행했던 바로 그해에, 여의도의 다른 구축 아파트와 마찬가지로 박정희의 명령으로 완공됐다. 반세기가 넘은 건물이었다. 근대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곰팡이는 당연했다. 화장실에서 바퀴벌레를 보아도 놀랄 것이 없었고, 개수대에서 썩은 내가 올라와도 그러려니 했다. 아내와 함께 산책을 마치고 돌아온 여름밤에는 통통하니 살이 오른 쥐가 아파트 복도 반대편으로 내달리는 모습을 본 적도 있다. 기함할 듯 놀란 나와 달리 아내는 대수롭지 않아 하며 현관문을 열었다. “오빠, 견뎌. 이게 실거주 투자의 현실이야.” 아내는 평소처럼 장난스럽게 말했으나 나는 그 말을 묵직이 받아들였는데 싱글일 때부터 정석대로 자산을 늘려 온 아내의 투자 이력을 알아서였다. 현관문을 잽싸게 닫은 나는 만삭이 된 아내의 배를 쓰다듬으면서 “충성충성”이라고 촐싹댔다. 사실 아이가 뱃속에 있을 때만 해도 실감하지 못했다. 벌레나 쥐가 부르는 본능적인 혐오도 자산 증식이라는 대명제 앞에선 한낱 농담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곰팡이조차 농담일 수 없었다. 집에는 율이가 있었다. 가습기를 끈 나는 전날 벗어 둔 티셔츠를 집어 들었다. 율이가 깨지 않게 까치발로 창문에 다가갔다. 물기를 닦고서 창문을 미세하게 열었다. 서늘한 외풍이 실낱처럼 들어왔다. 재건축 단톡방에 상주하는 어르신들은 아침에 잠깐씩 이렇게 해 두면 곰팡이도 예방하고 아이

  • 관리자
  • 2025-04-01
흰옷 빨래의 날

흰옷 빨래의 날 안담 오늘은 마지의 기일이니까 흰옷을 모아 빨래를 한다. 마지가 유니폼처럼 자주 입던 크림색 티셔츠도 잊지 않고 꺼내서 빤다. 아마도 처음 살 때는 흰옷이었을 거다. 내가 애용하는 독일 브랜드의 캡슐 세제는 성능이 뛰어나다. 이 티셔츠에서는 마지의 냄새가 사라진 지 오래다. 이제는 나도 마지의 냄새를 잘 떠올릴 수가 없다. 꽤 강한 냄새였는데, 그런 냄새가 잊히기도 한다는 게 신기하다. 가끔 그 냄새를 다시 기억해 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히면, 4년 전 마지와 내가 처음 만났던 장소인 모둠 전집에 간다. 전을 굽는 작업대가 가게 밖으로 툭 튀어나와 있어서 포장 손님도 많은, 반은 노점인 그런 가게. 튀는 기름을 막기 위해 조리대 틈새와 철판 모서리에 은색 호일이 덧대어져 있고, 그럼에도 철판 가장자리나 작업대 위 처마에 쌓이는 기름때를 막을 수는 없다. 조용히 질색하며 지나치는 행인들, 저 시커먼 데서 맛이 나오는가 보다고 농담하는 손님들, 그런 사람들 사이에 섞여 가게에서 흘러나오는 기름 냄새를 맡는다. 이 냄새와 비슷했던 것 같아. 열과 기름과 사람이 합쳐서 내는 냄새. 전혀 아닐 수도 있지만. 적어도 이 냄새와 비슷하다고 생각했던 기억만큼은 선명하다. 내 동거인의 냄새, 홍제천 스리룸의 주방 맞은 편 작은 방의 냄새, 마지의 냄새. 앞으로는 누구와 같이 살 생각이 없다. * 윤석열 나이로 스물아홉이 되던 2021년 겨울, 나는 당근마켓을 통해 홍제역 인근 스리룸의 하우스메이트를 구하고 있었다. 마지는 그 글을 보고 연락한 세 번째 사람이었다. 일반적인 시각에서 좋은 집으로 보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백련산과 홍제천이 코앞이고 인왕산이나 북한산도 비교적 멀지 않다는 점을 제외하면 인프라랄 게 없는 집. 인적 드문 가파른 언덕에 있고 북향이라 볕이 잘 들지는 않으며 어떤 역에서든 멀었다. 낡은 건물인데 월세는 70만 원으로 센 편이었다. 월세를 제외하면 그 집의 여러 요소는 내게는 장점이었다. 크고 힘 좋은 내 개와 오를 산이 있고 사람은 만나기 힘들다는 게. 스리룸에 방들이 크고, 연식이 오래된 집의 컨디션을 의식한 집주인이 못 박기를 포함해 여러 변화를 허용해 준다는 점도 좋았다. 나부터가 담배를 피우기 때문에 흡연자도 좋았다. 내가 대형견과 산다는 사실은 누군가에게는 극단적인 장점이고 누군가에게는 극단적인 단점이었을 테다. 내 개는 순하다 못해 맹한 편이었지만, 글에는 남자나 키 큰 사람에게는 경계심을 보인다고 적었다. SNS로 하메를 구하는 여자에게 피곤한 사람이 얼마나 꼬이는 줄 아냐고 으름장을 놓은 지인이 많았기 때문이다. 지인 소개가 낫지 않냐는 조언도 숱하게 들었지만, 지인의 지인이 길거리에 다니는 아무개보다 더 좋은 사람일 거라는 전제에 동의가 잘 안되었거니와, 하우스메이트가 맘에 안 들었을 때 소개해 준 지인의 체면까지 고려해야 하는 상황도 만들고 싶지 않았다. 나의 구인 글은 짧아졌다 길어졌다를 반복하다가 이런 형태가 되었다. ‘홍제역 인근 스리룸 하메 구합니

  • 관리자
  • 2025-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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