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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당의 풀을 뽑다

  • 작성일 2019-10-01
  • 조회수 930

마당의 풀을 뽑다

이상국


1908년 옥천에서 태어난 김기림은
도호쿠 대학을 나와 시인이 되었다
바다를 청보리밭으로 알았다거나
무슨 산맥들이 아라비아 옷을 입었다든지 하는
구라파풍의 시를 남기고 북으로 붙들려 갔다
같은 해 양양에서 태어난 나의 아버지는 시골 유생으로
필사본 만세력과 주역을 가지고 담배벌이를 하거나
비오는 날 공회당에서 자아비판을 했고
세필 끄트머리에 침을 발라 가며
나에게 축문 쓰는 법을 가르쳤다
김기림은 북조선에서 인민으로 죽었고
아버지는 수복지구에서 촌부로 생을 마치는 동안
자빠지고 엎어지고 그 사이가 백 년이 넘었다
시인은 넘쳐나고 노래는 많아도
아버지가 부르던 학도가를 나는 지금도 부른다
사회진보 깃대 앞에 개량된 자 임무가 중하다지만
봄은 짧고 나라는 힘이 없다
그때나 지금이나 인민은 죽어나고
그렇게 개고생한 아버지들은 가고
아무것도 아닌 아들만 남았다
북에 있는 김기림의 아들은 뭘 하며 사는지
며칠째 미세먼지가 하늘을 뒤덮은 날
마당의 풀을 뽑다가 이런
쓸데없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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