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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로 무렵

  • 작성일 2024-06-01
  • 조회수 452

   백로 무렵


전영관


   카페 화단의 칸나가 뭉그러지고 

   코스모스가 피었으니 꽃이 꽃을 지우는구나

   삼복 지나 완경(完經)을 겪은 칸나는 검붉었다 

   걸그룹처럼 

   허리를 흔드는 코스모스들을 힐끗거렸다 

   꽃은 천년 고목에서 피어도 어린 요괴다

   철지난 능소화가 

   망하고 컴백한 가수인 양 어린 척했다 

   천수국이 교복 차림의 여고생으로 모여 있었다

   교실은 크고 긴 플라스틱 화분이다

   골목 끝 공원으로 가을 마중 나갔다 

   손사래치고 버둥거려도 올 것은 오더라


   검버섯 피어서 

   눌은밥 같은 노인들이 앉아 있었다

   어머니 생각에 마음도 눌은밥처럼 흥건해졌다

   노인정 앞에 

   푸르게 힘찬 잣나무를 심어 드리고 싶었다 

   청설모도 재롱 피울 것이다 

   목련 만발했던 봄날에

   “내가 몇 번 못 본다고 쟤가 저렇게 애쓰나 봐” 

   하는 소리를 들었다


   주머니에 손 넣는 습성도 줄이기로 했다 

   자폐를 느끼기 때문이다

   올가을엔 갈색 재킷이 어떨까 하며 들춰 보니 

   태반이 검은색이고 빨강이 몇몇이었다

   감정의 극단을 왕복했던 것이다


   오늘 처음 가을 옷을 골랐는지

   지나는 사람에게서 나프탈렌 냄새가 났다 

   그이의 외출이 즐겁기를  

   고민 끝에 고른 옷일 테니 만족했기를 바랐다

   그 집 드레스 룸에서는 옷이 옷을 지웠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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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일

생일 전영관 아버지는 청양 출신 삼류 투수였다 쓰리볼 카운트에서 직구로 강판을 면했다 지명타자는 종신직이더라도 허탈함은 피할 수 없었다 한 번 더 던졌는데 볼이었다 볼넷이 된 아버지는 1남 4녀라는 성적을 만회하느라 손가락 물집이 그치지 않았다 스트라이크는 아들 볼은 딸이라는 가부장적 편견도 만담(漫談)이 되었다 투수는 자신이 던진 공을 자식처럼 여겨야 한다는 스포츠 정신도 포함되었다 던진 투수보다 받아낸 포수가 죄인이 되는 시절이었다 빈곤, 실직 같은 백네임 붙인 강타자들이 아버지를 괴롭혔다 선수는 관중이 자신만 보는 것 같아서 자신을 잃고 그들은 자신의 맥주와 치킨을 즐길 뿐이다 홈런볼을 받으면 행운이 온다고 하지만 호되게 맞아 멀리 날려간 공인 것이다 개중 불행한 주인공을 받은 셈인데 사람들은 부러워한다 현자는 선수에게 돌려준다 불행은 느닷없이 들이닥치는 것 같아도 그럴 만한 곳에 찾아오는 불청객이었다 수비수 전체를 관장해야 하는 어머니 슬픈 포수, 어머니와 처음 만난 날이다

  • 관리자
  • 2024-06-01
세상이 칠판이 될 때

세상이 칠판이 될 때 박형준 비 오는 밤에 고가도로 난간에 기대어 차들이 남기는 불빛을 바라본다 도로의 빗물에 반사되는 모습을 바라보고 또 바라본다 나는 차들이 달리며 빗물에 휘갈겨 쓴 불빛들을 읽으려고 하지만 도로에 흐르는 빗물은 빠른 속도로 불빛들을 싣고 고가도로 아래로 쏟아진다 빗물받이 홈통 주변에 흙더미가 가득하고 간신히 피어난 풀꽃 하나가 그 아래로 휩쓸려 들어가지 않으려고 버티고 또 버틴다 나는 비 내리는 고가도로에 올라서서 가장 낮은 자리에 버려진 칠판을 떠올린다 번져서 하나도 읽지 못하더라도 빗물에 쓰여진 글자들을 바라보고 또 바라본다 차들이 남긴 불빛들과 함께 저 아래 빗물받이 홈통으로 떨어질지라도 꿋꿋하게 버티는 풀꽃의 결의를 생각한다 고가도로 밑 물이 불어나는 강물을 거슬러 상류로 올라가는 물고기의 지느러미가 강물에 팔딱이며 쓰고 있을 글자들을 마음 어딘가에 품고서 나는 비 내리는 고가도로(생략해주세요) 난간에 기대어 서 있다

  • 관리자
  • 2024-06-01
페이지

페이지 박형준 다 튿어진 책 한 권이 툇마루에 펼쳐진 채 놓여 있다 책주인은 어디까지 페이지를 넘기다가 자리를 떠났을까, 백 년이 흘러도 돌아올 수 없을 것 같아 바람이 빛바랜 종이에 스며들 때 페이지는 금방이라도 넘어갈 듯하다 그러다 거세고 거침없는 돌풍, 순식간에 툇마루를 쓸어버리고 잊힌 말처럼 춤추는 먼지를 일으킨다 페이지들이 혼란에 사로잡혀 펄럭이다가 그중 하나가 떠다니는 법을 배우듯이 서서히 공중으로 떠오른다 페이지는 잠시 툇마루를 빙글빙글 돌다가 다시 잔잔해진 바람을 타고 천천히 뜰로 날아간다 누군가의 발밑에 떨어질 편지, 알 수 없는 여행을 떠난다 바람의 힘에 의해 책에서 튿어져 나왔지만 이제 바람과 맞서며 창공으로 떠올라야 한다 그러나 페이지는 겨우 뜰의 가장자리에 닿을 듯하고 거기엔 한 무더기 재가 쌓여 있다 글자들의 무덤에 허공으로 조금 날아갔던 새가 다시 돌아와 앉아 있다

  • 관리자
  • 2024-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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