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추 동물 이야기
- 작성일 2009-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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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추 동물 이야기 |
김주희
1. 허공에 초식 동물의 눈동자를 그린 후에야
방금 허공에 손가락으로 원을 그렸어. 살짝 처진 눈썹, 초식 동물처럼 순해 보이는 검고 커다란 눈동자.
이곳의 공기는 여전히 후덥지근하고 무기력해. 이름 모를 저 나무도 평범한 나뭇잎들을 몸에 단 채 나흘 전이나 지금이나 무표정하게 서 있어. 옆구리 찌그러진 스테인리스 휴지통도 이 도서관 후미진 곳에 그대로 있고.
처음 이 벤치에 앉은 건 올해 오월 팔일 저녁이었어. 도서관 정문 앞까지 왔다가 뒤돌아 어둠을 툭툭 차며 건물 뒤편으로 왔지. 낡은 벤치가 어둠 속에 덩그러니 놓여 있었는데, 왜 내 눈에는 그게 내 자리처럼 보였을까. 그 후 열람실에서 문제집을 풀다가도 여기로 왔어. 오래 앉아 있다 보면 누군가 이리로 올 것 같았어. 그 대상이 전혀 떠오르지 않는데도 말이지. 도서관 열람실에 드나드는 사람들 중에 버려진 듯한, 이 낡은 벤치를 찾는 사람은 나뿐인지도 몰라. 올 때마다 이 벤치 위에는 옅은 어둠 아니면 공기가 앉아 있으니까. 오늘 나는 무엇에 이끌리듯 아니, 올 곳이 여기뿐이라는 듯 나흘 만에 다시 이 벤치로 왔어. 허공에 초식 동물의 눈동자를 그린 후에야 알 것 같아. 왜 내가 열람실에 가방을 내려놓자마자 터덜터덜 걸어와, 여기 이렇게 앉아 있는지.
나흘 전 무더위는 굉장했어. 가만히 앉아 있어도 이마에 땀방울이 맺힐 정도였으니까. 타닥타닥. 나무 타들어 가는 소리가 나고 폭발음이 허공을 울리더니 불기둥이 치솟는 뜨거운 광경. 그런 장면을 머릿속에 그려 보고 있어서, 더 여름의 중심부로 들어온 듯 숨이 막혔는지도 몰라. 대학 졸업반이던 6년 전 여름부터였을 거야. 눈앞에서 불길이 타오르는 장면이 떠오르는 건. 현실에서는 일어나기 힘든 일이지. 적어도 내가 아는 나는, 주변을 태울 사람은 아니거든. 그런 생각에 빠질 때는, 인화 물질을 가지고 있는 사람뿐만 아니라 그 누구도 내 옆에 없으니까. 그날 내 맥박이 빨라지면서 불길은 점점 사그라지고 어느 순간 나는 멍하니 초록 나뭇잎들을 응시하고 있었어. 그러다 초록 잎사귀들이 뭉개져서 푸른 허공이 시야에 들어왔고 어느 순간 초록 잎사귀들이 사르륵거렸던 듯해. 여리고 미세한 그 울림은 바로 허공에 녹아 버려서 내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그 소리가 어디에서 나온 것인지 알 수 없었어. 시선을 조금씩 옆으로 옮겼더니 단독 주택 옥상에서 움츠린 듯 꼼짝없이 빨랫줄에 걸려 있는 하얀 와이셔츠 몇 벌이 보였어. 그러다 어느 사이 허공의 중심을 보고 있었던 것 같아. 그저 공백만 보이는 거야. 그걸 보는 사람은 무감각한 상태가 되는 거지. 누가 와서 옆에 앉아도 그 인기척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배고프다.”
그 소리에 다시 정신을 차릴 수 있었어. 평범한 젊은 남자의 목소리였지. 손가락 두 뼘 정도 되는 거리에 비니를 쓴 남자가 앉아 있었어. 도서관에 있던 사람인가. 청바지에 흰 티셔츠, 운동화. 옷차림만 봤을 때는 열람실에서 흔히 마주치는 그런 남자였어. 그런 부류가 아니라고 느낀 건 눈동자 때문이었어. 유난히 크고 검어서 악의 없는 순한 동물처럼 보였지. 남자는 그 어떤 경계심도 없이, 아주 오래전부터 아는 사이라는 듯 나를 보고 있었어. 처음 보는 사람을 그렇게 바라보다니. 한편으로는 무모하리만큼 당당해 보였어.
“배고파.”
남자가 눈을 씀벅이며 말했어. 그제야 나는 남자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안았어. 나도 모르게 벤치에 쓰러져 잠이 든 걸까. 한여름 불길을 상상하게 된 후로 낮에도 수면을 충분히 취하지 못한 듯 피로했어. 이 벤치에서 가수면 상태에 빠진 적도 있었지. 그래서 남자가 배고프다고 했을 때 처음에는 그런 상황에 처한 줄 알았어.
“그러면 나랑 같이 밥 먹을래요?”
누군가에게 해본 적이 없거나, 한 지 오래돼서 기억나지 않는 말이 조심스레 내 입에서 나왔어. 한편으로는 오래전부터 준비된 말처럼 느껴졌지. 평소 나라면 늦은 오후에 음식을 먹으면 잠자기 전까지는 식사를 안 해. 오히려 집에 들어와 먹은 것을 게워 낼 때도 있지. 그런데 묘하게도 남자가 밥을 먹자고 했을 때는 식욕이 생겼어.
나는 가방을 챙겨 올 테니, 도서관 정문 앞에서 만나자고 했어. 그러자 남자는 도서관 정문이 어디냐고 되묻는 거야. 그에게 정문으로 가는 길을 어린아이에게 설명하듯 차근차근 알려 주었어. 어쨌든 그는 나한테 해가 되는 행동을 할 사람 같지는 않았어. 그러니 밥 한 끼 정도는 먹어도 괜찮다고 판단했던 거고. 가방을 찾아 밖으로 나오는 동안 별생각이 다 들었어. 벤치에서 꿈을 꾸는 건 아닐까. 나도 모르게 깊은 잠에 빠졌나 봐. 현실이라면, 그는 거기에 없을지도 몰라. 집으로 가 버렸겠지. 도서관에서 가방을 찾아 밖으로 나오는 동안 머리가 어질어질하고 속이 메스꺼웠어. 그리고 참 묘하게 가슴도 두근거렸지.
그는 정문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어. 그의 뒷모습을 본 순간 나는 안도했지. 살인을 저질렀는데 결국 꿈이었던 것처럼 허무함이 깃든 안도감. 하지만 나는 그런 것을 내색하지 않으려고 했어. 그와 나는 한여름 오후 돌발적으로 만나, 같이 밥 먹는 사이일 뿐이니까.
“배고파. 여기가 텅 비어 있다.”
그는 아이가 투정하듯 인상 쓰며 복부를 가리켰어. 정확히는 손끝으로 가슴에서 복부까지 원을 그렸지. 그리고 배고플 때 나는 소리가 아주 재미있다는 듯 자기 배를 콕콕 찔렀어. 그에게 어떤 음식을 좋아하냐고 묻자 내가 먹는 거라면 다 좋다는 말이 건너왔어.
“몇 살이에요?”
식사하고 헤어질 사이에 너무 사적인 질문을 하는 건 아닐까. 나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지. 그가 등장하지 않았다면 그런 표정을 지을 일이 없었을 거야. 나흘 전만 해도 나는 세상 밖에 있는 사람처럼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었어.
“네 나이와 같다.”
바로 그때였어. 곁눈질하며 걷던 내가 자리에 멈춰선 것은. 차들이 왕복 1차선 도로를 내달리는 소리가 비현실적으로 크게 들려왔어. 어느 사이에 내가 음 소거해 버렸던 스피커가 작동해 버린 것처럼. 현기증을 느끼며 바로 옆에 서 있는 그를 천천히 올려다보았어. 가만 보니 그는 다른 사람들과 어딘지 모르게 다르다면 달랐어. 경계심이 없는 큰 눈동자와 매끈하고 깨끗한 피부. 깔끔하다고만 생각했던 첫인상이 다시 보니 새것처럼 보이는 거야. 어디선가 지금 모습 그대로 갓 세상에 등장한 사람. 사실, 남자의 입에서 나와 동갑, 스물아홉 살이라는 말을 듣기 전까지만 해도 나는 남자를 평범하게 봤어. 지능이 낮거나 어떤 정신적 충격을 받아 머리가 어떻게 된 사람 정도로, 어느 쪽으로 생각하든 정신이 이상한 사람이었지. 그리고 그런 사람은 의외로 세상에 많잖아.
“혹시 나 알아요?”
2. 내가, 나도 모르게 허공을 보며 누군가를 불렀다는 게
그는 나를 안다고 했어. 천진하게 고개를 끄덕였지. 반면 나는, 지금까지 내 이야기를 들은 당신이라면 짐작했겠지만, 그를 전혀 몰랐어. 하지만 나를 어떻게 아느냐고 묻지는 않았지. 불길을 상상하고 자주 피로감을 느낀 후부터 외부 자극에 무감각해졌던 것 같아. 보통 사람들이 인간이라면 저지를 수 없다고 여기는 끔찍한 범죄들. 당신도 포털 사이트에서 그런 내용이 요약된 헤드라인을 보면 무덤덤해? 오히려 인간이니까, 그런 범죄가 가능한 거지. 그의 이상한 면에도 나는 빠른 속도로 무심해졌어. 진입로를 내려와서 남자와 나는 보도블록 위를 걸어갔어. 횡단보도를 바로 건너면 분식집이 있었지만 계속 걸었지. 걷다가 식당이든, 패스트푸드점이든, 음식점이 나오면 들어가려고 했어. 걷는 것도 식사 코스에 포함된 것처럼 말이지. 두 정거장 거리를 걷고 나서야 나는 평범해 보이는 식당 앞에 섰지. 간판도 기억나지 않는 그런 식당 말이야. 그때 그와 내가 식당에 들어가 식사를 할 수 있었더라면 어땠을까. 이 이야기는 시작될 수 없었을 거야. 우리가 밥만 먹고 헤어졌더라면.
“지갑을 두고 왔어. 식당에 못 들어가.”
그는 내 말을 귓등으로 넘겨 버렸는지 울상을 지은 채 그 자리에 서 있었지. 왜 내가 정신과 육체가 부조화를 이룬 이상한 남자의 허기를 채워 주어야 하지. 그렇다고 그를 거기 내버려 둘 수도 없는 노릇이었어. 뜨뜻미지근한 공기가 머물러 있는 그 거리에서, 눈동자 때문인지 남자가 초식 동물처럼 보였어. 밀폐된 공간에서라면 인간보다 초식 동물과 함께 있는 게 더 안전하잖아. 인간, 그중에서도 남자라면 나한테 무슨 짓을 할지 알 수 없는 거니까. 하지만 그는 초식 동물의 분위기를 가지고 있어서인지 음흉해 보이지 않았어. 그에게 집으로 가자고 한 건, 그래서였던 것 같아.
도서관에서 돌아와 현관문을 열면 열두 평 임대 아파트에는 어둠이 자욱하게 퍼져 있곤 했어. 현관 자동 점멸등이 고장 났거든. 별로 불편하지도 않았고, 굳이 낯선 사람을 집에 들여서 고치기는 더욱 싫어서 내버려 둔 거야. 내가 낯선 사람을 집에 데려오다니. 가스 검침원 아주머니 정도가 유일하게 집에 들이는 사람일 거야. 그 경우에도 가스공사에 전화로 확인한 후 문을 열어 주지. 그날은 문을 열자 집 안에 켜켜이 쌓여 있던 어둠이 품으로 와락 쏟아져 내리는 듯한 느낌이었어. 그는 우리 집에 오는 것을 전혀 낯설어하지 않았어. 신발을 벗기 직전 머뭇거리긴 했는데, 생각해 보니 집에 들어올 때는 신발을 벗는다는 것을 몰랐던 것 같아.
집 안에는 나 혼자 제대로 차려먹을 만한 음식도 없었어. 컴퓨터 앞에서 인터넷을 하며 간단하게 식사를 해결했지. 나한테 식사라는 건 허기를 없애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거든. 등 뒤로 들려오는 그의 발소리는 묵직했어. 집 안에서 다른 사람의 인기척이 느껴지다니. 그래서 더 그의 발소리가 무게감 있게 들렸는지도 모르지.
“컵라면밖에 없네. 이거라도 먹을래?”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가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어. 그가, 정확히는 그의 몸 일부가 짧은 순간이었지만 내 감각을 건드린 거야. 그래, 그건 참으로 오랜만에 느껴지는 자극이었어. 얼굴이나 몸피만 보면 영락없는 사람이지만 발은 짐승의 그것과 다를 바 없었어. 그의 발가락은 두 개였어. 대학생 때 서울 대공원에서 무심히 보았던 그 소목과의 초식 동물처럼. 그 이상한 발을 보고 나는 순간적으로 당황했어. 그런 발을 가진 사람을 처음 보았으니까. 그의 왼발이 오른쪽 발등을 비빌 때야 나는 가까스로 눈꺼풀을 들어 올릴 수 있었지. 그리고 처음으로 초조해하고 불안해하는 그의 눈동자와 마주쳤어. 당신이라면 어쩌겠어? 당신한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잖아. 지금 당신이 혼자 멍하니 있다면, 어디에선가 이상하지만 위험하지는 않은 누군가 그리로 찾아오는 중인지도 모르니까.
초식 동물처럼 크고 순한 그의 눈동자를 보았을 때 같이 식사를 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어. 초식 동물의 발을 가졌다고 해서, 라면 먹는 데 지장이 있는 건 아니잖아. 어차피 헤어질 사이니까, 더 이상 그의 이상한 발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은 거야. 아니, 그런 걸 캐묻는다는 게 그냥 귀찮았는지도 몰라. 그를 내 작은방으로 데려왔어. 중고 텔레비전이 우리를 무심히 지켜보고 있었지. 오랜만에 텔레비전을 틀었더니 앵커가 실종 어린이 토막 살해 사건을 보도하고 있었지. 범인은 동네에 사는 서른아홉 살 남자로 특별한 직업 없이……. 소음처럼 들려서 바로 꺼 버렸어. 동물의 발을 가지고 있어서 그가 더 위험하지 않은 사람처럼 보였지. 솔직히 그런 생각을 했는지 잘 모르겠어. 확실한 건, 그와 내 방에서 라면을 먹는 동안 신변의 위협은 느끼지 않았다는 거야. 내가 자신의 발에 대해 언급하지 않아서인지 그는 부풀어 오르는 빵처럼 기운을 회복하고 내게 소소한 질문을 던졌어. 식물보다 더 표정이 없다면서 왜 그런 표정을 짓고 있느냐고 물었던 게 기억나. 나는 딱히 웃을 일도 울 일도 없어서라고 대답했어.
“저기는 왜 닫혀 있어? 들어가도 돼?”
그는 손으로 안방 미닫이문을 가리켰어. 내 입장에서는 뜬금없는 질문이었지. 대학을 졸업한 후 아무도 나한테 그런 질문을 하지 않았으니까.
“부모님이 쓰던 방이거든.”
그러자 그는 그게 닫아 놓은 것과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물었어. 그래서 두 분이 6년 전 같이 돌아가셨고, 방 주인이 들어갈 일 없으니 닫아 놓은 거라고 말해 줬지.
“같이?”
“응. 그렇게 됐어. 들어가 봐도 돼.”
그는 그쪽으로 가더니 미닫이문을 열고 문지방 안으로 그 이상한 발을 들이밀었어. 안방 베란다 문을 열고 어두운 허공 속을 응시하듯 가만히 서 있었지. 그러다 뒤돌아 나를 보고는 그 방이 마음에 든다면서 거기서 자고 싶다는 거야. 정말 순수하게 잠만 자고 싶어서 그런 말을 하는 것처럼 보이긴 했지. 하지만 나는 선뜻 그러라고 대답하지 못했어. 그런 상황에서 내가 어떤 대처를 하던 사람이었는지 알 수 없었어. 다행히 마주 보고 있자니, 그가 그림자처럼 자연스럽게 느껴졌어. 무신경하게 대해도 되는 그런 대상 말이야. 9시가 조금 안 된 시각이었는데, 그는 졸음이 밀려오는지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떴어. 그 덕분에 나는 참 오랜만에 안방에 이부자리를 폈어.
“여기서 자면 돼. 난 들어오지 않을 테니까. 편하게 자. 여기가 싫으면 주방 옆에서 자. 대신 옷은 꼭 입어.”
그는 곧 이불 속으로 들어가더니 태아처럼 몸을 웅크렸지. 아주 먼 곳에서 온 듯 피곤해 보였어. 미닫이문을 닫아 주는데, 그런 생각이 들었어. 내일 돌려보낼 때는 라면이 아닌 밥을 같이 먹어야겠다고. 그는 씻고 나와, 안방 문을 가리키기 전 졸린 눈으로 아직도 속이 차지 않았다고 말했거든.
작은방에서 나는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였지. 부모님 사망신고를 마치고 돌아온 날 새벽처럼. 불면은 그 이후에도 계속 이어져서 가만히 방 안에 누워 있으면, 안방에서 그 무엇이 수군거리는 듯했어. 느낌일 뿐이어서 더 불편했지. 부모님과의 추억 같은 것을 떠올려 보려고도 했으나 그럴수록 생각나는 게 없어서 더 잠이 안 왔지. 결국 부모님의 물건을 가급적이면 버리기로 했어. 그래봤자 거의 옷가지뿐이었지만. 하지만 만일 누군가 보관해 놓으라고 말했다면 버리지 않았을 수도 있어. 아무튼 그 후 심한 불면에 시달리지는 않았는데, 그가 온 첫날은 좀처럼 잠을 잘 수 없었어. 주방으로 나와 물 한 잔을 마시고 침묵하듯 닫힌 안방을 보았어. 정말 저 안에 이상한 발을 가진 남자가 있을까. 조심스럽게 문을 열어 보았더니, 이불 밖으로 비니를 쓴 그의 머리통이 보였어. 나는 옆에 누워 그의 얼굴을 보았지. 조심스럽게 아까 하다 만 이야기를 꺼내 놓고 싶어졌어.
“부모님은 같은 날 죽었어. 백 명 넘는 사람들도 모두 한날에 같이. 6년 전에 그런 일이 일어났어.”
나는 혀아랫소리로 말한 후 베란다로 나왔지. 밤하늘에는 인공위성 몇 개가 큐빅처럼 반짝이고 있었어. 그렇게 오랜만에 밤하늘을 보다가 나도 모르게 그와 방에서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어. 이상한 발을 가진 사람이든 아니든 누군가 내 옆에서 라면을 먹는다는 게 생소해서, 그에게 물었지.
“네가 왜 내 옆에 있어.”
“나를 불렀으니까.”
“누가.”
그는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켰어. 첫날 그에게서 들은 말 중 가장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어. 지금까지 내 이야기를 들은 당신이라면 알겠지만 나는 그를 부른 적이 없거든.
“어떤 근거로 내가 너를 불렀다는 거야.”
‘근거’라는 말이 그에게 조금 어렵게 들렸던 것 같아. 그는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내가 자기를 불렀다고만 말했어. 그래서 내 부름을 듣고 거기에서 빠져나왔다고. 나는 더 묻지 않았어. 내가, 나도 모르게 허공을 보며 누군가를 불렀다는 게 말이 되지 않잖아. 첫날 그가 암호처럼 툭툭 내뱉은 말들을 나는 흘려들었어.
3. 타인의 이야기를 되새겨 본다는 건
라마의 발을 가진 남자, 초식 동물의 발, 발가락이 두 개인 남자. 그에 대한 정보를 얻으려고 검색을 해봤지.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내가 대학생 시절 서울 대공원에서 본 그 초식 동물은 바로 라마였어. 그러다 아프리카 짐바브웨의 깊은 밀림 지대에 산다는 바도마 부족에 대한 기사를 봤어. 타조 인간, 타조 발가락 부족이라고도 불리는 이 부족은 발가락이 두 개인데 문명사회와 고립된 곳에서 살고 있다고 했어. 그런 발가락을 갖게 된 것은 염색체 이상 때문이라는 거야. 사진에 찍힌 흑인 남자는 무표정한 얼굴로 흙더미 위에 앉아 있었지. 발가락만 뺀다면 평범한 사람이었어. 가운데 발가락 세 개가 없는 V자형 발가락. 기사에는 V자형 발가락 덕분에 나무 타기를 잘할 수 있다고 나와 있었지. 우리 집 안방에서 잠들어 있는 그도 나무 타기를 잘할까. 언뜻 봐도 그의 발가락과 타조 인간의 그것은 달랐어. 그의 것은 라마 같은 초식 동물의 발가락과 더 비슷했거든. 타조 인간과 그하고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어 보였어. 인터넷 검색이 쉬워 보여도, 내 입장에서는 그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알아본 거야.
혼자 살게 된 후 물살에 떠밀려 세상 밖으로 밀려난 것처럼 사람들과 거리가 생겼어. 내키지 않으면 집에 있지만 거의 매일 도서관에 나가는 게 내 일상이지. 혼잣말조차 안 하는 날은, 하루 종일 말없이 지낼 때도 있어. 그런데 그가 온 다음날 자연스럽게 다른 하루가 펼쳐졌지. 우선 오전에 그하고 나는 마트에 들러 장을 봤어. 그는 마트 구경을 처음 하는 것처럼 신기해했어. 카트를 끌고 진열대 사이를 오가는 동작에 생기가 묻어 있었지. 당신이라면 그날 밥만 먹고 헤어질 사람과 어떤 음식을 먹겠어? 다시는 안 볼 그 사람을 위해서, 상대방이 좋아하는 음식 정도는 같이 먹어 줄 수 있잖아. 그래서 아파트로 돌아와 그하고 같이 김밥을 만들어 먹었어. 그는 시식한 것들 중에 김밥이 가장 맛있다고 했거든. 이 세상 어딘가로 초식 동물의 발을 가진 남자를 소풍 보내는 것 같기도 했어. 기억이 나. 혼자 있을 때 김밥을 말면 기분이 좋아질 거라고 그가 나한테 말했던 게. 뭐, 그런 말도 나는 흘려들으면서 겨우 졸음을 참고 있었어. 그가 먹을 김밥을 싸 놓고 안방에 들어가서 잠을 잤는데, 이런 내 행동을 보더라도 나는 그를 경계하지 않았어. 깨고 보니 내 옆에 그가 누워 있었지. 그와 내가 부모가 사리진 12평 임대 아파트에서 어쨌든 살아가는 이란성 쌍둥이처럼 보였어. 그래서였나. 귀를 덮은 비니가 답답해 보여서 벗겨 주고 싶었어. 조심스레 비니를 벗겨 주다가 숨이 멎는 줄 알았어. 그러니까, 그걸 귀라고 불러야 할지, 그냥 뿔이라고 해야 할지 지금도 모르겠어. 내가 보기에는 뿔인데 나중에 확인해 본 결과 그 뿔이 귀의 역할을 하는 건 맞아. 그는 두 손으로 거기를 막고 있으면 소리가 잘 안 들린다고 했거든. 아무튼 귀가 있어야 할 자리에 양의 뿔 두 개가 달려 있었어. 양의 뿔처럼 소용돌이 모양으로 굽어 있는 귀. 내 눈에 양 뿔처럼 보였어. 양 뿔을 그리라고 하면 내가 손 가는 대로 그렸을 듯한 모양. 잠시 후 그가 어둠 속에서 눈꺼풀을 천천히 들어 올려서 어딘지 모르게 슬퍼 보이는 눈으로 나를 가만히 보았어. 내가 먼저 무슨 말이라도 해야 했어.
“너는 양인가 봐.”
“그럼 너도 양이야? 나는 네 심정을 이해하는데.”
“나는 사람이지. 봐, 뿔이 아니라 귀가 있잖아.”
그러자 그가 양에 대해 말해 달라고 하는 거야. 평소 내가 양을 어떻게 생각해 왔는지. 혹시 싫어하지는 않는지 말이야. 그가 진지한 표정으로 물으니, 반사적으로 양에 대해 생각은 해봤지. 그러고 보니 나는 살아 있는 양을 본 적이 없어. 속으로 양을 계속 발음해 보았어. 그러자 그림이나 영상으로 무심히 본 듯한 하얀 동물 양이 어느 순간 내 머릿속에서 정체불명의 단어로 인식되기 시작했어. 양의 개념이 머릿속에서 붕괴된 거야. 왜 그를 양이라고 불렀는지조차 알 수 없게 되어 버렸어. 그가 양 뿔 모양의 귀를 가지고 있다는 게 그리 이상해 보이지도 않았지.
“그러면 널 뭐라고 불러야 해?”
“그런 거 처음부터 없었어. 네가 불러 주지 않았잖아.”
그는 왜 자기한테 그런 질문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듯 이렇게 말하는 거야. 하긴 그는 첫날부터 내가 자기를 불렀다고 했지. 그 말을 진지하게 믿지 않았지만 터무니없다고도 생각하지 않았어. 진지한 농담 정도로 여겼던 것 같아.
“양 씨라고 부를까. 사람을 부르는 말이기도 하니까.”
그는 두 눈을 천천히 감았다 떴는데, 기분이 괜찮은 듯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 있었지. 그러더니 다시 시무룩해져서 한숨을 작게 내쉬었어.
“사람들은 나를 싫어해. 보기만 해도 소리 지르지. 알아. 사람들과 내가 다르게 생겼다는 걸.”
나는 아프리카에 사는 타조 발가락 부족 이야기를 해줬어. 그는 나 다음으로 양 뿔과 동물의 발을 보여 주고 싶은 사람이 바로 타조 인간이라고 했지. 그날 밤 그가 나지막하게 말하기를 처음 세상에 왔을 때 여자가 자기를 보고 비명을 질렀다고 했어. 주택가 인적 없는 어두운 골목길에 한 남자가 서 있다고 상상해 봐. 초식 동물의 발을 하고 양의 뿔을 달고 있는 남자. 누구라도 놀라겠지. 그런데 비명의 원인을 제공한 그도 여자의 반응에 놀라서 허공으로 숨어 버렸다고 해. 거기에서 가만 보니, 자기와 사람들이 다른 건 귀와 발가락이라는 걸 알았고, 허공 속에 숨어서 비니와 운동화를 훔쳤다고 했어. 그리고 허공의 길을 따라서 나를 찾아온 거라고. 다행히도 내가 허공의 문을 바라보고 있어서 쉽게 찾을 수 있었다고 했어. 그런데 벤치에 앉아 나를 본 순간부터 허공의 문이 닫혔다고 하니, 이건 뭐 사실 여부가 중요하지 않은 이야기였지.
그에게는 신체적 특이함 말고도 다른 특징이 하나 있어. 그걸 어렴풋하게 알게 된 건 바로 셋째 날이었어.
“6년 전 그렇게 많이 사람들이 어떻게 같은 날 죽었어? 큰 배가 뒤집혀서? 전쟁?”
그는 내가 첫째 날 밤에 한 이야기를 들었다고 했어. 그 이야기를 하루 동안 곰곰 생각해 보는 중이라고 했어. 당신은, 주변에 당신이 한 말을 하루 동안 생각해 주는 사람이 있어? 나는 없었어. 바로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어. 양의 뿔이나 짐승의 발 같은 건 그때 내가 당황했던 거에 비하면 별것 아니었지.
“지하철 객차 안에 불이 나면 그렇게 돼. 사람들이 탄 열차가 뼈대만 남고 타 버린 거지. 거기에 부모님이 있었던 거고.”
그가 다가와 두 손으로 내 어깨를 지그시 눌러 주었을 때 나는 반사적으로 움찔 놀랐어. 호의라고 해도 타인이 내 몸을 만지는 게 익숙하지 않았거든. 그는 저녁에도 나를 위로해 주었어. 이야기를 곱씹어 보니 내 심정이 전해진다는 거야. 타인의 이야기를 자기 일처럼 진지하게 듣는 사람은 별로 없잖아. 그런데 그가 바로 그 얼마 안 되는 사람이었어.
나는 부모님의 사고를 주변 사람들에게 알리지 않았어. 주변 사람이라니. 연락이 뜸한 고등학교 동창들에게 일일이 전화를 걸어 말할 수 없잖아. 그리고 수업이 끝나면 아르바이트를 하는 게 내 대학 생활이었어. 속말을 할 만한 사람들은 없었지. 하지만 누구라도 내게 잘 지내냐고 물어봤다면 말했을 거야. 그 후 사건 현장에도 가지 않았고, 인터넷에 올라온 자료도 본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내 머릿속에는 사진처럼 불길이 치솟는 장면이 남아 있었지. 지금 돌이켜보니 나는 무의식중에 늘 그 시간을 보고 있었던 것 같아.
당신은 이미 짐작했겠지만, 나는 그를 돌려보내지 않았어. 같이 있자는 말도 안 했지. 그냥 내버려 둔 거야. 그는 내가 하는 이야기를 좋아했어. 내 마음속에 있는 이야기가 듣고 싶다고 했어. 이야기들을 곱씹어 보면 내 심정이 헤아려지지만, 눈으로는 내 마음을 꿰뚫어 보지 못한다고 하면서. 나는 마음속에 담아 놓은 이야기 같은 거 없다고 말했어. 그리고 관계가 끊긴 옛 친구, 후배와 관계를 가졌던 처음 사귄 남자친구 등 오래된 이야기들을 그에게 들려주었지. 그는 그런 이야기도 진지하게 들으며 내 심정을 헤아려 보는 것 같았어.
타인의 이야기를 되새겨 본다는 건 어떤 느낌일까. 곰곰 생각해 보면 그는 일상어보다 감정이 들어간 말에 더 귀를 기울였어. 마치 말 속에 녹아 있는 감정을 흡입하겠다는 듯. 넷째 날 밤, 나는 그의 옆에 누워서 셋째 날 못 다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어. 그는 내 눈을 응시하며 내 말 하나하나를 곱씹듯 두 눈을 천천히 깜빡였지.
“엄마는 관절염이 심해져서 식당 일을 관뒀어. 아버지는 허리가 안 좋아져 매일 인력시장에 나갈 수 없었고. 나는 시간을 쪼개서 아르바이트를 했어. 부모님이 불길 속에 있을 때도 일하는 중이었어. 합동 영결식을 치른 후에도 일을 했지. 그런데 졸업을 한 후 아침에 일어나는 게 힘들어졌어. 부모님처럼 어디가 아팠던 것도 아니야. 그냥, 나도 모르는 사이 몸에서 기운이 서서히 빠져나간 것 같았어.”
말없이 누워 있지 않으면 느릿느릿 움직이던 시절이 있었어. 식물처럼 조용히 지내며 회사에 이력서를 넣곤 하던. 나를 채용할 것 같지 않은 회사에 원서를 넣을까, 말까 고민하다가 마감일에 맞추어 이메일로 원서를 접수했지. 수십 개의 원서를 넣었지만 서류 전형에서 다 미끄러졌어. 나는 허공의 길로 다녀 본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세상 밖에 있었어. 국가고시 준비를 시작해 수험생 신분을 얻었을 때 그나마 세상에 둥둥 떠 있는 기분을 느꼈지. 그리고 그 공중에는 나 말고도 수십 명의 사람들이 비눗방울처럼 가볍고 아슬아슬하게 떠다니고 있어서, 소속감까지는 아니어도 다른 사람들 속에 내가 있다고 희미하게나마 여길 수 있었지. 나는 이런 이야기들을 무덤덤한 목소리로 말했어. 그는 내 이야기 첫맛이 건조하다고 했지. 곱씹어 보면 그런 첫맛을 가진 이야기는 대부분 외로운 것들이라고.
그의 마음은 서너 개가 아닐까. 내가 한 이야기를 다른 마음의 방에 쌓아 놓았다가 나중에 되새김질할 수 있도록. 사실 여부는 확인할 수 없어. 그의 말을 들은 후 자연스럽게 떠오른 생각일 뿐이야. 어쨌든 나한테 그는 반추 동물의 특징을 가진 사람 정도로 보였어. 그가 말하기를, 내 이야기를 들으면 속이 채워지는 느낌이라고 했어. 거기에서도 내가 한 이야기를 계속 곱씹으며 지냈다고. 그러다 보면 나중에 이야기는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어. 하지만 이야기마다 스며있던 감정 같은 건 떠올릴 수 있다고 했지. 다시 말하면 그는 내가 오래전 자기한테 했다는 말을 잊어버린 거지. 그런 확인할 수 없는 이야기에 나는 반응하지 않았어. 어젯밤만 해도 그와 나 사이에 별다른 문제는 없었던 거야.
4. 다시, 허공의 문을 여는 이야기
그러다 오늘 새벽 나한테 문제가 발생했지. 나는 그가 잠든 모습을 보다가 옆에서 잠이 들었어. 그러다 문득 깨고 보니 푸른 새벽이 방 안에 퍼져 있었지. 분명 우리 집인데, 낯선 곳에서 눈을 뜬 것처럼 가슴이 먹먹했어. 내 안에서 잠자던 무엇이 깨어난 것 같기도 하고, 모르겠어. 몇 년 동안 느껴 보지 못한 그런 감정이 내 마음에 가득 차 있었어. 아파트 복도로 나오자 푸른 허공이 펼쳐져 있었지. 허공에 시선을 맞추자 눈물이 무기력하게 흘러내렸어. 지금도 그 이유를 모르겠어. 나는 아파트 복도에서 검푸른 허공을 보며 소리 없이 울었어. 그럴수록 내 마음속에 딱딱하게 굳어 있던 그 무엇이 녹아내리는 것 같기도 했어. 그러다 저 안에 그가 있다는 사실이 문득 슬프게 느껴지는 거야. 그라면 내 상태를 눈치 채고 이리로 나와야 하는 게 아닌가. 다른 사람에게 기대를 하고 있다니. 그런 마음을 내가 품고 있다는 게 너무 낯설었어.
잠자는 그의 옆에 가만히 누워 있었을 때는 눈물이 말라 있었지. 그가 안방에 잠들어 있는 것이 자연스러워 보였어. 기껏해야 나흘을 함께 지냈을 뿐인데. 그는 그 기간 동안 마트나 공원에 외출할 때는 다른 사람이 놀라지 않게 비니를 꾹 눌러썼어. 식사를 한 후에 나처럼 말을 잘하기 위해서라며 드라마도 보았어. 둘째 날 낮잠에서 깨어나 나한테 책을 읽어 달라고 한 걸 보면 그는 문맹일 수도 있어. 이건 거의 확실한데 그는 꼼꼼하고 깔끔한 편이야. 셋째 날 오후에 오래된 진공청소기 사용법을 알려 줬더니, 먼지 흡수가 잘 안 된다며 구석구석 비질을 하고 물걸레질을 했거든. 생각해 보니 그는 내 행동을 지켜보았다가 스스로 터득해 나가는 게 많았어.
앞으로 이렇게 살 수 있을까.
나이 들어 경비 일을 하는 그를 떠올려 보았어. 신분증 없는 그가 그런 일을 운 좋게 맡을 수 있을까. 그러자 왠지 미래에는 대단히 운이 좋은 사람들만이 늙어 그런 일을 할 수 있을 것처럼 여겨졌어. 그는 나를 위해 아침부터 저녁까지 수레를 끌고 다니며 폐지를 주울지도 몰라. 하지만 자신이 사회에 소속되지 않은 사람이란 건 실감할 거야. 그가 생물학적인 남자가 아니라면 우리 사이에 아이는 없겠지. 그는 남자와 생김새만 흡사한 생명체인지도 몰라. 언젠가는 더 이상 내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지도 않겠지. 울어 버린 후로 내 머릿속이 복잡해졌어.
네가 있던 곳으로 돌아가.
여러 가지 생각이 얽히고설키어 혼란스러운 가운데, 나는 나지막하게 속삭였어. 밖으로 나오니 아침이 밝아 있었어. 둘째 날 밤에 산책 삼아 그와 같이 왔던 집 근처 공원으로 걸어왔지. 운동하는 사람들이 간간이 보였지만 그들은 풍경과 다를 바 없이 느껴졌어. 공백 같은 공원 속을 나 혼자 타닥타닥 걷는 느낌이었어. 빛을 흡수하려는 듯 하얀 수련들이 연못 위에서 입을 벌리고 있었지. 나는 벤치에 앉아 수련들이 조금씩 천천히 입술을 여는 모습을 바라보았어.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햇살이 물 위로 미끄러지며 물비늘이 반짝거렸을 때 문득 기억이 났어. 그와 함께 왔을 때는 밤이라, 져 버린 수련 위에는 어둠만 퍼져 있었다는 걸. 그는 수련이 핀 모습을 보고 싶다고 했고, 나는 건성으로 다음에는 낮에 오자고 말했어.
그 쉬운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자마자 공원을 빠져나왔어. 오늘 낮이라도 그와 공원으로 와야겠다고 생각했지. 그러자 내 몸을 이루는 원자 같은 것들이 활발하게 움직이는 느낌이었어. 나는 달리기 시작했어. 집 앞에 도착해 숨을 고르며 현관문을 두드렸지만 인기척이 없었어. 열쇠로 문을 열자 그날 저녁처럼 안방 미닫이문은 닫혀 있는 거야. 그 문을 열었더니 허공이 온통 빛으로 일렁이고 있었어. 바닥에는 햇살만이 나른하게 누워 있었고. 그러니까 그는 집 안 어디에도 없었던 거야. 그의 부재를 확인한 후 한동안 멍하니 서 있었어. 이 벤치에 와서도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가만히 있었지. 그러다 허공에 그의 눈동자를 그린 후 무엇이 하고 싶은지 알게 됐어. 그의 부재와 상관없이, 우리가 처음 만난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 아니, 그의 부재로 끝나는 이야기였는지도 몰라. 이 이야기의 결말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지 않았어. 여기서 허공에 시선을 맞추고 속말을 털어놓기 시작하니까, 잊었던 것들도 생각났어. 불에 타 버린 듯 지워졌던 기억이 떠오른 거야.
나는 엉뚱하고 괴팍한 그림을 잘 그리던 아이였어. 뱀의 혀를 가진 소녀, 날개가 달려 있어서 부모가 벽장에 가두어 놓은 아이. 그리고 싶은 대로 그리다 보니 그런 그림이 나왔어. 뭐라고 하는 사람이 없어서 지겨워질 때까지 그렸지. 아침에 나갔다가 밤늦게 들어오는 부모님은 몰랐을 거야. 내가 그림 속 인물에게 말하면 그림 속 인물이 내 입을 통해 대답한다는 걸.
그러던 어느 날 구멍 두 개 뚫린 상자를 그렸을 수도 있어. 당신도 알다시피 그건 어린 왕자에 나오는 양 상자야. 하지만 내가 그린 상자에는 양이 들어 있었어. 생김새는 사람과 같아. 다만 발가락이 두 개로 나뉘어졌고, 말려 있는 뿔 모양의 귀가 있을 뿐이지. 그래서 나중에 비니로 귀를 가리고 운동화를 신으면 사람과 다를 바 없어 보이지. 본인도 자기가 양이라고 생각하지 못할 만큼. 어쨌든 오래전 양의 이미지는 어딘가에 조용히 숨 쉬고 있을 법한 동갑내기 남자아이와 흡사했지. 나는 양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려주었어.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양 그림 같은 것에 무신경해졌지. 기억조차 못할 정도로. 그러니까, 정말 내가 양 그림을 그렸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야. 기억에 없다는 건, 실제로 일어난 일이 아닐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나흘 전, 이 벤치에서 그를 만난 건 사실이야. 이 이야기를 마친 후에 나는 다른 이야기를 시작할 거야. 그건 다시 허공의 문을 여는 이야기지. 어둠이 전염병처럼 퍼지기 전, 허공의 문을 열고 그가 돌아올 수도 있으니까. 당신이 그의 귀와 발을 보고 놀라지 않는다면, 그와 함께 당신 혼자 있는 그곳으로 찾아갈 수도 있어. 하지만 그가 오지 않는다면 그의 존재를 당신에게 증명할 방법은, 이 이야기뿐이지. 그가 버리고 간 파란색 비니와 275밀리미터 흰 운동화를 보여 줄 수는 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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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리자
- 2025-09-01
법의 아름다움 길란 출근 시간이 되기 20분 전에 부속실에 도착했다. 우선 판사님들의 책상을 청소했다. 강 판사님의 책상 위에 올려진 커피잔도 치우고, 정 판사님 책상 위에 있는 사도신경이 새겨진 크리스털도 지문 자국 하나 남지 않게 조심히 닦았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교회에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지만 사도신경의 내용만큼은 다 외워 버렸다. 크리스털을 닦고는 재판에 필요한 자료를 정리해 정 판사님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판사님께서 읽으시기 편하게 글씨 크기를 키워서 출력한 자료도 옆에 두었다. 남들은 나보고 오버한다고들 하지만, 엄마는 이런 게 다 업무 능력이라고 했다. 판사님들께서 안 보는 척하면서 다 보고 있을 거라고. 책상 청소를 마치고 책장과 벽에 걸린 십자가의 먼지를 털어내고 있을 때 정 판사님께서 부속실에 들어오셨다. “권 기사, 좋은 아침이에요.” “안녕하세요 판사님. 좋은 아침입니다. 커피 한 잔 드릴까요?” “그럼 좋지.” 그렇게 말하며 판사님은 책상에 앉으셨다. “매번 고마워요. 따로 뽑기 힘들 텐데.” 판사님이 큰 글씨로 뽑은 자료를 들어 보이셨다. “아니에요. 제가 판사님 업무 도와드리는 거로 돈 받는 거잖아요.” 최대한 사교성을 끌어올려 너스레를 떨었다. “내년에 부서 바뀌면 어떡하나. 권 기사가 아주 내 버릇을 나쁘게 들여놨어.” 판사님이 웃으며 말하셨다. 머신으로 커피를 내리고 있으니 강 판사님과 이 판사님께서도 부속실에 들어오셨다. 강 판사님과 이 판사님께도 인사를 하고 커피를 드렸다. 판사님들께서는 고맙다고 하시고는 안에서 편하게 일하고 있으라고 말해 주셨다. 나는 판사님들께 인사를 하고 부속실 안에 있는 속기실에 들어왔다. 판사님들과 분리된 나만의 공간이었다. 법원에서 일하기 전에는 판사들이 권위적인 사람들일 것이라고 막연히 생각했는데, 실제로 겪어 본 판사님들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행정 업무를 처리하고 점심을 먹고 나니 어느덧 2시가 다 되어 가고 있었다. 나는 속기용 키보드와 공판 자료들을 챙겨 법정에 들어왔다. 대기석에는 사람이 스무 명 정도 앉아 있었다. 속기사석에 앉아 그들을 둘러보았다.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자부터 60대 남성까지 성별과 나이가 다양했다. 눈에 띄는 것은 단연 휠체어에 앉은 사람이었다. 곧 검사분들이 재판장에 들어와 검사석에 자리를 잡았다. 정 판사님께서도 공판 시간에 맞춰 입정하셨다. 재판이 시작되었다. 판사님께서 첫 번째 사건의 번호를 부르고, 피고인의 이름을 부르고, 인적 사항을 확인했다. 검사가 기소의 이유를 밝혔다. 횡령죄였다. 나는 빠르게 손을 움직였다. 법정 안에서 발화되는 모든
- 관리자
- 2025-09-01
모든 공원에는 이름이 있다 조재윤 그녀는 공원에게 이름을 지어주기로 했다. 그녀의 퇴근길이 비탈이 될 즈음, 공원은 나타난다. 사 차선 도로와 맞닿아 있는 공원은 아스팔트의 바깥이 아닌 일부처럼 보인다. 넓지도 좁지도 않은 너비의 내부엔 몇 개의 운동기구와 나무 벤치밖에 없다. 옅은 주황색 가로등 불빛 아래 놓여 있는 나무 벤치에 앉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여느 공원에서든 흔하게 볼 수 있는 흐느적거리며 산책하는 사람 또한 없다. 그녀는 자정에 가까운 퇴근길의 경로를 공원 입구로 바꾼 적이 없다. 공원 뒤편 아파트 단지가 있지만 단지 내에 이미 공원이 존재하기 때문에 이곳을 찾는 주민 또한 없다. 과자 부스러기를 뿌려 주는 주민이 없기 때문에 비둘기 또한 없다. 공원엔 나무도 없다. 나무가 없기 때문에 참새 또한 없다. 그녀는 공원 앞에 놓여 있는 낡은 표지판을 들여다본다. 공원의 이름은, 무슨무슨 혹은 땡땡 공원이다. 무슨무슨 혹은 땡땡에 적혀 있던 글자는 칠이 벗겨져 알아볼 수 없다. 없는 게 너무 많은 공원은 이름 또한 없다. 그녀의 원룸 창문을 열면 또, 공원이 나타난다. 언덕 위 원룸에서 보는 공원은 더 작고 조악해서 뭉쳐 놓은 모래 더미 같다. 그녀는 공원의 이름을 유추해 본다. 본래의 이름. 무슨무슨에 들어갔던 글자들. 하지만 머릿속엔 텅 빈 공원이나 길옆 공원 같은 공원의 민낯을 드러내는 이름만 떠오른다. 그녀는 공원의 이름을 아무것도 없는 공원으로 지어야 할까 생각하다가 그런 이름을 지어 주기엔 공원이 가엾게 느껴져 머릿속에서 지운다. 시간은 밤 열두 시를 향하고 있다. 그녀는 힘겹게 나무 벤치를 비추고 있는 가로등 불빛을 바라보며 락을 떠올린다. 락에게 공원의 이름짓기를 도와달라고 말하고 싶지만 락이 오는 시간은 아직 멀고 멀었다. 오후 한 시. 한낮의 해가 지구의 정수리에 오도카니 설 때, 락은 온다. 따르릉 따르릉 소리를 내며. 따르릉 따르릉. 그녀는 방 안을 울리는 소리를 따라 해본다. 따르릉 따르릉. 전화벨 소리보다는 자전거의 경적 같다고 생각하지만 따르릉만큼 자신의 벨 소리를 정확하게 표현할 단어는 없다고 수긍하며 따르릉 따르릉 비켜나세요, 흥얼거린다. 전화를 받자 락이 인사한다. 안녕. 오늘은 그늘이 많은 날이야. 그녀도 인사한다. 안녕. 오늘은 햇볕이 따뜻한 날이야. 근데 따뜻하다는 말은 여름과 정말 어울리지 않는 말 같아. 락이 웃으며 말한다. 그늘이 필요한 날이었는데 딱 좋네. 서늘해. 그녀가 답한다. 바깥에 까마귀가 많아. 까마귀가 전깃줄에 줄지어 앉아 있으면 글씨 위를 까맣게 그은 밑줄 같아. 락이 잠시 뜸 들이다 말한다. 오늘 점심은 소고기뭇국이었어. 나는 무보다 소고기가 더 많이 들어 있길 바라지만 언제나 무가 더 많아. 그래서 소고기뭇국의 이름은 소고깃국이 아니라 뭇국이지. 락의 말이 끝나자 그녀가 이어 말한다. 해가 따뜻할 땐 이불을 널어야 하는데. 그러고 보면 여름은 언제나 이불을 널어놓기가 좋은
- 관리자
- 2025-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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