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벚꽃」 외 6편
- 작성일 2022-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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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코문학창작기금 - 시]
오늘은 벚꽃
문성해
봄이라고 공원인데 오늘은 외할머니가 내 안에 큰 키를 웅크리고 들어와서는 그 볼 넓은 발을 내 오목한 발에 접어 넣고 난분분 벚꽃길을 절뚝절뚝 걸으시나 오늘은 암만해도 꼿꼿한 허리로 마실 벚나무 공터에서 장구 잘 치던 외할머니의 덩더쿵 덩더쿵 거리던 눈 속만 같아라 정자나무 곁 팽팽한 벚꽃들 아래 그보다 더 늙음이 팽팽한 외할머니며 외할머니 친구분들이 장구며 꽹과리로 낮술에 묵은 흥취 깨워 낼 때 삼수갑자 돈 벚꽃들 한 올 한 올 배추 흰나비인 양 펄럭거려 어린 나는 자꾸 팔을 훼훼 내저었지 장하디장한 그 벚나무들이 경북 상주에서부터 경기도 북부하고도 먼 이곳까지 날아와 헐떡이는 오늘은 내 여섯 살 어린 방에서 산발한 채 눈 뜨고 돌아가신 그 외할머니가 들어앉아 자꾸만 이쪽으로 저쪽으로 가자가자 해쌓는다 장정 서넛은 일궈야 하는 스무 마지기 밭뙈기를 한나절에 다 멘 그 큰 손으로 내 머리채를 휙 휙 잡아채며 벚꽃들 환한 웃음의 목젖을 태풍의 눈인 양 자꾸만 치어다보라 하시는 것이었다
연못이 된다는 거
먼 남의 일인 줄 알았는데
가게에 물이 오고
아비는 혼이 나가고
장롱이 뜬다
누구나 연못이 된다는 거
밥상과 찬장에 당분간 물밖에 올릴 게 없다는 거
우리의 교복이 둥둥 수생식물이 된다는 거
엄마는 끼고 있던 금가락지를 잃고
놔둬라, 물이 빠지면 찾겠지
은행에 갔던 아버지가
낡은 비늘을 떨구며 돌아온 밤
동생은 귀여운 지느러미를 흔들며 숙제를 하고
나는 아가미가 패이는지 밤새 귀가 아팠다
누구나 연못의 재료가 된다는 거
건너갈 수 없는 사람이 된다는 거
건너올 수 없는 사람이 된다는 거
그 이후로 물을 보면
수장된 것들이 보이곤 했다
문 워크*
나는 걸어갈게
당신은 노를 저어서 와
걸음의 도구인 두 발
나는 절룩이며 갈게
당신은
한 발이 한 발을 인도하며
그림자처럼 와
정성껏 물살처럼 와
나는 총알처럼 단숨에 날아갈 테니
당신은 화살처럼 와
오면서 산자락에선 굽어지고
바람의 엄살도
비의 사투리도 얹고 와
과녁을 훌훌 넘으면서
당신은 생각하지
아기 때부터 걷던 양수 속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던 걸음을
물결과 도란도란 걷던 한때를
나는 오늘의 일만 알게
당신은 비와 번개의 어제와
자욱이 날아가는 홀씨들의
내일도 알아
나는 흙투성이 두 발에
진흙만 치덕치덕 덧바를게
당신은 도란도란
구름과 달무리 속을 흐느끼듯이 와
세상의 무대를 다 데리고 간 당신
이제야 달처럼 가고 있구나
* 마이클 잭슨의 춤속의 걸음
호랑이를 믿는 남자
아직도 마을 뒷산에 호랑이가 있다고 믿는 남자가 있지
모두들 옛일이라고 콧방귀를 뀌었지만
그는 밤마다 어둠의 장막을 뚫는 울음소리를 듣지
날마다 산에 올라 호랑이 발자국을 추적하고
나무 등걸에 붙은 황금빛 털을 찾고
새카맣게 말라 빠진 의문의 똥을 호랑이 것이라 믿는 남자
간혹 깊고 따뜻한 굴이라도 찾아내면
새끼 품은 크고 아름다운 품새 하나를 떠올리지
사는 게 죽기보다 힘들어 죽기 직전에야
마음속 호랑이를 찾아낸 그 남자
그때부터 살기 위한 명분이 생겼지
울타리를 넘는 목소리도 생겼지
호랑이가 산과 벌판을 쿵쿵 넘어오지 않아도
그는 산처럼 고목처럼 네 발로 걷지
아무도 소리쳐 울지 않아도 가끔 지진처럼 울지
밤마다 호랑이를 펴고
호랑이 속에서 잠이 드는 남자
그 옛날
모든 두려움과 환희가 집약된 한 마리 호랑이
가슴을 뚫고 집채만큼 자라나는 그것을 위하여
아침이면 호피 문양의 태양 빛이 성큼성큼 내려오지
일석 이희승* 선생이 사랑한 흰 꽃 등나무
파주 출판도시 김동읍 씨 작은댁 사랑채 담장에는 국어학자이자 시인인 일석 이희승 선생이 생전 아끼시던 등나무가 혜화동에서 이곳으로 옮겨져 있다 수령 45년 된 이 등나무는 해마다 봄이면 선생 손길을 기다리는 집짐승마냥 유순하게 술렁인다 오늘 내 몸에 이파리 여럿 달고 그 앞에 출정하여 보니 선생은 유치들마냥 돋아나는 새순의 연둣빛이 아니라 겁도 없이 함부로 바람에 뛰어드는 이 천방지축들을 더 사랑하신 것은 아니었을까 새순이 붙잡고 오는 등꽃의 흰 손목들이 아니라 그 아래 꼬물거리며 지나가는 유치원생들의 햇내와 느릿느릿 유모차를 밀고 가는 노파들의 햇주름을 더 사랑하신 것은 아니었을까 빼곡한 잎새들의 배경인 하늘과 그 아래 실타래 같은 줄기들의 회합과 목책을 휘감은 억센 손아귀와 두텁고 깊은 그의 그늘을 챙겨 사랑한 선생은 또 먼 훗날 이 앞에 선 까마득한 후배의 눈알을 미리 다 사랑하신 건 아니었을까 아니었을까
* 이희승(1896~1989)
국어대사전을 저술한 국어학자이자 시인. 조선어학회에 입회하여 ‘한글맞춤법 통일안’과 ‘표준어사정’ 사업에 참여,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검거되어 1945년 해방될 때까지 복역.
내가 만일
내가 만일 가수라면
이 밤 듣는 이 하나 없는 술집을 맴도는 낮은 노래라면
소파 밑 고양이들의 꼬불꼬불한 귓속으로 흘러 들어가리
그 속에서 밤새 고였다가 아침이면 나른한 기지개가 되리
내가 만일
폐업 전야의 식당이라면
마지막 손님을 위해 사각의 냅킨을 접으리
내일이면 침입자가 될 그를 위해
냉동고 속 재료를 모두 녹여
세상에는 없는 메뉴를 선보이리
내가 만일
변두리 영화관의
화면마다 빗금을 뿌리는 낡은 영사기라면
하루 종일 설거지통에서 접시를 닦던 처녀와
손톱에 기름때가 빠지지 않는 애인의 심장을
두근거리는 비의 드럼 소리로 두드려 주리
내가 만일
밤의 건축가라면
대대로 물려줄 콘크리트 집 대신
달빛처럼 흐느적거리고
박쥐처럼 위태로운 집을 지으리
내가 만일
산골 초등학교의 늙은 수위라면
교문 앞 어린 미루나무를 재크의 콩나무로 키워 놓으리
방학을 마친 아이들의 가녀린 목 속에
기타 줄 같은 탄성이 차오르게 하리
내가 만일
가업을 이어받은 인쇄공이라면
검고 차가운 잉크 대신
부드러운 향유고래의 기름으로 활자를 찍으리
침 묻혀 넘기는 독서가의 페이지마다
심해를 침잠하는 향유고래의 독서가 되게 하리
내가 만일
따뜻한 바닷가 마을의 하나뿐인 산파라면
늙은이들도 어렸을 때 몇 번 못 보았다던 눈송이들을
(그때는 재앙인 줄 알았다던)
언덕 위 저 맑고 젊은 구름들이 매일매일 낳게 해 주리
그들의 부드러운 사타구니 속에 수시로 잉태되는 비를
맑고 찬 눈송이로 슬쩍슬쩍 바꿔치기 하리
내가 만일
신도 모르게 손이 맵고 빠른 늙은 산파라면
소년기
어미가 죽자
마을에서는 독을 달라는 이가 많았다
소년이 보는 앞에서
커다란 독을 빙글빙글 굴리며 가던 사람들
독은 서커스 하듯
골목을 논두렁을 밭둑길을
오래오래 굴러 집을 나갔다
마지막 독이 스릉스릉 소리를 감으며 나가자
텅 빈 장독대 위에 작은 독처럼 웅크려
소년은 오래된 어미 냄새를 맡았다
이무기가 감고 넘나들던,
소년보다 오래 묵은 장독들이었다
그것들이 불어난 물길을 타고 돌아오거나
집 나간 소처럼 제 집을 찾아 들 일은 없을 터
마당 한 귀퉁이가 서럽고 넓었다
독을 다 내주었는데도
빈집 역시 크고 둥근 독이었다
소년은 그 속에서
웅웅거리는 귀를 막은 채
묵은 김치 한 포기처럼 담겨
독한 잠을 잤다
혹한기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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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코문학창작기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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