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과 열
- 작성일 2022-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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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빛과 열
정용준
문을 열고 들어오는 산수를 보고 한주는 젓고 있던 주걱을 내려놓았다. 리모컨을 눌러 음악을 정지했다. 무거운 정적을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은 서로를 봤다. 산수는 한주를 알아보았지만 한주의 눈과 몸은 그를 알지 못하는 것 같았다. 한주는 인덕션 전원을 껐다. 마스크를 벗고 숨을 내쉰 뒤 고개를 숙여 스테인리스 비커 속에 반쯤 녹아 가는 하얀 비누 베이스를 바라봤다. 시어버터 향이 작업실에 산산이 번졌다. 산수는 들고 온 사과 박스를 문 앞에 두고 어색하게 손을 들어 인사했다.
“오랜만.”
한주는 라텍스 장갑을 한쪽씩 벗어 탁자에 올려놓은 뒤 작게 답했다.
“놀랐네.”
한주는 선반 위에 놓인 하얀 머그컵을 빤히 보다 한 개를 꺼내 차게 식힌 메밀차를 담아 산수에게 건넸다. 한주가 사과를 씻는 동안 산수는 집 안을 훑어봤다. 버려진 시골집을 고쳐서 산다더니 여기저기 수리한 흔적이 많았다. 벽에 판자를 덧댔고 못 자국이 많았다. 습기 많은 여름을 여러 해 보내면서 변색된 천장은 부풀어 올랐다. 거실 중앙에 커다란 기둥 두 개가 섰고 방에 해당되는 곳엔 문턱은 있었지만 문은 없어 집 천제가 가로로 긴 직사각형이었다. 마당을 바라보는 통창 앞으로 일인용 녹색 소파가 있었다. 소파 오른편엔 바닥에서부터 쌓아 올린 책 탑이 있었고 왼편엔 세라믹 드리퍼와 비커, 주전자가 놓인 협탁이 있었다. 한눈에 봐도 거기에 앉아 많은 시간을 보낸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한쪽 벽 전체엔 갈색 비누와 까만 비누가 가지런히 놓인 비누건조대가 오래된 책장처럼 서 있었다. 새것은 하나도 없었지만 싸구려 물건도 없는 공간. 언뜻 보면 남루하고 비루해 보이지만 유심히 살피면 집을 지키기 위해 꼼꼼하게 수리하고 가꾸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산수는 맞은편에 앉아 사과를 깎는 한주를 봤다. 단정하게 빗질을 했지만 며칠 머리를 감지 않은 듯 기름져 있었고 머리카락 사이사이 하얀 머리카락이 선명하게 섞여 있었다. 안경알 너머로 오른쪽 눈꺼풀이 살짝 처져 있었고 눈 밑으로 주근깨가 가득했다. 산수는 사과를 조금씩 베어 물면서 가을로 깊어 가는 요즘 날씨, 여름과 겨울엔 난방을 어떻게 하는지, 비누 판매는 잘 되는지, 물었고 한주는 딱 필요한 정도만 짧게 답하고 설명했다. 머릿속에서 할 말을 준비하고 밑줄 그은 문장을 천천히 읽고 있는 것 같았다. 산수는 한주가 편한 이야기를 해주길 기다리고 있었다. 말문을 어떻게 열어야 할지 어렵기만 했다. 한주가 물었다.
“아이와 엄마는. 건강하지?”
“잘 지내지. 애 이름은 기억하고?”
“하나뿐인 조카 이름을 모르는 고모도 있을까. 윤서. 이제 몇 살이야?”
“일곱 살.”
“와, 벌써. 예쁘겠네.”
한주는 웃었고 산수도 따라 웃으며 물었다.
“사는 건 좀 괜찮아?”
한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누나.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했어. 걱정도 됐고.”
한주는 흘러내린 머리를 한 손으로 쓸어 넘기며 말했다.
“걱정은 무슨. 나는 내가 알아서 해.”
“키우던 개. 죽었다며.”
“응. 겨울이. 얼마 전에.”
“그랬구나. 어릴 때 기억난다. 내가 보름 정도 키웠잖아. 예뻤는데.”
산수는 한주의 시선이 닿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통창 앞에 낡은 올리브색 쿠션이 있었고 그 위에 구멍 난 반팔 면티와 실타래 공이 놓여 있었다. 벽에 느슨하게 걸어 놓은 갈색 마 끈에 나무집게로 집은 사진이 걸려 있었다. 커다랗고 하얀 개. 어떤 사진의 풍경은 하얀 눈밭이었고 어떤 배경은 코스모스와 푸른 하늘이었다. 한주가 개의 목을 껴안고 찍은 사진도 있었는데 환하게 웃고 있었다. 산주는 그 모습을 보고 묘한 질투심이 솟았다. 자신의 기억 속에서는 누나의 그런 표정은 없었다. 한주는 고개를 돌려 산수를 봤다.
“그런데 그걸 어떻게 알았어?”
“뭘?”
“겨울이 일.”
어떻게 말해야 하는 걸까, 산수는 생각했다. 한주가 먼저 물었다.
“기사 봤어?”
“어, 몰랐는데…… 고모가 기사 링크를 문자로 보내 줘서.”
한주는 복잡한 감정이 담긴 눈으로 산수의 얼굴을 쳐다봤다. 무엇인가 심장 쪽으로 올라오는 게 느껴졌지만 한주는 심호흡으로 그걸 눌렀다.
“고모?”
“응. 고모가 누나 생각 많이 해. 늘 소식 물어 봐. 아무래도.”
한주는 손바닥이 보이게 손을 들었다. 산수는 입을 다물었다.
“알 바 아니고 알고 싶지도 않아.”
한주는 잠시 멈췄다가 호흡을 가다듬고 말을 이었다.
“별일 아니었어. 겨울이 화장하려 했는데 주위로 불이 번졌어. 그걸 보고 누가 오해한 거고. 그뿐이야.”
산수는 묻고 싶었다. 왜 굳이 직접 개를 화장했는지. 왜 하필 그때 그 장소였는지. 방화는…… 왜. 하지만 어째서인지 말을 꺼낼 엄두가 나지 않았다. 한주는 알고 있었다. 산수가 물으려는 말이 무엇인지. 입에 머금고 있는 말이 무엇을 담고 있는지도. 한주는 애써 말을 고르고 있는 산수의 복잡한 표정을 찬찬히 들여다봤다. 그사이 많이 늙었다. 엄마의 얼굴과 아빠의 성격으로 살아온 동생. 결혼하고 아이도 있으면서 목소리와 표정엔 아직도 애 같은 투정과 조급함이 묻어 있었다.
“그 말 하러 여기까지 내려온 거야? 이제 가. 내 걱정 말고.”
“누나.”
한주는 대답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 작업실로 들어갔다. 실리콘 몰드에서 비누를 꺼내 커터기에 넣고 잘랐다. 산수는 한주의 뒷모습을 봤다. 헐렁한 겨자색 스웨터. 살이 너무 많이 빠져 골반뼈에 걸친 잿빛 면바지. 옛날에 비해 더 마르고 작아진 모습이었지만 그때와 같은 것이 하나 있었다. 불 냄새. 세월이 흘러도 여전히 느껴지는 재와 연기 같은 나의 누나. 산수는 말했다.
“언제까지 이렇게 지낼 거야. 가족이라고는 누나와 나 둘뿐인데. 내 생각은 안 해? 조금도? 누나. 제발. 뭐라고 말 좀 해봐.”
해가 지고 있었다. 노랗고 가는 빛이 예리한 칼날처럼 작업실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한주는 한 줄기 빛을 감은 눈 위에 놓고 잠시 가만히 있었다. 뜨거운 손가락 하나가 눈을 꾹 누르고 있는 것 같았다. 날카롭고 아름다운 느낌. 금방이라도 눈을 멀게 할 것 같은 통증. 답답해하는 동생의 얼굴과 표정에 새삼스럽게 마음이 일렁였다. ‘말을 하라고? 무슨 말을? 오래전 나는 말했다. 몇 번이고 말하고 또 말했어.’ 한주는 안경을 벗어 탁자에 놓고 눈가가 붉어질 때까지 손바닥으로 비볐다. 그리고 말했다.
“밥 먹고 가.”
*
산수는 집 주변을 느리게 걸었다. 만나고 싶었다. 어떻게 사는지, 어떻게 살아왔는지, 이제는 무슨 생각을 하고, 지금은 어떤 마음인지, 아무 말이나 듣고 싶었고 어떤 말이든 하고 싶었다. 하지만 누나는 그럴 생각이 없는 것 같다. 밥 먹을 때, 차 마실 때조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초조한 마음에 이런저런 말을 꺼내도 닫힌 입술은 열리지 않았다. 산수는 두려웠다. 침묵이 길어지면 당장이라도 누나가 자신을 집 바깥으로 끌어낼 것만 같았다. 산수는 핸드폰을 식탁에 놓고 재킷을 의자에 걸어 둔 채 밖으로 나갔다.
언젠가 어떤 날 깨끗하게 마른 꽃을 보며 누나가 했던 말이 떠오른다.
“그늘에 오래 두어 저렇게 마르면 얼마나 좋을까? 저걸 뭐라고 해야 해? 죽은 거야? 영원히 살아 있는 거야? 나도 식물이면 좋겠다. 말도 없고 움직일 필요도 없고 하늘에서 내리는 비와 빛만 있으면 살 수 있는 그런 삶이면 좋겠어. 어쩌다 불행이 닥치면 불과 빛에 휘감겼다가 마침내 순한 재와 연기로 돌아가는 삶. 그게 부러워.”
짙은 고요에 잠겨 점점 짙어지는 암녹색 산과 여기 저기 바위처럼 점점이 놓인 작고 낡은 집들. 잎사귀가 붉고 노랗게 물들어 가는 이름 모를 가을나무들. 작은 바람에도 일렁이며 파도치는 대숲. 이렇게 외따로 떨어져 사는 삶. 이게 누나가 소망하는 삶인 걸까.
평소 연락이 없던 고모에게 한 통의 문자가 수신됐을 때 산수는 무의식적으로 호흡을 멈췄다. 한 줄의 인사도 없이 당도한 기사 링크 하나. 이윽고 전화가 걸려왔다. ‘아직도 그러고 산다니.’ ‘연락은 해?’ ‘옛날부터 내가 그럴 줄 알았다.’ 산수는 고모의 말이 들리지 않았다. 눈과 마음이 기사에 향해 있었고 행간 속에서 사실과 진실을 찾아내려고 신경은 곤두섰다. 기사 밑으로 연관 보도가 몇 개 있었지만 정체불명의 언론들이 동일한 내용을 복사해 붙여 넣은 무의미한 기사였다. 누구도 관심을 갖지 않는 이 짧은 단신을 고모는 어떻게 읽은 걸까. 그리고 이걸 굳이 나에게 보낸 저의는 무엇일까. 고모의 말을 한 마디도 더 들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산수는 종료 버튼을 눌렀고 전원버튼을 꾹 눌러 핸드폰을 껐다. 까만 핸드폰 액정에 반사된 마흔하나의 남자. 산수는 쓸쓸하게 젖어 있는 자신의 까만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이십이 년 전 겨울. 새벽 두 시에 산불이 발생했다. 산림 40ha가 불에 탔다. 주택 두 채가 전소됐고 자고 있던 팔십대 노부부가 사망했다. 이 날 화재는 규모 자체는 크지 않았지만 강풍이 불어 다음날 오후가 돼서야 불길이 잡혔다. 경찰은 한주를 방화범으로 지목했다. 발화점으로 추정되는 부분을 특정해 그 일대를 예상 시간에 지나간 아홉 대의 자동차를 조사해 운전자를 조사했다. 그중 세대의 차에서 담배의 흔적이 나왔다. 그 차들 중 유일하게 한 대만 오십 분가량의 시차가 발생했다. 모종의 이유로 인해 차가 그 일대에서 정차를 했다는 계산이 나온 것이다. 그 차는 한주 아버지의 차였고 운전자는 한주였다. 경찰은 한주를 조사했다. 그 시간에 그 지역을 통과한 이유와 한 시간가량 정차했어야 하는 알리바이를 추궁했다. 또한 마을을 방문해 주민들에게 한주에 대해 물었다. 경찰은 산불의 원인을 한주가 피운 담배로 봤지만 명확한 증거는 없는 상태였다. 한주는 줄곧 자신은 방화범이 아니라고 했다. 담배를 피우는 것은 맞지만 그 시간 그 장소에서는 피우지 않았다고 했다. 하지만 조사를 받았다는 것만으로도 한주는 이미 방화범이었다. 산불이 난 지역을 특별한 이유도 없이 다음날 다시 찾아간 것도 방화의 가능성을 뒷받침했다. 이십삼 세 여성의 담뱃불에 백 년 나무와 노인이 피해를 받았다는 기사를 시작으로 연달아 몇 개의 기사와 뉴스가 났다. 마을 사람들은 놀라면서도 그럴 줄 알았다는, 언젠가 이런 일을 저지를 줄 알았다는 이상한 반응을 보였다. ‘옛날부터 씨가 보였어요.’ ‘그렇게 불을 좋아하다니 결국 산불을 낸 거야.’ ‘학교도 그만뒀잖아요.’ ‘예전부터 행실이 불량하고 표정이 사나운 아이였어요.’
차고 어둡고 고분고분하지 않은 아이. 학교를 자주 빠지고 공사장과 다리 밑에서 불을 피우며 못된 친구들과 어울리는 질 나쁜 학생. 버려진 나뭇조각과 쓰레기들을 드럼통에 넣고 태우는 걸 즐기는 악취미를 가진 소녀. 그것들을 태우고 위로 솟구치며 춤추는 불꽃. 바람이 휘날리는 빨간 불티. 그걸 황홀하게 바라보는 기이한 눈동자. 사람들은 누나를 꺼림칙한 시선으로 봤다. 불장난을 좋아하는 아이. 언젠가 큰일을 저지를 여자애. 그러거나 말거나 언제나 그 앞에 서 있는 한주는 어릴 때부터 그랬다. 가스레인지를 켜놓고 그 앞에 우두커니 서 있기도 했고 하릴없이 성냥을 긋고 한 송이 불꽃을 바라보기도 했다. 조막만 한 숯 한 조각으로 커다란 장작을 태우고 젖은 나무라 할지라도 긴 연기 속에 기어이 불을 피워냈다.
산수는 그날의 누나를 기억한다. 깊은 밤. 잠에서 깬 건 낑낑거리며 우는 강아지 소리 때문이었다. 누나의 옷과 손에 흙과 피가 묻어 있었다. 얼이 빠져 있었고 울었는지 눈이 충혈 되고 눈가가 붉었다. 무슨 일이 있냐는 말에 누나는 아무 말도 안 했다. 무슨 강아지냐고 했더니 길에서 주웠다고 했다. 하얀 털. 접힌 귀. 여러 특성이 뒤섞여 결국엔 아무 특성이 없는 잡종처럼 보였다. 한주는 구치소에서 보름간 수감되었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전신주 문제로 인한 사고라고 소방당국이 결론을 낸 것이다. 하지만 한주는 여전히 방화범이었다. 정정 기사는 나지 않았고 한주를 방화범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의 생각도 바뀌지 않았다. 마을 어른들은 말했다. ‘아무튼 산에서 담배는 피웠을 거야.’ ‘이번엔 아니었어도 언제라도 그럴 수 있지. 불장난을 좋아하는 애니까.’ 가능성. 평소 행실. 그게 한주의 죄였다. 한주는 아버지와 동생에게 설명도 해명도 하지 않았다. 강아지를 껴안고 일주일 동안 멍하니 창밖만 응시했다. 그리고 깊은 밤 강아지와 함께 집을 나갔다.
산수가 다시 누나를 만난 건 아버지의 장례식이었다. 아버지는 마지막까지 한주를 찾지 않았다. 어머니가 죽은 이후로 꾸준히 선을 보고 누군가를 만나 보려고 애를 썼지만 결국 누구와도 좋은 관계로 발전하지 못한 채 삼륜 오토바이를 타다 논두렁에 처박혀 죽었다. 친지들이 내실에서 자고 있던 새벽. 한주는 나타났다. 그때 산수는 탁자에 엎드려 쪽잠을 자고 있었는데 이상한 기분에 잠에서 깼다. 어떤 여자가 꼿꼿하게 서서 아버지의 사진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산수는 그 사람이 누나라는 것을 알았지만 어쩌면 죽은 누나의 영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두려움을 느꼈다. 한주는 생각했다. ‘아버지는 자신의 딸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끝끝내 알지 못한 채 죽었구나. 드라마에서는 죽기 전 가족들이 만나 해묵은 감정을 해소하고 울며 화해하던데 현실의 삶엔 그런 게 없구나.’ 한주는 한참 그렇게 서 있다가 향을 피우고 고개를 숙인 뒤 빈소를 나갔다. 한주는 산수의 어깨를 살짝 만지고 눈인사를 했다. 그제야 산수는 그가 살아 있는 누나라는 것을 알았다. 잠깐 화장실에 간 줄 알았던 누나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그 후로 산수는 한주를 수소문해 연락처와 사는 곳을 알아냈다. 하지만 한주는 산수의 전화를 받지 않고 문자에도 답하지 않았다. 계속되는 채근에 더 이상 연락을 하지 말라는 짧은 답을 보낼 뿐이었다. 찾아가겠다고 연락하고 내려갔을 때는 집은 비어 있었다. 산수는 누나의 말을 믿었다. 누나를 믿기에 당연히 말도 믿어야 했다. 하지만 다른 이들이 누나를 믿지 못하는 것도 이해했다. 자신의 마음엔 혼란이 없지만 이 믿음을 다른 이에게 전하기 위해서는 이유와 근거가 필요했다. 하지만 믿음의 근거는 믿어야 하는 믿음밖에 없었다. 어느 밤엔 누나를 잃은 것이 슬펐고, 어느 밤엔 자신을 버린 누나에게 서운했고, 어느 밤엔 누나를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미웠고, 어느 밤엔 그들을 믿을 수 없게 행동한 누나가 미웠다.
*
한주는 창가에 서서 산수를 봤다. 심각한 표정으로 시름에 잠겨 종종걸음으로 배회하는 동생. 그 옛날 멀리서 애처롭게 누나를 부르던 모습에서 조금도 자라지 않은 것 같았다. 한주는 파란색 플라스틱 소쿠리를 들고 밖으로 나왔다. 구부정한 자세로 한 발 한 발 느리게 걸어 깻잎과 가지가 있는 텃밭으로 향했다. 고랑 앞에 앉아 담벼락에 기대 자신을 보고 있는 산수를 향해 이쪽으로 오라고 손짓했다. 한주는 산수에게 깻잎을 따서 가지런히 소쿠리에 담으라고 했다. 산수는 구부정하게 서서 서툴게 깻잎을 땄다. 한주는 고랑에 작은 의자를 놓고 앉아 나이든 동생을 봤다. 잎을 따낼 때 혹 줄기가 다칠까 봐 시원하게 똑 따내지 못하고 망설이는 손도 옛날과 똑같았다.
“너 무릎은 괜찮아? 나는 요즘 무릎이 안 좋다.”
“글쎄. 아직까지는 괜찮은데 나는 목이 안 좋아. 사진 찍어 봤는데 디스크가 튀어나와 있더라. 엄마도 무릎 안 좋았잖아. 누나. 조심해야 돼. 지금부터 관리 좀 하고. 다른 데는 괜찮고?”
“응. 괜찮아. 어쩌겠어. 나이 들면 여기저기 고장 나는 거지.”
누나는 동생의 등을 향해 동생은 등 뒤에서부터 발밑으로 길게 흐르고 있는 누나의 그림자를 향해 한 마디 한 마디 말했다. 비누를 만드는 것. 보름에 한 번 우체국에 나가 물류센터로 택배를 보는 것. 딸을 키우는 기쁨과 막막함에 대해. 보습학원을 운영하는 고단함과 학부모들과의 갈등에 대해. 어린 시절의 공동의 경험과 상이한 기억에 대해. 산수는 소쿠리를 바닥에 내려놓고 한주 옆에 쭈그리고 앉았다. 핸드폰으로 딸 사진을 보여줬다. 한주는 안경을 이마 위로 올리고 미소를 지었다.
“너 닮았다.”
“아내는 누나 닮았다고 하던데? 내가 봐도 누나 어릴 때 얼굴하고 완전 똑같아. 약간 누나랑 비슷한 구석도 있고. 애가 뭐랄까.”
“이상해?”
“아니. 뭐가 이상해.”
“나처럼 불장난 하다가 집 나갈까 봐?”
“어?”
“농담.”
한주는 오른쪽 무릎을 손으로 움켜쥔 뒤 끙, 소리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주는 풀을 모아 불을 피웠다. 불꽃은 보이지 않았고 하얀 연기가 하늘을 향해 길게 피어올랐다. 해는 졌고 산등성이는 검붉었다. 군청색 하늘과 농도가 약한 푸른 어둠으로 잠긴 한주의 작은 집. 벌레소리가 들렸고 저 멀리 어느 집에서 틀어 놓은 노랫소리가 들렸다. 가사는 들리지 않았지만 ‘쿵짝. 쿵짝. 쿵짝짝. 쿵짝.’ 트로트 리듬이었다. 평온하고 나른했다. 그럼에도 산수는 한주에게 물었다.
“여기 혼자 있으면 안 무서워?”
“괜찮아.”
“이제 개도 없어서 혼자잖아.”
“그렇지. 겨울이 없어서 외롭겠지. 무서운 건 아니야.”
“집에 있는 물건들 자꾸 보면 마음 안 좋을 텐데 정리하는 거 도와줄까?”
갈고리로 마른풀을 긁어 불 쪽으로 모으던 한주는 허리를 꼿꼿이 펴고 선 뒤 고개를 돌려 산수를 봤다.
“됐어. 그냥 같이 지낼 거야. 난 잘 지냈고 앞으로도 그럴 거야. 이제 그만 올라가. 밤 깊어지면 운전도 힘들 텐데.”
“누나가 여기서 이렇게 혼자 지내는 거 신경 쓰여. 나는 누나가 이제 사람들도 좀 만나고 그랬으면 좋겠어. 시간도 많이 흘렀고 그사이 세상도 많이 달라졌잖아.”
“달라져? 뭐가? 사람들이? 세상이? 정말?”
한주는 평온한 어조로 답했지만 문장마다 끝을 올리는 것에 산수는 마음이 상했다.
“삐딱하게 듣지 마. 여기까지 내려온 나를 생각해서라도.”
“너를 생각하라고? 너는 내 생각해? 너 여기 왜 왔는데. 누나가 옛날처럼 또 불을 지르고 다니는구나. 제정신이 아닌가 보다. 겁나서 온 거잖아.”
“왜 그렇게 말해. 누난 여기까지 찾아온 내 기분이 어떤지 알아?”
‘내 기분이 어떤지 알아?’ 한주는 오래전 동생이 자신에게 그렇게 물었던 날이 생각났다. 그때 내가 뭐라고 답을 했더라. 한주는 아득해졌다. 설명. 해명. 진실. 사실. 진짜. 지나고 보니 말 같은 것은 무의미했다. 사람들은 믿어지면 말없이도 믿고 사실과 근거와 상관없이도 믿었다. 질문과 답은 공허했다. 누구도 내 말을 믿지 않았고 마음을 궁금해 하지 않았다. 진실과 사실. 힘이 없고 능력 없는 말장난이다. 믿을 수 없었겠지. 믿고 싶지 않을 수도 있고. 그러나 그 어리석은 질문과 편견은 나를 사로잡았고 어느 순간부터 나를 형성했다. 어떤 몰이해 끝에 내린 결론. 정말로 나는 그런 사람이 되고 말았다. 기자들은 내가 한 말보다, 내가 한 행동보다, 자기들이 쓰고 싶은 이야기에 관심을 갖는다. 사실을 말해도 거짓이 되었다. 아무 말을 하지 않으면 비밀이 되었다. 교묘하게 편집됐다. 중요한 정보는 다 빠졌다. 내 행동은 다른 의미가 됐고 결국 나는 다른 행동을 한 사람이 됐다. 질문 속에 함정이 있었고 그물이 있었다. 그들은 내 말의 어느 부분을 딱 걸어 낚아챘다. ‘다른 사람은 눈곱만큼도 생각하지 않는 년.’ ‘평생을 그렇게 살더니 불까지 지르네.’ ‘불에 타 죽을 년.’ 어른들은 자기들끼리 모여 다 들리게 수군거렸다. 나중엔 못 본 척했고 안 보이는 척했다. 어디를 가든 누군가 내 뒷모습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집요한 시선을 느꼈다. 한번은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사람들과 눈을 마주쳤다. 사람들의 눈알이 모두 터질 정도로 그들을 무섭게 노려봤다. 증오의 레이저에 머리통이 터져버리길 바랐다. 하지만 바보처럼 눈물이 흘렀다. 억울한 것도 슬픈 것도 아니었다. 그저 너무 피곤했다. 그들에게 설명하는 것도, 설명한 것을 다시 증명하는 것도, 진력이 났다. 그들이 믿었던 건 내가 한 일이 아닌 나에 대한 소문이었으니까. 진부한 위로는 원하지 않았다. 내게 필요했던 것은 누군가 내 말을 믿어 주는 것뿐이었다. 내가 말한 것으로만 나를 읽고 이해하려는 사람. 누구도 없었다. 가족도 아니었다. 가족들이 침묵을 지키면서 나를 겨우 겨우 받아 주고 있다는 그 느낌. 끔찍했다. 어떤 말이라도 꺼내면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말을 할까 봐 입을 다무는 것뿐이었다. ‘왜 그랬어?’ ‘무슨 생각이었어?’ ‘정말이야?’ 침묵 속에 스민 비난과 한숨이 귀에 또렷이 들렸다. 싫었다. 내 존재가 누군가의 입을 막아야 한다는 것이. 차라리 내가 입을 다무는 것이 나았다. 그것만이 나를, 내 가족을 지키는 유일한 방법이었으니까. 나중에 이 결정을 후회하게 되리라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했다. 해야만 했다. 눈물이 흘렀다. 이 우주에 나 혼자였다. 저 별들조차 아득히 먼 곳에서 달려온 빛일 뿐이고 어떤 별은 이미 죽었을 것이다. 그래도 평정심을 유지하며 수치와 모멸을 견뎠다. 다 이해한다는 듯 슬픈 표정으로 내 어깨를 만지던 친지들의 끔찍한 손길. 사랑과 걱정을 가장했지만 그 밑에 깔려 있는 위선과 거짓 위로가 같잖았다. 나는 스스로가 무서워졌다. 이러다 언젠가 어떤 날 멀쩡한 정신과 판단으로 그들의 말처럼 내가 나쁜 짓을 저지를 것 같았다. 내 속에서 뭔가가 튀어나와 내 목을 움켜쥘 것 같았다. 밤마다 불 꺼진 창문에 돌을 던지는 상상을 했다. 불 붙은 나무를 들고 이 집 저 집 찾아가 불을 지르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참아야 했다. 그래서 그랬다. 나는 입을 다물고 사라져야 했다. 한주는 마른침을 삼킨 뒤 산수에게 말했다.
“몰라. 나는 내 기분도 몰라.”
“누나. 혹시 복수하는 거야? 아버지도 죽었고 그 일 아는 사람은 이제 거의 없어. 시간이 이렇게 많이 흘렀는데 언제까지 이렇게 살 거야. 이제 나밖에 없는데. 누나가 나한테는 이러면 안 되잖아. 나한테는.”
답답함에 일그러진 동생의 표정. 한심한 누나 때문에 고통스럽다는 그때 그 표정.
“나는 너 안 보고 싶어. 가.”
한주는 불길을 덮을 정도로 많은 풀을 집어던졌다. 불은 사라지고 하얀 연기가 가득했다. 한주는 그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어린 한주는 성냥이 만든 불꽃을 보고 마음을 뺏겼다. 시럽이 묻은 딸기가 예쁘게 박힌 생케이크보다 초에 붙은 작은 불이 더 예뻤다. 하얗고 파랗고 빨간 불. 공중에 떠서 바람과 입김에 흔들리는 투명한 그림. 한주는 불을 발견했을 때 처음으로 ‘아름다움’이라는 단어를 마음으로 느꼈다. 가스레인지 레버를 돌려 왕관 같은 불꽃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드럼통에 붙은 불 속으로 장작을 집어넣을 때마다 사랑하는 동물의 입에 먹이를 넣어 주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불에게 머리와 등이 있었다면 한주는 하염없이 불을 쓰다듬었을 것이다. 화염이 흔들릴 때 나는 바람과 파도를 닮은 소리. 수분이 사라지면서 뒤틀리는 목재에서 들리는 ‘딱딱’ 소리는 음악 같았다. 한주는 불이 좋았다. 꽃을 좋아하고 구름을 좋아하고 음악을 좋아하는 것처럼 불을 좋아했다. 아름답지만 손을 대면 안 된다는 것을 안다. 불을 지르고 싶지 않았다. 불로 무엇인가를 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걸 이해하지 못했다. 위험하다고만 했다. 왜 그걸 그렇게 빤히 쳐다보고 있냐고 불길한 눈으로 물었다. 한주는 평생 오해받으며 살아왔다. 해야 할 일을 열심히 하지 않고, 종종 게을렀고, 모두에게 친절하지 않았고, 원치 않는 옷을 입지 않고, 종종 학교에 가지 않고, 슬픈 사람의 곁에 머물거나 이야기를 들어 줬을 뿐인데, 한주는 이상한 애가 되어 있었다. ‘되바라진 년.’ ‘까진 년.’ ‘미친년.’ 한주는 사람들이 자신을 그렇게 부르는 게 싫었다. 하지만 그렇게 보이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건 더 싫었다. 왜 그렇게 나를 미워할까. 나는 누구에게도 잘못한 적 없는데. 까진 게 나쁜가. 안에 있으면 괜찮고 바깥으로 보이면 나빠지나. 속살. 피. 뼈. 몸 안에 갇힌 온갖 물과 진액들. 그게 뭐라고. 그 덕에 살고 있으면서. 한주는 자신이 그렇게 보이는 게 부끄럽지 않았다. 단지 번거롭고 피곤할 뿐. 가족도 그랬다. 아버지는 차고 건조했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경멸의 눈빛을 보였다. 고모들과 친지들은 대놓고 혀를 차며 사랑과 염려를 가장한 비난을 일삼았다. 고모는 오빠를 버려두고 멋대로 죽었다고 한주의 엄마를 미워했고 엄마의 얼굴을 꼭 닮고 목소리까지 비슷한 한주도 미워했다. 지 엄마와 똑같이 오빠 힘들게 할 상이라고 했다. 덜 마른 풀이 뿜어내는 매캐한 연기 속에서 한주는 눈을 가늘게 뜨고 밑동만 남은 그루터기에 앉아 밤으로 물들어 가는 산을 봤다.
*
운전석에 앉은 산수는 희미한 그림자로 어른거리는 누나를 봤다. 너무하다. 너무해. 서운하고 화가 났다. 어떻게 저리 매정할 수 있나. 당장 내가 죽어도 표정 하나 바뀌지 않을 것 같았다. 한주가 주워온 개를 데리고 갑자기 사라져 버린 건 산수에게 큰 상처로 남았다. 세월이 흘러 둘 사이에는 남매의 정이나 사랑 같은 것은 남지 않았다. 언쟁이나 싸움조차 없었다. 어쩌다 산수가 손을 내밀면 한주는 잡지 않았다. 산수는 수도 없이 누나의 마음을 헤아리려 노력했다. 왜 그랬을까. 왜 그래야 했을까. 알 수 없었지만 그래도 이렇게 애를 쓰고 염려하고 노력하는 것이 가족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누나는 아니었다. 한 번도 동생의 마음을 궁금해 하거나 감정이나 기분을 살피지 않았다. 수도 없이 방문을 두드렸지만 정작 누나는 내 방을 노크한 적이 없었다. 자신이 이런 마음으로 사는 걸 뻔히 알면서 떠났고 이 상태로 긴 세월 내버려뒀다. ‘처음 보는 개에게는 이렇게 평생 마음을 쏟으면서…… 나는 개보다 못하구나. 죽은 개새끼보다 못한 새끼구나.’ 산수는 당장이라도 파킹을 풀고 액셀을 깊게 밟아 빨리 여기를 떠나고 싶었다. 하지만 이대로 가면 영영 누나를 잃어버리게 될 것 같았다. 산수는 두려웠다. 나쁜 상상만으로도 심장이 쪼그라드는 것 같았고 실제로 호흡도 힘들어졌다.
한주가 열여섯. 산수는 열둘. 엄마가 죽었다. 탁자에 단정하게 놓인 노트와 빗. 침대에 누워 묘한 표정으로 눈 감은 엄마는 긴 시간 미동도 없는 굳은 모습으로 스스로를 죽였다는 것을 알렸다. 산수가 먼저 발견했고 나중에 한주의 손목을 끌고 왔다. 왜 그러냐는 물음에 산수는 아무 답도 하지 않았다. 한주는 손목을 움켜쥐고 있는 동생의 손 떨림 속에서 감당할 수 없는 커다란 파도 같은 것이 저 멀리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집에 도착하니 아버지가 엄마를 흔들고 있었다. 소리를 지르며 엄마에게 말을 걸었고 초조한 듯 서툴고 거친 손으로 팔을 주무르고 가슴을 두드렸다. 매트리스가 흔들리며 낡은 스프링 소리가 났다. 한주는 그 순간 눈을 감았다. 기억하려 했다. 그날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날이었어. 군청색 하늘 위로 뜬 금성이 크고 밝았던 날이었지. 산수는 살면서 처음으로 큰 슬픔을 경험한 듯 보였지만 한주는 어째서인지 평온을 느꼈다. 당시 엄마는 어떤 이유로 인해서 앞을 보지 못했다. 한 달 내내 울기만 했고 그 눈물에 눈가가 짓무르고 나중엔 눈동자도 흐리게 만들었다. 한주는 끝내 몰랐다. 엄마가 왜 그렇게 울었는지. 엄마는 누구에게도 마음과 감정을 말하지 않았다. 애석한 건 끝내 엄마에게 질문할 수 없다는 거였다. 한주는 가끔 물속에 떨어지거나 달리는 차에서 뛰어내리는 상상을 했다. 타오르는 불속에 숯처럼 붉어지고 싶었다. 연기에 질식해 죽는 것도 좋겠다. 그 영상과 그림은 머릿속에 오래된 그림처럼 걸려 있다. 그런 짓은 절대로 하지 않고 할 생각도 없다.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다만 왜 나는 이런 그림이 걸린 어두운 미술관에 들어가는 걸까. 두렵고 궁금했다. 엄마가 있었다면 분명히 이 마음이 뭔지 알 것 같았다. 이 그림 없애고 싶은데 방법을 모르겠다. 하지만 한편으론 포기하고 체념했다. 엄마도 몰랐겠지. 방법을 알았다면 내 곁에 있었을 테니까.
산수는 한주를 볼 때마다 본능적으로 두려움을 느꼈다. 어느 날 갑자기 누나도 엄마처럼 그렇게 자신의 곁을 떠날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누나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일삼고 멍한 표정과 눈으로 현실과 유리된 듯 허공에 떠서 지내는 모습을 볼 때마다 엄마가 죽던 날의 떨림이 피부에 느껴졌다. 원치 않았으나 누나가 엄마 뒤를 따르는 모습을 상상했다. 그 이미지가 워낙 강렬해 사실이 아닌데도 겪은 것처럼 기억됐다. 산수는 몇 번이고 나쁜 생각과 예감을 부정했고 떠오른 상상을 머릿속으로 바로잡아야 했다. 열쇠를 돌려 시동을 껐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몰라도 그렇게 되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
연기를 휘젓고 산수가 한주의 곁에 다가갔다. 그리고 말했다.
“말해 줘. 거기에 왜 간 거야. 왜 다시 방화를…… 그래. 좋아. 사정이 있었겠지. 알아. 이런 말 하기 싫은 거. 누나 말대로 몇 번이고 설명했다는 것도 알아. 그때 그 이야기를 해달라는 게 아니야. 그냥 나는. 갈 때 가더라도 누나가 지금 괜찮다는 걸 확인이라도 하고 싶어. 그게 그렇게 어려워? 그냥 나한테 말하는 게 그렇게 힘드냐고.”
한주는 대답 대신 모닥불 앞에 의자를 놓았다. 잘 마른 장작 세 덩어리. 작은 나뭇가지와 마른 잎사귀. 한주는 크게 숨을 들이마신 뒤 일정한 바람이 새어 나오도록 길고 가늘게 숨을 뱉었다. 불은 금방 커졌다. 숨결대로 불은 흔들리며 커졌고 장작의 결 깊숙한 곳으로 타들어갔다. 작고 붉은 점이 장작에 문신처럼 하나 둘 새겨지기 시작했다. 불과 가까운 한주의 무릎이 분홍색으로 물들었다. 알루미늄 호일에 감자 세 알과 옥수수 두 개를 감싸고 불을 헤집어 적당한 자리를 만들고 하나씩 집어넣었다. 열기와 불티가 하늘에 퍼졌다.
“이제 숯에 불 붙었다. 감자랑 옥수수 좀 구울 테니까 먹고 가.”
둘은 밤이 만들어내는 평온한 고요 속에서 불을 봤다. 이 순간 산수는 뭐라고 설명할 수 없는 행복을 느꼈다. 어지러운 일들. 분주하고 번거로운 일상다반사들 다 내버려두고 여기에서 누나와 함께 며칠만 지내고 싶었다. 별다른 말없이 바람처럼 시간이 그냥 흘러갔는데 답답하지 않았고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초조한 마음도 없었다. 고소한 감자와 옥수수 냄새가 몸과 마음까지 고소하게 만드는 것 같았다. 한주는 보석처럼 반짝이며 빛과 열을 내는 불을 보며 말했다.
“그날 개를 치었어. 경찰에게 몇 번이고 말했던 이야기야. 기자에게도 말했지. 그런데 아무도 몰라. 누구도 알려 하지 않았고 나는 몇 번이고 말했는데 사람들은 내가 사실을 감췄다고만 하더라. 하지 않은 일을 말하라고 털어놓으라고 하더라. 하려고 했던 일이 무엇인지 고백하라고. 가족들도 심지어 너도 그랬어. 이제는 다 이해해. 사람들은 거짓말을 하기 마련이고 뉴스는 사실만 보도하니까. 내가 한 말이 변명으로 느껴지겠지. 그날 나는 놀랐어. 차에 느껴지던 작지만 분명하게 전해지던 충격. 그리고 외마디 비명. 하얀 개였는데 머리에서 흐른 피에 몸이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어. 지금도 그 느낌 그 진동 그 소리 생생하게 떠올라. 그 개를 살릴 수만 있다면 뭐든 했을 거야. 그런데 이미 숨이 끊어진 뒤였지. 내 입에서는 입김이 뿜어져 나오는데 개의 코와 입에서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거든. 그때 솜뭉치처럼 작은 강아지 한 마리가 죽은 개 쪽으로 오더라고. 그 애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모르는 듯했어. 나는 본능적으로 강아지가 죽은 엄마를 보지 못하도록 껴안았어. 그리고 뒷좌석에 태웠지. 그 개를 거기에 둘 수 없었어. 겨울이었고 아스팔트였고 너무 추웠으니까. 죽었어도 그렇게 춥고 딱딱한 곳에 누워 있으면 안 되니까. 하지만 겨울이었어. 얼어붙은 땅은 강철 같더라. 나뭇가지와 손가락으로 아무리 파내도 작은 구멍조차 낼 수 없었지. 손바닥이 찢어지고 손가락에서 피가 흘러 땅을 적셔도 땅은 부드러워지지 않았어. 어쩔 수 없이 나뭇잎과 나뭇가지로 몸만 덮어 주고 돌아와야 했지. 그런데 그 밤 근처에서 불이 난 거야. 다음날 그 장소를 찾았을 때 개는 타버렸어. 까만 숯불처럼 그림자처럼 간신히 형체만 남은 채. 왜인지 모르겠지만 당시 경찰은 내 손톱에 낀 흙과 상처 난 손이 방화의 증거라고.”
한주는 나뭇가지로 숯불을 몇 번 뒤집었다. 불꽃이 잠시 커졌고 바람에 불티가 휘날렸다.
“산수야. 그 시절 나는 사람이 싫었어. 내가 사람이란 것도 싫었어. 아마 겨울이가 없었다면 나는 살아갈 이유도 의미도 없었기에 그만 살았을지도 몰라. 하지만 나는 겨울이를 키우기로 결심했어. 그리고 다짐했지. 절대로 내 엄마처럼 새끼를 내버려두고 먼저 가지 않겠다고. 사고로도 죽지 않겠다고. 나는 동물이 좋아해 주는 사람동물이 되고 싶었어. 그게 내가 원하는 전부였어. 겨울이는 내 새끼였어. 그런데 이상하게 내 새끼가 나를 키우는 것 같았단다. 살면서 누구도 나를 진심으로 염려해 주는 이는 없었어. 두려운 생각을 하고 있거나 오래전 기억에 빠져 어둡고 깊어지면 겨울이가 짖었어. ‘정신 차려!’ ‘그러지 마!’ 마치 사랑하는 사람이 혼내듯. 짖고 또 짖었어. 때론 못된 꿈을 꾸고 있으면 겨울이가 짖는 소리가 들렸어. 저 먼 하늘에서. 저 깊은 바다에서 울리는 것 같은 아득한 소리. 정말로 깜깜한 밤바다와 먹구름 너머에 하얀 빛이 머물러 있는데 거기에서 멍멍, 하고 짖는 소리가 들리는 거야. 그렇게 악몽에서 깨어나기도 했지. 개는 내가 소리 내어 읽어 주는 책을 좋아했어. 그 소리 노래처럼 들리는 걸까. 그 옆에 앉아 창문을 열어 주면 더 좋아했지. 개가 나를 반가워해 주는 것. 커다란 꼬리가 느리게 왔다 갔다 하는 것. 모두 행복이었고 그것만으로도 내 삶은 충분했단다. 그랬던 겨울이가 내 곁을 떠난 거야. 나는 그 애를 진짜 엄마에게 돌려주고 싶었어. 비록 내가 앗아가고 말았지만 그렇게라도 해줘야 할 것 같았지. 그래서 거기에 다시 갔고 불을 피웠던 거야. 사람들은 죽은 이를 왜 태우는 걸까. 왜 살과 피와 뼈를 이 땅에 남겨 두지 않으려 하는 걸까. 나는 그걸 이제 알 것 같아. 열기와 빛. 연기와 냄새. 그 뜨거움. 그 통증. 나중엔 뜨거움과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 부드러운 몸과 마음이 될 테니까. 산수야. 걱정 마. 나는 행복했어. 잘살았고 남은 날들도 잘살 거야. 비록 네가 원하는 방식은 아니지만.”
산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감자 껍질을 벗겼다. 고소하고 뜨거운 알맹이를 입에 넣고 천천히 씹었다. 걱정 마, 라는 누나의 다정한 말에 안심이 되면서도 마음 깊은 곳에서 불쑥 솟아오르려는 뜨거움에 자꾸 헛기침이 나왔다. 행복했어, 라는 그 말에 눈물이 나려고 했는데 안도의 마음인지 억울한 마음인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그 일은 한주에게도 큰 사건이었지만 산수에게도 큰 사건이었다. 한주가 사라지고 산수의 삶은 송두리째 바뀌었다. 영원한 겨울이 시작되는 것 같았다. 빛이 비춰도 춥고 비가 내려도 메말라 갔다. 먹구름은 온종일 눈을 쏟아냈다. 가끔씩 비추는 태양에도 의아했다. 저렇게 맹렬한 빛인데 이렇게 추울 수 있다니. 산수는 생각했다. ‘맹세컨대 나는 누나의 말을 믿었어. 어떤 행동을 하더라도 실망하지 않았어. 비난하거나 비판하는 마음조차 없었어. 하지만 점점 나는 누나에게 아무도 아닌 사람이 됐지. 나는 언제나 누나의 말이 어려웠어.’
“너는 내 말을 믿고 싶은 거야. 실제로 믿는 게 아니고. 이해를 못 할 수는 있지만 네가 이해할 수 없다고 나보고 달라지라고 하지 마. 유혹당해 본 적 없으면 유혹에 넘어간 이에게 함부로 말하는 거 아니야. 왜 그런 충동에 넘어가는 거냐. 그깟 감정에 왜 이렇게 휘둘리냐. 왜 이렇게 나약하냐. 그 힘이 강해 굴복당하는 거 맞아. 나약한 거 맞아. 그런데 그 힘을 느껴 본 적도 없으면서 그렇게 말하면 안 돼. 유혹의 고통. 욕망의 고통이 뭔지도 모르면서 그냥 그렇게 말해서는 안 돼.”
산수는 항상 누나에게 서운했다. 실망스러웠고 때론 어딘가에 있을 누나를 온 맘을 다해 미워하기도 했다. 하지만 미운 건 누나가 아니라 누나를 떠나게 만든 자기 자신이었다. 끝내 헤아리지 못한, 그래서 누나로 하여금 마음에 있는 말을 할 수 없게 한 자신이 싫고 밉고 실망스러웠다. 산수는 애써 웃으며 말했다.
“그렇다면 다행이네. 다행이야.”
더는 따지지 않았다. 더는 묻지 않았다. 그저 그렇게만 말했다. 다행이라고.
한주는 박스에 깻잎과 가지를 담았다. 옥수수와 감자도 담고 껍질을 벗겨 말린 고구마줄기도 비닐봉지에 넣어 박스에 넣었다. 산수를 위한 회색 비누. 산수의 아내를 위한 갈색 비누. 산수의 딸을 위한 노란 비누도 담았다. 출발하기 전 산수는 창문을 내리고 손을 뻗었다. 한주는 산수의 손을 잡았다. 산수는 다음에 또 오겠다고 했고 다음에는 가족과 함께 오겠다고 했고 연락하면 받으라고 했다. 한주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산수의 자동차가 어둠 속을 뚫고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한주는 그 자리에 서서 손을 흔들었다. 다시 찾아온 고요와 정적.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 소리와 벌레소리가 들렸다. 한주는 담배 한 대를 피웠고 연달아 한 대를 더 피웠다. 붉은 빛이 강해졌다 약해졌다 반복하다가 한 줄의 긴 연기로 사라졌다.
그리고 연기
이해할 수 없는 방식을 이해하게 되는 이해
고통에서 멀어지니 느껴지는 고통.
눈동자 안쪽의 물과 피를 들여다보는 눈동자.
겨울이와 함께 태울 사진을 떼어내는 순간 하얀 벽이 드러났다. 그 한 폭의 휑한 세계 속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아무것도 없는 세계. 이쪽이 아닌 다른 쪽. 천국이나 지옥. 그런 복잡한 세계 말고 텅 비어 있는 세계의 투명한 일원이 되고 싶었다. 아무 의미가 없는 의미. 그 가벼운 무게로 영원히 떠다니는 무엇이 되고 싶었다. 그건 이야기의 상상처럼 비극이 아니다. 하얀 직사각형에 이마를 대고 숨을 내쉬었다.
믿음이 있었다. 이 개는 오래 살 거다. 나보다 오래 살 거다. 이렇게 건강한데 이렇게 심장이 힘차게 뛰는데 쇠약해질 리 없다. 내가 모든 순간 보살필 거야. 늙어 갈 틈 없이 내가 사랑으로 가득 채울 거야. 하지만 아니었다. 겨울이는 서서히 나이를 먹었고 갑자기 늙기 시작했다. 새하얗던 털이 회색빛으로 물들고 이빨이 빠졌고 관절이 나빠졌다. 산책을 오래 하면 금방 절뚝거렸다. 하지만 겨울이는 산책을 하고 싶어 했다. 나는 내 개를 껴안고 숲을 걷고 개울을 건넜다. 날이 갈수록 호흡은 불규칙해졌고 뭘 먹으려고 하지 않았다. 자다가 갑자기 경련을 일으켰다. 아무리 안아 주고 또 안아도 몸은 미지근했고 자꾸만 떨었다. 어느 날부터는 보이지 않는 곳에 숨었다. 사라진 겨울이를 찾는 동안 나는 그날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라도 그럴 것이다. 죽어가는 모습을 누구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을 것 같았다. 하물며 사랑하는 이라면 더더욱 이 모습을 감추고 싶겠지.
도로는 그때와 똑같았다. 산들도, 산 너머 하늘도 그대로였다. 하지만 풍경이 달랐다. 그땐 밤이었고 겨울이었다. 지금은 낮이고 가을이다. 그땐 두려움과 추위로 벌벌 떨었는데 지금은 사방이 반짝거렸고 너무 아름다웠다. 그게 왜 이렇게 억울한 걸까. 나와 겨울이만 여기에 사진처럼 멈춰 있고 우리를 제외한 풍경은 시간에 따라, 계절에 맞게, 착실하게 변해 가고 있었던 것이다. 갓길에 차를 세워 놓고 담요를 두른 겨울이를 껴안고 산으로 올라갔다. 마른 풀과 나뭇가지를 모아 불을 냈다. 이상했다. 그날따라 불이 붙지 않았다. 자꾸 연기만 났고 불이 나더라도 금방 사그라졌다. 나는 큰 불을 만들 생각이었다. 나와 겨울이를 삼켜 춤추는 불꽃과 뜨거운 열기가 되어 마침내 완전한 연기와 그을음으로 소멸될 큰 불을 내고 싶었다. 그런데 아니었다. 불은 커지지도 번지지도 않았다. 사실 나는 겨울이를 불속에 넣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머리로는 마음으로는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으면서도 두려웠다. 아까웠다. 내 새끼. 그 예쁜 털과 부드러운 살과 단단하고 명확한 뼈가 사라지는 것이 싫었다. 누군가 소리를 질렀고 이윽고 사이렌이 들렸다. 불에 태운 건 사진뿐이었다.
집에 돌아와 옆 좌석에 놓은 담요를 껴안고 텃밭으로 갔다. 봄이 오면 꽃을 심으려고 비워 둔 한켠에 겨울이를 묻었다. 겨울이가 좋아하는 책을 생각나는 대로 읽었고 흥얼거리면 좋아했던 노래도 불렀다. 나중에는 소리 없이 입술만 움직였다. 슬픔으로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기도와 식도에 물이 차오르는 듯했고 성대는 시퍼렇게 멍이 든 것 같았다.
누가 나를 안아 줄 필요는 없다. 하지만 무언가 품에 안을 것은 필요했다. 겨울이가 어깨에 고개를 올리고 가만히 있으면 혈관을 타고 도는 어떤 열과 독이 겨울이의 털과 따뜻한 피부 속으로 흡수되는 것 같았다. 내게 있는 나쁜 것 다 가져가는 것 같아 놀라 겨울이를 떼어내면 내 개는 다시 다가와 품으로 파고들었다. 피를 뽑는 마음으로 내게서 그걸 가져간 뒤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겨울이는 내 개가 아니었다. 겨울이는 나를 신으로 삼지 않았다. 나는 그것이 좋으면서도 두려웠다. 다행스러웠고 동시에 서운했다. 여느 개처럼 무조건적으로 나를 바라보거나 기다리지도 않았다. 적당히 떨어져 자신만의 시간을 갖고 무심히 바깥을 바라보는 생물이었다. 대신 겨울이는 내가 자기를 좋아하도록 내버려뒀다. 동물은 스스로 죽지 않는다. 그래서 더 힘들 거다. 얼마나 많은 감정 속으로 들어가야 했을까. 엄마가 죽는 것을 봤고 차에서 내가 내리는 것을 봤고 엄마를 차가운 바닥에 놓고 그 위를 나뭇가지와 낙엽으로 덮는 것을 봤다. 그 사람이 엄마의 피 묻은 손으로 자신을 들어 올리는 것도 내버려둬야 했을 것이다. 겨울이는 그것을 기억하고 있을까. 추억하고 있을까. 엄마를 그리워하고 있을까. 내가 그리워하듯 그렇게? 겨울이는 나를 원망할까. 두려울까. 무서울까. 나중엔 나를 용서했을까?
아직도 벽에 산책 줄이 걸려 있다. 장난감이 바닥에 뒹굴고 있고 사료는 쌀보다 많다. 내 옆에서 나를 바라보던 동그랗고 까만 눈동자. 나는 그 눈을 밤하늘이라고 불렀다. 청명한 밤하늘. 영원하고 차가운 우주. 거기에 내가 비춰 보이는 것이 좋았다. 나중에는 깊숙한 곳에서부터 흐려지며 구름이 끼던 하늘. 어둠 속에서 내리던 눈과 비. 작업실에 들어가 리모컨을 눌렀다. 멈췄던 곳에서부터 음악이 재생됐다. 나는 잠시 눈을 감고 소리가 피부에 스며들기를 기다렸다. 인덕션 전원을 누르고 굳어버린 비누 베이스를 녹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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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2022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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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리자
- 2025-06-01
그리고 밤과 가을이 김연수 1 지난여름, 정기에게는 세 가지 고민이 있었다. 하나는 눈에 문제가 생겼다는 것. 길을 걸어갈 때면 날벌레들이 달려드는 것 같아 혼자 손사래를 친 적이 여러 번이었다. 기사를 쓰려고 책상 앞에 앉으면 머리 뒤쪽에서 번개 같은 게 번쩍이기도 했다. 노안이 찾아온 건 벌써 몇 년 전의 일이었다. 그때 안과에 가서 진료를 받고 안경도 새로 맞췄다. 나이가 들면 서서히 시력이 나빠지리라고만 생각했지, 거기에 더해 전에 없던 것들이 보이는 증상까지 생길 줄은 미처 몰랐다. 그런 처지가 되고 보니 책 읽는 일이 힘들어졌다. 평생의 즐거움이었던 독서가 성가신 일이 되면서 생활은 성기어지고 마음은 허술해졌다. 더 오래전, 나이가 들면 활자 같은 건 멀리하고 자연을 벗 삼아 소일하며 세속적 가치관에 물든 마음을 고치리라 생각하던 때가 있었다. 그때는 은근히 노년을 기대하기도 했지만, 그런 시절은 너무나 빨리 지나갔다. 두 번째는 포항에서 에너지공학과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딸 민지와의 관계가 점점 멀어진다는 점이었다. 그건 서울과 포항이라는 지리적 거리감 때문만은 아니었다. 작년에 집을 새로 구하면서 민지는 아빠인 정기에게 도와달라고 부탁을 해 왔다. 그 과정에서 이사의 이유가 언제부터인가 짝꿍처럼 붙어 다니던 여자 선배 희선과 같이 살기 위해서라는 사실을 그는 알게 됐다. 그는 민지와 희선이 단순한 선후배 사이가 아닐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몇 번 딸에게 희선에 대해 물었지만, 민지의 반응은 모호했다. 그러다가 정기는 그 일에 대해 더 묻지 않게 됐다. 한 번은 민지가 “나는 아빠가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 아닐 수도 있어요”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앞뒤 대화의 맥락으로는 그 일에 대한 답변이 아니었음에도 정기는 둘 사이의 관계에 대한 질문의 대답으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마지막 고민은, 자신이 담당한 부고란에 누구의 죽음을 다룰 것이냐는 점이었다. 최종 후보는 미국의 SF 소설가와 전 여당 대표, 둘 중 하나였다. 아무도 읽지 않는 신문 부고란에 누구를 쓰든 무슨 상관이겠느냐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정기에게는 앞의 두 고민만큼이나 심각한 고민이었다. 앞의 두 고민은 과거의 일에서 비롯된 결과를 수습하는 것이었지만, 세 번째 고민은 미래를 결정하는 것이라고 정기는 생각했다. 과연 소설가냐, 정치인이냐. 정기의 고민은 여름만큼이나 깊어졌다. 2 노트북 화면 너머로 신문사 후배인 은영이 지나가고 있었다. “휴가는 즐거웠어?” 정기가 알은체를 했다. “줄곧 비만 내렸잖아요. 태풍이 온다는데 어떻게 해요?” 잔뜩 낯을 찌푸리며 은영이 말했다. “태풍이 온다는 예보가 있었으면 가지 말았어야지.” “그런 거 따지고 들면 아무 데도 못 가죠. 태풍 지나갈 때 제주 안 있어 봤죠? 그게 진짜 여름이더라구요. 바람이 몰아치는데, 어휴, 엄청났어요. 그러더니만 휴가 마지막 날이 되
- 관리자
- 2025-06-01
바람 부는 날 정기현 단지는 어둠에 잠겨 있었다. 펜스와 인접한 아파트 건물들은 가로등 불빛을 받아 그 형태를 짐작할 수 있었으나, 단지 안쪽으로 시선을 옮기면 어둠의 수심이 깊어져 모든 것이 감추어졌다. 아침이고 저녁이고 긴긴 태양 볕 아래 그 흉물스러움을 남김없이 드러내던 여름과는 달리, 겨울의 단지는 어딘가 의뭉스러워 보였다. 이야기를 가득 품은 고성처럼 보이기도 하였다. 내가 살고 있는 주택 앞, 단군 이래 최대 규모의 재건축 단지라는 별칭이 붙은 아파트 단지는 조합원과 건설사 간 충돌로 공사가 중단되어 짓다 만 아파트 건물들이 2년 동안 그대로였다. 1만 5천 가구를 수용할 수 있다며 대대적으로 착공에 들어갔던 대규모 단지는 2차선 통행로를 중심으로 양분되어 있었는데, 문득 그 길을 걷고 싶다는 생각이 든 것은 이번 겨울부터였다. 출근 버스를 타기 위해 정류장까지 가려면 펜스가 세워지기 전보다 30분씩은 더 둘러 걸어야 했다. 고개를 푹 숙이고, 아직 잠에서 온전히 깨어나지 못한 상태로 정류장까지 걸을 때면 아파트 중앙 통행로에서 불어오는 거센 바람 소리가 들려왔다. 솔바람, 산들바람 아니고 토네이도에 가까운 세기였다. 물론 토네이도를 직접 겪어 본 적은 없지만···. 사람 하나는 거뜬히 날려 버릴 듯 기세 좋은 바람이었다. 단지 바깥은 바람 한 점 없이 잠잠했으므로, 이는 분명 바람길을 잘못 낸 시공 탓에 불어 대는 건물풍일 터였다. 거센 바람에 펜스가 흔들리며 콰챵- 하는 소리를 낼 때면 살을 에는 새벽녘 추위도 어쩐지 더욱 견디기 어려워져 굳게 잠긴 펜스를 원망하게 되었다. 자물쇠를 열고 단지 가운데 통행로로 다닐 수 있다면 그 끝의 버스 정류장에 금세 도달할 텐데. 아침마다 30분씩은 더 자고 나올 수도 있을 텐데. 내게는 바람쯤이야 잠을 조금이라도 더 잘 수 있다면 얼마든지 견딜 수 있는 문제였다. 한파 특보 경보 문자가 알람보다도 일찍 울려 잠을 깨웠던 날, 나는 빌라 현관을 벗어나 오른쪽 인도로 걷는 대신 길 건너 펜스 쪽으로 향했다. 펜스 출입구에는 주먹만 한 자물쇠가 굳게 걸려 있었다. 화풀이라도 하듯 자물쇠를 세게 두 번 당겨 보았는데 그것만으로도 자물쇠가 훌렁 풀려 버렸다. 펜스 안쪽으로 손을 쏙 넣어 자물쇠가 걸려 있던 걸쇠를 풀고 출입문을 열자 눈앞에 펼쳐진, 소리로만 접하던 바람의 길. 이용자가 나 혼자뿐이라 길은 실제 너비보다도 광활해 보였다. 건축 자재들, 내부 설비들이 군데군데 널브러져 있었고 고목처럼 주차되어 있는 승합차도 몇 보였다. 길 가장자리에도 단지로의 진입을 막는 펜스가 설치되어 있어 잠시 길과 나뿐인 세계에 진입한 것만 같았다. 통행로는 야트막한 고갯길이었다. 바람은 듣던 대로 거세었다. 나는 두 손으로 외투를 꼭 여민 채 거센 바람에 맞서 걸었다. 두 발이 동시에 떨어지는 순간 바람에 휘말려 공중으로 붕 떠오를 것 같아 한 발이 떨어지면 다른 한 발은 땅에 꼭 붙어 있도록 의식하며 걸어야 했다. 고갯길의 고
- 관리자
- 2025-06-01
저번까지 읽은 이후로 이어보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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