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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켈 정비공의 부탁

  • 작성일 2020-02-01
  • 조회수 1,909

[단편소설]



메켈 정비공의 부탁



나푸름




잠에서 깬 너는 순간 어디에 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아. 그러다 곧 이곳이 시칠리아 섬 서쪽 해안에 있는 작은 호텔이라는 걸 깨닫지. 너는 눈을 감고 오늘의 일정을 되새겨. 오전에는 바닷가의 염전 지대를 따라 산책을 할 거야. 정오에는 마을 광장에 있는 카페에서 샌드위치를 먹고, 어제 읽다 만 소설을 마저 읽는 거지. 해가 질 무렵이 되면 예약한 식당에서 정어리와 회향을 곁들인 파스타에 와인을 마시며 지역의 미식 전통을 즐길 거야. 밤에는 호텔로 돌아와 매춘부와 사랑을 나누는 거지.
너는 곧 상황을 납득해. 자리에서 일어나 욕실로 향하지. 샤워기에서 뜨거운 물이 쏟아지고 수증기가 올라와. 의뢰인에게는 지나치게 더운물로 샤워를 하는 습관이 있거든. 물줄기에 닿은 살이 빨갛게 익어 가. 너는 무의식적으로 왼쪽 귀를 만지려 하지만, 이윽고 손이 가는 방향을 바꿔 비누를 집어 들지. 개미에 물린 것처럼 왼쪽 귀가 따끔거려. 너는 고통을 참으며 거품을 낸 비누로 온몸을 문질러 씻어.
너는 키튼 앤 마거릿 주식회사의 기버(giver)로 다양한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진행한 이력을 가지고 있어. 의뢰인들은 대체로 너의 기억에 높은 만족지수를 보였지. 작년에 가장 평가가 좋았던 프로젝트는 에베레스트를 등정했던 한 달간의 기억이었어. 의뢰인은 B 의류 회사의 임원으로 출장을 제외하곤 혼자서 여행을 떠나 본 적이 없는 50대의 중년 남성이었지. 너는 작년 겨울 의뢰인을 대신하여 상업 등반대와 함께 에베레스트를 올랐어. 그리고 아이스폴 지대를 통과하는 도중 갑작스러운 눈보라를 맞아 동료들과 함께 산에 고립됐지. 너는 그곳에서 운 좋게 목숨을 건졌지만, 동상으로 괴사한 왼쪽 귀의 삼분의 일을 잘라내야 했어.
회사에서는 네가 겪은 재난에 애도를 표했어. 그리고 네가 겪은 지나친 고통의 시간은 그 귀퉁이가 조금씩 잘려 나간 채 의뢰인에게 이식됐지. 그 결과, 의뢰인은 기획했던 것보다 극적인 기억을 전달받았어. 바람이 왼쪽 귀를 스칠 때마다 그때의 기억 때문에 귀 끝이 가려운 지경에 이르렀지. 의뢰인은 귀를 긁어도 없어지지 않는 그 가려움 때문에, 그때의 기억이 생생하게 느껴진다고 했어. 고통스러우면서도 감동적인 기분이 든다고, 평생 잊지 못할 모험이 되었다고 했지.


너는 누비아 탑에서부터 해안가의 염전 지대를 따라 천천히 걸음을 옮겨. 해안 쪽으로 눈을 돌리면 둔덕처럼 쌓인 흰색의 소금 결정과 붉은 지붕의 풍차들이 보이지. 바람에 함유된 소금기가 네 몸 이곳저곳에 달라붙어. 너는 멈춰 서서 소금 결정이 쌓인 바다를 오래도록 바라봐. 이따금 코끝으로 스며드는 비린내로 인해 구역질이 난다는 것 이외에, 너는 아무런 감상도 느끼지 않아. 눈앞에 보이는 풍경이 감탄스럽지 않다기보다, 네가 느끼는 감정은 네가 하는 일에서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야. 중요한 것은 네가 무엇을 보는지니까. 오래도록 바라보는 것, 귀를 기울이고 냄새를 맡는 것, 음식을 씹고 음미하는 것. 그렇게 감각을 통해 기억을 만들어내는 것. 그런 것들은 너의 지난 10년을 구성하고 있는 중요한 요소야. 세부적인 사항들이 기억에서 잊힐 때쯤 뇌에 남는 부분이란 그런 식으로 감각에 기댄 정보들이거든. 그렇게 남은 정보들만이 십 년이 지나고 이십 년이 지나도록 사람의 머릿속에 박혀 있는 거지.
너는 바닷가 맞은편에 있는 염전 박물관을 발견해. 낡고 오래된 건물이야. 내부는 불을 꺼둔 것처럼 어둡지. 정문은 자물쇠로 잠겨 있는데, 오랫동안 열지 않았는지 여닫는 부분에 녹이 슬어 있어. 너는 손으로 차양을 만들어 정문에 달린 작은 창을 통해 안을 들여다보지. 내부에는 나무로 만든 커다란 상자들이 군데군데 쌓여 있어. 이사를 나가는 것 같기도 했고 아직 짐을 풀지 않은 것 같기도 했지. 그때 너는 누군가가 옆으로 다가오는 기척을 느껴. 너는 창문에서 떨어져 반대편으로 몸을 틀어. 품이 큰 남색 점퍼를 입은 남자가 생각보다도 가까운 거리에서 너를 바라보고 있었지. 남자가 영어로 말했어.
여기는 문을 닫은 지 오래예요.
너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뒤 발길을 돌려. 그리고 네 뒷모습을 바라보는 남자의 시선을 느끼지. 남자가 말했어.
당신, 작년에도 여기에 오지 않았어요?
너는 몸을 돌려 대답해.
아니요, 여긴 처음입니다.
남자는 너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며 왠지 익숙해서 그렇다고 하지.
동양인들이 비슷하게 생겨서 그렇겠죠.
아마도요.
남자는 말끝을 흐렸어. 너는 남자가 말을 끝맺지 못한 이유를 확신이 없기 때문이라고 짐작하지. 너는 남자를 뒤로 한 채 산책로를 따라 걸음을 옮겨. 뒤를 돌아보지 않더라도 남자가 여전히 너를 바라보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지. 너는 남자가 착각한 것이라 여겨.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남자의 얼굴은 마치 너를 알기라도 하는 사람처럼 보였어. 너는 걸음을 서두르지. 너에게는 이곳을 방문한 기억이 없어. 어쩌면 의뢰인이 과거에 이 마을을 방문했던 걸지도 모르지. 의뢰인이 이미 방문했던 곳의 기억을 요청하는 건 종종 있는 일이거든. 하지만 의뢰인과 너의 얼굴은 조금도 닮지 않았어. 연령대는 물론 체형도 달랐지. 의뢰인이 이곳에 온 적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곳의 사람들이 너를 의뢰인으로 생각할 리는 없어. 어쩌면 남자에게는 너와 비슷한 체구의 동양인을 봤던 기억이 있는지도 모르지. 익숙한 게 아니라 비슷하다고 말하고 싶었던 걸 수도 있고, 네 말처럼 동양인들은 모두 비슷하게 생겼는지도 몰라. 그리고 어떤 사람은 비슷한 것을 익숙한 것으로 착각하기도 하지. 너는 곧 생각하기를 그만둬.


정오가 되자 햇빛이 점점 강해져. 너는 해안가를 떠나 중앙 광장으로 발걸음을 옮겨. 바다에서 벗어날수록 바람이 잦아들어. 너는 적당해 보이는 카페에 들어가 피클을 뺀 햄 샌드위치와 커피를 주문해. 음식이 커피보다 먼저 나왔는데, 빵은 말라서 딱딱했고 양상추는 수분 없이 눅눅했지. 소설은 이제 막 중반부에 접어들고 있어. 좀처럼 책을 읽는 속도가 나지 않아. 강제수용소로 끌려가 죽음과 같은 굶주림에 시달리는 책의 주인공 때문인지 아니면 형편없는 샌드위치 때문인지, 너는 점점 불쾌한 기분에 사로잡혀.
그리고 너는 그 이유를 조금 전 카페로 들어선 사내의 탓으로 돌려. 사내는 품이 큰 남색 점퍼를 입고 있었어. 점퍼의 등 부분에는 이탈리아어로 메켈 정비소라고 쓰여 있었지. 박물관에서 마주친 남자의 낡은 점퍼와 비슷해 보였는데 같은 사람으로 보이지는 않아. 너는 광장 근처에 정비소가 있으리라 여겨. 그렇다면 해변을 서성이던 그 남자는 무엇을 고치러 그곳에 왔던 것일까.
네 두 눈은 여전히 책에 고정되어 있어. 하지만 너는 아까부터 계속 같은 문장을 읽고 있지. 정비공이 점점 너에게 다가오고 있었거든. 너는 왠지 모르게 손에서 땀이 나는 것을 느껴. 마치 네가 사내를 훔쳐보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야. 그렇게 네 앞에 선 정비공의 얼굴은 아까 박물관 앞에서 본 남자의 것과 같았어. 남자가 말했어.
역시 당신이 맞네요.
일말의 고민이나 추측이 내포되지 않은 단정적인 말. 어쩌면 그건 남자가 영어에 능숙하지 않기에 내린 선택일 수도 있어. 한편으로 그 말은 네가 남자의 확신을 알아채기에도 충분했지. 너는 왼쪽 귀에서 열감을 느껴. 너는 남자의 말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어. 남자를 본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거든. 남자는 예전부터 알고 있던 사람을 만난 것처럼 너에게 말했어. 너는 고개를 내저으며 정비공의 말을 부정하지만, 붉어진 귀 때문에 마치 거짓말을 하는 사람처럼 보이네.



키튼 앤 마거릿 주식회사의 의뢰인들은 대부분 일이나 가족 때문에 옴짝달싹할 수 없는, 지나치게 바쁜 사람들이야. 그들은 휴가를 내 어디론가 훌쩍 떠나는 일이 불가능하거나 혼자만의 시간을 보냈던 기억이 희미해지면 회사에 의뢰를 해왔어. 다른 이들이 만들어준 기억을 실제 여행에 드는 비용보다도 비싼 값에 사들이는 셈이지. 그렇게 부유하고 시간이 없는 일 중독자들은 키튼 앤 마거릿 주식회사의 주요 고객이었어. 여행의 피로감이나 시간에 대한 부담감이 배제된 기억은 실제보다도 완벽했어. 직접 경험하지 않았을 뿐이지 그 모든 기억은 진짜였으므로, 키튼 앤 마거릿 주식회사의 일은 중요했어.
네팔에서 돌아온 후, 네가 일선에 복귀하기까지 반년이 걸렸다. 그동안 너는 조금이라도 추운 기운이 올라올 때마다 몸을 떨었어. 바람이 불면 오한이 왔고, 동상에 걸렸던 손가락이나 코, 발끝의 부분 부분에 물집이 잡혔지. 가려움증은 점차 심해졌고, 왼쪽 발에서는 더 이상 발톱이 자라지 않았어. 그동안 너는 그때의 기억에서 조금도 벗어날 수 없었다. 평생을 잊을 수 없으리란 두려움에 몸이 움츠러들 지경이었으니까.
그러던 어느 날, 너는 지하철역을 올라가는 계단에서 익숙한 얼굴의 남자와 마주쳤어. 그리고 네가 느꼈던 실제적 고통이 환상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 네가 본 것은 계단 전면에 설치된 B사의 아웃도어 의류 광고였어. 광고 영역 안으로 들어가자 주변 온도가 내려갔고 네 앞으로 차가운 바람이 불어왔어. 너는 수개월 전에 잘라낸 왼쪽 귀 끝이 빨갛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지. 눈앞에 펼쳐진 홀로그램을 통해 빙하로 뒤덮인 험준한 산자락이 보였어. 계단 끝에서 나타난 한 남자가 산악 장비를 착용한 채 네 옆으로 힘겹게 걸음을 옮겼어. 어느새 한참 앞서 나간 남자가 뒤를 돌아 너를 바라보았지. B사에서 새로 출시한 산악용 의류 브랜드의 광고였어.
너는 그 광고의 모델이 반년 전에 에베레스트를 오르던 너라는 것을 깨달았어. 정확하게는 너의 얼굴이 아닌 B 의류회사 임원인 의뢰인의 얼굴이었지만, 너는 그 합성된 영상 속에서 네 기억을 찾아낼 수 있었어. 너는 모자 속에 가려져 끄트머리밖에 보이지 않는 남자의 귀를 바라보며, 네 왼쪽 귀를 더듬었어. 존재하지 않는 귀의 끄트머리가 욱신거렸지. 의뢰인은 자회사의 브랜드 산악 의류를 착용한 채 에베레스트를 등정했던 기억에 힘입어 올해는 부사장으로 취임할 예정이라고 했지.
너는 계단에 서서 당황했다. 마치 너의 기억이 의뢰인에게 강탈당한 것처럼 느껴졌거든. 실제로 조난을 당하고 귀의 일부를 잃은 사람은 의뢰인이 아닌 너였지만, 너는 이제 더는 그 기억을 자신이 겪은 일처럼 느낄 수 없었어. 너의 기억은 의뢰인이 합당한 값을 치르고 사유화한 재화였으니까. 너는 그 순간, 어쩌면 수년이 흐른 뒤엔 네가 겪은 그때의 기억이 그저 언젠가 보았던 광고로만 여겨지리라는 예감에서 벗어날 수 없었어. 네 몸에 남은 명백한 상처 자국과 후유증에도 불구하고, 그런 일을 겪었다는 것 자체를 기억하지 못할 것만 같았거든.
그런 식으로 팔려 나간 기억들은 너의 몸에 지워지지 않는 검은 얼룩으로 남았어. 그 얼룩들이 영영 텅 빈 공백으로 남으리라 생각하면 잠을 이룰 수 없었지. 너는 너 자신이 아름다운 풍경 속에서도 인간적 감흥을 느끼지 못했던 이유를 어렴풋이 알 것 같았어. 그 모든 감각은 온전히 너의 것인 적이 없었어. 너는 너에게 남겨진 공백을 어떻게 메워야 할지 알 수 없었지. 모든 과거는 불확실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어. 그렇다면 너에게 남아 있는 건 뭘까. 네 몸에, 네 기억에 남아 있는 건 무엇일까. 정작 중요한 부분은 잘려 나간 채로, 아무도 갖고 싶어 하지 않는 지나치게 괴로운 기억들만이 네 것으로 남는다면, 그것들은 너를 어떻게 만들었을까.



어쩌면 그런 식으로 너의 기억들이 유실되어 왔으므로, 너는 너를 기억한다고 말하는 정비공을 쉽게 떨쳐 보낼 수 없었던 듯해. 하지만 네가 기억하지 못하는 방문이 실제로 있었다 하더라도, 지금 당장 그 사실을 인정할 수는 없어. 이것은 너의 휴가가 아니니까. 이런 일이 반복된다면 너는 이번 기억에 실패하게 되겠지.
너는 네 앞에 앉아 있는 정비공을 바라봐. 턱밑에 듬성듬성하게 난 수염 때문에 피곤하고 거칠어 보이는 인상이야. 정비공의 눈과 목소리는 너를 알고 있다는 확신을 품고 있었어. 남자는 불쾌한 표정을 하는 네 앞에서 눈 하나 까딱하지 않고 샌드위치를 주문했어.
밥을 먹기 좋은 식당은 아니에요. 이렇게 작은 마을인데 이 집 주인이 야채를 사러 시장에 나가는 걸 한 번도 못 봤어요.
너는 작게 한숨을 쉬며 정비공에게 말해.
나는 당신이 생각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죠?
제가 이곳에 왔었다면 기억을 했을 거예요. 그리고 다시 오지는 않았을 거 같군요.
종업원이 미리 만들어 두었던 것처럼 상태가 좋지 못한 샌드위치를 정비공 앞에 놓았어. 그는 입을 크게 벌려 샌드위치를 베어 물었지. 퍼석한 소리와 함께 샌드위치의 반이 그의 입속으로 들어갔어. 남자의 턱수염에 마요네즈와 노란 겨자씨가 묻어났어. 그는 질긴 고기를 씹는 사람처럼 오랫동안 턱을 움직였지. 그리고 아직 넘기지 않은 조각들을 입에 머금은 채로 말했어.
정말 그렇게 생각해요?
너는 역겨움을 참으며 겨우 말을 내뱉지.
만약 제가 이곳에 왔었고 그걸 기억해 내지 못하는 것뿐이라고 해도, 그 사실이 당신이 내게 아는 척을 할 만한 이유는 못 됩니다.
남자는 순간 인상을 쓰며 접시에 반쯤 먹은 피클을 뱉어냈어.
젠장! 여기 피클 맛이 끔찍하다는 걸 깜박했네요.
남자는 네 앞에 놓인 피클이 빠진 샌드위치를 바라보며 말했지.
푸아 씨가 왜 그렇게 공격적인지 모르겠어요.
순간, 너는 고개를 들어 남자를 바라봐.
푸아. 남자는 정확히 너에게 말하고 있었어. 분명하게, 남자의 입에서 나온 이름은 의뢰인의 것이었지. 너는 의뢰인의 나이, 출신 학교, 가족 관계와 같은 기본적인 정보를 숙지하고 있었어. 휴가지에서 발생할 수 있는 예상 가능한 대화를 위한 것이었지. 하지만 그러한 준비 과정은 어디까지나 의뢰인을 알고 있는 사람이 아닌, 의뢰인을 알지 못하는 사람을 위한 것이었어. 오히려 의뢰인을 알고 있는 이들은 너를 보고 의뢰인을 떠올릴 수 없을 테니까. 아까도 말했지만 너와 의뢰인의 외관 사이에는 공통점이 없었거든. 하지만 남자는 순간적인 착각이 아닌 확신을 갖고 있었어.
왜 내가 그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겁니까?
남자는 그제야 말이 통한다는 듯이 살짝 웃었어. 너는 그 웃음을 보며, 네가 잘못 반응했다는 걸 깨달아.
당신이 그 사람 자리에 있으니까.
너는 팔뚝에 닿은 철제 테이블의 차가운 감촉을 느껴. 그 감각은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이 현실이라 말해 주고 있었지. 정비공은 네가 컵 밑에 받쳐 놓았던 냅킨을 빼내 입에 묻은 소스를 닦았어.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너에게 말했지.
우리가 세 번째 만날 때는 인정해야 할 거요. 당신도 나를 알고 있다는 걸 말이에요.
그게 무슨 말입니까?
그렇게 될 거요.
정비공은 말을 마치자 몸을 돌려 카페 밖으로 사라졌어. 너는 종업원을 불러 자리에 남은 정비공의 접시를 치워 달라고 해. 너는 테이블 위의 빵 부스러기를 털어낸 뒤 옆자리에 있던 여분의 냅킨을 가져다 잔 밑에 깔지. 그리고 다시 책을 펴고 조금 전에 읽었던 부분을 찾아내. 기억을 편집할 시점은 완벽해 보여. 의뢰인의 기억에 정비공이 들어갈 필요는 없는 거니까. 하지만 너는 테이블 가장자리에 남아 있는 작은 얼룩을 발견하지. 그 얼룩은 언제부터 거기에 있었지? 너는 이제 책에 적힌 단어 하나도 이해하지 못하리란 것을 깨달아.



너는 남자가 어디서부터 자신을 따라왔는지 짐작도 하지 못해. 카페에서의 만남이 우연이 아니듯, 박물관에서의 만남 또한 우연은 아니었을 거야. 너는 남자의 목적을 알지 못해. 하지만 남자는 네가 의뢰인의 신분으로 이 마을에 도착했다는 것을 알았지. 그리고 너에게 따라야만 하는 일정이 있다는 것도 알았어. 너는 이 작은 마을에서 고작 사흘을 지냈을 뿐이야. 오늘 이전에 남자를 보았던 기억은 없었어. 너는 네가 방문했던 유적지와 식당을 떠올리며 남자를 기억해 내기 위해 노력하지만 남자는 마치 오늘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처럼 어디에서도 발견할 수 없었지. 너는 피곤이 몰려오는 것을 느껴.
너는 호텔로 걸음을 옮겨. 남자가 그렇게 나가고 나자, 카페에 앉아 책을 읽는 시늉을 하고 있을 수 없었거든. 너는 머릿속으로 떠오르는 의문들을 잠시라도 잊기 위해 노력해. 호텔에 들어가자 프런트에 있는 직원이 푸아 씨, 라고 이름을 부르며 너에게 인사를 건네네. 너는 순간 걸음을 멈추고 의뢰인의 이름을 부른 직원을 바라보지. 그러자 오히려 직원 쪽에서 당황하며 너에게 다가와. 너는 그제야 자신이 이곳에서 의뢰인의 이름을 쓰고 있다는 걸 깨달아. 어쩌면 의뢰인의 이름을 알아내는 것은 생각보다 쉬운 일이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남자가 아는 건 그게 전부가 아니었어. 너는 직원에게 가볍게 눈인사를 한 뒤 서둘러 엘리베이터를 타.
너는 호텔 객실에 들어가 바지와 셔츠를 벗고 이를 닦아. 부패한 음식을 먹은 것처럼 입안에서 지독한 냄새가 나는 것 같았거든. 너는 의뢰인의 습관대로 잇몸에 상처가 날 때까지 이를 닦지. 물로 입을 헹구자 잇몸이 아릴 정도였어. 너는 잘 정리된 침대에 몸을 누이고 이불을 덮어. 마치 잠이 든 것 같은 모습을 연출하지. 몇 분 뒤, 너는 눈을 뜨고 협탁 위에 놓았던 핸드폰을 집어 키튼 앤 마거릿 주식회사의 사이트에 접속해. 사이트 중앙에는 바탕체로 쓴 회사의 광고 문구가 걸려 있지.


키튼 앤 마거릿 주식회사의 모든 프로젝트는 의뢰인 한 명을 위한 영화나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의 기억은 개인의 성향과 취향을 반영하여 실제와 같은 생생함과 만족감을 주지만 죄책감이나 불편함과 같은 부정적인 감정은 최소화합니다. 당신은 가족에게서 벗어나 은밀한 휴가를 즐길 수 있고, 이국적인 국가로 사냥 여행을 떠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런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아도 됩니다. 그것은 당신의 기억이지만 당신의 몸은 깨끗하고 손은 피로 더럽혀지지도 않습니다.


회사에서 작년에 새로 만든 문구였어. 너는 그 자극적인 문구로 인해 올해 의뢰의 대부분이 매춘과 동물 사냥에 집중되고 있다는 걸 들은 적이 있어. 문구 덕에 매출이 상승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었지. 회사에서는 문구와 달리, 기버들이 저지르는 모든 불법 행위의 의도가 의뢰인에게 있으므로, 기버 쪽에서는 책임을 느낄 필요가 없다고 했어. 하지만 의뢰인의 손이 깨끗하다는 것이 강조될수록, 너는 그들이 버리고 간 무언가가 네 몸에 남겨져 있으리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지.
너는 상사의 개인 정보를 입력하고 관리자 페이지를 열어. 그곳에는 진행 단계에 있는 여러 프로젝트의 정보가 정리되어 있어. 너는 네가 수행하고 있는 프로젝트의 보안 등급이 꽤 높은 축에 속한다는 것을 깨달아. 등급이 높다는 것은 의뢰인의 사회적 지위가 높거나 회사의 정기적인 고객이라는 것을 의미했어. 그리고 이번 의뢰인은 두 가지 모두에 해당했지. 정비공은 너를 의뢰인의 이름으로 불렀어. 네가 의뢰인의 대리자가 아닌, 의뢰인 자체인 것처럼 너를 불렀지.
'당신이 그 사람 자리에 있으니까.'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는 말에, 남자는 그렇게 대답했어. 그 사람의 자리. 그 말은 결국 이전의 누군가가 너와 똑같은 행동을 했다는 의미일지도 모르지. 그리고 너의 행동은 키튼 앤 마거릿 주식회사의 정기적인 고객에 의해 이미 결정된 사항이었어. 너는 내부 자료 속에서 마을의 이름을 검색해. 총 열다섯 건의 완료된 프로젝트가 마을의 이름과 연관되어 나와. 시칠리아 섬 끄트머리에 있는 작은 마을치고는 지나치게 많은 횟수였지. 각각의 프로젝트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에는 접근할 수 없었어.
너는 회사에서 너에게 지급했던 근 십 년간의 급여 내역을 조회해. 적게는 일 년에 한 번, 많게는 서너 달에 한 번씩 지급됐던 보상금 내역이 적지 않은 금액으로 표기되어 있어.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예상치 못하게 벌어졌던 사고들에 관한 보상금이었지. 곧이어 너는 연봉과 비슷한 액수의 성과급이 세 차례가량 지급된 기록을 발견해. 너는 기억을 더듬어 보았고, 곧 그중 한 번의 성과급에 대해서만 기억해 낼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 처음 일을 시작했던 십 년 전 여름에 지급된 것이었지. 지급 날짜를 보고도 별다른 기억이 떠오르지 않자 너는 당황하기 시작해. 하지만 너는 그것 말고도 많은 것들에 대해 기억하지 못했어. 어떤 기억들은 잃어버리는 쪽이 삶을 살아가는 데 더 도움이 되곤 했으니까. 그러나 기억하지 못하는 어떤 일로 많은 돈을 받았다는 건, 그것이 성과에 의한 결과라기보다 보상의 개념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품게 하지.
너는 이전에 네가 진행했던 프로젝트 내역을 살펴보며 십 년 전 여름의 기록을 조회해. 인터넷으로 열람할 수 있는 프로젝트는 지난 6년 동안의 기록이 전부였어. 너는 회사에 의뢰인에 관한 공개되지 않은 정보를 열람할 것을 요청하지. 너는 핸드폰을 다시 협탁 위에 올려놔. 식사 시간까지는 아직 여유가 있어. 너는 다시 눈을 감고 짧은 잠을 청해.



네가 일을 하면서 정말로 죽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건 아이스폴 지대에 갇혔을 때가 처음이었어. 적어도 네 기억상으로는 그랬지. 구조를 기다리는 동안 너는 지금 죽으면 네 이름이 부고로 뜰지, 아니면 의뢰인의 이름이 부고로 뜰지 알 수 없다고 생각했어. 평소 같으면 하지 않았을 멍청한 생각이었지만, 그곳에서 죽지 않고 버티기 위해 너는 어떤 생각이라도 해야 했어. 발밑의 갈라진 틈새 사이는 밤보다 깜깜했지. 눈보라는 송곳처럼 네 몸을 찔렀어. 너는 바람을 피하기 위해 틈새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넓은 빙하의 균열지대 속으로 자꾸만 파고들었어. 발을 디딜 곳조차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깜깜한 그 속은 바람보다 정적으로 가득했지. 조금씩 마비되는 감각들 사이로, 너는 네가 허공에 거꾸로 매달려 있는 것만 같다고 여겼어. 추락하는 것이 아니라 부유하는 거라고 여기면 견디지 못할 일조차 견딜 수 있을 것 같았거든.



잠에서 깬 너는 순간 익숙하지 않은 풍경에 정신이 들지 않아.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낯설게 느껴지지. 너는 다시 눈을 감고 새로운 것이 아닌 익숙한 것들을 그리워해. 하지만 그 익숙한 것들에 대해 생각하면 할수록, 그것들은 희미하게 흩어지고 말아. 너는 마치 아주 오래 전부터 집을 나와 있었던 사람처럼 지치고 피곤해져. 그리고 네가 다시 눈을 떴을 때, 모든 것들은 여전히 낯설게 느껴지지. 너는 얼마 지나지 않아 상황을 이해해. 곧 머릿속에 정비공의 얼굴이 떠올라. 이제 와 돌이켜보니 그 얼굴에는 처음부터 깊은 확신이 그려져 있었어.
메켈 정비소.
너는 남자의 등에 쓰여 있던 이탈리아어를 중얼거려. 커피 테이블 위에 개켜 놓았던 셔츠와 바지를 차려입어. 셔츠에는 바닷가에서 맡았던 소금 냄새가 배어 있네. 너는 가방에서 연한 회색 셔츠를 꺼내 상의를 갈아입어. 프런트에 들러 예약해 놓았던 식당으로 가는 길을 물어. 식당은 호텔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으로 바닷가 근처에 있었어. 너는 문득 생각났다는 듯 직원에게 묻지.
혹시 광장 근처에 자동차 정비소가 있습니까?
시내까지 나가셔야 합니다. 자동차에 문제가 생겼나요?
큰 문제는 아닙니다. 이 지역에는 없습니까? 작은 곳이라도 괜찮을 것 같은데.
작년까지는 한 곳이 있었는데 폐업을 했습니다. 출장 신청을 하시면 내일 아침까지 손볼 수 있도록 조치하죠.
아니요, 괜찮습니다. 혹시 그 폐업한 곳의 이름을 좀 알 수 있습니까?
메켈 정비소요. 아는 곳인가요?
······처음 듣습니다.
너는 남자의 낡고 오래된 신발과 지저분한 인상을 떠올려. 어쩌면 남자는 돈을 목적으로 접근한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지.
호텔을 나서니 이미 해가 조금씩 지고 있어. 낮보다 조금 쌀쌀해진 날씨에 팔에 소름이 돋네. 어쩌면 모든 일정은 이제 의미가 없어진 걸지도 몰라. 더는 의뢰인의 역할을 대신할 필요가 없을지도 모르지. 정비공이 등장한 시점부터 이번 기억은 실패했던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너를 괴롭게 해. 다시 호텔로 돌아가 잠을 자는 게 나을 수도 있어. 하지만 너는 가만히 그렇게 앉아 있을 수 없어. 의뢰인의 일정이 그것을 원하고 있는 게 아니라면, 너는 어딘가로 계속해서 이동해야 했으니까. 네 마음속에는 기묘한 흥분과 불안이 교차하지. 너는 정비공이 나타나지 않기를 바라는 동시에 지금이라도 당장 그의 앞에 나타나기를 바라. 거기에는 설혹 너 자신마저 과거의 일에 연관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섞여 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너에게는 앞으로 나아가는 것 외에 다른 선택권은 없는 것으로 보여.



예약된 자리에 앉자 눈앞으로 바다가 보여. 짙은 붉은색의 노을이 지고 있네. 네 앞에 놓인 사물들이 붉게 물들어가. 종업원이 회향과 사프란을 곁들인 파스타를 네 앞에 놓았어. 그 위에는 구운 정어리가 올려 있지. 너는 나이프를 이용해 정어리의 뼈를 바르고 꼬리를 잘라내. 너는 자신을 둘러싼 아름답고 고요한 풍경이 정서적인 만족감을 강요하고 있다고 느껴. 너는 과거에 창백한 푸른색을 띠는 노을에 대해 들어 본 적이 있어. 화성에서 본 노을이 그렇다고 해. 너는 푸른색의 노을을 생각해. 어쩌면 노을은 본래 창백한 푸른색을 띠는 것인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 푸른색은 지구 표면에 도착하기도 전에 흩어져서 지구에 당도했을 때는 오직 붉은색으로 남겨지는 거야. 사람들은 결국 붉은색의 노을밖에 보지 못하는 거지.
너는 이내 적당한 크기로 정어리의 살을 잘라. 적당한 크기라는 건 네가 정한 게 아니라 의뢰인이 정해 준 크기였어. 하지만 노을에 대한 생각은 의뢰인이 정해 준 이야기가 아니었지. 그러므로 너는 노을의 색이 붉건 푸르건 눈앞에 있는 생선의 살을 적당한 크기로 잘라 먹는 것에 집중해. 그건 어려운 일이 아니야. 그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어. 그건 지금도 어렵지 않게 해치울 수 있는 일이야.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불필요한 기억은 지우면 그만이야. 기억에서 무엇을 지우고 무엇을 남길지에 대해 가장 잘 아는 건 너일 테니까.
해가 지면서 시야는 조금씩 어두워져. 항구 주변으로 하나둘 가로등이 켜지지. 너는 오랜 시간을 들여 천천히 음식을 먹어치워. 그러자 지금까지 일어났던 모든 일이 마치 머릿속의 망상처럼 느껴져. 정비공을 만났던 일과 그와 나누었던 대화, 입고 있던 점퍼와 이미 폐업한 정비소는 아무런 연관성 없는 조각들에 불과해 보여. 더는 생각을 진행하지 않고 거기에서 멈출 수도 있을 것 같아. 너는 이번 일이 끝난 뒤에는 당분간 일을 쉬어도 좋겠다고 생각하지. 그저 집에 가만히 누워, 아무것도 느끼거나 보지 않고 지내도 좋을 거야. 그때, 네 핸드폰이 울려. 회사로부터 온 메시지였어. 의뢰인의 인적사항에 관한 요청이 프로젝트와 관련이 없다는 이유로 거절되었다는 내용이었지. 너는 핸드폰을 바지 주머니에 넣어. 너에게는 아직 마지막 일정이 남아 있어.
너는 의뢰인과 정비공의 관계가 단순히 근래에 시작됐을 리는 없다고 생각하지. 그들은 이전부터 서로에 대해 알고 있는 것 같았거든. 정비공은 의뢰인과 나이는 물론 생김새마저 다른 너를 보고도 의뢰인을 떠올렸어. 남자가 이전에 본 의뢰인이 네 모습을 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지. 하지만 너에게는 이곳에 온 기억도, 오늘 이전에 남자를 본 기억도 없어. 너는 기억나지 않는 십 년 전 여름을 떠올려. 끊임없이 흘러내리던 땀만이 겨우 기억에 남아 있어. 그때 네 옆에 누군가가 있었던가? 그랬을지도 모르지. 모든 것을 알기에는 이미 늦었을지도 몰라. 하지만 남자는 너를 다시 만날 거라고 했어.
그리고 네가 호텔에 들어가 객실의 문을 열었을 때, 거기에는 이미 알고 있는 얼굴의 남자가 널 기다리고 있었어. 정비공이었지. 남자는 여전히 메켈 정비소라 쓰여 있는 점퍼를 입은 채 침대 위에 걸터앉아 있었어. 너는 남자를 보자 어쩐지 그런 광경을 이미 예상했던 사람처럼 차분한 마음이 들어. 남자가 말했어.
당신은 매번 같은 호실에 묵어서 찾기 쉬웠어요. 게다가 본인 이름으로 되어 있더군요.
너는 몇 시간 전 마을의 이름을 검색했던 일을 기억해. 이번 일을 포함해 총 열여섯 번의 프로젝트가 이 작은 마을과 연관되어 있었지. 너는 남자의 말에 긍정도, 부정도 할 수 없어. 너는 의뢰인의 이름으로 이곳에 온 것이었지만 실제로 의뢰인 본인은 아니었으니까. 너는 미니바에서 작은 크기의 술병을 꺼내 마셔. 차가운 알코올이 식도를 통과하자 몸 전체가 뜨끈뜨끈해지지. 너는 방금 네 행동이 누구의 행동이었는지 구분할 수 없어. 네가 술을 마신 건 의뢰인으로서 마신 건가, 아니면 너로서 마신 건가. 너한테 이제 그런 행동을 할 자격이 있기는 한 걸까.
카페에서 남자는 너를 의뢰인으로 인식한 사람처럼 말했지. 어쩌면 남자는 한 번도 의뢰인의 얼굴을 본 적이 없는 것일 수도 있어. 너는 영원히 입을 다물 수도 있어. 하지만 그러지 않기로 하지. 너는 말해.
그 사람으로 온 건 맞지만, 정확히 제가 그 사람인 건 아닙니다. 당신이 이해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네 말에 남자는 짧게 웃었어. 너는 그 웃음에 당혹스러워하지. 이번에도 당황하고 혼란스러워하는 건 너뿐이네. 남자가 말했어.
이 동네에 당신을 포함해서 지금까지 열 명의 사람이 왔었어요. 올해로 십 년 째요. 그 얼굴을 매번 어떻게 바꾼 건지는 모르겠어요. 그중에 적어도 한 명은 푸아 씨였겠죠. 아니면 모두 푸아 씨였다거나.
그들 모두가 다른 얼굴을 했었다는 말입니까?
모두 다른 얼굴이었어요. 그런데 그들 모두 같은 곳을 가고 같은 음식을 먹더군요. 처음에는 몰랐어요. 그게 특정인들에게 유명한 관광코스일지도 몰랐으니까. 어떻게 그 다른 모습을 한 모두가 같은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할 수 있겠어요. 물론 그런 생각을 한다고 해서 그게 정말로 사실일 거라고 믿지는 않았지만.
남자의 말은 고민과 추측을 담고 있었지만 그 말의 의미만큼은 명확했어. 망설임은 보이지 않았지. 마치 같은 이야기를 수십 번이고 반복해서 말했던 사람같이 말이야. 너는 그렇게 쌓인 단단한 확신이 두려워져. 남자는 뒤이어 말했어.
······하지만 당신 같은 사람들을 십 년째 보다 보니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정말로 그 많은 사람이 결국은 한 사람이었던 걸지도 모른다고.
남자의 말에 따르면 적어도 열 명, 혹은 아홉 명의 기버들이 이곳에서 같은 행동을 했다는 것이 돼. 혹은 그보다도 더 많았을지도 모르지. 너는 머릿속이 복잡해지지. 회사에서는 어째서 이런 프로젝트를 승인했던 걸까. 의뢰인은 도대체 어떤 의미가 있다고 이런 일을 반복했던 것일까. 그러다 너는 오늘의 마지막 일정을 기억해 내. 네가 말하지.
이곳에서 기다려야 할 여자가 있었습니다.
남자는 고개를 내려 한참 동안 자신의 발밑을 보았어. 그의 두 귀와 목덜미는 어느새 붉어져 있었지. 너는 남자의 귀 뒤쪽을 바라봐. 이윽고 고개를 든 남자는 처음 만났을 때처럼 분명한 얼굴을 하고 있었어.
아내는 이제 그 일을 할 수 없어요.
그게 무슨 말이죠.
아내는 죽었어요. 이제 오지 않는다고.
남자는 왜 네 앞에 나타난 걸까. 그녀가 이 마을의 유일한 매춘부이기라도 했던 걸까. 하지만 너는 그 말을 듣는 순간 알았어. 정비공의 아내 또한 십 년 이상 벌어진 이 일의 일부였다는 걸 말이지. 그녀가 이 마을의 유일한 매춘부가 아니라, 의뢰인이 그녀의 유일한 손님이었던 거겠지. 정해진 휴가지를 십 년 넘게 방문하며 같은 음식을 먹고 같은 것을 보고 같은 여자와 잠을 잤던 거야. 그런 생각이 들자, 너는 이곳에서의 모든 일이 계획된 일상의 부분 같다고 느껴. 매년 다른 기버가 그의 역할을 했다는 게 의뢰인에게 큰 의미가 없었던 걸까. 그 열 명의 기버들은 모두 이런 사실을 알고 있던 것일까. 알면서도 의뢰인에게 동조했던 것일까. 하지만 이미 너는 알고 있어. 그들이 그런 걸 알 필요는 없으니까. 지금의 너처럼 말이야.
네 머리는 곧 혼란스러운 생각들로 가득 차. 그 열 명의 기버들이 성공했던 일을 자신이 모두 망가뜨리고 있다는 걸 깨닫고, 죄책감에 휩싸이기도 하지. 하지만 그 죄책감은 누구를 향한 것이지? 네가 지금 느끼는 혼란 중 무엇 하나도 의뢰인의 계획과 맞아떨어지는 것이 없잖아. 아마도 의뢰인은 반복된 일상을 통해 삶을 유지해 나가는 그런 류의 사람이었겠지. 매년 다른 남자를 만나러 나가는 아내나 그런 아내를 바라보는 남편의 의중 같은 건 아무런 변수가 되지 못했을 거야. 오히려 그 변수가 열 명 중의 한 명인 네게 있었다는 건 그 누구도 알지 못했지. 너는 남자에게 말해.
왜 처음부터 말하지 않았죠?
당신이 나를 보고도 조금도 거리낌이 없었으니까. 그러고 보니 당신들은 매번 그런 식이었군요. 매번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어요. 그래서 바보같이 매번 속았네요.
······하지만 나는, 나는 정말 몰랐습니다. 나는 아니에요.
너의 말에 남자는 허탈한 표정을 지었어.
그렇다면 당신은 도대체 누구냔 말이요.
너는 대답할 말을 찾아. 잊고 있던 네 이름이 목 끝까지 밀려오지. 하지만 너는 네 이름이 남자에게 아무 의미가 없으리라는 걸 알아. 그래서 너는 이름을 말하는 대신, 다시 한 번 네가 의뢰인이 아니라고 말하려 하지. 그런데 입을 떼는 순간, 누군가가 주문을 건 것처럼 말문이 막혀. 그것이 계약에 위배된 행동이기 때문인지 아니면 정말로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기 때문인지, 너는 잘 모르겠다고 작게 중얼거리지. 정비공이 말했어.
당신들이 열 명이든 한 명이든, 이제 그런 건 나한테 조금도 중요하지 않아요. 나한테는 이제 아무것도 없어요. 정비소도 그 여자도, 이제 나한테는 없어요. 애초에 나한테는 아무것도 없었던 걸지도 모르죠.
너는 남자의 말에 섞인 원망을 느낄 수 있어. 하지만 그게 누구를 향하고 있는지는 모르겠다고 생각해. 그러자 문득 너는 그게 원망이 아니라 절망에 가깝다는 걸 깨달아. 남자가 말했어.
당신들이. 당신이 망친 거요. 당신이 자꾸 오니까. 그 여자가 기대를 했단 말이요. 그렇게 다른데. 그렇게 다른 얼굴들인데.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자꾸 그러니까. 어쩔 수 없이.
남자는 말을 끝맺지 못했어. 끝이 잘린 말들은 명확한 뜻을 품지 못한 채로 남자의 주변을 맴돌았지. 하지만 너는 정비공이 말을 마치기를 기다려. 침묵을 이해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그 마지막 말에 어떤 해답이라도 있기를 바라며 남자를 바라보지. 하지만 남자는 말을 잇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났어. 그리고 끝을 맺을 말을 오히려 네가 가지고 있기라도 하듯 네 주변을 두리번거렸지. 그러다 너를 봤어. 마치 너를 처음 발견한 사람처럼 너를 봤지.
······그러니, 당신은 더 이상 여기 오면 안 돼요. 난 그 말을 하러 온 거요.
너는 남자의 오래된 신발과 빛바랜 점퍼를 봐. 아내가 죽기 전까지만 해도 지금처럼 낡지 않았을 점퍼를 생각해. 그리고 네가 느낄 필요가 없는 감정을 맞닥뜨리지. 너는 문을 나서려는 남자를 붙잡아 세워.
잠깐만 기다려요.
너는 객실 금고로 다가가 설정해 놓은 비밀번호를 풀어. 금고에서 여분의 돈을 꺼내 정비공에게 건네. 충동적인 행동이었지. 그래, 대체 네가 무슨 자격이 있다는 거야. 네가 정말로 의뢰인이 되기라도 한 거야?
정비공은 네가 내민 돈을 가만히 바라봤어. 그가 고개를 숙인 탓에, 너는 그의 얼굴을 보지 못하지. 너는 어쩐지 남자가 흐느끼고 있다고 생각해. 그래서 너는 계속 남자의 붉은 귀만을 바라봐. 시선을 내리지도, 다른 곳으로 돌리지도 못하지. 그 모습이 익숙해질 정도의 시간이 흐른 뒤에야, 남자는 고개를 들었어. 그는 울고 있지 않았지. 그가 너에게 말했어.
아내에게도 그랬나요?
너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지. 아무것도 알지 못하니까. 하지만 너는 의뢰인 같은 부류를 이미 겪어 보아 알고 있어. 아는 만큼 죄책감을 느끼지. 의뢰인이 정비공의 아내를 사랑했을 리 없어. 그녀가 편하고 익숙했을 수는 있겠지. 그것은 하나의 패턴 같은 걸 거야. 아침에 일어나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고 잘 다려진 옷을 입는 습관처럼 말이야. 아침을 먹고 출근을 하고 아내와 함께 잠을 자는 것과 같은 일상적인 일들 속에서 잠시나마 벗어나기 위해 만들어낸 새로운 종류의 패턴인 거지. 의뢰인은 어쩔 수 없이 다른 기버들을 보낸 게 아니야. 그때그때 사람만 바꿔 준다면 남편도 눈치 채지 못할 거라고, 적어도 자신은 안전하리라 생각했던 거겠지. 그 일로 정말 기버 중 누군가가 변을 당한다 하더라도, 의뢰인은 아무런 고통도 느끼지 못하겠지. 삭제하면 될 정도의 감각. 누구에게도 죄책감을 느낄 필요가 없는 감정. 그런 게 사랑일 수 있을까. 그걸 사랑이라고 말해도 부끄럽지 않을 수 있을까. 하지만 사랑조차 하지 않았다는 건 너무 가혹한 일이지 않은가. 너는 부끄럽고 끔찍한 기분을 느끼며 말해.
하지만 나는, 나는 아니에요.
너는 정비공이 그 말을 믿어 주길 절박하게 바라. 너한테 그건 사실이니까. 적어도 너는 그렇게 믿었으니까. 너는 네가 믿는다면 남자도 믿을 수 있으리라 여겨. 하지만 그게 사실이 아니라는 걸 너도 알 거야. 그래, 그래서 너는 돈을 꺼냈지. 당혹과 수치를 이기지 못하고 결국에는 돈을 꺼내버리고 만 거야. 남자가 물었어.
그걸, 어떻게 그렇게 확신할 수 있는 거요?
너는 정말로 다를까. 다른 사람인 걸까. 정비공의 말처럼, 너는 그걸 어떻게 확신할 수 있지? 너는 손에 들린 돈을 남자 앞에 내밀어. 마치 그것이 용서의 값인 것처럼 말이야. 너는 남자를 제대로 보지도 못하면서 거듭 말하지.
제발 이 돈을 받아가세요.
남자는 지폐를 쥐고 있는 네 손을 바라보며 말했어.
죽었으면 좋겠네요.
너는 이번에도 그 말이 누구를 향한 말인지 알 수 없어. 그 말은 마치 남자가 스스로에게 하는 말처럼 들리기도 해. 너는 이제 고개를 들어 남자를 바라보고, 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지. 죄책감과 수치로 가득 찬 그 눈이 어쩐지 익숙하게 느껴지네. 지금 보니 남자의 눈은 네 것과 그리 다르지 않아 보여. 남자는 네 손에 들린 돈이 아내를 죽이기라도 한 것처럼 바라봤어. 끔찍하고 당혹스러운 광경 앞에서 힘이 빠지고 말조차 제대로 내뱉을 수 없는 사람같이 말이야. 정말로 네 손이 그의 아내에게 무슨 짓을 하기라도 한 듯이 그랬어.
그래, 어쩌면 그건 너에게 한 말이었을지도 몰라. 너는 그런 사내의 눈을 보며, 정말로 네가 그랬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그럴 리가 없다고 여기면서도 너와 같은 기버들이, 의뢰인이 무슨 짓을 했을지도 모른다고 여겨. 남자의 말처럼 네가 다 망친 걸까. 그것은 애초에 망가진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너에게는 일말의 잘못도 없는 것일까. 하지만 너는 아무것도 알지 못해. 너는 어떠한 것도 짐작할 수 없고 단정할 수 없지.
너는 이대로는 너무 억울하다고 생각해. 그래, 어떻게 보면 너는 정말 일을 한 것뿐이잖아. 네가 한 일 중에 원해서 했던 일은 하나도 없었잖아. 하지만 이미 늦었어. 사내는 네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오기도 전에 객실을 떠났지. 그곳에 남겨진 너는 제자리에 서 있는 것 말고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어. 어쩌면 정비공에게 네가 정말로 의뢰인이 아니라는 것을 인지시켜야 했던 것일 수도 있지.
의뢰인은 그녀의 죽음을 슬퍼할까. 그렇게 슬퍼할 수는 있는 사람일까. 그가 여자의 죽음을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너는 순간 네가 의뢰인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아. 너는 의뢰인의 생활습관과 잠자리에서의 버릇마저도 꿰고 있었지만 그를 한 번도 제대로 이해한 적이 없어. 이해할 필요가 없다고 여겼거든. 너는 푸아 씨가 아니니까.
하지만 너는 그와 동시에 정말로 네가 푸아 씨가 아니라고 할 수 있는지 확신할 수 없어. 정비공의 말처럼 너도 결국 그들 중 하나니까. 거대한 연극 안에서 너는 주인공이었으니까. 네가 배우에 불과했다는 건 이제 누구에게도 위로가 되지 못해. 너는 습관적으로 왼쪽 귀를 만지지. 잘려 나갔어야 할 부분이 말끔하게 채워져 있어. 이걸 채워 넣은 게 언제였을까. 그래, 회사에 복귀하기 나흘 전이었지. 너는 귀의 유실된 부분을 쥐의 피부로 만든 살덩이로 채워 넣었어. 생각보다 눈에 띄는 부분이었거든. 너는 의식하지 못한 채 그 연약하고 말랑말랑한 살덩이를 만지지. 그 연한 살결을 만질 때마다, 너는 네가 아무것도 잃지 않았다는 착각에 빠질 수 있었어. 하지만 지금 네 귀의 끝은 붉게 물들어 있어. 제 살이 아닌 피부에 대한 알레르기 반응처럼 말이야.



······그러나 아무런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아도 됩니다. 그것은 당신의 기억이지만 당신의 몸은 깨끗하고 손은 피로 더럽혀지지도 않습니다.


너는 머릿속으로 회사의 문구를 기억해. 너는 곧 십 년 전 여름, 그 기억나지 않는 자신에 대해 떠올리기 시작했어.


















황시운

작가소개 / 나푸름

2014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문장웹진 2020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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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마음 없이

좋아하는 마음 없이 김지연 안지는 이른 결혼을 했는데 실패로 끝났다. 아니, 그걸 실패라고 할 수 있을까? 이혼을 한 건 사실이었지만 안지는 자신의 인생 여정에서 그때 이혼한 일을 실패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 뒤로 더 행복해졌다고 할 수는 없을지언정 조금 더 자기 자신에 가까운 삶을 살게 된 것은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혼이라는 단어를 떠올릴 때면 늘 그에 대해 변호하고 싶은 여러 말들이 떠오르곤 했기 때문에 처음부터 결혼 같은 건 하지 않는 편이 더 나았을 거라는 생각을 하곤 했다. 때문에 이혼했다는 사실은 안지의 비밀은 아니었지만 먼저 나서서 밝히지도 않았다. 어릴 때 안지는 무척 전형적인 사람이 되고 싶었다. 구체적으로 그런 표현을 떠올리지는 않았다. 그저 자신이 속해야 하는 집단에서 튀지 않는 사람, 아주 평균적인 사람이고 싶었고 그런 사람이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을 했다. 찬반투표를 할 때면 눈치를 보다가 다수의 의견에 따라 슬그머니 손을 들었다. 친구가 좋아하는 가수를 따라서 좋아하고 친구의 것과 비슷한 브랜드의 신발을 사서 신었다. 친구들이 싫어하는 선생을 따라서 싫어했다. 사실 안지는 그 선생에게 남몰래 호감을 갖고 있었지만 친구들과 함께 떡볶이를 먹다가 술술 흘러나온 그 선생에 대한 욕을 듣고 재빨리 노선을 바꿔 함께 욕을 했다. 한동안 안지는 수학 시간마다 왜 애들은 저 선생을 싫어할까? 에 대한 답을 알고 싶어서 더 열심히 선생의 행동거지를 살폈다. 수학을 가르친다는 점만 빼면 딱히 나무랄 데 없는 사람이었다. 학생이 쉽게 답할 수 없는 내용을 골리듯 물어보지 않았고 무엇보다 학생들한테 사과를 할 줄 알았다. 뭔가 잘못 알고 섣불리 화를 냈을 때, 그러다 결국 진실을 알게 되었을 때, 다른 선생들은 그러게 헷갈릴 만한 짓을 왜 하고 다니느냐고 도리어 짜증을 부렸는데 그 선생은 재빨리 미안하다고 말했다. 미안하다. 내가 잘못 알았어. 미안해. 가끔 안지는 머릿속으로 그 목소리를 재생해 보곤 했다. 그 때문에 선생이 더 좋아졌지만 여전히 싫어하기 위해 애썼다. 누구나 다 그런 식으로 청소년기를 보내지 않나? 내가 아닌 사람이 되어 보려고 노력하면서? 안지는 대학에 갔고 연애를 했고 졸업을 했고 취직을 했다. 결혼도 했다. 아주 평균적인 삶이었다. 조금씩 빠르기도 했다. 조바심이 나 있었으므로. 자신도 남들처럼 지극히 평범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을 빨리 증명해 보이고 싶었으므로. 어느 정도 성공적인 것 같기도 했다. 남편이 바람이 나기 전까지는 그랬다. 식도 올리기 전 임신을 해 낳은 아이가 막 돌을 지난 참이었다. 임신이 아니었으면 결혼까지는 이어지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남편은 계속 후회하는 것 같았다. 그때 낙태를 밀어붙이지 않은 것을, 시간을 끌다가 영영 타이밍을 놓쳐버리고 만 것을, 어떤 결단력을 가지지 못한 자신을 자책했을지도 모른다. 그때 뼈저리게 깨달은 바가 있었는지 새로운 여자가 생겼을 때는 안지가 알아차리기도 전에 이혼을 해달라고 요구했다. 겨우 육 개월을 만났을 뿐

  • 관리자
  • 2024-07-01
소금 샹들리에

소금 샹들리에 정한아 호주에 사는 김이 오랜만에 귀국해서 친구들이 다 같이 모이기로 했다. 4명이 만나는 건 대략 7년여 만이었다. 방을 잡고 밤새 보자고 해서 오기 직전까지 망설였는데, 남편이 등을 밀었다. 정민이와 자신에게도 내가 없는 날이 필요하다고 큰소리를 치더니 정말 밤새 전화 한 통 없었다. 친구들과는 대학 동기였다. 전공은 문예 창작이었는데, 나는 2학년까지 다니고 학교를 그만뒀다. 그렇지만 정작 작가가 된 사람은 나뿐이라고 친구들이 투덜거렸다. 나는 작가가 아니라고 아무리 말해도 소용없었다. 그들은 십 수 년 전 내가 낸 단 한 권의 책을 기억하는 몇 안 되는 사람들이었다. 세 명 모두 미혼이었고, 아이를 가지지 않았다. 놀라울 정도로 예전 그대로인 친구들 사이에서 나만 철 지난 옷차림에 좀처럼 대화에도 섞이지 못했지만, 그런 것 때문에 마음이 상하지는 않았다. 오랜만의 서울 나들이에 술자리도 즐거웠다. 좋은 친구들이었다. 7년 전 정민이 자폐 스펙트럼 장애 판정을 받았을 때 그들은 자신의 일처럼 울어 줬고, 이후에도 종종 아이의 간식과 선물을 집으로 보내 줬다. 서서히 연락을 거둔 것은 내 쪽이었다. 애써 관계를 유지하는 일이 힘에 부쳤을 뿐, 그들에게 섭섭한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지난 몇 년 동안 나는 집이 아닌 곳에서 밤을 보낸 적이 없었다. 다들 술에 취해서 침대로 간 뒤에도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아 휴대폰만 들여다보았다. cctv 속 거실은 엉망이었다. 엎어진 식판, 사방에 흩어진 블록 조각, 길게 늘어진 옷가지들. 남편은 불도 끄지 않고 아이를 재우러 방에 들어간 모양이었다. 나는 정지화면 같은 그 풍경을 한참 바라보다가 해 뜰 무렵에야 겨우 잠이 들었다. 다음날 우리는 점심을 먹고 헤어지기로 했다. 맛집마다 대기가 길어 종로의 좁은 골목을 돌고 또 돌았다. 앞장서 구글 맵을 보며 걷던 김이 갑자기 작은 서점 앞에서 멈춰 서더니 책을 사야겠다고 말했다. 지난 이사 때 내 책을 분실했다는 것이었다. 나는 집에 돌아가서 책을 다시 보내 주겠다고 김을 달랬다. 다섯 평도 안 되어 보이는 그 작은 서점에 내 책이 있을 리는 만무했기 때문이다. 김은 막무가내로 서점에 들어갔다. 할 수 없이 그녀를 따라 들어갔다가 전면 책장에 전시된 내 책을 발견했다. 죽은 친구를 만났다고 해도 그처럼 놀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미애 씨!” 그곳에서 누군가 나를 불렀다. 우아한 노부인이었다. 린넨 바지에 화이트 셔츠, 큼지막한 호른 목걸이를 한 여자는 환하게 웃으면서 나를 바라봤다. “반장님?” 나는 말끝을 흐리며 물었다. 여자는 성큼성큼 내 앞에 다가와서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누군가 나를 그렇게 안은 것이 너무 오랜만이라 온몸에 힘이 풀리는 것 같았다. 그녀는 오래전 나와 함께 공부했던 문우였다. H 백화점 문화센터 소설 창작 교실의 반장. 친구들이 책을 구경하는 사이 나는 그녀와 짧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ldqu

  • 관리자
  • 2024-07-01
그동안의 정의

그동안의 정의 최예솔 작정하고 사라진 사람은 작정하고 찾아야만 한다. 나는 윤정수를 작정하고 찾지 않았다. 보통의 남매 사이라는 게 정확히 어떤 건지는 모르겠지만 윤정수와 나를 그냥 보통 남매, 라고 하기에는 좀 어렵지 않을까. 윤정수는 나보다 4년 먼저 태어났다. 그리 적지도, 그리 많지도 않은 애매한 나이 차이 덕분에 윤정수와 나는 딱히 친해지지 못했다.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윤정수는 중학교에 갔고, 내가 중학생이 되었을 때 윤정수는 고등학교에 갔다. 물론 윤정수와 내가 영 친해지지 못한 건 우리의 나이 차이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윤정수는 내게 없는 사람에 가까웠다. 말수도 없고 센스도 없고 자존심도 없고 공부머리도 없고 돈도 없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나? 아무튼 남매 사이에 정이라도 있었다면 걱정이라도 했을 텐데 그럴 이유조차 없었다. 쥐뿔도 없는 윤정수니까. 특이사항이라곤 개그맨 윤정수와 동명이인이라는 것 정도밖에 없는. 그러니 윤정수가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집을 나갔다고 해도 이상할 것 하나 없었지. 뭐 내가 찾는다고 윤정수가 나타났을 거라는 보장도 없지만 나는 막연히, 어련히 때 되면 나타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했다. 하지만 윤정수는 죽을 때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물론 내가 죽은 것은 아니다. 윤정수가 죽었다. 내 나이가 이제 서른이니까, 윤정수는 서른넷에 죽었다. 이제 내게 남은 혈육은 없다······ 아닌가? 고모. 그렇게 부르지 마. 왜요. 낯설어. 저도 고모가 낯설어요. 윤현수는 맹랑하다. 윤정수와 장현아의 딸이라고 해서 윤현수. 그거 좀 유치하지 않니? 물었을 때 윤현수는 뭐 어때요 엄마아빠말곤 모르는데, 하고 대답했다. 이제 나도 아는데? 하니까 이젠 고모도 모르는 척해 달라고 했다. 참 나 어디서 이런 게 굴러왔는지. 현수야. 네. 네 엄마 입국 날이 언제라고 했지? 다음 주 토요일이요. 아직 한참 남았네. 고모도 고모 할일을 해요. 시간 금방 갈걸요. 알겠다 그래. 윤현수를 데리고 온 사람은 장현아다. 이제는 나흘쯤 됐으려나. 아침부터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하도 시끄러워서 나가 봤더니 장현아가 윤현수의 손을 붙잡고 서 있었다. 장현아는 다짜고짜 윤정수를 아느냐고 물었고 나는 오랜만에 듣는 윤정수의 이름에 잠깐 벙쪘다가 네, 저희 오빠네요, 하고 대답했다. 조카입니다. 그날 장현아의 대사를 나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그건 도저히 내가 아는 사람이 뱉을 만한 말이 아니어서 대사라고밖에는 표현할 수 없겠다. 아직도 문득 의심스러울 때가 있다. 윤현수가 정말 나의 조카가 맞고 장현아가 정말 나의 새언니가 맞을까. 가족관계라는 게 그렇게 단순하게 정리되는 거라면 이제까지 윤정수와 나는, 또 윤정수와 나와 우리의 부모는, 왜 이렇게 흩어지거나 죽거나 혼자 남을

  • 관리자
  • 2024-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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