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사소한 이야기
- 작성일 2007-0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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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소한 이야기
서하진
1
문건은 회사 인터넷 게시판에 올라 있었다고 했다. 사내(社內), 누구나 열람할 수 있는 자료였으므로 소문은 삽시간에 회사 전체로 퍼져나갔다. 문건의 내용이 아니라 거기, 그 자리에 언급된 이름만으로도 사람들은 충격을 받았다.

문건과 관련해서 가장 먼저 보고를 받은 사람은 감사팀의 민 팀장이었다. 출근해서 막 녹차 한잔을 마시려던 그는 찻잔을 내려놓고 부팅이 끝난 컴퓨터의 마우스를 두 번 클릭했다. 그의 얼굴이 조금 창백해졌다. 단 이십초 만에 자료를 열람하고 프린트 아웃한 후 팀장은 기술팀에 전화를 걸어 삭제를 지시했다.
그는 천천히 문서를 반복해서 읽었다. 차분하고 냉정한 어투, 보고서처럼 일목요연하고 군더더기 없는 문장이었다. 작성자는 실명을 밝히고 있었다. 이영주? 그로서는 기억에 없는 이름이었다. 문제를 일으킬 소지를 안고 있는 직원이 아니라는 뜻이었지만 문제는 항상 뜻밖의 인물이, 뜻밖의 장소에서 일으킨다는 것을 그는 경험으로 알았다. 마흔세 살, 감사실에서만 십 오년째 근무하는 동안 그에게는 더 이상 놀라운 일도 믿을 수 없는 일도 존재하지 않았다. 신민호 이사…… 문건의 이름 밑에 그는 밑줄을 그었다. 그의 이름을 이런 곳에서 만나다니…… 뜻밖이다, 민 팀장은 생각했다. 신 이사와 그는 대학 선후배 사이였으며 같은 동네, 같은 아파트의 거주민이기도 했다. 명문 K대가 아닌, 비명문 K대 출신. 민 팀장이 감사실에서 오래 근무한 것이 사내 임원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명문 대학 출신이 아니었던 덕분이었다면 신 이사의 기용은 하나의 상징이라 할 수 있었다. 신 이사는 사내 마이너리티들의 희망과도 같은 존재였다. 그가 아는 신 이사는 친절하고 성실하고, 부지런한 사람이었다. 그날 새벽 산책길에서 만났던 신 이사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내와 작은 딸을 캐나다로 보낸 후 생긴 불면증을 피하기 위해 시작한 새벽 조깅이라 했다. 손을 흔들어 보이고 가던 길을 달리는 그의 입에서 뿜어져 나오던 하얀 입김을 생각하자 가슴 한가운데 묵직한 느낌이 일었다. 입사 초년 시절부터 형처럼 그를 챙겼던, 그에게 신 이사는 친형보다 더 자상한 사람이었다.
송수화기를 들고 신 이사의 내선번호를 누르려던 팀장의 손길이 두어 번 허공에서 맴돌았다. 그는 이내 송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사내 전화로 통화하는 일이 적절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까맣고 하얀, 두 개의 휴대폰을 꺼내고 번갈아 쳐다보던 그는 역시 고개를 저었다. 회사에서 지급하고 회사에서 요금을 지불하는 어떤 통신망도 보안을 장담할 수 없다, 고 그는 생각했다. 그의 개인 휴대폰이라 할지라도 안심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휴대폰의 전원을 끄고 서랍에 넣었다. 며칠 동안 그는 유선전화로, 누가 들어도 문제될 것 없는 대화를 나눌 것이었다. 스스로의 습관처럼 몸에 배인 안전의식이 잠깐 그에게 흡족한 기분이 들게 했다. 조심, 또 조심. 조직은 언제라도 그를 덮치고 쓰러뜨릴 수 있는 괴물이라는 것을 그는 익히 알고 있었다.
2
열시 오 분, 팀장은 회의를 소집했다. 이 과장, 박 계장과 정 사무역이 들어오고 마지막으로 민 팀장이 들어섰다. 팀장의 뒤로 육중한 나무문이 소리 없이 닫혔다.
“자료 삭제는 완료됐습니까?”
민 팀장의 어조에서 여느 때와 다른 기색은 느껴지지 않았다.
“기술팀에서 삭제는 했습니다만……”
정 사무역이 말끝을 흐리며 입맛을 다셨다.
“이미 퍼간 사람들이 있다는 말인가요?”
팀장이 물었다.
“그럴 가능성이 충분하다고 봅니다. 처음 올린 시각이 아홉시 오 분 전, 삭제는 아홉시 오십구 분에 완료되었습니다. 한 시간 이상 떠 있었던 셈이죠.”
한 시간이면, 태평양을 건너, 남극에까지도 가 닿을 수 있는 세상이었다. 외부로 소문이 새어나간다면, 만약 기자들이, 네티즌들이 낌새를 채기라도 한다면 회사로서는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도덕 경영을 모토로 하는, 삼십대 그룹의 대열에 막 진입한 회사의 이미지에 큰 흠결이 생길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건 일단 추이를 봅시다. 기술팀에 연락해서 유출 정도를 확인시키고 홍보팀은 기자들 동태를 살피라고 하세요. 내일 회장님 연초 회견이 예정되어 있죠? 그에 앞서서 회식을 하던가, 할 수 있겠죠. 미리 손쓴다는 인상 주지 않도록 조심하라 이르세요.”
말을 끊은 팀장이 손에 든 서류를 꼼꼼히 살피는 사이 이 과장의 휴대폰이 울렸다. 폴더를 열고 창을 보던 이 과장의 안색이 일그러졌다.
“신 이사님인데요…… 어떻게 할까요?”
“받으세요. 호출이 있을 때까지 대기하시라 하세요.”
팀장의 어조는 분명하고 단호했다. 신 이사가 이미 자신의 휴대폰에 몇 차례 전화를 걸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신 이사는 단순한 두뇌의 소유자였다. 의리를 지킬 줄 알았으며 장애물을 피하지 않는, 저돌적인 인물이었다. 신입에서 계장, 과장, 부장, 이사가 되기까지 승승장구해온, 회사의 상징이 되기까지 그를 지켜온 철학이 성실, 인내, 노력…… 그런 도덕 교과서의 목록일 것을 생각하면 어쩌면 그는 한 시대의 상징이라 할 수조차 있었다. 그런 그도 이제 집으로 돌아갈 때가 온 것인가…… 마음이 무거웠지만 팀장은 해야 할 말을 마저 했다.
“문건의 신빙성에 대해서 먼저 이야기합시다. 박 계장님, 어떻게 봅니까?”
박 계장은 아, 저요? 하듯 찔끔 놀란 빛이었다.
“제가 보기에는…… 논리의 비약이 일부 보이기는 하지만 개연성이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영주 씨를 제가 좀 아는 데요,”
“개인적으로 아는 겁니까?”
박 계장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그게 아니라 영업부에서는 좀 알려진 직원입니다.”
“어떻게, 왜 알려졌지요? 사진으로 보니 상당한 미인이던데, 그 때문인가요?”
“박 계장이 아직 총각이다 보니……”
중년의 이 과장이 슬며시 끼어들었다. 방안에 잠시나마 웃음기가 돌았다. 머뭇머뭇하던 박 계장이 이영주 씨는 지난달에 결혼했고요, 그전에 동호회에서 만난 적이 있습니다, 라고 말했다.
무슨 동호회인지, 등록된 단체인지, 얼마만의 간격으로 모임을 갖는지, 어떤 인물들이 모이는지 팀장은 빠르게 물었다. 덩달아 말의 속도가 빨라진 박 계장이 그들이 속한 인터넷 게임 동호회에 대해 설명하는 사이 팀장의 손은 재빠르게 노트북 위를 오가며 기록을 남겼다.
“그러니까 박 계장님 의견으로는 이영주 씨의 말이 믿을 만하다, 이거죠? 다른 분들은?”
이 과장과 정 사무역이 비슷한 견해를 표시했다. 과장하지 않았다는 점이 더 심각하게 느껴진다는 의견을 내놓은 사람은 정 사무역이었다. 네 사람은 이십분 간 문건의 문장 하나하나를 검토했다. 어떤 부분에서는 어떤 이의 얼굴이 붉어졌고 어떤 이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오늘 사실 확인을 거치고 내일 중으로 위에 보고합니다. 먼저 이영주 씨를 부릅시다. 정 사무역, 사규 검토하고 예상 처리결과 뽑아주세요.”
방안에 무거운 기운이 감돌았다. 이 과장이 송수화기 쪽으로 손을 뻗었다. 네, 이영줍니다. 스피커폰에서 흘러나온 이영주의 음성은 맑고 아름다웠다.
3
스물아홉, K대 경영과 졸업, 입사 최고 성적, 최단기간 대리 승진, 신상기록 카드에서 확인한 대로 이영주는 영리해 보였다. 감색 슈트, 단정한 눈매와 매끈한 이마, 어깨 위를 흘러내리는 부드러운 머리카락, 긴장된 듯 꼭 다물려 있는 도톰한 입술. 사보 표지에 나온다면 썩 어울릴 얼굴이었다. 부르셨습니까, 하고 자리에 앉은 이영주는 팀장이 묻기 전에는 입을 열지 않았고 질문에는 짧고 간명한 답을 했다. 간간이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을 뿐 대개의 신고자들이 그러하듯 동정을 유발하는 애처로운 눈빛을 하거나 한숨을 쉬거나 낯을 붉히거나 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이영주 씨는 지금 법대로 처리해야 한다, 이런 말이지요?”
팀장이 물었다. 몇 차례 질문과 답이 오간 후였다.
“남녀 고용 평등법, 남녀 차별 금지법, 그런 것이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게 무언지 설명해줄 수 있나요?”
이영주는 입술을 꼭 다물고 팀장을 쳐다보았다. 반듯한 이마 한가운데가 잠깐 찌푸려졌지만 심호흡을 한 후 입을 연 이영주의 음성은 차분히 가라앉아 있었다.
“성희롱이란 업무와 관련해서 성적 언어나 행동 등으로 성적 굴욕감을 느끼게 하거나 성적 언동 등을 조건으로 고용 상 불이익을 주는 행위, 라고 알고 있습니다. 음란한 농담, 언사, 외모에 대한 성적인 비유와 평가, 원하지 않는 신체 접촉, 회식, 야유회 등에서 옆자리에 앉히고 술을 따르도록 강요하는 행위, 등이 이에 해당한다…… 이상은 문건에 적혀 있는 내용입니다.”
이 과장과 박 계장 얼굴에 감탄의 빛이 떠올랐다. 정 사무역은 조금 질린 듯한 표정이었다. 놀라운 암기력이다, 라고 팀장은 생각했다. 저런 여자에게 걸린다면 누구라도 빠져나갈 수 없을 것이었다.
“신 이사의 행동이 그것들 중 어디에 해당한다고 생각합니까?”
“굳이 꼽으라 하시면……”
방에 들어온 후 처음으로 이영주는 망설이는 얼굴이 되었다.
“음란한 농담을 했습니까?”
“음란하다고 할 수는 없을지도 모르지만……”
“영주 씨, 신랑이 훌륭하더만, 든든하겠어. 이 부분이 문제입니까?”
“아니, 그건……”
“그렇더라도 우리 최 대리, 김 대리 너무 괄시하지 마. 이 부분인가요?”
“그렇게 떼어두고 보시면 곤란하다고 봅니다.”
“그럼 주욱 연결시켜 봅시다. 영주 씨, 신랑이 훌륭하더만, 든든하겠어. 그렇더라도 우리 최 대리, 김 대리 너무 괄시하지 마, 예쁘게 봐주고…… 어디가 문제입니까?”
“문제는 제가 성적 수치감을 느꼈는지 여부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 앞뒤 설명을 읽으셨다면 이해가 되실지 모르겠는데요, 김 대리나 최 대리는 제게 청혼했던 사람들입니다. 이사님도 그걸 알고 계셨구요.”
이영주의 설명대로라면 그녀는 부서 안에서 도합 세 명의 남자에게서 청혼을 받았고 세 번 다 거절했다. 그녀는 그 남자들과 각각 교제 비슷한 것을 한 적이 있었으며 청혼을 거절한 동시에 만남도 끝이 났다. 미혼의 매력적인 여성이 미혼 남성의 관심을 끌고 결혼하자, 졸라대는 일이 생기고…… 그건 무척 자연스러운 일이었으며 무엇보다 이미 지나간 일이었다. 지난 달 이영주의 결혼식에는 부서의 거의 모든 직원이 참석했다. 신 이사 역시 방명록에 이름을 남기고 두툼한 봉투를 건네고 갈비탕과 바람떡을 먹었다.
“다른 자리에서 있었던 일로 넘어갑시다. 즉석 불고기…… 이건 무슨 말인가요?”
“그건…… 설명대로 회식 중에 이사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여기 계신 분들도 다 아실 거라 생각합니다.”
민 팀장이 좌중을 둘러보았다. 정 사무역이 민망한 듯 고개를 숙였다. 이 과장과 박 계장은 눈을 돌리고 딴청을 피웠다.
“해외 출장 중 다른 호텔에 묵고 있는 이영주 씨에게 호텔을 옮길 것을 종용했다, 이 부분 말인데요, 일의 진행 상 숙소가 같으면 편리하다고 여길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 일이 그렇게 불쾌했다는 건, 좀 이해하기 어려운데요.”
“팀장님.”
이영주의 눈썹이 움칠했다. 숨결이 조금 거칠어진 듯도 했다.
“그 정황은 문건에 설명되어 있습니다. 그 말이 나온 상황이, 어떤 시점에 호텔을 옮기라 했는가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출장 중 이사님과 저는 같은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지도 않았구요.”
민 팀장이 말없이 이영주를 째려보고 있었으므로 이 과장이 대신 나섰다.
“일과가 끝나고 회식 중에 그런 제의를 했다, 이렇게 되어 있군요. 신 이사는 취한 상태였다, 고 적혀 있군요. 당시 다른 참석자가 있지 않았나요? 두 사람만의 회식이 아니었지 않습니까?”
이영주는 깊은 한숨을 쉬었지만 곧 자세를 가다듬었다.
“현지 남자 직원 두 사람이 동석했습니다.”
비스듬히 이영주를 노려보던 민 팀장이 고개를 바로 돌렸다.
“자아, 이영주 씨. 상황을 정리해 봅시다. 출장 일정 중에 회식이 있었다, 현지 직원이 두 사람이나 함께 있었다, 그런 자리에서 신민호 이사가 내밀한 제의를 한다, 이건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취해 있었다 하더라도 지나친, 그러니까 너무 민감하게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습니까?”
너무 민감하다…… 이영주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남자들은 다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느끼지 못하는 것은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 어째서 감사팀에는 여자 직원을 두지 않는 것일까, 싶었다. 그녀는 며칠 전 남편의 반응을 생각했다. 자기네 회사에는 성희롱, 뭐 그런 문제가 없어? 문건을 올려야 하나, 주저하고 있었을 때, 의논을 하기 위해 물었을 때 남편은 피식 웃었다. 제조업체잖아, 순 사내놈들인데, 뭘. 시사 주간지를 넘기던 그는 힐끗 아내를 쳐다보며 물었다. 뭐지? 너 사무실에서 무슨 일 있었구나? 무슨 일이라기보다…… 그녀의 음성이 조심스러워졌다. 누가 뭘 어쨌어? 어제 회식했다더니 그 때 일이야? 남편은 주간지를 덮었다. 당장이라도 문제의 남자에게 달려갈 기세였다. 아니, 사실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야. 남자들은 정말 이상해. 왜 여사원에게는 무어라도 외모와 관련해서 한마디 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걸까. 절로 한숨이 나왔다. 한마디…… 그게 다야? 긴장이 풀린 얼굴로 그가 물었다. 꼭 만지고 안고 그래야만 희롱이 아니지 않은가, 낯 뜨거운 농담만이 희롱인가, 물었을 때 남편은 말했다. 오늘 예뻐 보인다, 요즘 날씬해졌다, 그런 말이야 누구나 하잖아. 너 그런 말 듣는 거 좋아하잖아. 그런 말 해주고 싶어도 차마 할 수 없는 여자가 널렸어. 미모가 경쟁력인 세상인데 너 예쁘다는 게 뭐 나쁘냐…… 그쯤 이영주는 남편에게 설명하기를 포기했다. 그의 이해를 구하려했던 것이 무리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칫 어떤 말을 들었을 때의, 어떤 미묘한 상황에서의 자신의 감정을 이야기했다가는 외려 그의 오해를 살 듯한 분위기였다.
어쨌거나 기분 나쁜 건 나쁜 게 아닌가. 내 기분이 잘못이라고 누가 판단한단 말인가. 이영주는 지그시 어금니를 물었다. 그녀는 팀장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며 또박또박 말했다.
“처음부터 제가 그랬다고 생각하시면 곤란합니다. 거듭 되면, 거듭 비슷한 상황이 벌어져서 민감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고 아시겠지만 지극히 개인적인 일이라 다른 사람에게 이해시키기도 쉽지 않습니다. 저로서도 이런 불미스러운 일에 연루되고 싶은 마음은 없었지만…… 그저 피하고 잊어버리고 농담으로 넘기는 것이 불가능했느냐 물으신다면……”
이영주는 잠깐 말을 끊고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네 명의 남자가 그녀의 희고 긴 손가락을 보고 있었다.
“불가능했습니까?”
팀장이 물었다.
“저는…… 그러고 싶지 않았습니다. 저 자신은 좀 불편해지겠지만 민감하게 받아들이지 않으면, 이런 문제가 계속되리라는 판단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마치 투사라도 된 형상이 아닌가, 자신에게는 오류가 있을 수 없다는 듯한 저 태도는 K대 출신의 전형이 아닌가, 생각했지만 민 팀장은 입을 다물었다. 이영주의 진술을 들은 바, 문건의 내용은 대부분 사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의 말대로 받아들이기 나름, 이라는 해석을 할 수 있겠지만 받아들이는 주체가 삼은 이 문제의 해법은 이미 나 있는 것 같았다. 영리하게도 이 여자는 지난 가을의 승진 누락을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그녀가 문제 삼은 것은 사소하고도 사소한 말들, 그저 지나치는 행동들이었다. 이제 피할 수 없겠구나…… 팀장의 마음이 한층 무거워졌다.
4
오후, 감사팀의 호출을 기다리던 신 이사의 사무실, 모든 직원들이 숨죽이며 지켜보던 그 방 앞에 한 남자가 나타났다. 부속실의 비서가 놀라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그 남자는 고개를 저으며 정중하게 노크를 하고는 답을 기다리지 않고 문을 열었다. 방을 서성이던 신 이사의 눈이 커졌다.
앉아도 되겠나, 묻고는 대답을 듣기 전에 소파에 털썩 몸을 묻은 그 남자는 입술을 일그러뜨리고 신 이사를 쳐다보았다.
“어쩐 일이신가, 연락도 없이.”
신 이사는 뜨악한 표정이었다.
쯧쯧…… 혀를 찬 남자가 이게 무슨 꼴인가, 했다.
“당신이나 나나 산전수전 다 겪은 사람들인데 어쩌다 여직원 하나 간수를 못해서 이 지경을 당한단 말인가. 자네, 여자들한테 무관심한 줄 알았더니 그것도 아니었나봐?”
그래서, 고소하냐? 신 이사는 묻고 싶었다. 그를 보며 혀를 차는 저 남자, 그의 입사 동기이며 대리를 거쳐 과장을 달 때, 언제나 그보다 한 발짝 앞서가던 저 남자를 그는 한 때 무던히 미워했었다. 훤칠한 외모에 부유한 처가, 수재들만 모이는 곳에 입학한 아이들, 저 사람에게도 아쉬울 것이 있을까, 싶던 그 남자가 지난 가을 이사 승진에서 제외되었을 때, 대신 그 자리를 신 이사가 차지했을 때 그는 억울했을까. 화가 났을까. 자신이 그 일을 통쾌해 했었던가…….
“그건 그렇고…… 어쩔 셈인가? 지금 온통 자네 이야기뿐이야. 난리도 아니야.”
“그럴 테지……”
그는 맥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팀에서 뭐래? 아직 호출 전이지?”
“곧 연락이 있겠지. 가보면 사실을 알게 되겠지.”
그 남자, 박 상무보가 그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감사팀 놈들은 다 똑같아. 혹시 민 뭐라는 그 팀장이 후배라고 사정 봐줄 거란 기대 같은 건 아예 하지 말게. 알겠지만 작년에 나 당했었잖아.”
작년 가을, 한 여자가 감사팀에 투서를 보냈다. 투서는 이미 사내에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그의 자잘한 연애에 대한 보고서였다. 여자의 신원이 모호했으므로 그는 모함이라고 우겼지만, 그렇게 일단락되었지만 승진에 걸림돌이 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걔네들이 부르면 먼저 문건 내용에 대해서 질문을 할 거야. 내 짐작엔 그 여직원을 먼저 불렀을 거고 사실 확인 차원에서 자네를 부를 거란 말이지.”
“사실이고 뭐고…… 나는 정말 황당한 심정이야. 자네라면 그렇지 않겠나?”
“그 심정은 충분히 이해하네. 누구나 자네가 억울하다고 생각하지. 그렇지만 나로서는…… 내 의견을 말해도 된다면 인정하고 조용히 처리 절차를 밟는 것이 현명하지 않을까…… 생각하네. 여기서 더 버텨도 점점 스타일만 구기는 게 아닐까 말이지. 사내 여론도 좋지 않은 것 같고……”
“여론이라니? 그게 누군가?”
신 이사의 언성이 높아졌다.
“누구나 억울하다 생각할 거라면서, 여론은 누구나가 아니란 말인가?”
그의 동료는 한동안 침묵했다. 딱하다는 듯 혀를 찼다.
“당신이 모르는 게 있어. 여자들이란 말이야, 무슨 일엔가 한을 품으면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는 이상한 동물이야. 그 여자, 척 봐도 알겠더라, 절대 포기 안 하게 생겼더구만.”
여자에 대해서라면 그의 견해가 옳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문제는 게시판에 공표됐다는 것이지. 막고는 있다지만 내일 당장 일간지 가십 란에 기사가 나갈걸? 냉정하게 판단해야 해. 사실이 어땠나, 그런 거, 전혀 중요하지 않아.”
신 이사는 물끄러미 그를 쳐다보았다. 사실이 중요하지 않다면, 무엇이 중요하단 말인가. 그로서는 판단이 서지 않았다.
“내 생각을 말하자면…… 윤리위가 소집되는 걸 막아야 한다는 거야. 알겠지만 그 멤버들 중에는 자네를 질시하는 인간이 적지 않으니까.”
그의 말처럼 만약 윤리위원회가 소집된다면 징계를 피할 수 없을지도 몰랐다. 조용히 퇴직하는 일조차 불가능해질지도.
“이것 봐, 신 이사. 단순하게 생각해. 우리 나이, 벌써 오십이야. 다른 회사에서는 대부분 퇴직이지. 이런 대기업 이사까지 했으니 어디 다른 자리를 알아볼 수도 있어. 자네라면 모셔가려고 경쟁할지도 몰라. 버티면서 욕보고, 싸우고, 징계 받고 퇴직금 깎이고…… 그거, 보통 일이 아니야. 아이들 생각도 해야지. 자네는 더구나 딸들이 아닌가.”
누가 시켜서 왔나, 그는 묻고 싶었다. 내가 나가면 자네가 그 자리를 이을 건가, 묻고 싶었다. 언제까지나 불명예로 남을 이런 퇴직을 하고 싶지는 않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의 입은 좀처럼 열리지 않았다. 틀린 말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가 아니었다. 단 하루만에, 단 몇 시간 만에 이처럼 난데없는 궁지에 몰린 자신의 처지를 그는 이해하기가 힘이 들었다. 나는 정말 억울하다, 나는 정말 억울하다, 정말정말 억울하다…… 그는 울고 싶었지만 물론 울 수는 없는 일이었다.
5
휴게실에 모인 남자직원들의 의견은 분분했지만 대체로 너무하지 않나, 로 요약할 수 있는 것이었다.
“엉덩이를 만진 것도 아니고 가슴에 손을 댄 것도 아니야, 어깨에 손만 올렸다잖아. 그게 대체 무슨 죄란 말이야?”
한 남자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누군가 냉큼 대꾸했다.
“걔는 어깨에도 성감대가 있나 보지.”
와그르, 웃음이 터졌다.
“우리 부장, 그 아줌마가 나한테 갈구는 거 들으면, 진짜 혈압 오르거든. 말끝마다 남자가 되어가지고, 모름지기 남자가, 이러는데, 이것도 성희롱 아니야? 누가 이런 거 문제 좀 삼지.”
기다렸다는 듯 여성 상사를 모시는 남자들의 애환이 줄줄이 이어졌다.
“도대체 이 사회는 남자들을 모조리 변태 취급한다니까. 남자란 그저 눈이 확, 돌아가고 그 즉시 아랫도리를 싸안고 끙끙거리는 똥 마려운 강아지로 여긴단 말이지.”
좁은 휴게실 안의 모든 남자들의 얼굴에 분개한 표정이 떠올랐다.
“말마. 애프로디시악이 뭔지 아느냐, 여직원에게 물었다가 잘린 남자 임원도 있다잖아. 그날 바로 잘린 건 아니고 한 달 있다 잘렸다더라고. 한 달 뒤에 이십 년이 된다고, 연금이랑 퇴직금이 엄청나게 차이 난다고 그 마누라가 와서 울며불며 빌어서 그랬다는 거지.”
애프로디시악이 뭐냐? 누군가 물었다. 무식한 놈, 최음제라는 거다, 라는 답이 돌아왔다. 아프로디테랑 비슷하다고? 당연하다. 거기서 유래되었으니까. 모든 상대 여성이 아프로디테처럼 아름답게 보이고, 아프로디테처럼 아름답게 만들어줄 강력한 힘을 갖게 되는…… 뭐 그런 의미였을 거다, 라는 설명이 뒤를 따랐다. 갑작스레 학구적이 된 분위기였다. 사실 여자들이 남자에 대해 알고 있는 게 뭐냐, 알고 보면 여자들이 더 문제, 라고 말을 이은 그 남자 직원은 영업부 내에서도 전문가로 통하는 사람이었다.
주위의 시선을 집중시킨 그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여자들은 성적 흥분, 발기, 유지, 사정으로 이르는 길이 모든 남성이 꿈꾸고 생각하고 희구하는, 유일하고도 분명한 일로 생각한다. 남자들이란 단순하고 무식하기 그지없는 존재여서 그 단순해 보이는 행로에도 시각적이거나 심리적인 자극이 필요하며 자극을 받아들인 대뇌피질이 흥분하고 그 흥분은 대뇌의 시상과 시상하부를 거쳐야 하며…… 이런 사실을 전혀 무시한다. 척수를 타고 내려간 신호가 척수의 아랫부분인 요수의 발기 중추로 전달되고 발기 중추에서 전달된 신호는 성기로 가는 혈관을 확충시켜 이윽고 성기의 해면체에 혈액이 흘러들어가게 되는…… 신경계, 심혈관계, 내분비계, 근골격계가 유기적으로 작용하여 일어나는, 대단히 섬세하고 미묘한, 심지어 예술적인 이 일련의 과정에 대해 여자들은 관심을 갖지 않는다. 말하자면 남자들도 머리, 등, 그리고 허리, 무엇보다 가슴이 있는 존재라는 것을 자주 잊는다…… 그의 긴 설명이 끝날 무렵 누군가 물었다.
“그런데, 아까 애프로디시악인가, 하는 거, 비아그라 같은 거야? 우리나라에도 파나?”
연사 역할의 남자가 빙그레 웃었다.
“굴, 장어, 호박씨, 깨, 새우, 콩…… 이런 거 먹으면 돼. 괜히 없는 해구신 찾지 말고. 그것들에 아연이 많이 들어 있거든. 등 푸른 생선, 마늘, 양파 이런 것들도 보이는 대로 먹어둬. 샐레늄이라고, 미네랄이 많이 들어있는데, 그게 바로 섹스 미네랄이라는 거야.”
남자들의 눈이 호기심과 감탄으로 빛났다. 누군가 점심시간이 끝나간다는 사실을 알렸다. 남자들은 삼삼오오 사무실로 돌아갔다.
6
“자네, 내게 무슨 억하심정이 있나……”
신 이사의 목소리는 나지막했다. 그는 그저 궁금할 뿐이다. 이 여자, 착하고 귀엽고 재주 많은 부하 직원이었던 여자가 왜 그에게 칼날을 들이댔는지. 언제부터 날을 갈고 있었는지…….
“그런 거…… 없습니다. 이사님.”
이영주의 음성도 나지막하다. 이 여자에게 이 남자는 이제 그저 지나치는 길에 만나는 중년남자일 뿐이다. 고개를 똑바로 들어 쳐다보기에도 조심스럽던 이사님이 아니었다.
“그런데…… 왜 그랬나. 내가 설령 자네가 쓴 그대로, 자네에게 몇 마디 했다 해도…… 그게 그저 자네가 예쁘고……”
그는 잠깐 숨을 고르며 적절한 단어를 생각한다. 이제 다 끝났다 싶지만 알 수 없는 일이다. 이 여자가 오늘의 대화를 또다시 게시판에 올릴지 누가 아는가. 아직 남아 있는 퇴직금 정산 과정에 그의 생각이 미친다. 이제 그에게는 누구를 만나도, 무슨 말을 할 때도 머뭇거리고 다시 생각하고 한숨 돌이키는 버릇이 생길 것이었다.
“자네를 아끼다 보니 한 말이라는 거…… 그걸 몰랐단 말인가.”
“이사님.”
이영주도 말을 고르는 중이었다. 오후 늦게 이영주는 감사실의 통보를 받았다. 신 이사가 자진 퇴직하는 선에서 일을 마무리지으려 한다, 별도의 징계는 없다, 받아들여주겠는가. 팀장은 정중하게 물었으며 이영주는 알겠다, 고 짤막하게 대답했다. 자신이 원하는 해결책은 아니었지만 그녀에게는 더 이상 밀고 나갈 기력이 남아 있지 않았다. 이제 끝난 마당에 그에게 더 상처를 입히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이영주는 생각했다. 그는 아직껏 자신의 잘못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잘못은커녕, 재수 없이 된통 걸렸다고 여기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이런 회사의 임원이었으니 어쩌면 그를 모셔가려 애쓰는 또 다른 회사가 있을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아니, 틀림없이 그럴 것이었다. 전무이사, 상무이사, 어쩌면 부사장…… 한번 잘 잡은 줄이 평생 가느니라, 그녀의 어머니가 입버릇처럼 하던 말이 생각났다. 이영주는 그를 똑바로 쳐다본다.
“이사님은 아낀다 하시지만…… 제겐 모욕인 경우가 많았습니다. 저는 그런 아낌은 받고 싶지 않습니다. 제가 이상한 여자, 별난 여자 취급받으리라는 거,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아니, 아니, 신 이사가 손을 내저었다.
“내 말은…… 이 사람아, 그게 아닐세. 자네에게 모욕이었다는 걸, 내가 몰랐다는 걸 인정하겠네. 나는 그걸 다 인정했네. 감사팀에서…… 일문일답을, 자네도 겪었을 테지만…… 나는 내 잘못이 없었다고 말하는 게 아니네. 내가 그랬다 하더라도 왜 내게 말하지 않았는가, 그 말일세. 자네는, 그 뭔가, 표현이 확실한 사람이 아니었나 말이야.”
그의 표정이 처연해졌다. 이영주의 얼굴에도 그늘이 어렸다.
“제가 바란 건 이사님의 퇴직이 아니었어요. 저는 사과를 받고 싶었어요. 제게 고통이었다는 걸 알게 하고 싶었어요. 저뿐 아니라 많은 여직원들이 비슷한 일을 겪는다는 걸 알리고 싶었어요. 그저 단순히 불쾌한 정도가 아니라 회사가 싫어지고 움츠러들어 눈치 보는 자신이 싫어지고…… 불면에 시달리고 우울증을 겪는 직원들도 있어요. 저는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저는 그저,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이사님을 이처럼 퇴직하게까지 할 생각은 아니었어요. 그렇지만…… 만약 제가 이사님께 그런 말씀을 드렸다면…… 알았네, 미안하네, 하셨겠습니까.”
이영주의 음성이 떨렸다.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그예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나왔다. 오래 참았던 눈물이었다.
그때 이영주의 휴대폰이 울리고 남편의 번호가 떴다.
“너, 바쁘니? 나 잠깐 볼래?”
남편의 목소리는 긴장으로 떨리고 있었다.
“너 무슨 짓을 한 거니. 지금 나한테 사람들이 전화하고 난리 났어. 소문 무서운 거, 나 오늘 같이 실감한 거 처음이다. 무서운 마누라 모시고 사는 놈이라고, 우리 회사에까지 소문이 좌악 퍼졌단 말이야.”
이영주가 침묵하는 사이 남편은 흥분을 감추지 않았다.
“그 사람…… 가장이잖아. 딸이 둘이라던데…… 인제 딸들 앞에서 어떻게 얼굴 들고 살겠니. 너는 무슨 애가 그렇게 인정이 없냐…… 거기까지 가느라고 그 사람이 얼마나 고생했겠냐. 남의 모가지 자르고…… 좋냐? 나는 그게…… 남의 일 같지 않다……”
이영주는 가만히 폴더를 접었다.
7
집은 조용하고 어두웠다. 아내와 작은딸이 떠났다는 사실이 새삼 허전했지만 지금 이 순간 그는 아내의 부재가 다행스러웠다. 고맙게도 큰딸의 방에서 불빛이 새어나왔다. 그는 방문을 열었다.
“아빠. 늦으셨네?”
책상 앞에 앉아 있던 딸이 그를 불렀다. 그는 취한 눈으로 딸을 쳐다보았다. 마음이 아팠다. 그는 손을 좌악 펴고 가슴을 손바닥으로 쓸어내리는 시늉을 해보였다. 가슴이, 가슴이 아파…… 딸의 눈이 신기하다는 듯 동그랗게 커졌다.
“아빠가 수화(手話)를 아시네?”
딸은 재작년부터 서울 외곽 도시의 지체부자유아들을 돌보고 있었다. 세 해째 대학 입학에 실패하고 더 이상 수능시험을 보지 않겠다, 선언한 후 시도한 일이었다. 무보수에 가까운, 봉사를 위한 직업이었다.
“아빠가 말이다…… 예전에 말이다……”
그는 딸의 발치에 몸을 앉혔다. 오래 전, 스무 살이었던 때, 그는 그가 태어나고 자란 도시의 껄렁패였다. 가난하고 보잘것없는 친구들, 잃을 것 없어 두려워할 그 무엇도 없는 또래들과 어울려 더러운 골목들을 쏘다녔다. 그에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그의 이름을 지방도시의 신생 대학 입학생 명단에 올려놓고 조용히 기다렸다. 모름지기 좀 놀아본 사내가 일도 한다, 그의 아버지는 자주 그렇게 말했다. 아버지의 끈기에 밀려 학교에 갔을 때 그는 그가 속한 학과가 특수교육과라는 것을 처음 알았다.
몇 차례 실습을 나간 어느 날이었다. 일급 장애 판정을 받은, 전신마비 아동을 씻기고 입히고 노래를 가르치는 일정을 소화하면서 그는 자신의 온 신경이 문 쪽을 향해 있음을 알았다. 마치 자석에 끌린 듯 하시라도 그곳으로 향할 수 있도록, 등이 휠 듯한 느낌으로 문을 향하고 있는 스스로에게 그는 몹시 실망했지만 그 실망감보다 선명히 남은 것은 그가 씻기던 아이의 오물의 느낌이었다. 끈끈하고 질척한 그 감촉은 오후 내내 그의 뇌리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날 밤 그는 아버지에게 말했다. 아부지, 저는 제가 의리 있고 성실한 놈인 줄 알았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제 보니 저는…… 게으르고 얍삽한 놈입니다. 그의 아버지는 물끄러미 그를 쳐다보았다. 인자 마, 제 그릇에 맞게 살랍니다. 서울 좀 보내 주이소.
“아빠가 예전에 재수할 때 말이다…… 용산에서 학원 댕길 때, 말이다. 하숙집에 청각장애인이 있었거든. 가가 무슨 어려운 일만 당하믄 이 아빠가 나서서 다 해결해주고 그랬잖아……”
그의 아버지는 그의 학적을 만들어 주고 그를 서울로 보내주었다. 명문 K대가 아니었어도 대견해하며 그의 등록금을 대 주었고 그를 결혼시키고 아이를 낳았을 때 뛸 듯이 기뻐해주고 첫 집을 샀을 때 눈물을 흘려주었다. 그의 아버지는 그의 모든 것을 해결해 주었다. 두 딸아이에게 그도 그렇게 하고 싶었다. 아이들의 모든 것을 해결해 주는 아버지가 되고 싶었다.
“그 친구가…… 이름이 뭐였니라……”
어이없게도 지방대학 학적부에 남았던 자신의 이름이 동그마니 떠올랐다. 신민호…… 이름 참 좋다, 그자…… 반쯤 눈을 감은 채 그가 중얼거렸다. 비스듬히 그의 몸이 쓰러졌다.
“아빠, 많이 취하셨네. 우리 아빠 취하면 귀엽다니깐.”
딸이 그의 어깨에 담요를 덮어주었다. 입사했을 때, 사원증을 신기한 듯 쓸어보고 쓸어보던 아버지. 오늘, 그를 본다면 아버지는 말없이 그를 안아줄 것이었다. 괜찮다, 괜찮다, 등을 쓰다듬어 줄 것이었다. 이제는 없는 아버지가 그는 몹시 그리웠다. 꿈에서라도 아버지를 만날 수 있었으면…… 감은 그의 주름진 눈가에 물기가 흘러내렸다.
송별회는 생략되었다. 신 이사의 비서였던 정애리가 책상 서랍을 비우다 말고 울음을 터뜨렸다는 후문이 있었지만 그의 퇴직을 슬퍼한 또 다른 직원의 이야기는 전해지지 않았다. 그날 오후, 신 이사의 결심을 굳히게 한 박 상무보의 방문이 민 팀장의 사주로 이루어졌으며 두 사람이 저마다 다른 속셈이 있었다는 풍문이 돌았지만 사실은 확인되지 않았다. 회사는, 다른 모든 곳과 마찬가지로 소문과 음모에 민감한 곳이었다.
주인이 사라진 사무실에는 며칠간 내부 공사가 진행되었다. 나무문은 유리로 교체되었으며 창에 드리워졌던 블라인드도 제거되었다. 시선에 훤히 노출된 그 사무실에 곧 사십대의 여성 임원이 부임할 것이라는 소문이 돌다가 저절로 사라질 때까지 그곳은 오래도록 비어 있었다. 어쩌면 회사 차원의, 임원 감원을 목적으로 한 음모였던 것은 아닐까, 의심하는 사람도 생겨났다.
이영주는 전보 발령을 받았다. 영등포 지사의 감사역, 직함은 계장이었지만 본사의 영업부 대리로서는 좌천이라 할 만한 자리였다. 그쯤, 당연하다는 듯 이영주는 묵묵히 새로운 일터로 향했다. 회사는 변함없이 분주히 돌아갔다. 달라진 일이라면 점심시간이면 대체로 지하의 직원 식당을 이용하던 남자들이 회사 밖으로 나가는 일이 잦아졌다는 정도였다. 남자 직원들이 줄줄이 찾아간 곳은 회사 앞 굴밥 전문점이었다. 《문장 웹진/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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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리자
- 2025-04-01
성한 입 이현석 아기 앓는 소리에 눈을 떴다. 박명이었고 아직 분유 먹일 시간은 아니었다. 어두운 잠귀를 이유로 밤 당번을 자처한 것은 나였으나 의지와 달리 본성은 강했다. 아내가 자리끼 컵을 산산조각 냈을 때도 세상모르고 코만 곯았다는데 율이와 둘이 잔 뒤로는 아이가 내는 작은 소리에도 눈이 금방 뜨였다. 바닥에 깔아 둔 매트리스에서 몸을 일으킨 나는 아기 침대를 내려다보았다. 율이는 아무 일 없다는 듯 두 눈을 꼭 감은 채 입을 오물거렸다. ‘아빠가 또 속았네.’ 잠은 설쳤어도 흐뭇했다. 이 작은 목숨이 간밤을 또 무사히 넘겼구나. 그 마음을 얹고 도로 몸을 뉘었는데 다시 잠에 들지는 못했다. 아기방 창문에 맺힌 물방울이 거슬렸다. 창문은 밤새 돌린 가열식 가습기 탓에 부러 흩뿌린 것처럼 흥건했다. 문득 재건축 조합 단톡방에서 보았던 잡담이 떠올랐다. 유명 로펌을 다니느라 바쁜 딸과 얼마 전 개원한 의사 사위를 대신해 손주 둘을 보느라 겨우내 가습기를 틀었더니 옷장 안에서부터 피어난 검은 곰팡이가 벽면 한쪽을 잡아먹었다는 이야기였다. 시황 따라 일이 억은 우습게 에누리하는 아파트에서 곰팡이 걱정이라니. 직면한 현실과 지난봄 우리 부부가 치른 비현실적인 가격 사이의 뚜렷한 차이에 헛웃음이 나왔다. 물론 현실만 따지면 놀랍지 않았다. 아파트는 인혁당 재건위 사건으로 박정희 정권이 삼화토건 회장 도예종, 매일신문 기자 서도원, 경북대학교 총학생회장 여정남 등 여덟 명을 국가보안법 위반, 내란예비음모 등으로 사형을 선고한 지 하루도 지나지 않아 형을 집행했던 바로 그해에, 여의도의 다른 구축 아파트와 마찬가지로 박정희의 명령으로 완공됐다. 반세기가 넘은 건물이었다. 근대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곰팡이는 당연했다. 화장실에서 바퀴벌레를 보아도 놀랄 것이 없었고, 개수대에서 썩은 내가 올라와도 그러려니 했다. 아내와 함께 산책을 마치고 돌아온 여름밤에는 통통하니 살이 오른 쥐가 아파트 복도 반대편으로 내달리는 모습을 본 적도 있다. 기함할 듯 놀란 나와 달리 아내는 대수롭지 않아 하며 현관문을 열었다. “오빠, 견뎌. 이게 실거주 투자의 현실이야.” 아내는 평소처럼 장난스럽게 말했으나 나는 그 말을 묵직이 받아들였는데 싱글일 때부터 정석대로 자산을 늘려 온 아내의 투자 이력을 알아서였다. 현관문을 잽싸게 닫은 나는 만삭이 된 아내의 배를 쓰다듬으면서 “충성충성”이라고 촐싹댔다. 사실 아이가 뱃속에 있을 때만 해도 실감하지 못했다. 벌레나 쥐가 부르는 본능적인 혐오도 자산 증식이라는 대명제 앞에선 한낱 농담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곰팡이조차 농담일 수 없었다. 집에는 율이가 있었다. 가습기를 끈 나는 전날 벗어 둔 티셔츠를 집어 들었다. 율이가 깨지 않게 까치발로 창문에 다가갔다. 물기를 닦고서 창문을 미세하게 열었다. 서늘한 외풍이 실낱처럼 들어왔다. 재건축 단톡방에 상주하는 어르신들은 아침에 잠깐씩 이렇게 해 두면 곰팡이도 예방하고 아이
- 관리자
- 2025-04-01
흰옷 빨래의 날 안담 오늘은 마지의 기일이니까 흰옷을 모아 빨래를 한다. 마지가 유니폼처럼 자주 입던 크림색 티셔츠도 잊지 않고 꺼내서 빤다. 아마도 처음 살 때는 흰옷이었을 거다. 내가 애용하는 독일 브랜드의 캡슐 세제는 성능이 뛰어나다. 이 티셔츠에서는 마지의 냄새가 사라진 지 오래다. 이제는 나도 마지의 냄새를 잘 떠올릴 수가 없다. 꽤 강한 냄새였는데, 그런 냄새가 잊히기도 한다는 게 신기하다. 가끔 그 냄새를 다시 기억해 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히면, 4년 전 마지와 내가 처음 만났던 장소인 모둠 전집에 간다. 전을 굽는 작업대가 가게 밖으로 툭 튀어나와 있어서 포장 손님도 많은, 반은 노점인 그런 가게. 튀는 기름을 막기 위해 조리대 틈새와 철판 모서리에 은색 호일이 덧대어져 있고, 그럼에도 철판 가장자리나 작업대 위 처마에 쌓이는 기름때를 막을 수는 없다. 조용히 질색하며 지나치는 행인들, 저 시커먼 데서 맛이 나오는가 보다고 농담하는 손님들, 그런 사람들 사이에 섞여 가게에서 흘러나오는 기름 냄새를 맡는다. 이 냄새와 비슷했던 것 같아. 열과 기름과 사람이 합쳐서 내는 냄새. 전혀 아닐 수도 있지만. 적어도 이 냄새와 비슷하다고 생각했던 기억만큼은 선명하다. 내 동거인의 냄새, 홍제천 스리룸의 주방 맞은 편 작은 방의 냄새, 마지의 냄새. 앞으로는 누구와 같이 살 생각이 없다. * 윤석열 나이로 스물아홉이 되던 2021년 겨울, 나는 당근마켓을 통해 홍제역 인근 스리룸의 하우스메이트를 구하고 있었다. 마지는 그 글을 보고 연락한 세 번째 사람이었다. 일반적인 시각에서 좋은 집으로 보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백련산과 홍제천이 코앞이고 인왕산이나 북한산도 비교적 멀지 않다는 점을 제외하면 인프라랄 게 없는 집. 인적 드문 가파른 언덕에 있고 북향이라 볕이 잘 들지는 않으며 어떤 역에서든 멀었다. 낡은 건물인데 월세는 70만 원으로 센 편이었다. 월세를 제외하면 그 집의 여러 요소는 내게는 장점이었다. 크고 힘 좋은 내 개와 오를 산이 있고 사람은 만나기 힘들다는 게. 스리룸에 방들이 크고, 연식이 오래된 집의 컨디션을 의식한 집주인이 못 박기를 포함해 여러 변화를 허용해 준다는 점도 좋았다. 나부터가 담배를 피우기 때문에 흡연자도 좋았다. 내가 대형견과 산다는 사실은 누군가에게는 극단적인 장점이고 누군가에게는 극단적인 단점이었을 테다. 내 개는 순하다 못해 맹한 편이었지만, 글에는 남자나 키 큰 사람에게는 경계심을 보인다고 적었다. SNS로 하메를 구하는 여자에게 피곤한 사람이 얼마나 꼬이는 줄 아냐고 으름장을 놓은 지인이 많았기 때문이다. 지인 소개가 낫지 않냐는 조언도 숱하게 들었지만, 지인의 지인이 길거리에 다니는 아무개보다 더 좋은 사람일 거라는 전제에 동의가 잘 안되었거니와, 하우스메이트가 맘에 안 들었을 때 소개해 준 지인의 체면까지 고려해야 하는 상황도 만들고 싶지 않았다. 나의 구인 글은 짧아졌다 길어졌다를 반복하다가 이런 형태가 되었다. ‘홍제역 인근 스리룸 하메 구합니
- 관리자
- 2025-04-01
저번까지 읽은 이후로 이어보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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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건
잘 읽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