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덕
- 작성일 2009-0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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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덕
박준
저녁 찬거리는 있냐는 물음에 조금 머뭇거렸습니다 민박집 주인은 턱으로 언덕 채마밭을 가리킵니다 나는 주인에게 알부민 양철통을 재떨이로 쓰고 계시던데 혹시 간이 안 좋으시냐 물으려다 말고 언덕을 올랐습니다
근처에 분명 고추밭이 있을 것 같은데 언덕에서 헤매입니다. 그 언덕이 튼 살 같은 안개를 부여잡고 있을 때 반팔을 입고 나가기로 한 조금 전을 후회했다고, 언덕이 언덕을 모르고 있을 때 제 몸의 한기를 그 자리에 벗어 두고 떠난 그녀를 생각했다고 말하기로 합니다 오늘 변심한 애인들의 향기는 좋고 나는 살아서 나를 다 속이지 못했다라고도 말하기로 합니다 덧셈을 잘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간밤에는 달게 잤습니다라고 연이어 말할 때 나는 저녁의 억양과 닮아 갑니다
나는 혼잣말을 할 때 자주 뒤를 봅니다 오래 비어 있던 내 손을 보고 있었는지 민박집 주인이 언덕을 올라오고 있었습니다 주인이 가파른 경사에 닿기 전에 서둘러 상추 몇 잎을 따 언덕을 내려갑니다 민박집 방으로 돌아와서는 나도 같이 텅 비어서, 비어 있는 상(像)들이 누군가를 부를 때 늘 짓던 표정들을 따라 해보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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