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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들의 벤다이어그램

  • 작성일 2024-07-01
  • 조회수 1,312

   어른들의 벤다이어그램


이소



   1.


   스무 살을 훌쩍 넘어 성인이 되어도 자신을 어른으로 여기지 못하는 사람들은 얼마든지 있다. 내가 그런 사람이었다. 뉴스를 보면 언제나 피해자의 억울함에 몰입하고, 많은 경우 나를 포함하지 않은 채 ‘어른들’에게 분노를 터트리는 사람. 

   2014년 4월 16일, 이 날 나는 처음으로 어른의 자리에서 사건을 경험했다. 아이의 자리가 아닌 해운회사의 직원이나 공무원이나 인솔 교사의 자리에 서 있었다. 항해사나 해경보다 교사인 나를 떠올리기가 더 쉬웠다. 누구나 교사라는 직업에 대해서는 동원할 수 있는 충분한 양의 기억이 있으니까. 나는 전문가를 깊이 신뢰하는 사람이었으므로, 내가 그 배에 탔다면 안내 방송을 충실히 따르며 어른들과 시스템을 믿으라고 아이들을 다독였으리라는 걸 알았다. 누가 보아도 나는 완벽히 어른이었다. 굳이 괴로웠다는 말을 덧붙일 필요도 없이 그때는 모두가 괴로웠다. 공부를 해야겠다고 생각했고, 다음해 문학을 전공하러 대학원에 들어갔다. 누군가 공부라는 게 어떤 실천이 될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아무런 답변도 떠올릴 수 없다. 나부터가 그런 희망 같은 건 없었다. 그저 전처럼 살 수 없을 뿐이었다. 나는 어른이었고, 내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수습될 수 있는 사고가 아니라 소화할 수 없는 사건이었으며, 내게는 더 정확한 언어가 필요했다. 딱 거기까지 생각할 수 있었다. 



   2. 


   지금도 교사인 나를 상상해 본다. 항해사나 해경에 대해 잘 알지 못해서가 아니라, 교사라는 직업과 위치가 내게 어른이란 무엇인지 사고실험을 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다른 직업과 달리 미성년인 학생들을 상대하는 교사는 흔히 이중적인 이미지로 재현된다. 전교조와 교총을 교대로 인터뷰하는 기사의 관례처럼, 전통을 수호하는 보수적인 교사와 변화를 추동하는 진보적인 교사가 대립하는 양상으로 그려지는 건 흔한 일이다. 제도가 부여한 의무와 규범을 학생들에게 어디까지 얼마만큼 요구해야 하는지 고민하는 한 명의 교사를 그리는 경우도 드물지 않지만, 이 경우에도 그의 심리적 갈등은 그의 교육방식에 딴지를 걸 더 완고한 교사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라는 점을 떠올려 보면 전자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할 수 있다. 결코 전위적인 존재에 도달할 순 없지만, 마땅히 후위의 역할은 초과해야 하는 사람. 

   그러나 생각해 보면 교사만 그럴 리는 없다. 모든 직업은 사회가 요구하는 허용범위 안에서 가까스로 변주를 시도하고, 모든 부모는 자녀를 양육하며 유사한 딜레마에 빠진다. 교사는 자신의 의무를 익히 아는 어른의 상징이고, 불행인지 다행인지 나는 점점 학생보다 교사에게 더 쉽게 이입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니 문제는 오래되고 흔한 방식의 재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재현이 더는 설득력을 갖지 못하는 데 있을 것이다. 어차피 시대가 변한 줄 모르는 늙은 교사들은 두려운 존재가 될 수 없다. 보수적인 교사와 진보적인 교사의 대립은 기성세대와 새로운 세대가 갈등을 통해 사회를 혁신하는 재생산 메커니즘의 갱신을 상징한다.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처럼 학교에서 쫓겨나는 키팅 선생을 향해 책상 위에 올라가 경례를 올리던 열렬한 학생들도 결국 대학과 사회로 진출하여 어른이 될 것이다. 재생산의 회로는 결코 멈추는 법이 없고, 오히려 키팅 선생 같은 이들에 의해 다음 시대에 적합한 방식으로 조율되어 생산성을 유지한다. 그렇다면 더 이상 뜨거운 가슴을 지닌 진보적인 교사를 그려낼 수 없는 상황, 기성의 제도와 대립하여 학생들의 환호와 지지를 얻는 반골 교사를 상상할 수 없는 상황, 기성세대와 구별되는 다음 세대를 키워낼 새로운 유형의 교사를 재현할 수 없는 상황은 어떤 상황인가. 당연하게도 오래되어 낡고 삐걱거리는 회로가 여전히 유효해서는 아닐 것이다. 그저 사회가 갱신되고 개혁되기를 기대하는 쪽이 그보다 훨씬 더 어려워졌을 따름이다. 



   3. 


   「너머의 세계」1)의 연수는 교사를 그만둔다. 학생과 학부모의 괴롭힘에 시달리고 동료 교사들의 무시와 냉소에 상처를 입은 채 연수는 “중앙 현관을 넘고 나면 이제 다시는, 어떤 문 안으로도 몸을 들이지 않을 작정”(168쪽)으로 학교를 떠난다. 젊은 교사인 연수는 자신만의 교육 방침을 고수하다 자포자기한 것도, 제도에 맞서 신념을 지키려다 탈주한 것도 아니다. 연수 앞을 가로지른 선 안쪽에는 자신을 만만하게 여기는 학생과 학부모와 동료 교사들이 서 있다. 모두가 연수를 한심하게 여기고, 연수는 눈앞의 선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바깥에 점으로 존재한다. 만약 소설이 학부모와 학생의 갈등을 재현한다면, 연수에게는 제자의 고통을 공감하며 그와 연대를 형성하는 선택지가 주어지거나 혹은 어머니와 연대를 형성하여 제자를 설득하는 선택지가 주어질 수 있다. 반대로 학생과 학부모가 돈독하더라도 그들을 바라보며 동료 교사들끼리 서로 이해하는 과정을 재현한다면, 연수가 난관을 극복하든 극복하지 못하든 교사로서 어떠한 행위를 하고 그로 인한 결과를 수용하는 과정을 밟아 갈 수 있다. 그러나 선은 오직 연수 앞에만 그어진다. 그 단절선 앞에서 연수는 어떠한 교훈이나 경험도 얻지 못한 채 홀로 학교를 떠난다.

   다시는 어떤 문으로도 들어가지 않기로 한 연수의 세계를 벤다이어그램으로 그려 보면, 단 하나의 원소로 이루어진 작은 집합과 수많은 원소로 이루어진 커다란 집합이 아무런 교집합 없이 나란히 놓인 모양으로 그려질 것이다. 연수는 자신으로만 이루어진 집합 안으로 아무도 들이지 않는다. 학교를 그만둔 후 사람을 상대하고 싶지 않아 무인가게 청소일을 하던 연수는 행색이 초라한 어린아이가 자꾸 가게에 찾아와 비닐째 육포를 뜯어 먹는 기이한 광경을 목격하지만, 그 모습을 문밖에서 물끄러미 바라볼 뿐 안쪽으로 들어갈 엄두를 내지 못한다. 연수의 벤다이어그램에서는 누구도 연수보다 약자일 수 없다. 언제나 연수는 선 바깥에 홀로 서 있고, 선 안쪽에서 일어나는 일에 관여하지 않을 권리가 있다. “연수는 너머의 세계에 있기로 했다. 그것은 부끄러운 선택이 아니었다. 적어도 연수에게는 그랬다.”(168쪽) 상처의 권리라고 해야 할까, 약자의 권리라고 해야 할까. 연수의 집합론에서 연수 한 명으로 이루어진 집합에는 어떠한 포함관계나 교집합도 고려되지 않는다.

   고통의 재림을 상상하며 불안을 느끼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상처는 사람을 위축시키고, 자신의 상처에 깊이 함몰된 자가 그리는 그림은 ‘나’와 ‘내가 아닌 것들’의 대립으로 표현된다. 내 앞을 가로지르는 선, 그리고 선 너머의 전부. 그러나 소설이 등장인물을 변호하는 형식이 아니라 등장인물을 통해 질문을 제기하는 형식이라고 믿는다면, 연수가 그리는 단순한 벤다이어그램이 던지는 결코 단순하지 않은 질문을 곱씹어야 할 것이다. 과연 자연스럽다는 것은 자연스러움 이상의 가치를 담보할 수 있을까. 연수가 느끼는 불안과 공포가 자연스러운 반응이라고 해서 그것을 타당한 태도와 선택이라고 보증할 수 있을까. 어떠한 선도 넘지 않고 선 바깥의 점으로 남기로 한 연수의 선택은 이후 이어질 삶에서 언제까지 얼마만큼 알리바이로 인정될 수 있을까. 

   위험에 노출된 어린아이조차 선 안의 존재로 바라보는 시선, 내가 아닌 모든 것을 선 안쪽의 것으로 바라보는 공포심과 경계심 어린 시선은 아마도 어른의 시선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길을 잃고 배가 고파 무인가게에 드나들던 어린아이의 눈에는 연수야말로 선 안쪽의 존재로 보였으리라는 점을 떠올려 보면, 연수의 회피가 정말 “적어도 연수에게는” “부끄러운 선택이 아니”라고 단언할 수 있을지 다시 생각해 봐야 한다. 언제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어떤 상황에서나, 매번 같은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사람은, 적어도 그런 어른은 없다. 점으로 남아 보호할 수 있는 ‘나’, 선을 넘지 않아 지킬 수 있는 ‘나’라는 존재가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어른의 시작이니까. 어른은 많은 것을 지킬 수 있는 자가 아니라 다만 포기하는 법을 아는 자에 가깝다.



   4. 


   「어차피 세상은 멸망할 텐데」2)의 희주 역시 교사를 그만둔다. 희주는 기후위기로 꿀벌이 사라지고 해수면이 올라가는 뉴스와 다큐멘터리를 보며 정말 “화내야 하는 일과 화낼 필요가 없는 일을 정”해야 한다고 믿었고, ‘할 필요 없는 일’들에 골몰하는 학생들에게 서둘러 그 사실을 알려주고 싶었다.



  어차피 인간은 죽는 건데. 다 같이. 희주는 괴롭힘을 당하는 아이들과 괴롭히는 아이들에게도 이 사실을 빨리 알려주고 싶었다. 어차피 우리는 모두 물에 잠길 거다. 잘하면 30년 뒤에. 다 같이 죽는 거지. 희주가 그 말을 한 건 아이들을 사랑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희주가 근무하던 사립학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194쪽)



   학교를 그만둔 후, 희주는 환경 관련 기사를 스크랩하고 식물을 키우고 채식을 하고 수영장에 다닌다. 자기혐오와 자기연민을 오가며 불안에 시달리는 연수에 비하면, 지구에 사는 온갖 생명체를 향한 연민으로 가득한 희주의 일과는 한가하고 평화로워 보인다. 연수가 생활을 위한 최소한의 일과만 유지하며 살아간다면, 희주는 온갖 취미반에 등록하여 이것저것 배우기를 멈추지 않고 하루 중 가장 많은 시간을 요리하는 일에 쏟아 부으며 무해하고 정성스러운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한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희주의 세계를 벤다이어그램으로 그려 보면, 언뜻 상반되어 보이는 연수와 희주의 세계가 사실은 상당히 유사한 모습을 하고 있음을 알아볼 수 있다. 세상의 멸망을 실감하는 희주 한 사람으로 이루어진 작은 집합과 멸망 앞에서도 아등바등 욕심을 부리는 나머지 사람들로 이루어진 커다란 집합이 나란히 놓여 있는 모양. 희주 엄마를 비롯한 주변 사람들이 희주의 삶을 조금도 이해하지 못하기에 두 집합 사이에 교집합은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형태가 유사하다고 해서 희주와 연수의 벤다이어그램에 아예 차이가 없다는 말은 아니다. 희주의 벤다이어그램에는 한 겹의 집합이 더 존재한다. 희주의 집합과 다른 사람들의 집합을 모두 포함하는 전체집합. 인류세 시대의 생명체를 원소로 삼는 거대한 집합이 이 모든 것을 감싸며 한 겹 더 크게 그려진다. 그러니까 희주의 집합은 주변 사람들의 집합과 교집합을 형성하진 않지만, 전체집합의 차원에서 보면 두 집합 모두 인류로서 생명체에 포함되는 부분집합이라는 공통점을 지닌다. 

   비록 관념적인 형태일지라도 희주가 푸릇푸릇한 것들에 대한 애착과 인류에 대한 연민을 지니는 것은 이 때문이다. 희주와 연수 두 사람은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다른 사람들과 기꺼이 분리되길 선택했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지만, 학교를 그만둔 후 깨지기 쉬운 도자기처럼 고통의 역치가 급격히 낮아진 연수와 달리 자신을 포함한 모든 사람을 전체집합의 균질한 원소로 바라보는 희주는 오히려 무덤덤한 구석이 있다. 연수의 분리가 고립이라면 희주의 분리는 고독이다. 단 한 사람의 원소로 이루어진 집합을 구성한다는 점에서 연수와 희주의 집합은 형태상 유사하지만 그 구조를 따져 보면 차이가 발견된다.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그 차이로 희주는 연수보다 넓은 행동반경을 유지할 수 있고, 그러다 주호처럼 희주의 선을 넘어오는 이와 마주쳐 잠시나마 교집합을 형성할 수도 있다.

   그러나 아이들에게 “어차피 우리는 모두 물에 잠길 거”라고 말하는 희주가 좋은 ‘인류’일지는 몰라도 좋은 교사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초등학생에게 먼저 가르쳐야 할 것은 멸종의 윤리가 아니라 생활의 도덕이고, ‘괴롭힘을 당하는 아이’와 ‘괴롭히는 아이’는 구별되어야 한다. 교사에게는 그들의 사정을 듣고 그들에게 각자 다른 말을 건네야 하는 역할이 있다. 몇 년 살아 보지도 않은 아이들을 어차피 죽을 인간으로 바라보며 연민하는 희주의 시선에는 어딘가 무심하여 잔인한 신학자 같은 구석이 있다. 아마도 바로 그 점이 연수의 경우와 달리 희주에게 장막이나 보호구 역할을 해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바로 그 점이 아이들을 한 명의 사람이 아닌 멸종 직전의 인류로 뭉뚱그려 누군가의 마음에 깊은 상처를 남겼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5.

 

   「보편 교양」3)의 곽은 학교를 그만두지 않는다. 딱히 그만둬야 할 이유가 없었다. “아쉬운 월급이지만 임금노동자 평균 수입에 비하면 넉넉했”고 “자잘한 연수나 업무가 있긴 해도 방학은 방학이었다.” 중요한 건 언제나 “균형감각”(191쪽)이었다. 한편으로는 자신이 입시를 통한 재생산 회로에 종사하고 있다는 자의식을 잃지 않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학생들에게 배움의 기쁨을 알려주겠다는 희망 또한 버리지 않는 것. 그는 “공교육이란 중산층의 아비투스를 재생산하고 체제 유지에 기여하는, 필연적으로 부수적인 국가 장치”라고 곱씹었지만, 그럼에도 미래에 대해 “아무도 예단할 권리는 없”(205쪽)다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학생들의 과목 선택권을 보장하는 새 교육정책이 그래 봤자 입시 제도에 불과하다고 우려하면서도, 내심 ‘고전읽기’ 과목을 개설하여 학생들과 책을 읽을 수 있다는 기대를 품었다. 그러니까 곽은 장기적인 전략에 따라 효율적인 전술을 구사할 수 있는 사람이다. 정치적으로 편향된 내용을 가르친다고 민원을 넣은 은재 아버지에게 『자본론』이 ‘서울대 권장도서’가 될 만큼 얼마나 ‘안전’한지 설득하려다가 “자신이 마르크스를 긍정하려는 것인지 부정하려는 것인지 혼란스럽기도”(204쪽) 할 정도로.

   그러니 곽은 누구와도 완벽히 불화할 수 없다. 곽은 모범생인 은재가 대견한 만큼 학교를 겉도는 다른 학생들도 이해할 수 있고, 마르크스를 위험한 사상가로 동경하면서도 은재 아버지에게 그가 얼마나 안전한지 설명할 수 있으며, 비판과 사유가 체제를 향한 저항이라고 여기면서도 이제 체제가 비판적 사유 능력을 교양으로 요구하고 있음을 파악할 수 있다. 이런 곽의 세계를 벤다이어그램으로 그려 보면 연수와 희주의 경우와는 전혀 다른 그림이 그려진다. 중간 크기의 집합들이 서로 복잡하게 교집합과 포함 관계를 이루며 얽혀 있는 그림. 여기서 출발해도 저기로 도착하는 긴 사슬처럼 엮인 집합 다발이 보이기도 하고, 어제는 아무런 접점도 없었지만 오늘은 넓은 교집합을 공유할 수도 있고 내일은 꿀꺽 삼켜져 포함되어 버릴 수도 있는 유동적인 집합들이 가득한, 그런 입체적이고 혼란스러운 그림. 

   복잡한 교집합의 관계는 한눈에 파악되지 않는다. 『자본론』을 가르친 곽과 곽의 수업을 충실히 따라온 은재와 그것을 걱정하는 은재 아버지의 관계를 생각해 보자. 곽은 수업을 통해 은재와 자신 사이에 교집합이 존재한다고 믿지만, 마르크스에 한해서라면 실은 곽과 은재 아버지야말로 단단한 교집합을 이루고 있다. 마치 군사독재 시절 마르크스의 저작을 금서로 지정했던 국가기관과 어떻게든 그것을 읽으려고 위험을 감수했던 학생들 모두 책의 힘을 믿는다는 공통점을 지녔던 것처럼, 곽과 은재 아버지 역시 책을 읽으면 사람이 달라질 수 있다는 믿음, 책을 읽으면 선을 넘을 수 있다는 믿음을 공유하며 교집합을 형성한다. 은재가 『자본론』을 스펙 삼아 서울대에 합격한 후에도 그들의 교집합은 여전히 유지된다. 이제 두 사람은 마르크스가 ‘보편’과 ‘교양’의 세계에 입성했음을, 마르크스를 읽는다고 선을 넘는 시대는 오래전에 영영 끝나버렸음을 깨달은 동류가 된다. 

   곽의 벤다이어그램에서 통치의 경계선은 엄청난 탄력성을 지니고, 그 선 바깥으로 넘어가는 일은 도저히 불가능해 보인다. 불온서적이 있다면 그것을 읽고 선을 넘을 수 있지만, 모든 게 교양이 되어버리면 애초부터 넘어야 할 선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선 너머가 보이지 않는 곽의 벤다이어그램을 비관하자는 말은 아니다. 무얼 해도 바깥으로 나가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말은 통치의 경계선이 그만큼 자주 갱신된다는 의미이고, 통치의 경계선이 갱신 중이라는 말은 푸코의 주장처럼 언제나 통치와 저항이 동시에 구성된다는 의미일 수 있기 때문이다. 선 너머로 갈 수 없다는 말을 영원히 내부에 갇혀버렸다는 투항의 뜻으로 들을 수도 있지만, 반대로 통치에는 항상 예상치 못한 잉여와 빈틈이 존재하여 운신할 수 있는 내부 공간이 완전히 사라지는 일은 없다는 뜻으로 들을 수도 있다. 물론 이 모든 일은 곽의 냉소가 곽의 희망을 완전히 덮어버리지 않았을 때만 가능하다. 냉소와 희망 사이의 승부가 쉽게 나지 않길 바라는 것, 그것이 곽의 벤다이어그램에서 기대할 수 있는 최대치의 목표로 보인다.



   6.


   연수, 희주, 곽. 세 사람의 벤다이어그램은 평범한 어른이 자신보다 강고하고 막대한 사회를 표상하고 상대하는 세 가지 전형적인 형식을 보여준다. 물론 모두 맹점은 존재한다. 연수와 희주의 집합은 자기연민에 빠지거나 자기보존에 골몰하기 쉽고, 곽의 집합은 필연적으로 자기분열을 동반하기에 자칫 자기기만으로 이어지기 쉽다. 어쩌면 오늘날 교사로서, 어른으로서 산다는 것은 이 정도의 선택지 앞에 놓이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있는 그대로의 인간 삶이 패배라는 사실은 너무나 명백하”고 “삶이라고 부르는 이 피할 수 없는 패배에 직면한 우리에게 남아 있는 유일한 것은 바로 그 패배를 이해하고자 애쓰는 것”4)이라면, 삶의 맹점을 그리는 소설들이 제공하는 실존적 증거를 들여다보고 소설에 쓰이지 않은 것들을 상상하고 검토하는 일이 마냥 무의미하지만은 않다고 믿는다. 그러니 엉성하고 성긴 소묘지만 남겨 두기로 한다.

 

   #1. 연수처럼 첫 번째 방식으로 세계를 보는 사람들은 큰 집합과 작은 집합의 대치에 압도되어 있다. 당연하게도 그 경계선에 대한 의식과 두려움이 크고, 자꾸 자신의 상처와 내면으로 파고들거나 사회로부터 억압당한다는 대타의식을 키울 수밖에 없다. 이들의 불안과 공포는 눈앞의 경계선이 상당 부분 상상적으로 구성되었음을 인정해야만 줄어든다. 전체집합이 어떻게 구성되고 배치되어 있는지에 관한 메타적 시선을 확보해야 겁에 질린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다. 가장 선명해 보이는 두 집합 사이의 대립에 집중하기보다 더 큰 세계에서 자신이 어느 좌표에 위치하는지 파악할 것. 언제나 피해자인 사람도, 언제나 보호받아야 하는 사람도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2. 희주처럼 두 번째 방식으로 세계를 보는 사람들은 전체집합에 대한 의식이 지나치게 강하여 삶이 보유한 속된 욕망에 적절한 지분을 할당해 주지 않는다. 어린아이에게도 삶보다 죽음을 먼저 속삭이는 이 상냥한 허무주의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전체집합 안에 자신과 비슷한 사람들로 이루어진 중간 크기의 집합을 발견하고 가꾸는 일이다. 인류세 시대에 필요한 윤리는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자기보호와 구별하기 어렵다. 그러니 중간 규모의 집합에서, 생활의 차원에서, 그 윤리를 실험해 봐야 한다. 다행히 소설에서는 선을 지킬 줄 모르는 주호의 동선이 희주가 그어 둔 경계선을 가로질러 교집합을 만든다. 덕분에 희주는 무해함과 보존의 서사에서 참견과 발견의 서사로 이동할 수 있게 된다. 

   #3. 곽처럼 세 번째 방식으로 세계를 보는 사람들은 다층적인 지도 위에 자신을 세워 두고 상황에 맞춰 운용한다. 다양한 집합 사이를 이동하는 플레이어처럼, 이들은 교집합이 아예 없는 고립된 집합이나 하나의 원소만으로 이루어진 단일한 집합은 선호하지도 신뢰하지도 않는다. 집합과 집합 사이를 오가다 보니 낙차로 인해 자연스럽게 아이러니가 발생하고, 그 낙차를 해소하기 위해 냉소와 유머의 기술이 필요하다. 교집합과 여집합 개념을 포함하여 집합론의 기초를 가르치기에 좋은 벤다이어그램을 가지고 있기에, 이들이 피해야 할 함정은 “계몽된 허위의식”을 지닌 똑똑한 “냉소주의자”,5) 그러니까 자신들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면서도 계속 그렇게 하는 자가 되는 것이다. 이들은 비애감 가득한 말투로 기만을 합리화할 방법쯤은 얼마든지 알고 있다.


  

   7.

 

   거칠고 도식적으로 분류해 보았지만, 실은 사회생활을 하는 어른들은 대부분 저 세 가지 벤다이어그램을 동시에 그리며 살아간다. 나 역시 그렇다. 대상에 따라, 상황에 따라 내가 서 있는 그림이 달라진다. 그 점을 반성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 대상과 상황이라는 것을 제대로 파악하고 행동해 왔는지, 적어도 십 년의 세월이 지났다면 검토해 봐야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할 뿐이다. 명백히 잘못 판단하여 후회가 남는 일도, 여전히 잘 모르겠는 일도, 다시 고민해 봐야겠다고 미뤄 둔 일도 많다. 다음 달에 이어질 글은 여기에서 시작하려 한다.


1) 안보윤, 「너머의 세계」, 《현대문학》 2023년 5월호.

2) 공현진, 「어차피 세상은 멸망할 텐데」, 《악스트》 2023년 3/4월호.

3) 김기태, 「보편 교양」, 《창작과비평》 2023년 가을호.

4) 밀란 쿤데라, 박성창 역, 『커튼』, 민음사, 2012, 21쪽.

5) 페터 슬로터다이크, 이진우·박진애 역, 『냉소적 이성 비판1』, 에코리브르, 2005, 4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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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문화 속 부동산과 젠더 정치학 전지니(한경국립대 교수) * 이 글에는 종결되지 않은 웹툰과 올해 공연된 연극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투기와 여성 이 글은 한국의 부동산 현실, 그중에서도 전세 사기로 집약되는 부동산 범죄를 다룬 웹툰과 연극을 겹쳐 보려 한다. 이를 통해 동시대 대중문화 텍스트 안에서 자산 증식에 대한 소시민적 욕망이 어떻게 젠더화되어 형상화되는지를 살피고, 여성을 범죄의 가해자 혹은 피해자로 배치하는 작품 속 시도가 갖는 양면성에 대해 조망한다. 논의할 작품은 표제에 부동산을 내세워 비슷한 시기 독자, 그리고 관객과 만난 (유기 글/그림, 2024.1.13.~연재 중), (김수정 작/연출, 2023.10.14.~22.(초연), 2024.6.1.~9(재연)) 등 두 편이다. 부동산과 여성을 관련지어 논의하는 경우는 본격적인 강남 개발 이후인 1970년대 중반부터 시작됐다. 부동산 가격 상승과 서민의 박탈감, 중산층 진입의 욕망 등의 문제는 박완서의 강남 아파트를 산 교수 부인의 이야기인 「낙토의 아이들」(1978)에서부터 시작해 재개발을 둘러싼 부녀회의 욕망을 다룬 웹툰 (스토리 매미/작화 희세, 2019.05.05.~2020.09.27.)까지 꾸준히 반복되었다. 염두에 둘 점은 (유하 작/연출, 2015), (연상호 작/연출, 2018)의 경우처럼 대중문화 속에서 개발·재개발의 역학관계를 다룰 때는 남성 인물이 이야기의 중심에 놓이지만, 개발의 수혜를 입고자 하는 소시민의 욕망을 다룰 때 그 중심에는 여성이 자리한다는 점이다. 관련하여 한국전쟁을 전후하여 불안한 경제상황 속에서 반복되었던 투기는 여성의 것으로 전유되는 일이 빈번했다. 전쟁 이후 사회 혼란의 주범으로 간주되었던 ‘사설계’를 주도하는 부인들이나 1970년대 후반부터 매체에 오르내린 부동산 투기의 주범 ‘복부인’에 대한 비판적인 시선은 근현대사 속 뿌리 깊은 여성 혐오와 직결되어 있다. 정치·사회적 불안으로 발생한 투기 심리를 여성의 전유물로 간주하며 문제의 핵심을 피해 가고 비판의 대상을 국가와 체제가 아닌 여성으로 지목한 것이다. 한국전쟁 이후 여성이 투기에 몰두하는 이유를 심리학적, 사회학적으로 분석한 기사도 있었다. 한 언론은 “복부인의 욕구 단계는 생리 욕구와 안전 욕구의 원시적인 단계에서 못 벗어나고 있다.”며 여성이 상대적으로 안전 욕구가 강하고 사회 진출이 부진한 것을 복부인이 생기는 이유로 분석하기도 했다.1) 이 와중에 투기를 여성의 것으로 지정하는 데 대한 자성의 목소리도 있었다. 1984년 한 신문 독자는 신문 기고를 통해 ‘복부인’은 여성 천시 단어로 공공매체에서 이 같은 유행어를 쓰면 안 된다고 역설한다. 그는 “이는 여성 학대의 사회적 악습에서 오는 콤플렉스를 여성의 사회 유린이라는 감정으로 희석시키려는 ‘투사’ 심리요, 또한 일종의

  • 관리자
  • 2024-10-01
휴먼들의 소화불량, 비인간-사물의 매혹

휴먼들의 소화불량, 비인간-사물의 매혹 황녹록 밖에선 바퀴벌레의 신음소리 아버지가 숨겨 둔 약을 먹은 것입니다 어머니 내 책상 위에 아버지가 피운 모기향 좀 치우세요 시집 위에 몸 약한 날벌레들 다 떨어지잖아 동생 문 열고 들어옵니다 나는 문밖으로 재빨리 나가려고······ 동생이 소리 질렀습니다 여기 또 있어 진은영, 중1) 오래된 사물, 거슬리는 존재감 이제 우리는 반려인, 반려동물, 반려식물, 반려미생물, 반려사물 등 반려종의 경계를 구분 짓지 않기로 한다. 반려종이란 서로의 밥을 나누고 몸을 나누고 마음을 나누는 관계를 뜻하는 말로 어떤 물질성을 가지고 있는 존재를 의미한다. 반려들은 나눔의 상호성을 가지고 있지만, 그 못지않게 서로를 위태롭게 하고, 서로 먹다가 소화불량이 되기도 하고, 때로 죽고 죽이는 유해성의 성분도 가지고 있다.2) 그리하여 누군가의, 무엇인가의 반려가 된다는 것은 결코 무구할 수 없는 관계 속으로 이끌려 들어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과 비인간 반려들의 낯선 이물감으로 시작되는 관계맺음은 애초에 구역감과 체기(滯氣)를 동반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 관계맺음은 일상 속에서 예기치 못한 만남으로 강제될 테고, 그로부터 서로를 향한 진지한 응시의 요구가 시작된다. 그 응시는 세계에 대한 새로운 물음과 응답의 이야기로 확장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새로운 관계맺음에 대하여 ‘영원한 동반자’라는 환상을 기대하거나, 우정 어린 돌봄으로 윤리적 책임을 지우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다른 존재들의 있음을 감각하고 그 감각에 감응하는 관계로서 반려를 말하려는 것이다. 김초엽의 소설 『지구 끝 온실』3)은 SF적 상상력을 통해 인간 지수와 사이보그 레이첼, 레이첼과 희귀식물 모스바나, 그리고 모스바나와 이희수의 혼종적 관계맺음에 대한 이야기로 읽을 수 있다. 종의 경계를 넘어선 존재들의 반려-되기는 멸망해 가는 지구 끝에서 찾아내는 희망의 메시지로 충분히 가능해 보인다. 나아가 구원의 식물(푸른빛)이자 악마(생태계의 위협적인)의 식물인 ‘세발갈고리덩굴’의 이중적 존재감은 반려들의 관계로부터 인류의 재건과 구원의 (불)가능성에 대한 적극적인 타진으로 읽어 볼 수도 있다. 꽤 오래전 카프카는 그의 단편에서 규정할 수 없는 것들, 식별 불가능한 반려들의 존재감을 감지한 바 있다. 카프카의 작은 존재들은 경직된 습관의 세계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다양한 실험과 그 과정에서 예기치 않게 발생된 감염의 산물이다. 카프카의 비인간-사물들은 서로를 반려종으로 여기기에는 아직 미심쩍고 불안한 상태로 존재한다. 오드라데크(Odradek)4)는 낡은 실타래 조각처럼 묘사할 수 없는 형태를 띠고, 낙엽이 바스락거리는 듯한 웃음소리를 낸다. 아무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을 것이 분명하지만, 가장(家長)은 자신이 죽은 후에도 오드라데크가 계속 살아 있는 것이 근심스럽다고 고백한다. 또 있다. 반은

  • 관리자
  • 2024-10-01
한일 문화의 초국적 접점과 ‘마주침’의 서사학

한일 문화의 초국적 접점과 ‘마주침’의 서사학 : 동시대 한국 소설 속 ‘일본’이라는 물음 정창훈 올해 상반기 일본 방송가는 ‘한일 로맨스’로 뜨거웠다. 한국인 배우 채종협(작중 윤태오 역)과 일본인 배우 니카이도 후미(모토미야 유리 역)가 공동 주연을 맡은 드라마 가 그것이다.1) 이 드라마는 채종협을 단숨에 한류 톱스타로 만들며 일본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끈 것은 물론이고, 국내에서도 여러 OTT 플랫폼이나 케이블 TV채널을 통해 방영되며 화제가 되고 있다. 나 역시 이 드라마를 매회 빠짐없이 챙겨보았는데, 기대 이상으로 흥미진진한 이야기였다고 생각한다. 이 두 인물의 연인 관계에 시련이나 위기를 가져오는 여러 갈등의 요인들이 있었으나, 그 가운데서 국가적, 역사적 문제와 연관되는 요인을 끝내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이 오히려 신선했다. 국적(내셔널리티)과 언어, 생활관습의 차이는 둘 사이의 장벽이 되기는커녕 상대에 대한 관심을 극적으로 심화시키는 계기가 된다. 가족이나 주변인들도 이 둘이 한국인, 일본인이라는 이유로 둘 사이를 반대하진 않는다. 이것은 종래의 한일 서사물에서 양국 인물의 연애사를 그려 온 방식과는 차별화되는 것인데, 이를 통해 ‘이례적인’ 해피엔딩의 결말이 주어진다. ‘한일 로맨스’ 자체가 이례적인 것은 아니지만, 다른 아시아 이웃들의 경우와 비교했을 때, 한일 양국 인물의 만남을 그린 서사적 재현이 여러 차례 반복되어 온 점, 나아가 오늘날 그 재현의 양상이 현저히 다양화되고 있다는 점은 주목을 요하는 현상이다.2) 물론 나쁘게 말하자면 이 드라마는 한국과 일본 사이의 정치적, 역사적 이슈를 정교하게 회피함으로써 구축된 가상의 이야기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른 각도에서 보면 이는 한국과 일본이라는 이웃이 서로를 감각하는 방식에 새로운 무언가가 ‘첨가’되고 있음을 예시하는 것이 아닐까. 돌이켜보면 지난 몇 년 동안 한국 소설은 이러한 변화에 한 발 앞서 민감하게 대응해 온 것으로 보인다. 여러 가지 껄끄러운 문제를 공유한 ‘오랜 이웃’과의 ‘새로운 관계’를 상상하는 시도가 동시대 소설 속에서 계승되어 온 점, 이 글은 거기에 새삼스레 주목하려 한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의 움직임이 가져온 의미를 통시적 관점에서 살펴보기 위해, 잠시 과거로 돌아가 이야기를 시작하고자 한다. ‘현해탄 서사’ 이후, 한일을 넘나드는 월경의 서사 근대 이래 한일 관계에서 ‘현해탄’은 상징적 의미를 지녀 왔다. 특히 식민지-제국 체제의 해체 이후 그것은 ‘한반도와 일본 열도 사이의 바닷길(대한해협)’이라는 외시적 의미만이 아니라 역사적, 정치적 문제 등으로 인한 한국과 일본의 ‘가깝고도 먼 관계’(심리적 거리감, 국가적 입장의 차이 등)를 가리키

  • 관리자
  • 2024-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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