ㅊㅅㄹ
- 작성일 2023-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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ㅊㅅㄹ
최진영
서진은 집에 들어서자마자 로봇청소기를 작동시켰다. 작년 크리스마스이브에 술에 취한 상태에서 12개월 할부로 구매한 청소기인데, 여태 ‘괜히 샀다’는 후회 한 번 없이 저녁마다 편리하게 사용하고 있었다. 이전에는 청소하느라 바빴을 시간에 반신욕을 할 수 있다는 점이 가장 만족스러웠다. 동네 단골 빵집에서 포장해 온 호밀빵 샌드위치를 먹으며 욕조에 물을 받았다. 오디오북을 틀어 놓고 반신욕을 하던 중에 에세이에 쓸 만한 문장이 떠올라 핸드폰 메모장에 기록했다. 서진은 동네의 작은 서점에서 진행하는 독서모임에 일 년째 참여하고 있었다. 매달 첫째 주와 셋째 주 수요일 저녁, 여덟 명의 회원이 서점 한편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2주간 읽은 책에 대한 감상을 나누고 직접 쓴 에세이를 발표하는 모임이었다. 서진의 에세이를 읽고 회원들은 ‘문장이 담백하다’ ‘글이 간결하고 깔끔하다’ ‘윤리관이 높은 것 같다’ ‘자신에 대한 엄격함이 엿보인다’ ‘공감 능력이 뛰어난 것 같다’고 말했다. 회원들의 말을 들을 때마다 서진은 자신이 과연 그런 사람인가 돌아봤고, 그들이 짐작하는 사람처럼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회원들은 신중하게 단어를 골라서 천천히 말했다. 자기 말에 상대가 상처 받지 않을까 염려했으며 적당한 선과 예의를 지켰다. 서진은 독서모임이 지금 회원 그대로 가능한 오래 지속되기를 바랐다. 일상에서 만나는 타인에게는 기대하기 힘든, 상대를 깔보지 않는 높은 교양과 섬세한 배려를 한 달에 두 번은 체험할 수 있으니까.
반신욕을 마친 뒤 위스키 온더록을 만들어 소파에 앉았다. 볼륨을 소거한 채 틀어 놓은 텔레비전에서는 리얼리티 소개팅 프로그램이 나오고 있었다. 연애를 원하는 솔로들이 며칠 동안 합숙 생활을 하면서 진정한 사랑을 찾는다는 내용의 프로그램인데, 신청률도 시청률도 대단하다고 했다. 서진은 위스키를 조금씩 마시며 시시각각 바뀌는 화면의 자막을 읽었다. ‘너무 감동적이야’ ‘변하지 않을 자신 있어요’ ‘근데 저는 아직 제 마음을 잘 모르겠어요’ ‘충분히 표현했다고 생각해요’ ‘실망이 크죠’ ‘마음처럼 쉽지가 않네요’ 화면 속 여자는 인터뷰 중 말을 잇지 못하다가 울음을 터트렸다. 서진은 리모컨을 들고 볼륨을 한 칸 높였다. 여자의 목소리가 작게 들렸다.
또 상처받고 싶지 않아요. 그 지옥에 다시 들어가기 싫어요. 다시는 누구도 사랑할 수 없을 것 같아요.
서진은 잔을 가볍게 흔들어 얼음을 녹이며 여자의 말을 가만히 따라 했다. 사랑, 상처, 지옥이란 단어가 마치 옛사람이 쓰던 말처럼 느껴졌다. 무거운 그 단어들의 중심에서 살던 때가 서진에게도 있었다. 사랑은 날카로운 얼음 조각처럼 서진을 찔렀다. 용암처럼 불타올라 서진을 녹였다. 태산처럼 솟아올라 서진을 짓눌렀다. 그렇게 그 시절의 서진은 죽었다. 흉터 같은 화석이 되었다. 그러므로 이제 다 지나간 일이었다.
지난밤에도 서진은 남편과 사랑한다는 말을 주고받았다. 지난밤의 ‘사랑해’와 두 사람이 막 연애를 시작했을 때 주고받던 ‘사랑해’는 같지 않았다. 이전에는 사랑을 다이아몬드처럼 여겼다. 잃어버릴까 봐 조마조마했다. 다른 사람의 것과 비교했다. 이것이 진짜인지 종종 의심했다. 언제나 조금은 부족하다고 느꼈다. 지금 서진에게 사랑은 공기와 같았다. 고산지대에 오른 사람처럼 30~40% 이상 희박해져야만 위기를 체감할 수 있을 것이다. 평소에 느끼는 미세한 부족함은 다른 것으로 채울 수 있었다. 기념일을 맞이해 5박 6일간 여행을 떠나는 것, 봄밤의 연극 관람, 여름 주말의 락페스티벌 공연, 가을의 지리산 등반 등으로. 흘러넘치는 사랑보다는 부족한 편이 안정적이었다. 쏟을까 불안해하기보다 아직 반이나 남았다고 생각하는 게 편했다. 자기 전에 마시는 조니워커 블루라벨 온더락 두어 잔 또한 사랑의 부족함을 채울 수 있는 훌륭한 방편이었다. 위스키를 마시며 서진은 중얼거렸다. 이제 나는 졸업했어. 다시 돌아갈 일은 없지. 핸드폰의 알람이 울렸다. 회식이 길어져 늦을 것 같다는 남편의 메시지였다. 서진은 답장을 보내고 텔레비전을 껐다.
암막커튼으로 외부의 빛을 완전히 차단하고 침대에 누웠다. 핸드폰으로 유튜브를 켜고 ‘수면asmr’을 검색했다. 세 시간 동안 빗소리만 틀어 주는 영상을 터치한 뒤 핸드폰을 머리맡에 두고 어둠을 응시했다. 텔레비전 속 여자의 표정과 말이 잔상처럼 남아 아른거렸다. 서진은 스물아홉 살의 여름을 떠올렸다. 애인과 헤어진 뒤 아무나 붙잡고 하소연하며 울던 그날들. 배신감, 원망, 후회, 지울 수 없는 상처 등을 간증하듯 말하고 다녔다. 친구들과 같은 팀 동료들은 인자한 표정으로 서진의 반복되는 말을 들어 줬다. 다 잊고 보란 듯이 잘사는 것이 최고의 복수라는 말로 서진을 다독였다. 그러나 서진은 부족함을 느꼈다. 말하면 말할수록, 울고 또 울어도, 사람들이 자기를 보듬어 줄수록 갈증 끝에 소금물 마시듯 괴로움만 커져 갔다. 뙤약볕이 작열하던 주말 오후, 집에 틀어박혀 밥도 먹지 않고 편파적 기억과 싸우던 서진은 모자를 눌러쓰고 집을 나섰다. 내장이 끓어오르고 숨이 막혔다. 입을 열면 구렁이가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서진은 동네의 천변을 향해 빠르게 걸었다. 지칠 때까지 걷거나 달리다 보면 뜨거운 감정이 조금씩 미지근해지곤 했으니까. 하지만 그날은 아무리 걸어도 해소되지 않았다. 몸이 지쳐 갈수록 몸속의 구렁이는 더욱 사납게 뒤챘고, 역겨운 그것을 누구한테든 토해 내고 싶다는 생각만이 부풀어 올랐다. 땀이 흘러 얼굴이 따끔거렸다. 허기로 손이 떨렸다. 물이라도 마시자는 생각으로 편의점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건너편의 작은 카페가 눈에 들어왔다. 서진은 처음부터 그곳에 가려고 집을 나선 사람처럼 서둘러 길을 건넜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주문한 뒤 화장실에 들어가 모자를 벗고 얼굴을 씻었다. 갑자기 눈물이 쏟아져 세면대를 붙잡고 소리 죽여 울었다. 어지러워 주저앉았다가, 손바닥으로 얼굴을 감싸 쥐면서 정신을 차리자고 중얼거렸다. 핸드타월로 얼굴을 대충 닦은 뒤 화장실을 나섰다. 카운터 바로 옆 테이블에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이 놓여 있었다. 카페 주인이 서진을 보고 미소 지었다. 미소를 돌려주고 싶었지만 웃을 수 없었다. 서진은 의자에 앉아 커피를 두어 모금 마셨다. 올여름은 유난히 뜨거운 것 같아요. 카페 주인이 서진에게 말을 걸었다. 서진은 속삭이듯 주인의 말을 따라 했다. 카페의 넓은 창밖에서 사람들이 음료를 주문했다. 테이크아웃 위주로 운영하는 카페 같았다. 주인은 재빠르게 음료를 만들었다. 음료를 받아들고 웃으며 떠나는 사람들을 바라보다가 서진은 충동적으로 주인에게 말했다. 저기, 괜찮으시면 제 얘기 좀 들어 주시겠어요? 주인은 고개를 끄덕였고, 서진은 순서 없이 생각나는 대로 말했다. 두어 달 전의 이별, 연애 중 반복했던 지긋지긋한 다툼, 의심, 오해, 질투, 인내, 실망, 집착과 행패. 이야기 중에 손님이 오면 주인은 서진에게 양해를 구한 뒤 음료를 만들었다. 서진은 초조하게 입술을 씹으며 주인이 어서 자기에게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바라던 대로 헤어졌으니 그 사람은 행복하겠죠. 저만 불행한 것 같아서 억울해요. 사랑 끝에 남은 게 억울함뿐이라니 그게 제일 억울해요. 다시는 누구도 사랑할 수 없을 것 같다는 말로 서진의 이야기는 끝났다. 주인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카페의 창은 커다란 액자처럼 눈부신 세상을 담고 있었다. 서진은 공허한 눈빛으로 창 너머를 바라봤다. 찬란한 빛, 무성한 잎, 웃으며 지나가는 사람들, 토요일의 활기, 여름날의 열기. 주인은 천천히 일어나 음료를 만들었다. 서진은 꼼짝할 수 없었다. 일어나고 싶었지만, 카페 바깥으로 나가서 환한 빛에 속하고 싶었지만,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 주인이 새로 만든 음료를 서진에게 건네며 말했다. 달콤하고 상큼한 청포도 에이드예요. 마시면 기운이 좀 날 거예요. 서진은 연둣빛 음료를 바라봤다. 마음속 구렁이는 사라지고, 그 자리에 부끄러움이 차올랐다. 처음 본 사람에게 내가 무슨 말을 한 건가.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나. 서진은 고개를 숙이며 주인에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큰 실례를 했어요. 주인이 대답했다. 별말씀을요. 그리고 다시 음료를 권했다. 서진은 에이드를 한 모금 마셨다. 연이어 꿀꺽꿀꺽 들이켰다. 푸르고 달콤했던 어떤 시절을 모조리 마셔서 없애버리듯. 음료 값을 치르겠다고 서진은 말했다. 주인은 웃으며 대꾸했다. 아니에요. 오늘은 제가 대접하고 싶어요. 앞으로도 말벗이 필요할 때 종종 들러 주세요. 서진은 알겠다고, 감사하다고 대답한 뒤 카페를 나섰다. 집을 향해 걸어가며 다짐했다. 이제 그만. 여기까지. 다시는 돌아보지 않을 거야. 이후 서진은 자기와의 약속을 지켰다. 지나간 사랑과 이별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그 카페에 다시 가지 않았다. 오랜만에 그 시절을 떠올리며 서진은 안도했다. 모두 지난 일이란 사실이 새삼 다행스러웠다.
아스라한 빗소리 속에서 잠에 들려는 찰나, 카톡 도착 알람이 연이어 울렸다. 눈을 감은 채로 다섯, 여섯, 일곱까지 세다가 서진은 신경질적으로 핸드폰을 찾아 쥐며 중얼거렸다. 이 시간에 무례하게 누구야. 카톡 창을 열었다. 발신인은 우누리. 낯선 이름이었다. 대화창을 열었다. 하얀 말풍선이 가득 떠올랐다.
-안녕 유시진
-나 이은율
-기억하지 작년 양평 영캠
-그때 약속했잖아
-진짜 중요한 비밀 생기면
-서로 털어놓고 절대 비밀 지키자고
-귀찮다고 생까지 말기
-우리 진지했으니까
-근데 왜 너 프사 없음?
-무튼 톡 할까 말까 고민했는데
-그래도 넌 들어 줄 거 같아서
-우리 잘 통했으니까
-쪽팔리지만 선톡함
-나 ㄹㅇ 죽고 싶어
서진은 메시지의 핵심 단어를 짚어 가며 상황을 추측했다. 발신인 이은율. 수신인 유시진. 말투를 보니 청소년. 양평 영캠이라면…… 영어캠프? 서진은 메시지를 입력하는 칸에 ‘번호를 잘못 아셨습니다’라고 썼다가 지웠다. ‘저는 유시진이 아닙니다’까지 썼다가 지웠다. ‘제 이름은 윤서진입니다. 번호를 착각하셨어요’까지 썼다가 지웠다. 하얀 말풍선이 올라왔다.
-읽씹이네
-아직 학원?
-무튼 니가 그때 울면서
서진은 대화창을 바라만 봤다.
-자해 그만하라고
-그래 봤자 아무도 내 맘 모르고
-오히려 전부 내 탓으로 돌리고
-나만 억울해진다고 그래서 끊었거든 진짜
-딱 한 번 손바닥에 했는데
-바로 후회하고 치료함
이은율에게 유시진의 대답은 그리 중요하지 않아 보였다. 말풍선 옆의 숫자 ‘1’이 사라지는 것만으로도 위로 받는 것 같았다. 서진은 연이어 올라오는 메시지를 지켜봤다. 이은율은 지금 자해하고 싶은 충동을 겨우 참고 있다고 했다. 너한테 톡 쓰면서 참는 중이야. 너는 내 탓 하지 않으니까. 비웃지 않으니까. 내 말 듣고 우는 사람이니까. 너는 읽씹 하더라도 맘에 없는 소리는 안 하지. 너 아니었으면 벌써 그었을 거야. 근데 나 너무 힘들어.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어. 가만히 못 있겠어. 너무 불안하고. 진짜 미칠 것 같아. 메시지는 거기서 멈췄다. 삼십 분 넘게 기다려도 알람은 울리지 않았다. 서진은 다시 유튜브로 들어가 빗소리를 틀었다. 점점 정신이 또렷해졌다. 현관문 열리는 소리를 듣고 시간을 확인했다. 새벽 두 시를 지나고 있었다. 남편은 씻지도 않고 거실 소파에 누운 것 같았다. 선잠에 들고 깨길 반복하던 서진은 몸을 일으켜 암막커튼을 걷었다. 여명이 밝아 오고 있었다.
*
오전 회의 때까지는 견딜 만했다. 점심을 거르고 책상에 엎드려 단잠을 잔 이후부터 걷잡을 수 없이 잠이 몰려왔다. 서진은 화장실로 가 찬물로 세수한 뒤 핸드크림을 얼굴에 발랐다. 회사 근처 카페에서 에스프레소 두 잔을 주문해 연이어 마셨다. 카페 옆 편의점에서 투 플러스 원으로 판매하는 에너지 드링크와 초콜릿바를 샀다. 회사 건물 옥상에서 찬바람을 맞으며 에너지 드링크와 초콜릿바를 하나씩 먹은 다음 담배를 피우며 생각했다. 이십대에는 며칠 밤도 거뜬히 새웠지. 삼십대에 체력이 약해지긴 했지만 하룻밤 못 잤다고 다음날 바로 무너질 정도는 아니었는데. 체력이 약해진 대신 강해진 부분은 없을까? 서진은 핸드폰을 꺼내 카톡을 열었다. 이은율에게 새로 온 메시지는 없었다. 어쩌면 내가 유시진이 아니란 사실을 눈치 챘는지도 몰라. 그럼 차라리 다행일 텐데. 서진은 오 분 정도 가벼운 스트레칭을 한 뒤 사무실로 돌아갔다. 자리에 앉자마자 옆자리 후배가 파티션 안쪽으로 얼굴을 들이밀며 속삭였다.
부장님 왔다갔어요. 선배 어디 아프냐고, 벌써 갱년기 온 거 아니냐고 묻던데요.
서진은 웃으려고 애쓰면서 대꾸했다.
잠을 좀 설쳐서 그래. 별일 아니야.
후배는 혼잣말하듯 물었다. 그럼 아직 갱년기 아닌 거 맞죠? 책상 위 에너지 드링크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후배는 앉은 채로 의자를 끌며 자기 자리로 돌아가더니 서랍에서 무언가를 한 움큼 꺼내와 서진의 책상에 올려놓았다.
카페인 말고 차라리 이런 걸 먹어요, 선배. 그러다가 진짜 피부랑 위장이랑 다 망가진다니까. 선배 아프면 나도 끝장이에요. 선배 그만두면 나도 다 때려치울 거야.
침울한 표정으로 의자를 질질 끌어 파티션 너머로 사라졌던 후배가 다시 돌아와 덧붙였다.
그리고 선배 입술에 뭐라도 좀 발라요. 핏기가 하나도 없잖아. 보고 있으면 너무 불안해. 니베아 빨간색이라도 사서 발라요. 아니야, 또 까먹을 게 분명하니까 그냥 내가 내일 하나 사올게요.
후배는 거의 울상을 지으며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서진은 후배가 책상 위에 두고 간 발포비타민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챙겨 주는 건 고맙지만…… 하루쯤 컨디션 안 좋은 건 그냥 모른 척해 줘도 좋지 않을까. 언젠가부터 후배는 서진의 피부와 위장과 관절과 뼈 건강을 지나치게 걱정했다. ‘선배 아프면’ ‘선배 그만두면’이란 가정을 습관처럼 반복하는 후배의 말투 때문에 서진은 묘하게 스트레스를 받았다. 점심시간에 책상에 엎드려 잠을 잤다는 이유만으로 갱년기 운운했다는 부장에 대해서도 불쾌감이 일었다. 요즘 부장은 틈이 보일 때마다 ‘갱년기 여성의 증상’을 말하고 다녔다. 서진의 말과 행동을 모조리 여성 호르몬과 연관 지어 해석하려는 집요함에 화가 치솟아 ‘제발 그만 좀 하라’고 일침을 놓고 싶을 때도 적지 않았지만…… 그래 봤자 또 갱년기 여성의 증상 중에 심한 감정기복이 있다는 말을 들을 것이 뻔했다. 회사에서 오가는 말에 일일이 반응하면 인간관계뿐 아니라 업무에도 지장이 생겼다. 서진은 화가 나거나 울적해질 때마다 모니터를 바라보며 마음으로 거듭 주문을 외웠다. 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일라. 주문을 외우다 보면 자기 존재가 연기처럼 모니터 속으로 스며드는 것 같았다. 회사에서 서진은 꼭꼭 숨고 싶었다.
퇴근하려고 회사를 나서자 오히려 잠이 깼다. 서진은 지하철 빈자리에 앉아 핸드폰으로 평소 즐겨듣는 팟캐스트를 틀었다. 청취자에게 사연을 받아 고민에 대한 답을 주고 그에 어울리는 책이나 영화를 추천해 주는 채널이었다. 청취자의 고민은 ‘연애를 하고 싶지만 남자를 믿지 못하겠다. 성범죄자나 불법촬영을 하는 사람, 헤어진 뒤 스토킹 하는 남자를 만날까 봐 무섭다. 믿을 만한 상대를 어디에서 어떻게 만날 수 있을까?’였다. 진행자는 말했다.
낯선 사람을 의심하는 마음은 중요합니다.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습니다.
서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했다. 그래, 사람을 무턱대고 믿는 건 위험하지. 진행자가 이어 말했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자기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자기보다 소중한 존재는 이 세상에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돼요. 하지만 사랑이란 감정은 어떤 면에서 그 본능을 거스르게 합니다. 타인을 무모할 정도로 믿고, 타인을 위해 불편을 감수하며 심지어 자기 목숨을 내놓는 사람도 있죠.
지하철이 정차했다. 다섯 살 정도로 보이는 아이와 보호자가 서진 앞으로 다가왔다. 서진은 자리에서 일어나 아이를 앉도록 했고 보호자는 여러 번 고개 숙여 고맙다고 인사했다. 서진과 보호자는 아이 앞에 섰다. 두 어른의 고단한 얼굴이 지하철 검은 창에 비쳤다. 진행자의 말이 이어졌다.
한편 사랑한다는 말을 내세워 저지르는 여러 범죄들을 생각해 보세요. 가스라이팅, 그루밍 성범죄, 데이트 폭력, 비동의 불법촬영, 스토킹, 교제살인 등을 말입니다. 그들은 사랑해서 그랬다는 파렴치한 주장을 하고 그 말을 믿는 법조인들이 있습니다.
진행자의 목소리가 떨렸다. 서진은 주변을 둘러보며 생각했다. 이들 중에도 아동 대상 성범죄를 저지르거나 그런 영상을 보며 낄낄 웃는 사람이 있겠지. 진행자는 호흡을 가다듬고 말했다.
여러분이 생각하는 사랑은 무엇입니까? 사랑은 정말 기이하고 모호합니다. 누가 뭐라고 말하든 다 말이 되는 것 같죠. 하지만 모든 답이 정답인 문제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사랑은 허상이에요. 그 허상을 더럽게 악용하는 인간들이 너무 많습니다. 달콤한 말, 좋은 말에 속지 마세요. 나쁜 말, 어려운 말에 겁먹지도 말고요.
진행자는 화를 억누르는 것 같았다. 서진은 인터넷 창을 열고 ‘사랑’의 사전적 정의를 찾아봤다. 그러면서 ‘윤서진 사전’을 만들면 어떨까 생각했다. 수많은 단어에 대한 자기만의 정의를 찾아보고 싶었다. 그런 주제로 에세이를 완성하면 좋을 것 같아서 핸드폰에 간단히 메모했다. 그러느라 진행자의 말을 놓쳤지만 굳이 뒤로 가기를 누르진 않았다.
……참고 해내야만 하는 것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사랑만큼은 제발 억지로 하지 맙시다. 사랑하지 않고도 잘살 수 있어요. 외로우니까 연애라도 하자는 생각도 위험합니다. 세상에 재미있는 것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배우고 즐기고 누리세요. 그럼에도 사랑을 해야겠다면 반드시 자신을 믿으세요. 기분 나쁘면 기분 나쁜 게 맞습니다. 내가 너무 예민한 건가 같은 생각은 절대 하지 마세요. 사랑한다는 이유로 이런 것까지 해야 하나 싶은 일은 하지 마세요. 자신을 의심하지…….
카톡 알람이 울렸다. 이은율의 새로운 메시지였다. 서진은 숫자 ‘1’이 지워지지 않도록 대화창을 열지 않은 채 새로 올라오는 메시지를 읽었다.
-어젠 미안
-걔한테 톡 와서 답하느라
-우리 단톡방 있는데
-걔가 나한테만 따로 톡 보낸 거
-너는 좋아하지도 않는 애한테
-같이 듣자고 노래 링크 보냄?
-ㄹㅇ 삼귀 아님?
-노래만 보낸 게 아니고 걔가
내려야 할 역이 가까워져 서진은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지상으로 올라가는 에스컬레이터를 탄 다음 핸드폰을 꺼내 ‘삼귀다’를 검색해 봤다. 집으로 걸어가면서 서진은 주머니 속 핸드폰을 계속 의식했다. 수신인을 착각하고 보내는 메시지를 말없이 보고만 있는 이 행위가 불법촬영과 다를 게 뭔가 싶어 죄책감이 들었다. 더는 미루지 말자. 어서 알려야 해. 서진은 걸음을 멈추고 대화창으로 들어가 메시지를 썼다.
-저는 유시진이 아닙니다. 번호를 잘못 아셨어요.
-이제야 말씀드리는 점 사과합니다.
메시지를 전송한 다음 문득 떠오른 생각이 있어 다음 메시지를 썼다. 은율 님의 사랑을 응원합니다. 서진은 바로 전송하지 못하고 자기가 쓴 문장을 수차례 읽었다. 너무 과하지 않나 싶었다. 적당히 하자, 적당히. 중얼거리며 문장을 지우고 빠르게 걸었다. 어서 집에 가서 허기를 채우고 반신욕을 하고 싶었다.
현관문을 열자 맛있는 냄새가 났다. 왔어? 주방에서 남편 목소리가 들렸다. 뭐 만들어? 서진은 외투와 가방을 벗으며 물었다. 볶음밥에 김칫국! 서진은 욕실로 들어가 손을 씻고 나왔다. 마주 앉아 저녁을 먹으며 남편은 말했다.
이상해. 회식이 왜 이렇게 지루해졌지. 어제는 진짜 공허하더라.
남편은 사람들과 함께하는 자리를 좋아하는 편이었다. 회식 시간이 길어진다고 불평한 적은 없었다. 씻지도 않고 잠들 만큼 만취한 적도 없었다. 남편은 투덜거리듯 말을 이었다.
만사 귀찮은 거야. 어서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뿐이고 사람들 말이 다 시시하게 들리는 거야. 무슨 말을 들어도 다 아는 얘기 같고 심드렁하고. 답이 없는 말을 하면 답도 없는 말을 왜 저렇게 길게 하나 싶고, 답이 있는 말을 하면 정해진 답이 있는데 뭔 말을 저렇게 길게 하나 싶고. 답이 중요한 게 아니란 거는 나도 알지. 근데 나도 모르게 자꾸 답을 말하고 다음 대화로 넘어가려고 한단 말이야. 스피드 퀴즈 푸는 것처럼. 나 좀 나빠진 것 같지? 이렇게 꼰대가 되는 건가 싶어. 어제는 진짜 사람들이랑 빨리 헤어지고 싶었거든. 근데 또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너무 허무하고 쓸쓸한 거야. 인생 왜 이렇게 재미없어졌을까. 이런 게 권태란 걸까. 어제는 그 기분이 심하더라고. 그래서 요 앞에서 소주 더 마셨어. 혼자 마시니까 금방 취하더라.
권태에 빠진 남편에게 독서모임에 같이 가자고 권해 볼까 서진은 잠시 고민했고, 곧 마음을 다잡았다. 남편을 사랑하고 아끼지만, 남편이 포함되지 않은 채로도 충만한 세계 또한 필요했다. 서진은 일부러 다른 얘기를 꺼냈다.
당신 혹시 삼귀다라는 말 알아?
남편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모른다고 했다.
사귀기 전 단계를 삼귄다고 한대. 요즘 애들은.
남편이 뜨악한 표정을 지었다. 서진이 놀리듯 말했다.
아저씨, 그런 표정 하지 마세요. 우리도 즐, 뭥미, 썸탄다, 당근이지 같은 말 쓰고 살았잖아요.
남편은 인정한다는 듯 웃었다.
이귀다도 있대. 무슨 뜻이게?
삼귀다가 사귀기 전이면 이귀다는 첫 만남 같은 건가?
좀 더 상상력을 발휘해 봐.
서진은 의자에서 일어나 빈 그릇을 개수대로 옮겼다. 서진이 설거지하는 동안 남편은 식탁과 인덕션을 닦으며 이런저런 추측을 더 말했다. 서진이 답을 말하자 남편은 또 뜨악한 표정을 지었다. 근데 그런 말은 어떻게 알아? 남편이 거실 소파에 앉으며 물었다. 서진은 회사 사람에게 들었다고 둘러댔다. 이은율의 이야기를 전할 수는 없었다. 비밀을 지키기로 약속했으니까.
*
반신욕을 하는 내내 서진은 이은율과 유시진을 생각했다. 몇 살일까. 어디에 살까. 영어캠프에서는 어떻게 친해졌을까. 어쩌다가 번호를 잘못 저장했을까. 유시진이 일부러 틀린 번호를 알려준 건 아니겠지? 그런 가정은 좀 슬픈데. 이은율은 누굴 좋아하는 걸까. 단톡방이 따로 있다고 했으니까…… 친구로 지내다가 좋아하는 마음이 생긴 걸까? 이런저런 짐작을 하면서도 서진은 핸드폰을 확인하지 않았다. 이은율에게 답이 오거나 오지 않았을 텐데, 두 경우 모두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곤란함이나 미안한 마음을 최대한 미루고 싶었다. 서진은 자신의 첫사랑을 떠올렸다. 초등학생, 중학생 때 잠깐씩 좋아했던 사람들이 있지만 돌이켜보면 사랑보다는 호기심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진짜 첫사랑은 고등학생 때 찾아왔다. 동아리 선배를 이 년 동안 사랑했다. 왜 여자를 사랑하는가 고민하진 않았다. 왜 남자에게 사랑을 느끼는가 고민한 적 없듯. 자해하고 싶은 걸 꾹 참고 있다는 은율의 마음을 알 것도 같았다. 짝사랑이거나 아니거나, 사이가 좋거나 자주 싸우거나, 함께 있을 때도 떨어져 있을 때도, 상대가 진실을 말해도 침묵하더라도, 그 어떤 경우라도 괴로울 것이다. 예측할 수 없이 폭발하고 밀려오는 감정에 위기감을 느낄지도 모른다. 산소와 빛을 접한 심해어처럼 당혹스럽고 아플 것이다. 그 시절의 서진 또한 그랬으니까. 그때는 정말 매일 선배를 생각했다. 선배를 보며 아름다움의 개념을 뒤엎고 확장했다. 선배와 똑같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럴수록 자기혐오도 짙어졌다. 사랑하는 마음은 서진에게 희망을 주고, 절망시켰다. 서진을 살게 했고, 죽고 싶게 했다. 첫사랑 이후 몇 차례의 연애를 거치면서 사랑과 이별에도 조금씩 적응해 갔다. 매뉴얼을 한 번 읽어 본 사람처럼 비교적 덜 헤맸다. 그러나 복제품처럼 똑같은 사랑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새롭지도 않은데 익숙해지지도 않는 관계에 지쳐 가던 시기에 남편을 만났다. 연애는 그만하고 싶어서 결혼했고 아직까지 그 선택을 후회한 적은 없다. 서진은 남은 삶을 생각했다. 새로 겪을 감각을 예상해 봤다. 극복할 수 없을 상실감. 환멸과 허무. 그리고 더해질 그리움과 연민. 저녁을 먹으며 남편이 한 말이 떠올랐다. 인생 왜 이렇게 재미없어졌나. 서진은 그 말에 댓글을 쓰듯 중얼거렸다. 있잖아, 그래서 난 오히려 다행인 것 같아.
남편은 일찌감치 침대에 누워 핸드폰으로 유튜브를 봤다. 서진은 온더락을 만들어 소파에 앉아 두어 모금 마신 다음에야 이은율의 메시지를 확인했다.
-야
-ㅋㅋㅋㅋㅋㅋㅋㅋㅋ
-뭐래
-쨌든 걔 인프피래 난 인프제
-우리 잘 맞겠지 근데 난
-걔한테 다 맞출 수 있어 뭐든 해줄 거임
메시지는 계속 이어졌다. 걔 마음을 모르겠다. 모든 사람에게 다정한 것 같다. 사귀는 애가 있는 것 같다. 나한테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 고백하고 싶다. 거절당하면 죽고 싶겠지. 친구로 지내는 게 낫겠지. 그런데 자꾸 들키는 것 같다. 선물하고 싶어서 텀블러를 샀다. 왜 텀블러냐면 걔가 늘 들고 다닐 거니까……. 서진은 답장을 썼다. 저는 유시진이 아니에요. 제 이름은 윤서진입니다. 마흔 살 넘은 성인입니다. 저는 은율 님을 전혀 몰라요. 숫자 1이 바로 사라지고 답장이 올라왔다.
-헐
-진심?
-유시진 아니라고?
-어째서?
-전번 맞는데?
이삼 분쯤 흐른 뒤 새로운 메시지가 올라왔다.
-유시진 아니라는 증거 있어요?
서진은 피식 웃었다. 자기 얼굴을 찍어서 보낼까 하다가 마음을 다잡고 답장을 썼다.
-믿지 못한다면 어쩔 수 없죠. 아무튼 저는 유시진이 아니라고 분명히 밝혔습니다.
다시 몇 분이 흘렀다. 새로운 메시지가 올라왔다.
-그럼 누구세요?
-윤서진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진짜 유시진 아니야?
-윤서진입니다.
-그럼 아저씨예요?
-아줌맙니다.
빠르게 답장을 보낸 뒤 서진은 새로운 걱정에 사로잡혔다. 너무 과한 참견인가 싶었지만 망설이지 않고 메시지를 보냈다.
-은율 님. 모르는 성인 남자와 메시지 주고받는 거 위험해요.
-아줌마는 아줌마잖아요?
-네, 저는 확실히 성인 여자입니다만.
메시지를 보낸 뒤 서진은 더 깊은 걱정에 빠졌다. 자신의 성별이 무엇이든 간에 이런 상황을 경험하는 것 자체가 이은율에게 좋지 않을 것 같았다. 서진은 빠르게 메시지를 썼다.
-성별 가릴 것 없이 모르는 사람과 채팅은 위험합니다.
-절대 은율 님 신상 보내지 말고 사진이든 뭐든 낯선 사람에게는 주지 마세요.
-엄마랑 똑같이 말하네
-유시진 아닌 거 ㅇㅈ
-근데 아줌마 나한테 사진 요구할 거예요?
-절대 하지 않습니다.
-나도 안 줄 거예요 아줌마는 몇 살이에요?
-43입니다.
-헐 거의 엄마
-아줌마도 딸 있어요?
-없습니다.
-아들 있어요?
-없습니다.
-결혼 안 했어요?
-했습니다.
-근데 왜 없어요?
-출산하지 않는 삶을 선택하는 여자도 있습니다.
-와 존멋
-나도 그거 선택할 건데
-아줌마는 첫사랑이랑 결혼했어요?
-일곱 번째랑 했습니다.
-헐 사랑을 7번이나? 그게 가능해요?
-쌉가능.
-ㅋㅋㅋㅋㅋㅋㅋ짜증나
-왜 짜증납니까?
-내 첫사랑이 7번이나 연애할 거 생각하면 짜증나죠
-저는 은율 님 첫사랑이 아닌데요.
-무튼 걔도 그럴 거 같으니까
-걔는 인기가 많습니까?
-완전요 개부럽
-제 친구도 인기가 아주 많았는데 첫사랑을 지금까지 사랑합니다.
-ㄹㅇ? 일편단심!!
-일편단심을 압니까?
-그건 내가 제일 좋아하는 단어고
-난 일편단심이 꿈이에요
-존멋.
-아줌마는 첫사랑이랑 사귀었어요?
-네. 삼귀는 거 같아서 속상할 때도 있었지만.
-헐 지금 나도
-나만 좋아하는 거 같아서 불안한데
-사랑은 원래 불안합니다.
-그런 걸 왜 7번이나 했어요?
-은율 님은 불안한데 왜 사랑합니까?
-그래서 미치겠어요 서진 님
-갑자기 서진 님?
-아줌마가 계속 은율 님이라고 불러 주니까
-무튼 걔도 나를 찐으로 좋아한다는 걸 어떻게 확인할 수 있어요?
-확인할 수 없습니다. 은율 님이 확인할 수 있는 건 은율 님의 마음뿐.
-근데 어떻게 계속 사랑해요?
-은율 님은 어떻게 계속 사랑합니까?
한동안 답이 없었다. 서진은 버릇처럼 술잔을 들고 흔들었다. 잔에는 얼음만 남아 있었다. 답을 기다리며 온더락을 한 잔 더 만들었다. 십 분쯤 지나 메시지가 올라왔다.
-서진 님
-이건 진짜 비밀인데
-서진 님 믿고 말하는 거예요
-서진 님은 보통 어른이 아닌 것 같아서
서진은 다급하게 메시지를 썼다.
-하지 마세요.
-모르는 사람에게는 절대 말하지 마세요.
-위험합니다.
-모르는 사람을 믿지 마세요.
은율의 메시지도 바로 올라왔다.
-아는 사람한테는 말할 수 없고
-모르는 사람한테는 말하면 안 되고
-그럼 난 어쩌라고요 ㅠㅠ
서진은 섣불리 답장을 쓰지 못했다. 은율의 메시지가 올라왔다.
-ㄴㄱㅅㄹㅎㄴㅇㄴㅇㅈㄱㅇㄹㅇㅂㅎㅅㄷ
-ㄴㅇㅈㅂㅎㅅㄹㅋㅅㅎㄷ
-ㅅㅈㅌㅈㄴㅈ
잠시 잠잠해진 대화창. 술잔의 얼음이 녹아내리는 소리. 은율이 초성에 담아 털어놓은 비밀을 서진은 굳이 해석하려고 애쓰지 않았다. 은율의 메시지가 올라왔다.
-ㄹㅇ 죽고 싶어
-은율 님, 혹시 울고 있나요?
-어떻게 아세요?
-정말 죽고 싶은가요?
이삼 분 지나 새로운 메시지.
-그건 아니에요
-그럼?
-보고 싶고
-나를 사랑하면 좋겠어요
서진은 그날 퇴근길에 찾아본 사랑의 사전적 정의를 떠올렸다. 진행자의 말을 생각했다. 아이 앞에 서서 주위를 둘러볼 때의 절망감을 되새겼다. 서진은 천천히 메시지를 썼다.
-사랑은 몹시 아끼고 귀중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근데 걔는 나한테 상처를 줘요
-어떨 때 나를 모르는 척하고
-못 본 척 못 들은 척하고
-나중에 왜 그랬냐고 물어 보면 겁이 났다고
-울고 그럼 나는 미치겠고
-걔의 마음을 이해합니까?
-조금요 근데 난 겁나도 모른 척하긴 싫어요 더 잘해 주고 싶어요 걔한테만큼은
-은율 님의 그와 같은 마음이 사랑입니다.
-서진 님은 첫사랑이랑 왜 헤어졌어요?
-기억나지 않습니다.
거짓말이었다. 헤어져야 진정한 사랑인 줄 알고 이별했다. 헤어질 이유를 억지로 만들어 굳이 힘들게 이별했다. 그때는 정말 비장했다. 그런 이야기를 이은율에게 하고 싶진 않았다.
-어떻게 기억이 안 나요?
-시간이 흐르면 그렇게 됩니다.
-헐 배신감
-저는 기억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대화창은 다시 잠잠해졌다. 서진은 어깨를 펴고 두 팔을 위로 들어 스트레칭을 하다가 시계를 보고 깜짝 놀랐다. 열한 시 가까운 시간. 이은율을 어서 재워야 한다는 생각으로 메시지를 썼다. 전송 버튼을 누르려는데 은율의 메시지가 올라왔다.
-서진 님
-고맙습니다
-진심으로
-저는 더 잘하기로 했어요
-몹시 아끼고 귀중히 여기는 마음
서진은 쑥스러워하는 표정의 이모티콘을 보냈다. 이은율이 물었다.
-앞으로
-진짜 답답할 때만
-톡해도 돼요?
-비밀은 초성으로만 할게요
고민 끝에 서진은 좋다고 했다. 모르는 사람의 메시지에 답장하거나 신상정보를 주면 절대 안 된다는 당부를 다시 덧붙이면서. 이은율이 물었다.
-근데 우리 아직 모르는 사이예요?
-그렇습니다.
이은율은 ㅋㅋㅋㅋㅋ 했고, ㅅㅈㄴㅈㅁ을 남겼다. 더는 메시지가 올라오지 않았다.
서진은 이은율과 나눈 대화를 한 번 더 살펴본 뒤 대화창을 닫았다. 침실에서 고개만 빼꼼 내민 남편이 하품을 하며 물었다.
안 자고 뭐 해?
아직 안 잤어?
서진이 되물었다.
어. 먹방 보다가 잠이 다 깼어. 배고프다. 당신은 뭐 했어?
서진은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비밀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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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리자
- 2025-04-01
성한 입 이현석 아기 앓는 소리에 눈을 떴다. 박명이었고 아직 분유 먹일 시간은 아니었다. 어두운 잠귀를 이유로 밤 당번을 자처한 것은 나였으나 의지와 달리 본성은 강했다. 아내가 자리끼 컵을 산산조각 냈을 때도 세상모르고 코만 곯았다는데 율이와 둘이 잔 뒤로는 아이가 내는 작은 소리에도 눈이 금방 뜨였다. 바닥에 깔아 둔 매트리스에서 몸을 일으킨 나는 아기 침대를 내려다보았다. 율이는 아무 일 없다는 듯 두 눈을 꼭 감은 채 입을 오물거렸다. ‘아빠가 또 속았네.’ 잠은 설쳤어도 흐뭇했다. 이 작은 목숨이 간밤을 또 무사히 넘겼구나. 그 마음을 얹고 도로 몸을 뉘었는데 다시 잠에 들지는 못했다. 아기방 창문에 맺힌 물방울이 거슬렸다. 창문은 밤새 돌린 가열식 가습기 탓에 부러 흩뿌린 것처럼 흥건했다. 문득 재건축 조합 단톡방에서 보았던 잡담이 떠올랐다. 유명 로펌을 다니느라 바쁜 딸과 얼마 전 개원한 의사 사위를 대신해 손주 둘을 보느라 겨우내 가습기를 틀었더니 옷장 안에서부터 피어난 검은 곰팡이가 벽면 한쪽을 잡아먹었다는 이야기였다. 시황 따라 일이 억은 우습게 에누리하는 아파트에서 곰팡이 걱정이라니. 직면한 현실과 지난봄 우리 부부가 치른 비현실적인 가격 사이의 뚜렷한 차이에 헛웃음이 나왔다. 물론 현실만 따지면 놀랍지 않았다. 아파트는 인혁당 재건위 사건으로 박정희 정권이 삼화토건 회장 도예종, 매일신문 기자 서도원, 경북대학교 총학생회장 여정남 등 여덟 명을 국가보안법 위반, 내란예비음모 등으로 사형을 선고한 지 하루도 지나지 않아 형을 집행했던 바로 그해에, 여의도의 다른 구축 아파트와 마찬가지로 박정희의 명령으로 완공됐다. 반세기가 넘은 건물이었다. 근대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곰팡이는 당연했다. 화장실에서 바퀴벌레를 보아도 놀랄 것이 없었고, 개수대에서 썩은 내가 올라와도 그러려니 했다. 아내와 함께 산책을 마치고 돌아온 여름밤에는 통통하니 살이 오른 쥐가 아파트 복도 반대편으로 내달리는 모습을 본 적도 있다. 기함할 듯 놀란 나와 달리 아내는 대수롭지 않아 하며 현관문을 열었다. “오빠, 견뎌. 이게 실거주 투자의 현실이야.” 아내는 평소처럼 장난스럽게 말했으나 나는 그 말을 묵직이 받아들였는데 싱글일 때부터 정석대로 자산을 늘려 온 아내의 투자 이력을 알아서였다. 현관문을 잽싸게 닫은 나는 만삭이 된 아내의 배를 쓰다듬으면서 “충성충성”이라고 촐싹댔다. 사실 아이가 뱃속에 있을 때만 해도 실감하지 못했다. 벌레나 쥐가 부르는 본능적인 혐오도 자산 증식이라는 대명제 앞에선 한낱 농담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곰팡이조차 농담일 수 없었다. 집에는 율이가 있었다. 가습기를 끈 나는 전날 벗어 둔 티셔츠를 집어 들었다. 율이가 깨지 않게 까치발로 창문에 다가갔다. 물기를 닦고서 창문을 미세하게 열었다. 서늘한 외풍이 실낱처럼 들어왔다. 재건축 단톡방에 상주하는 어르신들은 아침에 잠깐씩 이렇게 해 두면 곰팡이도 예방하고 아이
- 관리자
- 2025-04-01
흰옷 빨래의 날 안담 오늘은 마지의 기일이니까 흰옷을 모아 빨래를 한다. 마지가 유니폼처럼 자주 입던 크림색 티셔츠도 잊지 않고 꺼내서 빤다. 아마도 처음 살 때는 흰옷이었을 거다. 내가 애용하는 독일 브랜드의 캡슐 세제는 성능이 뛰어나다. 이 티셔츠에서는 마지의 냄새가 사라진 지 오래다. 이제는 나도 마지의 냄새를 잘 떠올릴 수가 없다. 꽤 강한 냄새였는데, 그런 냄새가 잊히기도 한다는 게 신기하다. 가끔 그 냄새를 다시 기억해 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히면, 4년 전 마지와 내가 처음 만났던 장소인 모둠 전집에 간다. 전을 굽는 작업대가 가게 밖으로 툭 튀어나와 있어서 포장 손님도 많은, 반은 노점인 그런 가게. 튀는 기름을 막기 위해 조리대 틈새와 철판 모서리에 은색 호일이 덧대어져 있고, 그럼에도 철판 가장자리나 작업대 위 처마에 쌓이는 기름때를 막을 수는 없다. 조용히 질색하며 지나치는 행인들, 저 시커먼 데서 맛이 나오는가 보다고 농담하는 손님들, 그런 사람들 사이에 섞여 가게에서 흘러나오는 기름 냄새를 맡는다. 이 냄새와 비슷했던 것 같아. 열과 기름과 사람이 합쳐서 내는 냄새. 전혀 아닐 수도 있지만. 적어도 이 냄새와 비슷하다고 생각했던 기억만큼은 선명하다. 내 동거인의 냄새, 홍제천 스리룸의 주방 맞은 편 작은 방의 냄새, 마지의 냄새. 앞으로는 누구와 같이 살 생각이 없다. * 윤석열 나이로 스물아홉이 되던 2021년 겨울, 나는 당근마켓을 통해 홍제역 인근 스리룸의 하우스메이트를 구하고 있었다. 마지는 그 글을 보고 연락한 세 번째 사람이었다. 일반적인 시각에서 좋은 집으로 보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백련산과 홍제천이 코앞이고 인왕산이나 북한산도 비교적 멀지 않다는 점을 제외하면 인프라랄 게 없는 집. 인적 드문 가파른 언덕에 있고 북향이라 볕이 잘 들지는 않으며 어떤 역에서든 멀었다. 낡은 건물인데 월세는 70만 원으로 센 편이었다. 월세를 제외하면 그 집의 여러 요소는 내게는 장점이었다. 크고 힘 좋은 내 개와 오를 산이 있고 사람은 만나기 힘들다는 게. 스리룸에 방들이 크고, 연식이 오래된 집의 컨디션을 의식한 집주인이 못 박기를 포함해 여러 변화를 허용해 준다는 점도 좋았다. 나부터가 담배를 피우기 때문에 흡연자도 좋았다. 내가 대형견과 산다는 사실은 누군가에게는 극단적인 장점이고 누군가에게는 극단적인 단점이었을 테다. 내 개는 순하다 못해 맹한 편이었지만, 글에는 남자나 키 큰 사람에게는 경계심을 보인다고 적었다. SNS로 하메를 구하는 여자에게 피곤한 사람이 얼마나 꼬이는 줄 아냐고 으름장을 놓은 지인이 많았기 때문이다. 지인 소개가 낫지 않냐는 조언도 숱하게 들었지만, 지인의 지인이 길거리에 다니는 아무개보다 더 좋은 사람일 거라는 전제에 동의가 잘 안되었거니와, 하우스메이트가 맘에 안 들었을 때 소개해 준 지인의 체면까지 고려해야 하는 상황도 만들고 싶지 않았다. 나의 구인 글은 짧아졌다 길어졌다를 반복하다가 이런 형태가 되었다. ‘홍제역 인근 스리룸 하메 구합니
- 관리자
- 2025-04-01
저번까지 읽은 이후로 이어보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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