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뉴얼 제너레이션
- 작성일 2006-0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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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뉴얼 제너레이션
김중혁
아직도 첫번째 문장을 쓰지 못했다. 주의사항에서부터 막혔다. 흔해빠진 물건이라면 주의사항 쓰는 건 일도 아니다. 예전에 썼던 주의사항을 그대로 베껴 쓰면 된다. 말만 조금 바꾸고 문장의 배치를 달리하면 그만이다. ‘위험할 수 있습니다’를 ‘위험합니다’로 바꾸고 ‘분해했을 때 심한 충격을 받을 수 있습니다’를 ‘분해하지 마세요’로 바꾸면 된다. 하지만 처음 보는 기능을 지닌 제품이라면 아무리 연구원의 설명을 들어도 막막할 수밖에 없다. 어떤 걸 가장 먼저 경고해야 할 것인지를 생각해봐야 한다. 아무리 하찮은 매뉴얼이라 할지라도 체계와 순서가 있어야 하는 법이다.
태어나서 처음 보았던 매뉴얼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몇 달 동안 용돈을 모아서 산 디지털카메라의 매뉴얼이었다. 택배로 도착한 물건의 포장을 뜯었을 때 나를 압도한 것은 디지털카메라가 아니라 300페이지에 달하는 매뉴얼이었다. 나는 카메라의 포장을 뜯어볼 생각도 하지 못하고 밤새 매뉴얼을 읽었다. 매뉴얼을 읽지 않고 카메라를 건드리면 곧바로 고장을 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의사항, 구성품 안내, 촬영 준비, 기본적인 기능들, 고급 기능들, 좋은 사진을 찍는 요령, 부록, 제품 사양을 꼼꼼하게 읽고 또 읽었다. 감동적인 매뉴얼이었다. 디지털카메라의 매뉴얼은 머리 속 편평한 곳에다 커다란 밑그림을 그린 다음 문자와 그림과 도표로 오밀조밀한 지식의 건축물을 조각했다. 내 머리 속에다 디지털카메라가 주인인 어떤 마을을 지어놓은 듯한 느낌이었다. 나는 그 건축법이 신기했다. 매뉴얼을 다 읽고 나자 디지털카메라가 어떤 것인지 알 것 같았다.
그때부터 나는 매뉴얼을 모으기 시작했다. 내가 가지고 있지 않은 물건이라 하더라도 매뉴얼만 보면 그 제품을 사용한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인터넷을 이용해서 PDF형태의 무료매뉴얼을 다운받았고 전자제품 대리점의 판매원을 꼬드겨 각종 매뉴얼을 얻었다.
지금까지 수백 개의 매뉴얼을 읽었지만 세상의 모든 매뉴얼은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좋은 매뉴얼과 나쁜 매뉴얼. 좋은 매뉴얼은 머리 속에다 거대한 밑그림을 그려주지만 나쁜 매뉴얼은 여러 가지 정보를 아무렇게나, 모래성처럼 쌓는다. 좋은 매뉴얼은 조리 있게 사용자를 설득하지만 나쁜 매뉴얼은 자기 주장이 너무 강한 나머지 사용자를 배려하지 않는다. 나쁜 매뉴얼을 만드는 사람은, 당연히 나쁜 사람일 것이라고 나는 생각해왔다.
“아직 시작도 못하셨네요?”
디자인실의 박 팀장이 내 모니터를 보면서 말했다. 비웃는 듯한 말투가 거슬렸지만, 우리는 좋은 매뉴얼을 만드는 팀이었기 때문에, 박 팀장 역시 나쁜 사람일 리가 없으므로, 신경질을 낼 수는 없었다.
“그러게 누가 자기 맘대로 계약하래?”
“내 참, 일 없다면서 계약 따오라고 할 땐 언제고 이제 와서 딴소리예요? 그럼 계약 파기하시든지요.”
“그렇게는 못하지. 사무실 임대료도 밀렸는데…….”
“월급까지 밀리기 전에 얼른 끝내세요. 제품 일러스트는 대충 끝나가니까…….”
“누가 사장인지 모르겠네. 네가 사장이었으면 아마 내 손을 키보드에다 묶어뒀을 거야. 그렇지?”
“기대도 크시네. 벌써 해고시켰을 거예요. 월급은 많이 받는데 하는 일도 없고, 투정이나 부리고 말이죠.”
“알았어. 내일까지 끝낼게. 귀찮게 하지 말고 저리 꺼져.”
박 팀장은 커피를 홀짝이면서 자신의 책상으로 돌아갔다. 나는 다시 모니터로 눈을 돌렸지만 거기엔 황량한 모래사막이 펼쳐져 있었다. 모래사막 위에서 검은색 커서만 깜빡거리고 있었다. 깜빡거리는 커서는 모래사막에 파묻힌 무엇인가가 내게 보내는 구조신호 같았다. 이봐, 거기나 여기나 숨 막히긴 마찬가지니까 그냥 조용히 묻혀 버리라고, 구조신호 같은 걸 보내 봐야 도와줄 사람도 없으니까 말야. 나 역시 모래사막 저쪽의 누군가에게 구조신호를 보내고 싶은 심정이었다.
“제품 일러스트 파일 좀 보내줘. 그거라도 보고 있어야겠다.”
나는 박 팀장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목소리가 너무 컸던지 직원 세 명의 얼굴이 모두 나를 향했다. 제품 발표 일정에 맞춰 매뉴얼을 만들다 보면 신경이 날카로워지게 마련이지만 이번엔 내가 생각해도 정도가 심한 편이다. 직원들의 얼굴에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을 대하는 듯한 조심스러움이 스며 있었다.
“제품을 직접 만져보고 쓰시죠. 일러스트는 아직 미완성인데요.”
“손에 쥐가 날 정도로 만져봤는데 아무것도 안 떠올라. 미완성이라도 보내봐.”
목소리의 크기로 봐서는 한 100평쯤 되는 사무실에서의 대화 같지만 우리 사무실의 크기는 20평이 될까말까한 규모다. 사장인 나를 포함해 직원은 네 명, 네 명 중에는 팀장이 한 명, 수습사원이 한 명, 그러니까 평사원은 한 명뿐인, 그렇게 따져 보니, 참으로 언밸런스한 조직이다. 더욱 언밸런스한 것은 네 명이 모두 남자라는 것이다. 나는 박 팀장이 보내준 파일을 열었다.
“이게 뭐야. 우리가 둥근 치즈 매뉴얼을 만들고 있었나? 아니면 골프공 매뉴얼이었냐?”
박 팀장이 내 책상으로 걸어왔다. 모니터를 들여다보더니 웃었다.
“잘못 보냈네요. 이건 처음에 했던 스케친데.”
“이렇게 일을 하니까 자꾸만 사무실 임대료가 밀리는 거야. 파일 잘못 보낸 시간에다가, 네가 여기까지 걸어오는 시간에다가, 다시 책상으로 걸어가는 시간에다가, 다시 파일을 보내는 시간에다, 내가 다시 파일을 열어보는 시간까지 합하면…….”
“사장님은 수학을 못하니까 그걸 합하는 시간이 제가 까먹은 시간보다 더 많을 걸요.”
“무슨 회사가 이래. 사장 면박이나 주고.”
“좋은 회사죠.”
직원 두 명이 창문 쪽으로 얼굴을 돌린 채 웃고 있었다. 나도 웃음이 났지만 간신히 참았다. 내가 예민해 있을 때면 박 팀장이 늘 나를 웃긴다. 박 팀장이 예민해 있을 때면 내가 박 팀장을 웃겨준다. 일종의 품앗이 같은 것이었다.
박 팀장이 파일을 다시 보냈지만 나는 새로운 파일을 열어보지 않았다. 박 팀장이 잘못 보낸 그림을 계속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 그림은 모니터 한 가운데서 조용히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모든 행성들이 사라지고 ‘골프공 별’이라 이름 붙여진 행성 하나만이 살아남은 우주를 바라보고 있는 느낌이었다. 쓸쓸해 보였다. 어디선가 골프채가 날아와서는 ‘골프공 별’을 우주 바깥으로 날려버릴 것 같은 긴장감이, 그림 속에서 감돌고 있었다. 마지막 남은 행성인 ‘골프공 별’이 사라진 우주는 허공으로 가득 찰 것이고, 어디선가 하나님의 거룩한 목소리가 들려올 것이다. 나이스, 샷.
“박 팀장, 이 제품 이름이 뭐라 그랬지?”
“지구촌 플레이어요.”
“거지같은 이름이네.”
“홍보실장이 오면 직접 얘기하시죠. 30분 후쯤엔 사무실에 와 있을 테니까요.”
“뭐? 누구 마음대로 약속을 잡은 거야?”
“걱정 마세요. 일러스트를 보러 오는 거니까. 매뉴얼 텍스트는 아직 시작도 못했다는 소식을 들으면 좀 슬퍼하겠지만, 그래도 사장님이 제품 이름이 거지같다는 얘길 해주면 시간을 좀 벌 수 있을지도 모르죠. 제품 이름 다시 짓는 데 한 달은 걸리지 않겠어요? 아니면 우리하고 일을 못하겠다고 다른 회사로 갈지도 모르고, 그러면 사장님이 거지같은 사무실 임대료만 어떻게 해결하시면 되니까, 모든 게 간단하네요.”
“지금부터 모두 조용히 해. 나 쓰기 시작했으니까.”
사무실은 이전부터 조용했다. 박 팀장과 나 빼고는 모두들 열심히 일을 하고 있었다. 나는 헤드폰을 쓰고 일을 시작했다. 마감 시간이 30분밖에 남지 않았다고 생각하자 뭐라도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왼쪽에 기술개발 자료를 쌓아놓았고, 모니터에는 박 팀장이 새로 보내준 일러스트 파일을 펼쳐놓았고, 오른쪽에는 ‘지구촌 플레이어’라는 거지같은 이름을 달고 태어날 제품을 놓아두었다. 모든 준비가 끝났다. 나는 첫 문장을 쓰기 시작했다.
지구촌 플레이어를 사용할 때의 주의사항은, 지구를 사용할 때의 주의사항과 똑같습니다. 이 제품을 지구라고 생각해 주십시오. 첫째, 분해하지 마십시오. 둘째, 고온의 장소에 보관하지 마십시오. 셋째, 높은 곳에서 떨어뜨리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지구를 만들어낸 하나님이라고 생각해 보십시오. 지구를 함부로 집어던지지는 못할 것입니다. 가장 주의해야 할 점은, 지구를 어린아이들 손닿는 곳에 놓아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분명 지구를 파멸시키고 말 것입니다.
나는 아프리카 어느 원주민이 사냥을 할 때 불렀을 것 같은 노래를 들으면서 한 문장 한 문장을 써내려갔다. 첫 문장을 써놓자 나머지 문장들이 조금씩 모습을 드러냈다. 매뉴얼을 쓸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내가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어딘가에 숨어 있던 문장들이 눈치를 보면서 슬그머니 나타나는 것 같다. 매뉴얼을 쓴다는 것은 창작하는 것이 아니라 발굴하는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나는 문장 위에 덮인 먼지를 조심스럽게 툭툭 털어내기만 하면 된다. 고고학자가 된 기분이다.
20분 만에 주의사항을 모두 끝냈다. 박 팀장에게 앞부분을 읽어주었더니 “나쁘지 않은데요”라고 했다. 박 팀장의 대화사전을 참고하자면, 나쁘지 않다는 것은 꽤 좋다는 뜻이다. 박 팀장의 칭찬에 힘을 얻은 나는 ‘구성품 안내’와 ‘기본적인 기능들’을 순식간에 끝냈다. ‘구성품 안내’와 ‘기본적인 기능들’은 기술개발 자료를 참고하면 금방 끝나는 일들이다. 표현을 쉽게 바꾸고 외래어를 우리말로 번역해 주면 그만이다.
‘고급기능’ 항목을 쓰기 시작했을 때 문이 열렸고, 검은색 투피스를 입은 여자가 사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그때 나는 그리스의 어떤 가수가 열창하는 슬픈 발라드를 듣고 있었는데, 검은 옷의 그녀를 보는 순간 음악이 장례식장 분위기로 바뀌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키가 컸고, 몸집도 두툼했기 때문에 더욱 비장한 느낌이 들었다. 나는 헤드폰을 벗었다. 헤드폰을 벗자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몸집과는 어울리지 않는 날카로운 목소리였다. 그녀는 나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박 팀장과 얘기를 하고 있었다. 모른 척하고 싶었지만 박 팀장이 나를 소개했다. 그녀는 내게 명함을 건넸다.
“말씀은 많이 들었습니다. 사장님이 직접 저희 매뉴얼을 써주신다면서요?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덕분에 음악 감상을 열심히 하게 돼서 좋습니다. 재미있는 제품이라서 저도 재미있게 매뉴얼을 쓰고 있습니다.”
“그럼 기대하고 있을게요.”
그녀는 고개를 까딱하더니 박 팀장의 자리로 갔다. 가까이서 보니 장례식에 어울릴 만한 외모는 아니었다. 예쁜 얼굴은 아니었지만 표정이 밝은 여자였다. 열쇠구멍도 잘 보이지 않는 컴컴한 곳에 있을 때에도 활짝 웃기만 하면 간단하게 문을 열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다시 헤드폰을 끼고 일을 시작했지만, 박 팀장과 그녀가 나누는 이야기가 궁금해서 볼륨을 줄여놓았다. 특별한 이야기는 없었다. 이것보다는 이게 더 마음에 드네요, 그렇죠, 제 생각엔 좀더 부드러운 느낌의 일러스트였으면 좋겠어요, 푸른색을 많이 쓰면 어떨까요, 아뇨, 전체적으론 마음에 들어요, 색감만 좀더 밝았으면 좋겠는데요……, 이런 이야기들을 주고받고 있었다. 일을 하면서 잠깐 그녀의 모습을 훔쳐보기도 했다. 그녀는 자주 웃었다. 그게 사무적인 웃음인지, 아니면 박 팀장에게 마음을 빼앗겨서인지는 알 수 없지만 30초에 한 번 정도는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그녀가 돌아갈 때까지 나는 새로운 문장을 단 한 줄도 발굴해내지 못했다.
꼬박 이틀을 매달린 끝에 매뉴얼을 모두 완성했다. 박 팀장과 나는 제품의 매뉴얼을 완성할 때마다 점수를 매기곤 하는데 ‘지구촌 플레이어’는 10점 만점에 8점이었다. 8점이면 훌륭한 점수다. 10점을 받은 매뉴얼이 딱 한 개 있었고, 대체로 7점이 많다. 우리가 매뉴얼에 점수를 매기는 걸 알면 화를 낼 의뢰사도 많을 것이다. “6점밖에 못 받았으면 매뉴얼 작업을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라고 우리를 들볶을 담당자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게 그렇지가 않다. 처음부터 작업을 다시 한다고 해서 좋아질 수 있다면 우리도 기꺼이 그럴 것이다. 하지만 모든 매뉴얼에는 운명 같은 게 있는 법이다. 독창적인 제품, 훌륭한 일러스트, 세련된 글이 완벽한 조화를 이뤘을 때 좋은 매뉴얼이 탄생한다. 제품이 별로라면 매뉴얼도 별로다. 쓰레기를 넣으면 쓰레기가 나올 수밖에 없다.
우리는 완성된 매뉴얼을 전송해주고 회사 근처에 있는 와인바로 갔다. 몇 가지 일이 겹치는 바람에 한 달 전에 입사한 수습사원의 환영식을 아직도 해주지 못했다.
“수습아, 뭐 마실래?”
나는 와인리스트를 건넸다. 수습은 와인리스트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한 장 한 장 넘겨보더니 결국엔 다시 내게 건넸다.
“아무 거나 마시겠습니다. 사장님이 주문하시죠.”
“너 때문에 회식하는 건데 네가 골라야지.”
“와인을 잘 몰라서요…….”
“모를 게 뭐 있어. 잘 들어봐. 매뉴얼을 잘 쓰려면 제일 먼저 분류를 잘해야 돼. 어떤 기능과 어떤 기능을 함께 보여줄 것인가, 어떤 주의사항들을 함께 묶을 것인가, 이런 게 기본이야. 그리고 한눈에 좋은 매뉴얼과 나쁜 매뉴얼을 구분할 수 있어야지. 이 와인리스트가 어떤 기준으로 분류된 거 같아?”
“나라별로 되어 있던데요?”
“두 가지지. 첫째 나라별로 분류돼 있지. 프랑스, 이탈리아, 호주 등등. 둘째 품종으로 분류돼 있지. 레드 와인, 화이트 와인, 스파클링 와인 등등. 하지만 이런 분류에 집착할 필요는 없어. 새로운 분류도 가능하거든.”
“예를 들면 어떤…….”
수습은 두 손을 무릎 위에 가지런히 모은 채 열심히 내 얘기를 들었다. 박 팀장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사장님의 분류는 간단해. 와인은 세 종류야. 10만원이 넘는 와인, 5만원에서 10만원 사이의 와인, 5만원 미만의 와인. 어떤 걸 고를래? 수습. 참고로 말하면, 사장님은 5만원 미만의 와인을 특별히 좋아하시지. 와인 값 아껴서 밀린 사무실 임대료 내셔야 되거든.”
“박 팀장 자꾸 그럴래? 오늘은 아니라니까. 지구촌 플레이언지 뭔지 끝냈잖아. 그 돈만 받으면 임대료는 바로 해결돼. 좋아, 오늘은 특별히 10만원 근처 와인 마셔보자.”
그날 저녁 회식비로만 60만원을 지출했지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남자 네 명이 와인바에 앉아서 수다를 떠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었다. 디자인팀의 ‘퀵마우스’ ― 마우스를 움직이는 속도만큼은 자신이 세계 최고라고 믿고 있는 우리 회사의 유일한 평사원이다 ― 는 술에 취해서 연신 수습을 껴안았고, 박 팀장은 내 험담을 하면서 30분 동안 혼자 떠들었고, 나는 조용히 졸았다. 와인의 뭉근한 취기가 얼굴로 올라오자 참을 수 없이 졸렸다. 하지만 졸면서도 기분이 좋았다. 수습이 들어오면서부터 제대로 된 팀이 완성된 것 같았다. 세 명보다는 네 명이 좀더 팀다운 느낌이다. 박 팀장과 퀵마우스와 수습은 술을 더 마시기 위해 어디론가 갔고, 나는 집으로 돌아와 다음날 오후 늦게까지 잠을 잤다. 10점 만점에 가까운, 달콤한 잠이었다.
다음날 박 팀장에게 전화가 걸려왔을 때 나는 잠과 현실 사이에 걸쳐진 줄을 탄 채 비틀거리고 있었다.
“일어났어요?”
“아니, 지금 자면서 전화 받는 거야. 잠에서 깨면 전혀 기억 못할 테니까 나쁜 소식이면 지금 얘기하고, 좋은 얘기면 이따가 다시 전화해.”
“고신희 씨한테서 전화 왔어요. 사장님을 찾던데요.”
“고신희? 내가 아는 사람이던가?”
“거지같은 지구촌 플레이어 담당자요. 전화 좀 해 달래요.”
“나쁜 일인가 보군.”
나는 노트북을 켜서 지구촌 플레이어의 매뉴얼 파일을 열었다. 중요한 기능을 빼먹었거나 구성품 안내가 잘못됐다고 해서 담당자가 사장을 찾는 일은 없다. 어디에선가 결정적인 실수를 했거나 중요한 부분이 누락된 것인지도 모른다. 매뉴얼을 훑어보았지만 결정적인 실수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고신희 씨에게 전화를 걸었을 때 나는 뜻밖의 이야기를 들었다.
“오늘 아침에 매뉴얼을 다 읽었어요.”
“네, 그러시군요. 아침에 읽기 좋은 글은 아니죠.”
“감동적이었어요.”
“네? 제가 제대로 들은 건지 모르겠네요.”
“한 시간 만에 다 읽었는데, 너무 감동적이었어요.”
“파일을 잘못 받으신 건 아니죠? 제가 보낸 글은 주의사항과 구성품 안내가 포함된 매뉴얼인데요. 시나 소설 같은 게 아니고…….”
“제가 꿈꾸던, 그런 매뉴얼이었어요. 오후에 잠깐 시간을 내주실 수 있을까요? 만나 뵙고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전화를 끊고 나서 나는 다시 매뉴얼을 살펴보았다. 도대체 어느 부분에 감동적인 부분이 있는지는 발견할 수 없었다. 매뉴얼을 읽고 감동을 받았다는 사람은, 나를 제외하면 처음이었다. 내 얼굴에 침을 뱉는 꼴이 되고 말겠지만 매뉴얼을 읽고 감동을 받는 종류의 사람을 정상적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다. 감동이라는 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차원의 감정이지만 세상에는 상식적인 감동이라는 게 있는 법이니까 말이다.
그녀는 나보다 먼저 커피숍에 도착해 있었다. 오렌지색 재킷과 속에 받쳐 입은 하얀색 블라우스가 날씨와 잘 어울렸다. 화끈한 공연을 준비하고 있는 여름에 앞서 분위기를 돋우기 위해 등장한 오프닝밴드 같은 봄 날씨였다. 그녀는 소파에 기대앉아서 인쇄한 지구촌 플레이어 매뉴얼을 읽고 있었다.
“모두들 지구촌 플레이어 매뉴얼에 만족하고 있어요. 이 정도로 멋진 게 나올 줄 예상 못했거든요.”
“제품이 멋져서 그런 거예요. 저야 번역자일 뿐이니까요.”
“지나친 겸손은 자만의 친구랍니다.”
“지나친 자만이 겸손의 친구는 아니라서 반대쪽을 선택한 겁니다.”
“자만하셔도 될 만큼 좋은 매뉴얼이었어요.”
“도대체 어떤 부분이 감동적이었습니까?”
“우선 지구촌 플레이어의 모든 기능을 지구의 사용법처럼 만든 게 재미있었어요.”
“그거야 그 제품을 만든 사람이 생각해낸 거죠. MP3플레이어를 지구 모양으로 만들면 어떨까, 라는 생각을 했기 때문에 그런 디자인이 나온 것일 테고 전 그 디자인을 기능적으로 해석했을 뿐입니다.”
“저 같으면 지구와 연결시켜서 매뉴얼을 만들 생각은 못했을 거예요. 매뉴얼의 세계에는 오랫동안 지켜져 온 형식 같은 게 있잖아요. 그걸 깨버린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에요.”
“사람들이 그 형식을 왜 깨지 않는다고 생각하세요? 매뉴얼의 존재 이유는 기능을 전달하기 위한 겁니다. 제가 만든 매뉴얼이 재미있긴 하지만 기능 전달의 측면에서는 절반밖에 성공하지 못한 것 같아요.”
“지금 자신이 만든 매뉴얼의 점수를 깎아내리시는 거예요?”
“말하자면 그렇다는 얘기죠. 다양한 직업이 필요하듯 세상에는 다양한 매뉴얼이 필요하니까요. 모든 매뉴얼에는 저마다의 운명 같은 게 있다고 생각합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제품을 설명해주는 용도로는 조금 부족할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저흰 독창적인 매뉴얼을 원한 거였기 때문에 사장님 회사에다 일을 맡긴 거예요.”
대화를 나눌수록 상황이 이상하게 변하고 있었다. 그녀는 칭찬하고 나는 칭찬을 거절하는, 기이한 대화였다. 의뢰사 측에서 제작물을 이렇게 칭찬하는 건 흔한 일이 아니다. 뭔가 목적이 있기 때문에 이렇게 칭찬을 하는 것은 아닐까, 싶은 의심이 들었다. 그녀는 손가락으로 커피잔을 문지르면서 계속 말했다.
“매뉴얼을 읽고 나서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어요. 그래서 뵙자고 한 거고요.”
“궁금하네요.”
“매뉴얼을 다루는 잡지를 만들어볼 생각이에요. 매달 출시되는 다양한 제품들의 매뉴얼을 선별해서 보여주는 거죠. 매뉴얼이 넘쳐나는 세상이니까 누군가 그걸 정리해주면 좋지 않을까요? 물론 저희 회사 제품의 간접적인 홍보도 가능할 것 같구요. 어때요? 재미있을 것 같지 않아요?”
“저 같은 사람이야 재미있어 하겠지만 대중적인 성공을 기대하긴 힘들 거 같은데요.”
“잡지 발간에 대해서 저희 사장님과 잠깐 얘기를 하고 왔는데 흔쾌히 승낙을 해주셨어요. 사장님은 이 잡지로 돈을 벌 생각은 없으세요. 회사의 이미지를 위한 거죠.”
“저한테 이 얘길 하시는 이유가 뭡니까?”
“편집장을 맡아주셨으면 해요.”
그녀는 내 쪽으로 몸을 살짝 굽히면서 속삭이듯 말했다. 그녀에게서 어떤 향기가 나는 것 같았다. 그게 샴푸의 향인지, 아니면 화장품의 향인지, 혹은 몸에서 나는 향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떤 향이 내게 전달됐다. 순간적으로 사람의 판단을 흐리게 하는 성분이 포함된 것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아찔한 향기였다. 몸을 소파에 기댔다. 하지만 향기는 내 코를 쫓아왔다.
나는 영업과 판매를 제외한, 잡지의 제작 전반을 우리 회사에서 맡는다는 조건으로 편집장 자리를 승낙했다. 사원이 네 명뿐인 회사에서 감당하기엔 규모가 너무 큰 일이었지만 회사의 사정을 생각했을 때 거부할 수 없는 일이었다. 1년 치 잡지 제작비를 지원받기로 했는데, 그 금액이라면 밀린 사무실 임대료를 모두 내 버리고 더 큰 사무실로 옮겨갈 수도 있었다. 우리는 잡지 창간을 위해 강행군을 했다. 직원을 더 뽑으면 일이 수월하겠지만 최대한의 수익을 내기 위해서는 직원들을 혹사시킬 수밖에 없었다.
창간호 특집은 '지구의 삶을 바꿔준 세기의 매뉴얼들'이었는데, 우리는 특집에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역사상 가장 중요한 전자제품들의 매뉴얼을 모으기 위해 전국의 헌책방과 도서관을 뒤졌으며 '창고에서 썩고 있는 당신의 매뉴얼을 저희에게 파세요'라는 신문광고를 내기도 했다. 쉽지 않은 작업이었지만 매뉴얼들을 모으다 보니 뭔가 역사적인 일을 하고 있다는 사명감이 들기도 했다. 우리는 한 달 만에 5천 종 정도의 매뉴얼을 모을 수 있었다. 그 중에는 듣도 보도 못한 희귀한 제품의 매뉴얼도 많았다. 쓰레기나 다름없는 매뉴얼도 물론 많았다.
내 평생 잡지를 준비하던 그때만큼 행복한 시간은 없었다. 사무실은 고물상보다 더 지저분해졌고 책 먼지 때문에 끊임없이 재채기를 해댔지만 매뉴얼을 하나씩 읽어나갈 때마다 내 머리가 확장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매뉴얼을 분류하는 일은 나와 수습이 도맡았다. 좋은 매뉴얼은 왼쪽 책꽂이에 꽂고 나쁜 매뉴얼은 오른쪽 휴지통으로 보냈다. 좋은 매뉴얼과 나쁜 매뉴얼을 구분할 수 없다며 10분에 한 번씩 자문을 구하던 수습도 5일 정도가 지나자 스스로 판단을 내렸다.
두 달이 지났을 때 「MAN-U」― 매뉴얼이라는 말을 재미있게 풀어 쓴 잡지의 제호는 퀵마우스와 수습의 아이디어였다 ― 를 창간할 수 있었다. 당연한 일이지만 잡지에 대한 반응은 미미했다. 전자제품을 전문으로 다루는 신문에서 나를 인터뷰한 것과 잡지 몇 군데에서 기사를 실어준 것 말고는 반응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었다. 고신희 씨는 조금 실망하는 듯한 눈치를 보이기도 했지만 여섯 달 정도는 지나야 잡지의 성패를 알 수 있다는 내 말에 수긍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지구촌 플레이어가 MP3플레이어 시장에서 성공을 거둔 것이다. 매뉴얼 때문에 많이 팔린 것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지구촌 플레이어의 성공이 「MAN-U」에는 좋은 일임이 분명했다.
잡지는 조금씩 독자층을 늘려갔다. 다섯 달이 지났을 때는 판매량도 많이 늘었고 자신이 소장하고 있던 매뉴얼을 스캔해서 보내주는 독자도 많아졌다. 업계에서도 인정을 받아서 새로운 제품을 출시하기 전에 매뉴얼을 보내주는 회사도 많아졌다. 일이 너무 많은 탓에 더 이상 새로운 매뉴얼 작업을 할 수 없게 된 것이 아쉽긴 했지만 잡지를 만드는 일은 재미있었다. 매달 새로운 특집을 선정하고, 특집에 맞는 매뉴얼을 수집하는 일은 직접 매뉴얼을 만드는 일 이상으로 흥미로운 작업이었다.
일곱 번째 잡지의 마감을 겨우 끝내고 사무실 소파에 혼자 누워 책이 나오길 기다리고 있을 때 고신희 씨에게서 전화가 왔다. 책이 잘 나왔는지 확인하는 전화일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다른 용건이었다.
“오늘 저녁 어때요? 사장님이 저녁식사에 초대하고 싶어하세요.”
고신희 씨의 목소리가 밝은 걸로 봐서 기분 좋은 초대일 것이 분명했지만 내 몸이 너무 피곤했다. 심장이 불규칙적으로 뛰고 있었고 왼쪽 팔이 저렸고 발뒤꿈치도 아팠다. 책이 제대로 나왔는지만 확인하고 집으로 달려갈 작정이었다.
“저녁식사 중에 제 몸이 부서지는 걸 보셔도 괜찮다면요.”
“열심히 일했다는 티내긴 좋겠네요. 일곱 시 어떠세요?”
“그러죠. 고신희 씨도 같이 계시나요?”
“그럴 것 같은데요. 싫으세요? 빠질까요?”
“아뇨. 사장님이 빠졌으면 좋겠는데…….”
“농담 마시고 여섯시 삼십분까지 회사로 오세요.”
나는 전화를 끊고 혼자 웃었다. 창간호를 준비하면서부터 고신희 씨는 매일같이 사무실을 들락거렸다. 인원이 부족했기 때문에 고신희 씨에게 도움을 요청했었다. 그녀는 모든 대화를 곧이곧대로 듣는 스타일이어서 나와 박 팀장의 대화에 한동안 적응을 하지 못했다. 사장과 팀장이 서로 으르렁거리는 모습이 낯설었던 것이다. 창간호를 준비하면서 박 팀장과 나는 피곤할 때마다 고신희 씨를 놀리는 재미로 힘을 얻곤 했다. "내일부터 회사에 출근하지 마!"라고 내가 소리를 지르고 "재택근무를 지시하는 거라면 거절할게요. 집에 컴퓨터가 없거든요."라고 박 팀장이 대꾸를 했을 때 고신희 씨는 정말로 내가 팀장을 해고하는 거라고 생각하고 가슴이 철렁했다고 했다. 몇 달을 함께 일하면서 고신희 씨는 우리 회사의 다섯 번째 팀원이라고 해도 될 만큼 모두와 친한 사이가 됐다. 우리와 함께 일하면서 유머감각도 많이 늘었다. 홍보실 일이 바빠서 마감에 참여하지 못할 때는 사무실 분위기가 가라앉을 정도였다.
나는 잡지가 제대로 나온 걸 확인하고 근처 목욕탕에서 간단히 샤워를 한 다음 고신희 씨의 회사로 향했다. 버스를 타고 가면서 다음달 특집을 생각해 보았지만 별다른 게 떠오르지 않았다.
예약된 식당은 단 5초만 보아도 기가 죽을 정도로 화려한 프렌치 레스토랑이었다. 식당으로 들어가는 정원에는 수십 종의 꽃들이 보기 좋게 정돈돼 있었고, 한쪽 구석에는 작은 연못도 있었다. 두 명의 종업원이 문 앞에 서서 우리를 향해 90도로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했다.
“너무 기죽이는 거 아니에요?”
나는 고신희 씨 귀에다 속삭였다. 그녀는 소리 없이 웃기만 했다. 식당에 들어서자 커다란 복도가 나타났다. 마치 거대한 성에 들어온 듯한 느낌이었다. 나무로 된 복도를 디딜 때마다 발자국소리가 참새처럼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매니저가 우리를 안내한 곳은 복도 끝방이었다.
“어서 오세요.”
나는 방에서 기다리고 있던 사장을 보면서 잠깐 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왜 그러세요?”
사장이 물었다.
“제가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사장님이 남자라고 생각했거든요. 너무 놀라서 죄송합니다.”
“하하. 그럴 수 있죠. 전자제품 회사의 사장이라서 남자라고 생각했나 보죠?”
“그것도 그렇고, 이름도 남자 이름 같고…….”
“제 이름을 아세요?”
“그럼요. 잡지의 발행인이신데요.”
“아, 참, 그렇군요. 기대에 부응하지 못해서 죄송하네요.”
“제가 죄송하죠. 이렇게 아리따운 사장님을 남자로 생각하고 있었으니…….”
사장은 키가 작았고 목과 팔과 다리, 모든 게 가늘었다. 고신희 씨가 옆에 서 있으니 모든 게 너무 대조적이었다. 고신희 씨보다는 나이가 더 많아 보였지만 눈은 더 어려 보였고 이목구비도 또렷했다.
“피곤하실 텐데 와주셔서 고마워요.”
사장은 내게 손짓으로 자리를 안내하고 앉았다. 그녀의 동작에는 어딘지 모르게 딱딱한 데가 있었지만 나는 그게 한 회사를 책임져야 한다는 책임감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했다. 사원들을 친구처럼 대하며 책임도 나눠지는 나 같은 사장으로서는 절대 이해할 수 없는 어떤 책임감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잡지는 저도 재미있게 보고 있어요. 판매량이 많이 늘었다면서요?”
“그래도 아직까지는 적자입니다. 일 년쯤 되면 손익분기점을 넘어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너무 그렇게 딱딱하게 얘기하지 마세요. 판매량 따지려고 초대한 건 아니니까요. 배고프실 테니 우선 식사부터 하시죠.”
한 시간 동안 식사를 하면서 탁구공 무게 정도의 가벼운 잡담만이 테이블 위를 오고 갔다. 사장과 고신희 씨는 사이좋은 자매처럼 조용조용 이야기를 나누었다.
샐러드와 전채와 수프와 고기가 차례대로 나왔지만 정확한 이름을 알 만한 요리는 전혀 없었다. 물어보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가벼운 화제의 이야기가 끊임없이 오갔기 때문에 그 비좁은 틈 사이로 끼어들기가 쉽지 않았다. 어떤 요리인지를 적어놓은 매뉴얼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나는 모든 그릇을 깨끗하게 비웠다. 맛이 좋았다. 비싼 가격일 게 분명한 맛이었다. 와인과 고기의 조화도 훌륭했다. 후식과 함께 커피가 나왔을 때는 머리끝까지 음식이 차 있는 게 아닌가 싶을 만큼 배가 불렀다.
“사실은 고맙다는 말을 전하려고 식사에 초대한 거예요.”
자신의 몸과 너무 잘 어울리는 앙증맞은 에스프레소 잔에다 가루 설탕을 넣으면서 사장이 말했다. 에스프레소 맛 역시 흠잡을 데가 없었다.
“사장님께 인사 받을 만한 일은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요.”
내가 대답했다.
“시작하시면 알려주세요. 그때 다시 고마워할게요.”
“그러죠. 이 멋진 음식들을 한 번 더 먹을 수 있겠네요.”
“물론이죠. 그런데, 저,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잡지에 실린 모든 매뉴얼을 직접 분류하시는 편이세요?”
“저와 직원 한 명이 같이 합니다만 잡지에 실린 매뉴얼은 모두 제 머리 속에 입력돼 있죠.”
“지난 호에 나왔던 오르골 기억나세요?”
나는 머리 속의 목록을 뒤졌다. 곧 제품 하나가 머리 속 결과창에 나타났다. 흑백 매뉴얼 속의 제품 사진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어떤 독자가 스캔을 해서 보내준 매뉴얼이었다.
“네, 기억납니다. 공 모양의 오르골이었죠. 공을 좌우로 비틀 때마다 다른 음악이 흘러나온다는 물건……. 정교하게 만들어진 제품 같던데요.”
“기억하시네요. 제가 그 오르골을 가지고 있거든요.”
“그러세요? 한번 보고 싶네요. 매뉴얼이 너무 낡아서 사진이 제대로 보이질 않더라구요.”
사장은 빈 의자에 놓아두었던 핸드백에서 오르골을 꺼내 내게 건넸다. 겉모습과는 달리 무거웠다. 야구공보다 조금 컸지만 생긴 건 농구공과 비슷했고 무게는 투포환 공과 비슷할 것 같았다. 외피를 둘러싼 게 어떤 재질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꽤 단단해 보였다. 나는 매뉴얼을 떠올리면서 공을 비틀어보았다. 하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어떤 음악도 들리지 않았다.
“잘 안 되죠? 줘 보세요.”
사장은 두 손으로 공을 감싸 쥐더니 내가 알 수 없는 어떤 방식으로 공을 비틀었다. 별로 힘을 들이지도 않았다. 사장은 비튼 공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그 속에서 음악이 흘러나왔다. 단순한 멜로디였지만 울림이 길어서 여러 가지 음이 한꺼번에 들리는 것 같았다. 공속에서 빠져나온 소리는 위로 뻗어 올라가다가 나뭇가지처럼 여러 갈래로 나뉘어서 소리의 열매를 빚어내고 있었다. 공위로 한 그루의 나무가 자라난 것 같았다. 사장과 나와 고신희 씨는 둥근 테이블 한가운데 서 있는 눈에 보이지 않는 나무와 나무에서 자라나 아래로 떨어지고 있는 소리를 조용히 지켜보았다. 오르골 연주가 모두 끝나자 침묵이 생겼다. 오르골 연주가 울렸던 것 말고는 아무런 차이가 없는데 공간의 밀도가 달라졌다. 공간에는 아직까지 뭔가 살아 있었다.
“아름다운 음악이네요.”
고신희 씨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침묵을 깼다. 좀더 침묵을 즐겼더라도 좋았을 텐데, 아쉬웠다.
“잡지에 실린 매뉴얼을 보고 난 후에야 오르골의 음악을 들을 수 있게 됐어요. 오르골이라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잘못 만져서 고장이라도 낼까봐 작동시켜 볼 엄두를 못 냈거든요. 그래서 고맙다는 거예요.”
“전 왜 비틀질 못했던 거죠?”
“그걸 설명하기가 힘들어요. 두 손으로 공을 감싼 다음에 손 전체에 똑같은 압력을 가하고 쓰다듬듯 하면 쉽게 열리는데 그 감각을 전달하기가 힘드네요. 아무튼 힘을 줄수록 더 힘들어지죠. 다시 해보시겠어요?”
나는 공을 다시 비틀어보았지만 움직이지 않았다. 고장이라도 낼까봐 더 이상 시도하지 않았다. 고신희 씨는 아예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사장이 아끼는 물건을 망가뜨리면 곤란할 것이라는 생각에서 그런 것 같았다. 사장은 다시 공을 비틀어 음악을 들려주었다. 이번엔 다른 음악이었다. 음악이 끝나자 공기의 밀도가 더욱 높아졌다.
“어떤 각도로 비트냐에 따라 음악이 달라져요. 그것도 매뉴얼을 보고 알아낸 거죠.”
“저도 매뉴얼에서 읽은 기억이 나네요. 어디서 그렇게 멋진 물건을 구하셨어요? 탐나는데요.”
사장은 차 숟가락으로 티라미수 케이크를 한 조각 떼어 입안에 넣었다. 나도 티라미수 케이크를 먹었다. 부드럽고 진한 맛이었다.
“저도 언니가 쓰던 걸 물려받은 거예요. 바보같이 사용방법도 가르쳐주지 않더라구요. 한정 판매된 것이기 때문에 매뉴얼을 쉽게 구할 수 있는 물건도 아니에요. 덕분에 저는 10년 동안 음악도 들어보지 못했구요.”
“매뉴얼을 빠뜨리고 선물했나 보군요.”
“네. 매뉴얼은 예전에 버렸겠죠. 자긴 사용방법을 알았을 테니까요.”
“물어보지 그러셨어요.”
“물어보고 싶었죠. 누워 있는 언니를 깨워서 물어보고 싶었는데 도무지 일어나질 않더라구요. 일어나서 음악을 좀 들려 달란 말이야, 어떻게 해야 소리가 나는 거야, 그러고 싶은데 말이죠. 언니는 자기 방에 있을 때면 오르골 음악을 자주 들었어요. 제 방에서도 가끔 소리가 들렸는데 그 소리만 들리면 이상하게 졸렸어요.”
“언니의 유물이군요?”
사장은 에스프레소 잔을 들면서 에스프레소만큼이나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에스프레소는 오래 전에 식어버렸을 테니 더 쓰게 느껴질 것이다.
“이게 뭐처럼 보이세요?”
사장은 오르골을 손에 들더니 활짝 웃으면서 말했다.
“농구공 같은데요?”
“정말요? 전 한번도 농구공 같다는 생각은 못해봤네요.”
“아니면 투포환공?”
“운동을 좋아하시나 봐요. 전 이걸 볼 때마다 지구 같다는 생각을 하는데……. 세로로 나 있는 이 선들이 경도를 표시한 것 같지 않아요?”
지구라는 얘기를 듣고 보니 그럴 듯했다. 오르골을 만든 사람이 지구의 모양을 본뜬 것은 아니었겠지만 확실히 그건 지구의 모습과 닮아 있었다.
“지금 사장님께서 지구촌 플레이어의 탄생 과정을 설명드리는 중이라는 거 아시죠?”
고신희 씨가 나를 향해 말했다. "그 정도는 나도 눈치채고 있다고요, 고신희 씨!"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나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이야기였다. 잠이 부족해서 감각이 둔화된 것인지도 모른다. 사장은 테이블 위에다 오르골을 올려놓았다.
“제가 지구촌 플레이어의 매뉴얼에서 어떤 부분을 제일 좋아하는지 아세요? 외우고 있어요. 여러분이 만약 지구 반대편에 살고 있는 누군가의 음악을 듣고 싶다면 원하는 곳에 이어폰을 꽂으세요. 마치 구식교환기 같지 않나요? 여러분이 연결하고 싶은 나라에 잭을 꽂는다면 거기에서 누군가 노래를 불러드릴 것입니다. 전화기 건너편에서 들리는 지글지글한 소음처럼 아련한 음악들이 여러분의 외로움을 어루만져 드릴 것입니다. 조금 감상적이긴 하지만 저는 그 부분이 좋았어요.”
나는 뜻하지 않게 시낭송회에 불려간 초보시인이 되었다. 누군가 내 앞에서 내 글을 소리 내어 읽는 게 그렇게 소름끼칠 정도로 낯 뜨거운 일인 줄 몰랐다. 사장이 읽은 구절은 지구촌 플레이어의 매뉴얼 중에서 가장 공을 들인 부분이었다. 지구촌 플레이어에서 가장 독특한 기능은 표면에 그려진 지구의 어느 지점에다 이어폰을 꽂으면 그 나라 음악이 흘러나온다는 것이다. 가장 공을 들인 구절이니 누군가 좋아해준다는 사실만으로도 기쁜 일일 수 있을 텐데 민망하다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았다.
“오르골의 음악을 들을 수 없었기 때문에 지구촌 플레이어를 만들 수 있었어요. 매뉴얼이 없다는 게 가끔 도움이 될 때도 있네요.”
사장과의 저녁식사가 끝나자 피곤이 밀려왔다. 나는 사장이 타고 가는 차에 인사를 하고 곧바로 택시를 잡았다. 택시를 탄 지 10분도 지나지 않아 휴대전화 벨이 울렸다. 고신희 씨였다.
“그냥 집에 가실 거예요?”
“돈만 많았다면 열 시간 동안 택시 전세 냈을 거예요. 쓰러지기 일보 직전이니까……. 사장님은 어쩌고 전화했어요?”
“볼일 있다고 먼저 내렸어요. 마감도 끝났는데 술 한잔 안 할래요?”
“택시로 와요. 여기서 마십시다. 택시 전세낼 돈은 있어요?”
택시 운전수가 백미러로 나를 봤다. 설마 진담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예스예요, 노예요? 숙녀가 술 마시자고 제안하는데 너무 퉁기시네요.”
나는 그녀가 정한 장소로 방향을 바꾸었다. 집에 가보았자 쉽게 잠이 오지 않을 것 같았다. 원래 너무 피곤하면 잠이 오지 않는 법이다. 약속 장소에 도착해 보니 박 팀장이 고신희 씨와 함께 있었다.
“뭐야, 나한테 데이트 신청한 거 아니었어? 혹시 더블데이트?”
“얼른 앉기나 하세요. 마감 기념으로 팀원들끼리 한잔 하자고 한 거예요. 데이트는 무슨……”
우리는 새벽 3시까지 술을 마셨다. 그렇게 오래 마실 생각은 아니었는데 고신희 씨의 말 한마디가 우리를 흥분시켰다. "사장님이 잡지에 좀더 투자를 하시겠대요. 구체적인 건 내일 다시 상의해 보자고 하셨어요"라는 고신희 씨의 말에 박 팀장은 환호성을 질렀다. 투자금액이 많아진다는 것은 자신의 월급이 오른다는 얘기니까 좋아할 만한 일이긴 했다. 나 역시 기분이 좋았다. 어쩌면 직원을 더 뽑을 수도 있고 좀더 좋은 사무실로 옮겨 갈 수도 있을 것이다.
새벽 3시에 나는 먼저 집으로 왔다. 두 사람은 어떻게 됐는지, 술을 더 마시러 갔는지, 집으로 돌아갔는지, 둘이서 눈이라도 맞아 다른 곳으로 갔는지는 모르겠다. 새벽 1시 이후의 일들은 거의 기억이 나질 않았다.
눈을 떴을 때는 이미 해가 뉘엿거리고 있었다. 눈을 뜬 다음 가장 먼저 떠오른 얼굴은 어제 보았던 사장의 얼굴이었다. 내 눈앞의 그녀는 오르골을 손에 들고 쓴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녀의 표정이 쉽게 지워지질 않았다. 나는 오르골의 매뉴얼이 실린 잡지를 펼쳤다. 직접 오르골을 보고 난 뒤여서인지 매뉴얼은 허점투성이였다. 글은 거의 없고 그림으로만 모든 기능을 설명하고 있었다. 매뉴얼을 만드는 사람들 사이에선 '그림 한 장이 백 마디 말보다 낫다'는 게 정론이긴 하지만 문제는 잘 그린 그림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매뉴얼은 모두 10장 정도였는데 그나마 뒤쪽의 4장에는 회사의 연혁과 오르골을 한정 판매하는 가게의 연락처가 적혀 있었다. '오르골을 살며시 누르면서 비틀면 음악이 흘러나옵니다'라는 문구가 그나마 가장 정확하게 작성된 부분이었다. 그 매뉴얼을 잡지에 실었던 것은 훌륭한 매뉴얼이라서가 아니라 희귀한 제품의 매뉴얼이었기 때문이다.
오르골의 매뉴얼을 보고 있자니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 수많은 매뉴얼 중에서 정확한 매뉴얼은 몇 개나 될까. 제대로 된 잡지를 만들려면 모든 제품과 매뉴얼을 비교해봐야 하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그걸 확인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걸 확인하려고 들면 잡지를 그만두어야 할 것이다. 암호 같고, 기도문 같고, 방언 같은 매뉴얼 잡지가 아직까지는 마음에 든다. 매뉴얼뿐인 잡지이지만 그녀에게처럼 또 다른 누군가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나는 오르골의 매뉴얼을 다시 만들어보기로 했다. 매뉴얼을 다시 만들어 그녀에게 선물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박 팀장에게 그림을 그려 달라고 부탁할까 싶기도 했지만 꼭 그림이 필요할 것 같지는 않았다. 내 글로도 충분할 것 같았다. 오르골을 생각하자 첫번째 문장이 곧바로 떠올랐다. '이 오르골은 하나의 씨앗입니다. 씨앗에서 음악의 나무가 자라납니다.' 박 팀장, 첫문장 어때?라고 속으로 물었더니 나쁘지 않은데요, 라는 소리가 들렸다. 조금 감상적인가요? 라고 그녀에게 물었더니 감상적이라도 괜찮아요, 라는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매뉴얼을 쓴다기보다 연애편지를 쓰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나는 그녀의 얼굴을 떠올리면서 매뉴얼을 써 나갔다. 아니, 써 나갔다기보다 발굴해 나갔다. 오르골에 쌓여 있던 시간의 먼지를 툭툭 털어내고, 그녀 얼굴에 가득하던 쓴웃음을 툭툭 털어내고, 오래된 오르골 매뉴얼의 그림을 툭툭 털어내자, 어디에선가 문장들이 하나 둘 나타나기 시작했다.《문장 웹진/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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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리자
- 2025-06-01
그리고 밤과 가을이 김연수 1 지난여름, 정기에게는 세 가지 고민이 있었다. 하나는 눈에 문제가 생겼다는 것. 길을 걸어갈 때면 날벌레들이 달려드는 것 같아 혼자 손사래를 친 적이 여러 번이었다. 기사를 쓰려고 책상 앞에 앉으면 머리 뒤쪽에서 번개 같은 게 번쩍이기도 했다. 노안이 찾아온 건 벌써 몇 년 전의 일이었다. 그때 안과에 가서 진료를 받고 안경도 새로 맞췄다. 나이가 들면 서서히 시력이 나빠지리라고만 생각했지, 거기에 더해 전에 없던 것들이 보이는 증상까지 생길 줄은 미처 몰랐다. 그런 처지가 되고 보니 책 읽는 일이 힘들어졌다. 평생의 즐거움이었던 독서가 성가신 일이 되면서 생활은 성기어지고 마음은 허술해졌다. 더 오래전, 나이가 들면 활자 같은 건 멀리하고 자연을 벗 삼아 소일하며 세속적 가치관에 물든 마음을 고치리라 생각하던 때가 있었다. 그때는 은근히 노년을 기대하기도 했지만, 그런 시절은 너무나 빨리 지나갔다. 두 번째는 포항에서 에너지공학과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딸 민지와의 관계가 점점 멀어진다는 점이었다. 그건 서울과 포항이라는 지리적 거리감 때문만은 아니었다. 작년에 집을 새로 구하면서 민지는 아빠인 정기에게 도와달라고 부탁을 해 왔다. 그 과정에서 이사의 이유가 언제부터인가 짝꿍처럼 붙어 다니던 여자 선배 희선과 같이 살기 위해서라는 사실을 그는 알게 됐다. 그는 민지와 희선이 단순한 선후배 사이가 아닐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몇 번 딸에게 희선에 대해 물었지만, 민지의 반응은 모호했다. 그러다가 정기는 그 일에 대해 더 묻지 않게 됐다. 한 번은 민지가 “나는 아빠가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 아닐 수도 있어요”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앞뒤 대화의 맥락으로는 그 일에 대한 답변이 아니었음에도 정기는 둘 사이의 관계에 대한 질문의 대답으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마지막 고민은, 자신이 담당한 부고란에 누구의 죽음을 다룰 것이냐는 점이었다. 최종 후보는 미국의 SF 소설가와 전 여당 대표, 둘 중 하나였다. 아무도 읽지 않는 신문 부고란에 누구를 쓰든 무슨 상관이겠느냐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정기에게는 앞의 두 고민만큼이나 심각한 고민이었다. 앞의 두 고민은 과거의 일에서 비롯된 결과를 수습하는 것이었지만, 세 번째 고민은 미래를 결정하는 것이라고 정기는 생각했다. 과연 소설가냐, 정치인이냐. 정기의 고민은 여름만큼이나 깊어졌다. 2 노트북 화면 너머로 신문사 후배인 은영이 지나가고 있었다. “휴가는 즐거웠어?” 정기가 알은체를 했다. “줄곧 비만 내렸잖아요. 태풍이 온다는데 어떻게 해요?” 잔뜩 낯을 찌푸리며 은영이 말했다. “태풍이 온다는 예보가 있었으면 가지 말았어야지.” “그런 거 따지고 들면 아무 데도 못 가죠. 태풍 지나갈 때 제주 안 있어 봤죠? 그게 진짜 여름이더라구요. 바람이 몰아치는데, 어휴, 엄청났어요. 그러더니만 휴가 마지막 날이 되
- 관리자
- 2025-06-01
바람 부는 날 정기현 단지는 어둠에 잠겨 있었다. 펜스와 인접한 아파트 건물들은 가로등 불빛을 받아 그 형태를 짐작할 수 있었으나, 단지 안쪽으로 시선을 옮기면 어둠의 수심이 깊어져 모든 것이 감추어졌다. 아침이고 저녁이고 긴긴 태양 볕 아래 그 흉물스러움을 남김없이 드러내던 여름과는 달리, 겨울의 단지는 어딘가 의뭉스러워 보였다. 이야기를 가득 품은 고성처럼 보이기도 하였다. 내가 살고 있는 주택 앞, 단군 이래 최대 규모의 재건축 단지라는 별칭이 붙은 아파트 단지는 조합원과 건설사 간 충돌로 공사가 중단되어 짓다 만 아파트 건물들이 2년 동안 그대로였다. 1만 5천 가구를 수용할 수 있다며 대대적으로 착공에 들어갔던 대규모 단지는 2차선 통행로를 중심으로 양분되어 있었는데, 문득 그 길을 걷고 싶다는 생각이 든 것은 이번 겨울부터였다. 출근 버스를 타기 위해 정류장까지 가려면 펜스가 세워지기 전보다 30분씩은 더 둘러 걸어야 했다. 고개를 푹 숙이고, 아직 잠에서 온전히 깨어나지 못한 상태로 정류장까지 걸을 때면 아파트 중앙 통행로에서 불어오는 거센 바람 소리가 들려왔다. 솔바람, 산들바람 아니고 토네이도에 가까운 세기였다. 물론 토네이도를 직접 겪어 본 적은 없지만···. 사람 하나는 거뜬히 날려 버릴 듯 기세 좋은 바람이었다. 단지 바깥은 바람 한 점 없이 잠잠했으므로, 이는 분명 바람길을 잘못 낸 시공 탓에 불어 대는 건물풍일 터였다. 거센 바람에 펜스가 흔들리며 콰챵- 하는 소리를 낼 때면 살을 에는 새벽녘 추위도 어쩐지 더욱 견디기 어려워져 굳게 잠긴 펜스를 원망하게 되었다. 자물쇠를 열고 단지 가운데 통행로로 다닐 수 있다면 그 끝의 버스 정류장에 금세 도달할 텐데. 아침마다 30분씩은 더 자고 나올 수도 있을 텐데. 내게는 바람쯤이야 잠을 조금이라도 더 잘 수 있다면 얼마든지 견딜 수 있는 문제였다. 한파 특보 경보 문자가 알람보다도 일찍 울려 잠을 깨웠던 날, 나는 빌라 현관을 벗어나 오른쪽 인도로 걷는 대신 길 건너 펜스 쪽으로 향했다. 펜스 출입구에는 주먹만 한 자물쇠가 굳게 걸려 있었다. 화풀이라도 하듯 자물쇠를 세게 두 번 당겨 보았는데 그것만으로도 자물쇠가 훌렁 풀려 버렸다. 펜스 안쪽으로 손을 쏙 넣어 자물쇠가 걸려 있던 걸쇠를 풀고 출입문을 열자 눈앞에 펼쳐진, 소리로만 접하던 바람의 길. 이용자가 나 혼자뿐이라 길은 실제 너비보다도 광활해 보였다. 건축 자재들, 내부 설비들이 군데군데 널브러져 있었고 고목처럼 주차되어 있는 승합차도 몇 보였다. 길 가장자리에도 단지로의 진입을 막는 펜스가 설치되어 있어 잠시 길과 나뿐인 세계에 진입한 것만 같았다. 통행로는 야트막한 고갯길이었다. 바람은 듣던 대로 거세었다. 나는 두 손으로 외투를 꼭 여민 채 거센 바람에 맞서 걸었다. 두 발이 동시에 떨어지는 순간 바람에 휘말려 공중으로 붕 떠오를 것 같아 한 발이 떨어지면 다른 한 발은 땅에 꼭 붙어 있도록 의식하며 걸어야 했다. 고갯길의 고
- 관리자
- 2025-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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