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 마시러 갑니다
- 작성일 2006-08-31
- 댓글수 1
물 마시러 갑니다
김사과
잠이 오지 않는다. 네이버 분야별 주요뉴스와 오늘의 날씨, 핫이슈 따뜻한 세상-70대 박사에 도전하는 집념의 할머니까지 읽고 나서 블로그에 두 개의 글과 일곱 개의 사진을 올린 다음 방명록을 열어본다. 아무도 글을 남기지 않았다. 메일함을 확인하고 구글에서 지난달 헤어진 애인의 주민등록번호 앞자리와 메일주소를 쳐본다. 메일주소와 이름을 쳐본다. 이름과 주민등록번호 앞자리를 쳐본다. 지난달 헤어진 나의 애인은 참으로 주도면밀하거나 아니면 비밀스럽거나 아니면 아무것도 없이 그저 가볍고 얄팍한 사람이었구나. 침대에 눕는다. 일어나 컴퓨터의 전원을 끈다. 다시 눕는다. 그러나 여전히 잠이 오지 않는다.

밤은 검푸른 색으로 투명하게 바래가고, 달은 불투명한 상아색으로 다가온다.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먼지가 잿빛으로 슬쩍 밀려온다. 길가에 걸린 때탄 플래카드가 바람에 흔들린다.
이곳은 아파트가 끝없이 늘어서 있는 서울 인근의 위성도시이다. 지난 달 돈이 다 떨어져서 이곳으로 돌아왔다. 엄마 앞에서 나는 직업적인 걸인처럼 비굴하게 당당한, 당당하게 뻔뻔한 태도를 지어보였지만 엄마는 신라면 한 박스를 내 방 침대 옆에 밀어놓은 뒤 문을 닫았다. 나는 가끔 개밥을 먹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라면만 먹으니 허기가 져서 그렇다. 하지만 엄마가 몰래 보고 있을까봐 못 먹겠다. 나는 엄마가 무섭다. 나를 굶어죽이지는 않기 때문이다. 엄마를 보면, 물론 거의 보지 못한다, 어떤 식의 느낌이 드느냐 하면, 엄마는 종일 무엇을 할까, 나를 잡아먹으려고 나를 키우고 있는 것 같다.
도대체 어떻게 하다가 이렇게 되었나. 나는 어느 다리를 위쪽에 포개어놓아야 하나. 왼쪽 다음에는 오른쪽이 오고 오른쪽 다음에는 왼쪽이 온다. 그것이 영원히 반복된다는 생각을 하니 춥다. 너무 춥다. 이런 생각을 하는 동안에도 달은 점점 멀어지고 해가 다가온다. 해와 달이 이렇게 저렇게 자리를 바꾸어대는 사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내일도 오늘만큼 달달한 봄바람이 불어오겠지. 그리하여 나는 인내심을 잃어간다. 이 끝에 뭐가 있을지 알 것 같기도 하고 모를 것 같기도 하다. 뭔가 처음부터 심각하게 잘못되어 있다는 생각에 머릿속이 근질거린다. 아니 좀 우울한 것뿐이다. 여름이 오면 좋아질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때까지 괜찮을지.
*
온몸이 저리고 아무런 느낌이 없다. 손가락을 하나씩 움직여본다. 눈을 뜨고 기지개를 켜고 하품을 하고, 하지만 여전히 아무런 생각이 나지 않는다. 고통스럽다.
문을 열고 현관을 살핀다. 엄마의 신발이 보이지 않는다. 주방으로 간다. 식탁에는 엄마가 먹는 건강보조제들이 늘어서 있다. 나는 종합비타민과 대상클로렐라와 미네랄이 함유된 캐나다산 철분강화제와 스위스 천연 비타민C를 입속에 털어 넣으며 간간이 신음소리를 낸다.
춥고 목이 깔깔하다. 신라면 말고 다른 것이 먹고 싶다. 홍차를 진하게 우려낸 다음 데운 우유와 꿀을 넣어 마시면 좋겠다. 나는 찬장에서 동서벌꿀과 립톤 홍차 티백을 찾아냈다. 그런데 우유가 없다. 우유를 살 돈도 없다. 엄마는 나한테 돈을 주지 않으면서 내가 자기 돈을 훔쳐갈까 봐 꽁꽁 숨겨놓기까지 한다. 나는 찬장을 뒤져 십 원짜리를 모았다. 마흔아홉 개나 되지만 역시 부족하다. 절망하여 거실을 서성이는데 소파에 어젯밤 엄마가 벗어놓은 청바지가 보였다. 나는 청바지를 뒤지기 시작했다. 오백 원짜리 네 개를 발견한 나는 나머지 동전을 다시 주머니 속에 넣었다. 마흔아홉 개의 십 원짜리를 다시 찬장 속에 넣어놓은 다음 야구 모자를 깊게 눌러썼다.
문을 열고 나가려는데 우유가 잽싸게 밖으로 뛰어나갔다. 우유는 잠깐 멈춰서 나를 흘끗 보더니 계단을 깡충깡충 뛰어내려갔다. 나도 우유를 따라 계단을 내려갔다. 우유는 우윳빛 털을 나폴나폴 날리며 풀밭으로 달려가 킁킁대며 빙글빙글 돌다가 오줌을 쌌다. 나는 바닥에서 돌을 주워 주머니 속에 넣었다. 우유가 나를 본다. 나는 우유를 보며 주머니 속에서 돌멩이를 꺼냈다. 우유야 소시지 먹어라, 나는 손바닥 위에 돌멩이를 올려놓았다. 우유는 망설이다가 망설이다가 또 망설이다가 결국 다가와 덥석 잡히고 만다. 나는 우유를 가슴에 안고 느릿느릿 아파트 상가에 있는 슈퍼마켓으로 향했다.
햇볕을 쪼이니 머리가 지끈거린다. 어젯밤에 나는 무엇을 생각하다가 잠을 이루지 못하였나. 물감에 대해서 생각을 했나, 화가에 대해서 생각을 했나.
슈퍼마켓은 닫혀 있었다. 아침부터 되는 일이 없다. 이게 다 어젯밤에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탓이다. 나는 욕을 한 뒤 발걸음을 옮겼다. 또 다른 슈퍼마켓으로 가려면 큰길로 나가 횡단보도를 건너야 한다. 귀찮고 짜증스럽다. 나는 울상을 하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 눈부신 파란색을 이 눈부신 흰 구름을 이 눈부신 햇살을 그냥 좋은 날씨라고 부르기에는 어쩐지 좀 미안하다. 나는 큰길로 나가 횡단보도를 건넜다. 한 늙은 여자가 커다란 늙은 호박과 시든 오이, 그리고 몇 가지 봄나물을 늘어놓고 팔고 있었다. 나는 여자를 지나쳐 슈퍼마켓으로 갔다.
“안녕하십니까, 어서 오세요.”
군청색 추리닝을 입은 주인 남자는 슈퍼마켓 앞에 앉아 부채질을 하고 있었다.
“더워서 부치는 게 아니라 자꾸 파리가 앉아서.”
“아.”
“강아지가 귀엽네요. 이름이 뭡니까?”
“우유요.”
“우유?”
“네 우유요. 우유 있나요? 이 우유 말고 마시는 우유요. 매일우유 ESL 천미리짜리 하나 주세요.”
“우유가 우유를 사러 왔군요. 으하하하.”
남자가 크게 웃었으나 나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잠깐만 기다리세요. 꺼내다 드릴게요.”
주인 남자는 부채를 내려놓고 슈퍼마켓 안으로 들어갔다.
슈퍼마켓 안은 좁고 깜깜했다. 슈퍼마켓이라는 이름보다는 구멍가게라는 이름이 어울려 보였다. 오랫동안 닦지 않은 창에 먼지가 새까맣게 엉겨 붙어 있었다. 잠시 뒤 슈퍼마켓 안의 검은 어둠 속에서 남자의 누렇게 번들거리는 얼굴이 불쑥 튀어나왔다. 남자는 부끄럽게 웃는 얼굴을 하고 있었고 손에는 우유가 없었다.
“아이구 죄송한데요, 우유가 똑 떨어졌네요.”
“똑 떨어졌나요?”
나는 똑이라는 말이 재미나다고 생각한다.
“진짜 똑 떨어졌어요. 이거 어쩝니까.”
“그러게요.”
“하하 아가씨 말투가 무뚝뚝한 게 참 매력이 있네요.”
“아, 예.”
나는 비꼬는 건가하고 생각한다.
“죄송하네요.”
“혹시 근처에 다른 슈퍼가……” 나는 주위를 둘러본다. “없네요.”
남자가 웃는다. 웃음이 헤프다.
“그나마 제일 가까운 데가,”
주인 남자가 손을 들어 어딘가를 가리킨다.
“저쪽, 저 코너 돌아가면 24시 큰 게 하나 있거든요. 노란색 간판.”
나는 고개를 돌려 주인 남자가 가리키는 곳을 본다. 낡은 빌딩이 한 채 서 있다. 일층에는 꼬치구이호프와 이모 분식이 있는데 둘 다 문이 닫혀 있다.
“저 코너를 돌아서 언덕 하나를 넘어야 하기는 한데.”
“언덕이요?”
“네 저쪽으로 쭉 가면 산이잖아요. 안 가봤어요 아가씨? 절로 쭉 가면 산인데 산까지는 가지 말고. 그 전에 야트막한 언덕 같은 거.”
“여기 산이 있나요?”
“몰라요? 약수 뜨러 많이들 다니는데.”
“얼마나 가야 되는데요? 멀은가요, 슈퍼가?”
“금방 가요. 저기만 넘어가면 된다니까.”
나는 망설이는 눈빛으로 주인 남자를 쳐다본다. 남자는 딴청을 부리며 부채질을 하고 있다.
“알겠어요. 감사합니다.”
“언덕만 넘으면 금방이에요. 잘 가, 아가씨.”
그리하여 나는 가슴에 우유를 안고 우유를 사러 문 닫힌 꼬치구이호프와 이모 분식을 지나 오른쪽 길로 들어선다. 그러자 눈앞에 아파트도 상가도 아무것도 없이 삐뚤빼뚤한 논밭길이 이어져 있는 한가로운 농촌풍경이 펼쳐진다. 나는 당황스럽기도 하고 약간의 배신감을 느낀다. 기분이 좋지 않다. 마치 주변을 빼곡하게 메우고 있는 아파트를, 그리고 아파트에서 잘 먹고 잘 살고 있는 우리들을 비웃고 있는 것 같잖아. 보이느냐. 너희가 그토록 나를 멸시하고 몰아내려고 하였지만 이렇게 나는 살아남았다. 하지만 오래갈 리가 없다. 우리를 살게 하는 고마우신 아파트들이 곧 너를 몰아내고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될 텐데. 우리를 살게 하는 고마우신 아파트들이 없으면 우리는 모두 부랑자가 되어 거리에 나앉게 될 테니까. 그러니까 아파트가 전부다. 너는 아무것도 아니고.
나는 못마땅해서 투덜거린다. 썩은 비료냄새가 불편하다. 하지만 그것보다도 어디에 언덕이 있다는 건지. 저 멀리 보이는 것은 보신탕집 간판뿐이다.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이미 슈퍼마켓은 보이지 않았다. 주인 남자가 나를 속인 걸까? 왜? 나를 놀리려고? 나를 놀리는 것이 재미가 있을까? 어째서? 나는 놀림을 당한 건가. 아야 아프다! 우유가 내 머리카락을 물어뜯고 있다. 씨발놈의 자식! 나는 우유를 사야 하는데! 나는 주머니 속에 있는 오백 원짜리 네 개를 꼭 쥐었다.
한차례 센 바람이 불고 지나가자 먼지가 입안에 씹혔다. 나는 먼지를 씹어 삼키고 눈을 크게 떴다. 보신탕집까지는 별로 멀어 보이지 않았다. 나는 이 길을 따라 걸을 것인가 아니면 15분 정도 걸어서 지하철역 근처에 있는 바이더웨이에 갈 것인가 생각해보았다. 세수도 하지 않은 상태로 모자를 눌러쓰고 일주일째 빨지도 않은 추리닝에 열흘째 목욕도 하지 않은 강아지를 끌어안고 지하철 역 근처에 있는 바이더웨이에 가는 나를 상상해보았다. 때려죽여도 못 간다. 나는 느릿느릿 논밭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계절은 바야흐로 봄이다. 햇살은 두꺼운 스웨터같이 포근하다. 몹시 나른하여 온 몸이 녹아내리는 것 같다. 투명한 햇살이 회색 먼지를 뒤집어 쓴 소나무에 부딪혀 조각나 흩어진다. 왼쪽으로는 탈모가 진행 중인 남자의 머리처럼 비참한 모양새의 야트막한 산이 보인다. 듬성듬성 꽂혀 있는 나무들은 기괴하게 몸을 꼬고 있다. 햇살은 우유를 담뿍 넣은 아이스크림처럼 사르르 녹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가 잔잔한 파도처럼 조용히 밀려왔다가 하면서 내 팔뚝을 간질인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뽀얀 흙먼지가 나른하게 내려앉는다. 주위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귀가 먼 것만 같다. 아니면 시간이 멈춰버린 곳에 혼자 뚝 떨어진 것 같은 느낌. 순간 갑자기 눈앞에 펼쳐진 광경이 저 멀리 밀려갔다가 밀려온다. 현기증. 몸속의 피가 옅은 분홍색으로 묽어진다.
나는 우유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우유는 하얀 꼬리를 흔들며 여기저기 코를 박고 킁킁거리다가 먹지 말았으면 싶은 것들을 주워 먹었다. 길가에는 찢어진 검은 비닐봉지와 구겨진 종이컵이 삐죽삐죽 튀어나와 있었다. 망가진 철조망이 길 한가운데 나뒹굴고 있었다. 나는 그것을 밟고 지나갔다. 왼쪽 길가에서 썩은 냄새가 심하게 나서 살펴보니 커다란 웅덩이가 보였다. 웅덩이 가운데에는 썩은 나무토막과 죽은 쥐 한 마리가 나란히 떠 있었다. 멋진 회색빛 털의 작은 쥐는 느긋하게 드러누워 있었다. 웅덩이 근처의 밭에는 비둘기 두 마리와 까치 한 마리가 어슬렁거렸다. 우유가 새들을 발견하고 뛰어갔다. 새들이 날아가고 우유는 멍하게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나는 우유를 불렀다.
저 멀리 파란색 추리닝을 입고 흰 장갑을 낀 중년의 여자가 걸어오는 게 보인다. 나는 그 여자에게 다가가 말을 걸어본다.
“이 근처에 슈퍼마켓이 있나요?”
“저기 압구정보신탕집 옆에 작은 구멍가게가 하나 있기는 한데 일요일이라서 닫았을지도……”
“오늘이 일요일인가요?”
“일요일 아닌가?”
“저는 월요일로 알고 있는데요.”
“그렇군. 어제 성당에 갔다 왔지.”
여자가 나를 아래위로 훑어본다.
“월요일이면 열었지. 압구정보신탕집에서 왼쪽으로 코너를 돌면 바로 보여요. 압구정보신탕. 간판 확인하고.”
“고맙습니다.”
나는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다. 하지만 여자는 내 인사를 받지 않고 휑하니 가버린다. 뒤를 돌아보자 여자는 배치기 운동에 몰입하여 걷고 있다. 후-후, 후--후 하고 재미있는 소리를 내면서 걷는다.
길 끝에 있는 커다란 보신탕집의 이름은 사계절보신탕이었다. 사계절보신탕에서 왼쪽 코너를 돌자 시골해장국집이 나왔다. 압구정보신탕집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다시 사계절보신탕 쪽으로 걸어 나왔다. 사계절보신탕 건너편에는 이층짜리 미림가든이 있었다. 나는 사계절보신탕과 미림가든 사이에 서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미림가든 앞에는 어울리지 않게 미끈한 검은색 외제차가 한대 서 있고 그 옆에는 검은 양복을 입은 남자들 네댓 명이 서성거렸다. 나는 그 중에 한 명, 검은 안경을 쓴 까맣고 작은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그러자 남자가 옷매무새를 다듬더니 내 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나는 당황하여 뒤로 물러섰다. 남자가 내 팔을 잡고 씩 웃더니 말했다. “가시죠.” 그리고는 내 귀에다 대고 속삭였다. “조용하게.”
남자가 내 귓불을 쓰다듬었고, 나는 비명을 질렀다.
우유가 격렬하게 짖으며 나를 향해 달려왔다. 잠시 뒤 남자가 왼쪽 종아리를 잡고 욕을 하며 살기 가득한 눈으로 우유에게 다가가기 시작했다. 우유가 털을 세우고 마구 짖는다.
“왜 그러세요? 저한테 왜 그러세요?”
나는 겁에 질려 울고 있다. 하지만 남자는 내 말에 대답하지 않고, 다른 남자들은 껌을 질겅질겅 씹으며 흥미롭다는 듯 이 광경을 지켜본다. 그 때 사계절보신탕에서 한 여자가 나와 소리친다. 그 애가 아냐! 남자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 여자에게 쏠린다.
“아가씨 괜찮아? 괜찮으면 빨리 가. 아가씨한테 볼일 없어.”
나는 목이 막혀 말을 잇지 못한다.
“그러게 왜 이 앞에서 얼쩡대냐구. 정신 사납게.”
“우유 사야 된단 말이에요!”
“우유?”
“압구정보신탕집 앞에 슈퍼마켓이 있다고 했단 말이에요.”
나는 우유를 꼭 끌어안고 눈물을 닦는다.
“압구정보신탕? 거기가 어디야? 아아. 저기 목련 핀 집 보여, 아가씨? 거기 갈래길이 있는데 아랫길로 가 봐요. 위쪽 길 말고 아래쪽 길. 그럼 구멍가게가 하나 있어.”
“위쪽 길은 뭔데요.”
“약수터 가는 길. 아가씨 약수터 몰라? 안 가봤어?”
“약수터가 어딘데요.”
“아니 이 아가씨가 약수터를 모르네. 거기 물맛이 얼마나 좋은데. 우리 음식도 다 그 약수터에서 물 길어다가 만들잖아.”
“슈퍼마켓 멀어요? 오래 걸려요?”
“얼마 안 걸려. 금방이야. 그런데 강아지 이름이 뭐야? 예쁘네.”
“우윤데요”
“개 이름이 뭐가 그래? 우유같이 하얘서 우유야? 하, 참.”
나는 건성으로 인사를 하고 서둘러 그곳을 떠났다.
목련 핀 집은 원조 오리탕집이었고 오리탕집 앞에는 갈림길이 없었다. 나는 멈춰 서서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고 소매를 걷었다. 목이 마르다. 생각해보니 아침에 일어난 뒤 지금까지 먹지도 마시지도 않았다. 아무것도. 해는 이제 하늘 한가운데에 떠 있었다. 가만히 아래를 내려다보자 바닥이 비스듬히 기울어졌다. 또 한 차례 현기증이 밀려오고 나는 휘청거리다가 우유를 놓칠 뻔 했다. 우유를 바닥에 내려놓고 오리탕집 앞에 버려져 있는 갈색 소파에 주저앉았다. 우유는 놀랐는지 내 발치에 가만히 앉아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한 남자가, 남색 작업복을 입은 젊은 남자가 오리탕집 지붕 위에서 무언가를 고치고 있는 것이 보였다. 남자는 지붕 위에서 아주 편안해보였다. 남자는 허리에 감긴 검은 전선을 풀어 지붕 위 어딘가에 연결을 하기 시작했다. 작업이 끝난 남자는 스패너와 드라이버를 챙겨 왼쪽 발 아래 놓인 보라색 천 가방에 넣었다. 가방 지퍼를 닫고, 남자는 곧게 서서 허리를 쭉 폈다. 햇살이 남자의 머리카락을 금빛으로 물들였다. 그 순간 남자의 왼발이 미끄러졌다. 남자가 어! 하고 소리를 쳤고 나도 놀라 앗! 하고 소리를 쳤다. 남자는 심하게 휘청거리다가 지붕 위에 대자로 엎어져버렸다. 엎어지면서 오른발로 건드린 가방이 그대로 바닥으로 떨어졌다. 남자가 어- 어- 하며 지붕에서 미끄러져 내리기 시작했다. 나는 어- 어-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남자는 미친 듯이 팔을 휘두르며 기왓장을 움켜잡으려고 했지만 잡히는 것은 없고 계속해서 미끄러져 내렸다. 그러나 다행히도 남자는 그대로 바닥에 떨어지지 않고 오른발이 담과 벽 사이에 껴서 거꾸로 대롱대롱 매달리게 되었다. 담은 이층짜리 건물의 지붕과 맞닿아 있을 정도로 높았다. 주위를 둘러봤지만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남자가 다리를 움켜잡고 고통스러운 비명을 질렀다. “잠깐만, 잠깐만요. 기다리세요!” 나는 어색하게 외친 뒤 남자를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남자는 왼손으로 담장을 짚고 오른손으로 다리를 움켜잡고 있었다. 고통스러운지 몸을 이리저리 비틀며 신음소리를 냈다. 그러자 갑자기 끼어있던 다리가 빠져나와 남자는 그대로 머리부터 바닥으로 떨어졌다. 아스팔트 바닥에 수박이 떨어져 깨지는 소리가 났다. 딱 그 소리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 모든 일이 일어나는 동안 나는 겨우 세 걸음 남자에게 다가갈 수 있었다. 나는 다시 세 걸음 뒤로 물러선 뒤 우유를 안고 그곳을 떠났다.
나는 정신없이 뛰다가 갈림길이 나와 멈춰 섰다. 왼쪽 길과 오른쪽 길 모두 회색 담장이 이어진 비슷해 보이는 길이었다. 왼쪽 길 너머로 야트막한 야산이 보였다. 그렇다면 오른쪽 길이다. 조금 걷자 표지판이 하나 나타났다. 붉은색 화살표가 그려져 있고 그 옆에는 <배드민턴장 입구> 라고 써져 있다.
배드민턴!
나는 화살표에다 대고 벌컥 소리를 질렀다. 여전히 주위에는 아무도, 아무 소리도 없었다. 진공청소기로 모든 소리를 빨아들인 것처럼 이상한 정적이다. 귓가에 아까 남자가 떨어질 때 냈던 소리가 맴돌았다. 수박처럼! 깨어진 머리 사이로 붉은 즙이 흘러나왔을까. 나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는데! 해는 여전히 하늘 한가운데서 느긋하게 빙글빙글 타오르고만 있었다.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는 듯이 결백한 표정을 하고서는 그저 밝게 타오르고만.
집으로 돌아갈까.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이모분식과 꼬치구이호프가 있던 건물은 이제 보이지도 않았다. 다시 고개를 돌리는데 순간 회색 담장들이 히쭉 웃으며 몸을 비트는 것만 같았다. 좁은 골목길에는 가로등도 없었다. 밤이 깊어질수록 검은 어둠만 천천히 쌓여가겠지. 나와 우유는 그 안에 갇히는 건가. 나는 길가에서 졸다 잠이 들고 그러면 사계절보신탕집 여자가 우유를 잡아갈 거다. 나는 그저 우유를 사겠다는 것인데. 엄마가 나를 미워해서 이런 일을 당하는 건가. 엄마가 나를 미워해서, 그래서.
1분 쯤 걷자 회색 담장이 끊어지고 작은 공터가 나왔다. 촌스러운 파란색 플라스틱 지붕 아래 네모반듯한 비석과 회색 수도꼭지가 보였다.
"이 물은 지하 120미터에서 나오는 암반수입니다. 저희 부친의 뜻에 따라 이웃들과 모두 나눠먹기 위해 수도시설을 하였습니다. 깨끗하게 이용하여 주십시오."
나는 견고딕체같이 굵고 딱딱한 소리로 비석에 새겨진 글자들을 따라 읽었다. 수도꼭지를 틀자 물이 시원스럽게 쏟아졌다. 나는 우유를 내려놓고 수도꼭지에 입을 갖다 댔다. 물에서는 피맛이 났다. 나는 구역질이 나 삼키지 못하고 뱉어버렸다. 우유가 바닥에 고인 물을 할짝할짝 핥아먹었다. 나는 우유를 나무란 뒤 가슴에 안았다. 공터 왼쪽으로 야트막한 언덕이 이어져있는 것이 보였다. 언덕만 넘으면 돼요, 아까 슈퍼마켓 주인 남자가 분명히 그렇게 말했지. 하지만 내 생각에는 언덕만 넘으면 될 리가 없다. 여기까지 쭉 그래왔다. 우유를 살 수 있기는 있는 건가. 슈퍼마켓이 나오기는 하는 건가. 화가 치밀어 오른다. 되돌아가고 싶다! 하지만 여기까지 온 게 너무너무 아깝고 억울하다!
언덕을 넘자 표지판이 또 하나 보였다.
<배드민턴장 입구>
도대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배드민턴장이라는 건지? 배드민턴장이었던 흔적조차 보이지 않는다. 배드민턴 공 하나 버려져 있지 않다. 대신 거기에는 커다란 검은색 비닐하우스가 있었다. 그래, 저기가 커다란 24시 할인마트란 말이지. 저게 커다란 24시 할인마트라면 우리 우유는 알래스카말라뮤트다. 길은 거기서 끊겨 있고 그 너머는 산, 아까부터 봤던 야트막한 야산뿐이다. 나는 검은색 비닐하우스를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비닐하우스는 직사각형 상자모양으로 흙바닥에 웅크리고 있었고, 흙은 진한 핏빛을 띄고 있었다.
비닐하우스 앞에는 낡은 베이지색 소파가 놓여 있고 거기에는 늙은 남자 둘이 앉아있었다. 그 남자들은 지퍼백 속에 넣어 삼년간 냉동실에 방치해둔 백설기 같아 보였다. 어서 죽으시는 것이 좋지 않겠어요? 하고 빈정거려도 자신들에게 관심을 갖는다는 것에 그저 고마워 눈물을 흘릴 가엾은. 너희들에게는 청춘이란 것이 없었지? 너희들의 일생은 그저 덜 익은 백설기에서 썩은 백설기로 이동하는 경로에 지나지 않았지? 그러나 그것은 나도 마찬가지이다. 냉장고는 고장나 있고 우리 모두 문 안에서 썩어가고 있다. 나는 늙은 남자들을 향해 이렇게 괴롭다, 배가 고프다, 우유는 도대체 어디서 파는 거냐, 억울하다, 해가 점점 기울어간다, 울먹이며 하소연을 하고 싶었지만 우유를 사야 했기 때문에 그럴 수가 없었다. 아쉽다는 생각을 하며 문을 찾아 비닐하우스의 뒤쪽으로 돌아갔다.
그곳에는 신기한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산비탈에 비스듬하게 펼쳐진 넓은 공터에 하얀색 플라스틱 테이블과 의자가 잔뜩 놓여 있고 나이든 남자들이 그곳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남자들은 연신 담배를 피우며 진지하게 바둑을 두고 있다. 나는 가장 온순하고 착하고 무엇보다도 가장 나이가 어려보이는 남자에게 다가가 물었다.
“여기 혹시 슈퍼마켓이 있나요?”
남자가 고개를 들자 오른쪽 뺨에 깊게 움푹 패인 상처가 보였다.
“저 안으로 들어가 봐요.”
남자가 입술을 움직일 때마다 움푹 패인 상처가 씰룩거렸다. 내 표정이 굳자 남자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도대체 여기가 어디인가 묻는 것조차 피곤하다. 자욱한 담배연기가 내 눈을 향해 달려든다. 그래서 나는 눈물을 흘렸나. 사실 오늘 아침 눈을 뜬 순간부터 뭔가 이상했다. 밖에 나오지 말았어야 했다. 하지만 언제나 이상한 하루들 사이에서 좀 더 심하게 이상한 하루를 가려내는 것은 너무 어려운 일이었다고 결론 내리고 나는 비닐하우스 안으로 들어갔다.
하우스 안에는 더 많은 남자들이, 더 많은 테이블이, 더 많은 담배연기가, 더 많은 쉰 막걸리냄새가 있었다. 열린 문틈으로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자 순간 남자들이 놀라 몸을 움츠린다. 남자들이 나를 본다. 그곳에 있는 모든 남자들이 나를. 구석에서 졸고 있는 어린 남자아이만 빼놓고 모두 나를. 나는 힘겹게 입꼬리를 들어올린다. 대부분 다시 게임에 몰두하기 시작하지만 몇몇 남자들은 경계를 늦추지 않는다. 몇몇 남자들은 나를 빤히 쳐다보며 끈적끈적하게 웃는다. 몇몇 남자들은 소심하게 나를 곁눈질한다. 나는 곧장 왼쪽 통로를 따라 걷는다. 우유는 얌전하게 안겨 있다. 유리 대신 비닐을 씌운 엉성한 나무문을 열고 들어가자 풍성한 백발머리의 늙은 남자가 어서 오세요, 나를 보며 웃는다. 나는 지쳐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냉장고 안에 있는 매일우유 ESL을 힘없이 쳐다본다. 남자가 우유를 꺼내오고 나는 오백 원짜리 네 개를 계산대 위에 쌓아놓는다.
“강아지가 내 머리처럼 하얗네요.”
남자가 우유를 비닐봉지에 담으며 말했다. 나는 왠지 이 남자가 무섭다. 거스름돈을 받아 서둘러 비닐하우스에서 빠져나왔다. 문을 닫자 몸이 으슬으슬 떨리고 기침이 났다.
비닐하우스 옆에는 검은 비닐봉지가 수십 개 놓여 있었다. 그 옆에 놓인 작은 나무판에는 <무공해 열무 한 봉지 삼천 원>이라고 써 있었다. 나는 주위를 살핀 뒤 비닐봉지를 하나 집어들고 냅다 뛰기 시작했다. 소파에 앉은 늙은 남자들이 나를 향해 뭐라고 외쳤다. 아쉽지만 오늘은 이제 그만! 나는 더욱 더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가슴에 안긴 우유가 아래위로 거칠게 흔들렸다. 나는 우유를 꼭 끌어안았다. 숨이 차 머릿속이 검게 텅 비었다. 해냈다, 우유를 샀다, 하는 성취감이 아니라 누렇고 끈적끈적 더러운 느낌이 머리를 가득 채웠다. 나는 더 빠르게 뛰었다. 지금 이 상황이 미친 듯이 황량한 벌판을 가로질러 뛰다가 폐가 터져 죽어버리는 상황이라면 좋겠다. 나에게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좋겠다. 하지만 내 손에 들린 우유와 열무가 너무 무겁다. 우유를 안은 오른 팔이 저리다.
나는 약수터에 도착해서야 겨우 멈춰 섰다. 한참동안 언덕 쪽을 보았지만 쫓아오는 사람은 없었다. 숨을 고르며 만족한 웃음을 지었다. 우유와 비닐봉지를 바닥에 내려놓고 수도꼭지를 틀었다. 물에서는 여전히 피맛이 났다. 하지만 좋다. 뱀파이어가 돼서 처음 피의 맛을 볼 때 어떤 느낌이 날지 알 것도 같다. 그것은 아마도 낮게 가라앉은 죄의식과 쾌감이 꿈틀대며 온몸을 사로잡는 느낌이겠지. 갑자기 우유의 털 빛깔이 지나치게 흰 것 같이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우유가 보이지 않는다. 나는 놀라 우유를 찾다가 밭을 매는 여자가 우유에게 파를 먹이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나는 뛰어가 지나치게 화를 내며 길길이 날뛰었다.
“개한테 파를 주면 어떡해! 토한단 말이야! 죽어요!”
여자는 당황한 듯도 하고 미안한 듯도 하고 내가 두려운 것도 같고 그래서 어쩔 줄 몰라 한다. 나는 우유를 번쩍 들어 안은 다음 앞으로는 조심하라고 경고한 뒤 밭을 가로질러 나온다. 이름을 알 수 없는 작은 풀들이 내 발에 짓밟히고 있다. 나는 일부러 풀을 골라 밟으며 밭을 빠져나와 우유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우유가 밭을 매는 아주머니와 나를 번갈아가며 쳐다본다.
저쪽으로 갔다가는 까치한테 쪼여서 죽을 거다, 나는 우유의 눈을 들여다보며 마음속으로 설명한 다음 검은 비닐봉지를 들고 우유야 가자, 다시 걷기 시작했다.
얼마쯤 걸었을까. 나는 바닥에 주저앉아 열무가 든 검은 비닐봉지를 풀기 시작한다. 안에는 다 썩어 짓무른 열무가 들어 있다. 나는 조금 실망했지만 마음을 다잡는다. 햇볕에 말려서 시래기나물을 만들면 된다. 나는 다른 비닐봉지 안에 들어 있는 우유를 꺼내 열무가 든 비닐봉지에 넣는다. 그때 우유가 내 앞을 지나 왼쪽으로 이어져 있는 작은 샛길로 들어선다. 샛길의 끝에는 <주말 농장 임대>라고 쓰인 플래카드가 걸려 있는 낡은 철조망이 있다. 플래카드 아래에는 커다란 흰 개가 두 마리 묶여 있다. 개들이 긴장한 눈빛으로 우유를 본다. 내가 우유를 부르자 개들이 짖기 시작한다. 우유가 놀라 나를 돌아본다. 나는 손짓하며 우유를 부른다. 그러자 우유가 나에게로 쪼르르 달려온다. 나는 우유를 안고 개들에게로 다가간다. 개 짖는 소리에 귀가 먹먹하다. 크게 벌어진 입 속으로 선홍빛 긴 혀와 누런 송곳니가 보인다. 나는 개들의 거의 코앞에 우유의 머리를 들이댄다. 개들은 흥분하여 어쩔 줄을 모른다. 쇠줄에 묶인 목이 답답한지 자꾸만 몸을 턴다. 우유는 얌전히 눈만 끔뻑끔뻑하고 있다. 개들은 더 크게 짖는다. 귀가 멀 것 같다. 재미있다. 이대로 개들한테 우유를 안겨주고 도망치면 더 재미있겠다. 엄마가 화를 내겠지. 집에서 쫓겨날지도 모른다. 그러면 곤란하긴 한데 그래도 재미있다. 나는 깔깔거리며 몇 번 더 우유를 들이밀며 장난을 친다. 그리고는 이제 됐다 싶어 다리를 펴고 일어나려는 찰나 왼쪽에 묶여 있던 흰 개의 줄이 풀린다. 개가 나를 향해 커다란 아가리를 들이밀고 나는 놀라 우유를 놓치고 만다.
흰 개는 곧바로 우유의 머리를 덥석 물어 미친 듯이 흔들기 시작했다. 바닥에 붉은 피가 뚝뚝 떨어졌다. 흰 개의 주둥이가 붉게 물들어갔다. 묶여 있는 개는 계속해서 크게 짖어댔다. 분홍색 혀가 크게 부풀어 오른 것 같다. 침이 바닥에 뚝뚝 떨어진다.
이제 됐다. 죽었다.
내가 중얼거리자 흰 개는 머리를 크게 휘둘러 우유를 바닥에 내동댕이친다. 우유는 분홍빛 배를 내밀고 바닥에 누워 있다. 배도 있고 다리도 네 개, 꼬리도 있다. 그러나 눈은 어디에 있나. 귀는? 흰 개는 아직도 화가 덜 풀렸는지 우유의 분홍빛 배에 주둥이를 처박는다.
흰 개의 얼굴은 완전히 붉은색이 되어버렸다. 우유가 흰 개였는지 붉은 개였는지 이제는 나도 자신할 수가 없다. 흰 개가 갑자기 고개를 들어 나를 본다. 숨이 멎을 것 같다.
나는 천천히 뒷걸음을 치다가 한 젊은 여자와 부딪혔다. 흰 개는 그 여자를 보더니 갑자기 철조망을 뛰어넘어 도망쳐버렸다. 나는 젊은 여자를 보았다. 젊은 여자는 어린 여자아이와 함께였다. 여자아이는 버버리의 체크 원피스를 입고 있었고, 젊은 여자는 샤넬의 투피스를 입고 있었다. 여자의 가는 손목에 채워진 검은 가죽 시계가 햇살을 받아 빛났다. 여자가 놀란 눈으로 나를 본다.
“몰라요. 저 개 내꺼 아니에요 저 개도 내꺼 아니에요 저 개도 내꺼 아니에요 저는 우유 사러 온 거예요.”
나는 태연하게 설명하였지만 얼굴은 붉게 달아올라 땀으로 범벅이 되어있다. 여자는 여전히 놀란 눈으로 나를 본다.
“주말 농장 오셨나요? 아니면 외할머니댁?”
나는 계속해서 지껄인다.
“못 본 걸로 해주세요. 내 탓이 아니에요. 여기 밭에 심은 게 뭔지 알아요? 열무? 아니면 배추? 깻잎인가?”
여자는 여전히 입을 꾹 다물고 나를 본다. 할 수 없지. 여자에게 다가가려는데 갑자기 여자가 손목을 들어 시계를 본다.
“시계 예쁘다, 어디서 사셨어요? 아무튼 못 본 걸로 해주세요, 하지만 내 탓이 아니에요, 오늘 벌어진 일은.” 나는 한숨을 쉬고 다시 말을 잇는다. “참 어이가 없네요. 아직도 환한 대낮에. 뭐 거의 끌려갈 뻔했지만. 아니 그만 좀 쳐다보고 말을 좀 하지? 혀가 없나? 그 애는 아가씨 딸이야? 젊으신 분이 참 팔자.”
여자는 아이의 손을 꼭 쥐고 걷기 시작한다.
기다려 봐요 나도 그 쪽으로 갈 건데 같이 가면 되잖아요 나 이상한 사람 아니에요 왜? 나도 여기서 나갈 거란 말이야 아가씨도 그렇고 나도 이런,데 올 사람 아니잖아요 그래 나는 우유를 사러 왔다 그런데 슈퍼마켓이 다 닫혀,있었다 가로등도 없고 나 이런 데서 밤을 지새울 수는 없어 근데 왜 여기서 빠져나갈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지? 동서벌꿀 통 속에 들어,있는 그 노르스름한 것이 물엿이면 어쩌지? 우유를 따랐는데 검은물이 나오면 나는 어쩌지? 열무가 비닐봉지 안에서 썩어가고 있는데 큰일 났다 큰일 났다 큰일 났다
나는 계속해서 크게 중얼거리며 여자를 따라갔다. 여자는 여자아이의 손을 꼭 쥐고 앞으로, 앞으로만 걸어갔다. 편한 여자다. 하지만 내가 자기를 해칠 거라고 생각한다면 슬픈데.
횡단보도 앞에는 여전히 늙은 여자가 호박과 오이 그리고 몇 가지 봄나물을 늘어놓고 앉아 있었다. 아무것도 팔린 것이 없는 것 같다. 나는 여자 앞에 주저앉아 비닐봉지를 풀기 시작했다.
“할머니 이거 열무 맞나요? 말리면 시래기나물 해 먹을 수 있나요?”
여자는 진지한 얼굴로 비닐봉지 안을 들여다보더니 고개를 흔든다.
“안 돼, 아무것도 안 돼. 다 썩어문드러진 걸 가지고 뭘.”
나는 몹시 실망하여 비닐봉지에서 우유와 열무를 꺼내 열무는 버리고 우유는 가슴에 안는다.
횡단보도 앞에 서자 순간 졸음이 몰려온다. 눈앞에서 횡단보도의 흰 선이 하나씩 지워지기 시작한다. 젊은 여자와 아이는 벌써 길을 건너 저 멀리 사라져간다. 아아 천천히 잿빛 먼지가 눈동자를 채운다. 신호등이 깜박거리기 시작한다. 나는 애써 걸음을 옮기는데 딱 그만큼 집이 멀어지는 느낌이다. 나는 천천히 눈을 감으며 목이 마르니 물을 좀 마셔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
잠이 오지 않는다. 잠이 쏟아진다. 잠이 오지 않는다. 잠이 쏟아진다. 잠이 쏟아진다. 잠이 쏟아진다 잠이 쏟아지지 않는다 잠이 오지 않는다 죽을 것 같다 엄마는 아직도 돌아오지 않았다.
낮에는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로얄밀크티를 만들어 마셨다. 그것은 정말로 맛이 좋았다. 너무너무 맛이 좋아서 엄마한테도 만들어드려야지 엄마가 돌아오면 하고 생각했다. 그리고 오늘 벌어진 일을 이야기해야겠다고 엄마가 돌아오면. 그런데 엄마가 돌아오지를 않는다.
모든 것이 잘 되었다. 참으로 그렇다는 생각이 든다. 이제 엄마는 나를 키우면 되니까. 우유는 우유가 되었고 나는 언제나 나니까 나였으니까 이제 엄마는 우유 대신에 나를 키우면 된다. 내가 꼬리를 흔들게 우유 대신에 우유를 안고 내가 꼬리를 흔들게 앞으로 내가 우유를 대신해 개가 되어 드릴게요. 우유는 냉장고 속에 잘 있고 나는 소파 위에 잘 있다. 엄마는 부엌에 잘 있고 식탁 위에는 잘 끓인 라면과 잘 익은 김치가 있고 냉장고 속에는 차갑고 신선한 우유가 있고 그러니까 다 좋은 거다. 우리는 더 이상 서로를 미워하지 않고 사이좋게 모여서 행복하게 오래오래 잘 살 수 있을 거다. 이제 우리는 그렇게 살 거다. 엄마, 엄마가 돌아오면. 《문장 웹진/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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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 박솔뫼 어느 날 아침 애리는 자신이 오랜 시간 흔들리는 창을 보며 시간을 보내왔음을 알았다. 일을 하러 가는 길이었고 이곳에 이사와 이 열차를 탄 것은 1년 7개월째였지만 아주 오래전부터 학교에 들어가기 전 아이일 때 모든 것이 멈춰 서 있고 시간이 영원한 것처럼 느껴지던 때부터 탈 것에 올라타 멀어지는 집과 나무들을 보아 왔다고 느꼈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텐데 왜 그제야 그것이 새삼스럽게 느껴진 것일까. 어딘가로 향하는 감각과 함께 창 너머 공터와 집들과 골목들을 실제로 걷는 일은 왜인지 일어나지 않을 일처럼 느껴지고 언제까지나 좌석에 앉아 멀어지는 사람과 집들과 빨래와 커튼을 보고 있을 것 같다. 애리는 사원 숙소를 제공하는 회사에서 오랫동안 일을 하다 그만두고 나와 집을 구해 살다 사회복지와 개호 관련 자격증을 따고 이후에는 자격증과 상관없는 일을 몇 년을 하였다. 그러다 역시나 숙소를 제공하는 지금의 회사에 다니게 되었다. 회사는 큰 항구가 있는 대도시와 인접한 소도시에 있었고 숙소는 회사 직원만이 아니라 해당 지역 직장인들을 대상으로 한 곳이었기 때문에 회사와는 아주 가깝지는 않았다. 그 때문에 예전 회사는 숙소에서 회사까지 걸어갈 수 있었지만 지금 회사에 가기 위해서는 숙소에서 걷거나 자전거를 타고 역으로 가서 다시 20분가량 열차를 타야 했다. 숙소 앞에서 버스를 타는 방법도 있었고 버스를 타는 것이 여러모로 더 편했지만 버스는 늘 같은 회사 사람들로 붐볐고 앉아 가기가 힘들어서 애리는 보통 열차를 탔다. 오랜 시간 흔들리는 창을 보며 살아왔다는 것을 깨닫자 곧이어 오랜 시간 기숙사에서 공동 부엌에서 공용 생활공간에서 얼굴만 익숙한 사람들과 살아왔다는 사실이 마치 연결된 문제처럼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둘은 전혀 상관없는 일인데. 마음을 먹자면 살 곳을 구해서 혼자 사는 것이 가능했던 것도 같지만 애리는 왜인지 그럴 마음을 쉽게 먹지 못했다는 생각을 한다. 이렇게 나이가 들어서 공동 숙소에서 사는 것이 부끄럽거나 괴롭지는 않고 돈을 아낄 수 있고 여러모로 편리한 점도 많았지만 혼자 살 집을 찾아 오래 쓸 가구를 사는 일에 겁을 먹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는 자신을 냉정하게 바라본다. 창은 여전히 흔들리고 창밖으로 아무것도 없는 텅 빈 공터가 보인다. 공터 구석에서는 무언가 야채 같은 것을 심는 것도 같지만 대부분은 아무것도 없는 공터. 도시 어느 한구석의 아무것도 없는 텅 빈 공터는 드물다는 생각을 한다. 가끔은 누군가의 넓은 방과 책장에서 시간을 보내고 싶다가도 애리는 동시에 이것저것 모든 것을 한 번에 버리고 어딘가로 금세 떠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고 그것이 실제로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기 때문에 지금 생활은 지금 생활대로 좋다고 여기게 된다. 하지만 그럼에도 누군가의 텅 빈 방 (떠올려 보면 아주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가져 본 적이 없는)이 필요하다고 느낄 때 그것을 원하는 마음은 원하는 마음으로 눈에 보이는 곳에 확실하게 붙여 두어야 한다. 그러다 보면 텅 빈 방의 모습이
- 관리자
- 2025-07-01
알고 싶습니다 최재영 가끔 인생이 내게 애벌레가 파먹는 중인 사과를 베어 물도록 강요하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토요일 저녁 아홉 시 뉴스에선 오늘도 전 세계 기아들이 굶고 있고 남미 쿠데타 정부의 진압 몽둥이에 시민들이 맞고 있으며 전장의 포탄은 군인과 민간인들을 죽인다. 그러나 우리 집 안방엔 세 살 연상 아내와 세 살짜리 딸이 곤히 잠들어 있다. 비록 내일이면 공룡 박사 딸은 파키케팔로사우루스 흉내 내며 내 턱에 박치기를 날릴 것이고 아내는 원시인 사냥꾼처럼 괴성을 지르며 딸을 쫓을 것이지만··· 서른여섯 살의 나는 대한민국 성남시의 아파트에, 지금 여기에, 우리 세 가족과 잘 있고, 그것참, 다행이다. 내가 베어 문 사과 반쪽에 벌레가 없어서. 뉴스에 어느 북한군이 등장한 건 그런 생각을 할 때였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의 전장이었다. 한 북한군이 부상 때문에 낙오했는지 홀로 하늘을 보며 누워 있었다. 러시아 것인지 우크라이나 것인지 모를 드론이 공중에서 그를 촬영하고 있었다. 곧 드론은 부드럽게 수직 하강하며 그에게 다가갔고 그는 영화 속 주인공처럼 쓰으윽- 줌인 됐다. 뉴스 진행자와 패널들이 호들갑 떨었다. “너무나 리얼합니다!” 무슨 아는 사람이라도 본 것처럼 오바하네. 나는 그들의 반응에 코웃음 치며 손에 든 캔맥주를 쓰으윽- 들이키려다, 멈칫했다. 아는 사람 같았다. 낯이 익었다. * 약 15년 전 여름, 나는 백령도에 주둔한 해병대 6여단 영창에 15일간 구금되어 있었다. 죄명은 후임 폭행이었다. 막 상병이 됐을 때 생긴 일이었다. 영창의 개인 감방에 들어서자 정말이지 감옥처럼 생겨서(정말 감옥이긴 했지만) 울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철커덩 자물쇠가 닫히는 소리와 함께 스물한 살에 인생이 망해 버렸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감방 철창 너머론 건물의 입구와 헌병 하나가 근무하며 감시하는 공간이 보였다. 그 공간을 기준으로 네 개의 감방들이 반원을 그리며 각각 1호 창, 2호 창, 3호 창, 5호 창이라는 이름으로 있었다(4호 창은 없었다, 해병대에선 숫자 4를 쓰지 않으니까). 나는 3호 창에 수감됐다. 감방 안에 앉아 있으면 보이는 건 꾹 닫힌 건물 문, 그리고 중앙의 그 헌병밖에 없었다. 양옆의 다른 감방들은 시야에 아예 들어오지 않았다. 1호 창과 5호 창에도 수감자가 한 명씩 있다는 것만 알 뿐이었다. 단 2호 창만은 비어 있다고 했는데 폭행 사건이 일상적이라 항상 미어터지던 백령도 해병대의 영창에선 이례적인 일이었다. 나중에 듣기론 당시 북쪽 상황이 심상치 않아 각 부대들의 징계 절차가 보류됐기 때문이라고 했다. 감방 안은 어두컴컴하고 축축했다. 폭은 누워서 다리를 뻗지 못할 정도였다. 물론 화장실은 따로 없었다. 안쪽으로 세 걸음 가면 구석에 수도꼭지를 비롯해 쪼그려 앉아 일을 보는 일명 고무신 변기가 있었다. 무릎 정도 높이의 아담한 담만이 가림막을 해 주었다. 큰 것이든 작은
- 관리자
- 2025-07-01
프레살레 반수연 홍은 미로처럼 이어진 길을 솜씨 좋게 빠져나갔다. 홍을 놓칠세라 일행들은 빠른 걸음으로 따라붙었다. 이른 아침이었지만 공항은 번잡했다. 챙이 넓은 홍의 검은색 모자는 인파 사이에서 사라졌다가 나타나곤 했다. 모자가 사라질 때마다 짧은 불안이 스쳤다. 우리 중 누구도 파리에 처음 오는 이는 없었다. 정아는 작년 패션 위크에도 왔다고 했다. 하지만 출구로 빠져나와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홍을 만난 순간, 홍이 웰컴 투 패리스, 라며 환하게 웃던 순간, 제가 잘 모시겠습니다, 라며 농담과 카리스마가 뒤섞인 환영 인사를 건네는 순간, 홍은 우리가 놓쳐서는 안 될 깃발이 되었다. 몇 개의 건물과 긴 복도를 통과해 홍이 예약해 둔 렌터카 사무실에 도착했다. 미리 맡겨 두었다는 홍의 짐이 사무실 모퉁이에 쌓여 있었다. 각지고 거대한 두 개의 캐리어, 명품 마크가 선명한 가죽 배낭과 보스턴백, 두 개의 쇼핑백도 포개져 있었다. 캐리어 계의 에르메스라는 바로 그 리모와 아닌가요? 색깔 너무 이쁘다. 이삿짐을 떠올리게 하는 홍의 짐에 약간의 충격을 받은 나와는 달리 정아는 레몬색 캐리어에 먼저 관심을 보였다. 자기야, 그건 좀 그렇지 않아요? 에르메스야 버킨 말고는 뭐가 있나. 홍과 정아의 대화를 들으며 나는 며칠 전 정아가 단톡방에 올린 메시지를 떠올렸다. 유럽 항공은 수하물 분실이 잦으니 위탁 수하물 없이 기내용 캐리어와 작은 손가방으로 짐을 제한해요! 정아는 해당 항공사의 기내 반입 수하물 규정을 캡처해서 올리며 당부했다. 같은 옷을 이틀 연달아 입거나, 옷과 콘셉트가 맞지 않는 신발이나 가방을 견디지 못하는 예민한 패션 감각의 소유자인 정아가 분실이 두려워 그런 제안을 한다는 건 조금 의외였다. 그런데 이제 보니 정아는 홍의 짐이 어마어마하다는 사실을 미리 알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정아가 홍을 위해 우리 짐을 단속했다는 사실보다 진실의 내막을 뒤틀었다는 것이 묘하게 신경을 긁었다. 독일제 7인용 SUV 차량의 마지막 3열을 접어 트렁크의 공간을 넓혔다. 홍의 캐리어를 먼저 싣고 그사이에 네 개의 기내용 캐리어를 테트리스 하듯 넣었다 뺐다 씨름하느라 손가락이 욱신거렸다. 어찌어찌 짐을 욱여넣고 나니 트렁크는 룸미러로 후방이 보이지 않을 만큼 꽉 찼다. 배낭이나 손가방은 발아래에 두거나 안고 타면 될 거라고 홍이 운전석으로 올라타며 말했다. 나는 노트북과 파우치와 책이 담긴 배낭을 가슴에 안고 뒷좌석에 올라 안전띠를 당겨 맸다. 짐과 사람이 뒤엉켜 숨 쉴 공간마저 충분치 않게 느껴졌다. 답답함이 불안으로 바뀌며 숨이 가빠 왔다. 다른 일행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프로작을 한 알 꺼내 입에 물고 창을 조금 열었다. 약기운이 신경을 눌러 주기를 기다리며 눈을 감았다. 파리는 오전 열한 시, 한국은 오후 여섯 시였다. 지금쯤이면 윤수는 일어났을 것이다. 냉장고 제일 위 칸에 김치찌개 있어. 냉동실에 육개장도 얼려 두었어. 전자레인지에 데워 먹어. 공항으로 출발하기 전 나는 신발을 신다 말고 식탁에 앉아 짧
- 관리자
- 2025-07-01
저번까지 읽은 이후로 이어보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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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건
달듯 말듯..ㅎㅎ 잘읽었습니다~ 다음 글도 올려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