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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통

  • 작성일 2013-02-01

   십년감수(十年感秀)_시

 

 

  환상통

 

   김신용

 

 

 

 


   새가 앉았다 떠난 자리, 가지가 가늘게 흔들리고 있다

 

   나무도 환상통을 앓는 것일까?
   몸의 수족들 중 어느 한 부분이 떨어져 나간 듯한, 그 상처에서
   끊임없이 통증이 배어나오는 그 환상통,
   살을 꼬집으면 멍이 들 듯 아픈데도, 갑자기 없어져버린 듯한 날

 

   한때,
   지게는, 내 등에 접골된
   뼈였다
   木質의 단단한 이질감으로, 내 몸의 일부가 된
   등뼈,

 

   언젠가
   그 지게를 부수어버렸을 때, 다시는 지지 않겠다고 돌로 내리치고 뒤돌아섰을 때
   내 등은,
   텅 빈 공터처럼 변해 있었다

 

   그 공터에서는 쉬임없이 바람이 불어왔다

 

   그런 상실감일까? 새가 떠난 자리, 가지가 가늘게 떨리는 것은?

 

   허리 굽은 할머니가 재활용 폐품을 담은 리어카를 끌고
   골목길 끝으로 사라진다
   발자국은 없고, 바퀴 자국만 선명한 골목길이 흔들린다

 

   사는 일이, 저렇게 새가 앉았다 떠난 자리라면 얼마나 가벼울까?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는 창 밖,

 

   몸에 붙어 있는 것은 분명 팔과 다리이고, 또 그것은 분명 몸에 붙어 있는데
   사라져버린 듯한 그 상처에서, 끝없이 통증이 스며나오는 것 같은 바람이 지나가고

 

   새가 앉았다 떠난 자리, 가지가 가늘게 흔들리고 있다

 

– 『환상통』(천년의시작, 2005)에 수록

 

 

   추천하며

 

   모든 것들의 존재감은 어쩌면 사라진 다음에야 감각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가령 흔들리는 나뭇가지가 방금 떠나간 새의 흔적을 새기고 있는 것처럼. 그것을 상실감이라고 말해야 할까. 한때 내 삶의 일부였던 것들이 지금은 없다. 그런데 없는 것들이 더욱 아프게 다가온다. 시인은 그 아픔을 ‘환상통’이라고 부른다. 한때 존재했던 것들, 그러나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것들의 목록을 만들어 보는 건 어떨까. 그 목록 속에 우리의 진정한 삶이 숨 쉬고 있는 건 아닐까.

 

(문학평론가_고봉준, 김나영, 김영희, 양경언)

 

 

   《문장웹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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